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경향신문에 실린 해외칼럼을 읽고서야 주중에 러시아 총리가 교체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언론의 표현으론 푸틴의 '내각 물갈이'인데, 알다시피 내년 봄 대선을 염두에 둔 '포석'인지라 빅뉴스가 아닐 수 없다. 새로 임명된 Zubkov(주브코프, 주프코프, 줍코프, 주코프) 총리가 대선에 참여할 뜻이 있음을 내비치면서 포스트-푸틴에 대한 전망은 다시 혼전 국면으로 접어든 듯하다(인명 표기가 제각각으로 혼란스러운 것은 새로 바뀐 러시아어 표기법이 익숙한 예전의 표기법과 충돌하고 있어서이다). 국내 언론의 관련기사와 함께 니나 흐루시초바의 논평을 원문과 함께 옮겨놓는다(데일리 타임즈에 실린 원문은 http://www.dailytimes.com.pk/default.asp?page=2007%5C09%5C15%5Cstory_15-9-2007_pg3_3). 필자가 '흐르시쵸바'라고 돼 있지만 기사에서도 언급되고 있는 '흐루시초프'의 손녀이기도 하므로 '흐루시초바'가 맞는 표기이겠다.

한겨레(07. 09. 14) 주코프, ‘총리’ 이어 이참에 ‘대권’까지?

러시아의 차기 대권 후보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분석됐던 빅토르 주코프(사진) 총리 지명자가 13일(현지시각) 대권 도전 의사를 내비치는 듯한 발언을 했다. 이에 따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후계자 구도에 주코프 지명자가 새 변수로 등장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지금까지는 세르게이 이바노프 제1부총리와 드미트리 메드베제프 제1부총리가 가장 강력한 대선 후보로 꼽혔다.

주코프는 이날 두마(하원) 정당 지도자들과 면담 뒤 대선에 참여할 가능성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총리로 재직하는 동안 업적을 쌓는다면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고 러시아 언론들이 전했다. 드미프리 페스코프 크레믈(크렘린) 대변인은 “주코프 지명자가 대선에 출마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말의 뉘앙스를 잘 살펴야 할 것”이라며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

그러나 <모스크바타임스> <러시아투데이> 등 현지 언론들은 1999~2000년 초 사이 푸틴의 크레믈 입성 과정과 비교하면서 주코프의 대선 출마 가능성에 점점 무게를 두는 분위기로 바뀌고 있다. 우선 그가 정치인이라기보다는 ‘전문관료’ 출신이라는 약점을 갖고 있지만, 푸틴도 엇비슷했다. 보리스 옐친 전 대통령이 99년 8월 푸틴을 총리로 임명할 당시, 푸틴은 국가안보위원회(KGB) 출신의 전문관료였다.

또 주코프의 대중적 인지도가 낮지만 푸틴 대통령도 잘 알려진 얼굴이 아니었다. 정치 분석가인 오르로프는 “푸틴이 공개적으로 그를 지지하고, 아울러 깐깐한 금융감시자라는 평판을 갖고 있는 그가 반부패 운동을 펼친다면 대중적 지지를 획득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물론 주코프의 대선 출마를 점치는 전문가들은 푸틴의 ‘2012년 컴백 시나리오’를 굳게 믿고 있는 듯하다. 주코프가 65살로 고령이고 연임을 노릴만한 정치적 야망이 없는 인물인 점을 고려해 푸틴이 4년짜리 대통령으로 내세우고 있다는 것이다.(이용인 기자)

조선일보(07. 09. 14) 푸틴 후계자 누구냐

블라디미르 푸틴(Putin) 러시아 대통령으로부터 12일 새 총리로 지명된 빅토르 주브코프(Zubkov)가 차기 대권 도전을 시사해 파장이 일고 있다. 13일 아침 국가두마(하원) 의원들과의 상견례로 활동을 시작한 주브코프 지명자는 내년 대통령 선거 출마 여부와 관련, “총리로서 성공한다면 그런(대선 출마) 시나리오를 배제하지 않겠다”며 대권 욕심을 내비쳤다.

지금까지는 주브코프가 내년 5월 푸틴 대통령 퇴임까지 성공적 정권교체를 위한 ‘관리자’가 될 것이라는 의견이 많다. 부패와의 전쟁 등 국정과제를 마무리해야 하는 푸틴 대통령에게 재정감시국장 출신 주브코프가 총리에 적임이라는 평가 때문이다. 정치분석가 예브게니 나도르신은 “조세전문가인 주브코프는 푸틴의 권력 이양을 위한 실무형 총리”라고 했다.

하지만 그가 푸틴 후계자로 급부상할 수 있다는 견해도 적지 않다. 두 가지 이유에서다. 하나는 1999년 8월 옐친 정부 당시 연방보안국장이던 푸틴 대통령이 총리로 임명되고 12월 대통령 후보가 됐던 경험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푸틴과 주브코프 지명자의 친분이다. 1991~93년 푸틴이 상트페테르부르크시 대외관계위원장이었을 때 주브코프는 부위원장이었지만 사제(師弟)지간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도 주브코프는 푸틴을 러시아어 존칭 ‘비(Βы·귀하)’ 대신 ‘티(Τы·너)’라고 부를 만큼, 실세라는 것이다.

러시아 정국에 주브코프 변수가 등장하면서 아직 베일에 싸인 푸틴 대통령의 후계구도는 한층 불투명해졌다는 지적이다. ‘빅(Big)2’인 세르게이 이바노프(Ivanov)와 드미트리 메드베데프(Medvedev) 등 두 명의 제1부총리가 지지율 30%대로 앞서 있다. 드미트리 페스코프(Peskov) 크렘린 대변인이 8월 말 후계 가능성을 지목한 세르게이 미로노프(Mironov) 상원의장, 보리스 그리즐로프(Gryzlov) 하원의장 등 두 명의 의회 수장(首長)도 후보다. 여기에 주브코프와 야쿠닌(Yakunin) 철도공사 사장 등이 뒤를 쫓는 형국이다.(권경복 특파원)

경향신문(07. 09. 15) [해외칼럼]크렘린의 의자 빼앗기 게임

그 시기가 다시 왔다. ‘의자 빼앗기 게임’처럼 총리가 바뀌면서 러시아의 예비 선거철이 시작됐다. 가장 마지막에 총리직에 앉는 사람이 아마도 러시아의 차기 대통령이 될 것이다. 보리스 옐친은 대통령 임기가 끝나갈 때 적어도 6명의 총리를 갈아 치웠다. 러시아의 새로운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뿐 아니라, 옐친 패밀리와 재임기간 동안 그가 축적한 재산의 안전을 보장할 사람을 찾기 위해서였다. 가장 마지막에 총리직에 앉은 사람은 물론 블라디미르 푸틴이다.

이제는 푸틴의 차례다. 미하일 프랏코프 총리를 해임시키고 재임 기간 내내 자신에게 봉사했던 내각을 해산시켰다. 12월에 열리는 국회의원 선거와 내년 3월의 대통령 선거를 준비하기 위해서다.
1999년 옐친은 FSB(옛 KGB)의 수장으로 무명이었던 푸틴을 선택했다. 푸틴도 옐친과 마찬가지로 빅토르 주프코프 연방 재정감시국장을 총리로 끌어 올렸다.

이런 유사성에도 두 사람의 선택에 숨어있는 이유는 달라 보인다. 옐친이 푸틴을 선택한 이유는 그가 전직 KGB 스파이였지만 심장은 민주주의자라는 믿음이 바탕이 됐다. 푸틴은 공산주의가 무너진 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민주 시장인 아타톨리 쇼브차크 밑에서 일했다.

KGB는 상황을 역전시키는 것으로 유명하다. 푸틴이 베레조프스키를 국제적 악인으로 만들고, 미디어 모스트 그룹 회장이었던 블라디미르 구신스키를 추방하고, 석유 재벌인 미하일 호도로코프스키를 감옥에 집어 넣었을 때 옐친과 베레조프스키를 빼곤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푸틴이 총리직을 놓고 벌이는 게임은 누가 대통령이 돼도 안전을 보장받고 싶다는 욕망 때문이 아니다. 그는 크렘린을 떠나면 추방되거나 무덤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스탈린이 죽은 레닌을 격하시켰고, 흐루시초프는 스탈린을 비난했다. 브레즈네프는 흐루시초프를 자신의 별장으로 추방했다. 고르바초프는 체르넨코를 매장했다. 유독 옐친만 달랐다. 옐친은 고르바초프를 싫어했지만 점잖게 대했다. 물론 푸틴도 은퇴한 옐친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푸틴은 단순히 옐친을 무시했다.

주프코프의 지명 전에 언론은 푸틴의 대통령직을 승계할 차기 총리로 유력한 대선후보로 꼽히는 세르게이 이바노프 현 부총리가 될 것으로 예상했다. 강력한 대통령으로 남기를 바라는 푸틴이 이바노프를 임명했다면 권력은 이미 누수가 시작될 것이다. 프랏코프는 사임 이유를 밝히며 이 문제를 제대로 짚었다. 주프코프를 임명한 것은 계속해서 러시아의 절대권력을 쥐고 싶은 푸틴의 의중을 가능케 한다는 것이다.

주프코프의 전직인 연방 재정감시국장직은 필요하면 제2의 베레조프스키 등을 탄생시키며 잠재적인 모든 적들과 경쟁자를 감시할 수 있는 정보라는 재산을 끌어올 수 있게 해준다. 유일한 관심은 주프코프나 다른 총리가 성공적으로 ‘차르(황제) 대통령’을 그의 경쟁자들이 행했던 것처럼 실각시키는 데 성공할지 여부다.(니나 흐르시쵸바 / 뉴욕 뉴스쿨 국제관계학)

Kremlin Musical Chairs

It’s that time again - Russia’s pre-election season when prime ministers are changed as in a game of musical chairs.The last one seated, it is supposed, will become Russia’s next president.

As the end of his rule approached, Boris Yeltsin went through at least a half-dozen prime ministers, looking for the one who would ensure the security not only of Russia’s new democracy and market economy, but also of his "family" and the wealth that it had accumulated during his rule.The last man seated then was, of course, Vladimir Putin.

Now it is Putin’s turn to call the tune, dismissing Mikhail Fradkov and dissolving the government that had served him throughout his second term in order to prepare for the parliamentary elections looming in December and the presidential ballot in March 2008.In 1999, Yeltsin picked Putin, who was then the little-known head of the FSB (formerly the KGB).Putin chose to elevate the equally mysterious Victor Zubkov, head of the Federal Financial Monitoring Service (also known as the "finance espionage" agency).

Despite that similarity, the reasoning behind these choices appears to be somewhat different.Yeltsin’s choice of Putin - encouraged, ironically, by Boris Berezovsky, the prominent Russian oligarch and Yeltsin advisor who is now exiled in London as Putin’s mortal enemy - was based on his belief that the quiet apparatchik, even if a former KGB spy, was a democrat at heart.After all, Putin had been a proteg? of Anatoly Sobchak, the liberal mayor of St.Petersburg as communism collapsed.

A security services insider, Putin was seen as well placed to protect Yeltsin and his oligarchic allies.Indeed, Berezovsky intended to continue ruling the country from behind the scenes, first as Yeltsin’s health failed in the final months of his presidency, and then by controlling the successor he had helped to choose.

In Russia, however, the KGB is famous for turning the tables in any struggle with the Kremlin apparat.So no one but Yeltsin and Berezovsky was surprised when Putin, their supposed marionette, began pulling the strings.And pull them he did, turning Berezovsky into an international villain, exiling former media mogul Vladimir Gusinsky, jailing the oil magnate Mikhail Khodorkovsky, and eventually imposing a new authoritarian regime behind the fa?ade of Yeltsin’s democratic institutions.

Putin’s own game of prime ministerial "musical chairs" does not reflect a desire to secure for himself a quiet position behind the scenes while someone else rules, for he knows all too well that the path from the Kremlin leads only to inner exile and the grave.Stalin replaced the dying Lenin, Khrushchev denounced Stalin, Brezhnev banished Khrushchev to his dacha, and Gorbachev buried Chernenko.

Only Yeltsin did things differently.He disliked his predecessor, Mikhail Gorbachev, as much his predecessors disliked their predecessors.But all the same he treated Gorbachev in a more decent manner because Yeltsin fundamentally believed in democracy.So he left Gorbachev a private life that could also be lived in public.Putin, of course, did not accost the retired Yeltsin, but he didn’t have to.He simply ignored him while reversing his achievements in building a free Russia.

Before Zubkov’s nomination, reports swirled that the next prime minister would become Putin’s presidential successor, with Sergei Ivanov, a current deputy prime minister, dubbed the most likely candidate.But Ivanov, who is perceived as "strong," would provide unwelcome competition to Putin, who, after all, remains a "strong" president.Had he anointed Ivanov now, Putin’s power would already begin seeping away.

The outgoing Fradkov, surprisingly, put the matter best when he explained why he had resigned: with elections approaching, Putin needed a free hand.So Zubkov’s nomination allows Putin to continue to keep his cards - and thus ultimate power in Russia - close to his chest.

Of course, Zubkov will continue Fradkov’s "Yes, whatever you say Mr.President" management style.Moreover, his former position as head of the Federal Financial Monitoring Service will allow him to draw on a wealth of information to keep tabs on all possible enemies and competitors, perhaps turning them into new model Berezovsky’s, Gusinsky’s and Khodorkovsky’s, if necessary.

The only question now is whether Zubkov, or his successor, will eventually succeed in turning Czar Vladimir into the same sort of non-person that Putin’s rivals have become.

07. 0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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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술 2007-09-17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Zubkov. 실재 러시아말소리에 가장 가깝게 한국말로 표기하면 어떻게 되나요?

로쟈 2007-09-17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줍코프'일 겁니다. 뭐 이것도 더 들어가면 '줍꼬프'라고 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올 테지만...
 

계간 <세계의문학> 가을호는 전호에 이어서 '포스트 이후의 포스트'란 기획특집을 마련하고 있다. 서점에서 훑어만 보고 읽을 시간을 내지 못했는데, 담비에 리뷰 기사가 올라왔기에 옮겨놓는다(http://www.dambee.net/news/read.php?section=MAIN&rsec=MAIN&idxno=6070). '패스트-리딩'만 해서는 곤란하겠지만, 워낙에 다들 바쁘잖은가. 또 리뷰라도 챙겨두면 좋지 아니한가.

담비(07. 09. 17) 세계의문학 가을호'포스트 이후의 포스트' 

‘세계의 문학’ 2007 가을호가 ‘포스트 이후의 포스트’의 두 번째 순서에서 ‘대륙의 동쪽에서 전개된 포스트 이론’을 다루고 있다. 다섯 명의 필자가 러시아, 일본, 중국, 홍콩, 한국에서 일어나는 포스트 현상에 대해 논의를 펼쳤다. 변현태의 ‘포스트 소비에트 문예학과 바흐친의 유산’, 황호덕의 ‘무상無常의 시간과 구제救濟의 시간’, 서광덕의 ‘1990년대 이후 중국 사상계의 지형도’, 유영하의 ‘방법으로서의 홍콩’, 허윤진의 ‘헌책방의 문턱’이 그것이다.

변현태는 1991년 소련이 붕괴하고 독립국가연합의 한 공화국으로 러시아가 등장한 이후, 이른바 ‘포스트 소비에트 시대’ 문예학의 향방을 추적한다. 그 향방은 두 가지 입장으로 대별되는데, 소련 이전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의 러시아의 문학적 유산을 상속받아 포스트 소비에트적 가치를 발견하고자 하는 입장과, 서유럽 또는 서유럽과 러시아의 접점에서 포스트 소비에트적 가치를 발견하고자 하는 입장이 그것이다. 이버지-인문학자 대 그 가치를 일단 파괴하고 보자는 아들-니힐리스트의 대립, 슬라브주의 대 서구주의의 대립으로 표현될 수도 있는 둘의 긴장관계가 현금의 어떤 풍요로운 이론적 생산물을 쏟아내고 있는지 그려낸다.

황호덕의 글은 어떤 의미에서 ‘고바야시 히데오에 대한 비판’이라 할 수 있다. 왜 이 일본 비평가가 쟁점이 되는가? 대동아전쟁을 비롯한 역사에 대한 현대 일본인의 태도의 근본을 요약해주는 것이 고바야시의 태도이기 때문이다. 역사를 객관적 사실에서 독립시켜, 주관의 회상을 통해 주어지는 ‘마음’의 영역으로 축소시키고, 이 ‘마음’ 속에서 탈가치적인 ‘죽은 자 일반의 무상함’을 객관적 역사 대신 떠올리는 데서 야스쿠니 참배를 비롯해 역사에 면죄부를 주는 현금의 일본인의 사고방식이 가능했다. 이런 비판적 논의를 배경으로 겐겐다이시소(포스트모더니즘) 이후 일본 지성계 최대 쟁점 중 하나인 ‘21세기의 매니페스토·탈패러사이트 내셔널리즘’을 통해 표현된 국민국가에 환원되지 않는 형태의 정치론 등을 살핀다.

서광덕의 글은 중국의 개혁 정책이 성공의 배후에서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한 1990년대 이후 사상의 전개과정을 보여준다. 경제는 비약적으로 발전했지만, 그 과정에서 야기된 도시와 농촌, 지역간의 대립, 계층간의 분화, 제도의 부패 그리고 환경파괴 등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중국 지성계의 다양한 입장을 명료하게 소개하고 있다. 논자의 흥미로운 통찰은, 1990년대 중반 이후 중국의 사상계가 매우 다양한 입장 차이를 보여주지만, ‘모두 중화전통에 대한 회귀를 논의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대중매체가 고전 강독의 스타 만들기에 열중하는 것도 이런 회귀의 화두와 관련이 없지 않다. 논자가 우려하듯 이런 중화성 지향이 정치적 장체서 민족주의와 결합해 새로운 인종주의를 초래하지 않을까? 이런 중화주의에서 예외는 왕후이 정도의 지식인이라고 논자는 말한다. 이런 중국의 모습에 대해 한 일본인 중국 연구자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중국이 사회주의와 자유주의의 중간이 아니라 사회주의와 자유주의, 두 방향을 모두 충분히 열어놓는 길, 가장 요원하게 보일지라도 최고의 공정성을 가져올 수 있는 이 길을 걸어야 한다.” 중국도 중국을 모르는 이 시점에서, 어떻게 보면 매우 계획적인 사회통제를 통해 가능한 이런 주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하다.

유영하의 글은 올해로 반환 10주년을 맞은 홍콩의 현주소를 찾는다. 1967년 문화대혁명의 영향으로 좌파 주도의 대규모 폭동이 발생한 이래 영국은 홍콩의 탈중국화를 일관되게 추구했고, 결과적으로 ‘홍콩은 조국이 없다’는 점이 홍콩인들에게 입력됐다. 이제 홍콩인은 외국인과 비교하면 중국인이고, 대륙의 중국인과 비교하면 외국인이다. 이 글은 중국 반환 이후 지난 10년간 홍콩인들이 후식민주의 시대에 어떻게 외국과 중국 사이의, 또는 ‘식민자와 식민자 사이의’ 이중 소외로부터 정체성 찾기에 골몰하는지 추적한다. 그것은 저우레이가 홍콩 후식민의 장래를 ‘이중불가능’으로 정리한 데서 나타난다. 홍콩은 영국 식민주의에 굴복하지 않았듯이 중국 국적주의의 재림에도 굴복하지 않을 거라는 것이다. 하지만 각 분야에 있어서 중국보다 이미 선진적인 홍콩이 자기보다 뒤진 중국으로부터 온갖 정치적, 문화적 간섭을 받아야 하는 사태는 매우 심한 사회적 스트레스로 폭발하거나 아니면 사회 전체의 퇴행과 무기력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싶다.

허윤진의 글은 주로 여러 평론가들의 글을 읽어가며 한국 문학에서 1980년대와 오늘날의 거리를 가늠하고 있다. 이 글의 특이한 점은 ‘우리’라는 화자 외에 ‘나’라는 화자가 등장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나’라는 화자는 거기에 독자가 밀착할 때는 가장 강력한 보편적 언어를 쏟아내며, 그렇지 않을 때는 제한된 개인의 언어를 쏟아내는 특수성을 지닌다. 논자는 이 렌즈 속에서 독자들에게 1980년대 또는 그 유산과의 거리 가늠을 제안한다.(리뷰팀)

07. 0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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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시집들' 홍보를 쉼없이 하게 됐다. 황병승의 신작은 그보다 먼저 소개한 적이 있으므로 이제 남은 시인은 김행숙, 송승환 두 시인 정도이다. <이별의 능력>(문학과지성사, 2007)은 <사춘기>(문학과지성사, 2003)에 이은 김행숙의 두번째 시집인데, 얼핏 타이틀만으로는 역시나 여성시인인 조은의 오래전 시집인 <사랑의 위력으로>(민음사, 1991)를 떠올리게 했다. 무의식의 범주이긴 하나 모종의 '힘'에 대한 욕망이 두 여성시인의 밑자리에 놓여 있는 게 아닌가란 생각을 잠시 했다. 다음주 주말에 발표된다는 올해 미당 문학상 후보로도 올라가 있어서 관련기사를 참고자료 삼아 옮겨놓는다. 그 아래 이어지는 건 드물게 눈에 띈 <이별의 능력>의 소개기사이다.

중앙일보(07. 08. 11) 미당·황순원 문학상 최종 후보작 지상중계 ⑤김행숙

시인이 가장 싫어하는 말이지만 어쩔 수 없다. 김행숙은 어렵다. 올해 미당문학상 최종 후보 열 명 중에서 가장 어렵고, 당대 한국 시단을 통틀어서도 가장 난해한 시인 중 하나로 꼽힌다. 그러나 시인은 정작 “억울하다”고 항변한다. 시인이 들려준 일화 한 토막이다.

“등단하자마자 시 몇 편을 발표했어요. 어느 평론가가 비평을 했는데 전체 맥락은 호의적이었어요. 그런데 ‘김행숙은 어렵지만 어쩌고…’ 하는 대목이 있었어요. 그걸 보고 꼬박 사흘을 울었어요.”
 
“왜요?”
 
“벽이…, 너무 강고한 벽이 내 앞을 가로막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김행숙의 시는 어렵지만, 시어 자체는 어렵지 않다. 사전에서나 봤음직한 희귀 어휘를 찾아내지도 않고 신조어 따위는 만들어낼 생각도 없다. 매니어만이 해독 가능한 은어도 구사하지 않으며 비어나 욕설 따위를 동원하지도 않는다.

앞서 적은 ‘눈사람’ 역시 그러하다. 시인은 초등학생 수준의 단어만으로 한 편의 시를 완성했다. 그러나 해석은 결코 간단치 않다. 예컨대 ‘눈사람이 작아졌다! 엄마가 죽었다.’란 시구를 보자. ‘눈사람이 작아졌다’란 사건과 ‘엄마가 죽었다’란 사건이 병렬 배치됐다. 그러면 두 사건 사이에 인과 관계가 동반해야 아구가 맞는다. 설명이 없으면 암시라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두 사건은 그저 나란히 놓여있을 뿐이다. 무엇보다 마지막 두 행! 도대체 어떻게 시장을 가야 ‘사소하게 시장을 가는’ 것인가.
 
김행숙이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어와 시어가 만나는 자리, 시어와 시어가 이루는 문장의 의미가 뭇 정서와 거리가 있다. 그렇다고 난해한 시를 생산하는 여느 젊은 시인처럼 나름의 계산에 따라 모종의 실험을 도모하는 건 또 아니다. 차라리 그렇다면, 예측 가능한 구석이 있다. 그러나 김행숙은 어떠한 예측도 차단한다. 자신의 느낌을 느낀 대로 말하고 있어서이다. 이쯤에서 시인의 작품설명을 듣는다.

“점점 작아지는 눈사람, 녹는 것, 사라지는 것에 대한 느낌을 적고 싶었어요. 거의 안 보이는 나, 우리의 희미한 존재감 같은 것에 대한 느낌과도 통하지요.”
 
이제야 김행숙을 이해하기 위한 단서가 정체를 드러냈다. 느낌이다. 점점 녹아서 결국엔 사라지는 눈사람에 대한 느낌을 시인은 아이가 어른이 되는 과정에 빗대어 표현했다. 녹기 전의 눈사람은 그래서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눈사람이 작아지자 엄마가 죽는 것이다. 그걸 깨닫는 건 이미 사소한 존재가 돼버린 어른으로서의 우리이고.
 
이광호 예심위원은 “김행숙은 비유에 의존하지 않고 직접 주어를 대체하는 화법의 시인”이라고 설명한다. 맞는 말이다. 김행숙은 예쁘게 화장하거나 정성껏 포장하지 않는다. 심드렁하게, 느낌을 툭툭 던질 따름이다. 하여 김행숙의 시는 비쩍 말라 있다. 평이한 단어만 즐비한 것도 이 때문이다.

김행숙은 오늘 우리 시단에서 가장 첨예한 감각(또는 느낌)을 지닌 시인이다. 다시 말해 당대 한국 시의 한 첨단이다. 하니 “모르겠다”고 낙담할 일은 아니다. 그러고 보면 김행숙도 억울할 법하다. 어찌 타인의 느낌을 온전히 공감할 수 있느냔 말이다.(글=손민호 기자)

 

 

 

 

 

 

 

 

 중앙일보(07. 07. 24) [손민호기자의문학터치] 동갑 여성 시인 … 극과 극 시의 세계

여기 두 명의 동갑내기 시인이 있다. 김선우와 김행숙. 둘 다 1970년 소생이고, 여성이다. 무엇보다 이 둘은, 남들이 좀체 따라하기 힘든 자기만의 목소리를 가졌다는 점에서 닮은 구석이 있다. 하나 시 세계는 전혀 딴 판이다. 김선우는 한국 여성시의 전통 위에 오도카니 앉아 있고, 김행숙은 난해한 요즘 젊은 시의 물길을 맨 앞에서 연 주인공이다. 김선우에게선 뜨거운 심장이, 그리니까 생명의 퍼덕댐 같은 게 만져지고 김행숙을 떠올리면 예민한 손가락과 매운 눈매가 연상된다. 공교롭게도 둘의 시집이 비슷한 때 출간됐다. 김선우가 세 번째 시집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문학과지성사)를, 김행숙은 두 번째 시집 『이별의 능력』(문학과지성사)을 내놨다(*김선우 시인의 경우엔 고정 독자층이 있어서 이번에 목록에 넣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시가 너무 노숙하다고 생각한다).



#막무가내의 사랑 노래

김선우의 눈동자는 사연 많은 우물 같다. 물기 머금은 눈동자는 짙고 또 깊다. 그 눈길이 살짝 스치던 찰나 언뜻 귀기(鬼氣) 같은 걸 느꼈던 것도 같다. 그 기운을 뭐라 부르던 상관없다. 세상을 향한 경계의 표시일수도 있고 시인이 건네는 사랑의 눈짓일지도 모른다.

김선우가 예의 상냥한 목소리로 ‘그러니 우리, 사랑할래요?’(‘Everybody Shall we love?’부분)라고 물을 때 그건 애교 어린 구애가 아니다. ‘보도블록 콘크리트를 걷어내고/꽃잎을 놓은 댓잎 자리 위에 누워’서 하는 사랑이고 ‘포성 분분한 차디찬/여기는 망가진 빗장뼈 위 백척간두의 칼끝’에서 ‘그대와 나의 해골을 안고 뒹’구는 사랑이다. 말하자면, 목숨과 맞바꾸는 사랑이다.

하여 김선우의 사랑은 막무가내다. ‘내 살을 발라 그대를 공양’하는 사랑이고 ‘대천바다 물 밀리듯 솨아’ 몰려드는 사랑이다. ‘그대가 아찔한 절벽 끝에서/바람의 얼굴로 서성인다면/…/그대보다 먼저 바닥에 닿아/강보에 아기를 받듯 온몸으로 나를 받겠습니다’(‘낙화, 첫사랑’부분)라며 온몸을 내던지는 건, 그 사랑이 어느 지극한 곳을 향하기 때문이다. 그건 당신이고, 시푸른 육즙 뚝뚝 듣는 아욱이며, 소꿉 단지에 총탄을 모으는 팔레스타인의 소녀이고, 이태 전 세상을 뜬 위안부 할머니다.



#툭툭 내뱉기 또는 낯설게 말 걸기

김행숙은 김선우처럼 여성성을 드러내놓지 않는다. 아낙네의 질펀한 수다 속에 여성의 성기나 생리 얘기를 거리낌없이 집어넣는 건 김행숙에게 없는 일이다. 그러고 보니 김행숙에겐 없는 게 많다. 노골적인 사랑타령도 없고, 현란한 수사나 황당무계한 상상도 없다. 김빠진 일상을 멀거니 기술한, 뻣뻣한 문장만 즐비하다. 이를 테면 ‘나는 2시간 이상씩 노래를 부르고/3시간 이상씩 빨래를 하고/2시간 이상씩 낮잠을 자고/…/2시간 이상씩 당신을 사랑해.’(‘이별의 능력’부분)라고 밋밋하게 적을 따름이다.

그런데도 시가 된다. 이별 뒤에도 나의 하루는 노래를 부르고 빨래를 하고 낮잠을 자는데 대부분 소비된다. 그래, 이따금, 하루에 2시간쯤? 당신 기억이 떠오를 것이고, 하여 아플 것이다. 김행숙의 매력은 이렇듯이 툭툭 내뱉는, 비쩍 마른 고유의 화법에 있다.

‘마차에서 말들이 분리되는 순간/마차는 스톱! 하지 않았다’(‘손’부분)라고 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여기까진 마냥 무미하다. 그런데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나는 쓴다, 나로부터 멀어지는 말발굽들처럼’이라고 이어붙이자 앞 문장에 돌연 화색이 돈다. 그러니까 마차는 시인의 손이다. 말과 떨어졌어도, 다시 말해 생각이 끊겨도 손은 스스로, 그것도 집요하게 움직인다.

07. 09. 17.

P.S. 개인적으로 김행숙 시인과는 예전에 한번 전화통화를 한 적이 있었다. 가장 난해하지도 첨예하지도 않은 온화하고 여성스러운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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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17 03: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9-17 08: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올 가을의 '시집들 읽기' 목록에 올려놓은 박상우의 <이미 망한 생>(열림원, 2007)에 대한 소개기사도 옮겨놓는다. 몇 마디 덧붙이기 위해 며칠 전에 산 시집을 찾느라 책상주변을 잠시, 이리저리 둘러보았지만 눈에 띄지 않는다. 이 '처치 못할' 책들에 파묻혀 사는 인생도 '이미 망한 生'으로 족한게 아닌가 싶다.

세계일보(07. 09. 15) "더 이상 망가질 게 없어 나는 행복하다”

“이젠/ 파투가 된 삶도/ 삶이라고/ 믿고,/ 파투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수밖에”(‘破鬪의 삶’에서)

시집 제목이 ‘이미 망한 生’(열림원)이다. 시인 박상우(44)가 17년 만에 발표한 시집엔 망신(亡身)의 미학이 펼쳐져 있다. 생의 밑바닥에서 뒹굴고 있는 시인의 자조와 허무에는 가식이 없다. 스스로 구정물을 끼얹은 시인은 가랑비에도 몸 사리는 현대인과 달리 무엇이든 자유롭게 노래한다.

“그래, 망가질 수 있는 것들은 다 망가져라/ 망가져도 나처럼 완전히 망가져라// 망가질 수 있는 生이 망가질 때/ 나처럼 더 이상 망가질 게 없어 행복하려면”(‘망가진 生’에서)

“현실 속의 나는/ 숨을 쉬는 알맹이지만/ 이미 망한 生 속에 있어,/ 데드마스크를 쓰고 있는/ 허물인 것 같다”(‘이미 망한 生’에서)

그는 망가짐을 찬양하지만, 광대의 슬랩스틱을 즐기진 않는다. 남을 웃기려고 자신을 망가뜨리는 코미디는 단수 낮은 쇼다. 시인은 망신(亡身)을 자초해도 자기를 연민하거나 인정을 구하지 않는다. 시인이 공개하는 벌거벗은 자아는 희화화가 아니라 철저한 객관화다. 시인은 세상을 편견 없이 보기 위해 초인의 고행길을 묵묵히 걸을 뿐이다.

“그들은 내가 어떤 생존훈련을 견뎠는지 모르고/ 내가 얼마나 강하고 독한지도 모른다/ 난 나에게 충성을 혈맹한 편지가 있다/ 난 나를 위해서만 투쟁한다”(‘무덤 속, 비트를 탈출하다’에서)

망신(亡身)의 미학만 늘어놓은 건 아니다. 자신을 ‘아메바’에 비유한 시인은 단순하면서 따뜻한 서정시를 읊는다.

“눈사람이 대지 위에 서 있다// 눈사람의 敵은 따뜻한 세계/ 햇볕에 눈사람이 녹기 시작한다// 귀가 녹고/ 코가 녹고/눈이 녹고/ 몸이 녹았다// 한 사람이 敵의 사랑을 흠뻑 받고/ 사라졌다”(‘눈사람’에서)

시인은 “시는 삶과 세계에 대한, 내 의식의 알까기”라고 말한다. “시의 세계는 현실 속에 없지만 마음을 조금 위로합니다. 내 스스로 의사가 돼, 시라는 환자카드와 진료카드를 만드는 셈이지요.”(심재천 기자)

07. 09. 15.

P.S. 유일한 소개기사여서 옮겨오긴 했지만 별 내용은 없군. 알라딘에는 시인의 다른 시집이 뜨지 않아 얼핏 첫시집인가 했는데, 이미 <사람구경>, <물증이 있는 삶은 행복하다>, 두 권의 시집을 상자했고, <이미 망한 생>은 세번째 시집이다. '망신의 미학'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시인은 '반성'과 '극빈'의 시인 김영승이지만(박상우의 시들이 훨씬 절제돼 있긴 하다), 시구상으로는 "다들 망가질 때 안 망가지는 놈은 망가진 놈뿐야"라고 갈파한 황동규 시인을 '원조'로 삼을 수도 있겠다.

표제시 자체는 젊은 나이에 자살했지만 영화속에서 아직 '生生하게' 살아있는 한 여배우(직접 거명되지는 않지만 <주홍글씨>의 이은주를 가리키겠다)와 아직 살아있지만 마치 '데드마스크를 쓰고 있는' 듯한 자신의 '이미 망한 生'을 대조하고 있다. 영화속에서 그녀가 부르던 재즈노래가 문득 생각나는 밤이다. Only when I Sleep(http://www.youtube.com/watch?v=UGT0cutGM3k&mode=related&search=, 노래의 원조는 http://www.youtube.com/watch?v=zqhu6r5x2R8&mode=related&se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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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7-09-17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은 올리신 시집들 중에 눈길이 제일 먼저 갔더랬습니다..근사했습니다--;;
요런 시집은 마음 푹 놓고 읽어야지요..

로쟈 2007-09-17 2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가 '인생파' 취향이라서...
 

'시집들 읽기'를 위한 또다른 '펌푸질'이다. 도우미로 나선 이는 문학평론가 신형철씨이고 그가 추천하는 시집(이라기보다는 결구라고 해야겠지만)은 이영광의 <그늘과 사귀다>(랜덤하우스, 2007)이다(http://h21.hani.co.kr/section-021158000/2007/09/021158000200709130677037.html). 시인의 두번째 시집이라지만 나는 아래의 소개를 읽고서야 시인의 이름을 기억해두게 됐다(앞으로도 기억하게 될 것 같다. 잊어버릴 수 있는 이름이 아니잖은가!). 주로 거론되고 있는 시는 '동쪽바다'인데, 동쪽바다는 나로선 아주 친근한 곳이어서(태어난 곳은 아니지만 내가 자란 곳은 된다) 김연수의 소설에서 '7번 국도' 이야기를 들을 때만큼의 반가움을 갖게 된다(비록 시는 암울함으로 마무리되고 있지만). 전체 시가 궁금하신 분들은 나처럼 간단히 퇴근길에 서점에 들러 한권 챙기시면 된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제목은 나의 것이 아니다.

한겨레21(07. 09. 13) "당신은 좆도 몰라요"

수많은 문학상이 있다. 대개는 받을 만한 사람이 받는다. 바로 그게 문제다. 늘 받을 만한 사람이 받다니, 이럴 수가, 이렇게 지루할 수가. 불만은 또 있다. 왜 심사의 대상은 늘 ‘한 편의 작품’일까. 예컨대 이런 식은 어떤가. 올해의 제목상, 올해의 도입부상, 올해의 여성 캐릭터상, 올해의 묘사상, 올해의 아포리즘상 등등. 물론 작품이라는 것이 분리 불가능한 유기체인 줄은 잘 알고 있지만, 1등만 뽑는 시상식의 상상력이 하도 따분해서 하는 소리다.

이영광의 두 번째 시집 <그늘에서 쉬다>(랜덤하우스코리아·2007)를 읽었다. 독자들에게 많이 읽히고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전체적으로 아름답고 견고한 시집이다. 이 시집에는 이를테면 유배된 선비의 순결성 같은 것이 감돌고 있었다. 그래서 아름답고 견고하지만, 좀체 틈을 주지 않는 그 염결성이 다소 답답하기도 했다. 그러다 읽은 한 편의 시에는 드물게도 쓸쓸한 투정 같은 것이 배어 있어서 외려 그게 마음을 끌었다.

“동쪽 바다로 가는 쇳덩이들,/ 짜증으로 벌겋게 달아올라/ 붕붕거린다, 꽁무니에 불을 달고// 이 지옥을 건너야 極樂 해변이 있다”는 구절로 시작된다. 동해로 가는 차들의 행렬. 교통체증이 심했던지 ‘짜증으로 벌겋게 달아오른’ 차들이 악다구니 중이다.

이어지는 대목에서 시인은 ‘지구는 공사 중’이라고 투덜거리며 찻집으로 길을 낸다. 찻집 벽에는 고구려 벽화가 그려져 있고 시인은 ‘당신’에게 편지를 쓰듯 읊조린다. “뉴 밀레니엄은 어쩌면 벽화의 시대로 남지 않을까요.” 이어지는 내용이다.



폭탄 세일과 재탕 우주 전쟁과 기본 삼만 원을/ 숙식 제공과 月下의 도우미들과/ 흡반 같은 골목을 거느린 벽의 이면,/ 벽화는 모든 벽을 은폐해요/ 모든 벽화는 春畵예요// 세상은 궁극적으로 형장이고/ 인간은 인간의 밥이고/ 에로가 어쩔 수 없이 애로이듯/ 이건 苦行이야, 마시고 싶어 마시는 게/ 아니야, 하고 내가 주정했을 때/ 당신은 암말 없었죠 블라인드 너머/ 오색의 길을 오색의 길을 오색의 길을/ 보고 있었죠 이 지구는 어쩌면/ 버려진 별이 아닐까, 신음하듯.”(‘동쪽 바다’에서)

시인은 “벽화는 모든 벽을 은폐해요”라고 적었다. 우리는 이렇게 읽었다. 이제 주위의 모든 벽들은 죄다 광고판이다. 그것은 전 지구적 자본주의 시대의 벽화쯤 될 것이다. 그 벽화들은 초자아를 잃어버린 우리 시대의 욕망들을 음란하게 드러낸다. “모든 벽화는 춘화(春畵)예요.” 게다가, 벽화가 벽을 감추듯, 우리 시대의 춘화들은 인간다운 삶을 가로막는 곳곳의 ‘벽’들을 용케 감춘다. 그걸 알기 때문에, 고행하듯 술을 마시고, 버려진 별을 보듯 지구를 본다.

“돈 내고 받아드는 영수증처럼 허망한 당신의/ 오랜 병력과 어둠과 온몸이 부서질 듯한 체념을/ 가슴으로 한번 받아볼까요 나는 잘못/ 살았어요 살았으니까 살아 있지만/ 당신과 못 만나고 터덜터덜 가는 길에/ 동쪽 바다 물소리 푸르게 들리고,/ 내가 밤하늘 올려다보며 당신 생각을 할까요/ 느티나무 그늘에 앉아 두루미처럼 울까요/ 당신은 좆도 몰라요”

같은 시의 끝부분이다. 당신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서는 길에 잃어버린 유토피아처럼 동쪽 바다 푸른 물소리가 들린다. 같은 시의 다른 대목에서 시인은 “요컨대 인간은 전쟁 중이죠“라고 적었다. 말하자면 그에게 2000년대는 ‘지구는 공사 중, 인간은 전쟁 중’이라는 말로 요약된다. 이 구절에 공감하는 사람이라면 ‘나는 잘못 살았다, 잘못 살았기 때문에, 살아남았다’라는 시인의 자조에도, 그의 저 쓸쓸한 귀가에도 공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의 진짜 매력은 이런 근엄한 메시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투정 부리듯 늘어놓는 말들의 쓸쓸한 율동에 있다. 자학인 듯 가학인 듯 이어지던 말들이 제 쓸쓸함을 견디지 못하고 이렇게 무너진다. “당신은 좆도 몰라요.” 세상과의 불화가 그리움을 키우고, 너무 큰 그리움은 때로 화를 키운다. 욕설이 이렇게 물기를 머금을 수도 있구나. 이 시를 ‘올해의 결구(結句)상’ 후보로 추천한다.(신형철_문학평론가)

07. 09. 16.

P.S. '손민호기자의 문학터치'에서도 <그늘과 사귀다>가 언급되고 있어서 옮겨놓는다. 

중앙일보(07. 06. 12) 밑바닥에서 꿈을, 죽음에서 삶을

한 달쯤 전 나란히 나온 시집 두 권을 말한다. 부족한 지면 탓에, 아니 게으름 때문에 신간(新刊)이 되지 못하고 구간(舊刊)이 되어버린 시집이다. 시인 제위에 마냥 죄스럽다. 한편으론 뿌듯한 마음도 있다. 남들이 무심코 지나친 시집을 홀로 펼칠 때의 기분은, 횡재를 맞은 듯이 짜릿하다.

박영희(44)의 시집 '즐거운 세탁'(애지)과 이영광(41)의 시집 '그늘과 사귀다'(랜덤하우스). 두 시집은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다. 하나는 비루한 삶에서 희망을 길어올리고, 다른 하나는 죽음의 그늘에서 삶의 기운이 돋아난다.

두 시인 모두 문단에서 밀어주거나 끌어주는 이 없다는 것도, 그런데도 시와 함께 산다고 주저 없이 밝히는 것도 닮아있다. 박영희는 "시인의 누명을 쓰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부끄럽다"고 적었고 이영광은 "다름 아닌 시와 더불어 고행(苦行)하게 된 것이 행복하다"고 적었다. '누명'과 '고행'에서 시를 업(業)으로 삼는 자의 '자발적 버거움'이 읽힌다.



# 삶을 노래하다

여기 한 편의 시. 읽는 요령이 있다. 시가 묘사하는 풍경을 눈앞에 그려보는 것이다.

'저울눈금을 확인한 고물상 주인이 ㎏당 50원 하는 폐지를 부리다 리어카 밑바닥에서 젖은 라면상자 두 개를 발견하고는 이런 일이 벌써 한두 차례 아니라며 남은 이보다 빠지고 없는 이가 더 많은 노인을 다그치자 재생이 가능한 폐지를 주워온 노인네는 요 며칠 궂은 날씨를 탓하여 본다.//아무리 슬픈 일이 있어도 고물상에서는 눈물이 젖어도 폐지가 젖어서는 안 된다.'

'즐거운 세탁'의 맨 앞에 실린 시 '고물상을 지나다'의 전문이다. 고단하고 퍽퍽한 고물상 노인의 삶이, 읽는 이의 눈을 할퀸다. 이 시는 전에 본 적이 있다. 박영희가 쓴 르포집 '아파서 우는 게 아닙니다'(삶이 보이는 창)에서다. 시인은 거기에서 우리 사회의 밑바닥 인생을 부지런히 찾아다녔다. 고물을 줍는 노인들의 삶을 묵묵히 전한 다음, 시인은 앞의 시를 적어두었다. 그리고선 "아프면 눈물이 나오지만 고통스러우니까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그때 시의 제목은 지금과 달랐다. '삶'이었다. 하여 삶은, 고물상의 젖은 라면상자다.



# 죽음을 기억하다

'그늘과 사귀다' 초입에서 이영광은 '아버지 세상 뜨시고/몇 달 뒤에 형이 죽었다'('떵떵거리는'부분)고 부고(訃告)를 쓴다. 이어 한사코 죽음만을 기록한다. 아래는 그 세목(細目)이다.

①염습(殮襲):관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몸이 씻겨지는 동안,/다른 몸들이 기역 니은 리을로/엎드려 우는 동안('황금 벌레' 부분)

②출상(出喪): 수양버들 춤추는 길에/상여 하나 떠가네/제 발로는 더 이상 걷지 못하는 자의 집,/여러 몸이 메고 가네('수양버드나무 채찍'부분)

③하관(下棺):취한 몸을 리어카에 실어와 아랫목에 눕히듯/관을 내린다/…/맞지 않는 옷을 입고도 오늘은 신경질이 없어라/난생처음 오라를 지고도/몸부림이 없어라('나무 금강로켓'부분)

④기일(忌日):제상은 그의 돌상,/뼈에 붙은 젖을 물려주고/숟가락 쥐여주고/늙은 집은 이제 처음부터 다시 그를 키우리라('음복'부분)

⑤ …그 이후:나는 그들이 검은 기억 속으로 파고 들어와/끝내 무너지지 않는 집을 짓고/떵떵거리며 살기 위해/아주 멀리 떠나버린 것이라 생각한다('떵떵거리는' 부분). 하여 죽음은, 산 자의, 아니 죽음에 채 이르지 못한 자의 영역이다.(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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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9-16 1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에 놀라 클릭했다는 --;

로쟈 2007-09-16 19:32   좋아요 0 | URL
제 탓은 아닙니다.^^;

LAYLA 2007-09-16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 좋아요. ^^ 로쟈님 덕택에 알았네요

로쟈 2007-09-17 00:27   좋아요 0 | URL
별말씀을...

수유 2007-09-16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도 시지만, 신형철의 '말들의 쓸쓸한 율동'이란 표현에 무릎을 치네요. 제가 너무 옛시인속에 살았나 봅니다...좋은 시인들이 있었네요..겨울방학때쯤 한번씩은 읽어야겠습니다..신형철의 평론들도..

로쟈 2007-09-17 00:28   좋아요 0 | URL
신형철 평론집은 여름에 나온다고 했었는데 조금 늦어지는 모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