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 진 하 고 녹 진 하 다 :
天下無人
어느 순간에 연기 패턴이 확 바뀌는 배우가 있다. 연기력이 단계별로 구순기, 항문기, 남근기, 잠복기, 성기기 순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루아침에 눈을 뜨니 구순기에서 왕연기'로 폭풍 성장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염정아'가 그런 배우이다 엄정화 아닙니다잉 !
그가 << 장화, 홍련전 >> 에서 보여줬던 연기력은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에 가까웠다. 장화홍련전 이전이 발연기였다면 장화홍련전 이후는 왕연기'였다. 하지만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가는 경우도 있다. 이름을 거론하기가 민망하지만 안성기가 대표적인 경우'다. 이름만 보면 성기기'에 다다른 노련한 배우 같지만 그의 연기력은 구순기 고착'에 가깝다. 늘 똑같은 연기력으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배우로 우뚝 솟았다는 것은 기적이 가깝다. 그렇다면 설경구는 ?! 설경구는 << 살인자의 기억법 >> 에서 매우 이상한 낌새를 보이더니 << 불한당 >> 에서 불꽃을 피웠다.
<< 살인자의 기억법 >> 과 << 불한당 >> 이 모두 2016년에 만들어진 영화라는 점에서 2016년은 그의 연기 인생에 있어서 변곡점이라 할 만하다. <<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2016 >> 은 매우 잘 만든 상업영화'이다. 평론가들은 << 1987 >> 이라는 영화를 열심히 빨았지만, 내가 보기에는 << 불한당 >> 이 << 1987 >> 보다 뛰어나다. << 불한당 >> 은 범죄 조직 안으로 침투한 경찰 스파이'를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되는 영화로, 감독이 의도했는지는 모르지만 영화 제목 그대로 불한당'은 피는 흘려도 땀을 흘리지는 않는다. 땀(노동)을 흘리지 않고 돈을 번다는 점에서 불로소득자와 불한당은 동일어'이다.
불로(不勞 : 일할 로)와 불한(不汗 : 땀 한)는 같다. 두사부일체라 했던가 ? 불로와 불한과 불알은 같다. 이 영화를 재미있게 만드는 지점은 장르 변주'이다. 퀴어 멜로를 하드코어 범죄 장르로 변주하는 솜씨가 훌륭하다. 발라드 곡을 헤비 메탈 풍으로 연주했다고나 할까. 평론가 황진미의 지적처럼 이 영화는 < 신세계 > 보다는 < 무뢰한 > 에 가깝다. 다만, 남녀커플이 남남커플로 바뀌었을 뿐이다. 누가 봐도, 한재호(설경구 분)가 언더커버 조현수(임시완 분)를 바라보는 눈빛은 곡진하고 녹진하다. 아따, 녹아버리구마이 ~
감독이 퀴어 코드를 솜씨 좋게 숨겼다한들 삼복 더위에 녹아드는 엿처럼 찐득거리는 설경구의 저 눈빛은 어떻게 숨길 것인가. 영화 속에서 설경구는 임시완을 항상 " 자기야 ! " 라고 부른다. 여기서 " 자기 " 는 " 自己 : 스스로 자 + 몸 기 " 로 구성된 한자 조합이다. 자기(自己) 를 철학적 용어로 풀면 자아(自我)이므로 네 몸을 내 몸과 같이 생각한다는 뜻이니 이 얼마나 숭고한 박애'인가. 롤랑 바르트를 굳이 호명하지 않아도 사랑이란 네가 아프면 내가 아픈 열병이다. 사랑하는 타자와의 동일시가 바로 love 다.
뜬금없는 소리이지만 : 설경구가 사랑스러운 말투로 자기야 _ 라고 임시완을 호출할 때마다 철학자 묵자'가 생각났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天下無人 ! 하늘 아래 남(타인)은 없다는 뜻이다. < 내 > 가 곧 < 네 > 이기에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예수의 동양 버전이 바로 묵자'다. 영화 속 한재호(설경구 분)는 天下無敵 천하무적 을 욕망하지만 동시에 天下無人 천하무인 의 상태에 다다르게 된다. 결코 사랑해서는 안 될 존재인 조현수 형사(임시완 분)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이 엇박자가 이 영화의 비극을 돋보이게 만든다.
사랑하는 人을 敵으로 상대해야 되는 엇박자야말로 비극의 원형이 아니었던가. 이 영화가 멜로인 이유는 바로 엇박자'에 있다. 서로 간절히 원하지만 길이 어긋나서 만나지 못하는, 인생행로의 어긋남이 바로 멜로'이다. 오고가다 다 만나면 그것은 텔레토비이지 멜로가 아니지 않은가 ! 이 영화에 대한 내 20자평, 아니 사자성어는 다음과 같다. 我二朝兒 아이좋아
내 정치적 성향을 고려하자면 : 공자는 개새끼고 묵자는 예수다. 묵자 철학의 핵심인 겸애 : 가리지 않고 사람을 두루 사랑함 는 평등 사상 없이는 이룩할 수 없는 愛 다. 반대로 공자 철학에 등장하는 인애는 평등 없이도 도달 가능한 愛다. 공자의 仁(인) 사상은 두(二) 사람(人)이 서로 친하게 지내며 어질게 대처하라는 처세술을 가르치지만 평등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논어 제 7 편 술이(述而)편에 보면 이런 말이 있다. 공자왈 : " 삼인행, 필유아사언. 택기선자이종지, 기불선자이개지 三人行, 必有我師焉. 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 " 공자가 말하기를 "세 사람이 함께 걸어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 그들 중에서 훌륭한 점이 있다면 그것을 가려서 따르고, 나쁜 점이 있다면 그렇게 하지 않도록 고칠 수 있어 배움이 된다." 즉, 우열을 가리는 것이 삼인행의 핵심이다. 평등이 제거된 사랑은 진짜 사랑이 아니라 가짜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