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뉴스는 악을 응징하는 수단보다는 모멸감을 주는 수단에 가깝다. 뉴스가 모멸감을 생산하는 방식은 주로 " 양치기의 거짓(말)을 폭로하는 것 " 이다. 거짓(말)이 클수록 모멸감도 커지고 모멸감이 클수록 시청률도 크게 오른다. 농담을 섞어 말하자면, 뉴스를 생산하는 언론은 쪽을 사고 파는 기관인 셈이다.
그렇기에 언론인들이 정의의 사도 운운하며 권력을 감시하는 사명을 부여받았다며 비장한 목소리로 직업 윤리 강령을 강조할 때마다 웃게 된다. 언론은 권력을 감시하는 기관이다 ?! 가짜 뉴스'다. 권력을 감시하는 곳은 사정 기관이지 언론이 아니다. 언론의 주요 임무는 사실 보도'에 있다. 얼핏 보면 쪽(을) 팔린 일은 죽어도 하지 않으려는 양아치와 쪽을 사고 파는 일을 하는 언론인은 서로 상극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엇비슷한 점도 많다. 뉴스가 특정인에게 모욕감을 주는 방식은 비단 악당만을 표적으로 삼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언론이 노무현을 소비한 방식이 좋은 예이다. 논두렁 시계는 사건 본질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가짜 뉴스였지만 쪽을 사는 쪽에서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오브제'였다.
논두렁 시계는 노무현에게 모욕감을 주기에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노무현은 뉴스가 생산한 거대한 모욕감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수치와 염치를 아는 인간일수록 모욕감에 취약하다. 그렇기에 나쁜 정치와 결탁한 언론은 특정 대상을 공격하기 위해 끊임없이 모욕감을 생산한다. 언론사가 이재명이라는 정치인을 소비한 방식도 모욕감'이다. 언론은 김부선의 말을 " 팩트 체크 " 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김부선의 자극적인 말'을 여과 없이 보도하고 그 뉴스를 해석하는 단계에서 억측을 재생산한다. 김부선의 말(메시지)은 대부분 앞뒤가 틀리다. 김부선은 이재명을 불륜을 즐기기 위해서 따로 오피스텔을 얻었다고 폭로했지만
나중에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불륜을 즐겼다고 말을 바꿨다. 또한 그와 뜨거운 밤을 보내느라 아파트 난방비가 많이 나왔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 확인하니 정반대였다. 그녀는 이 지적을 의식한 듯 난방비를 아끼기 위해서 한겨울에도 이재명에게 파카를 입혔다고 말을 바꿨다. 그런데 언론은 이 사실을 보도하지 않았다. 오로지 김부선의 폭로에 집중했다. 화룡점점은 한때 사랑했던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를 찍어서 남을 만들었던 김부선의 폭로'다. 이 상황에서 공지영의 개입은 불난 집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되었다. 공지영은 이재명의 크고 까만 점이 그에게 망신을 줄 것이라고 확신했지만 오히려 망신을 당하는 쪽은 당신으로 기우는 형국이 되었다.
사태가 겉잡을 수 없이 흐르자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를 찍었다고 폭로한 김부선은 침묵하고 있지만, 공지영은 여전히 트위트에서 말의 성찬을 쏟아내고 있다. 반성도 없고 사과도 없다. 입만 열었다 하면 인간에 대한 예의를 말하고 인권과 정의를 위해 싸울아비를 자청했던 그녀가 왜 이 사태에 대해서는 반성을 모르는 것일까 ? 그녀에게 묻고 싶다. 먼 훗날, 그때 그 일에 대해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었나 _ 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