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부라보이라는 미국의 거물급 사회학자가 방한했다고 한다. '공공사회학'을 주창한 학자라는데, 요즘 사회학 책들을 별로 안 읽은 탓인지 '공공사회학'이란 말 자체가 생소하다(저자는 <생산의 정치>(박종철출판사, 1999)로 이미 오래전에 소개됐다). 설명에는 '전문(professional) 사회학’과 대비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강단사회학의 두 조류가 되는 것인가?(뒤집어 생각해보면, 공공사회학은 가장 실제적/실천적인 학문이어야 할 '사회학'이 그간에 얼마나 폐쇄적으로 전문화되었던가에 대한 반증이자 반성이기도 하겠다.) 하지만, 나의 관심은 공공사회학보다는 그가 러시아와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의 자본주의 이행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는 데 두어진다. 그 방면의 책들이 번역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세계의 책'으로 분류해놓는다. 인터뷰 기사를 옮겨놓는다. 인터뷰에서 인상적인 건 차베스에 대한 평가이다. 말발만 앞세운 사회학자들과는 좀 다르다는 인상을 준다.

한겨레(07. 05. 12) 사회학자여, 강단을 넘어 대중과 만나라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 대학 사회학과 교수인 마이클 부라보이는 ‘공공사회학(public sociology)의 전도사’로 불린다. 이매뉴얼 월러스틴과 함께 미국의 대표적인 좌파 사회학자인 그는 사회학이 사회에 대해 비판적 관점을 취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믿는다. 사회학이 지향하는 가치가 강단을 넘어 대중과 직접 만나야 한다고 강조한다. 사회학자는 강단에서 학문적 엄밀성만 추구할 게 아니라 그들의 가치가 실현될 수 있도록 직접 대중과 만나고 토론해야 한다는 것이다. 1980년대 우리 학계에 널리 퍼졌던 실천적 경향을 떠올리게 한다.

미국 사회학회 회장(2003~2004년) 시절 공공사회학을 주제로 미국사회학회 연례회의를 주재했으며, 지금도 각국을 돌며 공공사회학의 이념 전파에 주력하고 있다. 그는 사회주의권 붕괴 이전 헝가리 철강 공장에 직접 취업해 노동과정을 연구하는 등 현장 체험에 바탕을 둔 실증적인 노동 연구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지난 3일 중앙대·연세대 두뇌한국(BK)21 사업단 초청으로 한국을 첫 방문한 부라보이 교수를 4일 연세대 사회학과 원재연 교수 연구실에서 만났다.

-사회학자들이 왜 대중과 직접 만나야 하나.

=시민들이 그들의 존립에 물질적 지원을 하고 있다. 시민들이 낸 세금으로 학자들이 봉급을 받고 있다. 학자들은 시민사회에 뭔가를 돌려줘야 한다. 사회를 위한 의무다. 사회 역시 사회학자들의 가치에 대한 통찰을 필요로 한다. 자본과 국가로부터 시민사회를 지켜내는 데 학자들이 적극 기여해야 한다.

-대중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공공사회학의 가치는 무엇인가.

=공공사회학은 사회 문제에 직접 관여해 이슈들을 토론하는 것을 강조한다. 지향해야 하는 가치에 대한 단일한 정의는 없다. 다양한 정의가 가능할 것이다. 공공사회학계에서는 사회정의와 평등의 가치가 점차 중요성을 얻고 있다. 내게는 ‘사회정의’가 가장 중요하다.

-그런 가치를 어떻게 대중들에게 전달할 것인지 궁금하다.

=제도권 언론들이 보수적이라고 하지만 모두 단일한 성향을 가지고 있지 않다. 같은 미디어 안에서도 서로 모순되는 가치가 혼재한다. 예컨대 <뉴욕타임스>나 <월스트리트저널>과 같은 유력지에서도 진보적 칼럼을 찾을 수 있다. 미국에선 ‘공공 라디오’들이 훨씬 개방적이다. 사회학계 주최의 여러 행사에 언론인들을 초청해 교육시키는 데도 비중을 두고 있다. 중간 매개체를 거치지 않고 대중과 직접 만나는 것도 중요하다. 노조와 각종 시민·지역 단체 회원들과 수시로 만나 토론한다.

-한국 학자들은 1980년대 이후 강단에 매몰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미국의 영향이 크다. 미국의 사회학은 과도한 전문주의 경향을 띠고 있다. 아울러 시민사회의 조직화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학문적 지배권을 가진 미국의 이런 경향을 따라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미국 중심의 국제학술지 논문 게재가 갈수록 강단에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것도 주요한 이유다.

-일각에선 세계화가 정점에 도달했다는 지적도 내놓고 있다.

=절대 그렇지 않다. 어디를 가도 세계화 파고가 높아지고 있는 것을 본다. 남아프리카에서는 전기·수도 등 공공서비스가 민영화되고 있고, 중국과 인도 농민들은 각종 토목 공사 때문에 땅에서 쫓겨나고 있다. 아직 정점에 도달하지 않았다. 시장화는 그 반대세력을 키우고 있다. 볼리비아와 베네수엘라 브라질 우루과이 등 남미에서 이런 기류가 확연하다.

-베네수엘라 차베스 대통령은 세계화에 반대하는 새로운 민주주의 대안 모델이 될 수 있나.

=그가 세계에서 미국 지배권에 도전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가장 큰 걸림돌은 석유다. 그는 너무나 많은 ‘오일머니’를 가지고 있다. 때문에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꿀 이유가 없다. 근본적으로 자본주의와 타협하고 있다고 본다. 그는 대토지 소유자로부터 땅을 사버린다. 그들을 추방하지 않는다. 금융과 은행 제도와도 타협하고 있다. 너무 돈이 많아 자본주의와 타협하는 게 가능하다. 나는 그를 ‘민족적 대중주의자(national populist)’로 본다. 그가 도시 변두리 주민들의 빈곤을 개선하기 위해 일종의 재분배를 한 것은 인정한다.

-세계화 흐름 이후 양극화 경향이 거세지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최근의 사회운동은 일종의 수세적인 방어 운동이다. 공공영역의 민영화가 계속 확장되고 있다. 자유무역협정 역시 마찬가지다. 당장의 미래에 대해선 비관적이다. 하지만 남미를 비롯해 세계화에 저항하는 많은 대안 찾기가 시도되고 있다. 시장화에 반대하는 조직화가 여러 곳에서 이뤄지고 있다. 대안은 이런 사회운동에 있다고 본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중국과 러시아의 행로에 대해 어떻게 보나.

=1991년 이후 러시아 경제는 하강했으나 중국은 반대로 상승하고 있다. 러시아는 조직적으로 국가 전복을 시도했다. 혁명적인 방식으로 시장자본주의로 이행했다. 충격요법을 썼지만 치유책은 내놓지 못했다. 중국은 국가의 후원 아래 시장경제가 발전하고 있다. 자본주의 경제는 국가가 필요하다.

-마르크스주의의 현재적 의미는 무엇인가.

=자본주의에 도전하는 가치로서 언제든 의미가 있다.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근본적으로 마르크스주의는 매우 다층적이고 비동질적인 사유체계이다. 자본주의에 대항한 사회운동에 활력을 불어넣는 구실을 할 것이다.

-미국에서도 ‘인문학의 위기’를 체감하는지.

=내가 재직 중인 대학의 사회학과는 지금까지 계속 그 규모가 늘어나고 있다. 학문의 인기는 일자리의 수와 밀접한 상관관계를 맺고 있다. 미국의 물질적 매력에 기반한 지배력이 학문의 세계에서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도 한 영향이다. 미국의 힘은 자신들의 교육 체계나 지식·이데올로기에 권위를 부여하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남미가 저항 아이디어로 맞서듯, 유럽 등 다른 대륙도 미국과는 다른 세계를 만들어갈 수 있다고 본다.

공공사회학 = 학문이 강단을 넘어 대중과 만나 지향하는 가치를 전파하고 토론해야 한다고 믿는 사회학의 한 분야. 1988년 미국에서 이 용어가 처음 사용됐다. 동료 전문 학자들과 이론적 논의에 그치는 강단사회학인 ‘전문(professional) 사회학’과 대비되는 개념이다.(강성만 기자) 

07. 05. 13.

P.S. 부라보이 교수의 홈피(http://sociology.berkeley.edu/faculty/burawoy/workingpapers.htm)에는 그의 '워킹 페이퍼'들이 링크돼 있다. 러시아의 자본주의 이행에 관한 논문들이 단행본으로 출간되기를 기대해본다. 가장 최근에 나온 책으론 편저인 <세계화와 새로운 정체성들>(2007)이 눈에 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미디어오늘에 연재되고 있는 '강유원의 Book소리' 중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을 옮겨놓는다. 최근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1>(리젬, 2007)이 부분 번역되었고, 믿을 만한 번역서인가 궁금했었는데 우연히 이 번역서의 고유명사 표기가 신뢰할 만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관행'과 '상식'이 절대적인 건 아니지만 학문적 소통을 위해서는 존중될 필요가 있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그렇다고 '오디세이아'를 '오뒷세이아'로만 표기해야 한다는 주장에까지 내가 공감하는 것은 아니다).

미디어오늘(07. 05. 11)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

‘서양철학은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는 화이트헤드의 말을 들으면 서양 학문에 끼친 플라톤의 영향이 엄청나리라 짐작할 수 있지만 따지고 보면 그 영향이 아리스토텔레스만은 못할 것이다. 델로스 동맹의 맹주였다고는 하나 아테네는 작은 폴리스였고, 플라톤은 그곳의 철학자였다. 반면, 알렉산드로스의 스승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제자이기는 했어도 사실상 제국의 철학자였던 만큼 학문의 범위도 플라톤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래서인지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력은 서양의 중세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양 학문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력을 발견할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 중의 하나는 단테의 서사시 <신곡>이다. 중세 말에서 르네상스로 넘어오는 시기에 쓰여진 이 서사시에는 고대로부터 물려받은 많은 요소들이 녹아들어 있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로 알려진 호메로스의 서사시 전통,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의 전통이 들어가 있는가 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바탕으로 중세 신학의 결정판을 만들어낸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도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신곡>을 읽기 위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조금이라도 이해해야 하며, 이쯤 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 전공자의 기본 지식이 아니라 서양학문을 하는 모든 이의 기본이라는 위치에 자리하게 된다.



2007년 현재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신곡> 번역본은 여러 판이 있다. 대구가톨릭대의 김운찬 교수는 ‘교수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한형곤 번역의 <신곡>이 권장할 만하지만 더욱 충실한 새로운 번역이 필요하다고 진단하고 있다. 사실 <신곡> 번역은 역자인 한형곤 교수도 스스로 말하고 있듯이 본문은 물론이고 “주석이 본문의 70% 이상”이나 되는 지난한 작업이다. 그런데 그 주석 중에 너무나 당연한 것에 대한 실수가 있으면 다른 주석까지도 빛이 바래기 마련이다. <신곡> 지옥편 제11곡에 이런 구절이 있다. “또한 네가 물리학을 잘 관찰한다면.”이 구절에는 주석이 달려있는데, 그것은 이러하다. “물리학.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Physica> 제2권. ‘예술은 자연을 모방한다.’”

최근 불어판을 중역해서 나온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도서출판 리젬) 번역본에서도 유사한 사례가 있었다. 그 책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 몇몇의 명칭이 다음과 같이 쓰였다. ‘대도덕론’이 ‘위대한 도덕론’으로, ‘자연학’이 ‘물리학’으로, ‘소피스트적 논박’이 ‘궤변적 반론’으로, ‘분석론 전서’가 ‘제1분석법’으로, ‘분석론 후서’가 ‘제2분석법’으로 표기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전문적으로 읽을 필요도 없이, 철학관련 기본 도서를 읽어보기만 해도 ‘물리학’이 아니라 ‘자연학’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앞서도 말했듯이 철학의 상식이 아니라 서양학문의 상식인 것이다.



강대진은 최근 저작 <고전은 서사시다>(안티쿠스)에서 헤시오도스의 ‘일들과 날들’에 관한 황당한 번역어들을 발견한 사례를 적어두고 있기도 하다. “ ‘일들과 날들’이라는 제목은… 희랍어 제목 ‘Erga kai Hemerai’를 그대로 옮긴 것이다. 우리식 제목을 잡자면 ‘농사법과 택일법’ 정도라고나 할까?…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쓰여온 제목은 ‘노동과 나날’인데… 좀더 놀라운 제목들로는 ‘사업과 시대’, ‘작품과 생애’ 따위가 발견된다.”



이런 상황을 놓고 인문학의 영역에서 연구하는 모든 학자들을 대상으로 서양학의 기본 저작들, 이를테면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등의 저작 명칭에 관한 간단한 오리엔테이션이라도 실시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학자여서 더 이상 배울 게 없으니 참여할 수 없다고 버틴다면, 출판사 편집자들에게라도 그러한 교육을 좀 할 수는 없을까. ‘한국출판인회의’나 ‘대한출판문화협회’에서 한번쯤 이런 기회를 마련했으면 싶다. 독자들에게 아리스토텔레스에게도 ‘물리학’이 있었다고 우길 수는 없지 않은가.

07. 05. 13.

P.S. 역자 나름의 변이 없지는 않으나 '피지카(Physica)'를 '물리학'이라고 옮기는 수준이면 독자를 설득하기엔 역부족이 아닌가 싶다. 고유명사 표기 문제에 대해서는 이전에 두어 차례 페이퍼를 띄운 적이 있다. 최근에 읽은 못마땅한 책들에 대해서는 나중에 시간을 내어 다시 다룰 작정이다.  


댓글(7)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마늘빵 2007-05-13 08:35   좋아요 0 | URL
안내 감사합니다. 살 계획은 없었으니 다행이지만, 사게 되더라도 피해야겠군요. 기본적인 학문적 소통이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지요. 번역자가 누구인가 봤더니 전공자는 아니군요. 이런 전문서 같은 경우에는 이쪽 관련 서적들을 두루 접한 전문가들이 번역하는게 훨씬 낫지 싶습니다. 한국어로 얼마나 자연스럽게 옮기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기존에 쌓아왔던 것들을 염두에 두고서 번역을 하느냐죠. 기본적 명칭조차 어긋나버린다면 문제가 심각합니다.

로쟈 2007-05-13 10:31   좋아요 0 | URL
국내에 나온 관련서들을 한권도 참조하지 않았다는 뜻이지요. 번역은 많은 부분 '한국어'의 문제라는 걸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영어/불어/희랍어 등에 능통한 이들은 적지 않음에도 오역은 줄지 않는 것으로 보아...

2007-05-14 22: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5-14 23:11   좋아요 0 | URL
**님/ 기본적으론 한국에 능통해야 하겠죠. '능통'이란 게 물론 어학적인 차원에 국한되는 건 아니구요, 한국어의 번역 용례와 의미맥락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물론 많은 부분 노력으로 카바할 수 있습니다. 자문을 구할 수도 있구요). 한국어 자체의 핸디캡은 늘어놓아봐야 비생산적일 거 같구요. 물론 말씀대로 두루 능통하신 분이 번역하신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런 능력은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체득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훌륭한 번역자이지만 번역을 하지 않는 사람'을 저는 믿지 않습니다. 번역도 노하우를 필요로 하는 '실천지'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2007-05-14 23: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5-14 23:36   좋아요 0 | URL
'한국어 자체의 문제점'이라고 하는 건 어폐가 좀 있겠구요, 개념어들의 발달이 상대적으로 미흡하기 때문에 갖는 난점 정도라고 봐야겠지요. 한데, 실제 번역에서 애를 먹이는 건 반대로 한국어가 너무 조밀해서 발생합니다. 가령, 'truth'란 단어가 나오면, 문맥에 따라 '진실'이나 '진리'로 구별해주어야 하는데, 이런 게 번거로우면서도 실상은 더 어려운 일이죠. 번역학쪽 책들까지 챙기는 건 아니어서 '관련도서'까지는 모르겠습니다.^^;

2007-05-14 23: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지난주에는 별로 눈에 띄는 신간이 없어서 개인적으로는 개운한 한 주였다. 손자들이 놀러와주면 고맙고 돌아가주면 더 고맙다는 우스개가 있잖은가. 읽고 싶은 책들이 나오면 반갑기 짝이 없지만 한편 괴로운 일이기도 한 것이 '애서가'들의 현실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최근에 뇌과학에 관한 몇 권의 책이 나온 것 말고는 나를 괴롭게 한 책들이 따로 눈에 띄지 않는다. 뇌과학 관련서로서는 <꿈꾸는 기계의 진화>(북센스, 2007)를 진작에 사두고 있고 조만간 <스피노자의 뇌>(사이언스북, 2007)도 구입을 검토해볼 생각이지만 그래도 좀 여유가 생긴다면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도서출판 숲, 2007)을 장서용으로 구입하는 게 폼나지 않을까 한다. 단, 역자 천병희 선생이 욕심을 내어 또 개정판을 낸다면 좀 낭패(?)가 되겠지만. 관련기사를 읽고 신중하게 판단해봐야겠다.  

알라딘의 소개로는 "'로마의 평화'로 표상하는 인류사의 가장 절묘한 한 시대를 증언하면서 인류가 걸어야 할 길을 가리켜 보인 위대한 길잡이로 평가받는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 <아이네이스>의 완역본. 2004년 첫 출간된 책의 개정판이다. 초판이 번역의 충실함에 있어 딱히 흠잡을 데가 없다고 평가받음에도 불구하고 더 나은 번역을 위해 문장 하나하나 다듬은 옮긴이의 노고가 빛난다. '아이네아스의 노래'라는 뜻의 <아이네이스>는 로마라는 위대한 역사적 현상을 관찰하면서 아이네아스라는 한 인간의 운명을 배경으로 하여 한 국가의 세계사적 의미를 경건하게 노래하고 있다. <성경>,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와 더불어 서양정신세계의 큰 영향을 미친 대표적인 고전으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세계일보(07. 05. 08) 디도와 아이네아스의 비극적 사랑 부활했네

서양 사람들이 자신들 문화의 뿌리로 생각하는 로마의 고전 작품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아이네이스'(‘아이네아스의 노래’)다. 동양에서는 '삼국지'가 그만큼의 인기를 누렸을까. '아이네이스'는 이미 '일리아스'에서 몰락하는 트로이아인들을 다스릴 인물로 예언되어 있던 아이네아스가 세계를 문명화하는 나라를 세우기 위해 추종자들을 데리고 화염에 휩싸인 트로이를 떠나 정착지를 찾기까지 곳곳을 떠도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아이네아스는 제2의 트로이를 건설하라는 신탁을 받았건만, 자신의 사명과 운명을 처음엔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본의 아니게 재난과 죽음을 불러온다.

디도와 아이네아스의 비극적인 사랑은 이 작품에서 가장 사랑받아온 부분으로 디도와 사랑에 빠져 있을 때 최고신은 과업을 일깨우며 디도 곁을 떠나라고 재촉한다. 그가 떠나자 디도는 실연의 아픔을 이기지 못하고 그가 남기고 간 물건들을 태우려고 쌓아둔 장작더미에 올라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조차 모른 채 여러 곳을 방랑하고 오랫동안 탐색을 계속한다. 그렇게 방랑에 방랑이 이어지면서 가야 할 곳은 분명해지고, 사명을 향한 그의 의지도 점차 굳건해진다.

당대까지 인류가 경험한 가장 위대한 제국, 로마의 탄생을 노래하는 서사시인 만큼 '아이네이스'에는 무수한 인물들이 등장하여 활약하고 사라진다. 그렇지만 꼼꼼히 읽어보면 시인은 신의 행위나 영웅적인 인간상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건국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대의에 희생되어 어쩔 수 없이 부서지고 쓰러지는 인간들의 비애와 운명을 조명한다. 이것이 바로 2000년 동안 사랑과 찬탄을 받아온 베르길리우스 시 예술의 탁월함과 보편성이다.

산문으로 초안을 잡은 후 예술적 이상에 맞춰 오랫동안 그 시행들을 운문으로 조탁했다는 시성(詩聖) 베르길리우스의 유언은 11년 간 쓴 '아이네이스'를 불태워버리라는 것이었다. 완벽주의자였던 시인의 유언은 지켜지지 않았다.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다른 사람에게 마저 다듬게 하여 지금의 형태로 남게 된 것이다.

여기 또 한 명의 완벽주의자가 있으니 번역자 천병희(단국대 명예교수) 교수가 그렇다. 천 교수는 번역의 충실함이나 감동의 깊이에서나 이미 인정받은 '아이네이스'의 개정판을 내놓았다. 천 교수는 그동안 '일리아스'의 세 번째 번역본을, '오뒷세이아'의 두 번째 번역본을 내놓았으며, 이번에 '아이네이스'의 두 번째 번역본을 내놓았다. 30년 동안 50여 종에 가까운 그리스 라틴 고전을 원전 번역했지만, 언어는 늘 바뀌기 때문에 중요 고전 번역은 한 번으로 끝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소신이다.(조정진 기자)

07. 05. 13.

P.S. <아이네이스>의 또다른 번역본으로는 김명복 교수가 영역본을 옮긴 <아이네이드>(문학과의식사, 1998)이다. 저자의 이름 베르길리우스도 영어식으로 '버질'이라고 표기돼 있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2007-05-13 08: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늘빵 2007-05-13 08:38   좋아요 0 | URL
이 분 정말 완벽주의자 같습니다. 대단해요. 번역했던 것을 또 번역하고 또 번역하고. 집에도 <오뒷세이아>와 <일리아스>가 있는데 아직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제 책꽂이를 빛내고 있을 뿐이죠.

이번주엔 저도 관심가는 책이 하나 정도 밖에 안보이더라구요. 매주 몇 권씩 보관함에 넣다가 하나도 없으니 허전합니다.

로쟈 2007-05-13 10:36   좋아요 0 | URL
**님/ 미처 '확인'을 못했네요. 덕분에 좋은 책 읽겠습니다.^^
아프락사스님/ 저도 <오뒷세이아>를 갖고 있는데 막상 읽을 시간은 잘 안 나네요.^^;

가넷 2007-05-13 16:09   좋아요 0 | URL
숲 출판사들의 책은 값도 만만치 않지만, 책 무게도 왜 그렇게 많이 나가는지... 저는 손목 쪽이 유독(?) 약한 편인데, 등교길에 읽으려고 들고 있으려면 무리가 오더군요. --;;

로쟈 2007-05-14 01:38   좋아요 0 | URL
들고 다니시면서 읽을 책은 아닌 듯한데요. 설사 손목이 유독(!) 강하시더라도요.^^
 

지난 2월인가 도올의 <요한복음 강해> 출간의 계기로 불거진 논란이 최근 공식적인 공개토론회로 귀결된 모양이다. 한겨레에 관련기사들이 올라와 있는데(http://www.hani.co.kr/arti/society/religious/208785.html), 도올의 발제문만을 옮겨놓는다. 한동안 관련 기사들을 옮겨놓기도 했었기에 AS차원이다.  

» 성경해석을 둘러싸고 기독교계와 논쟁을 벌여온 도올 김용옥 세명대 석좌교수가 11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 감리교신학대학교 백주년기념관에서 ‘한국교회와 성서‘라는 주제로 신학자들과 공개 토론을 하고 있다.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한겨레(07. 05. 12) 도올 발제문 “종교는 더이상 ‘이해없는 신앙’강요 말라”

‘성서’를 놓고 도올 김용옥 교수와 신학자들 사이에 공개 토론회가 11일 오후 3시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 감신대 백주년기념관 중강당 3시간여에 걸쳐 열렸다. 조직신학회장 이정배 감신대 교수가 사회를 맡고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와 김광식 전 연세대 교수 등 두 원로와 함께 ‘역사적 예수’ 전문 번역가인 김준우 감신대 교수, 구약성서학자인 김은규 성공회대 교수 등 수준급 신학자들이 토론자로 나섰다. 다음은 토론회에 앞서 미리 나눠준 도올의 발제문 전문이다.

한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기독교 이해방식

1. 나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다. 나는 한국인이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민주주의공화국이며 민주시민사회의 모든 원칙을 준수한다. 나는 민주사회의 한 시민이며 개인이다. 내가 말하는 기독교는 매우 단순한 이런 전제들로부터 시작한다. 그것은 대한민국에서 살고있는 사람들의 기독교의 이해방식에 관한 것이다.

개인적이고 내면적이지만 사회적 가치도 거부 안해

2. 그렇다고 나의 기독교에 관한 논의가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나 어떤 국적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나는 종교와 국가의 어떠한 유기적 관계도 거부한다. 종교는 오히려 그러한 국가적 질서로부터 자유로운 인간 개체의 내면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다. 종교는 궁극적으로 사회적이라기보다는 개인적인 것이며, 제도적이라기보다는 내면적인 것이다. 그렇다고 종교가 사회적 가치, 즉 보편적 가치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한 시민의 실존의 선택이나 결단 대상일뿐

3. 나의 기독교에 관한 논의는 매우 단순한 나의 실존적 사실, 즉 내가 민주시민사회의 한 시민이라는 원자적 사실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즉 기독교는 어떤 종족이나 국가의 이해를 대변하는 구속적인 제도가 될 수가 없으며 나 개인의 실존의 선택이나 결단의 대상일 뿐이다. 대한민국이 한 종교의 구원을 얻는다는 말은 있을 수 없으며 오로지 대한민국사람이 구원을 얻을 뿐이다. 그 사람은 개인이며 시민이다. 시민사회는 인간 개인(individual)의 존엄을 지상의 가치로 삼는다. 개인이 신이라는 존재자에게 복속되는 제도적?법적 권위는 전무하다.

기도는 집단적인 게 아니라 나의 실존과 하나님이 만나는 것

4. 종교의 초기 제식행위는 대부분이 집단적인 것이었다. 부족집단의 춤(tribal dance) 같은 것이 가장 보편적인 형태였다. 아프리카의 민속춤이나 우리나라의 영고(迎鼓)·무천(舞天)이 모두 그런 류의 것이다. 그러나 현재 기독교의 핵심적 신앙행위는 기도이다. 기도는 집단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것이며 그것은 나의 내면 속에서 나의 실존과 하나님이 만나는 것이다. 예수도 기도를 가르쳤다. 기독교는 이미 출발부터 개인적인 것이었다.

기독교가 구약적 율법주의 따른다면 유대교의 아류일뿐

5. 기독교는 민족종교가 아니다. 유대민족의 모든 제식(할례, 절기 준수 등)이나 혈통주의적 관습의 강요를 거부하는 데서 출발했으며, 이방선교를 통해 초대교회를 구축했다. 그것은 “예수”라는 신념을 선택한 개인들의 공동체운동이었다. 그리고 기독교는 출발부터 유대민족의 율법주의를 거부했다. 어떠한 종교도 율법주의를 거부하지 않고서는 위대한 종교가 될 수 없다. 공자도 기존의 의례(儀禮)의 권위를 거부한 사람이었고, 불타도 베다의 권위를 거부했다. 기독교가 이제 와서 구약적 율법주의를 직접적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유대교의 아류일 뿐, 기독교가 아니다.

» 성경해석을 둘러싸고 기독교계와 논쟁을 벌여온 도올 김용옥 세명대 석좌교수가 11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 감리교신학대학교 백주년기념관에서 ‘한국교회와 성서‘라는 주제로 신학자들과 공개 토론을 하고 있다. 오른쪽은 한국조직신학회 이정배 교수.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교회는 교리가 아닌 사랑 믿음 소망 생존의 공동체운동

6. 나는 교회를 공동체운동이라고 생각한다. 이 공동체운동의 기본이념은 교리가 아니요, 사랑, 믿음, 소망, 생존과 같은 아주 보편적 정서(emotion)이다. 교회운동의 가장 큰 문제점은 배타성(exclusiveness)이다. 그들이 받아들이는 교리 이외의 어떠한 종교적 신념도 다 배제하고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교리라는 것은 대부분 후대의 역사적 정황 속에서 형성된 것이며 성서적 근거가 박약하다. 이것이 조직신학의 문제점이기도 하다. 그리고 기독교의 배타성도 유대인의 다이애스포라와 유사한 피박해집단의 역사적 특수상황에서 비롯된 아폴로제틱한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것이 곧 기독교의 본질은 아니다.

유교·불교·토속 무교 등 종교신념체계와 공존해야

7. 대한민국 시민으로서 오늘 여기에서의 나의 실존을 생각할 때,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공동체는 기독교라는 교리집단에만 국한될 수는 없다. 유교, 불교, 천도교, 원불교, 토속 서낭당 무교, 이슬람, 여타 다양한 종교신념체계와의 공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들 모두가 인간 내면의 고독(solitude)을 해결해가는 나름대로의 방식을 보유하고 있다. 만약 한국의 기독교가 이러한 공존을 배제하는 독존만을 고집한다면 나는 그러한 기독교에는 일순간도 나의 에너지를 할애할 수 없다.

종교는 나쁜 것이며 악한 것 일 수 있다

» 성경해석을 둘러싸고 기독교계와 논쟁을 벌여온 도올 김용옥 세명대 석좌교수가 11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 감리교신학대학교 백주년기념관에서 '한국교회와 성서'라는 주제로 신학자들과 공개 토론을 하고 있다.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8. 종교는 반드시 좋은 것이라는 아주 단순한 발상이나 강박관념을 우리는 버려야 한다. 종교는 나쁜 것이며 악한 것일 수 있다. 종교는 인간의 모든 야만성의 마지막 보루일 수도 있다. 종교가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더 아름다운 사회일 수가 있다. 단지 우리가 이러한 사회를 꿈꿀 수 없는 이유는 종교를 통하여 형성되어온 인류문명사의 기나긴 관성 때문이다. 그러나 어차피 종교는 인간세를 장악할 수 있는 힘을 상실해가고 있다. 그러한 거대한 추세 속에서 인간세는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가 고려사회를 장악하고 유교가 조선왕조를 장악하고 기독교가 20세기 우리민족의 식민지역사를 장악한 그러한 강력한 장악성을 21세기부터는 기대할 길이 없다.

어느 한 시점에서의 성서 정본 존재하지 않아

9. 기독교는 2천 년 동안 서서히 형성되어온 것이다. 이 말은 곧 어느 한 시점에서의 기독교의 모습이 기독교의 기준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형성되어가고 있을 뿐이다. 1세기의 기독교, 4세기의 기독교, 16세기의 기독교, 21세기의 기독교가 모두 동등한 자격을 지니는 기독교일 뿐이다. 성서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한 시점에서의 성서의 정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4세기말에나 모습을 드러낸 27서체제의 성서나 20세기 한글판개역성경은 동일한 자격을 지니는 신약성서의 다른 판본일 뿐이다. 신학도들이 기준으로 삼는 희랍어성서도 19세기말에나 그 모습이 갖추어진 것이다. 희랍어성서 자체가 2천 년 동안 진화해온 것이다. 현재의 27서체제의 성경이 기독교의 유일한 기준이라는 생각도 매우 유치한 발상이다. 가톨릭은 아직도 성서에 근거가 없는 많은 후대의 추가전승을 교리로 신봉하고 있다.

종교적 합리화의 재소통 거부하면 사기꾼의 횡포

10. 나는 기독교의 “이해”(Understanding)를 위하여 상기의 책 2권을 썼다. 이해를 전제로 하지 않는 “믿음”은 간편하고 또 아름다운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위태롭다. 그러한 믿음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그러한 믿음을 가능케 하는 역사적 환경이 필요하다. 그러나 기독교는 더 이상 핍박받는 종교가 아니다. 그리고 인간의 삶이 기독교를 발생시킨 그러한 절박한 상황의 강도를 계속 유지하는 것도 아니다. 모든 종교는 제식으로부터 출발한다. 반복적 제식은 특별한 감정을 수반하며, 그 감정은 신앙을 유발한다. 그리고 제식은 신화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신화는 합리화된다. 이 합리화단계에서 우리가 말하는 조직적 종교가 발생한다. 그런데 모든 종교적 합리화(Rationalization)는 인간의 체험에 관한 정보를 선택적으로 수용하며 그 정보에 대하여 독특한 권위를 부여한다. 나는 이러한 합리화가 인간의 보편적 이성의 자유로운 지식의 장 속에서 무전제적으로 다시 소통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것을 거부하면 그것은 천박한 독단일 뿐이다. 현대시민사회에서 독단을 중세세기방식의 도그마틱스로서 유지하려는 것은 사기꾼들의 횡포에 지나지 않는다.

기독교 새롭게 활성화시키는 촉발제 역할 자부

» 성경해석을 둘러싸고 기독교계와 논쟁을 벌여온 도올 김용옥 세명대 석좌교수가 11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 감리교신학대학교 백주년기념관에서 ‘한국교회와 성서‘라는 주제로 신학자들과 공개 토론을 하고 있다.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11. 나의 “이해”의 노력은 한국의 기독교를 새롭게 활성화시키는 촉발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자부한다. 21세기의 종교가 “이해없는 신앙”을 강요한다면 그것은 양아치적 권위의식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며, 시민사회의 논리에 의하여 무기력하게 될 뿐이다. 나의 “이해”가 많이 대중에게 읽힐수록 21세기의 한국기독교는 희망이 있다. 성서는 이제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이해의 대상이다. 이해 속에서 우러나오는 믿음만이 21세기를 버텨낼 수 있다.

교회가 신학자의 신념과 언어체계를 콘트롤하면 안돼

12. 나는 기독교에 기웃거리는 이방인이 아니다. 나는 한국기독교의 핵심 인사이더로 살아왔으며 기독교의 가치를 체화한 패밀리 전통 속에서 성장해왔다. 나는 나의 진리탐구가 이 사회의 많은 건강한 기독교운동을 촉발시킬 수 있기를 염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의 신학계가 자유로운 담론의 장을 확보해야 한다. 교회는 신학자들의 신념이나 언어체계를 콘트롤해서는 안된다. 교회라는 조직을 유지하기 위한 현실적 관심이 신학의 자유로운 개화(開花)를 질식시켜서는 아니된다. 모든 교회는 훌륭한 신학자를 양성하는 데 교육장학금으로서 최소한 십일조를 내어야 한다. 그것은 교회 존립의 이유며 양식(良識)이며 의무다. 그리고 교육헌금에 대하여 일체 이념적 클레임을 해서는 아니된다. 한국교계의 생명력은 오직 자격있는 신학자와 수준높은 목회자의 양성에 있다고 나 도올은 굳게 믿는다.

도올 김용옥(2007년 5월 11일 밤 駱閒齋에서 탈고)

07. 05. 12.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kos3378 2007-05-28 12:01   좋아요 0 | URL
좋은 자료 빌려가겠습니다.
 

한 주 걸러서 '작가와 문학사이'를 옮겨놓는다. 이번주는 소설가 편혜영 편이다. 첫 창작집 <아오이가든>(문학과지성사, 2005)을 통해서, 우리문학에서는 좀 낯선 '하드고어 원더래드'의 세계를 펼쳐보인 바 있는 작가이다(첫 창작집의 제사가 '안녕, 시체들'이었다). 개인적으론 그녀의 문장들을 좋아하며(건조한 단문들이다) 그녀의 장편소설이 기대된다(그게 가능한지 궁금하기도 하고). 아래 글에서 평론가는 그녀의 세계를 인간이하(subhuman)의 인간성 탐구로 규정하고 있다. 

경향신문(07. 05. 12) [작가와 문학사이](17)편혜영-인간 이하의 인간성 탐구

여기 죽음의 수용소에서 떼죽음을 당한 유태인과 인간의 식탁에 오르기 위해 도살된 가축이 있다. 대개 학살된 유태인은 연민과 공감의 대상이 되지만 도살된 가축은 그렇지 못하다. 왜 그런가? 아니, 어쩌면 인간의 죽음과 동물의 죽음을 비교한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를 기분 나쁘게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존 쿳시는 ‘엘리자베스 코스텔로’에서 노작가의 말을 빌려 우회적으로 이 두 죽음이 다르지 않음을, 다르지 않아야 함을 주장한다.

흔히 공감(sympathy)이나 감정이입(empathy)을 타자에 대한 이해와 관련된 것으로 보지만 사실은 전적으로 주체의 자기 이해에 불과하다. 나는 나를 연상시키는 존재만을 이해하고 상상할 수 있다. 나와 완전히 다른 존재란 상상의 대상조차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동물의 마음이란 의인화와 동일시의 과정을 거친 이후의 것에 불과하다. 인간은 동물이 아니기 때문에 동물로 존재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결코 알 수 없다. 그런 맥락에서 인간성(humanity)이란 동물의 마음, 혹은 동물됨을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즉 진정한 의미에서의 공감과 감정이입을 불가능하게 하는 속성에 불과한 것이다.



편혜영의 소설에는 바로 그런 인간성이 실종된 존재들, 예컨대 다양한 혐오동물(쥐 바퀴벌레 개구리 구더기 등등)과 썩어가는 시체 혹은 시체나 다름없는 인간들이 쉴 새 없이 등장한다. 그것들은 ‘인간적으로’ 참기 어려운 악취(얼마나 지독했으면 “다락의 쥐들조차 미쳐 날뛰게” 할까?)를 풍기고 ‘인간적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기괴한 모습을 지닌 존재들이다. ‘아오이가든’에서 인간은 고양이를 삼키다가 개구리를 낳다가 급기야 개구리가 된다. 인간과 고양이, 개구리는 뒤섞이면서 인간을 인간 이상이거나 인간 이하가 되게 한다.

그런 지경이니 편혜영의 소설에서 “이성적이고 정당한 것은 내가 아니라 개”(‘만국 박람회’)라는 말이 하나도 어색하지 않다. 또 “우리는 결국 또 하나의 쓰레기가 되어 소각장에 던져질” 운명(‘맨홀’)이라는 말에 충격받지 말기를. 오히려 편혜영 소설에 등장하는 인간들은 “다른 존재가 될 때까지” 변신을 거듭한다. 급기야 인간은 ‘부패하기 쉬운 단백질 덩어리’인 시체의 자리에 서게 된다. 편혜영의 소설은 그렇게 인간의 지위를 단백질의 자리로까지 끌어내린다. 도대체 왜 그러냐고? 역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인간이 아닌 모든 비루한 것들과의 공감을 위한 제스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른다. 아무리 시체되기, 동물되기 ‘놀이’를 한다고 해도 우리는 진짜 시체가 되기 전에는, 진짜 동물이 되기 전에는 시체와 동물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정말로 시체와 동물이 된다면 어떨까? 그러면 우리는 시체와 동물의 마음에 공감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인간은 시체와 동물이 되는 순간 그저 시체와 동물에 불과한 존재가 된다. 게다가 시체와 동물은 말이 없다.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시체와 동물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다. 우리는 나와 다른 존재들, 흔히 타자라고 불리는 존재들을 영원히 알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다시 한번,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혜영은 시체 동물 사물 등과 같은 비인간이 되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이 비인간적 존재들의 총체임을, 즉 잡종적 존재임을 자각하는 것이다. 예컨대 썩어가는 시체의 살조각은 물고기의 밥이 되고 다시 그 물고기는 ‘입맛 다시는 반찬’이 되는 순환구조를 상상해보자(‘시체들’). 그때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인간은 시체와 물고기가 뒤섞인 존재가 된다. 우리 인간이 시체와 물고기의 마음이 될 수는 없지만 우리 안에 시체와 물고기가 있다는 자각에서부터 나와 다른 존재와의 불가능한 공감은 가능해질 것이다. 그러니 편혜영 소설의 불편함과 불쾌감을 ‘인간적인’ 편함과 쾌감으로 바꾸려고 노력하지 말자. 그 ‘비인간적인’ 불편과 불쾌야말로 ‘너’라는 불가능한 허구(fiction)에 이르게 할지도 모르니 말이다.(심진경|문학평론가)

07. 05. 12.

P.S. 캐리커쳐와 사진 속의 작가는 너무도 다른 이미지를 보여준다. 내가 실제로 본 작가는 사진 속 이미지와 같았지만 작가 편혜영의 이미지는 검은 옷을 입은 캐리커처와 가깝다. '편혜영'이란 이름의 두 동거인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 정도이다.

작년 11월 한국일보문학상 후보자 인터뷰('편헤영-정미경'편)를 페이퍼로 옮겨놓은 게 있는데, (링크할 주소가 너무 길어서) 편혜영의 '사육장 쪽으로'에 관한 대목만을 다시 옮겨놓는다. 그녀의 대표작이면서 작년에 발표된 가장 중요한 작품들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편혜영, '사육장 쪽으로'

“천성적으로 착하고 교훈적인 얘기엔 흥미가 없어요. 이질적이고 충격적인 이미지를 좋아하다 보니 그로테스크하고 엽기적인 상상력이 발달한 것 같아요.”

작품과 작가의 실제 이미지가 상충하는 게 드문 일은 아니지만 <사육장 쪽으로>의 편혜영(33)씨는 그 충돌이 유별나다. 얌전하고 부끄럼 많은 성격을 보면 ‘천상 여자’이지만, 그의 작품은 엽기와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들을 통해 독자의 청각과 후각에 극한의 공포를 불어넣는다. “제 소설을 보고 집에 혼자 있을 때 뭐하고 지내는지 궁금하다는 분들이 많은데, 그럴 때마다 ‘쥐 배 가르며 놀아요’라고 농담했어요.(웃음) 제 작품이 저의 인상과 괴리되는 데서 오는 충격효과가 컸던 것 같아요.”

<사육장 쪽으로>는 평화로운 전원주택 마을의 중산층 소시민이 파산 경고장과 마을 사육장 개들의 습격을 동시에 받게 된, 강렬한 위기의 하루를 그린 단편. “처음부터 중산층의 속물성과 깨지기 쉬운 허구를 드러내자는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니고, 이미지를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주제가 생겼어요. 사육되는 개들은 사육장 안에서만 생활하고 삶과 죽음의 방식이 타자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에서 도시인과 비슷하기도 하잖아요.”

편씨는 “전에는 문제를 선명하게 하기 위해 극단으로 이미지를 밀고 나갔는데, 이젠 그런 이미지들에 손이 안 간다”며 요즘의 변화에 대해 말했다. “워낙 강력한 감각이라 중복되면 효과가 체감되게 마련이잖아요. 그래서 주인공의 아기가 개한테 물리는 장면도 묘사를 참았는데, 많은 분들이 여전히 잔인하게 느끼시더라구요. 아, 나는 태생이 끔찍해서 이런 걸 너무 천연덕스럽게 받아들이는 것 아닐까, 자책했어요.”

2000년 등단해 그 이듬해부터 직장생활과 소설쓰기를 병행하고 있는 편씨는 “사무원의 쓸쓸함에 관한 소설은 열 편이라도 쓸 수 있다”며 웃었다(*그런 쓸쓸함에 관한 소설도 읽고 싶다, 사실은). “사실 소설이라는 게 노동으로선 참 형편없는 일이거든요. 하지만 소설을 쓰는 그 시간만큼은 내가 유일하게 나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참 매혹적이에요. 사회적 인간으로 살다 보면 남들 눈에 보이는 내가 진짜 나인지 아닌지 헷갈릴 때가 많은데, 소설을 쓸 때만은 그런 고민이 없으니까요.”

◆ 심사평: 삶의 부조리 감각적 형상화 탁월
<사육장 쪽으로>는 우리 소설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야생의 상상력이 그로테스크하게 빛나는 작품이다. 도시 인근의 전원주택단지를 지배하고 있는 삶의 부조리를 이 소설만큼 감각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소설도 드물 것이다. 어디에 있는지조차 짐작할 수 없는 사육장의 개 짖는 소리로 청각화한 이 야만적인 공포는 일견 평화로워 보이는 소시민의 삶을 위협하는 삶의 어두운 부분에 대한 놀라운 메타포라고 할 만하다.

편혜영이 이런 종류의 알레고리에 능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일상적 삶을 특유의 판타지로 추상화하는 알레고리 작가로서의 편혜영의 독특한 위상을 부인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첫 소설집 <아오이 가든>은 역겹고 끔찍하며 엽기적인 상상력의 창고와도 같았다.

그러나 <사육장 쪽으로>에 이르게 되면 이 작가가 그 기괴한 악몽 아래 하나의 현실적인 밑그림을 살짝 배치해 둠으로써 독자들에게 해몽의 실마리를 제공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현실과 판타지가 절묘하게 섞여있다고 할까. 파산 직전에 이른 가장이 치매에 걸린 노모와 개에게 물어뜯긴 어린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찾아 헤매는 이 소설의 마지막은 우리의 현실이 이 끔찍한 악몽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있는지 묻고 있는 듯하다. 선혈이 뚝뚝 떨어지는 상상력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문학평론가 신수정)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