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보의 '8.15 기념 해외석학 인터뷰'로 미국의 저명한 한국학자인 브루스 커밍스 교수와의 대담 인터뷰가 실렸길래 옮겨온다(커밍스 교수는 아마도 촘스키 다음으로 국내 언론의 인터뷰 제의를 많이 받는 미국 학자일 듯하다).

문화일보(06. 08. 14) “한·미 관계 나빠보이며 개선 기미도 안보여”(*타이틀은 문화일보의 최근 기조를 반영하여 좀 선정적이다)
-광복 61주년이 되는 올해 해방전후사와 한국전쟁, 그리고 남·북한의 현대사를 둘러싼 한국내의 논란이 혼란스럽다. 전국교직원 노조가 만든 책자에서는 북한의 주장이 검증되지 않은 채 소개되고 남북한의 해방이후사에 대한 논란은 양극화로 치닫는 인상이 다. 심상찮은 한·미관계, 심지어 식민지종속 우려까지 제기되는한국과 미국의 자유무역협정(FTA)협상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핵개발과 미사일 시험발사로 한반도 정세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는 북한은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광복절 특집기획으로 한국 및 동아시아학 연구로 국제적 명성을 얻고 있는 브루스 커밍스(시카고대)교수와 로버트 스칼라피노(미 버클리대 정치학)교수로 부터 광복61주년의 한국현대사에 대한 얘기를 들어보았다(*스칼라피노 교수와의 인터뷰는 아직 게재되지 않았다). 브루스 커밍스 교수는 한국내 진보파, 북한조차 외면할 수 없는 권위를 갖고 있다. 인터뷰는 지난 7일 미시간주 앤아버의 자택에서 1시간30분 동안 이뤄졌다.
―당신은 북한을 여러 차례 방문했고 북한에 관한 책도 썼다. 북핵문제를 비롯해 향후 북한을 어떻게 보는가.
“북한은 부시 행정부가 있는 한 어떤 양보도 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 독립기념일에 미사일 발사시험을 한 것은 명백히 미국과 일본을 겨냥한 것이다. 북한은 미국과의 관계정상화를 바라고 있지만 미 행정부는 대북정책에서 6자회담파와 체제교체파로 나뉘어져 아무런 결정도 못내리고 있다. 지금은 이라크 때문에 북한문제에 신경 쓸 겨를도 없다. 더욱이 미국은 북한의 미사일 발사나 핵 개발 등을 미국의 미사일방어체제(MD) 구축에 좋은 명분으로 활용할 수 있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 같은 강경책은 결과적으로 미국·일본의 강경파에 이용당하는 셈인가.
“그렇다.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 등에게 북한의 미사일발사는 MD 강화의 명분이다. 또 북핵 문제 등은 미국이 중국을 간접 압박하는 지렛대 역할도 하고 있다.”
―한·미관계에 대한 우려가 많은데.
“한·미관계는 나빠 보이며 좋아질 것 같지도 않다. 서울에서는 젊은 세대가 권력을 잡으면서 여러 변화가 생겼지만 워싱턴은 노무현 대통령이 급진적(radical)이고 급진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고 보고 있다. 한국은 경제적 성공으로 민족적 자긍심이 높아지고 있는 반면 미국은 한국사람들이 고마워할 줄 모른다고 여긴다. 나는 한·미관계가 회복되기 어려울 정도로 나빠지지 않기를 바란다.”
―한국에서는 요즘 주한미군과 관련된 논쟁도 뜨겁다.
“지난 1970년대에 미국에서도 격심한 논쟁이 있었다. 내 생각으로는 미 지상군이 한국 방위를 위해 주둔할 필요가 없다고 보지 만 이제는 주한미군 철수가 한·미관계에서 뜨거운 감자여서 철수하기 어렵게 됐다. 미 국방부 등에서는 노무현 정부에 압박을 가하기 위해 미군 철 수위협을 가하곤 하지만 실제 부시 행정부의 레임덕 현상이나 낮은 인기를 생각하면 주한미군 철수 등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7, 8년 전 클린턴 행정부 당시에 미 국방부에서는 남북한의 화해 이후에도 주한미군을 계속 주둔시킨다는 계획이 논의됐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때 김정일도 주한미군 주둔에 대해 반대하지 않았다. 주한미군이 장래 중국과 일본의 위협을 상쇄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럴 경우 주한미군은 미국 한국 북한 모두에게 이익이다. 주한미군은 그야말로 지역내 균형자 역할을 하는 셈이 되는 것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협상에 대해서 미국의 진보적 학자로서 어떻게 생각하나. 한국내 일부 주장처럼 한국이 경제적으로 종속될 가능성이 있나.
“FTA는 상호이해관계에 따라서 추진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음모가 개입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미국과 한국 양측에서 FTA 를 반대할 수밖에 없는 이해당사자도 있을 것이다. 미국도 과거 철강산업을 지키려고 철저한 보호무역적인 조치를 취해왔다. 나는 FTA로 한·미간의 경제적 관계가 나빠질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FTA문제가 한·미관계에 악영향을 끼치는 전조가 될까 걱정이다.”
―요즘 한국에서는 교수의 저서 ‘한국전쟁의 기원’이 한국전쟁에서 김일성의 책임을 정당화한 책으로 인용되곤 한다. 신문 칼 럼에서는 ‘고등학생이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석좌교수 이름까지 들며 한국전은 미국과 남한이 일으켰다고 배웠다’고 한다는 사례까지 소개됐다.
“역사가로서 학자로서 자신의 주장과 다른 오해를 받는 일은 종종 있는 일이다. 내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나는 남한이나 미국이 전쟁을 시작했다고 한마디도 말한 적이 없다. 아마도 이런 오해가 생긴 것은 1980년대초 내 책이 한국에 소개될 당시 상황 때문일 것이다. 당시 나는 전두환 정권과 한국내 인권문제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그 때문인지 나를 못마땅해 하는 사람들이 내 책의 내용을 왜곡 하며 나를 비난했던 것 같다. 나는 남한편도 북한편도 미국편도 아니다. 미국에서는 한국전이 김일성의 남침이라는 단 한가지 사실만 알려져 있었을 뿐 미국이 1945년부터 1948년까지 한국에서 군정을 실시했던 사실은 잊혀가고 있었다. 나는 미국인에게 알려지지 않은 장면을 밝히려고 했었다.”
―한국에서는 지난 1980년대 한국의 젊은 세대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해방전후사의 인식’이라는 책이 지나치게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며 중도 보수성향의 학자들이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이라는 책을 발간해 해방전후 역사에 대한 새로운 논란이 일고 있다.
“좋은 현상이다. 역사가는 항상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북한은 소련의 괴뢰였고 남한은 친일부역자의 정권이라는 단순한 양분법은 사실이 아니다. 예컨대 남한은 부분적으로 민주주의 정권인 동시에 친일부역 문제가 있었다. 그 사이에 새로운 자료와 연구 성과가 많이 나왔다. 역사적 사실은 매우 복잡한 것이다. 1980년대초 내 연구가 한국 에서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그전까지만 해도 한국 학자들이 한국전쟁 같은 사안을 연구하다가는 잘못하면 감옥에 갈 수 있는 제한적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같은 외국인 학자의 역할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한국전쟁에 대한 연구가 더욱 깊어지면 남북한이 화해할 수 있는 기초도 그만큼 나아질 것이다.”
―1990년에 출판된 교수의 저서 ‘한국전쟁의 기원2’에서는 어 떤 점이 새로 밝혀졌나.
“1권을 쓴 뒤에 구소련이 붕괴되면서 비밀해제된 자료를 보면서 나는 매우 놀랐다. 김일성과 스탈린이 교환한 서신이나 김일성의 모스크바 방문 기록을 보니까 당초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깊이 소련의 스탈린이 개입해 있었다. 1950년 1월 김일성은 모스크바를 방문해서 스탈린으로부터 개전 승인을 얻는다. 그러나 이런 사실도 한국전쟁을 여러 원인에서 찾고자 했던 나의 기본논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한국전쟁 직전 딘 애치슨 국무장관이 한국을 미국의 방어선에서 제외한다고 밝혔다. 이 때문에 남침유도설 같은 주장도 나왔는데.
“애치슨 국무장관의 정책은 미국의 대아시아정책을 재확인한 내용이었다. 딘 애치슨 라인 때문에 김일성의 남침에 청신호를 주 었다는 주장은 난센스다. 한국을 제외한다는 명시적 표현도 없었다. 나중에 공화당이 이를 정략적으로 공격했지만 정작 애치슨의 발언 당시에는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다. 애치슨 장관이 이 말을 한 곳은 미 내셔널프레스클럽 연설 때였다. 당시에는 뉴욕타임스가 연설 내용을 소개하면서 한국이 방어선에 포함된다고 보도했다. 당시 북한의 노동신문도도 이를 번역해 ‘한국이 미국의 방어선에 포함된다’고 전했다.”
-그렇다면 스탈린이나 김일성이 남침을 결정한 배경은(*이하 주체사상에 관한 질문까지는 지면 기사에는 빠진 내용이다.)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미국은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부추긴 측면이 있는 것 같다. 스탈린은 2 차대전 이후 미국의 공세적인 반공정책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냉전의 핵심전선인 독일을 건들였다가는 3차대전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한반도는 냉전의 핵심전선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인 전선의 성격이 짙었다.”
-한국에서는 지난해 맥아더 장군의 동상 철거논란이 있었다. 맥아더의 역할은 어떤 것이었나.
“역사적 사실을 살펴보면 맥아더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 미국의 북진 결정도 맥아더가 아니라 트루먼과 애치슨이 결정 한 것이다. 사실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그를 싫어했다.맥아더는 전술적으로도 매우 큰 실수를 했다. 군대를 둘로 나누어 동쪽 서쪽으로 각각 진군하게 했는데 이후 군사전문가들로부터 어리석은 전술이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북한에서는 전쟁이후 남로당의 박헌영 일당이 처형됐다. 과연 박헌영은 김일성의 주장대로 미국의 간첩이었나.
“그 대목은 북한의 김일성 체제에서 가장 끔찍한 부분이다. 박헌영은 희생양이었다. 그는 개전 결정이나 전쟁 기간중 아무런 역 할도 하지 못한 채 김일성에게 밀려나 있었다. 박헌영이 미 군정당시 남한에 있으면서 미국관리들을 만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박은 미국이 가장 미워하는 정치적 인물이었다. 김일성은 박헌영의 남로당 세력을 남겨두었어야 했다. 그랬다면 남로당 출신들이 남한내 좌파와의 관계속에서 장차 남북한 화해의 틀을 쌓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주체사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1960년대 주체사상을 도입함으로써 북한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민족주의적 정권으로 변한다. 주체사상으로 김일성은 1인 가족지배 체제를 합리화했다(*상식적이지만 자주 간과되는 견해이다). 한때 옛 소련시절 국가보안위원회(KGB) 수장이었던 유리 안드로포프 등 최고위지도자들이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과 주체사상을 둘러싸고 고성을 주고 받기도 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복잡하다. 그는 소농 출신으로 가난에서 벗어나고 신분상승을 위해 일본군인이 됐었다. 그의 인권탄압이나 독재정권은 인정할 수 없지만 그는 진정으로 국력을 키웠다. 그는 다른 후진국 지도자와 달리 부패하지도 않았다. 그는 미국의 정책자문가들이 철강 산업같은 중화학공업정책을 반대했을 때 미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국가기간산업을 키워냈다. 박정희의 중화학공업 정책은 1930년 당시 일본의 만주 산업화정책과 닮았다. 사실 박정희가 만주에서 일본군 장교로 교육받고 근무할 당시 만주는 10%의 산업성장을 거듭했다.”
―한국의 경제적 성공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이나 집단은 누구라고 생각하나.
“1960년대는 미국의 지원 덕이 컸다. 미국은 수출산업 정책을 권고했고 실제 미국시장을 열어주었다. 1970년대는 박정희가 중 화학공업정책으로 국가기간산업을 이뤄냈다. 1980년대도 박정희의 성공이 이어지는 시기였다. 정주영 같은 기업인들도 여러 산업과 기업을 결합시켜 성공을 이뤄냈다. 무엇보다 가장 큰 공로자는 한국인들 자신이다. 근면하고 우수하며 특히 고등학교 교육수준은 놀랄만한 것이다. 이런 바탕 위에서 지금은 지식산업에서 성공을 거두고 있다.”(앤 아버(미시간) = 최형두특파원)

커미스와 한국사 연구(*보충 기사이다)
-미국의 진보적 역사학자인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내 진보파와 북한 모두로부터 인정받는 학자이다. 또 현재의 한국내 논란에서 상당부분 진보진영에서 인용되는 책들의 저자이다. 그는 지난 81년 <한국전쟁의 기원1>이라는 책을 통해 해방직후 미군정 시대 남북한 내, 그리고 남북한 간 정치사회적 갈등의 연장선상이라 는 관점에서 한국전쟁을 분석하는 수정주의적 관점을 제시했다. 미국정부의 방대한 미공개 자료를 근거로 한 그의 연구는 80년대 국내 소장학자들의 진보적 한국사연구에 동인을 제공했다.





-60대말 처음 평화봉사단원으로 내한한 커밍스는 진보적 연구시각 때문에 한동안 한국정부의 기피인물로 입국이 거부되기도 했다(*여담이지만, 도올 김용옥은 이때 커밍스로부터 영어를 배웠다고). 90년에는 구소련 붕괴이후 새로 공개된 소련측 비밀자료 등을 새로 감안한 <한국전쟁의 기원2>를 출간했다. 그가 97년에 펴낸 한국사(Korea’s Place in the Sun:A Modern History)에서는 한국전쟁에 대한 김일성의 책임, 남한의 산업화 과정에 대한 의 미부여 등을 담았다.

-2004년에는 <북한, 또하나의 나라>(한국내 번역본 ‘김정일 코드:브루스 커밍스의 북한’)에서 커밍스 교수는 핵을 둘러싼 북· 미간의 대치상황을 한국전쟁 때 미국에 의해 철저히 파괴된 북한과 북한을 ‘악의 축’등으로만 보는 미국간의 반세기 이상의 강한 적대감으로 분석했다. 또 지난 10여 년간의 핵문제로 인한 북·미갈등은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에게 덤벼드는 외교’(cat - and mouse diplomacy) 의 마지막 국면이라고 분석했다. 북한의 태도를 이해하려는 태도와 달리 북한 자체에 대해서는 병영국가(garrison state), 즉 “폭력 전문가들이 그 사회의 가장 강력한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국가”라는 개념에 가장 근접한 국가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아울러 북한의 세습제를 비롯한 불투명한 정치적 전통과 무수한 인권침해에 관해서도 비판했다.
-컬럼비아대 박사출신으로 현재 시카고대학 역사학과 교수인 커밍스는 미국내 보수파로부터는 미국의 이익을 외면하는 좌파학자로 지목당하기도 했다. 미군정 및 한국전 당시의 미국정책에 대한 비판적 연구 때문이었다. 한국과 미국의 이념전선에서 시달려왔 을 커밍스 교수지만 직접 만나보면 매우 자상했다. 인터뷰를 마 치고 그의 집에서 나오다가 운전실수로 잔디밭 일부를 흉하게 망쳤는데도 껄껄 웃으며 괜찮다고 말했었다.(최형두 특파원)
06. 08. 14-15.
P.S. 얼마전에 브루스 커밍스의 스승이기도 한 미국의 한국학 '대부' 제임스 팔레 교수가 타계했다. 이 참에 관련기사를 옮겨놓는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한국의 미국학 전문가들은 누구일까?).

동아일보(06. 08. 10) "미국내 한국학 1세대 팔레 교수 별세"
-미국 내 한국학의 대부 제임스 팔레(사진) 워싱턴주립대 한국학연구소 명예교수가 6일(현지 시간) 숙환으로 미국 시애틀 한 요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72세. 하버드대 출신인 팔레 교수는 1985년 ‘한국의 인권’이란 보고서를 통해 한국 군부정권을 비판해 미국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미국 학계에서는 그를 ‘워싱턴 마피아’의 대부라고 불렀다. 그는 1968년 당시 워싱턴주립대 일본·한국학연구소장이던 케네스 파일 교수에게 발탁된 뒤 줄곧 한국학 연구에 몰두했다.
-또한 학문적 동반자인 브루스 커밍스(한국 현대사 전공)와 함께 하버드대의 카터 에커트,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의 존 던컨, 인디애나대의 마이클 로빈스,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의 돈 베이커 교수 등 한국학 2세대 학자들을 집중적으로 길러냈다. 그는 미국 내 한인사회를 중심으로 전개된 한국의 민주화운동에도 적극 동참했다. 인권 및 노동운동 탄압 등을 이유로 박정희 정권이 제안한 한국학연구기금(100만 달러)을 거부해 ‘행동하는 지식인’이라는 평가도 받았다.(김윤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