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회찬이니까 우는 거다
" 인간적 - " 이라는 명사(관형사)는 이상한 낱말이다. 우리는 눈 덮인 킬리만자로 산기슭에서 먹이를 찾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를 향해 " 하이에나的 - " 이라고 지시하지 않으며, 양철 지붕 위를 걸어다니는 고양이에게 " 고양이的 - " 이라고도 말하지 않는다. 하이에나가 하이에나답다거나 고양이가 고양이답다고 해서 그것이 특별히 이상하거나 특출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에게만큼은 " 인간적 " 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사람에게 " 사람다운 성질( : 사전적 의미) " 이 있다고 강조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인간 대부분이 " 비인간적 " 이라는 불편한 진실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다운 인간은 드물다. 그렇기에 인간적인 사람은 다수가 아니라 소수'다. 정치가에게서 정치적 욕망을 읽는 것은 유쾌한 일도 아니고 불쾌한 일도 아니다. 직분에 충실한 욕망일 뿐이니 말이다. 하지만 정치적 욕망이 지나치다 보면 인간적 매력을 점점 잃게 된다. 안철수가 정치적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낼 때마다 그의 인간적 매력이 감소하는 것도 정치적 욕망과 인간적 매력이 서로 양립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노회찬은 마지막 결단 앞에서 정치적 욕망과 인간적 욕망 사이에서 갈등한 것처럼 보인다. 그는 사람다움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선택했다. 노회찬은...... 인간적이다. 내가 그의 죽음에 슬퍼하는 이유이다. 그는 춘추복 한 벌로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견뎠다. 생활고에 시달린 아내에게 사내답게 매달 30만 원을 생활비로 주겠다고 호언장담했으나 그마저도 지키지 못했다. 그가 입은 옷은 아파트 단지 내 재활용 옷 수거함에서 얻은 옷들이었다. 분향소 앞에서 통곡하는 노동자에게 왜 그렇게 우느냐고 묻자 그가 대답했다. " 노회찬이니까 우는 거다 ! "하여 나는 기꺼이 울겠다. 당신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