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신문에서 가장 눈에 띄는 외신 기사는 <양철북>의 작가로 독일의 노벨상 수상작가 귄터 그라스가 자신이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친위대로 복무한 사실을 털어놓았다는 것이다. 다음달 발간 예정인 그의 회고록에 담긴 내용이라는 데, 그가 이전에 쓴 '나의 세기'는 전폭적으로 수정되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관련기사 두 개를 옮겨놓는다.

동아일보(06. 08. 14) ‘양철북’ 노벨상 작가 귄터 그라스 “나는 나치 친위대였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독일 작가 귄터 그라스(78) 씨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친위대(SS)에서 복무한 사실을 털어놓았다.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FAZ) 인터넷판은 11일 이런 내용이 포함된 그라스 씨와의 회견 내용을 보도했다. 그는 다음 달 발간되는 회고록을 통해 2차 대전을 전후한 자신의 행적을 공개할 예정이다.

 

 

 


-그라스 씨는 회견에서 “이런 과거가 지금까지 나를 짓눌러 왔다”고 고백했다. 그는 “오랜 세월 침묵한 끝에 회고록을 내놓게 됐다”며 “당시에는 SS에서 복무했다는 사실이 부끄럽지 않았으나 전쟁이 끝난 뒤 수치스러운 감정이 들어 괴로웠다”고 말했다. 그는 15세 때 집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으로 잠수함부대에 지원했으나 거절당한 후 군 노무자로 일하다가 17세 때 드레스덴에 주둔한 SS 제10기갑사단으로 징집돼 복무했다고 밝혔다.

-지금까지 그라스 씨는 자신의 군 복무 경력에 대해 17세 때 징집돼 교황 베네딕트 16세처럼 방공부대에서 근무한 것으로 얘기해 왔다. 그는 종전 후 부상한 채 미군 포로로 잡혀 1946년까지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SS는 원래 아돌프 히틀러 총통의 경호대였으나 이후 강제수용소를 운영하고 유대인과 공산주의자 등을 학살하는 임무를 맡아 악명을 떨쳤다.

-그라스 씨는 “내 기억에는 SS가 그렇게 소름끼치는 존재가 아니었고 격전지에 파견된 엘리트 부대일 뿐이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2차 대전 후 뉘른베르크 국제전범재판에서 SS는 범죄 조직으로 규정됐다. 그는 “10대 시절의 나치 사상을 완전히 잊어버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며 자신이 나치 사상의 자발적인 동조자는 아니었다고 강조했다. 또 “(전쟁 참여는) 당시 많은 젊은이에게 흔했던 일”이라고 자신의 행적을 옹호했다.

 

 

 

-나치 시대에 성장해 전쟁에서 살아남은 세대의 ‘문학적 대변자’로 불리는 그라스 씨는 소설 ‘양철북’으로 199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양철북은 영화로 만들어져 1980년 아카데미상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라스 씨는 사회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정치적 견해를 공개적으로 나타냈고 인종 차별과 전쟁에 반대하는 적극적인 사회 참여로 명성을 떨쳤다.

-그라스 씨의 이 같은 고백에 대한 반응은 엇갈리고 있다*(*그간의 귄터 그라스론에 적어도 의미있는 수정이 불가피하겠다. “이런 과거가 지금까지 나를 짓눌러 왔다”는 고백을 고려하지 않은 작가론이란 사실 무의미하다). 독일의 유대계 작가인 랄프 조르다노 씨는 그의 과거사 고백을 환영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쌓아 온 업적과 명성이 훼손됐고 너무 오랫동안 자신의 과거를 숨겼다는 반응도 만만치 않다. 국제펜클럽 체코본부는 13일 그라스 씨에게 수여했던 문학상의 철회를 고려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지리 스트란스키 회장은 “우리는 이 문제를 간과하지 않을 것이며 논의에 부칠 것”이라고 말했다.

-체코 펜클럽은 1994년 체코의 저명한 작가인 카렐 차페크(1890∼1938)의 이름을 딴 문학상을 그라스 씨에게 수여했다. 공교롭게도 차페크의 형으로, 작가 겸 화가였던 요세프 차페크는 나치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사망했다.(김기현 기자)


세계일보(06. 08. 14) 귄터 그라스 "나는 나치 친위대원이었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귄터 그라스(78·사진)가 자신이 2차 세계대전 기간 중 악명 높은 히틀러의 나치 친위대에 복무했다는 사실을 61년 만에 고백해 독일사회에 충격을 안겨주고 있다.



-그라스는 12일자 일간 프랑크푸르트알게마이너 차이퉁과의 회견에서 자신이 17세 때인 1944년에 당시 군부대를 지원하는 노동봉사자로 근무하다가 드레스덴에 주둔한 나치 친위부대인 제 10기갑사단에 입대,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근무했다고 털어놨다.

-이 같은 그라스의 고백은 오는 9월 출간 예정인 ‘양파 껍질들’이라는 제목의 회고록에 자세한 내용이 담겨있다. 그라스는 “전쟁이 끝난 뒤 나치 친위대에 복무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워 괴로워했다”며 “친위대 복무 사실을 아내 외에 자식들에게도 비밀로 했었다"고 실토했다(*양파껍질들!).

-그라스가 복무한 제 10기갑사단은 45년 2월까지 동부전선에서 옛 소련군과 전투를 벌이다 4월에 옛 소련군에 투항했으며, ‘프른즈베르크’라는 별칭을 지녔다. 나치 친위대는 하인리히 히믈러 지휘하에 초기엔 9만5000명의 히틀러 경호부대로 발족했으나, 이후 90만 병력에 36개 사단을 자랑하는 정예 전투부대로 발전했다. 임무는 전선 투입은 물론 유대인 체포와 강제노동수용소 관리, 유대인,공산당원,집시 학살과 프랑스, 폴란드, 체코 등 나치 점령지에서 민간인 학살과 마을 방화 등의 만행을 자행해 악명을 떨쳤다.

-그라스는 자신은 15세에 집을 벗어나 애초 잠수함 부대에 입대하려 했으나 더 이상 모집을 하지않아 노동봉사 부대에 근무하다가 후에 친위대로 편입됐다고 밝히고 “나는 친위대 복무 사실을 치욕으로 느껴 차마 말로 고백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회고록에 밝혔다”고 실토했다(*작가 자신이 파문을 감수하고 생전에 사실을 고백한 것은 용기있는 행동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데, 나의 관심은 그보다는 그가 느낀 '치욕의 문학적 변용'에 두어진다. 귄터 그라스 읽기의 지평 변화가 사실 이 파문의 보다 중요한 의미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라스는 1927년 지금은 폴란드 영토인 단치히에서 출생했고 전후에 소설가로 데뷔했다. 59년 반 나치소설 ‘양철북’으로 99년 노벨문학상을 받았으며 ‘고양이와 쥐’, ‘넙치’ 등 명작들을 내놓았다. 그는 현실 참여에 적극적이어서 항상 사민당 선거운동에 참여해 왔으며 반전운동의 선봉에 서기도 했다.

-그의 고백이 발표된 후 소설가 발터 옌즈, 발터 켐포스키, 역사학자 아눌프 바링, 평론가 미카엘 볼프존 등 독일 지식인 사회에서는 그라스를 둘러싼 옹호와 비난 논란이 뜨겁게 일고 있다.(프랑크푸르트=남정호 특파원)

06. 08. 14.

P.S. 한국일보의 칼럼 하나를 보충해 놓는다(아래 사진은 그라스가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과 회견 도중 파이프에 불을 붙이고 있는 모습).

한국일보(06. 08. 16) 그라스의 주홍글씨

-김지하 같은 시인을 감옥에 가둬놓는 나라는 방문하지 않겠다던 귄터 그라스는 30여년이 지나 2002년 한일월드컵을 앞두고 한국을 찾았다. 그는 월드컵 개막식 전야제에서 '밤의 경기장'이라는 축시를 발표했다. '천천히 축구공이 하늘로 떠올랐다/ 그때 사람들은 관중석이 꽉 차 있는 것을 보았다/ 고독하게 시인은 골대 앞에 서 있었고/ 그러나 심판은 호각을 불었다: 오프사이드' 그라스는 이 시에서 축구를 빌어 절묘하게 시인, 넓게 말해 작가 혹은 지식인의 운명을 말하고 있다. 현실의 게임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언제나 한 발 앞서 가는 그들은 운명적으로 오프사이드 반칙을 범할 수밖에 없다.

-독일어권 최고의 지성, 비판적 좌파 지식인의 대변인 등 그의 이름 앞에 붙는 수식이 알려주듯 그라스는 이 시의 고독한 시인처럼 인류의 이상이라는 골대를 향해 누구보다 앞서 가며 오프사이드를 두려워하지 않던 작가였다. 나치 비판, 반핵운동, 베트남전과 이라크전 반대, 독일 통일과정에 대한 비판 등 20세기와 함께 달려온 그라스는 소설 <어느 달팽이의 일기>(1972)에서 작가를 "악취에 이름을 붙여주기 위해 악취를 사랑하는 사람, 그것이 존재의 조건"이라고 정의했다. 20세기의 마지막 해인 1999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음으로써 그는 한층 더 상징적 의미를 지니는 작가가 됐다.

-이런 그라스가 최근 2차대전 당시 가장 악명 높은 조직인 나치 친위대(SS)에 복무한 적이 있다고 62년만에 털어놓으면서 독일은 물론 세계가 경악하고 있다. 17세 때인 1944년 SS 제10기갑사단에 배치돼 종전까지 복무했다는 사실을 내달 회고록 출간을 앞두고 언론에 밝힌 것이다. 독일 언론들은 그를 위선자 취급 하는 모양이고, 일부는 노벨문학상 반납 주장도 제기하고 있다. 독일에 점령당한 뼈아픈 역사를 가진 동유럽 국가들은 물론 더하다. 노벨평화상을 받은 바웬사 전 폴란드 대통령은 "그를 만나면 악수하지 않겠다"며 그라스의 출생지로 지금은 폴란드 영토인 그단스크 명예시민 자격 취소를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라스는 왜 60년이 넘게 이를 숨겨 왔을까. 그는 "나치 친위대 복무 사실은 아내 말고는 자식들도 몰랐다"며 "젊은날 세상 물정 모르고 한 행위에 대한 부끄러움이 이후 줄곧 나를 짓눌렀으며, 그것은 나의 '주홍글씨'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주홍글씨를 드러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던 사람이었다. <양철북>(1959)의 주인공인 난쟁이 오스카의 입을 통했든, 47그룹의 동료 하인리히 뵐이 자신보다 27년이나 앞서 노벨문학상을 받았을 때였든, 그는 더 일찍 자신의 악취에 '이름을 붙여' 주었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그가 2002년 방한시 "일본인들은 예나 지금이나 잘못을 깨닫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깨닫는다 해도 그걸 내놓고 말하지도 않는다"고 독일과 일본의 과거 청산을 비교했던 말이 지금 훨씬 더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래저래 8월은 오욕의 시간이다. 그라스의 고백에, 이라크전 일으켜 그로부터 욕 먹었던 부시와 블레어, 8ㆍ15에 신사참배 강행한 고이즈미, 혹은 땅찾기에 혈안인 이 땅의 친일파 후손 등등 평소 고상한 문학이니 이상이니 따위 경멸해왔을 세계의 현실주의자들은 "거 봐, 잘난 척하더니, 너희들은 별 수 있냐" 하며 코웃음치고 있을 것이다. '나의 세기'(1999)를 소설로 썼던 노작가의 인간적 나약함 탓으로만 돌리기에는 그라스의 고백은 너무 늦었다. 20세기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하종오 피플팀장)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