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 <세계의문학> 가을호는 전호에 이어서 '포스트 이후의 포스트'란 기획특집을 마련하고 있다. 서점에서 훑어만 보고 읽을 시간을 내지 못했는데, 담비에 리뷰 기사가 올라왔기에 옮겨놓는다(http://www.dambee.net/news/read.php?section=MAIN&rsec=MAIN&idxno=6070). '패스트-리딩'만 해서는 곤란하겠지만, 워낙에 다들 바쁘잖은가. 또 리뷰라도 챙겨두면 좋지 아니한가.

담비(07. 09. 17) 세계의문학 가을호'포스트 이후의 포스트'
‘세계의 문학’ 2007 가을호가 ‘포스트 이후의 포스트’의 두 번째 순서에서 ‘대륙의 동쪽에서 전개된 포스트 이론’을 다루고 있다. 다섯 명의 필자가 러시아, 일본, 중국, 홍콩, 한국에서 일어나는 포스트 현상에 대해 논의를 펼쳤다. 변현태의 ‘포스트 소비에트 문예학과 바흐친의 유산’, 황호덕의 ‘무상無常의 시간과 구제救濟의 시간’, 서광덕의 ‘1990년대 이후 중국 사상계의 지형도’, 유영하의 ‘방법으로서의 홍콩’, 허윤진의 ‘헌책방의 문턱’이 그것이다.
변현태는 1991년 소련이 붕괴하고 독립국가연합의 한 공화국으로 러시아가 등장한 이후, 이른바 ‘포스트 소비에트 시대’ 문예학의 향방을 추적한다. 그 향방은 두 가지 입장으로 대별되는데, 소련 이전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의 러시아의 문학적 유산을 상속받아 포스트 소비에트적 가치를 발견하고자 하는 입장과, 서유럽 또는 서유럽과 러시아의 접점에서 포스트 소비에트적 가치를 발견하고자 하는 입장이 그것이다. 이버지-인문학자 대 그 가치를 일단 파괴하고 보자는 아들-니힐리스트의 대립, 슬라브주의 대 서구주의의 대립으로 표현될 수도 있는 둘의 긴장관계가 현금의 어떤 풍요로운 이론적 생산물을 쏟아내고 있는지 그려낸다.
황호덕의 글은 어떤 의미에서 ‘고바야시 히데오에 대한 비판’이라 할 수 있다. 왜 이 일본 비평가가 쟁점이 되는가? 대동아전쟁을 비롯한 역사에 대한 현대 일본인의 태도의 근본을 요약해주는 것이 고바야시의 태도이기 때문이다. 역사를 객관적 사실에서 독립시켜, 주관의 회상을 통해 주어지는 ‘마음’의 영역으로 축소시키고, 이 ‘마음’ 속에서 탈가치적인 ‘죽은 자 일반의 무상함’을 객관적 역사 대신 떠올리는 데서 야스쿠니 참배를 비롯해 역사에 면죄부를 주는 현금의 일본인의 사고방식이 가능했다. 이런 비판적 논의를 배경으로 겐겐다이시소(포스트모더니즘) 이후 일본 지성계 최대 쟁점 중 하나인 ‘21세기의 매니페스토·탈패러사이트 내셔널리즘’을 통해 표현된 국민국가에 환원되지 않는 형태의 정치론 등을 살핀다.
서광덕의 글은 중국의 개혁 정책이 성공의 배후에서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한 1990년대 이후 사상의 전개과정을 보여준다. 경제는 비약적으로 발전했지만, 그 과정에서 야기된 도시와 농촌, 지역간의 대립, 계층간의 분화, 제도의 부패 그리고 환경파괴 등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중국 지성계의 다양한 입장을 명료하게 소개하고 있다. 논자의 흥미로운 통찰은, 1990년대 중반 이후 중국의 사상계가 매우 다양한 입장 차이를 보여주지만, ‘모두 중화전통에 대한 회귀를 논의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대중매체가 고전 강독의 스타 만들기에 열중하는 것도 이런 회귀의 화두와 관련이 없지 않다. 논자가 우려하듯 이런 중화성 지향이 정치적 장체서 민족주의와 결합해 새로운 인종주의를 초래하지 않을까? 이런 중화주의에서 예외는 왕후이 정도의 지식인이라고 논자는 말한다. 이런 중국의 모습에 대해 한 일본인 중국 연구자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중국이 사회주의와 자유주의의 중간이 아니라 사회주의와 자유주의, 두 방향을 모두 충분히 열어놓는 길, 가장 요원하게 보일지라도 최고의 공정성을 가져올 수 있는 이 길을 걸어야 한다.” 중국도 중국을 모르는 이 시점에서, 어떻게 보면 매우 계획적인 사회통제를 통해 가능한 이런 주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하다.
유영하의 글은 올해로 반환 10주년을 맞은 홍콩의 현주소를 찾는다. 1967년 문화대혁명의 영향으로 좌파 주도의 대규모 폭동이 발생한 이래 영국은 홍콩의 탈중국화를 일관되게 추구했고, 결과적으로 ‘홍콩은 조국이 없다’는 점이 홍콩인들에게 입력됐다. 이제 홍콩인은 외국인과 비교하면 중국인이고, 대륙의 중국인과 비교하면 외국인이다. 이 글은 중국 반환 이후 지난 10년간 홍콩인들이 후식민주의 시대에 어떻게 외국과 중국 사이의, 또는 ‘식민자와 식민자 사이의’ 이중 소외로부터 정체성 찾기에 골몰하는지 추적한다. 그것은 저우레이가 홍콩 후식민의 장래를 ‘이중불가능’으로 정리한 데서 나타난다. 홍콩은 영국 식민주의에 굴복하지 않았듯이 중국 국적주의의 재림에도 굴복하지 않을 거라는 것이다. 하지만 각 분야에 있어서 중국보다 이미 선진적인 홍콩이 자기보다 뒤진 중국으로부터 온갖 정치적, 문화적 간섭을 받아야 하는 사태는 매우 심한 사회적 스트레스로 폭발하거나 아니면 사회 전체의 퇴행과 무기력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싶다.
허윤진의 글은 주로 여러 평론가들의 글을 읽어가며 한국 문학에서 1980년대와 오늘날의 거리를 가늠하고 있다. 이 글의 특이한 점은 ‘우리’라는 화자 외에 ‘나’라는 화자가 등장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나’라는 화자는 거기에 독자가 밀착할 때는 가장 강력한 보편적 언어를 쏟아내며, 그렇지 않을 때는 제한된 개인의 언어를 쏟아내는 특수성을 지닌다. 논자는 이 렌즈 속에서 독자들에게 1980년대 또는 그 유산과의 거리 가늠을 제안한다.(리뷰팀)
07. 09.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