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 지라르에 대한 짤막한 글을 써야 할 필요 때문에 자료들을 읽고 있는데, <문학과 사회>(2004년 가을호)에 실렸던 맹정현씨의 '모방과 폭력 - 지라르 논리의 원환구조'란 글을 옮겨온다. 자세히 뜯어읽기 위해서이다. 본문 중 강조와 (*)로 덧붙인 군말만이 나의 것이다.

 

 

 

 

욕망에서 성서로?
욕망에 관한 (탈)현대적 담론들의 특징을 한마디로 요약해보자. 아마도 그것은 욕망으로부터 인간을 지우고 욕망의 실체성을 부정한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닐까? 헤겔에서 라캉에 이르는 욕망론은, 욕망은 나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타자나 구조의 효과임을 주창함으로써 욕망에 대한 반인간주의적인 해석의 길을 열어주었다.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은 정확히 이러한 계보 속에서 씌어진 르네 지라르의 대표작이자 처녀작이다. 욕망은 삼각형의 도식에 의해 구성되며, 욕망과 대상 사이에는 항상 제삼자가, 금지의 매개자가 개입되어 있다는 지라르의 주장들은 그의 이름을 거명하지 않더라도 우리에겐 이미 익숙한 것이 되었다. 삼각관계가 없이는 욕망도 존속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가 말하는 욕망은 요컨대 실체가 없는 욕망이며, 이 점에 있어선 그가 욕망에 대한 현대적 해석들의 반경 안에 머물고 있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 국내에서 번역되어 출간된 지라르의 후기 저작들(<희생양>,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을 살펴보면 그가 (탈)현대 사상가들에 비해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그는 동시대의 사상가들처럼 반인간주의적 욕망 이론을 개진하면서 특이하게도 현대의 반종교주의와 이교도적 ‘니체주의’의 경도를 비판하며 ‘기독교주의로의 회귀’를 강력하게 주장한다. 심지어 유일신적 종교야말로 인간이 폭력의 악순환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의 메시지가 될 수 있다는 지라르의 결론은 낯설다 못해 이질감을 느끼게 한다(*내 기억에는 이미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에서도 이러한 메시지를 읽을 수가 있었던 듯한데, '이질감'까지 느낀다는 것은 특이한 일이다).

지라르의 여정에 있어서 욕망의 반인간주의적 해석에서 <폭력과 성스러움>으로 이행하는 과정은 비교적 자연스럽게 이해될 수 있었다. 하지만 상기 두 저작에서 보여주는 기독교적 엄숙주의로의 회귀는 논리적 비약이나 이론적 퇴행으로 비칠 수 있다. 그러나 후기의 작업 속에서 보여주는 반인간주의와 기독교주의라는 지라르의 독특한 이론적 배합은 정확히 그의 출발점에서 이미 예견된 것이며, 그가 설정했던 최초의 전제를 끝까지 밀고 나간 결과라 할 수 있다(*내 말이 그 말이다. 필자가 약간의 트릭을 쓴 것이군!). 이 점을 확인하기 위해선 익히 잘 알려진 지라르의 전제에서 다시 출발할 필요가 있다.



미메시스와 폭력
잘 알려져 있다시피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에서 보여준 지라르의 출발점, 최초의 전제란, 욕망을 미메시스와 접속시켜 읽는 것이다. 지라르에게 있어 욕망은 곧 모방 욕망이다. ‘나’는 ‘그’가 가진 것을 원하고 ‘그’가 욕망하는 것을 욕망한다. 대상에 대한 직접적인 생물학적 욕구가 아니라 제삼자를 경유한 욕망, 타자의 음영이 드리워진 매개된 욕망이다. “매개자 그 자신도 대상을 욕망하거나 욕망할 수 있다. 그런데 바로 이 매개자의 욕망이 주체의 눈에 이 대상이 끊임없이 욕망할 만한 것으로 보이도록 만든다.”(*영역본의 제목은 <속임수, 욕망 그리고 소설>이다.)

결국 욕망이란 거울의 운동 속에서 서로를 반사해가며 모방해가는 하나의 과정이다. 지라르는 욕망으로부터 성욕이라든가 생물학적인 욕구의 흔적을 제거한 후 모방의 흔적만을 도출해내는데, 이는 지라르에겐 모방만이 인간의 고유성을 보장할 수 있는 유일한 특질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모방 욕망이 긍정적 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나보다 우월한 자, 초월자에 대한 모방 욕망을 통해서(“매개자가 외재적인 경우”) “자아 이상”을 획득하고 사회의 문화유산들을 나의 것으로 섭취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수평적’으로 이루어질 경우, 즉 나와 초월자가 아닌 나와 동류(“짝패”) 사이에서 이루어질 경우(“매개자가 내재적인 경우”), 그것은 곧 관계를 갈등과 사투(死鬪)로 이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폭력의 기원이 있다. 모방은 “응집의 힘이면서 동시에 해리의 힘”인 것이다.

따라서 지라르가 모방 욕망에서 폭력의 논리로 이행하는 것은 그 출발점에 상정된 전제에 비추어볼 때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지라르는 1972년에 출간된 <폭력과 성스러움>에서 모방 욕망의 갈등의 측면을 최대한 부각시킨다. 인간이 모방하는 존재인 한 ‘나’와 ‘너’는 대립한다. 그런데 이러한 대립이 첨예해질수록 모방은 더욱더 가속도를 얻고 개체들은 원환을 그리면서 ‘무차별성’의 지점으로 수렴한다. 그것은 “적들 사이의 거울 효과를 증대시킨다.” 그리고 ‘무차별성’의 지점으로 수렴할수록 폭력의 강도는 점점 더 증폭되며, 그것이 일정 정도 한계에 다다르면 결국 사회는 위기에 빠진다.

<폭력과 성스러움>에서 지라르적 논리의 흥미로운 점은 위험 수위를 넘은 사회는 이러한 위기의 해소를 위해 그 사회 자체 내에 자생적인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지라르가 말하는 ‘문명’과 ‘언어’의 원리이다. 문명과 언어의 원리란 곧 희생양을 만들어내는 논리이다. 그리고 이러한 희생양의 논리를 가능케 하는 것은 다시금 ‘모방’이다. 욕망의 모방은 폭력을 만들어냄으로써 나와 너 사이에 갈등의 골을 판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갈등의 골을 봉합할 수 있는 가능성도 바로 그 모방에 있다. 증오를 모방함으로써, 서로 반목하던 ‘나’와 ‘너’는 ‘그’를 증오하는 ‘우리’가 된다.

 

 

 

 

‘공동체’의 동일성이 구성되는 것은 무언가를 이질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배척함으로써다. 공동의 적을 만들어냄으로써 우리는 ‘하나’가 된다. “바로 좀 전에 무수한 갈등, 적대 관계 속의 무수한 형제들이 있었던 곳에서 그 구성원 중 하나에 의해 고취된 증오 속에서 단결된 새로운 공동체가 나타난다.” 갈등을 양산하던 모방이 이제는 갈등을 치유하는 ‘치료책’으로 굴절된다. ‘수평적’ 폭력이 ‘수직적’ 폭력에 의해 방출의 기회를 얻고, ‘모방의 폭력’이 ‘폭력의 모방’으로 해소되는 것이다.

따라서 “폭력이 폭력을 추방한다.” 이에 대한 묵시론적 판본은 바로 “사탄이 사탄을 몰아낸다”이다. 결국 되돌아오는 것은 처음보다 더 강력한 폭력이며 더 교활한 사탄이다. 폭력의 ‘간계’이자 사탄의 ‘간계’이다. 지라르가 볼 때 전통적으로 문명은 희생양에 ‘성스러움’의 베일을 씌움으로써 희생양을 만들어내는 논리를 은폐해왔다. 바로 이 지점에서 지라르는 폭력과 성스러움을 접속시킨다. 적어도 희생 제의라는 문제와 관련시켜볼 때 성스러움이란 폭력의 논리에 대한 ‘몰인식’을 강화하기 위해 만든 매혹의 베일에 다름 아니다. 집단적인 폭력은 그 원인에 대해 무지한 상태에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인식론적 전환
여기서 다시 한 번 지라르의 논점 뒤에서 작동하는 이분법은 몰인식과 진리의 분할이다. 희생양을 만들어내는 논리, 희생 제의가 효과를 거두기 위해선 그것의 논리에 대해 당사자들이 몰인식해야 한다. 그는 이미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에서 ‘거짓’과 ‘진리,’ ‘기만’과 ‘진실’이라는 인식론적인 이분법을 동원한 바 있다. 기만과 진실의 이분법은 이제 상상적 거울의 운동 속에서 몰인식과 진리의 이분법으로 표현된다. ‘희생 제의 속의 맹목적인 폭력’이라는 주제는 <폭력과 성스러움> 이후 지라르의 모든 저작들을 관통하는 기본적인 주제다. 하지만 이 주제가 정당한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선 지라르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것이 바로 그가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귀착하는 본격적인 계기가 된다.

(1) 우선 ‘인식론적’ 문제. 즉 만약 이 사회가 폭력의 맹목적인 순환에 기초한 사회라면, 지라르는 어떻게 폭력의 악순환이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는가? 근본적으로 문명과 언어가 희생양을 만드는 “초석적인 살해”와 그 살해의 재생산에 근거한 것이라면, 그리고 그 재생산이 몰인식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그 맹목적인 사회 속에 몸담고 있는 지라르는 어떻게 그러한 진리를 깨달았는가?

(2) 이러한 ‘인식론적’ 문제는 보다 근본적으로 ‘윤리적인’ 문제를 전제한다. 즉 어떻게 폭력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버릴 것인가? 어떻게 폭력에 기대지 않고 폭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폭력의 치료제로서의 폭력이 아니라면 보다 적극적인 해결책은 무엇인가?

바로 이 두 가지 문제가 저자가 폭력의 구조를 파헤치는 비평가적 입장(<폭력과 성스러움>)에서 유대 기독교적 실천가(<희생양>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로 넘어가는 단초이다. 인식론적인 견지에서 볼 때, 지라르는 신화가 아닌 성서의 절대 우위를 주장한다. 폭력의 구조를 해명하는 데에는 신화 분석이 유용하게 쓰이지만, 자신에게 그러한 분석을 가능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 것은 신화가 아니라 유대 기독교적 성서와 복음서라는 것이다. “복음서가 희생양 과정을 엉클어뜨리거나 신화화하는 것이 아니라 신화적인 해석이었다면 신적으로 취급하였을 것들의 순전히 모방적인 성격을 드러냄으로써 희생양 과정의 신비를 벗겨내고 있다.”

물론 현상적으로 볼 때는 반대의 주장을 할 수도 있다. 우리는 신화에서보다 성서에서 더 많은 폭력을 접할 수 있으며, 심지어 성서의 ‘피학적 성격’을 비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라르는 신화에 폭력이 나타나지 않음은 폭력이 부재해서가 아니라, 폭력이 지워져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있음’과 ‘없음,’ ‘많거나’ ‘적음’의 문제가 아니라 ‘은폐’와 ‘드러냄,’ ‘억압’과 ‘계시’의 문제라는 것이다.

지라르에게 모든 텍스트에 등장하는 폭력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다. 폭력은 하나의 현실인 것이다. 하지만 신화는 폭력을 가하는 자에 기초한 텍스트이기에 폭력을 왜곡시키거나 드러내지 않는다. 반면 성서는 폭력을 당한 자의 언어이기에 그 폭력을 ‘폭력’으로 규정하며 그 폭력성의 구조를 ‘계시’한다. 신화는 폭력을 ‘은폐’하거나 ‘신화화’하고, 성서는 폭력을 ‘계시’하고 ‘탈신화화’한다(*이것이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에서 지라르가 반복적으로 대비시키면서 강조하는 바이다). 심층적인 구조 분석을 통해서만 폭력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신화와 달리 성서에선 심층적인 분석이 없이도 폭력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이 단순해 보이는 ‘은폐’와 ‘계시’의 놀이 속에서 우리가 눈여겨볼 것은 지라르의 비평가적 감식안이다. 비평가들은 지라르가 문학 비평을 버리고 인류학으로 전향했다고 비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인류학을 문학 비평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한다. 즉 인류학에서 텍스트는 어디에 위치하는가, 폭력과 텍스트는 어떤 관계인가? 또 텍스트에서 폭력이 위치하는 곳은 어디인가?

폭력을 자리 매김하기 위해 지라르가 원용하는 것은 현대 언어학적 수행론의 성과라 할 수 있는 언표 행위와 언표, 말하는 것과 말해진 것의 이분법이다. 지라르는 신화와 복음서에서 폭력의 위치를 혼동해선 안 된다고 말한다. “신화와 복음서의 차이, 신화의 은폐와 기독교의 폭로의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표현과 표현되는 것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신화에서 폭력이 보이지 않는다면, 이는 폭력이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폭력은 언표 행위의 수준에 있다. 반면 성서에서 폭력은 언표의 내용, 즉 대상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표면에 드러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언표 행위의 주체는 곧 그 폭력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비판하는 자의 위치에 있다.

성서는 신화 속의 폭력을 대상으로 삼아 폭력의 구조를 ‘계시’한다. 따라서 성서는 신화에 대한 ‘메타언어’라 할 수 있다. 성서는 신화 속에 감추어져 있는 폭력의 암호를 해독하고 그것을 지식의 형태로 전환시킨다. 지라르에게 종교적인 ‘계시’란 바로 이러한 ‘인식론적 전환’을 말한다.

폭력에 대한 이러한 상이한 자리 매김은 폭력을 당한 자에 대한 상이한 가치 평가를 수반한다. 신화에선 희생양이 죄인으로 그려지는 반면(이 점에서 지라르가 가장 오이디푸스(적)이다), 성서에선 희생양이말 그대로 희생양으로 그려진다. 가령 “예수는 희생양이다”라는 문장을 생각해보자. 이는 예수를 희생양으로서 규정함으로써 그의 무죄성을 전제하는 문장이다. 언표 행위의 주체가 예수의 무죄성을 항변하고 있는 것이다.

지라르는 신화적 세계관, 다신교, 이교도에서 유대 기독교적, 유일신교적 세계관으로의 이행을 ‘혁명’이라고 표현한다. “박해자의 환상을 처음으로 기록하면서 <구약 성서>는 혁명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이는 정확히 인식론적 혁명이다. 희생양의 메커니즘에 대해 몰인식하도록 만드는 신화의 왜곡(“환상”)을 계시(“기록”)한다는 점에서 인식론적인 혁명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혁명은 단순히 인식론적 혁명에 그치지 않는다. 유대 기독교적 세계관이 가져온 혁명은 또한 폭력의 ‘악무한’을 깨뜨리는 적극적인 전략을 겸비하고 있다. 즉 ‘윤리적’ 혁명인 것이다.

미메시스의 윤리
그렇다면 성서-복음이 가져온 윤리적 혁명이란 무엇인가? 지라르에게 인간은 언제나 모방하는 존재이다. 이러한 모방으로부터 갈등이 시작하고 폭력이 출발한다. 모방이 폭력의 악순환을 초래한다면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선 모방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일까? 이러한 물음 앞에서 지라르는 자신의 전제를 폐기하지 않는다. 즉 인간은 모방이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지라르에게 남은 길은 모방의 가치론이다. 다시 말해 ‘좋은 모방’과 ‘나쁜 모방’을 구별하는 것이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에서 지라르는 두 가지 모델을 구분한다. “하나의 모델은 탐욕이 적어서 어떤 것도 경쟁적으로 욕망하지 않기 때문에 절대로 그 추종자들이 장애물이나 경쟁자가 되지 않고, 또 다른 모델은 탐욕이 아주 많아서 그 추종자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친다.” 좋은 모델이란 모방 관계를 갈등의 경쟁 관계로 만들지 않을 경우를 말하는데, 그것은 곧 신이다. 그리고 두번째 모델, 그 추종자들을 탐욕스럽게 만드는 탐욕스런 모델은 바로 사탄이다.

결국 좋은 모방이란 신을 모방하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신의 좋은 욕망을 모방하는 것이다. 모방 욕망이 아닌 욕망, 자기 것으로 삼으려는 욕망이 아닌 금욕적인 욕망, 상대를 죽이는 경쟁적 욕망이 아니라 비경쟁적 욕망을 모방하는 것이다.

물론 경쟁적 모방과 달리 이러한 좋은 모방이 가능하기 위해선 또다시 ‘매개자’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인간이 맹목적인 모방의 원환 속에 갇혀 있는 한 신이라는 좋은 모델, 좋은 욕망을 알아볼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신을 직접적으로 모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신에 대한 모방을 매개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예수와 ‘예수의 말씀,’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예수의 욕망’이다.(*아래 그림은 러시아 화가 이반 크람스코이의 '황야의 예수'[1872])

예수는 신을 모방하고자 한 최초의 인간이다. 따라서 신을 모방하기 위해선 예수에 대한 모방을 경유해야 한다. 그렇다면 예수를 모방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곧 모방을 모방하는 것이다. 즉 “신을 모방하는 것을 모방하는 것이다.” 예수의 말씀은 신화의 암호를 해독하는 인식론적인 혁명이면서, 동시에 신이라는 모델을 비경쟁적 관계에서 추구했던 최초의 모델이라는 점에서 윤리적인 혁명이다.

결국 지라르의 원환은 완벽하다. 나쁜 모방의 악순환을 깰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좋은 모방이지만, 이러한 모방은 ‘신적인’ 것이기에, 매개적인 모방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폭력 구조의 해명에 있어서도, 그러한 폭력의 악순환을 벗어나는 해결책 모색에 있어서도 자신이 최초에 상정했던 모방 가설을 폐기하지 않는다.

인간은 모방하는 존재라는 전제에서 출발한 지라르는 결국 모방의 가치론과 윤리적인 실천의 문제로 귀착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다시 그러한 윤리적 실천의 핵심은 ‘모방론’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바로 지라르 논리의 원환 구조이다. 자신이 최초에 설정한 한계를 깨뜨리기 위해서 그 한계 속에서 스스로 해답을 찾아낸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이 지라르에게서 반인간주의적 욕망론과 기독교주의로의 회귀가 봉합되는 곳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06. 06. 26.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06-06-26 23:46   좋아요 0 | URL
퍼갑니다^^ 맹정현 씨는 라깡에 대해서 해박하시다는 그 분 맞죠?

로쟈 2006-06-26 23:52   좋아요 0 | URL
아직 정리도 안됐는데요(--;). 맞습니다. <라캉의 재탄생>에 그의 논문들이 실려 있습니다. 흔히 FM이라고 그러죠. 학위를 마치고 귀국했을 법한데, 좀 오래 걸리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