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지상주의자에게
날마다 책을 읽고 서평을 남기는 파워 블로거'가 있었다. 하루에 책 한 권을 읽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닐 텐데 덧대어 날마다 원고지 10장 분량의 서평도 올린다는 사실이 나를 놀라게 했다. 그는 철저하게 책 내용에 집중했다. 그의 리뷰는 요약정리가 잘 된 써머리 노트 같았다. 사람들은 그의 리뷰를 좋아했지만 내가 봤을 때 그 리뷰는 촌스러웠다. 단순하게 책 내용을 정리한 글은 기계적인 필경사의 단순한 결실에 불과했다. 그러다 보니 글쓴이가 쓴 글 속에서는 " 존재 " 로서의 고민이 보이지 않았다. 뇌는 있으나 심장이 없는 깡통 로봇 같다고나 할까 ?
결정적 계기는 노무현이었다. 노무현이 서거한 날에도, 그는 여전히 책을 읽고 리뷰를 올렸다. 심장이 없는 로봇답게 그의 글에는 죽은 자에 대한 애도도 없고 폭력적인 현실에 대한 비판도 없었다. 책 속에서 묘사하는 불평등과 폭력에 대해서는 성심 성의껏 잘잘못을 따지더니 < 책 - 바깥 > 의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다. 그는 오로지 책을 읽고 성실한 리뷰를 작성하는 것이 전부였다. 나는 그 좆같은 성실함에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성실한 필경사 생활은 결실을 맺었다. 그는 몇 년 후에 소설가로 데뷔했다. 그리고 성공했다, 시바 ! 유감스럽게도......
이동진 평론가를 볼 때마다 차가운 심장으로 글만 쓰던 그 필경사가 자주 떠오른다. 정치적인 것을 강박적으로 제거한 채 영화적인 것에만 집중한다는 점에서 영혼 없는 필경사를 닮았다. 아마도 그것은 그가 조선일보 기자 출신이라는 흑역사를 감추기 위한 강박이었는지도 모른다. 영화 << 변호인 >> 과 << 캐롤 >> 에 대한 입장은 철저하게 계산된 글이었다. 예를 들어 그는 영화 << 캐롤 >> 에 대하여 " 이 영화는 두 여자의 사랑 이야기라기보다는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인데 두 사람이 생물학적으로 여자다, 이 두 가지는 차이가 있겠죠 ? " 라고 말한다.
이처럼 그는 정치적인 것보다는 정치색을 탈색시키고 난 후에 그 텍스트를 해석하는 방식을 선호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동성애를 빼놓고는 설명이 불가능한 서사를 가지고 있다. 그는 영화-안'에서만 말할 뿐 영화-바깥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예를 들어 영화 속 노동 운동가의 영화적 삶에 대해서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고 감동하지만 정작 영화 바깥에서 365일 동안 cctv 철탑 위에서 투쟁하는, 현재진행형인 삼성 노동자의 투쟁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한다. 침묵이라기보다는 무관심에 가깝다. 그는 전형적인 영화지상주의자'다. " 영화가 세상을 구원하리라 ! "
좆같은 소리'다. 영화는 세상을 구원할 리가 없다. 영화라는 세계 - 안과 영화라는 세계 - 바깥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종종 이동진이나 정성일1) 같은 영화지상주의자가 영화 만만세를 외칠 때마다 헛구역질이 나오곤 한다. 정성일은 21세기 영화 평론가의 비평 수준이 초라하다며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지만 내가 보기에는 정성일이야말로 그 책임이 매우 크다. 너나 잘해라.
1) 정성일이 시간 날 때마다 입만 열었다 하면 하는 거짓말이 있다. 일명 < 시네필 3법칙 > 인데, 정성일은 트뤼포의 말이라며 시네필 3법칙을 자주 인용하고는 했다. “ 트뤼포는 언제나 말버릇처럼 영화광에는 세단계가 있다고 얘기했다. 초보는 한 영화를 두 번 이상 보는 것이며, 그 다음은 비평가가 되는 것이고, 진짜 영화광은 영화감독이라는 것이다.”그런데 트뤼포는 정작 이 말은 한 적이 없다. < 내 인생의 영화들 > 이라는 책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I am often asked at what point in my love affair with films I began to want to be a director or a critic. Truthfully, I don’t know. All I know is that I wanted to get closer and closer to films. The first step involved seeing lots of movies; secondly, I began to note the name of the director as I left the theater. In the third stage I saw the same films over and over and began making choices as to what I would have done, if I had been the director.
영화에 대한 나의 열정 가운데 어떤 부분이 나를 영화 감독이나 비평가의 길로 이끌었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솔직히 말해서, 모르겠다. 내가 아는 것은 영화와 더 가까워지고 싶었다는 것뿐이다. 첫 번째 단계는 많은 영화를 보는 것이었다. 두 번째로 나는 극장을 나설 때 감독의 이름을 적어두기 시작했다. 세 번째 단계에서 나는 같은 영화를 보고 또 보면서 내가 감독이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트뤼포는 잘 모르겠는데요 _ 라고 고백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한국의 영화감독들이 가장 많이 인용하는 시네필 3법칙이라는 국문으로 둔갑했다. 이게 다 시네필 정성일의 너무나 과도한 영화 사랑이 빚은 촌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