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 지라르에 대한 짤막한 글을 써야 할 필요 때문에 자료들을 읽고 있는데, <문학과 사회>(2004년 가을호)에 실렸던 맹정현씨의 '모방과 폭력 - 지라르 논리의 원환구조'란 글을 옮겨온다. 자세히 뜯어읽기 위해서이다. 본문 중 강조와 (*)로 덧붙인 군말만이 나의 것이다.

 

 

 

 

욕망에서 성서로?
욕망에 관한 (탈)현대적 담론들의 특징을 한마디로 요약해보자. 아마도 그것은 욕망으로부터 인간을 지우고 욕망의 실체성을 부정한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닐까? 헤겔에서 라캉에 이르는 욕망론은, 욕망은 나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타자나 구조의 효과임을 주창함으로써 욕망에 대한 반인간주의적인 해석의 길을 열어주었다.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은 정확히 이러한 계보 속에서 씌어진 르네 지라르의 대표작이자 처녀작이다. 욕망은 삼각형의 도식에 의해 구성되며, 욕망과 대상 사이에는 항상 제삼자가, 금지의 매개자가 개입되어 있다는 지라르의 주장들은 그의 이름을 거명하지 않더라도 우리에겐 이미 익숙한 것이 되었다. 삼각관계가 없이는 욕망도 존속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가 말하는 욕망은 요컨대 실체가 없는 욕망이며, 이 점에 있어선 그가 욕망에 대한 현대적 해석들의 반경 안에 머물고 있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 국내에서 번역되어 출간된 지라르의 후기 저작들(<희생양>,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을 살펴보면 그가 (탈)현대 사상가들에 비해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그는 동시대의 사상가들처럼 반인간주의적 욕망 이론을 개진하면서 특이하게도 현대의 반종교주의와 이교도적 ‘니체주의’의 경도를 비판하며 ‘기독교주의로의 회귀’를 강력하게 주장한다. 심지어 유일신적 종교야말로 인간이 폭력의 악순환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의 메시지가 될 수 있다는 지라르의 결론은 낯설다 못해 이질감을 느끼게 한다(*내 기억에는 이미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에서도 이러한 메시지를 읽을 수가 있었던 듯한데, '이질감'까지 느낀다는 것은 특이한 일이다).

지라르의 여정에 있어서 욕망의 반인간주의적 해석에서 <폭력과 성스러움>으로 이행하는 과정은 비교적 자연스럽게 이해될 수 있었다. 하지만 상기 두 저작에서 보여주는 기독교적 엄숙주의로의 회귀는 논리적 비약이나 이론적 퇴행으로 비칠 수 있다. 그러나 후기의 작업 속에서 보여주는 반인간주의와 기독교주의라는 지라르의 독특한 이론적 배합은 정확히 그의 출발점에서 이미 예견된 것이며, 그가 설정했던 최초의 전제를 끝까지 밀고 나간 결과라 할 수 있다(*내 말이 그 말이다. 필자가 약간의 트릭을 쓴 것이군!). 이 점을 확인하기 위해선 익히 잘 알려진 지라르의 전제에서 다시 출발할 필요가 있다.



미메시스와 폭력
잘 알려져 있다시피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에서 보여준 지라르의 출발점, 최초의 전제란, 욕망을 미메시스와 접속시켜 읽는 것이다. 지라르에게 있어 욕망은 곧 모방 욕망이다. ‘나’는 ‘그’가 가진 것을 원하고 ‘그’가 욕망하는 것을 욕망한다. 대상에 대한 직접적인 생물학적 욕구가 아니라 제삼자를 경유한 욕망, 타자의 음영이 드리워진 매개된 욕망이다. “매개자 그 자신도 대상을 욕망하거나 욕망할 수 있다. 그런데 바로 이 매개자의 욕망이 주체의 눈에 이 대상이 끊임없이 욕망할 만한 것으로 보이도록 만든다.”(*영역본의 제목은 <속임수, 욕망 그리고 소설>이다.)

결국 욕망이란 거울의 운동 속에서 서로를 반사해가며 모방해가는 하나의 과정이다. 지라르는 욕망으로부터 성욕이라든가 생물학적인 욕구의 흔적을 제거한 후 모방의 흔적만을 도출해내는데, 이는 지라르에겐 모방만이 인간의 고유성을 보장할 수 있는 유일한 특질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모방 욕망이 긍정적 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나보다 우월한 자, 초월자에 대한 모방 욕망을 통해서(“매개자가 외재적인 경우”) “자아 이상”을 획득하고 사회의 문화유산들을 나의 것으로 섭취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수평적’으로 이루어질 경우, 즉 나와 초월자가 아닌 나와 동류(“짝패”) 사이에서 이루어질 경우(“매개자가 내재적인 경우”), 그것은 곧 관계를 갈등과 사투(死鬪)로 이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폭력의 기원이 있다. 모방은 “응집의 힘이면서 동시에 해리의 힘”인 것이다.

따라서 지라르가 모방 욕망에서 폭력의 논리로 이행하는 것은 그 출발점에 상정된 전제에 비추어볼 때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지라르는 1972년에 출간된 <폭력과 성스러움>에서 모방 욕망의 갈등의 측면을 최대한 부각시킨다. 인간이 모방하는 존재인 한 ‘나’와 ‘너’는 대립한다. 그런데 이러한 대립이 첨예해질수록 모방은 더욱더 가속도를 얻고 개체들은 원환을 그리면서 ‘무차별성’의 지점으로 수렴한다. 그것은 “적들 사이의 거울 효과를 증대시킨다.” 그리고 ‘무차별성’의 지점으로 수렴할수록 폭력의 강도는 점점 더 증폭되며, 그것이 일정 정도 한계에 다다르면 결국 사회는 위기에 빠진다.

<폭력과 성스러움>에서 지라르적 논리의 흥미로운 점은 위험 수위를 넘은 사회는 이러한 위기의 해소를 위해 그 사회 자체 내에 자생적인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지라르가 말하는 ‘문명’과 ‘언어’의 원리이다. 문명과 언어의 원리란 곧 희생양을 만들어내는 논리이다. 그리고 이러한 희생양의 논리를 가능케 하는 것은 다시금 ‘모방’이다. 욕망의 모방은 폭력을 만들어냄으로써 나와 너 사이에 갈등의 골을 판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갈등의 골을 봉합할 수 있는 가능성도 바로 그 모방에 있다. 증오를 모방함으로써, 서로 반목하던 ‘나’와 ‘너’는 ‘그’를 증오하는 ‘우리’가 된다.

 

 

 

 

‘공동체’의 동일성이 구성되는 것은 무언가를 이질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배척함으로써다. 공동의 적을 만들어냄으로써 우리는 ‘하나’가 된다. “바로 좀 전에 무수한 갈등, 적대 관계 속의 무수한 형제들이 있었던 곳에서 그 구성원 중 하나에 의해 고취된 증오 속에서 단결된 새로운 공동체가 나타난다.” 갈등을 양산하던 모방이 이제는 갈등을 치유하는 ‘치료책’으로 굴절된다. ‘수평적’ 폭력이 ‘수직적’ 폭력에 의해 방출의 기회를 얻고, ‘모방의 폭력’이 ‘폭력의 모방’으로 해소되는 것이다.

따라서 “폭력이 폭력을 추방한다.” 이에 대한 묵시론적 판본은 바로 “사탄이 사탄을 몰아낸다”이다. 결국 되돌아오는 것은 처음보다 더 강력한 폭력이며 더 교활한 사탄이다. 폭력의 ‘간계’이자 사탄의 ‘간계’이다. 지라르가 볼 때 전통적으로 문명은 희생양에 ‘성스러움’의 베일을 씌움으로써 희생양을 만들어내는 논리를 은폐해왔다. 바로 이 지점에서 지라르는 폭력과 성스러움을 접속시킨다. 적어도 희생 제의라는 문제와 관련시켜볼 때 성스러움이란 폭력의 논리에 대한 ‘몰인식’을 강화하기 위해 만든 매혹의 베일에 다름 아니다. 집단적인 폭력은 그 원인에 대해 무지한 상태에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인식론적 전환
여기서 다시 한 번 지라르의 논점 뒤에서 작동하는 이분법은 몰인식과 진리의 분할이다. 희생양을 만들어내는 논리, 희생 제의가 효과를 거두기 위해선 그것의 논리에 대해 당사자들이 몰인식해야 한다. 그는 이미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에서 ‘거짓’과 ‘진리,’ ‘기만’과 ‘진실’이라는 인식론적인 이분법을 동원한 바 있다. 기만과 진실의 이분법은 이제 상상적 거울의 운동 속에서 몰인식과 진리의 이분법으로 표현된다. ‘희생 제의 속의 맹목적인 폭력’이라는 주제는 <폭력과 성스러움> 이후 지라르의 모든 저작들을 관통하는 기본적인 주제다. 하지만 이 주제가 정당한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선 지라르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것이 바로 그가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귀착하는 본격적인 계기가 된다.

(1) 우선 ‘인식론적’ 문제. 즉 만약 이 사회가 폭력의 맹목적인 순환에 기초한 사회라면, 지라르는 어떻게 폭력의 악순환이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는가? 근본적으로 문명과 언어가 희생양을 만드는 “초석적인 살해”와 그 살해의 재생산에 근거한 것이라면, 그리고 그 재생산이 몰인식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그 맹목적인 사회 속에 몸담고 있는 지라르는 어떻게 그러한 진리를 깨달았는가?

(2) 이러한 ‘인식론적’ 문제는 보다 근본적으로 ‘윤리적인’ 문제를 전제한다. 즉 어떻게 폭력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버릴 것인가? 어떻게 폭력에 기대지 않고 폭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폭력의 치료제로서의 폭력이 아니라면 보다 적극적인 해결책은 무엇인가?

바로 이 두 가지 문제가 저자가 폭력의 구조를 파헤치는 비평가적 입장(<폭력과 성스러움>)에서 유대 기독교적 실천가(<희생양>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로 넘어가는 단초이다. 인식론적인 견지에서 볼 때, 지라르는 신화가 아닌 성서의 절대 우위를 주장한다. 폭력의 구조를 해명하는 데에는 신화 분석이 유용하게 쓰이지만, 자신에게 그러한 분석을 가능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 것은 신화가 아니라 유대 기독교적 성서와 복음서라는 것이다. “복음서가 희생양 과정을 엉클어뜨리거나 신화화하는 것이 아니라 신화적인 해석이었다면 신적으로 취급하였을 것들의 순전히 모방적인 성격을 드러냄으로써 희생양 과정의 신비를 벗겨내고 있다.”

물론 현상적으로 볼 때는 반대의 주장을 할 수도 있다. 우리는 신화에서보다 성서에서 더 많은 폭력을 접할 수 있으며, 심지어 성서의 ‘피학적 성격’을 비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라르는 신화에 폭력이 나타나지 않음은 폭력이 부재해서가 아니라, 폭력이 지워져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있음’과 ‘없음,’ ‘많거나’ ‘적음’의 문제가 아니라 ‘은폐’와 ‘드러냄,’ ‘억압’과 ‘계시’의 문제라는 것이다.

지라르에게 모든 텍스트에 등장하는 폭력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다. 폭력은 하나의 현실인 것이다. 하지만 신화는 폭력을 가하는 자에 기초한 텍스트이기에 폭력을 왜곡시키거나 드러내지 않는다. 반면 성서는 폭력을 당한 자의 언어이기에 그 폭력을 ‘폭력’으로 규정하며 그 폭력성의 구조를 ‘계시’한다. 신화는 폭력을 ‘은폐’하거나 ‘신화화’하고, 성서는 폭력을 ‘계시’하고 ‘탈신화화’한다(*이것이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에서 지라르가 반복적으로 대비시키면서 강조하는 바이다). 심층적인 구조 분석을 통해서만 폭력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신화와 달리 성서에선 심층적인 분석이 없이도 폭력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이 단순해 보이는 ‘은폐’와 ‘계시’의 놀이 속에서 우리가 눈여겨볼 것은 지라르의 비평가적 감식안이다. 비평가들은 지라르가 문학 비평을 버리고 인류학으로 전향했다고 비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인류학을 문학 비평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한다. 즉 인류학에서 텍스트는 어디에 위치하는가, 폭력과 텍스트는 어떤 관계인가? 또 텍스트에서 폭력이 위치하는 곳은 어디인가?

폭력을 자리 매김하기 위해 지라르가 원용하는 것은 현대 언어학적 수행론의 성과라 할 수 있는 언표 행위와 언표, 말하는 것과 말해진 것의 이분법이다. 지라르는 신화와 복음서에서 폭력의 위치를 혼동해선 안 된다고 말한다. “신화와 복음서의 차이, 신화의 은폐와 기독교의 폭로의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표현과 표현되는 것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신화에서 폭력이 보이지 않는다면, 이는 폭력이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폭력은 언표 행위의 수준에 있다. 반면 성서에서 폭력은 언표의 내용, 즉 대상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표면에 드러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언표 행위의 주체는 곧 그 폭력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비판하는 자의 위치에 있다.

성서는 신화 속의 폭력을 대상으로 삼아 폭력의 구조를 ‘계시’한다. 따라서 성서는 신화에 대한 ‘메타언어’라 할 수 있다. 성서는 신화 속에 감추어져 있는 폭력의 암호를 해독하고 그것을 지식의 형태로 전환시킨다. 지라르에게 종교적인 ‘계시’란 바로 이러한 ‘인식론적 전환’을 말한다.

폭력에 대한 이러한 상이한 자리 매김은 폭력을 당한 자에 대한 상이한 가치 평가를 수반한다. 신화에선 희생양이 죄인으로 그려지는 반면(이 점에서 지라르가 가장 오이디푸스(적)이다), 성서에선 희생양이말 그대로 희생양으로 그려진다. 가령 “예수는 희생양이다”라는 문장을 생각해보자. 이는 예수를 희생양으로서 규정함으로써 그의 무죄성을 전제하는 문장이다. 언표 행위의 주체가 예수의 무죄성을 항변하고 있는 것이다.

지라르는 신화적 세계관, 다신교, 이교도에서 유대 기독교적, 유일신교적 세계관으로의 이행을 ‘혁명’이라고 표현한다. “박해자의 환상을 처음으로 기록하면서 <구약 성서>는 혁명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이는 정확히 인식론적 혁명이다. 희생양의 메커니즘에 대해 몰인식하도록 만드는 신화의 왜곡(“환상”)을 계시(“기록”)한다는 점에서 인식론적인 혁명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혁명은 단순히 인식론적 혁명에 그치지 않는다. 유대 기독교적 세계관이 가져온 혁명은 또한 폭력의 ‘악무한’을 깨뜨리는 적극적인 전략을 겸비하고 있다. 즉 ‘윤리적’ 혁명인 것이다.

미메시스의 윤리
그렇다면 성서-복음이 가져온 윤리적 혁명이란 무엇인가? 지라르에게 인간은 언제나 모방하는 존재이다. 이러한 모방으로부터 갈등이 시작하고 폭력이 출발한다. 모방이 폭력의 악순환을 초래한다면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선 모방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일까? 이러한 물음 앞에서 지라르는 자신의 전제를 폐기하지 않는다. 즉 인간은 모방이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지라르에게 남은 길은 모방의 가치론이다. 다시 말해 ‘좋은 모방’과 ‘나쁜 모방’을 구별하는 것이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에서 지라르는 두 가지 모델을 구분한다. “하나의 모델은 탐욕이 적어서 어떤 것도 경쟁적으로 욕망하지 않기 때문에 절대로 그 추종자들이 장애물이나 경쟁자가 되지 않고, 또 다른 모델은 탐욕이 아주 많아서 그 추종자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친다.” 좋은 모델이란 모방 관계를 갈등의 경쟁 관계로 만들지 않을 경우를 말하는데, 그것은 곧 신이다. 그리고 두번째 모델, 그 추종자들을 탐욕스럽게 만드는 탐욕스런 모델은 바로 사탄이다.

결국 좋은 모방이란 신을 모방하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신의 좋은 욕망을 모방하는 것이다. 모방 욕망이 아닌 욕망, 자기 것으로 삼으려는 욕망이 아닌 금욕적인 욕망, 상대를 죽이는 경쟁적 욕망이 아니라 비경쟁적 욕망을 모방하는 것이다.

물론 경쟁적 모방과 달리 이러한 좋은 모방이 가능하기 위해선 또다시 ‘매개자’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인간이 맹목적인 모방의 원환 속에 갇혀 있는 한 신이라는 좋은 모델, 좋은 욕망을 알아볼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신을 직접적으로 모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신에 대한 모방을 매개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예수와 ‘예수의 말씀,’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예수의 욕망’이다.(*아래 그림은 러시아 화가 이반 크람스코이의 '황야의 예수'[1872])

예수는 신을 모방하고자 한 최초의 인간이다. 따라서 신을 모방하기 위해선 예수에 대한 모방을 경유해야 한다. 그렇다면 예수를 모방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곧 모방을 모방하는 것이다. 즉 “신을 모방하는 것을 모방하는 것이다.” 예수의 말씀은 신화의 암호를 해독하는 인식론적인 혁명이면서, 동시에 신이라는 모델을 비경쟁적 관계에서 추구했던 최초의 모델이라는 점에서 윤리적인 혁명이다.

결국 지라르의 원환은 완벽하다. 나쁜 모방의 악순환을 깰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좋은 모방이지만, 이러한 모방은 ‘신적인’ 것이기에, 매개적인 모방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폭력 구조의 해명에 있어서도, 그러한 폭력의 악순환을 벗어나는 해결책 모색에 있어서도 자신이 최초에 상정했던 모방 가설을 폐기하지 않는다.

인간은 모방하는 존재라는 전제에서 출발한 지라르는 결국 모방의 가치론과 윤리적인 실천의 문제로 귀착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다시 그러한 윤리적 실천의 핵심은 ‘모방론’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바로 지라르 논리의 원환 구조이다. 자신이 최초에 설정한 한계를 깨뜨리기 위해서 그 한계 속에서 스스로 해답을 찾아낸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이 지라르에게서 반인간주의적 욕망론과 기독교주의로의 회귀가 봉합되는 곳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06. 06. 26.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06-06-26 23:46   좋아요 0 | URL
퍼갑니다^^ 맹정현 씨는 라깡에 대해서 해박하시다는 그 분 맞죠?

로쟈 2006-06-26 23:52   좋아요 0 | URL
아직 정리도 안됐는데요(--;). 맞습니다. <라캉의 재탄생>에 그의 논문들이 실려 있습니다. 흔히 FM이라고 그러죠. 학위를 마치고 귀국했을 법한데, 좀 오래 걸리네요...
 

북매거진 <텍스트>로부터 이메일 인터뷰 요청을 받고서 답한 초안의 내용을 옮겨놓는다. 분량상 책에는 얼마간 걸러진 다음에 게재될 것이다. (-)가 질문이고 (=)가 그에 대한 답변이다.  

-‘로쟈’라는 이름에 관해서 직접 말해달라. 그 이름은 자신을 얼마만큼 반영하고 있는지도 더불어...

 

=이런 자리를 마련해주어서 감사하다. 어떤 용도가 될는지는 의문이지만 이 또한 자기 존재감의 과시이면서 자기 존재의 '확장'일 테니까. 물론 이건 모두 '로쟈'가 열심히 끄적거려준 덕분이다. 어느 자리에선가 밝혔는데, '로쟈'는 <죄와 벌>의 주인공 로지온 라스콜리니코프의 애칭이다(즉, 로지온의 애칭이다). 교양있는 분들은 로자 룩셈부르크를 대개 연상하고서 '여자' 이름이 아닌가로 판단하는데, 로쟈는 '혁명가'가 아니라 '살인자'의 이름이다(혹 '박노자'의 닉네임이 아닌가란 의견도 예전엔 있었다.^^).

 

인터넷에서 글쓰기를 처음 시작한 게 지난 99년부터인데, 초기엔 '이가두' '이가휘' 같은 중국풍의 닉네임을 한동안 쓰기도 했다. 그러다 '로쟈'로 정착된 건 기억에 <죄와 벌>을 다시 읽을 필요가 생기면서부터였다. 보르헤스가 언젠가 '보르헤스와 나'란 글을 쓴 적이 있는데, '나와 로쟈'도 비슷하다. 많이 닮았지만 똑같지는 않다. 그는 나의 페르소나(가면)이면서 대변인이고 때론 주인이면서 동시에 하인이기도 하다. 그래도 가장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의 '책읽기 주체'라고 해야 맞을 듯하다. 그런 말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bibliological subject' 정도라고 해두자. '나는 책을 읽는다, 고로 존재한다'란 명제로부터 탄생하는 어떤 주체.

 

-당신의 알라딘 활동(?)이나 비평고원 활동(?)은 이른바 ‘업계(책을 읽고 쓰길 좋아하는 사람들을 포괄하는 의미에서)’에서는 꽤 유명한 편이다. 그들 중 상당수는 당신의 독서편력에 혀를 내두른다. 당신의 그런 현재를 있게 한 책읽기의 시작점이 궁금하다.

 

=내가 글을 쓰는 공간은 그 딱 두 군데인데, 해놓은 일에 비해서는 '이름'이 많이 알려졌다고 한다. 오역에 관한 지적들을 자주 하면서 출판 동네에 '요주의 인물'로 찍혀서 그런지도 모르겠고. 해서, '내성적인' 성격과는 좀 다르게 많이 나서는/나대는 인물이란 인상도 주는 듯하다(나는 책 얘기가 나오지 않는 대부분의 자리에서 '조용한' 편이다!).

 

'비평고원' 같은 카페는 내가 선택한 것이지만(나는 초창기 멤버인데, 내가 운영하는 카페에서보다도 더 열심히 '활동'했다), 알라딘의 서재 같은 경우는 어느날 뚝 떨어진 것이다. 알라딘은 책값 좀 벌어보려고 마이 리뷰를 몇 개 쓰다가 (지금은 없어졌지만) '명예의 전당'에 오르기도 해서 나름대로 애착을 갖고 있는 공간이다. 그렇다고 리뷰를 많이 쓴 건 아니고 아마도 유명세의 8할은 '페이퍼' 때문인 듯하다. 책에 대한 잡담들.  

 

'독서편력'이라고 하면 좀 부끄럽다. 생각만큼 책을 많이 읽는 건 아니기 때문에. 그건 독서의 성격과도 좀 관계가 있는데, 문학 전공자라서 자연스레 갖게 된 태도이기도 하지만, 나는 '자세히 읽기'가 필요한 책이 아니면 손에 잘 들게 되지 않는다(더불어 책을 빨리 읽는 편도 아니다). 그럼에도 많이 읽는 것처럼 비치는 것은 '아는 체'를 많이 해서인 듯한데(보수만 두둑이 준다면 앉은 자리에서 하루 종일 책 이름들을 적어나갈 수 있다), 사실 책들을 둘러보고 찾아보고 하는 일들을 즐기는 편이긴 하다(주변에선 내 전공이 '서지학'이라고 말하곤 한다).

 

한데, 그건 '독서편력'이 아니라 '도서편력'이라고 해야 맞겠다. 어쩌면 '편력'도 정확하지는 않다. <어린왕자>에 보면 지리학자가 사는 별이 나오는데, 그는 여행자들이 보고 온 내용을 책에 기록하기만 한다. 즉, 그가 하는 건 편력이 아니라 기록이다. 나는 책들의 성좌, 문학과 사상의 '지도'를 작성하는 데 취미가 있다.      

 

책읽기의 시작점? 어머니 말씀으론 내 당사주에 그렇게 나와 있다고 한다. 백발 도사가 책을 읽는 모습이 나의 당사주라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여하튼 8살 때쯤 동네 친구네 집에 놀러갔다가 책꽂이에 소년소녀 세계문학전집이 좍 꽂혀 있는 걸 보고 경이감을 느낀 적이 있다(우리 집에는 낱권으로도 책이 별로 없을 때였다). 어쩌자고 세상엔 도대체가 아무것도 없지 않고 책이란 게 있는 것일까?! 그러한 책의 존재 자체는 30년이 지난 지금도 경이롭다(여성들 또한 경이롭지만, 그들은 책만큼 친절하지 않다!).  

 

-당신의 글쓰기는 인터넷이라는 사이버 공간에서 활발하게 이뤄지는 편이다. ‘인터넷’이 글쓰기와 관련하여 갖는 어떤 의미가 있나? 지면을 허락받는 게 아니라, 지면을 스스로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자유로움을 느끼는 것인가?

 

=사이버 공간이란 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 건 아니다. 원래 독서일기 같은 걸 PC에다 쳐넣곤 했으니까. 다만, 공개된다는 게 다를 뿐인데, 사실 그게 ‘특별한’ 의미를 갖긴 한다. 좀더 친절하게 좀더 풀어써야 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지면을 스스로 만들 수 있다는 자유로움과는 별개로(그건 별로 의식해보지 못했다) 오프라인에서라면 가능하지 않은 글쓰기라는 걸 얼마간 의식하고는 있다. 그건 자유로움이면서 동시에 어떤 막연한 슬픔 같은 것이기도 하다.

‘곁다리 텍스트’라고 부르는 것에 나는 애정을 갖고 있는데, 가끔씩 들어오는 청탁을 받고 쓰는 게 아닌, 온라인에 직접 쓰는 글들의 대부분은 ‘곁다리 텍스트’들이다. 번듯하지도 않아서 내세우기에는 멋쩍은. 그래서 ‘책’으로 묶이지 않을 텍스트들. 그런 텍스트들을 모아놓을 수 있다는 점이 인터넷 공간의 특장이고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은 외국문학, 특히 러시아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당신의 학과 진학이 우연의 산물이라고 치더라도(아니라면, 그 이유도 물론 궁금하거니와), 그것을 당신의 업으로 삼은 것은 엄연히 당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문학을 한다는 것, 러시아 문학을 한다는 것이 당신을 위태롭거나 공허하게 한 적은 없는가(여기서의 위태로움은 경제적인 위태로움에 관한 것은 아니다).

 

=러시아문학을 전공으로 고른 것은 운명이다.^^ 나는 예정조화설 같은 걸 믿기도 하고(‘예정파국설’이어도 무방하다). 애초에는 그냥 ‘문학’을 전공한다는 생각이었고, 러시아문학에 큰 작가들이 많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 ‘경제적인 위태로움’을 논외로 하면, 문학이나 러시아문학을 공부한다는 사실에 회의를 느낀 적은 거의 없다. 동료들끼리는 상투적인 푸념들을 늘어놓지만 그건 내가 좋아서 하는 일에 주변 사람들의 ‘희생’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문학이란 성채는 인간들이 써놓은 최우량의 텍스트들로 구성된다. 이 텍스트들을 읽고 음미하는 일을 (조금 미안한 얘기지만) 고답적인 어투의 육법전서 따위를 읽는 것과 어찌 비교할 수 있겠는가? 물론 이러한 오만의 대가는 현실에서 톡톡히 치르고 있다.^^ 

 

한편으로, 질문은 ‘외국문학도’로서의 한계 같은 걸 느낀 적은 없는가, 라고도 읽히는데, 전공에 국한하여 말하자면 내가 목표로 하는 건 ‘러시아문학에 대한 이해’라기보다는 ‘러시아문학에 대한 한국인의 이해’ 혹은 ‘러시아문학에 대한 나의 이해’이다. 충분히 행복하고 보람된 일이다. 그저 인생이 짧다는 게 한스러울 뿐(이미 나는 내가 갖고 있는 책들을 다 읽기 전에 죽을 운명에 처해 있다).   

 

-당신은 이전에 <텍스트>에 출판번역의 오류에 관해서 글을 쓴 적도 있다. 번역 문제에 관하여 글을 쓸 때, 당신은 더욱 집요하고 철저한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비단 당신의 전공인 ‘노어->한국어’의 경우에만 해당하는 것도 아니다. 외국문학을 공부하는 동안 특별히 이런 작업에 대해서 더욱 날카로워진 것인가?

 

=나는 한국어를 사랑하지만, 한국인이 한글로 쓴 책만 읽고서 무얼 좀 알게 되고 또 똑똑해진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유감스럽지만 현실이 그렇다고 본다. 때문에 필요한 것이 좋은 번역이다. 특히나 고전들의 번역(‘우리시대의 고전’들을 포함해서). 기본적으로 좀더 많은 책들이 좀더 정확하게 번역되어야 한다. 그게 총론이다. 번역상의 오류 등에 대한 지적은 각론에 해당한다. 읽을 만한 책을 읽고 싶다는 개인적인 바람도 거기엔 겹쳐 있다. 더구나 내 돈 주고 산 책 아닌가?

 

그러한 작업과 관련하여 외국문학 전공자라는 정체성을 크게 의식한 적은 없다. 사실, 내가 문제삼았던 책들은 대부분 문학서들이 아니라 철학서나 이론서들이었다. 나는 그 책들이 교양서라면 일반 대학생들이 읽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적어도 한국어로 된 책 아닌가?). 하지만, 현실이 그렇지 않다.

 

한 지방대학에서 문화기호학 같은 과목의 강의를 한 적이 있는데, 시키지 않았는데도 어려운 이론서들을 읽다가 나가떨어지는 학생들이 더러 있었다. 아무래도 머리가 나쁜 듯하다면서. 그런데, 그들이 읽은 책들 가운데도 주어 술어도 못 맞추는 오역서들이 적지 않았다. 이런 게 ‘학문’이고 ‘관행’이라면 어처구니없을 뿐더러 비참한 일이다. 좀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그런 책들과 함께 우리가 ‘인간적인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당신은 교육 잘 받은 세대로서 풍요로움과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그러나 직업을 유전 받지 못한 세대로서의 곤궁함과 난처함 또한 당신의 몫이다. 당신의 풍요로움과 곤궁함에 관해 듣고 싶다.

 

=교육 잘 받은 ‘세대’라는 건 무슨 뜻인가?(어느 세대와 비교해야 하는 것인가? 아버지 세대?) 교육 ‘잘 받은’은 대학원졸을 의미하는 건가? 그런데 백수인? 나의 ‘실상’을 까발려놓으라는 얘기 같다.^^ 나의 풍요로움은 물론 책이다. 책밖에 없기도 하다. 가진 재산이라고는(지방 도시의 아파트 한 채 값 정도는 책값으로 들어갔으니까). 그러니까 나의 곤궁함은 정확히 그 풍요로움이 낳은 것이다. 그리고 그때의 곤궁은 확산력이 있어서 주변 사람들이 모두 곤궁에 시달린다(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시달린다!). 이런 문제를 자세히 늘어놓는다는 건 궁상맞은 일이다.^^  

 

-사람들은 늘 ‘(인)문학의 위기’에 대해서 말한다. 어느 때도 인문학이 위기에 놓이지 않은 적이 없었다는 점에서, ‘인문학의 위기’란 인문학적 역사가 된 듯싶다. 이것이 비록 상투적인 얘기가 되어버렸다고 한들, 당신 나름대로의 대답을 갖고 있을 텐데 (그것이 비록 상투적이라고 하더라도) 들려달라.

 

=사안은 좀 다르지만 문학이고 인문학이고 늘 위기였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회고적으로라도 ‘그때가 좋았지!’ 할 만한 시절은 있는 법이니까. 더불어, 나는 (인)문학 자체의 위기에 대해서는 별다른 느낌을 갖고 있지 않다. 사회 속에서의 위상이 저하되고 있다든가 필요가 절하되고 있다는 식의 평가는 가능하겠지만 (인)문학 혼자 억울할 일은 아닐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건 인문학자의 위기, 내지는 인문학 후속 세대의 위기이다. 물론 이 위기의 빌미는 태생적인데, 그것은 (인)문학이 기생적이라는 데 있는 듯싶다. 자기 스스로 밥벌이하는 게 아니라는 것. 보다 실감나게 말하자면, (인)문학 ‘공부’가 기생적이다. 이 공부는 있는 집 거덜내고 없는 집 주저앉게 한다. 한마디로 멜랑콜리한 공부이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서 적극적인 해답을 갖고 있지 않다. 굳이 있다면 생태학적이고 진화론적인 것이다. 학문 후속 세대를 배려하고 격려하는 사회와 그렇지 못한 사회가 있을 법하다. 그들은 각자의 풍토에 맞는 인문학의 부피와 깊이를 갖게 될 것이다.  

 

-인문학적 공간(혹은 장) 안에서 자신을 바라봤을 때, 현재의 당신의 자리는 어떠하며, 미래에는 어떨 것 같은가?

 

=정확하게 이해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내게 주어진 자리가 있고 찾아가야 할 자리가 있다. 즉, 해야 할 몫이 있고 나잇값이 있다. 그리고 하고 싶은 일, 해야 할일은 많다. 물론 일차적인 관심은 그것들을 구체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리보다 중요한 것은 책임이다. 인문학도로서 나는 우리 사회에서 인문학의 지분을 넓히면서 인문학이 더 많은 책임을 떠안도록 하는 데 일조하고 싶다. 인문(人文)은 ‘사람의 무늬’란 뜻도 갖고 있지만, 한편으로 인문학의 책임은 우리가 ‘무늬만 사람’인 이들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너나 할 것 없이 기본적으로 많이 읽어야 하며, 제대로 읽어야 한다. 그럴 수 있는 환경을 만든다는 것이 중요하다.  

 

-당신은 자기 고백적인 글을 쓸 때, 시와 시인을 인용하곤 한다. 그리고 어느 글에서인가 ‘시를 읽지않는 사람들’에 대해서 날카로운 태도를 취한 바 있다. 시(인)란 당신에게 무엇인가?

 

=‘시를 읽지 않는 사람들’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했었나?^^ 20대 초반에 많은 시들을 읽었고 몇 권 분량의 시도 썼다. 인문학이란 궁극적으로 ‘말과 사람’에 대한 관심이고 사랑이다. 시라는 건 그러한 관심/사랑의 최적의 표현이 아닐까 싶다. 프랑스의 시인 르네 샤르는 시를 ‘영혼의 끼니’라고 불렀는데, 나는 그러한 끼니로 ‘비만한’ 영혼들을 좋아한다. 한편으론 ‘찌라시’ 수준의 강파른 언어를 혐오하고. 물론 시인들은 그런 ‘끼니’가 될 만한 시들을 쓸 책임과 의무가 있다. 저급한 시들로 식중독이나 걸리게 하면 안된다.   

 

-당신에게 있어서, 혹은 당신의 글쓰기에 지식이란 어떤 쓸모를 갖는가? 당신은 주로 이론적이고 논리적인 글을 쓰는 편이다. 그렇지만, 러시아에서 보내온 ‘편지’들을 돌이켜보면, 시적인 감수성으로 씌어진 글을 쓰고 싶어하는 욕망도 엿보인다. 현재 당신의 글쓰기는 당신을 얼마만큼 드러내고 있는가.

 

=<텍스트>는 나에 대해서 너무 많은 걸 알고 있다.^^ 이론적이고 논리적인 글들이 원래 체질에 잘 맞는 건 아니다. 러시아인들이 대개 그렇듯이 나도 주정적인 면이 강하다. 한데, 그러한 면이 걸러지지 않은 채로 드러나는 걸 혐오하는 편이다. ‘시적인 감수성’이 ‘너절한 감상’을 의미할 수는 없다. 그런데, 시는 그냥 언어만이 아니다. 시는 삶이고 삶의 파토스이다. 나는 니진스키의 일기를 시로 읽는다. “나는 울고 싶은데 신은 내게 쓰라고 명령한다. 그는 내가 빈들거리는 걸 원하지 않는다. 아내는 울고 또 운다. 나 역시 운다...”라는 걸 읽으며 나는 울고 싶지만, 대신에 쓴다. 이러한 울음이 감상으로 함부로 절하되는 걸 혐오하고 경계하기 때문에 이론적이고 논리적으로 쓴다. 다른 뾰족한 수가 있는가?   

 

-지금 당신은 진정 쓰고 싶은 글을 쓰고 있는가?

 

=마지막 질문은 의외이다. 보통은 “당신이 진정 쓰고 싶은 글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게 예의 아닌가?^^ 아무래도 쓰고 싶은 것보다는 써야겠다는 걸 더 많이 쓰게 된다. 만약에 직업이 ‘공부’가 아니라 전업 작가라면 한두 달에 한권씩 책을 낼 만큼 쓸 생각도 있다. 어쩌면 그게 더 ‘자아실현’에는 도움이 될는지도 모르겠다. 한데, 문제는 내가 쾌락적이면서 또한 너무 금욕적이기도 하다는 데 있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한다. 하지만, 아주 조금씩만 한다. 나는 진정 쓰고 싶은 걸 내내 아주 조금씩만 쓰게 될 듯하다...

 

06. 06. 26.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3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parioli 2006-06-26 1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 리플이 저에게 남겨졌네요. ^^
로쟈님이 이렇게 대단하고 유명한 분인지 미처 몰라뵈었네요.
우연히 알게 되어 영광입니다~

3794 2006-06-26 1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성들 또한 경이롭지만, 그들은 책만큼 친절하지 않다!

그런데 택스트 라는 잡지는 어디서 구해야 하나요? 지방이라서 안보이는 걸까요?

로쟈 2006-06-26 2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gandhikr님/ 제가 그래도 알라딘에서는 제법 유명한 축에 속합니다(험험)...
양민님/ <텍스트>는 무가지이지만 정기구독이 가능하며 그 경우에는 구독료가 있습니다. text@texttata.com으로 문의해보시길...

기인 2006-06-26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홋홋; 저에게는 책이 여성들만큼 친절하지 않은데요? ㅎㅎ 역시 아직 젊고 학식이 짧아서 그런지. 아님 워낙 인기가 많아서 그런지. ^^; 농담입니다. (여성들이 책보다 친절한 것은 진담이고요 ^^;;;; ) 안 그래도 학부때 저에게 엄청나게 매몰찼던 헤겔을 다시 읽어보려고 세미나를 조직했습니다. 이번에는 거절당하지 않아야 할텐데, 걱정입니다. 독어를 못하는 저로서는 영역본과 국역본을 가지고 꾸준히 구애해볼 수 밖에요. ^^
항상 로쟈님 글 읽고 도움 많이 받습니다. :)

로쟈 2006-06-26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절한 쪽으로 더 많이 투자하십시오(헤겔은 다이제스트 정도로 때우시구요).^^

가을산 2006-06-27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로쟈 룩셈부르크인 줄 알았어요.
(그래서 '그녀'라는 소리도 들으시잖아요?)

2006-06-27 14: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6-27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답글은 안주셔도 된다고 하셨는데, 약간의 오해가 있으신 것 같아서.^^ 사진처럼 운동장 수준의 서재가 있다면 다행이겠지만 그럴 리는 없지요.^^ 어느 외국서점의 이미지일 겁니다...

Joule 2006-06-27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만 잘 쓰시는 게 아니라 말씀도 굉장히 잘 하시네요. 로쟈님처럼 답을 맛나게 잘하시는 분들만 있으면 인터뷰어도 할 만한 일이겠어요.

2006-06-27 16: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6-27 1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산님/ 교양이 있으시군요.^^
joule님/ 이게 이메일 인터뷰니까 제가 말로 한 게 아니라 글로 쓴 건데요(^^;)...

Joule 2006-06-28 00: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도대체 텍스트를 이렇게 건성으로 읽어서야 원. 쯧. (민망해서 괜히 한 마디)
 

<미국의 민주주의>의 저자로 널리 알려져 있는 프랑스의 사상가 알렉시스 드 토크빌의 <앙시앵 레짐과 프랑스혁명>(박영률출판사, 2006)이 최근에 출간됐다. 겸사겸사 토크빌에 관한 자료 몇 가지를 모아놓는다. 작년에 탄생 200돌을 맞았던 그의 삶과 사상에 관한 간단한 소개기사와 번역된 두 주저에 관한 서평들이다.  

동아일보(05. 07. 27) "佛 자유주의 사상가 토크빌 탄생 200돌"

-(*2005년 7월) 29일은 <미국의 민주주의>의 저자로 유명한 프랑스의 자유주의 사상가 알렉시스 드 토크빌(1805∼1859)의 탄생 200주년이 되는 날이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토크빌 200주년을 기리는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 미국에서는 예일대와 토크빌학회가 공동으로 9월 30일∼10월 1일 예일대 바이네케 도서관에서 공동학술대회와 전시회를 개최한다. 유럽에서는 11월 18∼20일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유럽에서의 민주주의에 대하여’라는 주제로 국제 기념 학술대회가 열린다.

-프랑스 명문 귀족 출신인 토크빌은 1831년 26세의 젊은 나이로 7개월간 미국을 방문한 뒤 귀족주의를 포기하고 민주주의가 시대적 대세임을 선언했다. 그는 프랑스 혁명을 진압한 비엔나 체제라는 복고주의가 팽배한 유럽에선 낯설게만 느껴지던 신대륙 미국의 민주주의의 힘이 ‘조건의 평등’에서 나온다는 점을 꿰뚫어 봤다. 귀족 출신의 젊은이답게 평등보다 자유를 고결한 가치로 봤던 그는 그러나 미국 방문 후엔 ‘자신의 눈에 인간 쇠퇴로 보이는 것이 신의 눈에는 발전으로 비친다’는 말로 평등을 더 강조하는 민주주의를 신의 의지로까지 격상시켰다.



-이 때문에 토크빌은 미국에서 ‘프랑스적 규범(canon)과 미국적 규범 모두의 구성원임을 선언할 수 있는 유일한 프랑스인’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미국식 민주주의를 절대 선으로 믿는 조지 부시 대통령도 애독서로 <미국의 민주주의>를 서슴없이 꼽을 정도다.

-그러나 170년 전 토크빌의 사상이 오늘날 다시 르네상스를 맞고 있는 것은 그의 민주주의에 대한 찬사 때문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한 그의 경고에서 찾아야한다는 게 학자들의 지적이다. 토크빌은 민주주의의 원동력인 평등에 대한 열망이 무질서와 노예 상태를 불러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는 ‘민주주의의 위기’가 거론되는 미국과 ‘민주주의 이후의 새로운 질서’를 고민하고 있는 한국의 정치현실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최장집 교수가 진단하는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와는 어떻게 다른가?).

-서병훈(정치학) 숭실대 교수는 “토크빌은 민주주의가 ‘시기하는 감정이 충만한 정치체계’라는 점에서 지적으로 뛰어난 사람을 싫어하는 평등제일주의를 낳고 한편으론 개인주의와 결합해 독자적 판단능력이 없는 개인들의 고립을 심화시킴으로써 다수의 익명에 자신을 숨기는 방식으로 ‘수의 권위’에 대한 순종을 낳을 수 있음을 경고했다”고 말했다. 

 

 

 



-토크빌은 미국에서 위대한 정치가가 등장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말했다. 그 같은 경고는 미국의 대통령선거에서 갈수록 비범함과 거리가 먼 인사들이 선출되는 문제점을 정확히 예측하고 있다. 또한 다수의 결정 앞에서는 누구나 입을 다물어야 하는 반(反)엘리트주의와 평등제일주의가 지배하는 한국정치의 현실에 대한 지적같이 들리기도 한다(*사회적 불평등과 양극화를 한국사회의 가장 큰 문제라고 보는 진보진영의 시각과는 얼마나 다른가?). 토크빌의 이런 사상은 내년에 탄생 200주년을 맞는 영국의 존 스튜어트 밀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토크빌이 폐결핵으로 갑자기 숨진 이후 ‘다수의 횡포’를 비판한 밀의 자유주의 사상으로 꽃피게 된다.

 

 

 



-김비환(정치학) 성균관대 교수는 “귀족주의적 자유주의자였던 토크빌이 궁극적으로 옹호했던 것은 자유였지만 그는 미국을 통해 평등의 참된 가치를 수용했다”면서 “다수의 지배를 주장하는 민주주의가 도덕적, 문화적 획일주의와 ‘부드러운 전제정치(soft despotism)’를 낳을 수 있다는 토크빌의 경고는 오늘날 더 유효하다”고 말했다.(권재현 기자)

동아일보(05. 07. 04) 알렉시스 드 토크빌, <미국의 민주주의>(고전해제)

-토크빌은 예리한 관찰자요 심오한 예언자다. 미국을 불과 7개월 여행하면서 미국 민주주의의 장점과 한계를 면밀히 파헤쳤으며, 장래 미국과 러시아가 두 세계 강국으로 등장할 것이라고 정확히 예측했다. 미국 사회가 프랑스 사회보다 민주적인 이유를 토크빌은 미국의 활성화된 지방자치, 자발적인 결사체, 배심원제도 등에서 찾았다. 이것들이 국가권력의 집중과 전제화 경향을 억제하고 다수의 횡포에 대항하여 소수의 권익을 보호하며 시민들의 공공의식을 함양시켜 준다.

-민주주의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제도뿐 아니라 관습도 중요하다. 프랑스가 대혁명 이후 다양한 헌정질서와 정치제도를 고안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달리 민주주의를 성취하지 못한 이유는 두 나라 사이의 상이한 관습에 있다. 흥미롭게도 토크빌은 당시의 급진자유주의자들 및 사회주의자들과 달리 자유와 평등을 이율배반적인 것으로 보았다. 민주사회에서 사람들이 자유와 평등 두 가지를 모두 추구하지만 자유보다는 평등을 선호하기 때문에 평등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유를 포기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시민들은 자유를 물질적 복지를 추구하기 위한 방법으로 선호하기 때문에 자유가 번영을 위협하는 상황에서 물질적 복지와 조건의 평등을 위해 기꺼이 자유를 희생할 것이라는 견해다. 특히 자유는 획득하기도 어렵고 그 이점도 잘 보이지 않는 반면 평등은 그 이점이 매우 즉각적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평등을 더 선호하게 된다는 것이다.

 

 

 

 

-토크빌은 평등화의 경향으로부터 오는 민주적 전제주의의 가능성뿐만 아니라 개인주의로부터 오는 민주적 전제주의의 위험성에 대해서도 경고했다. 민주사회에서 개인주의가 만연하게 됨에 따라 사람들의 삶은 서로 고립되고 서로를 연결시켜 주던 전통적인 유대는 거의 모두 해체된다. 게다가 조건의 평등과 물질적 복지에 대한 애착으로 중앙정부의 기능은 강화되고, 이로 인해 국가와 개인 사이에 전통적으로 존재하던 교회, 가족, 길드, 지역공동체 등 거의 모든 중간집단은 약화된다.

-대중의 여론도 전제주의를 부추긴다. 개인주의가 만연하게 됨에 따라 개인들의 다양한 의견보다는 다수가 형성한 여론이 오히려 더 강한 지적·도덕적 권위를 행사하게 된다. 이로 인해 개인들은 다수의 의견에 복종하고 거기에 안주함으로써 책임을 회피한다. 정치적 무관심 또한 문제다. 정치가 시민들의 관심으로부터 떨어져나갈 때 사적인 이해관계가 공적영역을 침범하게 된다. 현대사회의 병폐라 할 로비문화와 정경유착이 나타나는 맥락이다.

-파리의 유서 깊은 귀족가문에서 태어나 다양한 행정경험을 쌓은 토크빌의 사상은 보수주의와 자유주의를 넘나들 정도로 독특하고 뛰어나서 당대의 정치사상가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미래 민주사회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파악하고 있다. 그가 우려했던 대로 자유의 자발적 포기, 평등에 대한 열망, 다수의 횡포, 그리고 로비문화와 정경유착 등은 오늘날 미국을 위시한 여러 민주주의 나라들에서 나타나고 있다. 선후진국들이 겪고 있는 자유와 평등 사이의 갈등 또한 풀어가야 할 중대한 과제다.(임현진 서울대 기초교육원장)

조선일보(06. 06. 24) "자유를 잃은 혁명은 독재를 낳는다"

-프랑스의 사상가·정치가 토크빌(1805~1859)의 이책은 그가 죽기 3년 전에 자신의 모든 역사사회학적 지식과 학문적 역량을 기울여 저술한 대표작이다. 이책은 우리 독자에게도 익숙한 초기 저작인 <미국 민주주의>와 함께 토크빌의 양대 저작을 이루며,‘ 미국 민주주의’에서 시작된 프랑스 민주주의의 성숙이라는 문제의식을 평생을 고뇌하며 뼈를 깎는 노력으로 완성한 명작이다.



 

 

 

-이 책이 던지는 핵심 질문은 어째서 프랑스에서 가장 먼저 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는가라는 것이다. 그리고‘자유·평등·박애’라는 현대 민주주의 사회의 이념적 기반을 인류 최초로 성공적으로 완성한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이 어떻게 개인들의 정치적 자유를 억압하는‘민주적 독재’의 사회로 변질되어갔는가 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토크빌의 설명은 후대의 역사학자와 사회학자들이 프랑스 혁명에 대한 자유주의적(또는 수정주의적) 해석이라고 부르게 된 이론적 틀을 제시한 선구자적 작업이었다.

-토크빌에 따르면, 프랑스 혁명의 첫째 요인은 구체제(앙시앵 레짐) 때부터 시작된 프랑스의 지나친 중앙집권화 된 획일적 통치 방식이다. 둘째는 프랑스만의 독특한 절대왕정체제 하에서 정치적 결사와 시민적 자유가 결여됐기 때문에 과거의 특권계급인 귀족과 새롭게 등장한 지배계급인 부르주아 사이에 철저한 분리와 불신이 이루어져서 그들 사이에 국가를 통치하는 방식에 대한 합의를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군주정 최고의 번영기를 누렸던 루이 16세는 인민의 부담을 덜어주려는 다양한 정책적 노력을 기울였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국민들에게 봉건적 잔재들이 가장 참을 수 없는 구체제의 속박으로 느끼게 만들었다. 그래서 시민들이 계기만 주어지면 기존의 정치·사회체제를 혁명적으로 거부할 수 있는 정서를 갖게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의 혁명가들은 귀족계급을 현대사회의 법 정신에 맞게 복종시킴으로써 그들을 새로운 엘리트 계급으로 만드는 대신에 타도해버렸다. 그리고 이와 함께 현대사회라면 반드시 필요한 엘리트 계급과 그들의 덕목들-용기·모험정신·사회적 책임의식·창의성·지도력 등-을 함께 잃어버렸다. 또한 오랜전통을 지닌 기독교 정신을 인위적으로 대체한 반(反)기독교적 정서의 민주주의 이데올로기는 평등의 정신을 일방적으로 강조했다. 그 결과 시민들의 물질적 번영과 안락한 생활이 위협 받을 때 자유를 희생해 가면서까지 평등과 복지를 추구하게 만드는 전제주의에의 길을 열어놓았다는 것이다.

-게다가 당시 프랑스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 계몽철학적 문필가들은 전문성과 경험적 사실을 무시한 추상적 시민관과 사회관을 가졌다. 이들은 머리 속에서만 가능한 정의관을 시민에게 가르침으로써, 당면한 문제들을 구체적 사실과 경험에 입각해서 논의하고 전문가들의 자문을 받아 실용적 해결책을 찾는 방식을 경멸하게 만들었다.



-프랑스의 석학 레이몽 아롱은 1968년‘5월 혁명’을 계기로 맑시즘이 다시 부활하고 프랑스 사회가 큰 혼란에 빠졌을 때 반드시 일어야 할 필독서가 토크빌의 저서라고 주장했다(*얼마 되지 않는 레이몽 아롱의 번역서들은 모두 전사한 듯하다). 이 책은 또한 프랑스의 ‘5월혁명’에 준하는 좌파 지식인과 민중운동가들의 실험을 경험한 최근 10년간 한국 사회의 혼란에 대한 사회학적 진단과 처방의 단초도 제공한다.(민문홍 서울대 국제대학원 전임연구원·사회학)

(*)그러니 요즘 분발하고 있는 우파/신우파 지식인들도 토크빌을 열심히 읽어주면 좋겠다. 그게 한국민주주의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듯하니까. 더불어 자신을 좌파라고 간주하는 이들도 <공산당 선언>보다는 <미국의 민주주의> 같은 책을 더 열심히 읽어주었으면 싶다. 그래야 앵무새가 되지 않을 테니까(생각은 다른 생각들과 부딪치면서 단련된다)...

06. 06. 2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에 대한 이정우-홍윤기 논쟁에 답한다"란 부제로 노마디즘은 한 '발원지'라 할 이진경씨가 한겨레 신문에 기고한 글을 옮겨온다. 이게 어쩌다 상반기 인문학 '최대 논쟁'의 모양새를 갖춰가는 듯하다(거꾸로 우리 인문학이 얼마나 '조용한 동네'인가를 반증한다!). 어쩌다 구경꾼의 자리에 서게 되어 이 '네버엔딩' 티격태격을 중계하게 됐는데, 어지간하면 좀 말리고 싶어진다! 이 글이 '종료 휘슬'의 역할을 해주길 바랄 따름이다.

 

 

 

 

한겨레 21(06. 06. 23) 노마디즘은 침략주의인가

 -나는 철학자의 책을, 그것도 원문으로 몇 번이고 읽어야 철학이나 철학자에 대해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반대로 오역이 있어도 엔간하면 번역서를 읽는 게 좋다는 입장이다. 철학이란 철학적 문헌을 다루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사유하고 사유를 삶으로 만드는 것임을 보여준다고 믿기 때문이다(*그래서 '엔간한' 번역서들만 양산되는 것인가?). 그래서 훌륭한 이론과 개념에 대해 말하지만 그렇게 살지 못하는, 혹은 살려고 하지 않는 사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지식이나 사유를 삶에서 분리된 것으로, 고상하고 그저 지적인 것으로 분리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이나 사상을 무력화하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 최근 유목주의 문제를 둘러싸고 철학자 이정우(왼쪽)씨와 홍윤기씨의 논쟁이 전개됐다. 발단은 천규석씨의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라는 책이다.(사진/ 좌-한겨레 서정민 기자, 우- 한겨레 김태형 기자)

‘들뢰즈’를 전공한 분이 원전 타령?

-그렇기에 나는 농사꾼도, 노동자도 철학자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자본주의의 극단화된 분업이 가로막아서 그렇지, 그럴 수만 있다면 그것처럼 좋은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마르크스/엥겔스가 말하는 '공산주의 유토피아'가 바로 그것 아닌가? 뒤집어 얘기하면, 그것처럼 어려운 것도 없다!). 그런데 농사꾼이 철학자가 된다는 것은, 굳이 대비해서 말하자면, 농사꾼이 철학에 대해 말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삶을 사유하고 그 사유를 통해 새로운 삶을 구성하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싶다. 즉, 농사꾼임에도 철학을 할 수 있다는 기대 밖의 가능성보다는 농사꾼이기에 자신의 삶을 걸고 그것으로 얻어낸 사유의 강도가 중요하다고 믿는다. 거꾸로 자신의 철학에 따라 농사를 짓게 된 철학자 역시 존경한다.

-내가 알기엔 들뢰즈도 그렇다. 그는 스피노자를 전혀 읽지 않았지만 스피노자의 사유대로 사는 사람이 있다면 스피노자주의자라고 하기에 충분하다고 본다. 반면 스피노자의 개념들을 잘 알지만 그저 알 뿐이라면 ‘스피노자주의자’라는 말에 값하기 어렵다. 그래서 프랑스어로 원전을 읽지 않았다면 들뢰즈 철학에 대해 말해선 안 된다는 말을, 푸코나 들뢰즈 철학을 ‘전공’하신 분이 말하는 것이 무척 당혹스럽다.

-들뢰즈도 푸코도 어떤 자격이나 조건을 들어 발언할 주체의 자리를 제한하려는 이런 태도를 쉽게 받아들일 것 같지 같다. 그것은 담론의 권력이 작동하는 가장 통상적인 방법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리고 발언의 취지는 이해할 수 있지만, 들뢰즈의 사상이 서양철학사의 정점에서 나온 철학이라는 말도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그는 철학사라는 이름으로 행사되는 지적 권력에 대해, ‘주류’(majority)를 형성하며 그 척도에 부합하지 않는 것을 배제하거나 억압하는 권력에 비판적이었고, 따라서 그의 사상은 차라리 철학사와 대결하고 거기서 벗어나려는 철학이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농사꾼이든 철학자든 다른 사상이나 철학자에 대해 언급할 때는, 정확하게 이해하고 말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물론 모든 이론을, 더구나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이론을 성실히 엄밀하게 읽고 이해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 확신하기 어렵다면 극단적인 비난이나 비판의 말은 아껴야 하지 않을까?(*알다시피, 이 '정확성'에 대해서 이진경씨와 '대학원생' 간에 논쟁(?)이 붙기도 했었다. 응답이 없는 논쟁이었기에 '논쟁 없는 논쟁'이라고 해야 맞겠지만.) 

 

 

 

 

-예를 들어 들뢰즈가 억압으로부터 욕망의 해방을 주장했다는 말, 욕망의 해방이란 대중문화 수용자가 유행이나 이미지 등을 즐기는 찰나적 해방이라는 말, 인간의 욕망의 근원을 성적인 것으로 보았다는 말은, 들뢰즈를 어느 정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동의할 수 없는 것이다. 들뢰즈는 욕망의 근원을 성적인 것으로 보았다는 이유에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비판한다. 욕망은 처음부터 사회적으로 투여된다는 것, 따라서 성적인 것으로 환원해선 안 된다는 것이 <안티 오이디푸스>라는 책의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다(*'대학원생'의 새로운 <안티 오이디푸스> 번역은 언제 나오는지?).

-그리고 욕망이 해방의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것(“혁명은 의무가 아니라 욕망이었기에 있을 수 있었다”)을 주장한 것은 분명하지만, 욕망과 억압, 욕망과 권력을 대비시키는 단순한 구도는 거꾸로 그가 비판하고자 했던 것이다. 가령 정치학의 근본 문제란 “어째서 대중은 마치 그것이 자신을 위한 것이라도 되는 양 자신에 대한 억압을 욕망하는가?”라고 말할 때, 그는 욕망이 억압을 원하는 사태(파시즘의 경우가 대표적이다)가 바로 문제임을 지적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권력과 욕망이 다른 것이 아님을 지적한다. “권력이 바로 욕망인 것이다.” 욕망은 어떤 배치를 형성하는지에 따라, 혹은 어떤 배치에 들어가는지에 따라 혁명을 향하기도 하고 권력을 향하기도 한다. 따라서 문제는 욕망의 배치를 이해하고 변환시키는 것이다.

‘전쟁기계’ 개념은 무엇인가

-유목주의와 전쟁기계에 대한 비판도 이와 비슷하다. 먼저, 들뢰즈가 말하는 ‘전쟁’은 가치와 가치의 충돌이고, 어떤 지배적인 가치와 대결하는 것이다. 그래서 니체는 “좋은 전쟁에서는 화약 냄새가 나지 않는다”고 썼고, 들뢰즈는 카프카의 책이나 클레의 그림을 ‘전쟁기계’라고 했다. 전쟁기계란 기존의 지배적 가치에서 벗어나는 탈주선을 그리는 집합적 배치의 이름이다. 그래서 그것은 새로운 가치의 창안을 통해서 기존의 가치, 이미 지배적 장치와 결합된 가치에서 탈주하지만, 많은 경우 그것과 충돌하게 된다. 대개는 국가 장치나 지배적 가치가 탈주선을 가로막으며 시작되는 충돌이다. 여기서 ‘전쟁’이 발생한다. 따라서 전쟁기계는 전쟁을 목적으로 하지 않지만, 전쟁을 회피하지도 않는다.


△ 노마디즘은 몽골이란 또 하나의 기원으로 회귀하려는 복고주의가 아니다. 몽골의 유목민들. (사진/ REUTERS NEWSIS/ ANDREW WONG)

-유목민의 전쟁도 이러하다. 유목민은 전쟁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유목하며 자유로이 이동할 뿐이다. 그러나 땅을 ‘소유’하는 정착민들은 울타리를 쳐서 그들의 유목 행로를 차단하고 저지한다. 전쟁이 시작되는 것은 바로 거기다. 유목민의 번호적 조직은 이동과 유목에 적합하지만, 전쟁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정착민이 자신이 소유한 것을 지키기 위해 군대를 만들 때조차 그들의 전쟁기계가 조직의 모델이 된다. 이처럼 국가가 장악한 전쟁기계로 인해 유목적 전쟁기계는 전쟁을 목적으로 하는 기계로 오해되고 혼동된다(*그러므로 사단은 유목민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정착민에게 있다?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라고 간주하는?).

-자유로운 행로를 차단하는 울타리가 잊혀진 채, 유목이 남의 땅을 침범하고 침략하는 것으로 비난되듯이. 그러나 소유나 울타리가 없다면 침범이나 침략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자유로운 이동이 만들어낸 길들이 침략의 길로 간주되는 것은 그것을 차단하려는 소유의 벽, 울타리와 성벽(만리장성!) 때문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따라서 “들뢰즈가 유목민이 정착민 다음에 출현했다고 했다”는 말은 부적절한 말이다.)

-노마디즘은 몽골이란 또 다른 기원으로 회귀하려는 복고주의가 아니다. 따라서 몇몇 민족주의자들이 그것을 확장된 민족주의로 바꾸어버리는 것에는 단호하게 선을 그어야 한다. 그래서 들뢰즈는 유목민을 차라리 “움직이지 않은 자”로서 정의했다. 즉, 외형상의 유목이나 움직임이 아니라, 앉아서도 끊임없이 지배적 가치와 대결하며 새로운 가치를 창안하는 ‘태도’를 유목주의라고 정의한다. 유목민을 이주민과 구별한 것도 그 때문이다.

-따라서 이동한다는 이유만으로 신자유주의와 유목주의를 동일시하는 것 역시 부적절하다. 신자유주의, 혹은 세계를 이동하는 자본이란 어디를 가도 오직 돈밖에 모르는, 하나의 목적에 고착된 정착민이고, 잘 봐줘야 자신이 착취하던 것이 다 소진되면 다른 곳으로 이동해 다시 착취하기 시작하는 이주민일 뿐이다. 삼성이 ‘디지털 노마드’를 자사의 광고 카피로 삼았다고 해서 노마디즘을 부르주아적이라고 하는 것은, 자본가가 게바라를 상품화했다고 해서 그를 부르주아적이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생태주의자의 적대감 이해 못해

-마지막으로 덧붙이면, 생산성으로 유목과 농경을 비교하는 것은, 정확하게 공업에 의해 농업을 축출했던 논리를, 개발주의의 논리를 반복하는 게 아닐까? 유목민이 불모의 땅에서 산다는 조건을 고려하지도 않은 채 비교된다는 것은 접어둔다고 해도, 자본과 개발의 논리가 지배하는 곳에서 자기가 사는 땅을 그로부터 지키려는 농민이나 갯벌이나 산을 개발에서 지키려는 생태주의자는 지배적 가치와 대결하는 전쟁기계가 된다(배치가 달라지면 생태주의나 농업의 의미가 달라진다). 그렇다면 생태주의자가 유목주의에서 위협과 적대감을 느낄 이유가 없는 게 아닐까?

06. 06. 25.

P.S. 끝으로 내가 갖게 되는 의문: "외형상의 유목이나 움직임이 아니라, 앉아서도 끊임없이 지배적 가치와 대결하며 새로운 가치를 창안하는 ‘태도’를 유목주의라고 정의"할 경우, 전통적인 삶의 방식을 '반복'하는 몽골의 유목민들은 '이주민'으로 재정의되어야 하는 것인가?("유목민인 줄 알지만, 착각이야. 너희는 이주민들일 뿐이야!") 그들은 노마디즘이란 '영토'에서도 아무런 거처 없이 '자유로이' 이동해가야만 할 듯하다...


댓글(9)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인 2006-06-26 12:16   좋아요 0 | URL
오타 지적 ^^; 맨 처음 로쟈님의 '서문'에 '마리고' 싶습니다.

로쟈 2006-06-26 12:2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꼼꼼하게 읽어주셔서.^^

yoonta 2006-06-26 13:08   좋아요 0 | URL
몽골의 유목민들은 말그대로 "외형상의 유목"이겠죠. 들뢰즈의 노마디즘(유목주의)는 이와는 다른 "지배적 가치와 대결하며 새로운 가치를 창안하는 <태도>"겠구요. 몽골 유목민이라고 할때의 유목민은 어디까지나 외형상(들뢰즈의 유목주의로 봤을때는) 그런 것이기 때문에 굳이 "이주민"으로 바꿔부를 필요는 없을듯합니다..^^

그건 그렇고 로쟈님 코멘트에서도 볼수있듯 이진경씨는 비생산적인 이정우,천규석/홍윤기씨 논쟁보다는 "대학원생"의 물음에 대답해주면 더 재밌을것 같은데 말이 없네요. 김재인씨가 어떤 걸 지적했는지는 잘 기억은 안나는데 대답이 없는 것은 자신이 오류가 있음을 암묵적으로 승인한다는 건가요? 아니면 걍 무시하는건가요?

로쟈 2006-06-26 13:19   좋아요 0 | URL
'외형상의 유목'이라고 하시니까 잠시 웃음이 났습니다. 요즘 드라마에서 '굴러온 돌' 얘기가 자주 나오던데, 상식적으로 말하자면, '노마디즘'이야말로 '굴러온 돌' 아닌가요? "그래, 이주민이라고 안 바꿔도 돼. 그냥 유목민이라고 해줄께. 한데, 너네는 그냥 외형상상의 유목민일 뿐이야. 명심하라구!" 같은 건가요?^^

<노마디즘>과 <천 개의 고원> 사이에서 무엇이 오고갔고, 무엇이 더 오고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저도 당장은 지적할 수 없는데, 그런 '거래'야 당사자들이 알아서들 하겠지요. 서로 손해볼 게 없다거나, 아니면 대꾸해봐야 손해라는 판단을 했는지도...

yoonta 2006-06-26 13:48   좋아요 0 | URL
철학이란게 원래 그런거잖아요. 일상적인 시선(지배적 시선)으로부터 조금 다르게 보기.. 굴러온 돌(들뢰즈의 노마디즘)이 박힌 돌(실제의 유목민들)에 대해서 딴지를 걸수 있다는 것..그러고 보니 그것도 벌써 노마디즘의 '실천'이군요..^^

로쟈 2006-06-26 14:15   좋아요 0 | URL
저는 유물론자여서(이진경씨의 정의는 좀 다르지만) 사유란 삶의 손바닥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다르게 보기' 같은 '애교'가 거창한 '실천'이 되는 지점은 삶의 무게를 떠안을 때입니다. 제가 지지하는 건 '멋있는 노마디즘'이 아니라 유목민들은 거친 손등입니다...

yoonta 2006-06-26 14:27   좋아요 0 | URL
근데 웃긴건 정작 그 실제의 유목민들이 자신을 "유목민"이라고 정의하는가?하는 건 또 아닌것 같아요. "거친 손등"을 가진 실제의 유목민들은 자신을 굳이 유목민이냐 아니냐라는 논쟁을 할필요도 없는거죠. 그냥 그들은 그들의 삶을 살아갈 뿐이니. 그렇다면 유목민이라는 꼬리표자체가 외부적인 시선 혹은 관념적 사유의 결과물이라고 본다면 그런 사유의 카테고리안에서의 들뢰즈의 시선은 또 새로운 의미가 있단거겠죠..^^

니브리티 2006-06-27 14:16   좋아요 0 | URL
로쟈님의 유물론에 따르면 저는 '관념론자'임에 틀림 없군요..^^'' 저는 사유와 삶은 별개이거나 불일치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오히려 저는 유물론의 다른 방식으로 정신이 직접 물질/삶이 되는 방식이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체셔고양이처럼, 그 몸이 사라진 뒤에도 강력하게 남는 웃음이라는 정서(!)--정말 지젝은 탁월하다니까요--말이에요.

로쟈 2006-06-27 17:20   좋아요 0 | URL
"사유와 삶은 별개이거나 불일치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 게 관념론 맞습니다. 자기에게 맞는 잠옷을 입으면 되는 것이죠...
 

슬라보예 지젝의 문제작 <신체 없는 기관: 들뢰즈와 결과들>(도서출판b, 2006)이 드디어 번역/출간됐다. 원서는 2004년판으로 돼 있지만, 기억에는 2003년말에 출간됐고 나는 그 즉시 아마존에서 구입했었다. 한데, 1년간 러시아에 나가 있느라 책을 뜯어볼 시간이 없었고 귀국 후에도 책을 읽는 일은 이래저래 미뤄졌었다. 그건 단지 게으름 때문만은 아니고 곧 번역서가 나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천천히' 읽어보자는 계산이었다. 그리고 이제 때가 된 것.

책은 아마도 (지젝의 독자들 때문이 아니라) 들뢰즈의 독자들 때문에 꽤 팔려나가고 한동안 회자될 듯싶지만, 지난주 언론의 리뷰에서는 '지젝의 그림자'도 찾기 어려웠다(예상할 수 없는 일은 아니다. 기자도 읽어야 쓸 것 아닌가? 아마 내주쯤에는 '정상적인' 리뷰가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나마 내가 읽은 기사들 중 가장 비중있게 다룬 것이 '들뢰즈 속 헤겔의 그림자'란 타이틀을 달고 있는 한국일보의 리뷰였다.   

"라캉 정신분석학과 헤겔, 마르크스를 융합해 현대 분석철학의 독창적인 영지를 확보한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들뢰즈'라는 또 하나의 우람한 정신의 새 면모를 선뵌다(*'현대 분석철학'? 이 얼마나 '독창적인' 해석인가!). 들뢰즈가 제기한 개념인 '기관 없는 신체'(기관으로서 부여된 기능적 고정성에서 탈피해 다른 '기관'으로 변형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질료)를 뒤집어 놓은 책의 제목처럼, 그는 들뢰즈의 공저서가 아닌 '의미와 논리' 등 단독 저서들을 텍스트 삼아 그 속에 내포된 헤겔의 그림자를 포착한다. 그리고 들뢰즈가 '생성' 이전의 '잠재'의 철학자임을 부각하고 있다."

그렇다, 이게 전부다! 해서 좀더 기다렸다가 괜찮은 리뷰를 읽게 되면 옮겨올까 생각했지만, 기다리는 동안 마당이나 쓰는 기분으로 몇 마디 거들기로 한다. 러시아 영화감독 지가 베르토프와 관련한 대목을 중심으로.

 

 

 

 

들뢰즈와는 다른 진영에 속해 있는 철학자의 들뢰즈론이라는 점에서 <신체 없는 기관>은 여타의 들뢰즈론과 구별되며 바디우의 <들뢰즈 - 존재의 함성>(이학사, 2001)에 근접한다(사실 지젝과 바디우는 절친한 사이라고). 그리고 두 사람은 모두 들뢰즈에게서 헤겔의 그림자를 보거나 그 목소리를 듣는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들뢰즈가 살아있다면 뜨끔하거나 기겁할 일이겠다). 그 문제는 복잡하니까 남겨놓도록 하고, 여기서는 지난 2003년 방한시 지젝이 '신체 없는 기관'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던 내용 중에서(이 강연 내용은 단행본의 후반부에 포함돼 있다) '신체 없는 기관'의 전형적인 사례라 할 만한 '카메라의 눈'과 관련하여 지가 베르토프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대목을 따라가본다. 아래에서 강연문 '신체 없는 기관'이 포함돼 있는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이데올로기>(철학과현실사, 2005)로부터의 인용은 쪽수만을 적어준다. 

"(*히치콕의 <현기중>에서) 주체로 귀착되지 않으면서 주관화된 두 쇼트는 다름 아닌 순수하고 전-주체적인 현상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초과분은 봉합-논리에 수용도어 객관적 쇼트와 주관적 쇼트의 표준 절차의 수준으로 환언(*환원)된다. 우리가 이 과도함(*과잉)에서 맞닥뜨리는 것은 특정 주체의 완력으로부터 자유로운 '대상으로서의 응시'다. 그렇다면 (혁명영화의 절정기였던) 1924년에 지가 베르토프가 만든 옛 소련 무성영화의 고전인 <영화의 눈(Kino-Eye/ Kino-glaz)>에서 베르토프가 (카메라의) 눈을 영화의 상징으로 삼고 이 '자율적 기관'으로서으 눈을 통해 신경제정책(NEP) 하에서 구소비에트연방의 현실의 단편을 제시하며 1920년대 초반의 모습을 전달하는 것은 그리 낯설게 보이지 않는다."(332-3쪽, 강조는 지젝의 것)

"무엇을 흘깃 훔쳐보다(to cast an eye over something)'라는 관용구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눈에서 안구를 뽑아 주위에 던진다는 뜻인데, 이것이 바로 프랑스 동화에 나오는 엽기적 백치 마르탱이 어머니가 아들이 영영 맞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아들에게 교회에 가서 그곳에 있는 여자들을 좀 훝어보고(cast an eye over the girls there) 오라고 했을 때 한 행동이다. 그는 우선 푸주한에게 가서 돼지의 안구를 샀으며, 그후 그것을 교회로 가져가 그곳에서 기도하고 있는 여인들을 향해 던졌던 것이다. 후에 마르탱이 어머니에게 여자들이 자기의 행동에 그리 좋은 인상을 받은 것 같지 않다고이야기하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혁명 영화의 소임이다: 즉, 카메라를 부분대상으로 사용하여 주체에게서 도려내어져 주위로 자유롭게 던져질 수 있는 '눈'으로 만드는 것이다."(334쪽, 강조는 나의 것)

"베르토프 자신을 인용하면: 영화의 카메라는 손부터 발까지, 또 발부터 눈이나 다른 부분까지 가장 효율적인 순서로 관객의 시선을 이끌고(관객의 안구를 질질 끌고 다니고)(drags the eyes of the audience), 세부를 조직할 때는 일반적으로 몽타주 기법을 구사한다."(*강조는 원문에 따름. 리차드 테일러와 이안 크리스티 편, <영화 공장: 러시아-소비에트 영화 문건 1896-1939>로부터의 인용인데, 334쪽 각주에는 <영화의 요인(The Film Factor)>로부터의 인용으로 잘못 기재돼 있다. 'Factory'를 'Factor'로 잘못 본 것. 참고로 테일러는 헉명기 러시아 영화에 정통한 영화학자이다.)

이어서 지젝은 카메라에 대한 이러한 베르토프적 통찰을 자신의 일상적 경험과 연계시킨다: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괴이한 순간들 중 하나는 자신의 영상과 얼핏 맞닥뜨렸을 때 그 영상이 자신에게 시선을 되돌려주지 않는 것이다. 한번은 거울 두 개로 머리 측면에 이상하게 돌출된 부분을 살펴보려 한 적이 있는데, 그때 갑자기 내 옆얼굴이 흘깃 보였다. 그 영상은 내 모든 몸짓을 이상한 일관성 없는 방식으로 본뜨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우리의 거울상이 우리로부터 분리되는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우리의 시선이 더 이상 우리 자신을 향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다리언 리더)"(334-5쪽) 즉, 전-주체적, 혹은 탈-주체적 영상(이미지)가 태어나게 되는 것.

"이 괴기한 경험은 자신의 영상의 한 부분이지만 거울과 같은 대칭적 관계를 회피하여 라캉이 '대상 소타자(*대상 a)로서의 응시'라고 부른 것을 예증한다. 이 불가능한 지점으로부터, 즉 '밖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볼 때의 외상적 특징은 내가 응시를 위한 외부대상으로 대상화되었다는 사실이라기보다는 대상화된 것이 내 응시 자체라는 것이다. 대상화된 응시는 외부에서 나를 바라보므로 내 응시가 더 이상 내 소유가 아니며 내가 그것을 도둑맞았음을 뜻한다."(335쪽) 즉, '내 것이(었)지만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응시', 그것이 '신체 없는 기관'의 가장 전형적인 사례라 할 만하다.

이러한 주제에 잘 들어맞는 영화가 김성호 감독의 <거울 속으로>(2003)가 아닐까 싶다. (아직 보지 않았지만) ''동일한 형상의 사물을 비춰주면서도 반대적인 면을 보여주는 거울의 양면성을 세심하게 포착한 심리스릴러"라면 말이다. 더구나 "'스릴러의 거장'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고전영화 <현기증>의 뼈대에 거울공포란 소재를 도입해 현대적인 공포영화로 만든 작품"이라고 하지 않는가?..

지젝은 잠시 <로스트 하이웨이>를 경유해서 다시 <현기증>(1958)에 대한 분석으로 돌아간다. 스코티(제임스 스튜어트)가 금문교 밑 샌프란시스코 만에서 마들렌(킴 노박)을 구한 다음인 그의 아파트 장면을 자세히 분석해볼 것을 제안하면서.

하지만, 이 본격적인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다루어야겠다. 스코티는 마들렌을 들고 가는 게 무거웠겠지만, 독자들은 지젝을 이 정도 읽는 것도 버겁다! 벌써부터 '이론적 현기증'을 느낀다면 엄살이라고 해야 할까? 겨우겨우 버티고(Vertigo) 버틴 분들은 이제 <신체 없는 기관>으로 손을 뻗으시면 되겠다. 굿럭!..

06. 06. 25.


댓글(3)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06-06-25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읽어보고 싶어라!!!! 근데 제대로 읽으려면 적어도 몇 년이 걸릴 듯 하네요..


근데 지젝이 분석철학의 대가였군요.ㅋㅋㅋ
글고 저 신체없는 기관이 맞나요, 신체 없는 기관이 맞나요?

로쟈 2006-06-25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잘못 썼나요? 단순한 국어 상식에 의지하시면 될 거 같은데요... 덧붙여,'제대로' 사는 건 더 오래 걸립니다!..

비로그인 2006-06-25 2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단순한 국어 상식인가요? 책들 마다 표기가 달라서.....

근데 제목만 훝어봐도 재기가 철철 넘치는 군요.
제목이 죄다 패러디인데.

언제가, 아마도 경험일원론의 세기가 될 것인가?
들뢰즈 뒤에 달라붙기
스피노자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가능한가?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