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 나 의 가 족 삼 성 :
삼성과 나치
유대인 600만 명을 학살한 홀로코스트 주범이었던 나치 친위대 장교 아이히만은 어떤 사람일까 ? 유대인 정치 철학자였던 한나 아렌트는 주간지 뉴요커 특파원 자격으로 아이히만 재판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하여 잡지 << 뉴요커 >> 에 4회에 걸쳐 게재1)한다.
사람들이 아이히만을 통해 보고 싶었던 것은 인간의 탈을 쓴 짐승만도 못한 개새끼, 혹은 " 악마 오브 악마 오브 악마 대마왕 " 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한나 아렌트는 대중이 바라는 인물상과는 달리 다음과 같은 인물평을 내놓는다 : 아이히만, 성실함. 졸라 성실함(원문 : 각별히 근면한 것을 제외하고는.....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에서 발췌)이었다. 승전국은 아이히만은 개새끼라는 프레임을 원했는데 사람 새끼라고 하자 발칵 뒤집어졌다. 뭐야, 이따위 삼시세끼 ! 또한 자신을 각별히 근면한 사람이라고 믿었던 세계인들도 패닉에 빠졌다. 한나 아렌트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악은 평범하다는 주장이었다.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것 자체가 악입니다아. 그러니까 누구나 아이히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렌트가 주목한 것은 아이히만이 즐겨 사용하는 언어 습관이었다. 그는 생생한 생활어보다는 구닥다리 상투어와 딱딱한 관청어(관청에서 관료들이 특수하게 쓰던 언어)를 습관적으로 구사했다. 예를 들면 " 학살 " 을 최종 해결책, 완전 소개, 특별 취급 따위로 언어를 탈색시켰다. 이것은 언어(학살이라는 단어)를 암호화해서 행위에 따른 죄의식을 무감각하게 만들고자 하는 의도였다. 삼성이 삼성전자 노동조합을 와해시키는 것을 " 그린화2) " 라는 용어로 표현했다는 기사를 접했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아이히만이 즐겨 사용하던 관청어'였다.
삼성전자서비스센터 노조원 염종석 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자 삼성 노조 말살 내부 문건에 기재된 언어는 " 노조원 1명 탈퇴 " 라는 표현이었다. 회사 측의 지속적인 회유와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목숨을 끊은 불행한 죽음이 고작 " 탈퇴 " 라는 사무적이며 무미건조한 표현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삼성이 구사한 전략은 바로 아이히만의 그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삼성의 기업 이미지 광고를 볼 때마다 절실하게 깨닫게 되는 것은 악의 평범성이다. 저토록 친절하고 감성적인 언어 속에 숨겨진 그 악마성. 같은 노조원 최종범 노동자의 죽음도 다르지 않았다. 그는 너무 힘들고 배가 고팠다는 말을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딸 최별이 태어나던 날, 그는 자신의 sns 대문에 남긴 문자는 다음과 같다. 오늘부로 최종범 인생 끝. 최별 인생으로 다시 시작.
1)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부터 사형집행 순간까지 1년여의 취재를 바탕으로 아렌트가 고급 주간지 ‘뉴요커’에 1963년 4회에 걸쳐 연재한 심층기사를 엮은 책이 바로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이다.
2) 삼성은 노조 가입자의 노조 탈퇴를 " 그린화 " 라고 명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