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빈곤'이라... 아주 오랜만에 들어보는 문구다. 예전에 중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 성민엽의 첫 평론집이 <문학의 빈곤>(문학과지성사, 1988)이었다(*<지성과 실천>에 이은 두번째 평론집이다. 세번째 평론집이 재작년에 출간된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마르크스의 <철학의 빈곤>(아침, 1989)을 패러디한 제목이엇다(마르크스는 프루동의 철학을 풍자했던가). 아침신문에 시인이자 현재는 경향신문 기자인 김중식씨가 <작가와 비평> 특집을 소개하는 기사를 썼다. 그걸 옮겨온다.  

 

 

 

 

경향신문(06. 08. 14) 모두 가난한데 빈곤문학이 없다

-모두가 가난하다고 아우성인데, 문학은 더 이상 가난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최근 나온 <작가와 비평> 제5호의 특집은 ‘우리 시대의 가난과 빈곤의 상상력’이다. 요즘 문학이 빈곤 문제를 사회양극화와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알아보자는 취지다. 빈곤의 원인·양상이 시대마다 다르므로 문학적 상상력 또한 다를 수밖에 없으리라는 ‘가설’에서 출발한 기획인 셈이다. 그랬는데 글을 쓴 4명 비평가의 결론은 ‘모두 가난한데 빈곤문학은 사라졌다’는 것쯤 된다. 작가들이 현실의 절망에 눈감았거나 세상을 체념한 탓에 가난의 원인과 결과를 개인에게 귀속시킬 뿐 ‘근대성과의 충돌’이라는 문제제기를 회피하고 있다는 요지다(*내가 읽어본 몇 개의 빈곤문학으로는 중과부적인 모양이다).

-문학평론가 정문순씨(37)는 1990년대 이후의 소설을 분석한 글 ‘빈곤문학의 길 찾기, 좌절과 모색’에서 “겉으로 드러난 풍요와 이기심 뒤에 숨은 빈곤의 얼굴을 직시하는 작가가 과연 있는가”라고 자문한 뒤 “없다고 본다”고 자답했다. 정씨에 따르면 빈곤문학은 70년대까지는 하나의 독립적 영역이었다. 80년대 빈곤문학은 노동문학에 수렴됐다. 90년대 이후에 대해서는 “민중의 삶을 말하던 그 많은 작가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라고 표현했다. 작가들이 절망의 현실에 대해 눈을 감아버렸기 때문이란 주장이다.

-가까스로 빈곤문학의 범주에 넣을 수 있는 일부 작품들도 빈곤의 이유를 가족해체에서 찾을 뿐이다. 가난 자체가 모멸이며 소외라는 인식을 가진 작가가 거의 없다고 보았다. 그는 “근대적 사회제도의 일부로서 가족제도에 대한 집착에서 자유롭지 않았다”면서 “90년대 이후 한국소설에서 빈곤을 통한 성찰은 근대성과의 충돌에까지 이르지는 못했다”고 밝혔다.

-평론가 강경석씨(31)는 ‘불황의 상상력인가, 근대문학의 종말인가’에서 최근작 소설에 실업자 캐릭터들이 집단적으로 등장했다고 보고 그 배경과 의미를 살핀다. 정이현 ‘소년은 꿈꾸지 않는다’, 김숨 ‘트럭’, 김미월 ‘너클’, 이기호 ‘나쁜 소설’, 김애란 ‘베타별이 자오선을 지날 때’ 등을 분석했다. 강씨에 따르면 ‘소년은 꿈꾸지 않는다’는 속물의 허위를 폭로하기보다는 속물을 속물이게 만드는 속물성의 세계 혹은 그 메커니즘을 비판한다.

-주인공들이 현실의 백수라기보다 정신적 실직자에 가까운데, 이는 작가가 ‘세계의 기성질서=처음부터 막다른 골목’이라고 체념했기 때문이며 작품 속에서 속물성의 세계에 대한 암묵적 동의로 귀결된다는 설명이다. ‘너클’ 속 주인공의 무력감 또는 권태 역시 ‘무엇도 되지 않고자 하는 열정=세속적 방기=귀차니즘’으로 읽힌다는 것이다. 강씨는 그러나 “‘문학을 떠나서 생각’한다는 젊은 작가의 표현처럼 문학하는 허망함이 집단적인 표현들을 얻었던 시대는 없었다”면서 “이들이 그만큼 문학으로 되돌아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반어일 수 있다”고 동시대 작가들을 감싸안았다.

-비평가 엄경희씨(43) 역시 한국시사 속의 가난을 살핀 ‘가난을 재생산하는 자는 누구인가?’에서 “가난을 촉발시키는 구조적 모순에 대한 통찰은 이제 소수 시인들의 관심 영역”이라고 했다. 전국노동자문학회, ‘일과 시’ 동인, 백무산·조기조·최종천 시인 등 노동문학 계열, 그리고 70년대 이후 출생자 가운데 박성우·김사이 시인 정도에 국한된다는 것이다. “실업은 자본주의를 버티게 하는/몇 안 되는 기둥 가운데 하나다/실업은 노동의 무덤이며 자본의 강력한 무기다”(백무산 ‘너희들이 손댈 수 없다’).

-문학평론가 조해옥씨(43)는 ‘내면의 가난과 가난이 주는 풍요’에서 “90년대 이후 가난을 소재로 한 시작품들은 시대의 가난 또는 물질적 빈곤 대신 내면의 가난을 추구하는 게 대부분”이라면서 “이는 시인의 빈곤한 자아, 즉 시정신의 미시성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거대담론과 이데올로기의 해체에 뒤따르는 허무감이 90년대 이후의 시를 위축시키고 있다는 설명이다.

조씨에 따르면 90년대 이후에 가난을 다룬 시들은 대개 ‘무욕의 시’다. 시인들이 빈곤하고 위축된 자아를 벗어나기 위한 노력으로 내면의 가난을 추구하는 바, 비판정신보다는 서정성과 생의 본원적 문제에 천착하게 된다는 분석이다. 시인들의 가난은 자본주의적 가치를 거부하고 누추한 곳에서 삶의 비의와 환희를 찾으려 하는 것이다. 그는 그러나 “내면의 가난은 특정한 시대·역사와 무관한 시창작의 에너지”라면서 “가난을 오로지 시인 또는 시적 자아 개인에 속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시의 미시성이 곧 시정신의 풍요로움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라고 비판했다.(김중식 기자)

06. 08. 14.

 

 

 

 

P.S. 전체적인 요지는 '빈곤문학의 빈곤'쯤 되겠다. 그게 (역설적이지만) '문학의 빈곤'을 낳고 있다고(거기에 비하면 차라리 영화가 괄목할 만하다. 가령 1000만명 이상이 볼 걸로 예상되는 <괴물>만 하더라도 얼마나 계급의식에 투철한가?!). '빈곤문학'은 다르게 규정하면 '계급문학'이다. 그리고 이 계급을 규정하는 변수는 경제적 특권과 문화적 특권이다. 대부분의 젊은 작가들이 경제적으로는 중산층 이하인 경우가 많지만 이들의 문화적 향유 수준은 평균을 훨씬 윗돈다(대부분의 대학강사들처럼). 때문에 경제적 피착취 계급이란 자의식을 강하게 갖지 않는다/못한다. 더불어, 절대 빈곤의 상태에서라면 무슨 문학을 하겠는가? 그건 문학(예술) 자체의 오랜 딜레마이다(가령 19세기 인텔리겐치아 문학의 독자가 되어야 할 대다수 민중/농민들은 문맹이었다). 한데, <작가와 비평>은 몇 명이나 읽는 잡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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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6-08-14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0명쯤?

마노아 2006-08-14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깨기 어려운 딜레마군요. 몇달 전에 누가 저더러 너의 하부구조는 뒷받침되지 않는데 너의 상부구조는 인텔리라고 하더만... 그때의 충격이 되살아나는군요.ㅡ.ㅡ;;;

2006-08-14 13: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jouissance 2006-08-15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민엽의 첫 번째 평론집은 '문학의 빈곤'이 아니라 '지성과 실천' 아닌가요? '문학의 빈곤'은 그의 두 번째 평론집으로 알고 있는데... 한때 그의 비평을 좋아한 적이 있어 기억이 가뭇하게 나네요. 암튼 성민엽은 '문학의 빈곤'을 출간하고 현장비평을 떠나 아카데미성으로 꼭꼭 숨어버렸지요. 이동하는 그를 일러 '비평계의 기린아'라고 평할 정도로 뛰어난 비평가였는데 말입니다... 로쟈님 좋은 글과 정보들 항상 감사^^ -

로쟈 2006-08-16 0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지성과 실천>(1985)이 먼저 나온 첫 평론집입니다.^^ 한데, 제가 그 책은 도서관에서 빌려 있고, <문학의 빈곤>은 사서 본 책이라 후자가 더 기억에 남아있네요(더불어 <지성과 실천>은 알라딘에서 검색되지 않는 책이고).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2004)을 최근에 냈으니까 현장비평을 아예 떠난 건 아니겠고, 관심이 좀 줄었다고 봐야겠네요. 하긴 중국문학이 더 재미있고 역동적일 수도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