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라는 낱말의 동의어는 화가'이다




                                                                  옛말인 " 믈 " 은 " 물(水) " 로 변화했다. 마찬가지로 < 블 > 은 " 불(火) " 로, < 플 > 은 " 풀 (草) " 로 변화하였다. 형용사 " 푸르다 " 에서 어간 " 프르 ㅡ " 는 < 플 > 이 바탕이다.

그러니까 색을 지시하는 푸르다(푸른색)는 풀빛을 중심으로 그 주변색을 포괄적으로 아우른 때깔이다. 색띠(색상 스펙트럼)에서 靑 : 푸를 청'과 綠 : 푸를 녹'은 서로 떼래야 땔 수 없는 젖은 땔감과 같은 사이로 죽마고우요, 운우지정을 나누는 죽자사자 같은 사이'여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청색(BLUE)과 녹색(GREEN)을 따로 구분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녹색 신호등을 " 파란불 " 이라고 말하고 잔디를 " 파란 잔디 " 라고 부른다. 이처럼 동서양을 막론하고 옛사람들이 청색(BLUE)과 녹색(GREEN)을 구별하지 못하는 이유는 파랑( 먼셀 표색계에서 2.5PB 4/10에 해당되는 색)이라는 어휘가 다른 색 어휘와 비교한다면

비교적 최근에 발견된 색이라는 데 있다. 현대인이 인식하는 파랑은 자연(계)에서는 보기 힘든 색깔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파란색 꽃은 사람들이 인공적으로 교배해서 만들어낸 것이고, 6만4000종의 척추동물 중에서 몸에 파란색을 지니고 있는 종은 단 2개에 불과하다. 따라서 파랑이라는 인공염료를 생산하기 전까지, 옛사람이 자연에서 파란색을 보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옛사람들에게는 < 파랑 > 이라는 어휘 자체가 없었기에 청색과 녹색을 구별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것이다. 내가 파랑이라는 색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어떤 이와 < 파랗다 > 와 < 푸르다 > 를 두고 " 썰전 " 을 펼쳤기 때문이다.

그는 " 바다는 푸르다 " 거나 " 하늘은 푸르다 " 라는 표현을 문법 오류라고 지적했다. < 푸르다 > 가 녹색 계열인 풀빛을 중심으로 한 형용사이기에 " 바다는 파랗다 " 와 " 하늘은 파랗다 " 라고 써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하늘과 바다가 먼셀 표색계에서 2.5PB 4/10에 해당되는 색'이라고 ??!!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여, 잠시 모니터에서 눈을 떼어 창문 너머 하늘을 보시라. 그냥 보시지 마시고 뚫어져라 보시라. 파랑인가 ? 내 눈에는 오히려 회색으로 보인다. 실제로 색 어휘를 습득하지 못한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늘을 보고 하늘이 무슨 색이냐고 물으면 아이들은 대부분 색이 없다거나

회색이라고 대답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하늘을 파랗다고 맹신하는 이유는 실제로 하늘이 파랑이기 때문이 아니라 " 하늘이 파랗다 " 는 학습 표현에 세뇌되었기 때문이다. 고흐는 풍경화를 많이 남겼는데 그가 그린 그림 속에는 하늘이 다양한 색으로 그려져 있다. 하늘은 푸르다라는 문장을 틀렸다고 주장한 그 사람은 고흐의 그림을 보면 어떤 대답을 내놓을까 ?



- 수확하는 사람, 반 고흐



바닷물도 마찬가지'다. 서해에서 보는 물색과 남해와 동해에서 보는 물색도 서로 다르다. 물의 깊이와 수생식물의 종류 그리고 수질 상태에 따라서 물색은 제각각이다. 무엇보다도 물색의 기본은 " 색이 없다(투명) " 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런데도 하늘과 바다는 무조건 파랑이라고 해야 정답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폭력이고 그 사람 밑에서 국어 교육을 받는 이는 불행한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시'라는 문학 장르가 중요한 것이다. 만약에 어느 시인이 자신이 쓴 시에서 " 파란 하늘 " 이라거나 " 파란 바다 " 라는 관용어(법)를 사용한다면, 그 시인이 쓴 시는 시시하다는 데 500원을 걸어야 한다.

시인의 첫 번째 덕목은 오래 보는 일이다. 내가 시인이라는 낱말의 동의어'는 화가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하늘이 파랗다, 라고 쓴 시인은 역설적이지만 하늘을 오래 본 사람이 아니다. 관찰 없이 관용(慣用)적 습관만으로 쓴 시는 사이비'다. 윤희상 시인의 시 < 화가 > 는 오랜 관찰 끝에 결국에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되는 경지'를 다룬다. 화가가 그린 것은 수선화이지만 화가가 본 것은 보이지 않는 바람이다.

 


​화가는 바람을 그리기 위해서

바람을 그리지 않고

바람에 뒤척거리는 수선화를 그렸다

바람에는 붓도 닿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어떤 사람들은

그곳에서 바람은 보지 않고

수선화만 보고 갔다

화가가 나서서

탓할 일이 아니었다

                        

                         - 화가,  윤희상

 

 

 

 


사랑의 본질은 " 본다는 행위 " 에 있다.  오래 보아야 예쁘다는 나태주 시인의 시처럼 보고 싶다는 욕망(본다는 행위)이 결국에는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욕망으로 확장될 때 비로소 사랑은 완성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당신이 누군가를 사랑했다면) 한 번쯤은 시인'이었다. 나도 한때 시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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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04 17: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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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04 17: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6-04 18: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6-04 19: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파란여우 2019-06-04 21: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시는 그림과도 같다˝고 한 말이 생각나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9-06-04 22:12   좋아요 0 | URL
마그리트 그림 보면 정말 시 같습니다... 그림과 시는 비슷한 구석이 매우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