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조정래 선생의 신작 장편소설 <인간 연습>이 출간됐다. 책이 나온 건 며칠 됐고, 오늘자 한겨레에 최재봉 기자의 리뷰가 실렸다. 길잡이 삼아서 옮겨놓는다. 기사의 타이틀은 "무너진 사회주의 전향 장기수의 선택은?"이지만, "사회주의 몰락'에 대한 문학적 해명 시도"라는 설명에 기대어 페이퍼의 제목을 달았다. 그게 나의 관심사와 맞기도 하고(주제면에서 가장 '러시아적'이기도 하다).

-작가 조정래(63)씨가 새 장편소설 <인간 연습>(실천문학사)을 내놓았다. <한겨레>에 연재했던 <한강> 이후 소설로는 4년여 만이다. 80년대 초부터 20여년 동안 세 편의 대하소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에 매달려 온 조정래씨가 한 권짜리 소설을 발표하기는 <불놀이>(1983) 이후 23년 만의 일이다. 일제 강점기에서 유신 말기까지의 한국 현대사를 대하소설 삼부작으로 갈무리한 작가의 다음 행보가 어떠할지 독자들은 궁금해했던 터였다.

 

 

 

 

-<인간 연습>은 전향한 장기수 ‘윤혁’을 통해 이념의 현실적 의미를 따져 묻고 그 방향을 모색해 본 작품이다. 90년대 초를 배경으로 삼은 이 소설에서 윤혁을 가장 괴롭히는 것은 ‘사상의 조국’ 소련이 무너지고 조국의 북쪽에서는 인민들이 굶주림에 쓰러져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소설 앞부분에서 윤혁과 또 다른 전향 장기수 ‘박동건’은 자신들이 평생 동안 추구해 온 가치가 속절없이 스러지는 장면 앞에 망연자실해한다. 두 사람은 감옥에서 악랄한 고문에 못 이겨 전향은 했을지언정 자신들의 청춘을 바쳤던 사회주의 이념을 진정으로 버리지는 않았던 것.

-“이런 꼴 보려고 우리가 평생 그 고생을 한 겁니까”라며 탄식하던 동건은 결국 병상에서 죽음을 맞고, 윤혁에게 “그의 죽음은 바로 자신의 죽음”으로 받아들여진다. 동건의 죽음이라는 물리적 사태는 실상 사회주의라는 이념적 가치의 현실적 죽음을 대행하는 것이었으니까. 사회주의가 무너진 마당에 동건과 윤혁에게 남은 삶은 무의미한 소음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니겠는가.

-이념을 좇았던 많은 이들이 그러하듯 윤혁은 이성과 논리의 인간이다. 비록 전 존재가 뒤흔들리는 듯한 충격과 절망 속에서도 그는 사태의 진상과 원인을 합리적으로 규명해 보고자 한다. 무엇보다 결과적으로 실패였음이 드러난 자신의 선택에 대해 합당한 옹호의 논리가 필요했던 것. 이 대목이야말로 소설 <인간 연습>의 핵심에 해당할 터인데, 소설 속에서는 윤혁의 감방 동료였던 운동권 출신 ‘강민규’가 우선 윤혁의 노력을 돕는다.

-강민규에 따르면 사회주의의 실패는 △공산당 일당독재 △인간을 도덕적으로 개조할 수 있다는 믿음 △당의 일방적 계획과 집행 △‘당의 무오류’라는 오류 등에 기인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런 원인 분석 가운데서도 민규와 윤혁은 특히 사회주의가 ‘인간의 얼굴을 잃어버렸다’는 지적에 큰 공감을 표한다. 윤혁은 달리 “(본능적 존재인)인간을 이성적 존재로, 이성의 힘이 큰 존재로 보려고 한” 착각을 들먹이기도 한다.

-또 다른 해석도 있다. 보호관찰 대상인 윤혁을 감시하는 ‘김 형사’가 퉁겨준 신문 칼럼에서 어떤 교수가 쓴 글이다: “마르크스주의란 기본적으로 밥 먹는 철학인데도 그것을 실현시키지 못해 결국은 스스로 몰락하고 말았다.” 이런 사후 분석들에 앞서 벌써 30여 년 전에 사회주의의 몰락을 예견한 견해도 있었다. 간첩으로 내려오자마자 믿었던 친구의 신고로 체포된 윤혁을 담당했던 검사의 장담이었다: “모두 함께 일해 공평하게 나눠 먹는다고? 말이야 근사하지. 그렇지만 내 것이 아닌데 어느 누가 최선을 다해 일하겠나? 그 망상이 결국 공산주의를 망치게 될 것이다. 두고 봐.”

-미흡한 대로 원인 분석이 끝났으면 향후 대책이 마련되어야 하는 법. 이제 사회주의는 패배했으니 승리한 자본주의 쪽에 빌붙어 그 떡고물이나마 얻어 먹고자 분골쇄신해야 하는가. 그런 것이 아니라면? 이와 관련해 작가 쪽에서 뚜렷하고 획기적인 대안을 내놓고 있지는 못하다. 그다지 길지 않은 소설에 대한 요구로는 처음부터 무리했달까. 작가는 다만 일종의 원칙론이랄까 막연한 낙관적 전망을 제시하고 있어 보인다.

-방향은 두 가지. 하나는 강민규가 운동의 새로운 활로로서 추진하는 ‘진보적 시민단체’ 결성이다. “건전한 보수와 생산적 진보를 조화시켜 좌우의 날개로 균형을 잡는 사회를 만들어 가자는 구상”이라고 민규 자신은 설명한다. ‘사회주의는 시민단체들을 용인하지 않아 몰락했을 수도 있다’는 윤혁의 생각은 민규의 구상에 대한 납득과 지지의 표시로 볼 수 있다.

-또 다른 방향은 다소 엉뚱할망정 윤혁 자신에게는 무엇보다 절실하게 와 닿는 체험적 진실의 무게를 지니고 있다. 그 이름은 ‘아이들.’(*이 '엉뚱함'이 어중이떠중이들과 '작가'의 차이이다.) 윤혁은 우연한 계기로 부모를 잃은 어린 남매 ‘경희’와 ‘기준’을 만나고 그 아이들을 손주처럼 돌보면서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삶의 기쁨을 맛보게 된다. 아이들과의 만남은 “새싹 파릇파릇 돋는 너른 초원”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는 햇살” “온갖 꽃들이 흐드러지게 만발한 꽃밭”으로 묘사될 정도로 윤혁의 잿빛 삶을 황홀하게 채색한다.

-다섯 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소설의 마지막 장 제목은 ‘인간의 꽃밭’인데, 이 표현은 윤혁이 출간한 수기를 읽고 그를 찾아온 대전의 보육원장 ‘최선숙’이 자신의 보육원을 가리켜 한 말이다. 선숙은 그 자신 대학병원 간호부로서 전쟁 때 만났던 인민군 장교에게 큰 감화를 받아 인민군에 입대했던 경험을 지니고 있다. 그가 자신의 현재를 말한다: “제가 무작정 인민군을 따라나서며 그렸던 세상을 아이들을 길러내면서 만나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우리가 꿈꾸는 미래이니까요.”

-우여곡절 끝에 윤혁이 경희·기준 남매를 데리고 선숙의 보육원으로 들어간다는 소설 결말은 윤혁 역시 선숙의 견해에 동조한다는 뜻이리라. 아이들이 곧 미래라는 것. 이념 이전에 아이들을 잘 기르는 것이 인류의 미래에 대한 확실한 투자요 실천이 될 수 있다는 뜻(*이건 도스토예프스키이 마지막 소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테마이기도 하다).

-<인간 연습>은 조정래씨가 <한강> 이후 발표한 중단편 <수수께끼의 길>과 <안개의 열쇠>의 연장선상에서 사회주의의 몰락이라는 인류사적 사건에 대한 문학적 해명을 시도한 작품이다(*물락 15년 후에도 이 주제를 붙들고 있는 작가에게 경의를 표한다). <태백산맥>과 같은 이전 작품에서 좌익 옹호라는 비난을 받고 국가보안법 혐의로 피소되기까지 했던 작가의 이번 소설은 그가 맹목적 이념주의와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충분히 보여준다. 다만 사회주의 몰락 원인에 대한 해명과 그 이후의 대안 모색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독자들도 있을 법하다. 시종 윤혁의 시점으로 진행되던 소설이 끝부분에 가서 민규와 선숙의 시점 쪽으로 흔들리는 것이 혼란스럽다.

06. 0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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