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시집들' 홍보를 쉼없이 하게 됐다. 황병승의 신작은 그보다 먼저 소개한 적이 있으므로 이제 남은 시인은 김행숙, 송승환 두 시인 정도이다. <이별의 능력>(문학과지성사, 2007)은 <사춘기>(문학과지성사, 2003)에 이은 김행숙의 두번째 시집인데, 얼핏 타이틀만으로는 역시나 여성시인인 조은의 오래전 시집인 <사랑의 위력으로>(민음사, 1991)를 떠올리게 했다. 무의식의 범주이긴 하나 모종의 '힘'에 대한 욕망이 두 여성시인의 밑자리에 놓여 있는 게 아닌가란 생각을 잠시 했다. 다음주 주말에 발표된다는 올해 미당 문학상 후보로도 올라가 있어서 관련기사를 참고자료 삼아 옮겨놓는다. 그 아래 이어지는 건 드물게 눈에 띈 <이별의 능력>의 소개기사이다.

중앙일보(07. 08. 11) 미당·황순원 문학상 최종 후보작 지상중계 ⑤김행숙

시인이 가장 싫어하는 말이지만 어쩔 수 없다. 김행숙은 어렵다. 올해 미당문학상 최종 후보 열 명 중에서 가장 어렵고, 당대 한국 시단을 통틀어서도 가장 난해한 시인 중 하나로 꼽힌다. 그러나 시인은 정작 “억울하다”고 항변한다. 시인이 들려준 일화 한 토막이다.

“등단하자마자 시 몇 편을 발표했어요. 어느 평론가가 비평을 했는데 전체 맥락은 호의적이었어요. 그런데 ‘김행숙은 어렵지만 어쩌고…’ 하는 대목이 있었어요. 그걸 보고 꼬박 사흘을 울었어요.”
 
“왜요?”
 
“벽이…, 너무 강고한 벽이 내 앞을 가로막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김행숙의 시는 어렵지만, 시어 자체는 어렵지 않다. 사전에서나 봤음직한 희귀 어휘를 찾아내지도 않고 신조어 따위는 만들어낼 생각도 없다. 매니어만이 해독 가능한 은어도 구사하지 않으며 비어나 욕설 따위를 동원하지도 않는다.

앞서 적은 ‘눈사람’ 역시 그러하다. 시인은 초등학생 수준의 단어만으로 한 편의 시를 완성했다. 그러나 해석은 결코 간단치 않다. 예컨대 ‘눈사람이 작아졌다! 엄마가 죽었다.’란 시구를 보자. ‘눈사람이 작아졌다’란 사건과 ‘엄마가 죽었다’란 사건이 병렬 배치됐다. 그러면 두 사건 사이에 인과 관계가 동반해야 아구가 맞는다. 설명이 없으면 암시라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두 사건은 그저 나란히 놓여있을 뿐이다. 무엇보다 마지막 두 행! 도대체 어떻게 시장을 가야 ‘사소하게 시장을 가는’ 것인가.
 
김행숙이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어와 시어가 만나는 자리, 시어와 시어가 이루는 문장의 의미가 뭇 정서와 거리가 있다. 그렇다고 난해한 시를 생산하는 여느 젊은 시인처럼 나름의 계산에 따라 모종의 실험을 도모하는 건 또 아니다. 차라리 그렇다면, 예측 가능한 구석이 있다. 그러나 김행숙은 어떠한 예측도 차단한다. 자신의 느낌을 느낀 대로 말하고 있어서이다. 이쯤에서 시인의 작품설명을 듣는다.

“점점 작아지는 눈사람, 녹는 것, 사라지는 것에 대한 느낌을 적고 싶었어요. 거의 안 보이는 나, 우리의 희미한 존재감 같은 것에 대한 느낌과도 통하지요.”
 
이제야 김행숙을 이해하기 위한 단서가 정체를 드러냈다. 느낌이다. 점점 녹아서 결국엔 사라지는 눈사람에 대한 느낌을 시인은 아이가 어른이 되는 과정에 빗대어 표현했다. 녹기 전의 눈사람은 그래서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눈사람이 작아지자 엄마가 죽는 것이다. 그걸 깨닫는 건 이미 사소한 존재가 돼버린 어른으로서의 우리이고.
 
이광호 예심위원은 “김행숙은 비유에 의존하지 않고 직접 주어를 대체하는 화법의 시인”이라고 설명한다. 맞는 말이다. 김행숙은 예쁘게 화장하거나 정성껏 포장하지 않는다. 심드렁하게, 느낌을 툭툭 던질 따름이다. 하여 김행숙의 시는 비쩍 말라 있다. 평이한 단어만 즐비한 것도 이 때문이다.

김행숙은 오늘 우리 시단에서 가장 첨예한 감각(또는 느낌)을 지닌 시인이다. 다시 말해 당대 한국 시의 한 첨단이다. 하니 “모르겠다”고 낙담할 일은 아니다. 그러고 보면 김행숙도 억울할 법하다. 어찌 타인의 느낌을 온전히 공감할 수 있느냔 말이다.(글=손민호 기자)

 

 

 

 

 

 

 

 

 중앙일보(07. 07. 24) [손민호기자의문학터치] 동갑 여성 시인 … 극과 극 시의 세계

여기 두 명의 동갑내기 시인이 있다. 김선우와 김행숙. 둘 다 1970년 소생이고, 여성이다. 무엇보다 이 둘은, 남들이 좀체 따라하기 힘든 자기만의 목소리를 가졌다는 점에서 닮은 구석이 있다. 하나 시 세계는 전혀 딴 판이다. 김선우는 한국 여성시의 전통 위에 오도카니 앉아 있고, 김행숙은 난해한 요즘 젊은 시의 물길을 맨 앞에서 연 주인공이다. 김선우에게선 뜨거운 심장이, 그리니까 생명의 퍼덕댐 같은 게 만져지고 김행숙을 떠올리면 예민한 손가락과 매운 눈매가 연상된다. 공교롭게도 둘의 시집이 비슷한 때 출간됐다. 김선우가 세 번째 시집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문학과지성사)를, 김행숙은 두 번째 시집 『이별의 능력』(문학과지성사)을 내놨다(*김선우 시인의 경우엔 고정 독자층이 있어서 이번에 목록에 넣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시가 너무 노숙하다고 생각한다).



#막무가내의 사랑 노래

김선우의 눈동자는 사연 많은 우물 같다. 물기 머금은 눈동자는 짙고 또 깊다. 그 눈길이 살짝 스치던 찰나 언뜻 귀기(鬼氣) 같은 걸 느꼈던 것도 같다. 그 기운을 뭐라 부르던 상관없다. 세상을 향한 경계의 표시일수도 있고 시인이 건네는 사랑의 눈짓일지도 모른다.

김선우가 예의 상냥한 목소리로 ‘그러니 우리, 사랑할래요?’(‘Everybody Shall we love?’부분)라고 물을 때 그건 애교 어린 구애가 아니다. ‘보도블록 콘크리트를 걷어내고/꽃잎을 놓은 댓잎 자리 위에 누워’서 하는 사랑이고 ‘포성 분분한 차디찬/여기는 망가진 빗장뼈 위 백척간두의 칼끝’에서 ‘그대와 나의 해골을 안고 뒹’구는 사랑이다. 말하자면, 목숨과 맞바꾸는 사랑이다.

하여 김선우의 사랑은 막무가내다. ‘내 살을 발라 그대를 공양’하는 사랑이고 ‘대천바다 물 밀리듯 솨아’ 몰려드는 사랑이다. ‘그대가 아찔한 절벽 끝에서/바람의 얼굴로 서성인다면/…/그대보다 먼저 바닥에 닿아/강보에 아기를 받듯 온몸으로 나를 받겠습니다’(‘낙화, 첫사랑’부분)라며 온몸을 내던지는 건, 그 사랑이 어느 지극한 곳을 향하기 때문이다. 그건 당신이고, 시푸른 육즙 뚝뚝 듣는 아욱이며, 소꿉 단지에 총탄을 모으는 팔레스타인의 소녀이고, 이태 전 세상을 뜬 위안부 할머니다.



#툭툭 내뱉기 또는 낯설게 말 걸기

김행숙은 김선우처럼 여성성을 드러내놓지 않는다. 아낙네의 질펀한 수다 속에 여성의 성기나 생리 얘기를 거리낌없이 집어넣는 건 김행숙에게 없는 일이다. 그러고 보니 김행숙에겐 없는 게 많다. 노골적인 사랑타령도 없고, 현란한 수사나 황당무계한 상상도 없다. 김빠진 일상을 멀거니 기술한, 뻣뻣한 문장만 즐비하다. 이를 테면 ‘나는 2시간 이상씩 노래를 부르고/3시간 이상씩 빨래를 하고/2시간 이상씩 낮잠을 자고/…/2시간 이상씩 당신을 사랑해.’(‘이별의 능력’부분)라고 밋밋하게 적을 따름이다.

그런데도 시가 된다. 이별 뒤에도 나의 하루는 노래를 부르고 빨래를 하고 낮잠을 자는데 대부분 소비된다. 그래, 이따금, 하루에 2시간쯤? 당신 기억이 떠오를 것이고, 하여 아플 것이다. 김행숙의 매력은 이렇듯이 툭툭 내뱉는, 비쩍 마른 고유의 화법에 있다.

‘마차에서 말들이 분리되는 순간/마차는 스톱! 하지 않았다’(‘손’부분)라고 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여기까진 마냥 무미하다. 그런데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나는 쓴다, 나로부터 멀어지는 말발굽들처럼’이라고 이어붙이자 앞 문장에 돌연 화색이 돈다. 그러니까 마차는 시인의 손이다. 말과 떨어졌어도, 다시 말해 생각이 끊겨도 손은 스스로, 그것도 집요하게 움직인다.

07. 09. 17.

P.S. 개인적으로 김행숙 시인과는 예전에 한번 전화통화를 한 적이 있었다. 가장 난해하지도 첨예하지도 않은 온화하고 여성스러운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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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17 03: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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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17 08: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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