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과 악수








 




2002년 월드컵 때, 인민들이 광화문 광장으로 나와 떼거지로 응원을 할 때 나는 코웃음을 쳤다. 코로 웃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항문으로 웃을 수는 없으니까. 내가 세계사에서 거대한 획을 그을 이날(2018년)에 그날(2002년)을 이야기하는 것은 내가 히키코모리 성향이 있는 개인주의자라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촛불 집회 때 주말마다 광화문 광장으로 스무 차례 정도 출근 도장을 찍은 계기는 위대한 이명박근혜 동지가 싼 똥 때문이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투철한 민주주의 시민 의식 때문은 아니었다. 지금부터 광장에서 만난 세 사람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 세 사람이야말로 나한테는 가장 훌륭한 책이었다. 처음 만난 사람은 중학생으로 보이는 학생(들)이었다. 소리성애자인 나는 내 옆에 앉아서 재잘거리는 두 명의 학생들이 나누는 대사에 넋을 놓고 듣고 있었다. 서울 말씨 같기도 하나 어찌 들으면 강원도 사투리 같기도 하고 달리 들으면 경상도 사투리 같기도 했다.  도대체 이 인간들의 출신 성분은 어디인가 ?  궁금증을 참지 못한 나는 그들에게 물었다. " 어디서 오셨어요 ? "  내 질문에 그 학생들이 내놓은 답은 제주도였다. " 뭐요, 제주도에서 광화문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올라왔다구요 ? "  내용인즉슨, 용돈을 모아서 부모님 허락을 받아 친구와 함께 올라왔다는 것이다.

그때 내가 깨달은 점은 제주도에서도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올라왔는데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사는 내가 집회에 빠지면 안 되겠구나 _ 하는 마음이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 코 꼈네. 물어보지 말 걸 그랬어. "  두 번째는 휠체어를 탄 구순 노모를 끄는 (아들로 보이는) 장년의 남자였다. 그 어마어마한 인파를 뚫고 휠체어를 끈다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닐 텐데 아들은 구순 노모를 데리고 광장으로 나온 것이다.  그때 깨닫게 되었다.   혼자 집회에 참석하기보다는 주변인을 동원하라.  나는 생각했다. " 시바, 코 꼈네 ! " 세 번째는 휠체어가 아니라 들것(정확한 명칭은 모르겠다. 바퀴가 달렸다)이었다.

그 환자는 앉아 있을 힘조차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그는 집회에 참석해서 작은 힘이라도 보탤 요량으로 나온 것이다. 물론 나는 생각했다. " 진짜루, 코 꼈네 ! "  그렇게 주말마다 나오다 보니 스무 차례.  하지만 나는 이 평화로운 집회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프랑스처럼 조금 더 폭력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  내 판단은 틀렸다. 그때의 평화가 지금 김정은과 문재인이 악수를 하게 만든 원천이 되었으니까.  그리고 이 역사적인 결과에 나도 한몫을 했다는 사실이 뿌듯하기도 하다. 이 자리를 빌려 제주도에서 올라온 학생, 휠체어를 탄 구순 노인과 그 아들,

마지막으로 들것에 실려서 별 하나 없는 캄캄한 서울 하늘을 바라보셨던 그분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이 평화로운 밤을 만든 사람은 문재인이 아니라 바로 당신들이다. 당신들은 나의 가장 위대한 스승이었다. 많이 배웠시다. 만수무강하십시오.






 


덧 ㅣ 자유한국당 의원들에게 : 야, 시발 개새끼들아 ! 대한민국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외신 기자들이 이 감격스러운 장면 앞에서 울더라. 씨부랄새끼들아. 니들이 사람새끼냐.. 나라 잃었냐. 부모 초상 치뤘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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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같다면 2018-04-29 13: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나경원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어처구니가 없다‘ 는 논평을 내놓았군요.
자신이 가진 지식이나 영향력을 이렇게 괴물처럼 사용할 수 있다니..
근데 이 사람 ‘다스‘ 주어가 없다는 말 사과는 했던가요..?

곰곰생각하는발 2018-04-29 14:34   좋아요 0 | URL
나경원 사전에 배는 있어도 사과는 없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