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젝'을 키워드로 검색하다가 읽게 된 글 하나는 철학아카데미 이정우 교수의 '지젝의 들뢰즈론(1)', "잠재적인 것과 가능적/상상적인 것 - 지젝의 들뢰즈론: 비판적 음미"(05. 05. 26)이다. 실제 강의된 내용인지는 모르겠으나 '잠재적인 것의 실재성(1)'이라고 소제목이 더 붙은 걸로 보아 'Organs without bodies'(2004)의 첫 소절('The Reality of the Virtual')을 자세히 '음미'하고자 했던 듯하다(하지만, 그 '음미'는 (1)에서 더 진척되지 않은 듯하다). 그가 읽고 있는 것은 본문의 첫 페이지, 첫 문단 정도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들뢰즈 전문가'의 의견인지라 그의 '음미'를 참조하면서 지젝의 첫 문단을 읽어보고자 한다. 최근에 나온 국역본 <신체 없는 기관>(도서출판b, 2006)에서 이 문단은 이렇게 옮겨져 있다.

 

 

 

 

"한 철학자에 대한 참된 사랑의 척도는 우리의 일상생활 도처에서 그의 개념들의 흔적을 알아보는 데 있다 최근에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의 <이반 대제>를 다시 보면서 나는 제1부 도입부의 대관식 장면에 있는 멋진 디테일을 발견했다. 이반과 (당분간은) 제일 절친한 사이인 두 친구가 새로 기름을 부은 그의 머리 위로 커다란 접시들에 담긴 금화를 쏟아붓는다. 이때 관객들은 이 말 그대로의 금화 세례가 지닌 마술처럼 과도한 특성 때문에 놀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접시 두 개가 거의 비어 있는 것을 본 이후임에도 우리는 다음 장면에서 이반의 머리에 금화가 계속해서 '비현실적으로' 중단 없는 흐름으로 쏟아지는 것을 본다. 이러한 과잉은 몹시 '들뢰즈적'이지 않은가? 그것은 물체적 원인을 넘어서는 생성의 순수 흐름의 과잉, 현행적인 것(the actual)을 넘어서는 잠재적인 것의 과잉이지 않은가?"(17쪽)

'음미'의 내용을 보다 명확하게 확정하기 위해서 원문 또한 옮겨놓는다: "The measure of the true love for a philosopher is that one recognizes traces of his concept all around in one's daily experience. Recently, while watching again Sergei Eisenstein's Ivan the Terrible, I noticed a wonderful detail in the coronation scene at the begining of the first part: when the two (for the time being) closest friends of Ivan pour golden coins from the large plates onto his newly anointed head, this veritable rain of gold cannot but surprise the spector by its magically excessivecharacter - eveb after we see the two plates almost empty, we cut to Ivan's head on which golden coins 'nonrealistically' continue to pour in a continuing flow. Is this excess not very 'Deleuzian'? Is it not the excess of the pure flow of becoming over its corporeal cause, of the virtual over the actual?"(3쪽)

여기서 지젝이 묘사하고 있는 영화 <이반 대제>(1944)의 장면은 아래의 장면이다. 이반에게 금화를 퍼붓는 두 친구는 나중에 그를 배신하기 때문에 '당분간은'이란 말이 들어가 있다. 참고로, 이 장면에 대한 자세한 분석은 롤랑 바르트의 '제3의 의미'(<이미지와 글쓰기>, 세계사, 1993)에서 이루어지고 있다(영역은 'Image-Music-Text'[1977]에 수록돼 있다). 영화기호학에 관한 필수적인 텍스트인데,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다룰 수 있을 것이다.

아무려나 일단은 이러한 영화 속 한 장면에서도 '잠재적인 것의 철학자(the philosopher of the Virtual)' 들뢰즈의 잠재적인 것/현행적인 것이라는 개념쌍을 알아보는 데 들뢰즈에 대한 지젝의 '참된 사랑'이 놓여 있다. 참고로, 에이젠슈테인(1898-1948)의 <이반 대제>는 3부작으로 기획되었지만, 2부까지밖에 완성되지 못했고 '전제주의의 일시적 진보성'을 다룬 1부와는 달리 노골적인 스탈린(=폭군 이반) 비판을 담은 2부(1946)는 상영이 금지되었으며(에이젠슈테인은 화병으로 일찍 죽는다) 그의 사후에야 상영될 수 있었다. 물론 스탈린(1879-1953)도 사망한 이후인 1958년의 일이다. 아래는 <이반 대제>의 포스터(이반 대제 역은 스탈린의 영화적 페르소나라고 할 만한 '니콜라이 체르카소프'가 맡아서 연기했다).

러시아사에서 흔히 '이반 뇌제'라고 불리는 이반 4세(1530-1584)는 전횡적 권력을 휘둘렀던 러시아 황제(차르)들 가운데에서도 폭군으로 유명하다(그 '악명'에 있어서 우리의 '연산군'에 비견될 만하다. 물론 연산군은 내면적으로 굉장히 유약했지만). '뇌제(雷帝)'라는 이름은 그래서 얻게 된 것이며, 이것을 영어로는 'Ivan the terrible'이라고 옮긴다. 세계사의 폭군들을 다룬 책 <권력과 광기>(말글빛냄, 2005)나 <폭군들>(이마고, 2005)에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할 정도. 그래서 영화의 국내 출시명이 <폭군 이반>으로 돼 있으며 이전에 EBS에서는 <이반 대제>란 타이틀로 방영한 적이 있다.

 


 

 

바실리 3세의 아들이었던 이반은 1547년 그러니까 그의 나이 17살에 스스로 즉위하면서 자신을 (러시아사에서) 최초로 '차르'라고 부른다('차르'는 로마의 황제 '케사르'로부터 차용한 단어이다). <이반 대제>의 첫머리에서 묘사되고 있는 것도 1547년 왕관을 자신이 직접 머리에 쓰는 젊은 황제의 대관식 장면이며, 금화 세례를 받는 것은 그러한 의식에 이어지는 장면이다. 국역에서 "새로 기름을 부은 그의 머리"(his newly anointed head)라고 직역된 대목은 "새로이 황제의 자리에 오른 그의 머리" 정도의 뜻이다.

이반 대제는 이후에 40년간 모스크바 공국 시대의 러시아를 통치하게 되는데, 생애 말기 그의 최대 비극은 자신의 아들을 왕홀로 쳐죽인 사건이다. 러시아 최대 화가 일리야 레핀의 그림 '1581년 11월16일 금요일의 이반 뇌제와 그의 아들 이반'(1885)가 묘사하고 있는 장면(흔히는 '아들을 죽인 이반'이라고 줄여서 부른다. 모스크바의 트레챠코프 미술관 소장). 이 그림의 초점을 잃은 늙은 황제의 모습에서 더이상의 광기는 읽히지 않는다. 이반 뇌제는 이후에 몇 해 지나지 않아 세상을 뜨게 되는데, 독살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대략 이 정도의 배경지식을 갖고서 다시 텍스트로 돌아가본다. 인용한 첫문단에 대한 이정우 교수의 요약은 이렇다: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의 <광폭한 이반(Ivan the Terrible)>의 초반부에서 지젝은 매우 '들뢰즈적인' 장면을 포착해낸다. 대관식에서 이반의 친구들이 그의 머리에 금화들을 쏟아 붇는 장면이다. 금화가 거의 다 떨어졌는데도 영화는 금화의 흐름=와류를 계속 보여준다. 이 장면을 지젝은 'nonrealistically'라는 부사로 표현한다. 이 표현은 우리가 흔히 어떤 영화를 보고서 “리얼하다”라고 말하는 방식을 염두에 둔 표현일 것이다. 즉 <광폭한 이반>의 이 장면은 '리얼하지 않은' 장면인 것이다. 지젝에 따르면, 바로 이 점에서 이 장면은 '들뢰즈적'이다. 왜 들뢰즈적인가? 이 장면이 '생성의 순수 흐름이 물체적 원인을 초과하고(excess) 있기 때문'이다. 즉 '잠재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the actual)을 초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역본의 '현행적인 것(the actual)'은 이처럼 '현실적인 것'이라고 옮기는 게 이해하기 쉽다. 다르게 말하면, '사실적인 것', 혹은 '사실임직함'이다. 마치 무한정인 양 쏟아지는 금화의 흐름(=생성의 순수 흐름)은 분명 '물체적 원인' 혹은 '물질적 인과율'을 넘어선다. 바닥이 거의 다 드러난 접시로부터 끊임없이 금화가 쏟아진다는 것은 자연적 인과율로 설명되지 않는, 즉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니까 이 장면에서 에이젠슈테인은 '현실적인 것'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잠재적인 것'의 과잉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 계속적인 설명을 들어본다.

"사람들이 어떤 영화를 보고서 '리얼하다'고 할 때 그 'real'은 사실상 'actual'이다. 즉 ‘실재’를 뜻하기보다 ‘현실’을 뜻한다. 이것은 영화란 비현실적인 것이라는 전제 아래에 어떤 장면이 우리의 경험에 합치해서 매우 현실적으로 표현되고 있음을 뜻한다. 지젝도 이 점에 주의해서 'nonrealistically'라는 구절에 따옴표를 치고 있고, 그 후 현실적인 것을 뜻할 때에는 'the actual'로 쓰고 있다. 그렇다면 이 장면은 현실적이지 않은 어떤 것을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상상적인 것을 표현하고 있는가? 금화가 거의 다 떨어졌는데 여전히 폭포수 같은 금화의 흐름이 보인다면 그것은 하나의 환각적인 것, 상상적인 것에 불과한가? 지젝은 그렇지 않음을, 즉 그것은 상상적인 것이 아니라 들뢰즈적 의미에서의 잠재적인 것임을 지적한다. 그렇다면 들뢰즈에게서 잠재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은 어떻게 다른가? 그리고 어떤 점에서 <광폭한 이반>의 이 장면은 들뢰즈적인가?"

참고로, <이반 대제>에서 그러한 잠재적인 것의 과잉을 보여주는 형상은 아래와 같은 이반의 거대한/과장된 그림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그로테스크한) 그림자들 또한 '현실적인 것'을 초과하는 '잠재적인 것'의 순수한 과잉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그러니까 이러한 '과잉'의 영상화는 에이젠슈테인에게서 전략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정우 교수의 설명: "들뢰즈에게서 잠재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은 아니지만 엄연히 실재적인 것이다. 즉 그것은 우리의 경험에 드러나는 현실적인(actual) 것이 아님에도 분명 '실재하는(real)' 것이다. 이 점에서 들뢰즈의 사유 틀은 근대적이기보다는 차라리 고대적이다. 경험을 넘어서는 것을 인간 주체에게서 찾기보다는 경험 너머의 실재에게서 찾고 있기에 말이다. 들뢰즈는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존재론자이며, 칸트처럼 주체의 의식의 틀을 탐구하기보다는 차라리 그가 ‘물자체’로 남겨둔 그 자리에 ‘잠재적인 것’을 놓고 있다 하겠다. 즉 들뢰즈는 인간 주체가 어떻게 그에게 나타난 현상들을 구성하는가를 탐구한 것이 아니라 실재적인 것이 어떻게 현실적인 것으로서 나타나는가를 탐구한 것이다."(강조는 나의 것)

이에 대한 지젝의 설명: "들뢰즈에게 중요한 것은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이 아니라 잠재적인 것의 실재성(The reality of the virtual, 곧 라캉의 용어로는 '실재the Real')이다. 가상현실 그 자체는 다소 초라한 곤념이다. 현실을 모방한다는, 인공적 매체 속에서 현실의 재생한다는 관념. 반면 잠재적인 것의 실재성은 잠재적인 것 그 자체의 실재성을, 그것의 실재적 효과와 결과들을 나타낸다."(17쪽) 

다시 이정우 교수: "들뢰즈에게 가능적인 것과 잠재적인 것은 구분된다. 잠재적인 것은 실재이다. 그러나 가능적인 것은 인간 주관이 그의 경험 결과를 자의적으로 재구성한 것에 불과하다. 즉 사물의 지각을 통해서 형성된 심상(=이미지)을 머리 속에서 이리저리 굴려 상상(=이메지-네이션)하는 것이다. 즉 들뢰즈에게 ‘가능적인 것’은 곧 ‘상상적인 것’이다. 들뢰즈에게서 세계의 실재로서의 잠재적인 것과 인간 주관의 산물로서의 가능적인=상상적인 것은 분명히 구분된다. 따라서 가상현실을 뜻하는 ‘virtual reality’에서의 ‘virtual’은 들뢰즈적 잠재성이 아니라 차라리 가능성=상상적인 것에 해당한다. 들뢰즈 사유의 핵심은 잠재적인 것에 있지 상상적인 것=가능적인 것에 있지 않다."

여기까지는 두 사람 사이에 의견차이가 없는 듯하다. 차이는 <이반 대제>에 나오는 문제의 장면이 과연 '들뢰즈적인' 장면인가 하는 것: "이렇게 볼 때 지젝이 들었던 장면은 과연 '들뢰즈적인' 장면인가? 이 장면은 '리얼하지 않은' 장면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꼭 '들뢰즈적인' 장면인 것은 아니다. 일견 이 장면은 잠재적인 장면이라기보다는 상상적인 장면이기에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 장면은 이반의 심리이든, 대관식 참여자들의 심리이든, 감독의 심리이든, 관객의 심리이든, 일단 어떤 심리가 투영된, 즉 상상적인 장면으로 생각될 것 같다. 두 가지 가설이 가능하다. 첫째, 지젝은 이 영화를 다른 방식으로 읽고 있다. 둘째, 지젝은 들뢰즈의 잠재성 개념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

"첫 번째 가설의 경우, 이 영화가 표현하고 있는 장면을 단순히 상상적인 것으로 보기보다 더 근본적인 어떤 것, 즉 현실을 넘어서는 잠재적인 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꼭 옳다고 할 수는 없다 해도 하나의 의미 있는 독해일 수 있다. 즉 에이젠슈타인이 여기에서 자신의 상상을 투영한 것이 아니라 피상적인 현실 이상의, 그 아래에 깔려 있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 어떤 것을 순간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어쨌든 이 독해 자체는 심각한 문제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두 번째 가설을 보자. 지젝이 이 장면을 '들뢰즈적인' 장면으로 보는 것은 여기에서 '생성의 순수 흐름이 물체적 원인을 초과하고(excess) 있기 때문'이다. 즉 지젝은 물체적 원인을 ‘현실적인 것’으로, ‘생성의 순수 흐름’을 잠재적인 것으로 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규정은 매우 거친 규정이다. 들뢰즈에게서 ‘물체적 원인’은 오히려 잠재성의 차원에 위치한다. 현실적인 것은 물체적 원인의 결과들로서의 현상들, 사건들, 이미지들이다. 여기에서 들뢰즈의 ‘물체’ 개념은, 물체와 물질이 분명하게 구분되는 상식적-물리학적 사유에서와는 달리, 물질/물체의 구분 이전의 스토아 학파의 ‘소마’이고 스피노자의 ‘사물’이다. 지젝은 이 점을 간과하고 있다." 요컨대, 필자에 따르면 '물체적 원인'은 '잠재성의 차원'에 위치하기 때문에 지젝이 이 둘을 대비시키고 있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  

"따라서 ‘생성의 순수 흐름’과 ‘물체적 원인’은 대조되는 개념들이 아니다. 들뢰즈에게서는 생성의 순수 흐름은 곧 물질=실체의 흐름이고 그것이 곧 물체적 원인의 차원이다. 그리고 그 표면효과들, 결과들이 사건들, 현상들, 이미지들이다. 아울러 들뢰즈의 잠재성을 ‘생성의 순수 흐름’으로 보든 ‘물체적 원인’으로 보든 이런 식의 표현은 매우 일반론적이고 성긴 표현들이라는 점도 지적해 두자."

내가 보기에 문제로 걸려 있는 것은 잠재적인 것의 해석이 아니라 는 '물체적 원인(corporeal cause)'의 해석인 듯하다. 지젝은 '물체적 원인'을 '현실적인 것'에 위치시키는 반면에 이정우 교수는 '잠재적인 것'의 차원에 위치시키고 있는 것. 그렇다면, 그에게서 '현실적인 것(=상징적인 것)'의 자리는 어디인가?

"지젝은 상상적인 것과 잠재적인 것에 관한 들뢰즈의 구분을 정확히 지적해 주면서도, 잠재적인 것의 이해에는 난점을 드러내고 있다. 왜일까? 그것은 지젝 자신에게 중요한 것은 상상적인 것이며(지젝 스스로는 그것을 ‘실재적인 것’이라고 하겠지만), 때문에 들뢰즈를 독해하면서 그가 자꾸만 잠재적인 것에 상상적인 것을 투영하기 때문이다. 지젝의 들뢰즈 독해는 매우 흥미진진하면서도 철학적으로 정확하지는 않다."

그러니까 지젝이 가장 강조해마지 않는 실재, 혹은 실재적인 것(the Real)이라는 게 필자가 보기엔 (실제적으론) '상상적인 것'에 지나지 않으며, 둘을 혼동하고 있다는 것이 되겠다(지젝이 맨날 보로메오 매듭처럼 얽혀있는 RSI의 3항조를 얘기하지만, 실제로 그가 떠들어대는 것은 SI 2항조뿐이다?). 그래서 정작 실재적인 것(=잠재적인 것)에다 상상적인 것을 투영한다는 것('자꾸만'의 근거는 무엇인지?). 이러한 지젝 독해는 다소간 흥미롭지만 얼마나 정확한지는 의문이다('지젝, 너 또라이지?'라는 거 아닌가?).

다만, 내가 잠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필자에게서 들뢰즈에 대한 '이해'는 넘쳐나지만 '참된 사랑(true love)'은 부족하지 않은가, 라는 것. 그가 '자꾸만' 찾아내는 것은 '꼭 들뢰즈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대부분의 들뢰지안들이 염려하는 것은 들뢰즈적인 것의 '과잉'인 듯싶다. 그들에게 들뢰즈는 함부로 손댈 수 없는 것, 언터쳐블(the untouchable)이다. '니들이 들뢰즈를 알아?'라는 물음은 라캉주의적 '케보이Che Vuoi?'(도대체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대응물이자 차폐막이 아닐까? 그런데, 넘쳐나는 건 왜 들뢰즈가 아니라 들뢰지안들일까?.. 

06. 07. 01.

P.S. 이제껏 읽은 건 지젝의 첫 문단이다. 짐작에 '지젝의 들뢰즈론(1)'의 필자 또한 그 글이 씌어진 시점에서는 더 읽었을 성싶지 않다. 이후에 지젝은 보다 많은 걸 말하고 있으며 따라서 지젝에 대한 여하한 비판 역시 보다 많은 뒷받침을 통해 예증되어야 할 것이다. 철학은 '일견'에 의한 예단은 아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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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스 2007-01-06 0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내 최고 수준(?)의 들뢰즈 전문가의 지젝 비판 치고는 너무 소략하고 좀 심하게 말하면 '치졸'하군요. 작은 얘기를 꺼낸 게 잘못이라는 뜻이 아니라, 작은 얘기로부터 시작해서 더 근본적인 비판, 이를테면 지젝-라캉(-헤겔) 계보의 근본적인 맹점 같은 것을 지적하는 데까지 이르러야 마땅하지 않은가 싶습니다. 이 정도에서 맺을 얘기였으면 아예 시작하질 말던가...

로쟈 2007-01-06 0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재 투어'를 시작하셨나 봅니다.^^ 제 생각도 보다 '본격적인 비판'이 나와야 하는 거 아닌가 입니다. 철학을 화두로 대신할 수는 없는 거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