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보의 '8.15 기념 해외석학 인터뷰'로 미국의 저명한 한국학자인 브루스 커밍스 교수와의 대담 인터뷰가 실렸길래 옮겨온다(커밍스 교수는 아마도 촘스키 다음으로 국내 언론의 인터뷰 제의를 많이 받는 미국 학자일 듯하다).

문화일보(06. 08. 14) “한·미 관계 나빠보이며 개선 기미도 안보여”(*타이틀은 문화일보의 최근 기조를 반영하여 좀 선정적이다)

-광복 61주년이 되는 올해 해방전후사와 한국전쟁, 그리고 남·북한의 현대사를 둘러싼 한국내의 논란이 혼란스럽다. 전국교직원 노조가 만든 책자에서는 북한의 주장이 검증되지 않은 채 소개되고 남북한의 해방이후사에 대한 논란은 양극화로 치닫는 인상이 다. 심상찮은 한·미관계, 심지어 식민지종속 우려까지 제기되는한국과 미국의 자유무역협정(FTA)협상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핵개발과 미사일 시험발사로 한반도 정세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는 북한은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광복절 특집기획으로 한국 및 동아시아학 연구로 국제적 명성을 얻고 있는 브루스 커밍스(시카고대)교수와 로버트 스칼라피노(미 버클리대 정치학)교수로 부터 광복61주년의 한국현대사에 대한 얘기를 들어보았다(*스칼라피노 교수와의 인터뷰는 아직 게재되지 않았다). 브루스 커밍스 교수는 한국내 진보파, 북한조차 외면할 수 없는 권위를 갖고 있다. 인터뷰는 지난 7일 미시간주 앤아버의 자택에서 1시간30분 동안 이뤄졌다.

―당신은 북한을 여러 차례 방문했고 북한에 관한 책도 썼다. 북핵문제를 비롯해 향후 북한을 어떻게 보는가.

“북한은 부시 행정부가 있는 한 어떤 양보도 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 독립기념일에 미사일 발사시험을 한 것은 명백히 미국과 일본을 겨냥한 것이다. 북한은 미국과의 관계정상화를 바라고 있지만 미 행정부는 대북정책에서 6자회담파와 체제교체파로 나뉘어져 아무런 결정도 못내리고 있다. 지금은 이라크 때문에 북한문제에 신경 쓸 겨를도 없다. 더욱이 미국은 북한의 미사일 발사나 핵 개발 등을 미국의 미사일방어체제(MD) 구축에 좋은 명분으로 활용할 수 있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 같은 강경책은 결과적으로 미국·일본의 강경파에 이용당하는 셈인가.

“그렇다.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 등에게 북한의 미사일발사는 MD 강화의 명분이다. 또 북핵 문제 등은 미국이 중국을 간접 압박하는 지렛대 역할도 하고 있다.”

―한·미관계에 대한 우려가 많은데.

“한·미관계는 나빠 보이며 좋아질 것 같지도 않다. 서울에서는 젊은 세대가 권력을 잡으면서 여러 변화가 생겼지만 워싱턴은 노무현 대통령이 급진적(radical)이고 급진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고 보고 있다. 한국은 경제적 성공으로 민족적 자긍심이 높아지고 있는 반면 미국은 한국사람들이 고마워할 줄 모른다고 여긴다. 나는 한·미관계가 회복되기 어려울 정도로 나빠지지 않기를 바란다.”

―한국에서는 요즘 주한미군과 관련된 논쟁도 뜨겁다.

지난 1970년대에 미국에서도 격심한 논쟁이 있었다. 내 생각으로는 미 지상군이 한국 방위를 위해 주둔할 필요가 없다고 보지 만 이제는 주한미군 철수가 한·미관계에서 뜨거운 감자여서 철수하기 어렵게 됐다. 미 국방부 등에서는 노무현 정부에 압박을 가하기 위해 미군 철 수위협을 가하곤 하지만 실제 부시 행정부의 레임덕 현상이나 낮은 인기를 생각하면 주한미군 철수 등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7, 8년 전 클린턴 행정부 당시에 미 국방부에서는 남북한의 화해 이후에도 주한미군을 계속 주둔시킨다는 계획이 논의됐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때 김정일도 주한미군 주둔에 대해 반대하지 않았다. 주한미군이 장래 중국과 일본의 위협을 상쇄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럴 경우 주한미군은 미국 한국 북한 모두에게 이익이다. 주한미군은 그야말로 지역내 균형자 역할을 하는 셈이 되는 것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협상에 대해서 미국의 진보적 학자로서 어떻게 생각하나. 한국내 일부 주장처럼 한국이 경제적으로 종속될 가능성이 있나.

“FTA는 상호이해관계에 따라서 추진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음모가 개입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미국과 한국 양측에서 FTA 를 반대할 수밖에 없는 이해당사자도 있을 것이다. 미국도 과거 철강산업을 지키려고 철저한 보호무역적인 조치를 취해왔다. 나는 FTA로 한·미간의 경제적 관계가 나빠질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FTA문제가 한·미관계에 악영향을 끼치는 전조가 될까 걱정이다.”

요즘 한국에서는 교수의 저서 ‘한국전쟁의 기원’이 한국전쟁에서 김일성의 책임을 정당화한 책으로 인용되곤 한다. 신문 칼 럼에서는 ‘고등학생이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석좌교수 이름까지 들며 한국전은 미국과 남한이 일으켰다고 배웠다’고 한다는 사례까지 소개됐다.

역사가로서 학자로서 자신의 주장과 다른 오해를 받는 일은 종종 있는 일이다. 내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나는 남한이나 미국이 전쟁을 시작했다고 한마디도 말한 적이 없다. 아마도 이런 오해가 생긴 것은 1980년대초 내 책이 한국에 소개될 당시 상황 때문일 것이다. 당시 나는 전두환 정권과 한국내 인권문제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그 때문인지 나를 못마땅해 하는 사람들이 내 책의 내용을 왜곡 하며 나를 비난했던 것 같다. 나는 남한편도 북한편도 미국편도 아니다. 미국에서는 한국전이 김일성의 남침이라는 단 한가지 사실만 알려져 있었을 뿐 미국이 1945년부터 1948년까지 한국에서 군정을 실시했던 사실은 잊혀가고 있었다. 나는 미국인에게 알려지지 않은 장면을 밝히려고 했었다.”

―한국에서는 지난 1980년대 한국의 젊은 세대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해방전후사의 인식’이라는 책이 지나치게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며 중도 보수성향의 학자들이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이라는 책을 발간해 해방전후 역사에 대한 새로운 논란이 일고 있다.

“좋은 현상이다. 역사가는 항상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북한은 소련의 괴뢰였고 남한은 친일부역자의 정권이라는 단순한 양분법은 사실이 아니다. 예컨대 남한은 부분적으로 민주주의 정권인 동시에 친일부역 문제가 있었다. 그 사이에 새로운 자료와 연구 성과가 많이 나왔다. 역사적 사실은 매우 복잡한 것이다. 1980년대초 내 연구가 한국 에서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그전까지만 해도 한국 학자들이 한국전쟁 같은 사안을 연구하다가는 잘못하면 감옥에 갈 수 있는 제한적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같은 외국인 학자의 역할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한국전쟁에 대한 연구가 더욱 깊어지면 남북한이 화해할 수 있는 기초도 그만큼 나아질 것이다.”

―1990년에 출판된 교수의 저서 ‘한국전쟁의 기원2’에서는 어 떤 점이 새로 밝혀졌나.

“1권을 쓴 뒤에 구소련이 붕괴되면서 비밀해제된 자료를 보면서 나는 매우 놀랐다. 김일성과 스탈린이 교환한 서신이나 김일성의 모스크바 방문 기록을 보니까 당초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깊이 소련의 스탈린이 개입해 있었다. 1950년 1월 김일성은 모스크바를 방문해서 스탈린으로부터 개전 승인을 얻는다. 그러나 이런 사실도 한국전쟁을 여러 원인에서 찾고자 했던 나의 기본논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한국전쟁 직전 딘 애치슨 국무장관이 한국을 미국의 방어선에서 제외한다고 밝혔다. 이 때문에 남침유도설 같은 주장도 나왔는데.

“애치슨 국무장관의 정책은 미국의 대아시아정책을 재확인한 내용이었다. 딘 애치슨 라인 때문에 김일성의 남침에 청신호를 주 었다는 주장은 난센스다. 한국을 제외한다는 명시적 표현도 없었다. 나중에 공화당이 이를 정략적으로 공격했지만 정작 애치슨의 발언 당시에는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다. 애치슨 장관이 이 말을 한 곳은 미 내셔널프레스클럽 연설 때였다. 당시에는 뉴욕타임스가 연설 내용을 소개하면서 한국이 방어선에 포함된다고 보도했다. 당시 북한의 노동신문도도 이를 번역해 ‘한국이 미국의 방어선에 포함된다’고 전했다.”

-그렇다면 스탈린이나 김일성이 남침을 결정한 배경은(*이하 주체사상에 관한 질문까지는 지면 기사에는 빠진 내용이다.)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미국은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부추긴 측면이 있는 것 같다. 스탈린은 2 차대전 이후 미국의 공세적인 반공정책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냉전의 핵심전선인 독일을 건들였다가는 3차대전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한반도는 냉전의 핵심전선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인 전선의 성격이 짙었다.”

-한국에서는 지난해 맥아더 장군의 동상 철거논란이 있었다. 맥아더의 역할은 어떤 것이었나.

“역사적 사실을 살펴보면 맥아더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 미국의 북진 결정도 맥아더가 아니라 트루먼과 애치슨이 결정 한 것이다. 사실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그를 싫어했다.맥아더는 전술적으로도 매우 큰 실수를 했다. 군대를 둘로 나누어 동쪽 서쪽으로 각각 진군하게 했는데 이후 군사전문가들로부터 어리석은 전술이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북한에서는 전쟁이후 남로당의 박헌영 일당이 처형됐다. 과연 박헌영은 김일성의 주장대로 미국의 간첩이었나.

그 대목은 북한의 김일성 체제에서 가장 끔찍한 부분이다. 박헌영은 희생양이었다. 그는 개전 결정이나 전쟁 기간중 아무런 역 할도 하지 못한 채 김일성에게 밀려나 있었다. 박헌영이 미 군정당시 남한에 있으면서 미국관리들을 만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박은 미국이 가장 미워하는 정치적 인물이었다. 김일성은 박헌영의 남로당 세력을 남겨두었어야 했다. 그랬다면 남로당 출신들이 남한내 좌파와의 관계속에서 장차 남북한 화해의 틀을 쌓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주체사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1960년대 주체사상을 도입함으로써 북한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민족주의적 정권으로 변한다. 주체사상으로 김일성은 1인 가족지배 체제를 합리화했다(*상식적이지만 자주 간과되는 견해이다). 한때 옛 소련시절 국가보안위원회(KGB) 수장이었던 유리 안드로포프 등 최고위지도자들이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과 주체사상을 둘러싸고 고성을 주고 받기도 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복잡하다. 그는 소농 출신으로 가난에서 벗어나고 신분상승을 위해 일본군인이 됐었다. 그의 인권탄압이나 독재정권은 인정할 수 없지만 그는 진정으로 국력을 키웠다. 그는 다른 후진국 지도자와 달리 부패하지도 않았다. 그는 미국의 정책자문가들이 철강 산업같은 중화학공업정책을 반대했을 때 미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국가기간산업을 키워냈다. 박정희의 중화학공업 정책은 1930년 당시 일본의 만주 산업화정책과 닮았다. 사실 박정희가 만주에서 일본군 장교로 교육받고 근무할 당시 만주는 10%의 산업성장을 거듭했다.”

―한국의 경제적 성공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이나 집단은 누구라고 생각하나.

“1960년대는 미국의 지원 덕이 컸다. 미국은 수출산업 정책을 권고했고 실제 미국시장을 열어주었다. 1970년대는 박정희가 중 화학공업정책으로 국가기간산업을 이뤄냈다. 1980년대도 박정희의 성공이 이어지는 시기였다. 정주영 같은 기업인들도 여러 산업과 기업을 결합시켜 성공을 이뤄냈다. 무엇보다 가장 큰 공로자는 한국인들 자신이다. 근면하고 우수하며 특히 고등학교 교육수준은 놀랄만한 것이다. 이런 바탕 위에서 지금은 지식산업에서 성공을 거두고 있다.”(앤 아버(미시간) = 최형두특파원)

커미스와 한국사 연구(*보충 기사이다)

-미국의 진보적 역사학자인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내 진보파와 북한 모두로부터 인정받는 학자이다. 또 현재의 한국내 논란에서 상당부분 진보진영에서 인용되는 책들의 저자이다. 그는 지난 81년 <한국전쟁의 기원1>이라는 책을 통해 해방직후 미군정 시대 남북한 내, 그리고 남북한 간 정치사회적 갈등의 연장선상이라 는 관점에서 한국전쟁을 분석하는 수정주의적 관점을 제시했다. 미국정부의 방대한 미공개 자료를 근거로 한 그의 연구는 80년대 국내 소장학자들의 진보적 한국사연구에 동인을 제공했다.

 

 

 



-60대말 처음 평화봉사단원으로 내한한 커밍스는 진보적 연구시각 때문에 한동안 한국정부의 기피인물로 입국이 거부되기도 했다(*여담이지만, 도올 김용옥은 이때 커밍스로부터 영어를 배웠다고). 90년에는 구소련 붕괴이후 새로 공개된 소련측 비밀자료 등을 새로 감안한 <한국전쟁의 기원2>를 출간했다. 그가 97년에 펴낸 한국사(Korea’s Place in the Sun:A Modern History)에서는 한국전쟁에 대한 김일성의 책임, 남한의 산업화 과정에 대한 의 미부여 등을 담았다.



-2004년에는 <북한, 또하나의 나라>(한국내 번역본 ‘김정일 코드:브루스 커밍스의 북한’)에서 커밍스 교수는 핵을 둘러싼 북· 미간의 대치상황을 한국전쟁 때 미국에 의해 철저히 파괴된 북한과 북한을 ‘악의 축’등으로만 보는 미국간의 반세기 이상의 강한 적대감으로 분석했다. 또 지난 10여 년간의 핵문제로 인한 북·미갈등은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에게 덤벼드는 외교’(cat - and mouse diplomacy) 의 마지막 국면이라고 분석했다. 북한의 태도를 이해하려는 태도와 달리 북한 자체에 대해서는 병영국가(garrison state), 즉 “폭력 전문가들이 그 사회의 가장 강력한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국가”라는 개념에 가장 근접한 국가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아울러 북한의 세습제를 비롯한 불투명한 정치적 전통과 무수한 인권침해에 관해서도 비판했다.

-컬럼비아대 박사출신으로 현재 시카고대학 역사학과 교수인 커밍스는 미국내 보수파로부터는 미국의 이익을 외면하는 좌파학자로 지목당하기도 했다. 미군정 및 한국전 당시의 미국정책에 대한 비판적 연구 때문이었다. 한국과 미국의 이념전선에서 시달려왔 을 커밍스 교수지만 직접 만나보면 매우 자상했다. 인터뷰를 마 치고 그의 집에서 나오다가 운전실수로 잔디밭 일부를 흉하게 망쳤는데도 껄껄 웃으며 괜찮다고 말했었다.(최형두 특파원)

06. 08. 14-15.

P.S. 얼마전에 브루스 커밍스의 스승이기도 한 미국의 한국학 '대부' 제임스 팔레 교수가 타계했다. 이 참에 관련기사를 옮겨놓는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한국의 미국학 전문가들은 누구일까?). 

동아일보(06. 08. 10) "미국내 한국학 1세대 팔레 교수 별세"

-미국 내 한국학의 대부 제임스 팔레(사진) 워싱턴주립대 한국학연구소 명예교수가 6일(현지 시간) 숙환으로 미국 시애틀 한 요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72세. 하버드대 출신인 팔레 교수는 1985년 ‘한국의 인권’이란 보고서를 통해 한국 군부정권을 비판해 미국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미국 학계에서는 그를 ‘워싱턴 마피아’의 대부라고 불렀다. 그는 1968년 당시 워싱턴주립대 일본·한국학연구소장이던 케네스 파일 교수에게 발탁된 뒤 줄곧 한국학 연구에 몰두했다.

-또한 학문적 동반자인 브루스 커밍스(한국 현대사 전공)와 함께 하버드대의 카터 에커트,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의 존 던컨, 인디애나대의 마이클 로빈스,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의 돈 베이커 교수 등 한국학 2세대 학자들을 집중적으로 길러냈다. 그는 미국 내 한인사회를 중심으로 전개된 한국의 민주화운동에도 적극 동참했다. 인권 및 노동운동 탄압 등을 이유로 박정희 정권이 제안한 한국학연구기금(100만 달러)을 거부해 ‘행동하는 지식인’이라는 평가도 받았다.(김윤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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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6-08-15 23:34   좋아요 0 | URL
한국의 미국학 전문가들은 누구일까? -정말 누구일까요? ㅡ.ㅡ;;;;

로쟈 2006-08-17 00:27   좋아요 0 | URL
미국학 총서에 이름을 올린 저자들이 없지는 않지만, 과연 '간판급' 학자가 누구인지는 잘 떠오르지 않네요(--;)...
 

요즘은 미술 전시회 소식만 전하는 일로도 1년을 다 채울 수 있을 듯하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 없다"는 말도 진리이지만, "세상은 언제나 당신이 상상하는 것보다 더 넓다"는 것도 진리이다. 예술도 예외는 아니어서 언제나 이 두 가지 진리를 반복적으로 증언해준다. 펠리시엥 롭스와 에드바르트 뭉크의 2인 판화전에 개최된다고 한다. 솔직히 롭스란 화가의 이름은 이번에 처음 들어보았다. 관련기사들을 옮겨놓는다. 발걸음이 또 미칠 지 어찌 알겠는가...

한국일보(06. 08. 14) 팜므파탈… 치명적인 아름다움 뒤의 풍자

-유럽 역사에서 19세기 말부터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전까지를 ‘벨 에포크’(Belle Epoqueㆍ아름다운 시절)라고 부른다. 풍요와 퇴폐, 쾌락과 죽음이 우아하게 쌍을 이루던 그 시절 문학과 예술의 최고 인기 품목 중 하나는 팜므 파탈(femme fatalㆍ치명적인 매력으로 남자를 파멸시키는 여자)이다. 이건 남자들의 발명품이다. 19세기 중반 여성해방운동이 일어나면서 여성들이 당당하게 거리를 활보하기 시작하자 그에 대한 경계심이 팜므 파탈로 나타난 것이다.(*벨 에포크에 대해서는 빌리 하스의 <세기말과 세기초>(까치글방, 1994)란 책이 오래전에 출간된 바 있다. 미술에서의 팜므파탈 이미지에 대해서는 이명옥의 <팜므파탈>(다빈지, 2003) 참조).

 

 

 


-국립현대미술관이 덕수궁미술관에서 열고 있는 ‘롭스와 뭉크’ 판화전의 키워드는 팜므 파탈이다. 19세기 벨기에 판화가 겸 풍자화가 펠리시엥 롭스(1833~1898)와, 그보다 서른 살 아래로 20세기 초 표현주의를 대표하는 노르웨이 작가 에드바르트 뭉크(1863~1944)의 판화 98점을 선보이고 있다.

-두 작가 모두 미술사에서 중요한 인물인데도, 우리나라에 작품이 오기는 처음이다. 뭉크는 매우 유명한데도 그렇고, 롭스는 이름조차 낯설다. 롭스와 뭉크는 세기말 악마주의, 상징주의 그리고 표현주의에 이르는 미술사조의 흐름 속에 있다.

-롭스는 팜므 파탈의 이미지를 빌어 시대와 사회를 풍자했다. 여자, 어리석음, 그리고 죽음이 주도하는 세계를 표현했다. 치부를 드러내고 눈을 가린 채 돼지(성욕의 상징)의 인도를 받으며 위협적일 만큼 당당하게 걸어가는 창녀(‘창부정치가’)나 칼을 숨긴 채 높이 쳐든 손바닥에 남자를 올려놓고 조롱하는 여자(‘꼭두각시를 든 부인’)는 세계를 지배하는 팜므 파탈의 파괴력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는 사탄이 지배하는 악마적 세계, 죽음에 이르는 치명적 유혹, 파멸을 부르는 어리석음을 팜므 파탈과 연결짓고 있다. “여성의 냉혹한 눈짓, 숨기지도 위장하지도 않고 온몸으로 명백하게 드러내는 남성에 대한 적개심 등 롭스는 현대여성의 잔인한 측면을 묘사하는 데 정말 뛰어나다.”(롭스와 교유했던 프랑스인 공쿠르 형제의 평)

-뭉크에게 여자는 사랑스러우면서도 두려운 존재였다. 그의 대표작 ‘마돈나'는 여인의 멍한 눈과 소용돌이치듯 불안하게 흘러내리는 선으로 쾌락의 절정, 곧 죽음을 암시하면서 웅크린 태아와 정충으로 테두리를 장식해 염세적인 공포를 배가하고 있다. 또 다른 작품 ‘흡혈귀’는 고개를 숙인 채 남자의 목에 입술을 갖다 대는 여자의 모습이 마치 피를 빠는 듯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피해망상에 가까운 이런 두려움은 병약하고 신경질적이었던 뭉크의 기질 탓이기도 하지만 시대적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뭉크 자신은 20, 30대 청년시절을 회고하며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여성 해방의 한복판에서 무상한 시대를 살았다. 남성을 유혹하고, 사로잡고, 기만한 것은 여성이었다. 카르멘의 시대. 이 무상한 시대에 남성은 더 연약한 성(性)이 되었다.”

 

 

 



-뭉크는 어린 시절 어머니와 누이의 잇따른 죽음과 아버지의 우울증 때문에 평생 죽음의 공포와 불안에 시달렸다. 쾌활하고 방자하게 사회 풍자 놀음을 즐긴 롭스와 달리 뭉크는 철저히 자신의 내면으로 파고 들어 인간 실존의 어둠과 고독을 표현했다.

이번 전시는 국립현대미술관과 벨기에 트랜스페트롤 재단이 공동으로 기획했으며, 브뤼셀-서울-오슬로 순회전이다. 전시는 10월 22일까지. (02)2022-0600(오미환 기자)

 

국민일보(06. 08. 14) 19세기말 여성 이미지 들춰보기

-팜므파탈, 그 치명적인 이미지가 난무하던 19세기 말 유럽은 새로운 여성상과 남성상이 극렬하게 대립했다. 이 시기에 유럽에서 활동했던 벨기에의 판화가이자 풍자화가였던 롭스(Felicien Rops,1833∼1898)와 효현주의 대표작가 뭉크(Edvard Munch,1863∼1944)는 정치적,사회적 해방을 요구하는 여성에 대한 경계심을 작품에 반영했다.

-국립현대미술관(관장 김윤수)은 이들의 판화작품을 모은 ‘롭스와 뭉크:남자와 여자’ 전을 지난 11일 개막했다. 한국에는 처음 소개되는 두 작가의 작품은 비슷하면서도 사뭇 다르다. 롭스가 사회를 풍자하면서 시대를 자신의 삶으로 끌어들인 작가라면,뭉크는 자신의 감성을 철저히 파고들어 객관화시킨 작가이다. 롭스의 작품들은 ‘풍자의 손’으로 관람객의 눈길을 잡아 당기지만 뭉크의 작품은 시간이 멈춰버린 듯 정적이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작가는 세대를 이은 상징주의적 표현과 ‘팜므 파탈’이라는 여성관을 가졌다는 공통점이 있다. 단 롭스는 세기말 사회에 대한 영향으로,뭉크는 개인적인 경험으로 형성된 여성관이란 차이점이 있다.

-롭스의 어린시절이야기는 그다지 많이 알려지지 않다. 가정교사를 두고 교육을 받은 덕에 자유로운 유년기를 보냈고 브뤼셀에 들어가 학교 수업보다는 주간지의 삽화가로 시간을 많이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보들레르의 대표시집 ‘악의 꽃’에 삽화를 그렸던 그는 ‘악마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팜므 파탈의 이미지를 통해 사회를 풍자하고 해악함으로써 시대정신에 입각한 새로운 작품들을 생산해냈다. 대표작 ‘창부정치가’는 벌거벗은 창녀가 눈을 가린 채 돼지의 인도를 받고 있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가릴 곳은 가리지 않고,반대로 드러낼 곳은 모두 가린 묘사로 여인의 누드를 강조해 사악함을 드러낸다. ‘꼭두각시를 든 부인’은 칼을 숨긴 채 꼭두각시를 치켜들고 있는 여자를 묘사해 여자는 남자를 파멸시키는데 그치지않고 사회 전체를 위협하는 악마적인 존재로 그렸다. 이번에 그의 61점의 작품이 전시됐다.



-노르웨이 출신의 화가로서 국내에 많이 알려진 뭉크는 불행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아버지의 우울한 성격,다섯 살 때 겪은 어머니의 죽음, 병약한 자신의 건강,두 살 위의 누나의 죽음 등으로 죽음의 공포와 불안은 평생 동안 그를 사로잡았다. 그러나 이런 병적인 상태는 오히려 수많은 걸작을 생산해내는 밑바탕이 되었다.

-대표작 ‘마돈나’는 역동적인 곡선과 함께 여자의 황홀한 표정이 잘 드러난다. 뭉크에게 마돈나는 사랑의 상징이자 죽음에 이르게 하는 팜므 파탈의 여성으로 대변된다. 뭉크는 유화에서부터 판화에 이르기까지 사랑,불안,죽음에 이르는 자신의 내면세계를 예술작품으로 승화해 표현주의라는 거대한 시대의 물결을 이끌었다.



-이번 전시에 그 유명한 ‘절규’는 오지 못했지만 ‘마돈나’와 어린시절 죽은 누나의 옆모습을 그린 ‘병든아이’,10대 소녀의 공포감을 나타낸 ‘사춘기’ 등 주요작품 37점이 전시됐다. 한편 ‘롭스와 뭉크:남자와 여자’ 전은 벨기에 크랜스페트롤 재단이 14개 소장처의 작품을 모아 기획한 전시로 10월 22일까지 계속된다.(이지현 기자)

06. 08. 14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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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2-26 0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저 이 전시 갔었어요. 로쟈님의 인문학 내공 엿보기만 했는데 제가 잘 아는 미술을 매개로 살짝 흔적 남겨요. 롭스의 여성에 대한 경계 정말 대단하더군요. 그렇지만 판화에 보이는 묘사력은 기교의 절정이었어요. 역시 시대에 필요한 기술이 발전을 가져오는듯 해요. 뭉크는 판화만 와서 아쉬웠지만 워낙 정서가 친숙한 화가라 관심갔어요. 그런데 뭉크의 마돈나가 팜므파탈이었는지 다시 생각하게 되네요. 제가 그림가르치는 사람인데도 그림을 깊이 안봐버릇해서 부끄러워요..오히려 글을 쓰면서 그림도 깊게 봐야겠단 생각이 들어요. 뭉크는 오히려 가족의 병력, 죽은 누이, 슬픔, 불안 이런 이미지로 여성을 보았다는 막연한 기억만 나요.. 로쟈님, 저 인문학책 열심히 읽고 나중에 자문 많이 구할게요~ 러시아문학도 문화도 좋아해요. 특히 체홉 희곡에서 사랑화살의 어긋남같은 거요..^^

로쟈 2006-12-26 0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 보니까 저는 못보고 지나가버렸네요.--; 대신 소식을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체홉의 드라마들을 좋아하신다니까 반갑네요. '사랑의 어긋남'을 좋아하신다는 걸 보면 좀 짓궂으신지도.^^
 

월요일 아침부터 일거리가 많군. 기사들을 읽다가 그냥 넘어가기 뭐해서 몇 개 옮겨놓는데, 최근에 <헤겔>을 출간한 이제이북스의 전응주 대표를 다룬 인터뷰 기사도 마찬가지이다. 예전에 한번 다룬 줄 알았더니 그냥 읽기만 하고 지나쳤던 모양이다. 해서, 예의상 자리를 마련한다.

경향신문(06. 08. 12) "제대로 된 철학서 누군가는 내야겠죠"

-‘2006 한국출판연감’에 따르면 2005년 9월 말 현재 문화관광부에 등록된 출판사 2만4천5백80개 가운데 지난해 책을 한 종이라도 낸 출판사는 전체의 10%에도 못미치는 2,273개이다. 평균 발행 부수는 2,745부. 이들 가운데 그나마 적자를 면할 정도로 책이 팔린 출판사는 얼마나 될까.

-이제이북스는 이른바 ‘안 팔리는 책’만 ‘골라서’ 내는 출판사 가운데 하나다. ‘안 팔리는’ 인문학서적, 그것도 철학서를 주로 내놓는다. 인문학서적의 손익분기점이라고 흔히 말하는 1,000부 이상 팔린 책은 손에 꼽을 정도. 이 회사 전응주 대표(49)는 “재판(再版) 찍은 게 3~4종 정도 되는데 그나마 철학책은 하나도 없다”면서 “사재를 털어 꾸역꾸역 책을 내고 있다”고 밝혔다.

 

 

 



-‘범주론 명제론’ ‘플라톤과 유럽의 전통’ ‘헤겔 예나 시기 정신철학’ ‘스피노자와 정치’…. 출간 도서목록만 살펴봐도 사정을 알 만하다. 최근 내놓은 역서 ‘헤겔, 영원한 철학의 거장’도 그 같은 ‘운명’을 비켜가기가 수월치 않아 보인다. 책은 극단의 평가를 받는 철학자 헤겔의 참모습을 가장 충실하게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는 전기물이다. 1,000쪽이 넘는 방대한 양이 독자들을 압도한다. 전대표는 “출판사를 시작한 2001년에 번역자와 계약을 했으니 5년이 넘게 걸린 셈”이라고 웃었다.

-철학을 전공하고 시간강사 생활을 하던 전대표는 “좋은 철학서를 제대로 내겠다”는 신념 하나로 출판업계에 뛰어들었다(*묵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했던가?). “철학서의 번역물들이 이해하기 힘든 게 많았고, 일본어 번역서를 다시 번역한 것도 많았습니다. 최소한 오역이 없는 철학서를 내보자고 생각했지요.”

-어려운 개념이 많다보니 철학서 번역은 특히 시간이 많이 걸리는 작업이다. 대여섯번 교열을 보는 건 기본. ‘헤겔~’은 교열과 편집 작업에만 반 년 가까이 걸렸다. 전대표가 직접 교열을 보는 경우도 많다. 그는 “지금도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원전 번역물을 영어와 독일어 번역을 옆에 두고 비교하면서 보고 있다”면서 “그냥 대충 하면 손해보지 않고 갈 수도 있겠지만 그럴 수는 없다”고 말했다. 편집자들은 그를 원고를 집어삼키는 ‘블랙홀’이라고 부른다. 책을 오래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사철(絲綴) 제본을 하고, 밑줄 긋고 메모하기 편한 종이를 쓰는 것도 그 같은 꼼꼼함 때문이다.

-전대표는 희랍어·라틴어 원본을 번역할 수 있는 세대가 활동하고 있는 지금 관련 철학서를 번역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만간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낼 예정이고, 플라톤 전집도 완간을 목표로 하고 있다. 물론 책을 낼수록 적자만 쌓여가는 상황은 고민거리다. “좋은 책인데 내려면 겁난다”는 그의 말은 이 같은 고민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래도 유행을 따라 책을 만들 생각은 없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지만 누군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란다. “남들은 뭐라 해도 1,500부, 2,000부 팔았다면 그걸로 만족합니다. 철학서 독자가 50~100% 늘었으니 그걸로 된 거 아닌가요.”

06. 08. 14.

P.S. 국내 철학전문 출판사라면 서광사와 철학과현실사를 들 수 있었다(서광사의 책들은 뜸해졌다, 철학과현실사의 책들은 '대중'과 '교양'을 별로 염두에 두지 않는 듯하다). 이제이북스는 새로운 강자다. 플라톤 전집까지 완간한다면 아마 판도가 달라질지도 모르겠다. 쌓여가는 적자를 버텨주기만 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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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6-08-14 11:49   좋아요 0 | URL
오오오. 퍼가요. 아 이런 사람들이 많아져야하는데. 나오면 죄 얼마 안가 절판되어버리니.

반딧불,, 2006-08-14 11:51   좋아요 0 | URL
저도 퍼갑니다.

로쟈 2006-08-14 11:56   좋아요 0 | URL
누군가 해야 할일을 하는 사람들이 필요하고 고마운 사람들이죠(사실 그 이면은 섬뜩한 것이기도 하지만. 누군가 해야 할 악역들)...

호랑녀 2006-08-14 12:48   좋아요 0 | URL
버텨주기를...

biosculp 2006-08-14 18:21   좋아요 0 | URL
우리나라에 의사나 한의사가 한 7-8만명정도, 변호사도 한만명정도 되나요.교수들도 몇만명은 되는것 같고, 기업과장급이상도 꽤 될것같고, 학교 선생님들도 한 30만명 되나요. 전교조가 조합원이 9만명이라니. 그런데 좋은 학술서가 천권이 넘어가기힘드니.
수능 1등이 저 공부할때 헤겔읽었어요. 해야 좀 팔릴지, 아니면 부잣집들 장식품이 두꺼운 책으로 유행이 바뀌어야 좀 될지.
하여간 힘되는대로 당장 읽지는 않더라도 좋은 책은 사놔야지요. 안그러면 절판되어 구경하기 조차 힘드니.

로쟈 2006-08-14 23:23   좋아요 0 | URL
사실 도서구입 십일조 같은 거라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십오조가 넘을 때도 많았지만, 그런 '민폐' 수준은 아니더라도 정신의 '웰빙'을 위해서라면 좀 투자할 필요가 있는 것이죠...
 

'문학의 빈곤'이라... 아주 오랜만에 들어보는 문구다. 예전에 중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 성민엽의 첫 평론집이 <문학의 빈곤>(문학과지성사, 1988)이었다(*<지성과 실천>에 이은 두번째 평론집이다. 세번째 평론집이 재작년에 출간된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마르크스의 <철학의 빈곤>(아침, 1989)을 패러디한 제목이엇다(마르크스는 프루동의 철학을 풍자했던가). 아침신문에 시인이자 현재는 경향신문 기자인 김중식씨가 <작가와 비평> 특집을 소개하는 기사를 썼다. 그걸 옮겨온다.  

 

 

 

 

경향신문(06. 08. 14) 모두 가난한데 빈곤문학이 없다

-모두가 가난하다고 아우성인데, 문학은 더 이상 가난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최근 나온 <작가와 비평> 제5호의 특집은 ‘우리 시대의 가난과 빈곤의 상상력’이다. 요즘 문학이 빈곤 문제를 사회양극화와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알아보자는 취지다. 빈곤의 원인·양상이 시대마다 다르므로 문학적 상상력 또한 다를 수밖에 없으리라는 ‘가설’에서 출발한 기획인 셈이다. 그랬는데 글을 쓴 4명 비평가의 결론은 ‘모두 가난한데 빈곤문학은 사라졌다’는 것쯤 된다. 작가들이 현실의 절망에 눈감았거나 세상을 체념한 탓에 가난의 원인과 결과를 개인에게 귀속시킬 뿐 ‘근대성과의 충돌’이라는 문제제기를 회피하고 있다는 요지다(*내가 읽어본 몇 개의 빈곤문학으로는 중과부적인 모양이다).

-문학평론가 정문순씨(37)는 1990년대 이후의 소설을 분석한 글 ‘빈곤문학의 길 찾기, 좌절과 모색’에서 “겉으로 드러난 풍요와 이기심 뒤에 숨은 빈곤의 얼굴을 직시하는 작가가 과연 있는가”라고 자문한 뒤 “없다고 본다”고 자답했다. 정씨에 따르면 빈곤문학은 70년대까지는 하나의 독립적 영역이었다. 80년대 빈곤문학은 노동문학에 수렴됐다. 90년대 이후에 대해서는 “민중의 삶을 말하던 그 많은 작가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라고 표현했다. 작가들이 절망의 현실에 대해 눈을 감아버렸기 때문이란 주장이다.

-가까스로 빈곤문학의 범주에 넣을 수 있는 일부 작품들도 빈곤의 이유를 가족해체에서 찾을 뿐이다. 가난 자체가 모멸이며 소외라는 인식을 가진 작가가 거의 없다고 보았다. 그는 “근대적 사회제도의 일부로서 가족제도에 대한 집착에서 자유롭지 않았다”면서 “90년대 이후 한국소설에서 빈곤을 통한 성찰은 근대성과의 충돌에까지 이르지는 못했다”고 밝혔다.

-평론가 강경석씨(31)는 ‘불황의 상상력인가, 근대문학의 종말인가’에서 최근작 소설에 실업자 캐릭터들이 집단적으로 등장했다고 보고 그 배경과 의미를 살핀다. 정이현 ‘소년은 꿈꾸지 않는다’, 김숨 ‘트럭’, 김미월 ‘너클’, 이기호 ‘나쁜 소설’, 김애란 ‘베타별이 자오선을 지날 때’ 등을 분석했다. 강씨에 따르면 ‘소년은 꿈꾸지 않는다’는 속물의 허위를 폭로하기보다는 속물을 속물이게 만드는 속물성의 세계 혹은 그 메커니즘을 비판한다.

-주인공들이 현실의 백수라기보다 정신적 실직자에 가까운데, 이는 작가가 ‘세계의 기성질서=처음부터 막다른 골목’이라고 체념했기 때문이며 작품 속에서 속물성의 세계에 대한 암묵적 동의로 귀결된다는 설명이다. ‘너클’ 속 주인공의 무력감 또는 권태 역시 ‘무엇도 되지 않고자 하는 열정=세속적 방기=귀차니즘’으로 읽힌다는 것이다. 강씨는 그러나 “‘문학을 떠나서 생각’한다는 젊은 작가의 표현처럼 문학하는 허망함이 집단적인 표현들을 얻었던 시대는 없었다”면서 “이들이 그만큼 문학으로 되돌아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반어일 수 있다”고 동시대 작가들을 감싸안았다.

-비평가 엄경희씨(43) 역시 한국시사 속의 가난을 살핀 ‘가난을 재생산하는 자는 누구인가?’에서 “가난을 촉발시키는 구조적 모순에 대한 통찰은 이제 소수 시인들의 관심 영역”이라고 했다. 전국노동자문학회, ‘일과 시’ 동인, 백무산·조기조·최종천 시인 등 노동문학 계열, 그리고 70년대 이후 출생자 가운데 박성우·김사이 시인 정도에 국한된다는 것이다. “실업은 자본주의를 버티게 하는/몇 안 되는 기둥 가운데 하나다/실업은 노동의 무덤이며 자본의 강력한 무기다”(백무산 ‘너희들이 손댈 수 없다’).

-문학평론가 조해옥씨(43)는 ‘내면의 가난과 가난이 주는 풍요’에서 “90년대 이후 가난을 소재로 한 시작품들은 시대의 가난 또는 물질적 빈곤 대신 내면의 가난을 추구하는 게 대부분”이라면서 “이는 시인의 빈곤한 자아, 즉 시정신의 미시성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거대담론과 이데올로기의 해체에 뒤따르는 허무감이 90년대 이후의 시를 위축시키고 있다는 설명이다.

조씨에 따르면 90년대 이후에 가난을 다룬 시들은 대개 ‘무욕의 시’다. 시인들이 빈곤하고 위축된 자아를 벗어나기 위한 노력으로 내면의 가난을 추구하는 바, 비판정신보다는 서정성과 생의 본원적 문제에 천착하게 된다는 분석이다. 시인들의 가난은 자본주의적 가치를 거부하고 누추한 곳에서 삶의 비의와 환희를 찾으려 하는 것이다. 그는 그러나 “내면의 가난은 특정한 시대·역사와 무관한 시창작의 에너지”라면서 “가난을 오로지 시인 또는 시적 자아 개인에 속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시의 미시성이 곧 시정신의 풍요로움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라고 비판했다.(김중식 기자)

06. 08. 14.

 

 

 

 

P.S. 전체적인 요지는 '빈곤문학의 빈곤'쯤 되겠다. 그게 (역설적이지만) '문학의 빈곤'을 낳고 있다고(거기에 비하면 차라리 영화가 괄목할 만하다. 가령 1000만명 이상이 볼 걸로 예상되는 <괴물>만 하더라도 얼마나 계급의식에 투철한가?!). '빈곤문학'은 다르게 규정하면 '계급문학'이다. 그리고 이 계급을 규정하는 변수는 경제적 특권과 문화적 특권이다. 대부분의 젊은 작가들이 경제적으로는 중산층 이하인 경우가 많지만 이들의 문화적 향유 수준은 평균을 훨씬 윗돈다(대부분의 대학강사들처럼). 때문에 경제적 피착취 계급이란 자의식을 강하게 갖지 않는다/못한다. 더불어, 절대 빈곤의 상태에서라면 무슨 문학을 하겠는가? 그건 문학(예술) 자체의 오랜 딜레마이다(가령 19세기 인텔리겐치아 문학의 독자가 되어야 할 대다수 민중/농민들은 문맹이었다). 한데, <작가와 비평>은 몇 명이나 읽는 잡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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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6-08-14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0명쯤?

마노아 2006-08-14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깨기 어려운 딜레마군요. 몇달 전에 누가 저더러 너의 하부구조는 뒷받침되지 않는데 너의 상부구조는 인텔리라고 하더만... 그때의 충격이 되살아나는군요.ㅡ.ㅡ;;;

2006-08-14 13: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jouissance 2006-08-15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민엽의 첫 번째 평론집은 '문학의 빈곤'이 아니라 '지성과 실천' 아닌가요? '문학의 빈곤'은 그의 두 번째 평론집으로 알고 있는데... 한때 그의 비평을 좋아한 적이 있어 기억이 가뭇하게 나네요. 암튼 성민엽은 '문학의 빈곤'을 출간하고 현장비평을 떠나 아카데미성으로 꼭꼭 숨어버렸지요. 이동하는 그를 일러 '비평계의 기린아'라고 평할 정도로 뛰어난 비평가였는데 말입니다... 로쟈님 좋은 글과 정보들 항상 감사^^ -

로쟈 2006-08-16 0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지성과 실천>(1985)이 먼저 나온 첫 평론집입니다.^^ 한데, 제가 그 책은 도서관에서 빌려 있고, <문학의 빈곤>은 사서 본 책이라 후자가 더 기억에 남아있네요(더불어 <지성과 실천>은 알라딘에서 검색되지 않는 책이고).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2004)을 최근에 냈으니까 현장비평을 아예 떠난 건 아니겠고, 관심이 좀 줄었다고 봐야겠네요. 하긴 중국문학이 더 재미있고 역동적일 수도 있겠습니다...
 

아침신문에서 가장 눈에 띄는 외신 기사는 <양철북>의 작가로 독일의 노벨상 수상작가 귄터 그라스가 자신이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친위대로 복무한 사실을 털어놓았다는 것이다. 다음달 발간 예정인 그의 회고록에 담긴 내용이라는 데, 그가 이전에 쓴 '나의 세기'는 전폭적으로 수정되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관련기사 두 개를 옮겨놓는다.

동아일보(06. 08. 14) ‘양철북’ 노벨상 작가 귄터 그라스 “나는 나치 친위대였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독일 작가 귄터 그라스(78) 씨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친위대(SS)에서 복무한 사실을 털어놓았다.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FAZ) 인터넷판은 11일 이런 내용이 포함된 그라스 씨와의 회견 내용을 보도했다. 그는 다음 달 발간되는 회고록을 통해 2차 대전을 전후한 자신의 행적을 공개할 예정이다.

 

 

 


-그라스 씨는 회견에서 “이런 과거가 지금까지 나를 짓눌러 왔다”고 고백했다. 그는 “오랜 세월 침묵한 끝에 회고록을 내놓게 됐다”며 “당시에는 SS에서 복무했다는 사실이 부끄럽지 않았으나 전쟁이 끝난 뒤 수치스러운 감정이 들어 괴로웠다”고 말했다. 그는 15세 때 집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으로 잠수함부대에 지원했으나 거절당한 후 군 노무자로 일하다가 17세 때 드레스덴에 주둔한 SS 제10기갑사단으로 징집돼 복무했다고 밝혔다.

-지금까지 그라스 씨는 자신의 군 복무 경력에 대해 17세 때 징집돼 교황 베네딕트 16세처럼 방공부대에서 근무한 것으로 얘기해 왔다. 그는 종전 후 부상한 채 미군 포로로 잡혀 1946년까지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SS는 원래 아돌프 히틀러 총통의 경호대였으나 이후 강제수용소를 운영하고 유대인과 공산주의자 등을 학살하는 임무를 맡아 악명을 떨쳤다.

-그라스 씨는 “내 기억에는 SS가 그렇게 소름끼치는 존재가 아니었고 격전지에 파견된 엘리트 부대일 뿐이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2차 대전 후 뉘른베르크 국제전범재판에서 SS는 범죄 조직으로 규정됐다. 그는 “10대 시절의 나치 사상을 완전히 잊어버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며 자신이 나치 사상의 자발적인 동조자는 아니었다고 강조했다. 또 “(전쟁 참여는) 당시 많은 젊은이에게 흔했던 일”이라고 자신의 행적을 옹호했다.

 

 

 

-나치 시대에 성장해 전쟁에서 살아남은 세대의 ‘문학적 대변자’로 불리는 그라스 씨는 소설 ‘양철북’으로 199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양철북은 영화로 만들어져 1980년 아카데미상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라스 씨는 사회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정치적 견해를 공개적으로 나타냈고 인종 차별과 전쟁에 반대하는 적극적인 사회 참여로 명성을 떨쳤다.

-그라스 씨의 이 같은 고백에 대한 반응은 엇갈리고 있다*(*그간의 귄터 그라스론에 적어도 의미있는 수정이 불가피하겠다. “이런 과거가 지금까지 나를 짓눌러 왔다”는 고백을 고려하지 않은 작가론이란 사실 무의미하다). 독일의 유대계 작가인 랄프 조르다노 씨는 그의 과거사 고백을 환영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쌓아 온 업적과 명성이 훼손됐고 너무 오랫동안 자신의 과거를 숨겼다는 반응도 만만치 않다. 국제펜클럽 체코본부는 13일 그라스 씨에게 수여했던 문학상의 철회를 고려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지리 스트란스키 회장은 “우리는 이 문제를 간과하지 않을 것이며 논의에 부칠 것”이라고 말했다.

-체코 펜클럽은 1994년 체코의 저명한 작가인 카렐 차페크(1890∼1938)의 이름을 딴 문학상을 그라스 씨에게 수여했다. 공교롭게도 차페크의 형으로, 작가 겸 화가였던 요세프 차페크는 나치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사망했다.(김기현 기자)


세계일보(06. 08. 14) 귄터 그라스 "나는 나치 친위대원이었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귄터 그라스(78·사진)가 자신이 2차 세계대전 기간 중 악명 높은 히틀러의 나치 친위대에 복무했다는 사실을 61년 만에 고백해 독일사회에 충격을 안겨주고 있다.



-그라스는 12일자 일간 프랑크푸르트알게마이너 차이퉁과의 회견에서 자신이 17세 때인 1944년에 당시 군부대를 지원하는 노동봉사자로 근무하다가 드레스덴에 주둔한 나치 친위부대인 제 10기갑사단에 입대,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근무했다고 털어놨다.

-이 같은 그라스의 고백은 오는 9월 출간 예정인 ‘양파 껍질들’이라는 제목의 회고록에 자세한 내용이 담겨있다. 그라스는 “전쟁이 끝난 뒤 나치 친위대에 복무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워 괴로워했다”며 “친위대 복무 사실을 아내 외에 자식들에게도 비밀로 했었다"고 실토했다(*양파껍질들!).

-그라스가 복무한 제 10기갑사단은 45년 2월까지 동부전선에서 옛 소련군과 전투를 벌이다 4월에 옛 소련군에 투항했으며, ‘프른즈베르크’라는 별칭을 지녔다. 나치 친위대는 하인리히 히믈러 지휘하에 초기엔 9만5000명의 히틀러 경호부대로 발족했으나, 이후 90만 병력에 36개 사단을 자랑하는 정예 전투부대로 발전했다. 임무는 전선 투입은 물론 유대인 체포와 강제노동수용소 관리, 유대인,공산당원,집시 학살과 프랑스, 폴란드, 체코 등 나치 점령지에서 민간인 학살과 마을 방화 등의 만행을 자행해 악명을 떨쳤다.

-그라스는 자신은 15세에 집을 벗어나 애초 잠수함 부대에 입대하려 했으나 더 이상 모집을 하지않아 노동봉사 부대에 근무하다가 후에 친위대로 편입됐다고 밝히고 “나는 친위대 복무 사실을 치욕으로 느껴 차마 말로 고백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회고록에 밝혔다”고 실토했다(*작가 자신이 파문을 감수하고 생전에 사실을 고백한 것은 용기있는 행동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데, 나의 관심은 그보다는 그가 느낀 '치욕의 문학적 변용'에 두어진다. 귄터 그라스 읽기의 지평 변화가 사실 이 파문의 보다 중요한 의미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라스는 1927년 지금은 폴란드 영토인 단치히에서 출생했고 전후에 소설가로 데뷔했다. 59년 반 나치소설 ‘양철북’으로 99년 노벨문학상을 받았으며 ‘고양이와 쥐’, ‘넙치’ 등 명작들을 내놓았다. 그는 현실 참여에 적극적이어서 항상 사민당 선거운동에 참여해 왔으며 반전운동의 선봉에 서기도 했다.

-그의 고백이 발표된 후 소설가 발터 옌즈, 발터 켐포스키, 역사학자 아눌프 바링, 평론가 미카엘 볼프존 등 독일 지식인 사회에서는 그라스를 둘러싼 옹호와 비난 논란이 뜨겁게 일고 있다.(프랑크푸르트=남정호 특파원)

06. 08. 14.

P.S. 한국일보의 칼럼 하나를 보충해 놓는다(아래 사진은 그라스가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과 회견 도중 파이프에 불을 붙이고 있는 모습).

한국일보(06. 08. 16) 그라스의 주홍글씨

-김지하 같은 시인을 감옥에 가둬놓는 나라는 방문하지 않겠다던 귄터 그라스는 30여년이 지나 2002년 한일월드컵을 앞두고 한국을 찾았다. 그는 월드컵 개막식 전야제에서 '밤의 경기장'이라는 축시를 발표했다. '천천히 축구공이 하늘로 떠올랐다/ 그때 사람들은 관중석이 꽉 차 있는 것을 보았다/ 고독하게 시인은 골대 앞에 서 있었고/ 그러나 심판은 호각을 불었다: 오프사이드' 그라스는 이 시에서 축구를 빌어 절묘하게 시인, 넓게 말해 작가 혹은 지식인의 운명을 말하고 있다. 현실의 게임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언제나 한 발 앞서 가는 그들은 운명적으로 오프사이드 반칙을 범할 수밖에 없다.

-독일어권 최고의 지성, 비판적 좌파 지식인의 대변인 등 그의 이름 앞에 붙는 수식이 알려주듯 그라스는 이 시의 고독한 시인처럼 인류의 이상이라는 골대를 향해 누구보다 앞서 가며 오프사이드를 두려워하지 않던 작가였다. 나치 비판, 반핵운동, 베트남전과 이라크전 반대, 독일 통일과정에 대한 비판 등 20세기와 함께 달려온 그라스는 소설 <어느 달팽이의 일기>(1972)에서 작가를 "악취에 이름을 붙여주기 위해 악취를 사랑하는 사람, 그것이 존재의 조건"이라고 정의했다. 20세기의 마지막 해인 1999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음으로써 그는 한층 더 상징적 의미를 지니는 작가가 됐다.

-이런 그라스가 최근 2차대전 당시 가장 악명 높은 조직인 나치 친위대(SS)에 복무한 적이 있다고 62년만에 털어놓으면서 독일은 물론 세계가 경악하고 있다. 17세 때인 1944년 SS 제10기갑사단에 배치돼 종전까지 복무했다는 사실을 내달 회고록 출간을 앞두고 언론에 밝힌 것이다. 독일 언론들은 그를 위선자 취급 하는 모양이고, 일부는 노벨문학상 반납 주장도 제기하고 있다. 독일에 점령당한 뼈아픈 역사를 가진 동유럽 국가들은 물론 더하다. 노벨평화상을 받은 바웬사 전 폴란드 대통령은 "그를 만나면 악수하지 않겠다"며 그라스의 출생지로 지금은 폴란드 영토인 그단스크 명예시민 자격 취소를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라스는 왜 60년이 넘게 이를 숨겨 왔을까. 그는 "나치 친위대 복무 사실은 아내 말고는 자식들도 몰랐다"며 "젊은날 세상 물정 모르고 한 행위에 대한 부끄러움이 이후 줄곧 나를 짓눌렀으며, 그것은 나의 '주홍글씨'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주홍글씨를 드러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던 사람이었다. <양철북>(1959)의 주인공인 난쟁이 오스카의 입을 통했든, 47그룹의 동료 하인리히 뵐이 자신보다 27년이나 앞서 노벨문학상을 받았을 때였든, 그는 더 일찍 자신의 악취에 '이름을 붙여' 주었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그가 2002년 방한시 "일본인들은 예나 지금이나 잘못을 깨닫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깨닫는다 해도 그걸 내놓고 말하지도 않는다"고 독일과 일본의 과거 청산을 비교했던 말이 지금 훨씬 더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래저래 8월은 오욕의 시간이다. 그라스의 고백에, 이라크전 일으켜 그로부터 욕 먹었던 부시와 블레어, 8ㆍ15에 신사참배 강행한 고이즈미, 혹은 땅찾기에 혈안인 이 땅의 친일파 후손 등등 평소 고상한 문학이니 이상이니 따위 경멸해왔을 세계의 현실주의자들은 "거 봐, 잘난 척하더니, 너희들은 별 수 있냐" 하며 코웃음치고 있을 것이다. '나의 세기'(1999)를 소설로 썼던 노작가의 인간적 나약함 탓으로만 돌리기에는 그라스의 고백은 너무 늦었다. 20세기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하종오 피플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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