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동, 살인의 추억 그리고 트럼프
홍길동은 총명하고 무예에 뛰어났다고 한다. 문무를 겸비했으니 장차 위인이 될 인물이었으나 현실은 시궁창이었다. 형을 형이라 하지 못하고 아버지를 아버지라 하지 못하니, 홍길동은 아버지 홍상직의 아들이나 아들이 아니었다. 아들아들 하는 세상에서 아들로 태어났으나,
미역 줄기 같은 이 야들야들한 깊이의 얇음은 몸종이었던 춘섬이 낳은 아들(서자)'이라는 출신 성분 때문이었다. 혈기왕성한 길동은 불평등한 사회 구조에 절망하여 눈 감을 위인이 아니었다.어느날, 그는 심야에 아버지를 만나 단판을 벌이기 위해 담판을 벌인다. 형을 형이라 하고 아버지를 아버지라 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 홍길동이 원하는 것은 아버지의 승락이다. 평소 총명한 길동을 애틋하게 여겼던 아버지는 호부호형을 허한다. 소설 << 홍길동전 >> 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아버지의 승낙'이다. 여기서 아버지는 대타자(Other : 라캉의 용어로 대타자는 동일시로 통합될 수 없고 상상적인 타자의 타자성을 초월하는 완전하고 근본적인 타자성 ) 이다.
대타자 아버지는 재현불가능하다. 부자 관계에서 아들은 아버지를 완벽하게 재현할 수 없을 뿐더라 동일시도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아들은 불초 소생(不肖 아니 불, 닮을 초 : 아버지를 닮지 않았다는 뜻 ) 이다. 하지만 다들 아시다시피 홍길동은 아버지를 초월한다. 불초에 머물지 않고 월초(越肖 넘을 월, 닮을 초)한다는 점에서 소설 << 홍길동 >> 은 전복적인 서사'이다. 홍길동은 아버지를 초월했기에 아버지가 없는 단독자 고아'이다. 그는 율도국을 세워 태초의 아버지 시조'가 된다. 영화 << 살인자의 추억 >> 에서 박두만과 서태윤 형사는 첩의 자식'이다.
형사는 용의자 박현규(박해일 분)가 살인범이라 확신하지만 단독자의 이름으로 법을 집행할 능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박두만과 서태윤 형사가 법을 집행하기 위해서는 대타자(미국)의 승락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 유명한 기찻길 터널 장면에서 집행은 선고 유예된다. 대타자의 회답은 불일치'였다. 그것은 곧 " 아버지의 불허 " 를 의미한다. 아버지의 불허에 화가 난 형사는 권총을 꺼내 직접 법을 집행하려 하지만 이때 거대한 기차가 둘 사이를 가로지르며 떼어 놓는다. 프로이트 심리학에서 기차라는 오브제가 발기한 남근(팔루스 Phallus)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기차의 < 가로지르기 > 는 아버지의 개입이다.
이 장면을 도상학으로 풀어서 표현하자면 < 아들 / 아버지 > 이다. 여기서 대한민국이 미국의 허락 없이는 자주적 결정을 할 수 없다는 점에서 < 식민 / 제국 > 의 관계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늑대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희생되는 양들의 침묵을 통해서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수컷의 무능을 고발한다. 그것은 군 작정권이 없는(군 작전권은 미국에게 있다) 대한민국의 현실이기도 하다. 트럼프의 DMZ 방문을 통해서 우리가 절실하게 깨닫게 되는 것은 미국의 허락 없이는 평화도, 그리고 종전도 없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