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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 경제학 (반양장)
누리엘 루비니 & 스티븐 미흠 지음, 허익준 옮김 / 청림출판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오렌지 수확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이 있다. 평소 오렌지 거래만으로 사업을 유지하던 그는 더 많은 수익을 낼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궁리하던 차에 주스를 만들기로 했다. 오렌지 100상자를 유통, 가공시켜 오렌지 주스 1000병을 만들었다. 때마침 식약청에서 원재료 오렌지 100상자중 '한 박스'가 상했으니 유통시킨 모든 주스를 폐기시키라 권고한다. 제조업자는 이미 주스를 만들기 위해 원자재에 유통, 가공하는데 필요한 생산설비와 포장재 등을 투입한 후라 손실이 극심해 졌다. 결국, 10배의 수익을 남기려던 제조업자의 욕심은 부패한 한 박스의 오렌지 때문에 실패한 것이다. '오렌지 한 상자의 비극'의 예는 서브프라임 모기지사태의 본질을 간명하게 설명한다. "기묘하고 복잡하며 유동성도 부족한 파생상품을 통해 잘게 쪼개진 신용위험"은 시장의 공분산을 높이고 국지적 리스크나 노이즈의 출현이 곧바로 시스템의 변동성의 증대로 귀결된다. 예고된 파국인 셈이다.
경제위기의 본질에 대한 루비니의 설명을 들어보자. "투자자들이 호황기에 한몫을 쥐기 위해 과다한 빚을 지게 되면 거품이 이리저리 퍼져나간다. 신용대출이 쉽게 이루어지고 사람들은 너도나도 빌린 돈으로 투자를 감행한다. 소비는 늘고 기업은 이익을 내면서 개인과 기업은 더 쉽게 돈을 빌려 더 쉽게 쓴다. 악순환이 계속된다. 하지만 거품자산에 대한 공급이 수요를 초과하게 되면 거품은 꺼지고 일시에 재앙이 닥친다." 위기의 근원은 2000년대 초부터 시작된다. 주택담보대출, 즉 모기지(mortgage)업체들이 부동산 호황기를 이용해 돈 갚을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에게도 무리하게 대출을 해주기 시작한다. 결국 2005년부터 부동산 경기가 위축되면서 대출상환부담이 증가하자 가장 먼저 모기지 업체가 어려워 졌고, 서브프라임 모기지 연체율이 상승하면서 주택담보부증권(MBS)의 가격이 하락하게 된 것이다. 문제는 MBS에 기반한 다양한 파생상품들이 복잡하게 얽히고 설켜 한 곳에서 문제가 터지면 도미노처럼 채권 부실이 급속하게 번져나갈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데 있다. 각 금융기관이 발행한 채권의 부실은 이 채권을 보증해 준 '모노라인'(채권보증회사) 들을 어려움에 빠뜨렸고, 전 세계로 팔려나간 주택관련 파생상품(CDO, CDS)의 대규모 손실 발생이 글로벌 경기침체란 위기 증폭의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 되어 있다." 파생상품의 기초자산인 '서브프라임 모기지'란 한 박스의 썩은 오렌지는 리스크를 제어한다는 '선의'로 이리저리 쪼개고 섞여 전 세계에 취약성을 퍼뜨렸다.
루비니는 "금융백화점 모델은 이미 실패했다'고 주장하며 IB(투자은행)모델의 종언과 CB(상업은행)으로의 이행을 촉구한다. 은행의 본원적 역할인 예대마진에 근거한 자금중개기능의 복원이 절실하다는 것이다. 과급한 탐욕은 '수익모델의 다변화'로 포장되고, 이어서 금융업의 발전을 위해 '국가의 축소'란 주장으로 이어진다. 금융 위기의 진원지인 월가의 거대자본의 '고삐풀린 질주'를 견제해야 한다는 인식은 향후 사태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강력한 금융 규제 개혁을 필요로 한다. '감독기능의 정비'란 당위성의 실현은 거대자본의 압력과 전방위적인 로비로 '자기자본투자'라는 얼마든지 편법적 운용이 가능한 형식적인 미봉책으로 종결되었다. '손실의 국유화 이익의 사유화'란 언설을 이번 금융위기 해소과정의 근본 모순을 함축한다. 금융시스템의 감독-감시 기능의 부재로 야기된 '시장의 실패'는 방만한 경영에 대한 책임론을 부각시켰다. 하지만 금융권의 손실은 '공적자금'의 형태로 국민에게 전가 되었을뿐, 월가는 여전히 세금으로 보너스 잔치를 벌이고 있다.
그린스펀 집권기의 저금리 기조와 닷컴버블로 형성된 글로벌 유동성은 미국 주택시장의 거품을 잉태한 배경이다. 자본주의의 역사적 전개과정이 '버블을 통한 버블의 극복'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더 이상 금리를 낮출 수 없는 상황에서 미연준의 양적완화는 예정된 수순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연준의 QE2가 금융권의 부실자산 매집에 소진 됨에따라 신용확대가 정체되고 장기금리는 오히려 상승중이다. '미국의 미래' 일본을 보면 국채매입을 통한 금융권의 유동성 공급이 장기금리를 떨어뜨려 대출-신용을 증가 시킨 다기보단 그 효과가 미미하고, 오히려 정부의 포지션을 예상한 스마트 머니들의 배만 채워줄 가능성이 높다. 그러고 보면 헬리콥터 벤의 폭탄돌리기의 귀결은 이미 예고된 것이 아닐까? 버냉키의 QE3 언급은 시장의 학습효과를 자극하고, 작금의 유동성 장세를 지지하는 모멘텀으로 기능중이다. 연일 영국, 아일랜드의 CDS는 폭락중이고, 중국의 긴축기조는 달러캐리트레이드의 이머징 마켓으로의 유입 기조가 당분간 지속될 거라는 시그널이다. 문제는 미국의 양적완화 기조가 글로벌 시장에 인플레를 유발시키고, 각국 정부의 환율시장개입을 정당화시킬 알리바이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단 점이다. 외환시장의 변동성에 취약하고, 감독체계가 미흡한 '한국' 역시 예외가 될 수 없음을 시사한다. "금융위기란 일반적으로 비슷한 경로를 따라 되풀이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경제와 금융상의 취약점이 쌓이다 보면 결국에는 정점을 찍게된다. 모든 혼란은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며, 위기상황 역시 습관의 산물이다." 투기자본의 팽창으로 자산시장의 거품이 이머징 마켓으로 유입되는 이 때에 루비니의 지적을 간과해선 안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