독서'와 독설' 사이.

 

 

 

 

 

 

 

 

 

 

 

 

 

 

 

 

 

 

 

 

 

 

< 소설가의 각오 > 에서 미루야마 겐지는 일본 문단의 지랄같은 꼰대의 풍경'을 비판한다. 돌아가는 꼴을 보면 일본과 한국은 비슷하다. 그가 요구하는 소설가의 각오'는 수도승 같은 속세에 초월한 무욕'이다. 그래야 좋은 소설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단의 풍경은 무욕은커녕 무념'으로 일관하고, 단단한 각오 대신 가오 잡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한 마디로 폼생폼사다. 그래서 그는 일본 주류 문단 밖의 작가'로 생활한다. " 문학 살롱이여, 조까라 ! " 반면 스티븐 킹'은 돈 벌어서 좋다고 솔직하게 고백한다. 미루야마 겐지가 보기엔 스티븐 킹이 속물처럼 느껴지겠만, 킹은 꽤 진지하게 글쓰기 강의를 한다. 그는 순문학이 가지고 있는 엄숙주의'를 직설적으로 비판한다. 그가 보기엔 " 주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창작 교실이나 문학 강의에서는 흔히 귀찮을 정도로 ( 그리고 공연히 우쭐거리면서 ) 주제에 매달리는데,사실 주제는 ( 놀라지 마시라 )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다. " 라고 말한다. 내가 지금까지 읽어본 글쓰기 관련 서적 중 최고가 아닐까 싶다. 이에 필적할 만한 책으로는 밀란 쿤데라의 < 소설의 기술 > 이 있다. 얼핏 보면 소설 작법 같지만 위대한 타자의 텍스트에 대한 독후감이다. 가장 좋은 작법은 위대한 텍스트를 분석하는 것이니 말이다. 미루야마 겐지'가 요구하는 소설가의 각오를 제대로 실천한 사람을 한국에서 찾는다면 김수영이 될 것이다. 그를 볼 때마다 자주 조지오웰과 겹친다. 그는 말과 행동이 일치한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Battle Royale by Adam Rabalais

 

21세기 한국 단편의 특징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 재미없다 ! " 물론 걸출한 몇몇의 작가는 있다. 박민규, 김애란, 김영하, 최제훈, 배명훈 정도 ?!  21세기 한국 장편 소설의 특징 또한 " 재미없다 ! "  다. 물론 예외적인 작가는 있다. 박민규와 김영하는 단편과 장편 모두 고른 실력을 보여준다. 하지만 나머지 작가는 단편의 퀼리티와 장편의 퀼리티‘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차이가 난다. 한국 작가들은 대부분 단편에 강하지만 장편에 약하다.  하성란의 경우 단편은 훌륭하지만 장편은 형편없다. 김애란이 < 두근두근.. > 에서 실패한 이유는 실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종목 변경에 따른 적응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100미터 달리기 선수가 10,000미터 달리기를 할 때와 같다. 고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주법과 호흡법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한국 문학의 특성상 대부분의 예비 작가들은 100미터 달리기 선수로 키워진다. 처음 시작하는 주 종목이 단거리‘다. 대한민국은 등단이라는 (세계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작가 등용문이 있는데, 등단을 위해서는 단편' 을 선보여야 한다. 선배들 앞에서 노래 한 곡 ! 얼핏보면 멘토와 멘티의 관계이지만 사실 갑'과 을'의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 슈퍼스타 K에서 중요한 것은 멘토의 취향에 누가 가장 근접한가에 있다. 멘토의 요구 조건'에 가장 가까운 자'가 살아남는다. 그것은 말 그대로 요구 조건'이지 진심어린 충고'가 아니다. 더군다나 언어란 누구나 공평하게 사용할 수 있는 공공재산'인데 도 불구하고 이 공공재산'을 사용할 자격이 있는지를 심사/검열'하는 방식은 거의 폭력에 가깝다. 쫌, 역

겹다.

 

이런 시스템으로 키워진 등단 작가들은 단편을 문예지에 팔면서 근근이 생활한다. 단편이 모이면 단편집을 내고, 같은 방식으로 몇 권의 단편 소설집’을 낸 후 장편에 도전한다. 다시 육상종목에 빗대자면 단거리 선수로 출발했는데 중간에 장거리 선수로 전향하는 것이다. 물론 성공하는 선수도 있지만 대부분 실패하고 만다. 물론 단거리와 장거리 모두 좆 빠지게 달려야지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지만 이 두 분야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단거리는 전력 < 집중형 > 이고, 장거리는 전력 < 분배형 > 에 있다. 달리기에서 자신의 종목을 바꾼다는 것은 한 체급 올려서 도전하는 권투 경기와는 다르다.


반면 평론가는 좋은 작가를 발굴해서 대중에게 소개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데, 이게 뒤집어져서 작가가 평론가의 구미에 맞춰 글을 쓴다. 그리고 평론가가 모시는 윗분은 출판사다. ( 혹은 출판사가 스타 평론가를 모신다. ) 뭐 대충 이런 시스템이 운영되니 문학의 가장 밑바닥엔 소설가'가 깔린다.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하여튼 신진 작가들은 윗분에게 잘보여야 한다. 잰 체하는 속물의 대명사인 교수 집단 내의 문학평론가‘는 고도의 압축을 선호한다. 그들은 수수께끼를 푸는 형식을 선호한다. 평론가는 공선옥 작가처럼 쉽게 글을 쓰면 글 쓸 거리’가 없어서 당황한다.  스핑크스의 수수께끼가 의미하는 바는 바로 이것이오, 라며 허세를 작렬해야 하는데 그게 안 된다. 그래서 평론가는 공선옥에 대한 언급을 자주 하지 않는다. 평론가들이 보기엔 그녀의 소설은 " 재미

 

없어요, 공선옥 씨! "

 

사연이 이러하니, 글을 써서 먹고 살려고 기웃거리는 사람들은 대충 문단 돌아가는 꼴을 파악해야 한다. 누가 갑이고 누가 을인가에 대해서 말이다. ( 단편만 써서 먹고 살 가능성은 이명박이 십년 안에 자신의 과오를 뉘우칠 확률보다 낮다. )  신인 작가들은 문학평론가에게 눈도장을 찍혀야 한다. 자주 노출될수록 유리하다. 문학평론가가 방앗간'이니 작가들은 기꺼이 참새'가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그들은 평론가들에게 먹히는 단편을 쓴다. 성과 죽음에 대해서, 식욕과 아름다움에 대해서, 대충 이런 식의 알레고리‘로 이야기를 푼다. 막힌다 싶으면 < 현대인의 고독 > 을 이야기하고, 그래도 막힌다 싶으면 < 현대인의 불안 > 에 대해 진술하면 대충 그럴 듯한 소설이 된다고 생각한다. 생각해 보면, 출판사 교정을 보는 사람들은 무척 피곤할 것 같다. 까닥 잘못하면 < 현대인의 불안 > 을 < 현대인의 불알 > 로 인쇄되는 대형 실수를 범할 수 있으니깐 말이다. 그러니 일반 독자‘는 한국 소설이 재미가 없다. 어찌나 심각한지 이 세상 고뇌는 모두 자신들이 짊어진 것만 같다.


편혜영의 소설을 보면 평론가들이 참 좋아하겠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평론이라는 것이 그렇다. 홍상수 영화처럼 밑밥이 잘 깔린 영화는 평론가가 평론하기에 좋다. 차이와 반복 운운하며 들뢰즈를 인용하면 A4 용지 10장은 거뜬하게 쓸 수 있다. 난해할수록 평론가에게는 쉽다. 오히려 평론가를 난처하게 만드는 것은 오히려 쉬운 영화들이다. < 디워 > 에 대해 무슨 할 말이 있나. 디워는 평론가들에게는 개미지옥이다. 그래서 평론가들은 < 디워 > 를 미워한다. 편혜영의 단편은 평론가가 좋아할 작품이다. ( 평론가가 좋아하는 작품이 모두 좋은 작품은 아니다. ) 그러니 평론가들이 개미떼처럼 몰려들어서 성찬을 늘어놓는다. 이것은 일종의 공생관계다. 그녀는 평론가를 위한 단편을 쓰고, 평론가는 그녀를 위한 글을 쓴다. 평론의 성찬이다. 알레고리는 착착 감긴다. 그러니깐 주인공의 두려움은 남성 가부장에 대한 억압에서 비롯된 것이죠. 먼 곳에서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는 여성을 둘러싼 경계가 이미 남성의 폭력적 세계에 갇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죠, 편혜영 씨 ?

 

당연하죠, 평론가 선생님 ! 사실... 그렇게 해석하시라고 안개 속에서 개 짖는 소리'를 연출했습니다. 호호호. 쓸 거리'를 제공하는 거죠.


가장 대표적인 단편이 천운영의 < 바늘 > 이다. 기막히게 좋은 단편이라는 평론가들의 설레발이 무색할 정도‘로 지루하기 짝이 없다. (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 단편이 매우 뛰어나다는 데는 공감한다. ) 문제는 심사위원이나 평론가들이 참 좋아할 모든 문장을 고루고루 갖추었다는 점이다. 내가 보기엔 독자를 위해 쓴 글이 아니라 심사위원들을 위해 쓴 글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듯, 어려운 것을 좋아하는 평론가의 구미에 맞게 글을 쓰니 일반 독자와는 멀어질 수밖에 없다. 읽어도 무슨 소린지 모른다. 엿 먹어라, 한국 소설 ! 이라며 모두 외면해도 요지부동이다. 어차피 1년에 책 한 권 읽는 대중에게 봉사하느니 차라리 윗분에게 잘 보이는 것이 낫다는 태도다. 그리고 어느 정도 그게 먹힌다. 먹물은 먹물끼리 놀아야 제격이다. 요지경이다. 요지경 속 인물들이 세상 살아가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꼴이다. 퀼리티, 퀼리티에 목숨 걸지 말고 스티븐 킹’처럼 신나게 재미있는 소설 좀 썼으면 한다. 어쩌면 대중의 형편없는 독서 문화'는 유감스럽게도 < 독설 > 을 책임져야 하는 평론가의 직무 유기와 < 독서 > 를 책임져야 하는 소설가의 직무 태만 때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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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3-03-21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가의 가오라. 연달아 흥미로운 글들을 쓰시는 군요.
21세기 한국 소설의 특징을 한 가지 더 붙이자면 "다 똑같다!" 입니다. 제가 늘 하는 말입니다.
눈썰미가 없는 탓인지, 소설집을 읽다보면 이것이 누가 쓴 것이더라 헷갈리곤 합니다.
다 비슷해요. 박민규와 황정은이 그래서 돋보이는 게 아닐까요. 제가 그렇게나 사랑하고 좋아하는 한강 작가도 사실 일반인이 보면 다른 작가와 똑같은 작가입니다. 음... 써놓고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다 비슷비슷하다구요.
그리고 사실 저는 편혜영을 썩 괜찮게 봅니다. 그녀의 단편들을 괜찮게 읽었거든요. 물론 그녀가 비대중적인 소설을 쓰는 건 맞아요. 한번은 제 친구에게 그녀의 장편소설을 빌려주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당최 어려워서 못 읽겠다고 돌려주었습니다. 장편뿐 아니라 단편도 마찬가지죠. 저는 편혜영의 작품을 그리 많이 읽은 건 아니지만 어쩌면 김숨과 그녀는 닮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곰곰님께서 언급하신 '현대인의 불안'을 다룬다는 점에서요. 어떻게보면 이 한국문학은 현대인의 불안과 고뇌의 범주에서 절대 멀어질 수 없는 것 같아요. 그것을 얼마나 개성있게 다루느냐에 따라 진부하다와 경이롭게 새롭다의 갈래가 나뉘어지겠죠. 편혜영도 개성 있는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개성이라기보다 자기만의 문체를 갖고 있는 것이겠지요. 김미월은 영 심심해요.
평론이 자기들만의 리그인 것은... 저도 평론가를 해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만... 음...

곰곰생각하는발 2013-03-22 01:22   좋아요 0 | URL
사실 전 소설 잘 몰라요. ㅋㅋㅋㅋㅋㅋ. 그냥 아는 척을 제가 좀 한 것 가타 부끄럽습니다.
전 주로 추리소설을 읽었습니다. 재미있으면 장땡이다,주의거든요...ㅎㅎㅎㅎㅎㅎ
소이진 님은 한국 문학에 대해 깊이가 있으신 것 같아요. 저와는 좀다른 레벨이신 것 같습니다.
앞으로 많이 배우겠습니다. 이곳으로이사온지 며칠안 되서 좀 낯설고 그러네요..ㅎㅎㅎㅎ


사실 소설가가 현대인의 불안을 안 건드리면 그건 직무유기죠.
그런데 저는 너무 노골적인 불안 타령은 심히 불만이 가더라고요.

나탈야 2013-10-18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마루야마 겐지가 느꼈던 문학계의 폐단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이글 엮어 가겠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3-10-18 21:22   좋아요 0 | URL
나의 뮤즈 나턀야, 나의 사랑 나탈야 오셧구려... 사랑해요. 나탈야, 얼릉 나라 결혼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