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오늘에 연재되고 있는 '강유원의 Book소리' 중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을 옮겨놓는다. 최근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1>(리젬, 2007)이 부분 번역되었고, 믿을 만한 번역서인가 궁금했었는데 우연히 이 번역서의 고유명사 표기가 신뢰할 만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관행'과 '상식'이 절대적인 건 아니지만 학문적 소통을 위해서는 존중될 필요가 있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그렇다고 '오디세이아'를 '오뒷세이아'로만 표기해야 한다는 주장에까지 내가 공감하는 것은 아니다).
미디어오늘(07. 05. 11)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
‘서양철학은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는 화이트헤드의 말을 들으면 서양 학문에 끼친 플라톤의 영향이 엄청나리라 짐작할 수 있지만 따지고 보면 그 영향이 아리스토텔레스만은 못할 것이다. 델로스 동맹의 맹주였다고는 하나 아테네는 작은 폴리스였고, 플라톤은 그곳의 철학자였다. 반면, 알렉산드로스의 스승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제자이기는 했어도 사실상 제국의 철학자였던 만큼 학문의 범위도 플라톤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래서인지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력은 서양의 중세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양 학문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력을 발견할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 중의 하나는 단테의 서사시 <신곡>이다. 중세 말에서 르네상스로 넘어오는 시기에 쓰여진 이 서사시에는 고대로부터 물려받은 많은 요소들이 녹아들어 있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로 알려진 호메로스의 서사시 전통,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의 전통이 들어가 있는가 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바탕으로 중세 신학의 결정판을 만들어낸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도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신곡>을 읽기 위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조금이라도 이해해야 하며, 이쯤 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 전공자의 기본 지식이 아니라 서양학문을 하는 모든 이의 기본이라는 위치에 자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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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현재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신곡> 번역본은 여러 판이 있다. 대구가톨릭대의 김운찬 교수는 ‘교수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한형곤 번역의 <신곡>이 권장할 만하지만 더욱 충실한 새로운 번역이 필요하다고 진단하고 있다. 사실 <신곡> 번역은 역자인 한형곤 교수도 스스로 말하고 있듯이 본문은 물론이고 “주석이 본문의 70% 이상”이나 되는 지난한 작업이다. 그런데 그 주석 중에 너무나 당연한 것에 대한 실수가 있으면 다른 주석까지도 빛이 바래기 마련이다. <신곡> 지옥편 제11곡에 이런 구절이 있다. “또한 네가 물리학을 잘 관찰한다면.”이 구절에는 주석이 달려있는데, 그것은 이러하다. “물리학.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Physica> 제2권. ‘예술은 자연을 모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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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불어판을 중역해서 나온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도서출판 리젬) 번역본에서도 유사한 사례가 있었다. 그 책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 몇몇의 명칭이 다음과 같이 쓰였다. ‘대도덕론’이 ‘위대한 도덕론’으로, ‘자연학’이 ‘물리학’으로, ‘소피스트적 논박’이 ‘궤변적 반론’으로, ‘분석론 전서’가 ‘제1분석법’으로, ‘분석론 후서’가 ‘제2분석법’으로 표기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전문적으로 읽을 필요도 없이, 철학관련 기본 도서를 읽어보기만 해도 ‘물리학’이 아니라 ‘자연학’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앞서도 말했듯이 철학의 상식이 아니라 서양학문의 상식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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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진은 최근 저작 <고전은 서사시다>(안티쿠스)에서 헤시오도스의 ‘일들과 날들’에 관한 황당한 번역어들을 발견한 사례를 적어두고 있기도 하다. “ ‘일들과 날들’이라는 제목은… 희랍어 제목 ‘Erga kai Hemerai’를 그대로 옮긴 것이다. 우리식 제목을 잡자면 ‘농사법과 택일법’ 정도라고나 할까?…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쓰여온 제목은 ‘노동과 나날’인데… 좀더 놀라운 제목들로는 ‘사업과 시대’, ‘작품과 생애’ 따위가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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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을 놓고 인문학의 영역에서 연구하는 모든 학자들을 대상으로 서양학의 기본 저작들, 이를테면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등의 저작 명칭에 관한 간단한 오리엔테이션이라도 실시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학자여서 더 이상 배울 게 없으니 참여할 수 없다고 버틴다면, 출판사 편집자들에게라도 그러한 교육을 좀 할 수는 없을까. ‘한국출판인회의’나 ‘대한출판문화협회’에서 한번쯤 이런 기회를 마련했으면 싶다. 독자들에게 아리스토텔레스에게도 ‘물리학’이 있었다고 우길 수는 없지 않은가.
07. 05. 13.
P.S. 역자 나름의 변이 없지는 않으나 '피지카(Physica)'를 '물리학'이라고 옮기는 수준이면 독자를 설득하기엔 역부족이 아닌가 싶다. 고유명사 표기 문제에 대해서는 이전에 두어 차례 페이퍼를 띄운 적이 있다. 최근에 읽은 못마땅한 책들에 대해서는 나중에 시간을 내어 다시 다룰 작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