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젝'을 키워드로 검색하다가 읽게 된 글 하나는 철학아카데미 이정우 교수의 '지젝의 들뢰즈론(1)', "잠재적인 것과 가능적/상상적인 것 - 지젝의 들뢰즈론: 비판적 음미"(05. 05. 26)이다. 실제 강의된 내용인지는 모르겠으나 '잠재적인 것의 실재성(1)'이라고 소제목이 더 붙은 걸로 보아 'Organs without bodies'(2004)의 첫 소절('The Reality of the Virtual')을 자세히 '음미'하고자 했던 듯하다(하지만, 그 '음미'는 (1)에서 더 진척되지 않은 듯하다). 그가 읽고 있는 것은 본문의 첫 페이지, 첫 문단 정도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들뢰즈 전문가'의 의견인지라 그의 '음미'를 참조하면서 지젝의 첫 문단을 읽어보고자 한다. 최근에 나온 국역본 <신체 없는 기관>(도서출판b, 2006)에서 이 문단은 이렇게 옮겨져 있다.

 

 

 

 

"한 철학자에 대한 참된 사랑의 척도는 우리의 일상생활 도처에서 그의 개념들의 흔적을 알아보는 데 있다 최근에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의 <이반 대제>를 다시 보면서 나는 제1부 도입부의 대관식 장면에 있는 멋진 디테일을 발견했다. 이반과 (당분간은) 제일 절친한 사이인 두 친구가 새로 기름을 부은 그의 머리 위로 커다란 접시들에 담긴 금화를 쏟아붓는다. 이때 관객들은 이 말 그대로의 금화 세례가 지닌 마술처럼 과도한 특성 때문에 놀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접시 두 개가 거의 비어 있는 것을 본 이후임에도 우리는 다음 장면에서 이반의 머리에 금화가 계속해서 '비현실적으로' 중단 없는 흐름으로 쏟아지는 것을 본다. 이러한 과잉은 몹시 '들뢰즈적'이지 않은가? 그것은 물체적 원인을 넘어서는 생성의 순수 흐름의 과잉, 현행적인 것(the actual)을 넘어서는 잠재적인 것의 과잉이지 않은가?"(17쪽)

'음미'의 내용을 보다 명확하게 확정하기 위해서 원문 또한 옮겨놓는다: "The measure of the true love for a philosopher is that one recognizes traces of his concept all around in one's daily experience. Recently, while watching again Sergei Eisenstein's Ivan the Terrible, I noticed a wonderful detail in the coronation scene at the begining of the first part: when the two (for the time being) closest friends of Ivan pour golden coins from the large plates onto his newly anointed head, this veritable rain of gold cannot but surprise the spector by its magically excessivecharacter - eveb after we see the two plates almost empty, we cut to Ivan's head on which golden coins 'nonrealistically' continue to pour in a continuing flow. Is this excess not very 'Deleuzian'? Is it not the excess of the pure flow of becoming over its corporeal cause, of the virtual over the actual?"(3쪽)

여기서 지젝이 묘사하고 있는 영화 <이반 대제>(1944)의 장면은 아래의 장면이다. 이반에게 금화를 퍼붓는 두 친구는 나중에 그를 배신하기 때문에 '당분간은'이란 말이 들어가 있다. 참고로, 이 장면에 대한 자세한 분석은 롤랑 바르트의 '제3의 의미'(<이미지와 글쓰기>, 세계사, 1993)에서 이루어지고 있다(영역은 'Image-Music-Text'[1977]에 수록돼 있다). 영화기호학에 관한 필수적인 텍스트인데,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다룰 수 있을 것이다.

아무려나 일단은 이러한 영화 속 한 장면에서도 '잠재적인 것의 철학자(the philosopher of the Virtual)' 들뢰즈의 잠재적인 것/현행적인 것이라는 개념쌍을 알아보는 데 들뢰즈에 대한 지젝의 '참된 사랑'이 놓여 있다. 참고로, 에이젠슈테인(1898-1948)의 <이반 대제>는 3부작으로 기획되었지만, 2부까지밖에 완성되지 못했고 '전제주의의 일시적 진보성'을 다룬 1부와는 달리 노골적인 스탈린(=폭군 이반) 비판을 담은 2부(1946)는 상영이 금지되었으며(에이젠슈테인은 화병으로 일찍 죽는다) 그의 사후에야 상영될 수 있었다. 물론 스탈린(1879-1953)도 사망한 이후인 1958년의 일이다. 아래는 <이반 대제>의 포스터(이반 대제 역은 스탈린의 영화적 페르소나라고 할 만한 '니콜라이 체르카소프'가 맡아서 연기했다).

러시아사에서 흔히 '이반 뇌제'라고 불리는 이반 4세(1530-1584)는 전횡적 권력을 휘둘렀던 러시아 황제(차르)들 가운데에서도 폭군으로 유명하다(그 '악명'에 있어서 우리의 '연산군'에 비견될 만하다. 물론 연산군은 내면적으로 굉장히 유약했지만). '뇌제(雷帝)'라는 이름은 그래서 얻게 된 것이며, 이것을 영어로는 'Ivan the terrible'이라고 옮긴다. 세계사의 폭군들을 다룬 책 <권력과 광기>(말글빛냄, 2005)나 <폭군들>(이마고, 2005)에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할 정도. 그래서 영화의 국내 출시명이 <폭군 이반>으로 돼 있으며 이전에 EBS에서는 <이반 대제>란 타이틀로 방영한 적이 있다.

 


 

 

바실리 3세의 아들이었던 이반은 1547년 그러니까 그의 나이 17살에 스스로 즉위하면서 자신을 (러시아사에서) 최초로 '차르'라고 부른다('차르'는 로마의 황제 '케사르'로부터 차용한 단어이다). <이반 대제>의 첫머리에서 묘사되고 있는 것도 1547년 왕관을 자신이 직접 머리에 쓰는 젊은 황제의 대관식 장면이며, 금화 세례를 받는 것은 그러한 의식에 이어지는 장면이다. 국역에서 "새로 기름을 부은 그의 머리"(his newly anointed head)라고 직역된 대목은 "새로이 황제의 자리에 오른 그의 머리" 정도의 뜻이다.

이반 대제는 이후에 40년간 모스크바 공국 시대의 러시아를 통치하게 되는데, 생애 말기 그의 최대 비극은 자신의 아들을 왕홀로 쳐죽인 사건이다. 러시아 최대 화가 일리야 레핀의 그림 '1581년 11월16일 금요일의 이반 뇌제와 그의 아들 이반'(1885)가 묘사하고 있는 장면(흔히는 '아들을 죽인 이반'이라고 줄여서 부른다. 모스크바의 트레챠코프 미술관 소장). 이 그림의 초점을 잃은 늙은 황제의 모습에서 더이상의 광기는 읽히지 않는다. 이반 뇌제는 이후에 몇 해 지나지 않아 세상을 뜨게 되는데, 독살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대략 이 정도의 배경지식을 갖고서 다시 텍스트로 돌아가본다. 인용한 첫문단에 대한 이정우 교수의 요약은 이렇다: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의 <광폭한 이반(Ivan the Terrible)>의 초반부에서 지젝은 매우 '들뢰즈적인' 장면을 포착해낸다. 대관식에서 이반의 친구들이 그의 머리에 금화들을 쏟아 붇는 장면이다. 금화가 거의 다 떨어졌는데도 영화는 금화의 흐름=와류를 계속 보여준다. 이 장면을 지젝은 'nonrealistically'라는 부사로 표현한다. 이 표현은 우리가 흔히 어떤 영화를 보고서 “리얼하다”라고 말하는 방식을 염두에 둔 표현일 것이다. 즉 <광폭한 이반>의 이 장면은 '리얼하지 않은' 장면인 것이다. 지젝에 따르면, 바로 이 점에서 이 장면은 '들뢰즈적'이다. 왜 들뢰즈적인가? 이 장면이 '생성의 순수 흐름이 물체적 원인을 초과하고(excess) 있기 때문'이다. 즉 '잠재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the actual)을 초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역본의 '현행적인 것(the actual)'은 이처럼 '현실적인 것'이라고 옮기는 게 이해하기 쉽다. 다르게 말하면, '사실적인 것', 혹은 '사실임직함'이다. 마치 무한정인 양 쏟아지는 금화의 흐름(=생성의 순수 흐름)은 분명 '물체적 원인' 혹은 '물질적 인과율'을 넘어선다. 바닥이 거의 다 드러난 접시로부터 끊임없이 금화가 쏟아진다는 것은 자연적 인과율로 설명되지 않는, 즉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니까 이 장면에서 에이젠슈테인은 '현실적인 것'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잠재적인 것'의 과잉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 계속적인 설명을 들어본다.

"사람들이 어떤 영화를 보고서 '리얼하다'고 할 때 그 'real'은 사실상 'actual'이다. 즉 ‘실재’를 뜻하기보다 ‘현실’을 뜻한다. 이것은 영화란 비현실적인 것이라는 전제 아래에 어떤 장면이 우리의 경험에 합치해서 매우 현실적으로 표현되고 있음을 뜻한다. 지젝도 이 점에 주의해서 'nonrealistically'라는 구절에 따옴표를 치고 있고, 그 후 현실적인 것을 뜻할 때에는 'the actual'로 쓰고 있다. 그렇다면 이 장면은 현실적이지 않은 어떤 것을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상상적인 것을 표현하고 있는가? 금화가 거의 다 떨어졌는데 여전히 폭포수 같은 금화의 흐름이 보인다면 그것은 하나의 환각적인 것, 상상적인 것에 불과한가? 지젝은 그렇지 않음을, 즉 그것은 상상적인 것이 아니라 들뢰즈적 의미에서의 잠재적인 것임을 지적한다. 그렇다면 들뢰즈에게서 잠재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은 어떻게 다른가? 그리고 어떤 점에서 <광폭한 이반>의 이 장면은 들뢰즈적인가?"

참고로, <이반 대제>에서 그러한 잠재적인 것의 과잉을 보여주는 형상은 아래와 같은 이반의 거대한/과장된 그림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그로테스크한) 그림자들 또한 '현실적인 것'을 초과하는 '잠재적인 것'의 순수한 과잉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그러니까 이러한 '과잉'의 영상화는 에이젠슈테인에게서 전략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정우 교수의 설명: "들뢰즈에게서 잠재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은 아니지만 엄연히 실재적인 것이다. 즉 그것은 우리의 경험에 드러나는 현실적인(actual) 것이 아님에도 분명 '실재하는(real)' 것이다. 이 점에서 들뢰즈의 사유 틀은 근대적이기보다는 차라리 고대적이다. 경험을 넘어서는 것을 인간 주체에게서 찾기보다는 경험 너머의 실재에게서 찾고 있기에 말이다. 들뢰즈는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존재론자이며, 칸트처럼 주체의 의식의 틀을 탐구하기보다는 차라리 그가 ‘물자체’로 남겨둔 그 자리에 ‘잠재적인 것’을 놓고 있다 하겠다. 즉 들뢰즈는 인간 주체가 어떻게 그에게 나타난 현상들을 구성하는가를 탐구한 것이 아니라 실재적인 것이 어떻게 현실적인 것으로서 나타나는가를 탐구한 것이다."(강조는 나의 것)

이에 대한 지젝의 설명: "들뢰즈에게 중요한 것은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이 아니라 잠재적인 것의 실재성(The reality of the virtual, 곧 라캉의 용어로는 '실재the Real')이다. 가상현실 그 자체는 다소 초라한 곤념이다. 현실을 모방한다는, 인공적 매체 속에서 현실의 재생한다는 관념. 반면 잠재적인 것의 실재성은 잠재적인 것 그 자체의 실재성을, 그것의 실재적 효과와 결과들을 나타낸다."(17쪽) 

다시 이정우 교수: "들뢰즈에게 가능적인 것과 잠재적인 것은 구분된다. 잠재적인 것은 실재이다. 그러나 가능적인 것은 인간 주관이 그의 경험 결과를 자의적으로 재구성한 것에 불과하다. 즉 사물의 지각을 통해서 형성된 심상(=이미지)을 머리 속에서 이리저리 굴려 상상(=이메지-네이션)하는 것이다. 즉 들뢰즈에게 ‘가능적인 것’은 곧 ‘상상적인 것’이다. 들뢰즈에게서 세계의 실재로서의 잠재적인 것과 인간 주관의 산물로서의 가능적인=상상적인 것은 분명히 구분된다. 따라서 가상현실을 뜻하는 ‘virtual reality’에서의 ‘virtual’은 들뢰즈적 잠재성이 아니라 차라리 가능성=상상적인 것에 해당한다. 들뢰즈 사유의 핵심은 잠재적인 것에 있지 상상적인 것=가능적인 것에 있지 않다."

여기까지는 두 사람 사이에 의견차이가 없는 듯하다. 차이는 <이반 대제>에 나오는 문제의 장면이 과연 '들뢰즈적인' 장면인가 하는 것: "이렇게 볼 때 지젝이 들었던 장면은 과연 '들뢰즈적인' 장면인가? 이 장면은 '리얼하지 않은' 장면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꼭 '들뢰즈적인' 장면인 것은 아니다. 일견 이 장면은 잠재적인 장면이라기보다는 상상적인 장면이기에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 장면은 이반의 심리이든, 대관식 참여자들의 심리이든, 감독의 심리이든, 관객의 심리이든, 일단 어떤 심리가 투영된, 즉 상상적인 장면으로 생각될 것 같다. 두 가지 가설이 가능하다. 첫째, 지젝은 이 영화를 다른 방식으로 읽고 있다. 둘째, 지젝은 들뢰즈의 잠재성 개념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

"첫 번째 가설의 경우, 이 영화가 표현하고 있는 장면을 단순히 상상적인 것으로 보기보다 더 근본적인 어떤 것, 즉 현실을 넘어서는 잠재적인 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꼭 옳다고 할 수는 없다 해도 하나의 의미 있는 독해일 수 있다. 즉 에이젠슈타인이 여기에서 자신의 상상을 투영한 것이 아니라 피상적인 현실 이상의, 그 아래에 깔려 있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 어떤 것을 순간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어쨌든 이 독해 자체는 심각한 문제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두 번째 가설을 보자. 지젝이 이 장면을 '들뢰즈적인' 장면으로 보는 것은 여기에서 '생성의 순수 흐름이 물체적 원인을 초과하고(excess) 있기 때문'이다. 즉 지젝은 물체적 원인을 ‘현실적인 것’으로, ‘생성의 순수 흐름’을 잠재적인 것으로 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규정은 매우 거친 규정이다. 들뢰즈에게서 ‘물체적 원인’은 오히려 잠재성의 차원에 위치한다. 현실적인 것은 물체적 원인의 결과들로서의 현상들, 사건들, 이미지들이다. 여기에서 들뢰즈의 ‘물체’ 개념은, 물체와 물질이 분명하게 구분되는 상식적-물리학적 사유에서와는 달리, 물질/물체의 구분 이전의 스토아 학파의 ‘소마’이고 스피노자의 ‘사물’이다. 지젝은 이 점을 간과하고 있다." 요컨대, 필자에 따르면 '물체적 원인'은 '잠재성의 차원'에 위치하기 때문에 지젝이 이 둘을 대비시키고 있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  

"따라서 ‘생성의 순수 흐름’과 ‘물체적 원인’은 대조되는 개념들이 아니다. 들뢰즈에게서는 생성의 순수 흐름은 곧 물질=실체의 흐름이고 그것이 곧 물체적 원인의 차원이다. 그리고 그 표면효과들, 결과들이 사건들, 현상들, 이미지들이다. 아울러 들뢰즈의 잠재성을 ‘생성의 순수 흐름’으로 보든 ‘물체적 원인’으로 보든 이런 식의 표현은 매우 일반론적이고 성긴 표현들이라는 점도 지적해 두자."

내가 보기에 문제로 걸려 있는 것은 잠재적인 것의 해석이 아니라 는 '물체적 원인(corporeal cause)'의 해석인 듯하다. 지젝은 '물체적 원인'을 '현실적인 것'에 위치시키는 반면에 이정우 교수는 '잠재적인 것'의 차원에 위치시키고 있는 것. 그렇다면, 그에게서 '현실적인 것(=상징적인 것)'의 자리는 어디인가?

"지젝은 상상적인 것과 잠재적인 것에 관한 들뢰즈의 구분을 정확히 지적해 주면서도, 잠재적인 것의 이해에는 난점을 드러내고 있다. 왜일까? 그것은 지젝 자신에게 중요한 것은 상상적인 것이며(지젝 스스로는 그것을 ‘실재적인 것’이라고 하겠지만), 때문에 들뢰즈를 독해하면서 그가 자꾸만 잠재적인 것에 상상적인 것을 투영하기 때문이다. 지젝의 들뢰즈 독해는 매우 흥미진진하면서도 철학적으로 정확하지는 않다."

그러니까 지젝이 가장 강조해마지 않는 실재, 혹은 실재적인 것(the Real)이라는 게 필자가 보기엔 (실제적으론) '상상적인 것'에 지나지 않으며, 둘을 혼동하고 있다는 것이 되겠다(지젝이 맨날 보로메오 매듭처럼 얽혀있는 RSI의 3항조를 얘기하지만, 실제로 그가 떠들어대는 것은 SI 2항조뿐이다?). 그래서 정작 실재적인 것(=잠재적인 것)에다 상상적인 것을 투영한다는 것('자꾸만'의 근거는 무엇인지?). 이러한 지젝 독해는 다소간 흥미롭지만 얼마나 정확한지는 의문이다('지젝, 너 또라이지?'라는 거 아닌가?).

다만, 내가 잠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필자에게서 들뢰즈에 대한 '이해'는 넘쳐나지만 '참된 사랑(true love)'은 부족하지 않은가, 라는 것. 그가 '자꾸만' 찾아내는 것은 '꼭 들뢰즈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대부분의 들뢰지안들이 염려하는 것은 들뢰즈적인 것의 '과잉'인 듯싶다. 그들에게 들뢰즈는 함부로 손댈 수 없는 것, 언터쳐블(the untouchable)이다. '니들이 들뢰즈를 알아?'라는 물음은 라캉주의적 '케보이Che Vuoi?'(도대체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대응물이자 차폐막이 아닐까? 그런데, 넘쳐나는 건 왜 들뢰즈가 아니라 들뢰지안들일까?.. 

06. 07. 01.

P.S. 이제껏 읽은 건 지젝의 첫 문단이다. 짐작에 '지젝의 들뢰즈론(1)'의 필자 또한 그 글이 씌어진 시점에서는 더 읽었을 성싶지 않다. 이후에 지젝은 보다 많은 걸 말하고 있으며 따라서 지젝에 대한 여하한 비판 역시 보다 많은 뒷받침을 통해 예증되어야 할 것이다. 철학은 '일견'에 의한 예단은 아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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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스 2007-01-06 0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내 최고 수준(?)의 들뢰즈 전문가의 지젝 비판 치고는 너무 소략하고 좀 심하게 말하면 '치졸'하군요. 작은 얘기를 꺼낸 게 잘못이라는 뜻이 아니라, 작은 얘기로부터 시작해서 더 근본적인 비판, 이를테면 지젝-라캉(-헤겔) 계보의 근본적인 맹점 같은 것을 지적하는 데까지 이르러야 마땅하지 않은가 싶습니다. 이 정도에서 맺을 얘기였으면 아예 시작하질 말던가...

로쟈 2007-01-06 0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재 투어'를 시작하셨나 봅니다.^^ 제 생각도 보다 '본격적인 비판'이 나와야 하는 거 아닌가 입니다. 철학을 화두로 대신할 수는 없는 거니까요...
 

지젝의 <신체 없는 기관>(도서출판b, 2006)에 관한 '본격적인' 언론 리뷰는 의외로 늦춰지고 있는데, 서울신문에 도서출판b의 기획위원이자 역자이기도 한 이성민씨와의 인터뷰가 게재되었길래 옮겨온다(인터뷰어는 조태성 기자). 지젝의 들뢰즈론 입구에 있는 독자들에겐 참고가 될 만하다. 기사의 검색 타이틀에 오타가 있는 듯하여 그냥 '지젝과 들뢰즈'를 페이퍼의 제목으로 삼는다.  

서울신문(06. 06. 29) “손쉬운 정치적 번역이 아니라 들뢰즈 본연의 철학으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홍윤기 동국대 교수가 노마디즘을 비판(서울신문 6월1일자 보도)한 뒤, 들뢰즈의 ‘정체’에 대한 의문은 커지고 있다.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대표와의 논쟁을 통해 홍 교수는 들뢰즈를 ‘마르크스·엥겔스의 후계자’로 규정한 뒤 그럼에도 ‘탈 영토화’로 상징되는 들뢰즈의 변혁전략이 현실적으로 효과가 없다고 주장했다. 멋들어진 아나키즘 이상의 의미는 없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들뢰즈는 이제 폐기돼야 하는가. 이때 <신체없는 기관>이 번역·출간된 것은 적절한 시점으로 보인다.

 

 

 



-저자는 영화판에서부터 소문이 퍼지기 시작해 상당한 마니아를 거느리고 있는 동유럽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 그는 들뢰즈 사상의 핵심은 초기의 단독 저술에 담겨 있다면서, 가타리와 함께 쓴 후기 저술(<앙티-외디푸스>, <천개의 고원>)이나 미국식 정치적 번역이 담긴 <제국>(네그리·하트)을 통해 알려진 들뢰즈의 모습은 잘못됐다고 주장한다. 아예 가장 대척점에서 서 있는 헤겔에 가장 가까이 다가선 철학자가 들뢰즈라고 규정한다. 번역을 맡은 이성민 도서출판b 기획위원에게 이번 책의 의미에 대해 들었다.

▶최근 노마디즘 논쟁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들뢰즈 본연의 철학과 그 정치적 번역은 다르다.‘유목주의’나 ‘자율주의(아우토노미아)’는 본연의 철학과는 거리가 있다. 홍윤기·이정우 논쟁에서 주목해볼 점은 이정우 대표가 시중의 해석 대신 들뢰즈 본연의 철학으로 되돌아간다는 점이다. 지젝도 후기 들뢰즈적 경향을 ‘손쉬운 정치적 번역’이라 폄하한다.

지젝도 들뢰즈적 실천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 아닌가.
-지젝도 평가하듯 들뢰즈는 스피노자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냈다. 그러나 이 해석은 중립적이다. 예컨대 지젝은 “‘제국’에서 다수성(다중·multitude)은 저항의 힘이지만, 스피노자에게는 근본적으로 애매하다.”고 말한다. 저항도 야만적 폭력일 수 있다. 그래서 유목주의자 혹은 자율주의자는 좀 더 ‘따분한’ 이론적 작업을 해야 한다. 동시에 ‘구좌파’,‘독단주의자’,‘원칙주의자’가 들뢰즈를 받아들였으면 한다. 인간 주체가 여전히 집단적으로 역사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들뢰즈와 진정으로 만났을 때, 변화를 위한 작은 공간이 열릴 것이다.

결국 들뢰즈가 헤겔을 부활시켰다는 것인데, 이게 들뢰즈의 의도인가.
-궁극적으로 들뢰즈를 ‘다르게’ 읽는다면, 헤겔을 부활시킬 수 있다. 지젝은 헤겔이, 들뢰즈가 견디기에는 너무 가깝다고 한다. 그는 둘이 가장 가까운 지점에서 들뢰즈를 다시 읽는다. 물론 여기에는 헤겔을 재해석하는 지젝의 작업이 깔려 있다. 조만간 지젝의 동료 돌라르가 헤겔의 ‘정신현상학’의 해설서를 낸다는 소식이다. 하지만 이번 책에서 이미 우리는 ‘새로운’ 헤겔을 만날 수 있다.

그렇다면 들뢰즈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내가 느끼기에 지젝은 동유럽 지식인임에도 ‘유럽주의자’다. 지젝은 유럽을 사랑하고 유럽의 가치를 높이려 한다.‘낡은 유럽’이 스스로의 가치를 다시 만들어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찬가지로 들뢰즈를 받아들일 때 한국적 현실을 고민하는 것은 패배적인 관점이다. 들뢰즈의 보편성을 껴안아야 한다.‘손쉬운 정치적 번역’ 대신 ‘본연의 철학’을 강조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가장 근본적으로, 가장 과감하게 끌어안아야 한다.

(*)아래는 인터뷰 전문이라고 한다. 역시나 전문이 요약보다는 더 흥미로우며 계발적이다.

최근 들뢰즈의 노마디즘 개념에 대한 혼돈이 많습니다. 대개 철학하시는 분들은 어떤 추상적인 관념으로 이해하시는 반면,다른 분야에 계신 분들은 실제적인 측면에 주목하는 듯 합니다.즉 무조건 대규모의 이동이 일어나야 노마디즘 현상으로 파악한다는 겁니다.단적인 예가 최근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천규석의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겠지요.천규석의 문제의식만이 아닌 것이 노마디즘 관련된 토론장에 들렀더니 모든 분들이 천규석의 문제의식과 비슷한 질문을 던졌습니다.대체,철학적인 개념을 넘어섰을 때 유목주의가 어떤 방식으로 해석되고 이해될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종종 한 철학자의 위대함은,진정으로 새로운 개념을 우리에게 선물한 사실에 있습니다.그 점에서 들뢰즈는 위대한 철학자입니다.들뢰즈와 관련해서 우리는 두 가지를 가지고 있습니다.하나는 들뢰즈 본연의 철학입니다.그리고 다른 하나는 들뢰즈 철학의 정치적 번역들입니다.제 생각에,“유목주의”나 “자율주의” 등은 후자에 속하는 것입니다.

-들뢰즈는 자신의 철학이 정치적으로 번역되는 데 스스로 협조한 적이 없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가타리와 협력한 들뢰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하지만 우리가 그곳에서, 즉 <안티-오이디푸스>나 <천개의 고원>에서 보는 것은 들뢰즈 철학 본연과는,들뢰즈의 독창적인 철학적 성취와는 거리가 있습니다.그것들은 그러한 성취가 정치적으로 번역될 수 있는 한 가지 길을 가리킵니다.그것도 매우 손쉬운 길을 말입니다.

-유목주의와 관련된 최근의 논쟁에서 이정우 씨는 분명 들뢰즈-가타리의 개념을 들뢰즈 본연의 철학적 관점으로,예컨대 <의미의 논리>의 들뢰즈의 관점으로 환원시켜 해석하려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시도를 통해 이정우 씨가, 비록 들뢰즈 철학의 또 다른 정치적 번역을 적극적으로 제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러한 길을 열기 위한 작은 이론적 틈새를 열어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틈새가 보일 수도 있는 곳에서 그의 말을 경청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가 천규석 씨를 정념적으로 비판하는 곳에서 그의 말을 경청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최근에 유행하는 들뢰즈적 개념들의 해석적 경향성을 비판하면서, 그것을 본연의 철학적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하는 지점에서 그의 말을 경청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천규석 씨와 이정우 씨가 둘다 “승리”할 수 있는 길이 없지 않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들뢰즈 본연의 철학과 들뢰즈와 가타리의 협력적 작업 사이에는 어떤 간극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안티-오이디푸스>나 <천개의 고원>이 최근에 한국에서 쟁점이 된 “유목주의”나 아니면 네그리-하트 식의 “다중”과 관련해 내용적으로 전혀 무관할 수 있는 책은 아닙니다. 지젝은 이와 같은 후기의 들뢰즈적 경향을 비판합니다.그것을 손쉬운 정치적 번역이라고 폄하하면서 말입니다. 저는 그의 말에 동의합니다.

이에 대해 홍윤기는 들뢰즈는 영락없이 맑스와 엥겔스의 후계자이지만, 그 문제의식은 높게 평가해도 구체적인 실천의 효과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지젝이 하고 있는 작업이 홍윤기의 주장과 비슷해 보이는데,그렇게 이해해도 될까요. 차이가 있다면 어디서 차이가 날까요.

-들뢰즈 사상의 핵심적 측면은 전통적 맑스주의자들이 놓치고 있는 부분을 볼 수 있게 해줍니다. 그는 스피노자의 사상을 현대적인 것으로 재해석해내는 데 성공함으로써, 오늘날의 사회를 분석하려고 하는 사람이 무엇을 먼저 고려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지젝은 들뢰즈의 그러한 공헌을 인정하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예컨대 존재의 일의성이나 정서적 강도 같은 개념들은 그 자체로 매우 강력한 개념들입니다. 지젝은 우리가 오늘날 일상생활에서조차 그러한 개념들을 매번 경험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현실은 추상적 개념과 무관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반지성적 분위기에 맞서 싸워야 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이러한 개념들이 그 자체로 좋은 것이거나 나쁜 것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지젝의 말처럼 그것들은 그 자체로 “중립적인” 것입니다. 예컨대 지젝은 <신체 없는 기관> 76쪽에서 “‘제국’에서 다수성(다중)은 저항의 힘으로 찬양되는 반면, 스피노자에게서 군중으로서의 다수성 개념은 근본적으로 애매하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적실한 통찰들입니다. 다수성이랑 권력에 대한 저항인 동시에 야만적이고 비합리적인 폭력의 폭발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대중들의 이와 같은 “유목적” 특성을 곧바로 정치적으로 긍정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겠지만, 우선은 그 지점에서 멈추어서,좀더 고민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유목주의자들이나 자율주의자들은 제 생각에 바로 그렇게 사색을 위해서, “따분하고” 순수한 이론적 작업을 좀더 밀고 나아가기 위해서, 사유의 근본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잠시 멈추어 설 필요가 있습니다.

-들뢰즈의 성취는 우선은 “철학적으로” 흡수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오늘날 아쉬워해야 하는 것은 들뢰즈 사상의 정치적 해석이 다양한 논쟁들과 더불어 풍요로운 가운데, 들뢰즈 본연의 철학적 측면이, 다시 말해서 “현대성 그 자체”에 대한 논의가 심도 있게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들뢰즈는 현대의 바로 그 철학자입니다. 따라서 저는 맑스주의자들에게 또 한 번의 기회가 남아 있다고 봅니다. 다시 말해서 저는 구좌파적 문제의식을 놓지 않고 있는 사람들이 이제라도 들뢰즈를 이론적으로 읽기 시작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들은 오늘날도 역시 간단한 세미나나 포럼을 마치고 그 유명한 뒤풀이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들은 공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들뢰즈는 피해갈 수도, 간단히 정치적으로 번역할 수도 없습니다. 저는 저 유명한 “포스트모던적” 주체들이 들뢰즈를 받아들이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저는 여전히 구좌파적인 사람들이,“독단주의자들”이,“원칙주의자들”이 들뢰즈를 받아들이기 바랍니다. 사회의 거시적 변화를 아직도 믿고 있는 사람들이 들뢰즈와 진정으로 조우할 때, 인간 주체가 여전히 집단적으로 역사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들뢰즈와 진정으로 조우할 때, 그때 진정한 변화를 위한 작은 공간이 열릴 것입니다.

그렇다면 들뢰즈는 헤겔의 부활을 꿈꾸는 또 다른 헤겔의 얼굴에 지나지 않는다고 봐야 합니까.들뢰즈가 궁극적으로 의도한 것은 헤겔을 죽이겠다는데 있는게 아니라 철저하게 죽이는 액션을 취함으로써 헤겔을 부활시키는 것이었습니까.그렇다면 진정한 의도였을까요 아니면 고려하지 못한 역풍이라고 봐야 할까요.



-흥미로운 물음입니다. 들뢰즈가 결국 그러한 일을 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겠군요. 헤겔을 부활시킨 것이 지젝이 아니라 들뢰즈일지도 모른다는 물음은 우리로 하여금 시간의 변증법을 성찰하게 만드는군요. 시간의 경과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어떤 “운명”이나 어떤 “필연성” 같은 것을 말입니다. 저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우리가 궁극적으로 들뢰즈를 “다르게” 읽는 데 성공한다면, 그로써 헤겔을 부활시킬 수 있다고 말입니다. 지젝의 말처럼 헤겔은 들뢰즈가 견디기에는 들뢰즈에게 너무 가까운 철학자였습니다. 지젝은 바로 그 지점에서, 그 둘이 가장 가까운, 혹은 거의 차이가 없어지는 지점에서, 들뢰즈를 다시 읽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지젝의 독자적인 공헌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들뢰즈가 헤겔을 부활시키기 전에 헤겔 그 자신이 재해석되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지젝의 몫이었습니다. 라캉도 그것을 해내지는 못했지요.오늘날 라캉주의가 철학과 그 자체를 장악하고 있는 유일한 대학인 류블랴나 대학에서 그들은 그것을 해내고 있습니다. 조만간 지젝의 동료 돌라르가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해설한 책을 낸다는 소식이 들립니다(*슬로베니아어로는 이미 출간된 걸로 안다). 하지만 이미 이루어진 지젝의 작업을 통해서도 우리는 “새로운” 헤겔을 맛볼 수 있습니다(*아래는 류블랴나 대학).



감히 추론입니다만은, 들뢰즈를 이런 방식으로 읽는 것은 지젝이 동유럽 지식인이라는 점도 작용하고 있는 걸까요. 하트가 들뢰즈를 미국식으로 독해해버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보자면, 지젝이 시사하는 가장 중요한 점은 서구 선진국의 잣대를 함부로 끌어들이지 않는다는 점이 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런 측면,즉 맥락의 차이를 간과해버린 것이 한국에서의 들뢰즈 열풍이 놓치고 있는 가장 큰 문제점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저는 “인상”만을 가지고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 경우는 그래야 하겠군요. 그러니 제 말이 그 이상으로 읽히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제 인상이 “독서”에서 나온 것이라는 말을 덧붙입니다. 제가 받은 인상으로,지젝은 “유럽주의자”입니다. 오늘날 진정한 유럽주의자가 서유럽이 아닌 동유럽에서 나오고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현상입니다. 하지만 여하간 지젝은 유럽의 유산을, 유럽의 문명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정신분석도 유럽에서 탄생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보다 유구한 역사를 가진 철학을, 라캉과는 달리, 비판하지 않고 궁극적으로 껴안는 것은 그가 유럽주의자이기 때문입니다.

-조 기자 님의 말씀처럼, 그는 “서구 선진국의 잣대”를 함부로 끌어들이지 않습니다. 그 대신 그가 하는 일은 역으로 바로 그것의 가치를 높이는 일입니다. 그는 “낡은 유럽”이 스스로의 가치를 바로 그 유럽적 방식으로 재창안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민주주의를 창안했듯이 말입니다. 그는 지성적 영역에서 스스로 그 과제를 떠맡고 있습니다.

-들뢰즈를 우리가 수용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하면 그것을 한국적 현실에 적용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패배적인 관점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들뢰즈 사상의 가장 보편적인 측면을 껴안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제가 들뢰즈 사상의 “철학적” 논의를 강조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좀 역설적이게 들리겠지만, 서구 선진국의 잣대를 함부로 끌어들이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가장 근본적으로, 가장 과감하게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적용”이라는 모호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으면서 말입니다.

 

 

 



지젝은 들뢰즈를 해석하는데 있어 알랭 바디우를 지속적으로 인용하고 있는데, 지젝이 알랭 바디우에서 벗어나는 지점은 어디 입니까.아 니면 전적으로 바디우적 해석 위에 서 있다고 봐야 합니까.

-바디우는 라캉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몇 안 되는 철학자 가운데 한 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디우와 지젝 사이에 공통점이 생기는 것이지요.하지만 지젝의 해석은 바디우에 토대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라캉과 헤겔에 토대하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지젝과 바디우의 차이에 대해서는 제가 아직 답변을 드리기 곤란합니다. 저는 바디우의 철학의 핵심을 관통하고 있지 못합니다. 그리고 관통하고 있지 못한 그 무엇에 대해,이 경우라면 입을 다물고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에라도 어떤 인상에 근거해서 말하자면, 바디우는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진지한 철학자인 반면, 지젝은 진지하지 않은 것에서도 내기를 걸 줄 압니다(*아래 사진은 지젝과 바디우).



도서출판b와 자신에 대해 간단히 소개해주신다면.

-저는 현재 도서출판b에서 기획일을 하고 있습니다. 공식적인 직함은 “기획위원”입니다. 제 관심사는 한국에서 진정한 지적인 전통이 “부활”하는 것에 일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는 이와 관련하여 지적인 담론의 장을 심화시키기 위해 번역일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가끔씩 기고를 하거나 강의를 하거나 하지만 말입니다.

-저는 대학(서울대 영어교육과)에서 언어학에 매료되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촘스키의 언어학이 유행이었지요.덕분에 저는 언어학과 분석철학에 입문하게 되었고, 당시의 맑스주의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습니다.하지만 졸업을 하면서 맑스주의와 유럽의 철학에 몰두하게 되었지요. 분석철학의 장점은 그것에 매료된 사람으로 하여금 그게 다가 아니라는 것을 동시에 깨닫게 해주는 데 있습니다. 제가 마이클 하트의 들뢰즈에 대한 책을 번역하게 된 것은 그 무렵이었습니다. 저는 일정정도 자율주의자인 조정환 씨와 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저는 라캉에게 귀착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서울대 미학과 대학원을 진학하면서,라캉을 알게 되었고, 그것이 궁극적인 학문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앞서 말한 지적인 전통의 부활을 위해 가장 시급한 일 가운데 하나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에 있다기보다는 선생들을 길러내는 데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라캉이 말하는 “주인담론”의 시대에, 혹은 권위주의의 시대에, 권위자들은 선생을, 즉 가르칠 사람을 키우는 데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더욱 혹독한 도제 시절을 겪게 했지요. 오늘날 이러한 연결고리는 무너졌습니다. 저는 이러한 연결고리를 다시 소생시키는 일이라면 바로 그곳에 기여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생산”이 아닌 “재생산”을 강조해야 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생산은 생산물을 만들어냅니다. 잘 교육받은 교양 있는 학생들을 말입니다. 하지만 재생산은 선생이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유능한 선생들입니다(*역자가 사범대학 출신이란 걸 다시금 상기하게 된다).

저는 제가 번역한 책들이 앞으로 선생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읽히기를 원합니다. 저는 제가 번역한 책들이 대철학자를 꿈꾸면서 언제까지나 학생으로 남아 있을 운명인 사람들에게 읽히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얼마전 도서출판b는 출판사를 확장했습니다. 그래서 작은 세미나 공간이 생겼지요. 그곳은 신림동 혹은 난곡에 위치하고 있는데, 저는 그곳을 “난곡연구소”라고 부르는 것을 선호합니다. 저는 거기서 학생들을 데리고 세미나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거기서 선생들을 키우는 작업에 헌신할 생각입니다. 라캉주의의 교조적인 모습이 저를 매혹시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오래된 진리를 새롭게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06. 07.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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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6-07-01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퍼갑니다. 국문학 전공자들이 너무 빨리 지젝, 들뢰즈를 해석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하고, 조금 더 근원적으로 읽기 위해서 다시 헤겔을 읽는 모험을 행하려고 하는 중입니다. 그러다가 헤겔을 빠져나가지 못할 수도 있지만, 뭐.. 아직 젊으니 길게 보고 헤겔을 읽으려는 중입니다. ㅎㅎ :)

로쟈 2006-07-01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년은 늙기 쉽습니다.^^

yoonta 2006-07-02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들뢰즈 철학의 "손쉬운 정치적 번역"이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그것이 들뢰즈 본연의 철학과는 어떻게 다른지...들뢰즈를 통한 헤겔의 부활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인 설명은 없는 질문과 답변들이네요. 아무래도 책을 읽어봐야 실체를 확인할수있을 듯.

로쟈 2006-07-02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속히 읽어봐주시길...

palefire 2006-07-02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골수 들뢰즈주의자들은 물론 들뢰즈 철학의 '손쉬운 정치적 번역'으로 거명된 '제국론자'(네그리-하트, 특히 마이클 하트)들을 건드리고 있는 듯합니다. (하트가 번역한 자율주의는 오죽하면 포스트콜로니얼리즘 쪽에서도 저항적 주체의 구체성과 적대의 문제에 둔감하다는 이유로 공격당하곤 하니까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국내로 보자면 모 연구실과 모 네트워크쪽이 이에 대해 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재 노마디즘 논쟁 등이나 과거 '들뢰즈'를 중심으로 선회했던 담론들의 양상에서 볼 때 이 두 진영이 되돌려줄 유일한 반응이라곤 '냉소'일 것 같습니다. (저는 작금의 노마디즘 논란은 개념적인 해석의 정확성보다는 들뢰즈를 표방하면서 등장하는 '타자들'에 대한 냉소로 전락하고 있다고 봅니다) 라캉과 들뢰즈 사이의 협상 속에서 그럴듯한 철학적 체계를 세우는 건 현대철학과 미학, 정치학의 가장 매혹적인 기획일 듯하지만 적어도 국내의 - 하긴 영미권에서도 그랬다고 하는데 - 들뢰즈주의자 연하는 사람들에게는 요원한 이야기겠죠. 다른 건 몰라도 슬로베니아학파가 이 점에서 한 가지 옳다면, 그들은 냉소주의를 비판하고 '행위로의 이행'을 중시한다는 거겠죠~

yoonta 2006-07-02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alefire님 님 댓글보고 질문드려봅니다. 님이 말씀하시는 들뢰즈주의자들의 "냉소주의"는 이정우나 이진경씨처럼 들뢰즈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떠들어라라는 태도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렇다면 슬로베니아학파는 그런 냉소주의를 비판하고 "행위로의 이행"을 한다는 건데 이 "행위로의 이행"이 말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요? 설명부탁드립니다..^^

로쟈 2006-07-02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alefire님/ 오랜만에 댓글을 달아주셨네요(살아계셨나요?^^). 다른 건 몰라도 맨마지막 문장에는 저도 동의합니다. '냉소'에 대해서는 <신체 없는 기관>에 관한 다른 페이퍼에서도 넌지시 언급한 부분이기도 하구요. 제가 지젝을 신뢰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아름다운 영혼'들의 냉소주의를 그가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palefire 2006-07-03 0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yoonta님/제가 언급한 냉소주의는 사실 국내 들뢰지언들이 여타 철학적/정치적 입장에서 들뢰즈 철학에 개입하는 양상들에 대한 '무관심'에 가깝습니다.(정말로 무시일 수도 있고 사실은 그 개입들이 깔고 있는 전제와 논변들의 속내에 대한 무관심이기도 하겠고요) 물론 그 무관심에는 말씀하신 그런 태도도 들어있습니다. 이진경씨의 경우는 김재인씨가 '문학동네'에 기고한 개념적 문제제기에 대해서도 그런 태도였던 듯해요. 그리고 슬로베니아학파의 그 부분은 로자님이 이해하신 그 맥락대로 보시면 됩니다. 슬로베니아학파에서 영미권 들뢰즈주의자들의 냉소주의에 대해 '행위로의 이행'으로 답했다는 내용은 아니고, 보다 일반적으로 그쪽에서 이야기하는 태도 혹은 윤리에 대한 지지를 언급했을 뿐입니다.
로자님/반갑습니다(신상의 중요한 변동 때문에 페이퍼는 챙겨읽었으나 오랜만에;;^^)

yoonta 2006-07-03 0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행위로의 이행이라는 말은 "태도 혹은 윤리에 대한 지지"라는 이야기군요. 그렇다면 그 윤리란 무엇인가요? 니체적인 긍정의 윤리인가요? 아니면 헤겔적, 라캉적 윤리? 제가 묻고 싶었던 건 바로 그 것입니다. "행위로의 이행"이란 무엇인가...단순히 "윤리"다라는 말씀으로는 님 말씀의 배경을 이해하기가 좀 너무 막연하군요..

제 질문이 좀 무성의하다는 감은 드는데..제가 워낙 지젝에 대해서 무지해서요..^^;;

yoonta 2006-07-04 2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답이 없으시군요.. 이런 경우는 두가지로 볼수있는데 답변불가능이거나, 답변하기 귀찮거나.. "냉소"가 아니길 바랄뿐입니다.. -_-

로쟈 2006-07-05 0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거들 자리는 아닌 듯하지만, 문맥에 가장 걸맞는 윤리는 주판치치가 <실재의 윤리>에서 제시해놓은 게 아닌가 싶습니다. '행위로의 이행'은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서도 설명되고 저도 언젠가 다른 자리에서 정리한 적이 있는 듯한데,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yoonta 2006-07-05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이 대신 답변해주셨군요..감사합니다^^
읽다가 만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을 다시 한번 뒤적여봐야 겠네요..
 

러시아의 루블화가 7월 1일부터 완전 태환화를 실시한다고 한다. 그게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이며 어떤 효과를 가져오는지 잘 모르겠지만, 루블화의 위상을 강화/격상시키는 것이라 한다. 관련기사 두 개를 옮겨온다.

한국일보(06. 07. 01) "러 호황 타고 루블화 위상 높이기"(온라인 기사의 제목은 "러시아 루블화 7월 1일부터 완전 태환?") 

-러시아의 자신감은 어디까지 뻗어갈 것인가. 옛 소련 붕괴 후 최고의 경제 활황세를 누리고 있는 러시아가 7월 1일부터 루블화에 대한 모든 통제를 없애며 완전 태환화를 실시한다. 러시아 국민들은 루블화를 자유롭게 들여오거나 나갈 수 있으며 외국인 투자자는 루블화 은행 계좌를 만들 수 있다.

-전문가들은 경제 성장으로 자신감을 얻은 러시아가 1998년 채무불이행(디폴트) 선언 당시 ‘휴지 조각’이나 다름없던 루블화를 미국 달러화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계 화폐 자리에 오르도록 하기 위해 본격 시동을 걸었다고 보고 있다.

-러시아가 어깨에 힘을 주는 이유는 배럴 당 70달러까지 치솟은 기름값 때문. 러시아는 연간 수백억 달러에 달하는 오일 달러에 힘입어 경제가 고속 성장하면서 루블화 수요가 크게 늘었다. 러시아 외환보유액은 1998년 150억달러에서 올해 2,300억달러로 1,500%나 뛰어 올랐다(*러시아 국영 '가즈프롬'에 관해서는 이전에 다룬 바 있다). 사회간접자본 구축과 국민 복지 증진을 위한 안정화기금도 700억달러나 쌓였다.

-이런 분위기를 보여주듯 러시아 하원(두마)은 24일 기업, 상점, 식당에서 외국 통화로 가격을 표시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안을 통과 시켰고 장관 등 공무원이 상품, 서비스 가격을 언급할 때도 달러화나 유로화로 바꿔 발표하지 못하도록 했다. 달러화, 유로화에 의지하지 않고 루블화만 가지고도 충분히 경제를 꾸려갈 수 있다는 뜻이다. 파이낸셜 타임즈(FT)는 러시아의 이번 결정은 고도의 정치적 계산에 따른 것이라고 30일 분석했다.

-러시아 정부는 2007년 1월부터 시작한다는 원래 계획보다 6개월이나 앞당겨 태환화 실시를 결정했다. 2주 후 상트 페테르부르크서 G8(서방선진 7개국+러시아) 정상회담이 열리고 러시아 정부가 파리클럽에 빚진 220억달러를 갚기로 합의한 지 불과 며칠이 지난 시점이다.

-FT는 “모라토리엄(대외 채무 지불유예) 선언 8주년을 맞은 러시아 정부가 G8 회담을 앞두고 루블화 이미지를 개선하는 동시에 재정 파탄 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났음을 자랑하기 위한 조치”라고 전했다. 아울러 “외교 분야에서 미국의 독주를 막겠다는 블라드미르(*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의지를 경제 분야 까지 반영한 것”이라는 분석도 덧붙였다.

 

 

 



-러시아는 핵 문제로 시끄럽게 하고 있는 이란에 대해 미국이 강력히 제재하려 하지만 이를 반대하고 있다. 또 이슬람 무장 단체 하마스가 총선을 통해 집권하자마자 미국의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마스 지도부를 모스크바로 직접 초대하는 등 곳곳에서 조지 W 부시 행정부와 부딪히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는 그 어느 나라보다도 빠르게 성장했다”며 “과거의 선입견으로 바라봤던 사람들은 지금 러시아를 두려워 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편 일부 경제 전문가들은 루블화가 태환화 함에 따라 경제가 과열, 물가가 오르고 수출 가격이 상승해 기업들이 경쟁력 확보에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박상준 기자)(*아래는 루블화 지폐의 견본 이미지. 루블의 최고액권은 1000루블짜리이며 원화로는 대략 4만원 정도이다.)

세계일보(06. 07. 01) 러시아 "루블화 위상 되살리자"

-국제유가 상승으로 오일 머니를 축적한 러시아가 1일 루블화의 완전 태환(통화 자유교환)을 위해 외환시장 규제를 철폐한다. 1998년 외환위기 때 400억달러(약 38조원) 규모의 디폴트(채무 불이행)를 선언한 지 8년 만이다. 러시아 국민들은 1일부터 루블화를 자유롭게 반입·반출할 수 있고, 외국 투자자들도 루블화 은행계좌를 개설할 수 있다. 기업이 벌어들인 외화의 25%를 중앙은행에 예치토록 한 규제도 사라진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루블화 태환 일정이 예정보다 6개월 앞당겨진 것은 계산된 정치적, 상징적 조치라고 30일 보도했다. 러시아 정부는 이날 국제 채권국 모임인 파리클럽과 8월21일까지 213억달러의 부채를 조기 상환키로 합의했다. 러시아는 부채 213억달러와 조기 상환에 따른 할증금 10억달러 등 총 223억달러를 지불하게 된다. 러시아 정부는 조기 상환으로 이자비용 부담이 감소, 총 77억달러의 경제적 이득을 보게 됐다고 강조했다.

-UBS의 수석 이코노미스트인 알 브리치는 “러시아가 이제 무시할 수 없는 국제사회 일원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일련의 조치”라고 분석했다. 외환시장 규제 철폐 역시 몰락했던 루블화의 위상을 회복시키는 동시에 달러화 독주를 견제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라고 신문은 분석했다.

-러시아가 루블화 태환에 나선 것은 2500억달러의 외환보유액과 700억달러의 석유안정화기금으로 대변되는 탄탄한 경제상황 덕분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루블화의 완전 태환은 경제구조 개혁과 기업환경 개선 등을 통해 러시아가 투자할 만한 시장으로 인정받을 때 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신문은 루블화의 태환화가 순조로우면 러시아 경제는 새로운 단계로 진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일각에서는 유입 자금이 급증하면 경기 과열이나 인플레이션을 유발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당장 외환시장에 큰 변화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AP은 러시아 중앙은행이 하루 환율 변동 폭을 규제하기 때문에 루블화 환율에 큰 충격은 없을 것으로 분석했다. 러시아 중앙은행에 따르면 29일 현재 달러·루블화 환율은 1달러에 27.0611루블이다.(조현일 기자)
 
 
06. 07. 01.
 
P.S. 지난 한주 러시아 관련 기사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끌었던 것은 이라크에서 살해당한 러시아 외교관들의 복수를 푸틴이 지시했다는 내용이었다. TV보도용 멘트는 이렇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특수부대에 러시아 외교관 살해범들을 추적 분쇄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러시아 대통령궁인 트램린 공보실은 성명을 발표하고 대통령이 특수부대에 모든 필요한 조치를 다해 이라크 주재 외교관들을 살해한 범죄자들을 찾아내 분쇄할 것을 지시했다고 밝혔습니다. 크렘린은 특수부대를 특정하지는 않았지만 과거 러시아 비밀경찰 KGB의 후신인 해외정보국이 작전에 나설 것으로 보입니다."
 
Photo from www.photobucket.com
 
그런데 거기에 이어진 해외토픽: "한편 사관학교 졸업식에 참가하기 위해 크렘린을 나서던 푸틴 대통령은 놀러온 어린이들과 잠시 대화를 나누었는데요. 한 어린이의 셔츠를 걷어올리고 배에다 깜짝 뽀뽀를 해 카메라 세례를 받기도 했습니다." 외신을 참조하여 조금 보충하면 푸틴은 4-5세쯤 된 이 아이에게 이름을 묻고, '니키타'라고 대답하자 사진처럼 뽀뽀를 했다. 아이나 주변 사람들이 다소 당황해 한 것은 불문가지이다.
 
테러리스트에 대한 '분쇄'를 지시하는 대통령과 어린아이의 배에 입맞추는 대통령, 이것이 푸틴의 두 가지 얼굴, 더 나아가 러시아의 두 가지 얼굴이다(푸틴의 대중적 지지의 일부는 그의 이러한 엉뚱한 돌출행동에 힙입고 있다). 대중적 친근감에 있어서 부시 또한 푸틴 못지 않지만, 차이라면 푸틴은 연출하지 않는다는 것. 그는 지극히 '러시아스런' 권력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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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조정래 선생의 신작 장편소설 <인간 연습>이 출간됐다. 책이 나온 건 며칠 됐고, 오늘자 한겨레에 최재봉 기자의 리뷰가 실렸다. 길잡이 삼아서 옮겨놓는다. 기사의 타이틀은 "무너진 사회주의 전향 장기수의 선택은?"이지만, "사회주의 몰락'에 대한 문학적 해명 시도"라는 설명에 기대어 페이퍼의 제목을 달았다. 그게 나의 관심사와 맞기도 하고(주제면에서 가장 '러시아적'이기도 하다).

-작가 조정래(63)씨가 새 장편소설 <인간 연습>(실천문학사)을 내놓았다. <한겨레>에 연재했던 <한강> 이후 소설로는 4년여 만이다. 80년대 초부터 20여년 동안 세 편의 대하소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에 매달려 온 조정래씨가 한 권짜리 소설을 발표하기는 <불놀이>(1983) 이후 23년 만의 일이다. 일제 강점기에서 유신 말기까지의 한국 현대사를 대하소설 삼부작으로 갈무리한 작가의 다음 행보가 어떠할지 독자들은 궁금해했던 터였다.

 

 

 

 

-<인간 연습>은 전향한 장기수 ‘윤혁’을 통해 이념의 현실적 의미를 따져 묻고 그 방향을 모색해 본 작품이다. 90년대 초를 배경으로 삼은 이 소설에서 윤혁을 가장 괴롭히는 것은 ‘사상의 조국’ 소련이 무너지고 조국의 북쪽에서는 인민들이 굶주림에 쓰러져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소설 앞부분에서 윤혁과 또 다른 전향 장기수 ‘박동건’은 자신들이 평생 동안 추구해 온 가치가 속절없이 스러지는 장면 앞에 망연자실해한다. 두 사람은 감옥에서 악랄한 고문에 못 이겨 전향은 했을지언정 자신들의 청춘을 바쳤던 사회주의 이념을 진정으로 버리지는 않았던 것.

-“이런 꼴 보려고 우리가 평생 그 고생을 한 겁니까”라며 탄식하던 동건은 결국 병상에서 죽음을 맞고, 윤혁에게 “그의 죽음은 바로 자신의 죽음”으로 받아들여진다. 동건의 죽음이라는 물리적 사태는 실상 사회주의라는 이념적 가치의 현실적 죽음을 대행하는 것이었으니까. 사회주의가 무너진 마당에 동건과 윤혁에게 남은 삶은 무의미한 소음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니겠는가.

-이념을 좇았던 많은 이들이 그러하듯 윤혁은 이성과 논리의 인간이다. 비록 전 존재가 뒤흔들리는 듯한 충격과 절망 속에서도 그는 사태의 진상과 원인을 합리적으로 규명해 보고자 한다. 무엇보다 결과적으로 실패였음이 드러난 자신의 선택에 대해 합당한 옹호의 논리가 필요했던 것. 이 대목이야말로 소설 <인간 연습>의 핵심에 해당할 터인데, 소설 속에서는 윤혁의 감방 동료였던 운동권 출신 ‘강민규’가 우선 윤혁의 노력을 돕는다.

-강민규에 따르면 사회주의의 실패는 △공산당 일당독재 △인간을 도덕적으로 개조할 수 있다는 믿음 △당의 일방적 계획과 집행 △‘당의 무오류’라는 오류 등에 기인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런 원인 분석 가운데서도 민규와 윤혁은 특히 사회주의가 ‘인간의 얼굴을 잃어버렸다’는 지적에 큰 공감을 표한다. 윤혁은 달리 “(본능적 존재인)인간을 이성적 존재로, 이성의 힘이 큰 존재로 보려고 한” 착각을 들먹이기도 한다.

-또 다른 해석도 있다. 보호관찰 대상인 윤혁을 감시하는 ‘김 형사’가 퉁겨준 신문 칼럼에서 어떤 교수가 쓴 글이다: “마르크스주의란 기본적으로 밥 먹는 철학인데도 그것을 실현시키지 못해 결국은 스스로 몰락하고 말았다.” 이런 사후 분석들에 앞서 벌써 30여 년 전에 사회주의의 몰락을 예견한 견해도 있었다. 간첩으로 내려오자마자 믿었던 친구의 신고로 체포된 윤혁을 담당했던 검사의 장담이었다: “모두 함께 일해 공평하게 나눠 먹는다고? 말이야 근사하지. 그렇지만 내 것이 아닌데 어느 누가 최선을 다해 일하겠나? 그 망상이 결국 공산주의를 망치게 될 것이다. 두고 봐.”

-미흡한 대로 원인 분석이 끝났으면 향후 대책이 마련되어야 하는 법. 이제 사회주의는 패배했으니 승리한 자본주의 쪽에 빌붙어 그 떡고물이나마 얻어 먹고자 분골쇄신해야 하는가. 그런 것이 아니라면? 이와 관련해 작가 쪽에서 뚜렷하고 획기적인 대안을 내놓고 있지는 못하다. 그다지 길지 않은 소설에 대한 요구로는 처음부터 무리했달까. 작가는 다만 일종의 원칙론이랄까 막연한 낙관적 전망을 제시하고 있어 보인다.

-방향은 두 가지. 하나는 강민규가 운동의 새로운 활로로서 추진하는 ‘진보적 시민단체’ 결성이다. “건전한 보수와 생산적 진보를 조화시켜 좌우의 날개로 균형을 잡는 사회를 만들어 가자는 구상”이라고 민규 자신은 설명한다. ‘사회주의는 시민단체들을 용인하지 않아 몰락했을 수도 있다’는 윤혁의 생각은 민규의 구상에 대한 납득과 지지의 표시로 볼 수 있다.

-또 다른 방향은 다소 엉뚱할망정 윤혁 자신에게는 무엇보다 절실하게 와 닿는 체험적 진실의 무게를 지니고 있다. 그 이름은 ‘아이들.’(*이 '엉뚱함'이 어중이떠중이들과 '작가'의 차이이다.) 윤혁은 우연한 계기로 부모를 잃은 어린 남매 ‘경희’와 ‘기준’을 만나고 그 아이들을 손주처럼 돌보면서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삶의 기쁨을 맛보게 된다. 아이들과의 만남은 “새싹 파릇파릇 돋는 너른 초원”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는 햇살” “온갖 꽃들이 흐드러지게 만발한 꽃밭”으로 묘사될 정도로 윤혁의 잿빛 삶을 황홀하게 채색한다.

-다섯 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소설의 마지막 장 제목은 ‘인간의 꽃밭’인데, 이 표현은 윤혁이 출간한 수기를 읽고 그를 찾아온 대전의 보육원장 ‘최선숙’이 자신의 보육원을 가리켜 한 말이다. 선숙은 그 자신 대학병원 간호부로서 전쟁 때 만났던 인민군 장교에게 큰 감화를 받아 인민군에 입대했던 경험을 지니고 있다. 그가 자신의 현재를 말한다: “제가 무작정 인민군을 따라나서며 그렸던 세상을 아이들을 길러내면서 만나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우리가 꿈꾸는 미래이니까요.”

-우여곡절 끝에 윤혁이 경희·기준 남매를 데리고 선숙의 보육원으로 들어간다는 소설 결말은 윤혁 역시 선숙의 견해에 동조한다는 뜻이리라. 아이들이 곧 미래라는 것. 이념 이전에 아이들을 잘 기르는 것이 인류의 미래에 대한 확실한 투자요 실천이 될 수 있다는 뜻(*이건 도스토예프스키이 마지막 소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테마이기도 하다).

-<인간 연습>은 조정래씨가 <한강> 이후 발표한 중단편 <수수께끼의 길>과 <안개의 열쇠>의 연장선상에서 사회주의의 몰락이라는 인류사적 사건에 대한 문학적 해명을 시도한 작품이다(*물락 15년 후에도 이 주제를 붙들고 있는 작가에게 경의를 표한다). <태백산맥>과 같은 이전 작품에서 좌익 옹호라는 비난을 받고 국가보안법 혐의로 피소되기까지 했던 작가의 이번 소설은 그가 맹목적 이념주의와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충분히 보여준다. 다만 사회주의 몰락 원인에 대한 해명과 그 이후의 대안 모색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독자들도 있을 법하다. 시종 윤혁의 시점으로 진행되던 소설이 끝부분에 가서 민규와 선숙의 시점 쪽으로 흔들리는 것이 혼란스럽다.

06. 0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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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신문에서 올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을 다룬 리뷰 기사를 옮겨온다. 필자는 경향신문의 김중식 기자이며 타이틀은 "박주영, 책세상에 칩거하는 ‘프리터族’ 그려"이다. 너무 기사틱한 제목이어서 '자발적 백수의 윤리학'이라고 고쳐단다. 보아하니, 백수는 2000년대 문학의 가장 특징적인 인물군이다. 

작가의 말을 인용하면 이렇다: "책을 소유하는 가장 바람직한 방식은 그것을 쓰는 것이라고 발터 벤야민은 썼다. 나는 책을 소유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이 소설에는 내가 좋아해 마지않는 것들이 아주 많이 포함되었다. 쓰면서도 읽는 것이 더 즐거울 때가 많았다. 하지만 읽는 것보다 쓰는 것에는 더 많은 자유가 있었고, 나는 그 자유가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이 소설을 쓰는 동안 나는 읽는 것보다 쓰는 것이 더 재미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 느낌을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다."

경향신문(06. 06. 29) 올해 제30회 ‘오늘의 작가상’을 탄 박주영씨(35)는 취미·놀이가 자연스럽게 직업·일로 연결된 행복한 사람이다. 수상작인 장편소설 <백수생활백서>(민음사) 역시 “가장 겸손한 독자를 치밀한 소설가로 탈바꿈시킨다”(심사위원 김화영)는 말마따나 오직 책을 읽는 것만이 삶의 이유이자 목표인 ‘나’(서연)를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 ‘나’는 일종의 프리터족(자유롭게 살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만큼만 아르바이트를 하는 사람들)인데 때때로 일 하러 나가는 유일한 이유는 책값을 벌기 위해서다.

 

 

 

 

-박씨는 “독서 자체가 정체성인 주인공의 삶과 나의 실제 생활은 70~80%쯤 비슷하다”면서 “올들어 60권쯤 읽었고 대학원(정치외교학) 졸업 직후인 1997~99년에는 연평균 300권쯤 읽었다”고 말했다(*백수는 백수가 안다). 작품의 구조는 노래가사와 드라마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는 뮤지컬 ‘맘마미아’의 그것과 비슷하다. 서사와 국내외 현대소설의 인용문이 돌쩌귀의 암짝·수짝처럼 문설주와 문짝을 사이좋게 열고 닫는 것 같은 모양새다. 작가는 “딱 맞는 인용문이 떠오르지 않을 땐 일단 공란으로 비워두고 소설을 써내려가면서 나중에 인용문을 찾아내기도 했다”고 밝혔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나’는 책을 읽거나, 읽을 책을 사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한다. 그러다 절판된 책을 갖고 싶었는데 인터넷을 통해 그 책을 팔겠다는 한 남자와 ‘오프라인’에서 접선한다. 실연한 남자는 옛사랑이 남긴 책을 팔아치움으로써 연인을 잊어버리겠다는 복수극에 ‘나’를 끌어들인다(*왠지 장정일의 <아담의 눈뜰 때>를 떠올리게 한다. 21세기 버전?).

-이 작품이 문제적인 이유는 두 가지 대목이다. 하고 싶은 일만 하는 밀폐적·자족적·자발적 백수들의 존재론을 묘사했다는 것과 경제적 어려움을 모른 채 자란 젊은이가 커서도 캥거루족처럼 부모에게 의지해 살면서도 ‘스스로 컸다’고 뻗대는 새로운 윤리학이 그것이다.

-식당 주인인 아버지는 돈을 잘 버는데도 돈 쓸 시간이 없을 만큼 일만 한다. 반면 “책을 읽을 시간을 뺏기고 싶지 않기 때문에 일하기 싫다”는 ‘나’는 아버지가 저당잡힌 ‘시간’마저 책읽기에 쓴다. 사글세를 벌기 위해 일을 해야 하는 시간을 줄이려고 아버지에게 얹혀사는 형국이다.

-작가는 “두 세대간에는 노동에 대한 개념과 삶의 방식이 다르다”면서 “프리터족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을 만큼만 돈을 벌면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삶의 방식 또한 자신만의 유토피아에서 똬리를 틀고 있다. ‘나’의 친구 유희와 채린 역시 사회적 관계와 의무를 팽개치고 소설쓰기와 로맨스(불륜)에 몸과 마음을 던지는 것이다.

06. 06. 29.

P.S.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김미현 교수는 이렇게 평한다: "그 자체로 불후의 도서관인 소설, 그 옆에 영화관이 있는 소설, 그 속에서 자족적인 삶을 사는 인간이 있기에 이 소설은 21세기적 유토피아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장자의 나비가 책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불가능한 이상을 실현 가능한 일상으로 느끼게 할 정도로 이 소설은 환상적이면서도 구체적이다. 반성하고 자학하는 주인공이 아니라 스스로를 사랑하고 만족하는 주인공을 이제 우리 한국 소설에서도 갖게 되었다." 소설을 읽어보지 않았지만, 마지막 문장의 멘트는 '추상적'이다. '스스로 컸다'고 생각하는 백수들의 윤리학을 이 소설이 건드리고 있다면 말이다...

P.S.2. 자료를 옮겨오는 김에 문화일보 장재선 기자의 소개기사도 옮겨오도록 한다.

문화일보(06. 06. 29) 책읽는 여자, ‘백수 유토피아’를 꿈꾸다

어떤 사람들은 책을 읽는 걸 공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 책 읽기는 공부라는 성실하고 고리타분한 말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내 책 읽기는 처음부터 놀이였을 뿐이다. 내가 설사 아주 어려운 학술 책을 읽고 있다고 해도 그것 역시 놀이일 뿐이다.놀이가 꼭 쉬울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 내가 보기에는 아주 지능적이어야 하고 연마를 거듭해야 하는 바둑이나 장기, 체스를 놀이로 하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말이다.
-<백수생활백서>의 주인공 서연의 독백.


-현존하는 한국 최고 독서가는 누구일까. 책을 읽을 시간이 많아서 감옥생활이 괜찮았다고 회고한 김대중 전 대통령일까, 수만권의 장서를 갖고 무불통지(無不通知)의 혜안을 과시하는 이어령 이화여대 명예교수일까, 아니면 중학 중퇴 학력으로 오로지 책 읽기와 글 쓰기를 통해 대학교수로 입신한 소설가 장정일씨일까.

-여기 이들 못지 않게 책 읽기를 즐기는 28세의 여성이 있다. 이 미혼 여성은 1년에 최소 300권에서 700권 정도의 책을 읽어야 살맛이 난다. 지난 10년간 대략 5000권 정도의 책을 비타민처럼 씹어재꼈다. 사람들이 책을 하도 읽지 않아 ‘책읽는사회만들기 국민운동’단체까지 생긴 인터넷 시대에 책 읽기를 통해 자족의 삶을 추구하는 희귀종인 이 여성은, 그러나 실존인물은 아니다.

-올해 오늘의 작가상을 받은 박주영(35)씨의 장편소설 <백수생활백서>(민음사 발행)에 나오는 주인공 서연의 이야기다. 서연은 21세기에 지구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일하지 않고 오로지 책만 읽으며 살 수 있는 유토피아’를 꿈꾼다.

서연은 책 읽을 시간을 뺏기지 않으려 직업을 얻지 않은 자발적 ‘백수’입니다. 오로지 책 살 돈을 마련하기 위해 주유소나 친구 비디오가게에서 잠깐씩만 아르바이트를 하지요. 주인공과 그 친구들의 캐릭터에 작가인 제 모습이 골고루 투영돼 있습니다.”

-27일 서울 중구 충정로 문화일보에서 만난 작가 박씨는 책 읽기와 글 쓰기에만 능한 듯 어눌하기 짝이 없었다. 2005년 신문사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후 작가 생활을 해 왔으나 언론 인터뷰는 처음이라 너무 떨린다고 솔직히 토로했다. 경쾌하게 읽히는 그의 소설과는 달리 대화는 띄엄띄엄 느리게 진행됐다.

-부산에서 대학·대학원을 나온 그는 사회과학 전공 논문을 준비하며 책읽기의 즐거움에 푹 빠졌고, 이후 소설 쓰기에도 눈을 떴다고 했다. 그는 보통 신인작가들에게 주어지는 오늘의 작가상에 투고하며 수상의 확신이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제 소설이 빠르게 잘 읽힌다는 반응은 예상 밖이에요. 수많은 책들을 인용했는데…. ”

-그의 소설에는 마르그리트 뒤라스, 파트리크 모디아노, 폴 오스터, 레몽 장, 구효서 등 국내외 작가들의 작품에서 발췌한 구절들이 구석구석에 배치돼 있다. 철학, 사회과학 저서들도 꽤 인용돼 있다. 이것들이 현학으로 여겨지지 않는 것은 주인공 서연이 책 읽기를 지식을 확장하기 위한 학습으로서가 아니라 오로지 몰입에의 놀이로 즐기기 때문이다. ‘나는 그냥 좋아하는 책을 읽을 뿐이다. 막연하긴 하지만 책을 읽고 있는 순간만은 적어도 내 삶이 허무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로써 주인공 서연이 책 속에서 발견한 빛나는 구절은 독자들에게도 삶의 이면을 알아가는 순수한 기쁨을 느끼게 한다. 책 읽기의 체험에만 의지했으면 이 소설이 수많은 ‘독서일기’와 비슷해졌을 것이다. 아내와 사별한 후 식당업으로 홀로 딸을 키우는, 겉으론 무뚝뚝하지만 속정이 깊은 아버지, 서연의 고교동창으로 회사를 그만두고 소설을 쓰겠다는 ‘유희’, 남편이 아닌 남자와 사랑에 빠진 친구 ‘채린’ 등이 주인공과 엮어내는 희로애락은 작품에 현실감을 부여한다.

-특히 서연이 절판된 책들을 구하기 위해 만나게 된 ‘남자’의 실연 복수극에 동참하는 이야기는 주말 드라마의 한 대목처럼 박진감이 있다.서연과 남자가 책을 주제로 한 대화 틈틈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끼워넣는 것은 이 시대의 문화코드가 영상 쪽으로 기운 것을 어쩔 수 없이 반영하고 있다. “저는 영화의 대본과 같은 소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소설엔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재미가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그는 이미 장편소설 하나를 써서 퇴고 중이라고 했다. 지금까지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서른 살이 되어가는 여자들의 성장이야기를 줄거리로 하고 있다. 그는 이후엔 탐정소설류를 쓰고 싶다고 귀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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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6-06-29 09:12   좋아요 0 | URL
제가 옛날 사람이 되어 버렸나봐요.글을 읽다보니 순간 그런 생각도 듭니다.돈벌이 만이 최고의 가치로 규정되어 버린 개발독재 세대의 가치가 진저리처집니다.그러나 또한 노동을 통한 가치의 실현을 도외시하고 노동의 의미를 극도로 개인화,파편화 시켜 버린 프리터나 일명 백수족들의 윤리가 과연 옳바른가 라는 생각도 듭니다.물론 백수가 늘어나는 것이 그들의 자발적 선택에 의한 것 만은 아니라는 생각에 안타까운 마음도 듭니다만.....책을 위해 백수가 된다는 것은 무언가 가치 전도라는 생각이 듭니다.아무래도 저도 이제 늙나보네요.켕

로쟈 2006-06-29 09:38   좋아요 0 | URL
백수족들의 '윤리'에 대해서 이견이 가능하지만, 그것이 한 가지 '가능한' 선택이라는 점은 인정하고 싶습니다. 비노동만큼 반국가적, 반자본적인 것도 없을 테니까요. 자멸적인 것이긴 하나...

기인 2006-06-29 09:57   좋아요 0 | URL
박주영, 책세상에 칩거하는 ‘프리터族’ 그려" 는 '그녀'가 아닐까 싶습니다 ^^;
음. 저는 노동을 통한 가치의 실현이, 그 '가치'가 교환가치나 사용가치가 아닌 자아실현 같은 '가치'가 존재한다는 데에는 부정적입니다. 적어도 상당수의 노동현실에 있어서는요.
그렇다고 부모를 착취(?)하는 삶은 물론 바람직하지 않지만.
인문학 대학원생은 뭐랄까.. 이 또한 일종의 프리터 족으로 살 수 밖에 없는 경우가 많은데 (예전 로쟈님 인터뷰 중에 인문학의 기생성은 이렇게 인문학 대학원생의 존재 방식에서도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 공대 대학원생들은 투덜되기는 해도 먹고는 살던데요;;) 그 아르바이트라는 것이 주로 '과외'라는 것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일종의 계급 재생산 같기도 하고, 어쨌든 맘에 안 들어서 요즘은 과외를 안 하고 서서히 굶어죽어가고 있습니다 ^^;

로쟈 2006-06-29 10:02   좋아요 0 | URL
암세포를 죽이는 방법 중의 하나가 굶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혹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건 안 사기...

드팀전 2006-06-30 09:19   좋아요 0 | URL
출구가 막힌 사회가 주는 반강요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물론 글을 쓴다거나 공부를 한다거나 하는 것 등을 목표로 자발적 백수를 선택할 수는 있겠지만...그 역시 항구적 백수의 윤리를 쫓는 다기 보다는 단계상 거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프리터나 백수모델에 대입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인문학 대학원생들은 지금은 그렇지만 다들 교수나 평론가나 뭐 이런 목표를 지향하고 가는 도정이지 자발적 백수나 프리터를 상정해 두고 공부하진 않을테니까요.
노동현장에서 노동이 자아실현 가치로 각성되기 까지는 상당히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대게는 밥벌이를 위해서 마지 못해 일한다고 하지요.-좀 멋있게 이야기하면 교환가치나 사용가치라고 하겠지만-전 밥벌이란 말이 더 좋아요.직업 선택의 첫 관문에서 자신의 가치를 고려치 않고 밥벌이만을 위해 일하게 된 사람들의 경우 노동을 통한 자아실현의 가치를 찾기 어려운 경우를 많이 봅니다.하지만 프리터나 백수처럼 취미의 일상화를 통한 자아실현 만큼이나 자신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현장에서 자아의 가치를 찾으려고 하는 경우도 많다는 점.노동을 통한 자아실현이 어렵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지향점이라고 생각하기에 부정적인 견해는 잠시 거두어 두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