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가을의 '시집들 읽기' 목록에 올려놓은 박상우의 <이미 망한 생>(열림원, 2007)에 대한 소개기사도 옮겨놓는다. 몇 마디 덧붙이기 위해 며칠 전에 산 시집을 찾느라 책상주변을 잠시, 이리저리 둘러보았지만 눈에 띄지 않는다. 이 '처치 못할' 책들에 파묻혀 사는 인생도 '이미 망한 生'으로 족한게 아닌가 싶다.

세계일보(07. 09. 15) "더 이상 망가질 게 없어 나는 행복하다”

“이젠/ 파투가 된 삶도/ 삶이라고/ 믿고,/ 파투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수밖에”(‘破鬪의 삶’에서)

시집 제목이 ‘이미 망한 生’(열림원)이다. 시인 박상우(44)가 17년 만에 발표한 시집엔 망신(亡身)의 미학이 펼쳐져 있다. 생의 밑바닥에서 뒹굴고 있는 시인의 자조와 허무에는 가식이 없다. 스스로 구정물을 끼얹은 시인은 가랑비에도 몸 사리는 현대인과 달리 무엇이든 자유롭게 노래한다.

“그래, 망가질 수 있는 것들은 다 망가져라/ 망가져도 나처럼 완전히 망가져라// 망가질 수 있는 生이 망가질 때/ 나처럼 더 이상 망가질 게 없어 행복하려면”(‘망가진 生’에서)

“현실 속의 나는/ 숨을 쉬는 알맹이지만/ 이미 망한 生 속에 있어,/ 데드마스크를 쓰고 있는/ 허물인 것 같다”(‘이미 망한 生’에서)

그는 망가짐을 찬양하지만, 광대의 슬랩스틱을 즐기진 않는다. 남을 웃기려고 자신을 망가뜨리는 코미디는 단수 낮은 쇼다. 시인은 망신(亡身)을 자초해도 자기를 연민하거나 인정을 구하지 않는다. 시인이 공개하는 벌거벗은 자아는 희화화가 아니라 철저한 객관화다. 시인은 세상을 편견 없이 보기 위해 초인의 고행길을 묵묵히 걸을 뿐이다.

“그들은 내가 어떤 생존훈련을 견뎠는지 모르고/ 내가 얼마나 강하고 독한지도 모른다/ 난 나에게 충성을 혈맹한 편지가 있다/ 난 나를 위해서만 투쟁한다”(‘무덤 속, 비트를 탈출하다’에서)

망신(亡身)의 미학만 늘어놓은 건 아니다. 자신을 ‘아메바’에 비유한 시인은 단순하면서 따뜻한 서정시를 읊는다.

“눈사람이 대지 위에 서 있다// 눈사람의 敵은 따뜻한 세계/ 햇볕에 눈사람이 녹기 시작한다// 귀가 녹고/ 코가 녹고/눈이 녹고/ 몸이 녹았다// 한 사람이 敵의 사랑을 흠뻑 받고/ 사라졌다”(‘눈사람’에서)

시인은 “시는 삶과 세계에 대한, 내 의식의 알까기”라고 말한다. “시의 세계는 현실 속에 없지만 마음을 조금 위로합니다. 내 스스로 의사가 돼, 시라는 환자카드와 진료카드를 만드는 셈이지요.”(심재천 기자)

07. 09. 15.

P.S. 유일한 소개기사여서 옮겨오긴 했지만 별 내용은 없군. 알라딘에는 시인의 다른 시집이 뜨지 않아 얼핏 첫시집인가 했는데, 이미 <사람구경>, <물증이 있는 삶은 행복하다>, 두 권의 시집을 상자했고, <이미 망한 생>은 세번째 시집이다. '망신의 미학'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시인은 '반성'과 '극빈'의 시인 김영승이지만(박상우의 시들이 훨씬 절제돼 있긴 하다), 시구상으로는 "다들 망가질 때 안 망가지는 놈은 망가진 놈뿐야"라고 갈파한 황동규 시인을 '원조'로 삼을 수도 있겠다.

표제시 자체는 젊은 나이에 자살했지만 영화속에서 아직 '生生하게' 살아있는 한 여배우(직접 거명되지는 않지만 <주홍글씨>의 이은주를 가리키겠다)와 아직 살아있지만 마치 '데드마스크를 쓰고 있는' 듯한 자신의 '이미 망한 生'을 대조하고 있다. 영화속에서 그녀가 부르던 재즈노래가 문득 생각나는 밤이다. Only when I Sleep(http://www.youtube.com/watch?v=UGT0cutGM3k&mode=related&search=, 노래의 원조는 http://www.youtube.com/watch?v=zqhu6r5x2R8&mode=related&se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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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7-09-17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은 올리신 시집들 중에 눈길이 제일 먼저 갔더랬습니다..근사했습니다--;;
요런 시집은 마음 푹 놓고 읽어야지요..

로쟈 2007-09-17 2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가 '인생파' 취향이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