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의 고백  :  다자이 오사무와 미시마 유키오에 대하여












                                                                                        서로 극과 극인 관계를 종종 " 다자이 오사무와 미시마 유키오 " 에 빗대어 설명하곤 한다. 다자이 오사무는 부잣집 도련님으로 평생을 화류계 여자 치마폭 속에서 살다가 게이샤와 함께 맑고 깊은 상수원에 뛰어들어 동반 자살했다. 


네 번의 자살 시도 끝에 완성한 마침표'였다. 당시에 청산가리를 먹고 마을 식수원에 뛰어들었다고 해서 대대적인 식수원 수질 검사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시신은 일주일 후에 발견되었다). 마을 사람들이 음용할 식수원에서 투신자살을 했으니 민폐인 경우이다. 화류계 여자와 결혼한 다자이 오사무는 약물 중독으로 인해 많은 빚을 졌고, 두 번째 동반 자살에서는 혼자 살아남아서 병원에서 눈을 뜨자마자 자살 방조죄로 체포되었으며, 성적이 형편없어서 대학은 졸업도 못했다.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저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라는 첫 문장으로 시작하는 << 인간실격 >> 의 요조가 말해주듯이 그는 나약하고 쩨쩨한 사내였다. 내면의 여성성도 강해서 1인칭 여성 시점으로 쓰여진 << 여학생 >> 이라는 소설은 남성 작가가 썼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세세하게 여성 심리를 묘사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렇다 보니 남근의 화신이자 하드바디가 되기 위해 보디빌딩에 심취했던 헬쓰보이 미시마 유키오'가 보기에 다자이 오사무는 " 계집 같은 사내새끼 " 처럼 보인 모양이다. 다자이가 맑고 투명하며 깊은 마을 상수원에 투신 자살을 하자 미시마는 


"그런 개같은 성격이 문제라서 그 인간은 자살한 거야. 냉수마찰이나 기계체조 같은 규칙적인 생활을 했으면 자살했을 리가 없지 "라는 폭언을 쏟아내기도 했다.  일본도와 훈도시의 상징이었던 미시마 유키오는 투신과는 다른 할복이라는 기이한 형태의 자살을 선택한다. 그렇다 보니 다자이 오사무 문학을 좋아하는 이는 미시마 유키오 문학을 좋아할 수 없고 미시마 유키오 문학을 좋아하면 다자이 오사무 문학을 좋아할 수 없다. 그런데 나는 다자이 오사무도 좋아하고 미시마 유키오도 좋아한다. 내가 보기엔 두 사람은 이란성 쌍생아'다. 


취향이 전혀 다른 두 사람은 서로 헐뜯고 다녔지만 그들은 뗄래야 뗄 수 없는 젖은 땔감 같은 관계다. 둘 다 찌찔하고 쩨쩨한 인간이었다. 미시마 유키오는 계집 같은 사내새끼-들을 경멸했지만 사실 미시마 유키오의 유년 시절은 귀족 가문의 과보호 속에서 우쮸쮸 우쮸쮸 자란 전형적인 유약한 부잣집 도련님이었다. 가뜩이나 왜소한데다가 병약해서 별명이 " 창백 " 이었다.  어느 날, 덩치 큰 아이가 미시마 유키오에게 " 어이, 창백이 !  너는 불알도 창백하냐 ? " 라고 놀리자 미시마 유키오는 바지 지퍼를 내려 자신의 불알을 보여줬다고 한다. 그때 그 일을 기억하는 동급생의 기억에 의하면 체격에 비해 불알이 꽤 커서 놀랐다고. 


또한 다들 아시다시피 그는 마마보이로 유명했으며 게이바를 들락날락거리는 동성애자'였다. 강한 남성성의 복원을 강조했던 그의 뒷면은 사실 여성성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미시마 유키오는 다자이 오사무를 통해 자신의 컴플렉스를 보았던 것이다. 그들은 지킬과 하이드의 관계였다. 어쩌면 미시마 유키오도 미발표 원고에 다음과 같은 문장을 작성했는지도 모른다. "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저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도 다자이 오사무와 미시마 유키오의 혼종일지도 모른다. 


나는 찌질하고 쩨쩨한, 얼굴이 창백한 불알후드의 후예'이다. 누가 나에게 너는 불알도 창백하냐 _ 라고 놀린다면 기꺼이 바지 지퍼를 열어 보여줄 용의가 있다. 당구공만한, 딱딱한, 반짝반짝 빛나는, 오랜 케겔 운동으로 원형의 미학을 쟁취한 내 불알 두 쪽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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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맨 2019-12-03 12: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미시마와 다자이 두 사람을 좋아하지만 나이가 들어도 지금만큼 좋아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 둘의 글은 저에게 때로는 열기가 번뜩이는, 때로는 냉기로 창백해진 청년의 글로(만) 읽힙니다. 다시 말하자면 두 사람은 청년 남성의 파토스라는 조건에(만) 자신들을 과하게 투영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거든요.
언젠가 평론가 김현은 ‘살아서 별별 꼴을 다 보아야 하며, 그것이 삶이다‘라는 식으로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이 말을 제 식대로 바꾸자면 이른 나이에 존재의 슬픔을 말하는 글보다는, 오래오래 살아서 인간사의 희한함과 기막힘에 대해서 말하는 글이 더 와닿을 때가 있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9-12-06 13:32   좋아요 0 | URL
시기마다 작품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더군요. 저도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