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신문에서 연재하고 있는 '고전번역비평-최고 번역본을 찾아서'에 몇 달 전 출간된 최초의 원전번역 <니코마코스 윤리학>(이제이북스, 2006)에 대한 번역비평을 옮겨온다. 이 책의 출간 소식을 소개한 바 있기에 흥미롭게 읽은 기사이다. 필자는 몇몇 번역어들의 일관성 부족과 부절적절함에 대해 아쉬움을 피력하고 있다. 새 번역서를 읽으면서, 혹은 읽기 전에 참조해둘 만하다.

 

 

 

 

교수신문(06. 12. 19) 고전번역 비평_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인간이 영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삶은 어떤 삶인가.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붙들고 씨름하는 물음의 내용이다. 그의 관심은 신(들)의 삶이나 짐승들의 삶(?)이 아닌 인간의 삶에 있다. 또 아무리 좋은 삶이라 하더라도 인간이 실제로 영위할 수 있는 삶이 아니면 소용이 없다. 그의 문제의식은 인간이 실제로 누릴 수 있는 가장 좋은 삶은 어떤 삶이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일련의 논의 끝에 아리스토텔레스가 내린 결론은 실천적 지혜와 도덕적 덕을 드러내 보여주는 행동의 삶이 그런 삶이라는 것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이 처음 한국어로 번역된 것은 1966년 최명관(숭실대 명예교수)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무엇을 대본으로 하여 번역했는지 명시되어 있지 않다. 을유문화사와 서광사(1984)를 거쳐 지난 해 훈복문화사에서 새롭게 출간되었다. 최명관 역은 최초의 한국어판으로서 고전철학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이 땅에서 그리스 고전에 눈을 뜨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아마도 이 땅에서 철학하는 사람들 치고 최명관 역의 신세를 지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지난 달 이창우(가톨릭대)·김재홍(숭실대)·강상진(목포대)에 의해 새로운 번역이 나왔다. 고대 그리스 원전을 3인의 전공자가 5년간 공들여 번역한 결과물이다. 최초의 본격적인 원전 번역이라 하겠다. 말미에는 용어해설을 곁들여 독자의 이해를 돕는 한편, 왜 새로운 번역어를 선택했는지의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이제 우리도 한글세대에 의한 제대로 된 ‘니코마코스 윤리학’(이제이북스, 2006)번역본을 갖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3인의 공동번역은 기존의 번역어를 과감하게 버리고 새로운 번역어를 채택하고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탁월성’이라는 ‘아레테’의 번역어이다. 통상 ‘덕’으로 번역되던 ‘아레테’가 인간의 기능이나 본성을 지속적으로 잘 실현할 수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마땅히 ‘탁월성’이라고 번역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점을 십분 이해한다 하더라도 다른 맥락에서 보면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점도 있다. 한국어에서 탁월성이란 근본적으로 ‘~의 탁월성(~에서 빼어남)’이기 때문에 그냥 탁월성이라고 하면 ‘팔다리가 잘려나간 풍뎅이’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와 대조적인 ‘카키아’는 종전처럼 ‘악덕’으로 번역했는데 여기서는 왜 ‘[악]덕’을 그대로 두었는가. 아레테를 ‘탁월성’이라 할양이면 ‘카키아’는 ‘열등함’이라 해야 하지 않겠는가. 똑같은 ‘아레테’를 ‘능숙함’(VI 5)이라 옮겨 일관성이 없는 경우도 보인다.

‘아가톤’은 ‘좋음’으로 번역했다. 기존의 ‘선’보다 훨씬 나은 번역어이다. 그렇다면 ‘카키아’도 ‘악덕’보다 ‘나쁨’으로 옮기는 게 낫지 않았을까. ‘헤도네’는 ‘즐거움’으로 번역했다. ‘쾌락’이라는 한자말을 피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와 반대되는 ‘뤼페’도 ‘고통’이라기보다는 ‘괴로움’이라고 하는 편이 나았을 듯 싶다.

제5권에서는 ‘정의’와 ‘부정의’가 논의된다. 그러나 ‘디카이오쉬네’와 ‘아디키아’는 각각 ‘정의’와 ‘불의’로 옮기는 편이 조어(造語) 면에서 나았을 듯싶다. ‘아이스테시스’의 번역에서는 ‘감각’과 ‘지각’이 혼용되고 있다.
‘헥시스’는 ‘품성상태’로 번역했다. 이때 ‘품성’은 ‘稟性’이 아니라 ‘品性’일 텐데 그렇게 되면 ‘성격’과 별반 다를 바 없게 되어 ‘헥시스’와 ‘에토스’가 구별되지 않게 된다. 원래 ‘헥시스’란 ‘영혼의 상태’로서 영혼이 어떻게 틀 잡혔는가를 뜻하는 말이다. ‘테크네’는 ‘기예’로 번역했다. 예술적 기량의 면을 부각시키기 위함일 것으로 짐작되나 테크네가 앎의 일종임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여기서도 ‘기예’와 ‘기술’이 혼용되고 있다.

기술과 학문의 분과가 별다른 기준 없이 ‘~학’과 ‘~술’로 번역되고 있다. ‘의술’, ‘조선술’, ‘마술’이 있는가 하면, ‘가정경제학’, ‘정치학’, ‘수사학’이 나온다. 어떤 기준으로 이렇게 번역하였는가. 일관성을 고려한다면 ‘가정관리술’, ‘정치술’, ‘수사술’로 옮기지 못할 것도 없다. 실제로 ‘의술’(I 1)과 ‘의학’(X 9), ‘정치학’(I 2)과 ‘정치술’(VI 8)이 혼용되고 있다. 공동번역이기 때문일까.

3인의 공동번역은 상당히 많은 대괄호 [ ]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역자들이 최대한 원문에 충실하면서도 보다 더 정확한 의미 전달과 가독성을 함께 고려하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그러나 괄호의 남용은 독자로 하여금 선입관을 갖게 만들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덧붙인 괄호가 오히려 가독성을 떨어뜨릴 수도 있다. 독자로 하여금 독서를 잠깐 멈추게 하기 때문이다.

다음의 경우를 보자. (1) “그렇기에 그들이 행하는 것은 탁월성에 따라 행하는 것이 아니면서 [그저] 다른 사람들을 낮추어 보는 것이다.”(IV 3) 여기서 ‘그저’라는 말이 없어도 문장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없다.

 (2) “이런 까닭에 테티스 [여신] 또한 제우스에게 베풀어 준 선행들을 이야기 하지 않았으며…”(IV 3) 여기서 ‘여신’의 첨가어는 필요치 않다. 각주에서 “테티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바다의 여신으로 아킬레우스의 어머니”라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3) “아마도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그들이 생각하는 즐거움이나 그들이 추구한다고 말하는 즐거움이 아닐 것이며, [사실] 그들은 오히려 동일한 즐거움을 추구하는지도 모른다.”(VII 13) 여기서 ‘사실’이라는 괄호는 필요치 않아 보인다. 뿐만 아니라 이 문장에서 ‘그들’이라는 단어가 4번 나옴으로써 가독성을 떨어뜨린다. 인칭대명사, 지시대명사 등의 번역은 융통성을 보이는 게 좋다.

(4) “많은 사람[다중]들이 그러는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다중]이 즐거움으로 기울어지며 여러 가지 즐거움들의 노예가 된다고 말한다.” 이들 예에서 ‘많은 사람’ 다음에 [다중]이라는 첨가어가 꼭 필요한가라는 의구심이 든다.

대괄호가 필요한 경우도 있다. (1) “이때의 동등함은 저 [기하학적] 비례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산술적 비례에 따르는 것이다.”(V 4) [기하학적]이라는 괄호를 사용함으로써 원문을 그대로 살리면서도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2) “이러한 친애들은 [선행의] 우월성에 근거하는데, 부모님들이 존경을 받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VIII 11) 여기서 [선행의]라는 첨가어가 없다면 우월성이 선행의 우월성을 말하는 것임을 선뜻 알아차리기 어렵다. 그러나 번역이라는 게 어차피 역자의 해석이 가미된 것일진대 굳이 괄호를 사용할 필요 없이 노출시켜도 무방하리라 본다.

잦은 복수형 사용도 거슬린다. ‘다중’이 복수형인데 왜 ‘다중들’이라고 해야 하는가. ‘모든 품성상태들’에서도 ‘들’을 없애는 게 낫다. ‘모든’에 이미 복수의 뜻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한국어는 굳이 복수형을 쓰지 않아도 복수의 뜻을 담아내는 경우가 많다. 복수형을 쓰면 외려 거추장스럽다. 그외 ‘만들어지는’에서처럼 수동형을 사용하는 것이나 ‘~에 있어서’를 많이 사용하는 것은 한국어 어법에 어울리지 않는다.

제1권 제2장에 ‘총기획적’이라는 말이 나오고 제10권 마지막 장에는 ‘인간적인 것에 관한 철학’이라는 말이 나오나 아무런 주해도 없다. 다른 개념들에 해설과 각주를 다는 데 비하면 너무 무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둘 다 윤리학의 학적 위상에 관한 언급이기 때문이다.

‘총기획적’이란 ‘아르키테크토니코스’의 번역어로서 정치학을 규정하는 표현이다. 정치학이 아르키테크토니코스하다는 것은 그것이 다른 모든 실천적 과학의 목표를 포함하고 그것들을 내용으로 갖고 있다는 말이다.

‘건축학’(architecture)이 ‘아르키테크토니코스’에서 파생된 점을 감안하면 ‘건축학적’으로 번역해도 좋겠으나 ‘총기획적’이라는 말이 더 적합해 보인다. 다만 이 번역어가 최명관 역에 나오므로 그런 것쯤은 언급해두는 것이 학적으로 성실한 태도가 아닐까.

흠 잡자고 덤비면 어떤 번역인들 배겨낼 수 있겠는가. 이창우·김재홍·강상진 3인의 공동번역은 특장이 훨씬 더 많은 번역이다. 당분간은 한국어 표준판의 역할을 톡톡히 할 것으로 보인다. 제3의 한국어판이 나와 그 자리를 넘보기까지는. 그러나저러나 아무리 번역이라지만 번역체의 문장이 아니라 원래 우리말처럼 술술 읽히는 번역은 언제쯤이나 만날 수 있을까.(한석환/ 숭실대·철학)

06.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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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osculp 2006-12-23 11:19   좋아요 0 | URL
우리말처럼 술술 읽히는 번역을 하려면, 지금 번역하는 것이 실제로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는데, 국가에서 연구비타서 하는경우 전공자가 번역을 하면 국문학이나 문학을 공부하는 분이 같이 감수하는 식으로 가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는데요. 연구비에 이런것까지 포함하라면 택도 없을려나요.
전공자가 번역, 같은 전공자에게 일차 감수후, 문장을 볼수있는 사람에게 감수후 최종적으로 번역자가 결정. 현실에 안맞는 애기인지?

로쟈 2006-12-23 11:54   좋아요 0 | URL
번역의 관행 자체가 바뀌는 시간이 필요하겠죠. 역자들끼리 의견을 조율하는 데에도 상당한 진통과 애로를 겪는 게 다반사니까 감수자/편집자의 의견까지 고려한다면 상당한 견적이 아닐까 싶습니다...

기인 2006-12-24 21:34   좋아요 0 | URL
오, 강상진 선생님! 정말로 꼼꼼하고 치밀한 선생님이셨는데 :)
이것도 새로 장만하던지 해야겠네요.

로쟈 2006-12-24 23:05   좋아요 0 | URL
같은 고전 전공인 강대진 선생과 무슨 관계가 있는 분인가요?..

기인 2007-01-01 19:57   좋아요 0 | URL
ㅋㅋ 한 때 두 분이 형제라는 '설'이 있었는데(4~5년 전에 서울대에서 라틴어 1, 2 두 분이 번갈아 수업하시기도 했습니다 ㅋ), 두 분 모두께 수업을 들어본 결과(?) 두 분은 '의형제'시라고 하시더라고요. 강대진 선생님은 정말 유쾌하고 재미있으시고, 강상진 선생님은 정말 진지한데, 그 진지함이 또 유쾌한 분 ^^

로쟈 2007-01-01 21:58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그러고 보면, 기인님도 한 고전 하시겠는데요.^^
 

 

문화일보(06. 12. 22) 개신교 목회자 삭발 70명 넘어

사립학교법 재개정을 요구하는 개신교계의 대여당 압박이 22일에도 계속되고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와 ‘한국교회연합을 위한 교단장협의회’ 사무총장을 겸하고 있는 조성기 목사는 이날 문화일보와의 전화통화에서 “국회에서 여야 협상과정을 지켜본 뒤 오늘 중 긴급 교단장 회의를 열 예정”이라며 “사학법 재개정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낙선운동을 포함한 조직적인 저항 운동에 들어가겠다”고 말했다.

조 목사는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이 대거 삭발하는 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졌는데도 나 몰라라 하는 정부·여당을 이해할 수 없다”며 “일제 당시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숭실학교를 폐교했듯, 학교 폐쇄를 각오하고 사학법 독소 조항을 반드시 철폐하겠다”고 강조했다.

예장통합은 이에 앞서 21일 오후 서울 영락교회에서 대의원 1500여명이 모인 가운데 비상기도회를 개최하고 사학법이 재개정될 때까지 순교를 각오하는 마음으로 투쟁할 것을 결의했다. 이날 비상기도회에서는 새문안교회 이수영 목사를 비롯, 영락교회 이철신 목사, 장로회신학대 이만규 이사장, 목민교회 김동엽 목사, 뉴라이트 계열의 서경석 목사 등 30여명이 또 다시 집단 삭발했다. 이에 따라 사학법 재개정을 요구하며 집단 삭발을 한 목사와 신도들은 모두 70여명으로 늘었다.

예장통합 이광선 총회장은 이날 기도회에서 “목사들이 삭발한 것은 단지 수십여 명의 목사가 아니라 한국 교회 전체의 목회자들이 한 것”이라면서 “정부는 교회의 소리를 똑똑히 들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예장통합의 기도회에 이어 ‘한국교회연합을 위한 교단장협의회’도 이날 오후 5시 같은 장소에서 목사·평신도 등 2000여명이 참석한 비상기도회를 열고 사학법 재개정을 촉구했다. 이들은 성명서를 통해 “열린우리당이 제출한 사학법 재개정안은 종교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개방형 이사제’를 전혀 수정하지 않은 것으로 절대 수용할 수 없다”면서 “개방형 이사제와 임원승인 취소 사유 확대 등의 조항을 철폐하라”고 요구했다.(김종락 기자)

문화일보(06. 12. 21) “사학법 재개정 안되면 학교 문 닫는 건 당연”

개방형 이사제 도입을 골자로 하는 개정 사립학교법의 재개정을 촉구하는 기독교계의 중심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이광선 총회장이 서 있다. 영락교회, 명성교회 등의 대형교회를 포함, 약 7000 교회 250만 신도를 포용한 예장통합은 한국 기독교계 최대 교단. 서울 종로구 종로5가 한국교회백주년기념관에서 5일째 삭발한 채 금식기도 중인 이 총회장은 21일 오전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개방형 이사제가 폐지될 때까지 줄기차게, 끝까지 저항을 계속할 것”이라고 밝혔다.

―당초 기독교계가 사학법을 재개정하라고 제시한 시한이 오늘이다. 지금 상황은 어떤가.

“기독교 교단장들과 함께 기도하는 마음은 한결같다. 회기를 연장해서라도 사학법을 재개정하라는 것이다. 국가 백년대계와 사학의 육성을 위해 사학법은 반드시 재개정돼야 한다. 현행 사학법은 사학을 말살하려는 악법이다.”

―지난 17일 이 총회장이 삭발한 것에 이어, 20일에는 35명의 목사와 신도들이 집단 삭발했다. 심정은.

“목회자들의 삭발은 신앙 발전과 선교를 위한 순교자적 표현이다. 사도 바울도 순교를 위한 서원을 세우고 삭발한 적이 있다. 목회자들이 순교도 불사하려고 할 만큼 사학법 문제는 심각하다.”

―21일 오후 영락교회에서 여는 예장통합 비상기도회와 22개 교단 소속 목사 및 장로들의 기도회는 어떤 의의를 지녔는가.

“사학법 문제의 심각성을 교회의 지도자들이 앞장서서 1000만 성도들에게 알리자는 것이다. 사학의 비리를 두둔하는 것이 아니다. 비리가 있으면 관련법에 따라 엄정하게 처벌하면 된다. 현행 사학법은 나라를 위한 법이 아니다. 사악한 의도가 실려 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는 개방형 이사제를 절대 반대하고 있는 것에 반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는 개방형 이사제를 받아들이되, 학교운영위나 대학평의회가 아닌, 교단이나 종단에서 파송하도록 하자는 입장이다. 예장통합은 두 단체에 모두 소속돼 있는데….

“독소조항인 개방형 이사제를 전면 폐지해야 한다는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교단에서 이사를 파송한다면, 이해는 할 수 있다.”

―사학법이 재개정되지 않으면 학교를 폐쇄하겠다고 했다. 정말인가.

“기독교계 학교에서 선교를 못하게 하면 학교 문을 닫는 것은 당연하다.”

문화일보(06. 12. 21) “기독교 사상 첫 소수종교로 전락”

‘기독교는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는 물론 유럽에서도 소수 종교다. 세계 지성계의 흐름이 기독교에 적대적으로 가고 있다. 국제정치 환경도 기독교에 호의적이지 않다. 각 지역의 전통종교들이 발흥하고 있다….

기독교와 관계없는 제3자가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영국 에든버러대 신학부에 유학 중 이 대학 사상 처음으로 졸업도 하기 전에 교수로 임명된 뒤 현재 미국 고든-콘웰 신학교에서 강의중인 이문장 교수를 비롯, 앤드루 월즈 에든버러대 신학부 은퇴교수, 라민 싸네 미국 예일대 신학부 교수, 존 음비비티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 교수 등 세계적인 신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다.

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 등 세계 각 대륙 출신인 이들 6인의 신학자는 최근 함께 펴낸 ‘기독교의 미래’(청림출판)에서 “지난 300여년 동안 기독교는 서구 선교의 결과로 세계적인 종교가 될 수 있었으나, 이와 동시에 서구 교회가 쇠퇴하면서 전 세계적으로는 소수 종교로 전락했다”고 말했다.

이들이 밝히는, 세계 기독교 역사에서 일어나는 가장 뚜렷한 현상은 세계 기독교 역사상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 소수자가 되는 시대가 도래했다는 점이다.

이 교수에 따르면 유럽 대륙은 물론이고, 한때 세계 선교의 중심이었던 영국의 상황을 보더라도 교회 출석 인구는 5%를 밑돈다. 2000년 기독교 역사상 처음으로 서구사회에서 기독교가 소수자의 종교로 바뀌면서 정신 세계를 주도하거나 통제하는 규범으로서 영향력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기독교가 서구 사회를 떠났으나 기독교가 아시아나 아프리카, 남미에서도 여전히 소수 종교라는 것. 필리핀과 한국, 싱가포르와 인도네시아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대부분 아시아 국가의 기독교 인구는 1%를 밑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탈현대주의나 종교다원주의와 어우러져 세계 지성계의 흐름이 반기독교적으로 가는 반면에 불교, 힌두교 및 이슬람 등 전통종교들은 급부상하고 있다는 게 신학자들의 위기의식을 더한다. 게다가 뉴욕 세계무역센터를 대상으로 한 9·11 사태 이후 아시아 대다수 지역에서의 종교 환경과 국제정치 환경이 기독교에 비우호적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교회는 어떤가. 서구 신학계에서 한국적 신학, 한국적 성경읽기의 대가로 알려진 이 교수의 진단에 따르면 그동안 한국 교회는 빠르게 성장하면서 동시에 교회를 붕괴시키는 자해행위도 동시에 진행해 왔다. 교단의 분열이나 교회 지도자의 비윤리적인 행태, 교회 세습 문제 등이 그 사례다.

이 교수는 특히 한국인이 기독교에 반감을 가지게 된 가장 큰 원인은 한국 교회가 종교적이지 않은 데 있다고 말한다. 종교인이라면 진리의 체득에 있어 치열함, 자기를 부정하는 모습, 사랑의 실천, 세속의 재물과 권세와 명예에 초연한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데 보통사람보다 나을 게 없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이 교수는 ▲교회 지도자와 성도들의 윤리적 평가가 그리 좋지 않은 점 ▲종교적인 깊이가 없음 ▲한국 교회에 뿌리박힌 서구적 모습 ▲물량주의, 성장주의, 경쟁 논리 및 상업주의를 축으로 하는 자본주의적 가치관 ▲배타성과 패권주의 등도 한국인들이 교회에 등을 돌리는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이런 상황에서 아시아, 특히 한국에서 새롭게 자리매김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이 교수는 기독교가 한국(아시아) 종교로 자리잡으려면, 성경의 세계를 깨닫는 깊이와 영적인 능력이 통전적으로 어우러지는 것과 동시에 한민족의 종교적 심성을 심층적으로 고려, 한민족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교수는 무엇보다 “한국 교회가 한민족의 삶에 뿌리내리려면 기독교의 원형을 회복해야 한다”며 “한국 교회 안에 하나님이 살아있고, 예수 정신이 살아있고, 민족의 소망과 나아갈 길이 있다면 하나님은 한국 교회를 사용하실 것”이라고 강조했다.(김종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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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대 최고의 미술 이야기꾼'으로 꼽히는 이주헌씨가  러시아 관련서를 쓰고 있다는 소식은 지난 8월에 접한 바 있다: "요즘에는 러시아 미술관을 소개하는 책을 집풀중이다. 트레챠코프 미술관과 에르미타주 등 러시아가 자랑하는 미술관들과 그 소장품을 소개하는 책이 조만간 이씨의 책목록에 이름을 올릴 예정이다."('한겨레' 08. 11) 그 '예정'이 이제 '완료형'이 되었다. 그의 책 <눈과 피의 나라 러시아 미술>(학고재, 2006)이 출간된 것이다. 한해를 정리하는 의미에서 속으로 '올해의 책들'을 꼽고 있던 차였는데, 때마침 러시아 관련서를 집어넣을 수 있게 되어 반갑다. 짐작에 이 책은 러시아 미술에 관한 가장 자세하고 친절한 '매뉴얼'이 될 것이다(개인적으론 재작년에 둘러본 러시아 미술관들을 다시 되새김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일단 발빠른 리뷰기사를 옮겨놓는다.

한겨레(06. 12. 22) 러시아미술은 ‘혁명문학’이다

러시아는 문학의 나라, 음악의 나라, 혁명의 나라다. 1917년 일어난 10월 혁명은 20세기 역사의 향배를 결정지었다. 알렉산드르 푸슈킨에서부터 표트르 도스토예프스키와 레프 톨스토이를 거쳐 막심 고리키에 이르기까지 러시아 문학은 세계 문학의 젖줄이고 우리에게도 친숙하기 그지없다. 페테르 차이코프스키와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는 우리 음악처럼 가깝다. 심지어는 스탈린 시대의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도 낯설지 않다.

그렇다면 러시아 미술은 어떤가? 바실리 칸딘스키와 마르크 샤갈이 있지만 이들은 서유럽에서 활동한 화가들이다. 러시아 땅에서 러시아 민중과 호흡을 함께한 러시아 화가들은 우리에게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러시아는 우리가 알지 못할 뿐 거대한 미술의 보고다. 미술평론가 이주헌씨가 쓴 <눈과 피의 나라 러시아 미술>은 동토 깊숙이 숨어 한번도 전모를 내보이지 않던 러시아 미술을 지면에 초대해 그들의 장대한 아름다움에 흠뻑 젖어들게 해주는 책이다.(*아래 사진은 페테르부르크의 '러시아미술관'. 동상은 시인 푸슈킨의 동상이다)

여러 권의 전작에서 이미 미술 안내자로서 역량을 보여준 바 있는 지은이는 러시아의 정치·문화 쌍두마차인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그로 독자의 시선을 끌고 들어간다. 두 도시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과 러시아 미술관, 에르미타슈(*에르미타주) 박물관과 푸슈킨 박물관으로 하여 미술의 도시라는 별칭을 얻고도 남을 만한 곳이다. 에르미타슈와 푸슈킨 박물관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성모자>에서부터 앙리 마티스의 <춤>에 이르기까지 서구 미술사의 걸작 가운데 상당수를 품고 있다. 러시아 회화만이 지닌 고유한 정취를 느끼려면 트레티야코프 미술관과 러시아 미술관으로 가야 한다. 지은이의 눈길이 오래 머무는 곳도 이 두 미술관이다.

지은이의 설명을 빌리면 러시아 회화는 문학적 특성이 강하다. 그림의 형식 못지않게 내용을 중요하게 다룬다는 뜻이다. 주제의식이 뚜렷하고 이야기가 화면 전체를 가로지른다. 러시아 회화의 이런 특징을 잘 보여주는 유파가 1871년 결성돼 50년이나 지속된 ‘이동파’다. 이동파라는 이름은 참여 화가들이 수도를 떠나 지방 도시를 돌며 전시회를 연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변방의 민중에게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려 한 이 화가들의 노력은 현실에 눈을 돌려 사회를 변혁하려는 의지의 소산이기도 했다. 이들의 의지는 역사화라는 장르에서 탐스런 결실을 얻었는데, 그 미적 성취를 보여주는 한 경우가 바실리 수리코프(1848~1916)의 작품 <대귀족 부인 모로조바>(1887)다.



이 작품의 역사적 배경을 이루는 것은 17세기 러시아 정교의 대분열이다. 당시 총대주교였던 니콘이 교권을 확장하려 러시아 교회 전례를 뒤바꾸자 전통을 중시하는 성직자와 평신도가 반기를 들었다. 교권 확장은 러시아 정교의 우두머리인 차르의 중압집권적 권력을 강화하는 일이기도 했다. 반대파에는 차르의 권력 강화에 반대하는 귀족 계급이 포함돼 있었다. 차르 중심의 신교도와 귀족 중심의 구교도는 끝까지 맞섰다. 차르는 결국 반대파를 파문하고 주동자를 화형에 처했다. 2만명의 구교도가 분신자살로 격렬히 저항했다. 구교도의 반차르 저항 정신은 이후 수백년 동안 도도히 흐를 반역의 저류가 됐다.

<대귀족 부인 모로조바>는 이 반대파의 저항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준다. 주인공 모로조바는 차르에 맞서다 수도원에 유폐돼 삶을 마감한 역사적 인물이다. “화가는 이 순교자를 세상의 어떤 징벌로도 제어할 수 없는 강력한 카리스마의 소유자로 묘사했다. 하늘을 향해 치켜뜬 그의 눈은 자신의 행동이 신의 뜻에 따른 것이라는 확신으로 가득하다.” 쇠사슬에 묶인 이 귀족 여성 주위에서 민중들이 눈물을 흘린다. 구교도와 민중이 내적으로 결속돼 있음을 보여주는 이 역사화는 당대 현실을 향한 정치적 발언임이 분명하다.



수리코프와 함께 이동파를 대표했던 화가 일랴 레핀(1844~1930)은 더 적극적으로 현실을 역사화 속에 담았다. 그의 작품 <어느 선동가의 체포>(1880~1889)는 1877년 열린 ‘193인 재판’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귀족층·지주층의 자식들이 농촌으로 들어가 인민 봉기와 차르 전복을 기도했던 나로드니키(인민주의자) 운동은 러시아 혁명사의 중대한 전환점이다. 1970년대에 정점에 이른 이들의 활동은 대대적 체포와 ‘193인 재판’으로 궤멸적 타격을 입었고, 이후 혁명운동은 지하로 숨어들었다. 레핀의 그림은 이 시기에 체포된 젊은 혁명가를 주인공으로 삼았다. “상기된 얼굴의 운동가는 결코 비굴하게 선처를 호소하거나 절망하여 좌절할 모습이 아니다. 자신의 신념이 옳다고 확신하는 이상 언젠가 이 수고와 희생의 결실을 보릭라는 믿음을 잃지 않고 있다.” 열정과 믿음으로 부릅 뜬 눈은 200년 전 차르에 대항했던 구교도 여성 귀족의 눈과 겹친다. 그렇게 러시아 미술에는 러시아 혁명의 역사가 흐른다.(고명섭 기자)

06. 12. 22.

 

 

 

 

P.S. 러시아 미술사에 관한 참고자료로는 조토프의 <러시아미술사>(동문선, 1996)가 있다. '그림책'이 아니어서 개인적으로 그냥 소장도서로 분류해놓고 있다. 현대미술을 전반적으로 다룬 책으론 캐밀러 그레이의 <위대한 실험: 러시아미술 1963-1922>(시공사, 2001)이 유익하며 유일하다. <눈과 피의 나라 러시아 미술>을 읽으면서 참조할 만하다. 원서는 1962년에 나왔으며 영어로 된 저작으론 '고전'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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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2-22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러시아 미술은 거의 처음 접합니다.
오.. 아름답군요.
멋진 러시아 그림을 감상하게 해주신
로쟈님께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추천!!


로쟈 2006-12-22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감사받을 일은 아니구요, 저자의 노고와 발품이 고마운 것이지요...

Runa 2006-12-22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한겨레에서 본 기산데 또 깔끔하게 퍼갈 수 있게 올려놓으셨군요.^^
고전문학전집이 있는 집이 다 그렇듯이 제게 문학은 톨스토이나 도스토에프스키로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고교시절 고리키의 영향도 지대했지만, 재수하고 나서 체르니셰프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를 보며 조소와 부끄러움이 공존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시대로부터 이제 나는 너무나 멀어져 있다는 자각 때문이었지요.
러시아 음악은 너무 좋아하는데 레핀 말곤 러시아 미술에 대핸 너무 모르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문화는 미국이 아님 유럽에 너무 경도돼 있어요.
뜬금없지만, 로쟈님 같은 분이 들뢰즈가 자주 언급하는 '체스토프' 같은 이의 책을 번역하심 좋으련만.. 그냥 해 본 소린 거 아시죠?

로쟈 2006-12-23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미지가 자꾸 다운돼서 하나 교체했습니다. 들뢰즈가 자주 언급하는 철학자는 '셰스토프'이고 국내에 번역서가 있습니다('비극의 철학' 등). 제가 갖고 있는 선집도 두 권 분량 정도이고, 물론 어디서 지원해준다면 번역을 궁리해볼 수도 있습니다.^^

Runa 2006-12-24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 그래도 발음 여쭤볼까 했는데, 역시 틀렸군요. 번역서가 있는지는 몰랐는데, 알려주셔서 감사하고, 번역도 생각이 있다시니 반갑군요. 명성을 더 쌓아서 지원받길 기다리겠슴다.^^

로쟈 2006-12-24 1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에 지적한 적이 있는데, <차이와 반복> 국역본에 잘못 표기돼 있습니다. 그게 불어로는 헷갈리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로선, 보다 적합한 다른 분이 먼저 번역해주시길 기다리겠습니다.^^
 

최근에 읽은 러시아 관련 외신들 대부분이 부정적이거나 불길한 내용을 담고 있다. 러시아가 자원강국으로 부상하면서 새로운 '제국'의 면모를 되찾아가는 이면에서 푸틴을 권력의 정점으로 한 구 KGB 파벌의 득세와 새로운 지배층으로 등장한 관료-과두부유층 집단(올리가르히)의 전횡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러시아에서 사업을 하는 한 친구의 말을 빌면, 러시아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시절을 포함하여 현재까지도 여전히 '귀족사회'인 모양이다.

자본주의의 '약한 고리'로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필연은 동시대 러시아의 여러 징후들 속에서도 감지된다. 모스크바의 오스토젠카 구역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새로운(?) '계급전쟁'(이미 '계급투쟁'이 아니다!)은 한갓 에피소드일까(우리의 '철거민 전쟁'과도 무관하지 않은 에피소드이다. 차이라면 러시아에서는 법적인 권리조차도 보호받지 못한다는 것). 외신을 요약하고 있는 국내기사와 인터내셔널헤럴드트리뷴의 원기사를 옮겨놓는다.

경향신문(06. 12. 20) 러시아 모스크바 원주민-신흥갑부 ‘계급전쟁’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의 크렘린궁 인근 오스토젠카구에는 ‘공산당 선언’을 쓴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동상이 서 있다. 요즘 이 동상 주변으로 이곳 주민들이 몰려들고 있다. 시당국이 부자들을 위해 재개발을 추진하는 바람에 이곳에서 나고 자란 원주민들이 이주 보따리를 싸야 할 위기에 몰렸기 때문이다. 15년전만 해도 공산주의의 중심이었던 모스크바의 도심에서 원주민과 신흥 부자들 사이에 새로운 계급갈등이 빚어지고 있는 것이다.



모스크바 서쪽지역 오스토젠카구 히코프로 3가에 사는 주민들은 지난 9월부터 엥겔스 동상 앞에서 항의 집회를 열고 있다. 지난 5월 시 당국이 부유층들을 위한 최고급 주거지역을 짓기 위해 낡은 아파트를 철거하겠다고 발표한 데 따른 것이다. 당국이 모스크바 남쪽 외곽 부토보에 이주용 아파트를 제공하겠다고 밝혔지만 주민 반발을 무마하지 못했다. 부토보가 모스크바에서 지하철로 1시간이나 떨어진 데다 1930년대 말 스탈린 시절 1천만명의 유대인들과 한인들이 학살돼 묻힌 곳이기 때문이다.

오스토젠카는 모스크바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곳으로 예술가와 지식인들의 주거지였다. 지금 이곳에는 국제유가 상승으로 떼돈을 번 신흥 갑부들의 자금과 낡고 우중충한 건물을 대신해 최신식 건물을 들이겠다는 시 당국의 의지가 맞물려 수백만달러짜리 펜트하우스들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 오스토젠카 외에도 트베르스카야 등 도시 서쪽지역에는 ‘골든 마일’ 재개발 사업이 진행중이다.



신흥 갑부들을 위한 아파트는 철통 보안과 각종 편의시설을 자랑한다. 아파트값은 ㎡당 1만달러(평당 약 3천만원)가 넘어서는데도 없어서 못팔 정도다. 부동산업자인 게오르기 자구로프는 “돈과 권력이 있는 인물들은 모두 이 지역 부동산을 매입하고 있다”며 “신흥 부자들에게 1백만~2백만달러는 돈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러시아 부자들에게 ‘사적인 것’이 ‘사회적인 것’에 절대 우위를 차지한다.

재개발 붐은 러시아 부동산업자들에게 큰 돈벌이 기회가 되고 있다. 부동산 개발회사 RGI 인터내셔널은 이달초 런던 증권거래소에 상장했다. 미국계 투자은행 모건스탠리도 지난 10월 RGI인터내셔널 주식을 대거 사들였다. 그러나 이곳 주민들은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공포감에 시달린다. 오스토젠카에 사는 주민들은 당국과 개발업자들로부터 집을 비우라는 유·무형의 압력을 받고 있다.

최근 러시아 경제신문 코메르산트가 연방 반독점 감독원이 킬코프 페레록 3가 개발 사업을 불법으로 간주하고 있다고 폭로했지만 개발은 중단되지 않았다. 모스크바시 관계자는 오스토젠카의 항의는 ‘지역 이기주의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모스크바 소시민들의 상대적 박탈감은 커가고 있으며 주민들과 개발업자·시 당국 사이에 갈등이 커지면서 각종 범죄도 발생하고 있다. 유명 성형외과 의사가 청부살인업자에 의해 살해되기도 했다.

 

 

 



인터내셔널헤럴드트리뷴은 19일 이같은 오스토젠카의 분위기를 안톤 체호프의 소설 ‘벚꽃동산’을 떠올리게 한다고 보도했다(*소설이 아니라 드라마이다. 원기사에도 '소설'이란 언급은 없다. 기사에서 언급되고 있는 소설은 불가코프의 <거장과 마르가리타>이다. 기자들이 점점 용감해지고 있다). 이 소설은 신분제 파괴 이후 제정 러시아가 맞은 혼란한 사회상을 그렸다. 사회적 혼란을 겪는 오늘의 러시아에 부동산 문제가 계급간 갈등을 증폭시키고 있다는 설명이다.(김정선 기자) *아래는 모스크바의 유명한 구세주 성당과 모스크바강을 끼고 있는 오스토젠카 구역의 야경.

The gold domes of Christ the Savior Cathedral were built in the 19th century, destroyed by Stalin and rebuilt in the 1990s. ( Misha Japaridz/The Associated Press)

A class struggle on Moscow's Golden Mile

Locals fight a luxury housing project fueled by oil money

By Sophia Kishkovsky

MOSCOW: The statue of Friedrich Engels that graces one of central Moscow's most prestigious neighborhoods has not been of much use to any but pigeons in recent years. But Engels, co-author of "The Communist Manifesto," was a handy rallying point not long ago for some residents of that neighborhood, Ostozhenka, who were protesting its transformation into a hotbed of luxury housing thanks to an oil-fueled real estate boom.

"Leave Us Alone," read banners unfurled by the protesters in September. That cry is also the name of their movement, spurred by the latest luxury housing project, slated for the site of an apartment building in which some of them still live, at Khilkov Pereulok 3.

The gold domes of Christ the Savior Cathedral, built in the 19th century, destroyed by Stalin and rebuilt in the 1990s just as the district began to take off, overlook the area. Ostozhenka, once home to many artists and intellectuals, is now known in the parlance of real estate agents and their wealthy clients as the Golden Mile. Its winding lanes are now home to modern multimillion-dollar penthouses, Ferraris, gourmet restaurants and bizarre crimes: Last year a celebrity plastic surgeon was stabbed by roller skaters, and later died, in what appeared to be a contract killing.

The neighborhood's rise is only one of many morality tales of money, power and real estate now playing out across post-Soviet Russia. In recent months, incidents included an elderly Moscow couple who had been evicted from their home and were camping in the yard of their old apartment building, which was slated for demolition to make way for new construction, and villagers being pushed from their homes on the edge of Moscow to make way for high-rises.

In both cases, residents were infuriated by orders to move to apartments in Yuzhnoye Butovo, a district that is near a former Stalinist killing field and an hour from central Moscow by subway. They are still fighting the orders. The fight continues in Ostozhenka as well. "The Golden Mile is the most brilliant business project in post-Soviet Russia," Denis Litoshik said in November at one of the neighborhood's upscale coffee shops.

Litoshik, 27, has a personal stake in its transformation: He lived, until recently, at Khilkov Pereulok 3, and he is a leader of Leave Us Alone. As a journalist for the business newspaper Vedomosti, he is awed by what he says is a reported price tag on apartments going up next door to his former home: $33,000 a square meter, or $3,000 a square foot. "They're not selling drugs, but they're making much more money," he said of developers who have converged on Ostozhenka. But a few buildings, some ramshackle, some solidly middle class, hinder a complete makeover.

One of those is Khilkov Pereulok 3. Litoshik lived there with his wife and their baby until the city authorities issued a decree in May declaring the building subject to demolition to make way for new construction, even though the 19th-century building was overhauled in the 1960s and renovated again in the past few years.

Litoshik said he and other residents had been pressured by officials and developers to leave. Fearing that the building could be burned down, as sometimes happens across Russia when new construction has been slated, he moved away and began to fight. This month, the business daily Kommersant reported that the federal anti- monopoly watchdog had deemed the plans for Khilkov Pereulok 3 illegal, but that ruling could yet be challenged and may not halt the development. Sergei Tsoi, press secretary for the mayor, Yuri Luzhkov, was quoted by Kommersant earlier this year as calling the Ostozhenka protesters' actions "egoism."

Ostozhenka stood virtually untouched until the late 1990s, frozen in time by a Soviet decree that called for the construction of a vast Lenin-topped Palace of Soviets in place of the razed Christ the Savior Cathedral. It was never built, but the plan was never revoked; a swimming pool was instead built on the site. Ostozhenka figured in Mikhail Bulgakov's surrealist novel, "The Master and Margarita," which gave the Russian language its ultimate real estate catch phrase: "The housing problem has corrupted them."

Bulgakov depicted the early Soviet years, when aristocratic abodes were forcibly transformed into communal apartments for the masses, with shared bathrooms, kitchens and secrets. Now new money is squeezing out the remaining kommunalki, as the communal apartments were called.

Aleksandr Khosenkov, 56, lives in a friend's communal flat. "I live here, but all the streets have been renamed — I can't find the houses," he said. "It doesn't matter if a person has a Mercedes. Their soul should matter, not their car."

Georgy Dzagurov, general director of Penny Lane Realty, offers properties in Ostozhenka. "Practically anyone who is powerful has bought there," he said, adding that "$1 million or $2 million is nothing for them."

In October, Morgan Stanley announced its purchase of a stake in RGI International, owned by Boris Kuzinez, a developer whose ultramodern buildings are credited with transforming Ostozhenka into Billionaires' Row. RGI's Web site, posted in time for its London Stock Exchange initial public offering earlier this month, lists Khilkov 3 among its projects.

While describing his clients only as "mostly businessmen, bankers, in oil and metals," Kuzinez acknowledged an oligarch's need for the right milieu. "It's hard for oligarchs to live in a regular building," he said.

Maksim, a banker, though not an oligarch, declined to give his last name but agreed to show his sleek two-bedroom apartment in an a Kuzinez development. "There are guards everywhere," he said. "Filtered water, central air-conditioning, good parking. The main thing is it's homogenous. This is a plus."

Litoshik, wearied by battle, is accepting a buyout of $800,000 for his apartment, or more than $10,000 per square meter. A victory, he said, because in Russia a fair price is almost miraculous. A loss, he said, because "we never wanted to sell our apartment."

It is a story that has been familiar to generations of Russians, both before and after the Soviet era. "Khilkov 3 is 'The Cherry Orchard 2,'" Litoshik said, referring to Chekhov's play about — what else? — money, real estate and the squeezing out of one class by another.(06. 12. 18)

06. 12.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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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권의 책을 쓰거나 번역한" '비정규직' 철학박사 강유원의 신간이 출간됐다. 마르크스의 <경제학-철학 수고>(이론과실천, 2006)이 그것이다. 흔히 '경철수고'라고 불리던 책인데, 지난 1987년에 같은 출판사에서 김태경씨의 번역으로 출간됐던 책이다. 그때 분량은 151쪽이었는데, 이번에 나온 번역본은 229쪽이다. 목차로 봐서는 후주의 분량이 많아진 탓인지 책의 판형 때문인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아직 책을 직접 보지 못했다).

이 '경철수고'와 관련하여 내가 갖고 있는 책은 국역본이 아니라 펭귄판 <초기 저작선(Early Writngs)>(1992)인데, 이 영역본의 분량으론 120쪽 가량이다. 책은 재작년에 모스크바대학의 구내 헌책방에서 50루블(당시 환율로 2,000원)에 구한 것이다. 국역본과 영역본의 표지를 나란히 놓고 보니까 마르크스의 사진이 비교될 수밖에 없는데, <공산당선언>이 발표되기도 전인 1844년에 나온 '경철수고' 자체가 청년 마르크스(1818-1883)의 저작인 만큼 영역본의 사진이 보다 어울려 보인다(그러니까 마르크스가 만 26세에 쓴 글이다).

 

 

 

 

짐작에 1841년에 쓴 박사학위논문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그린비, 2001)를 제외하면 가장 젊은 시절 마르크스의 단행본 저작이겠다. 참고로, 김태경 번역본은 절판되었고, 박종철출판사에서 나온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1>(1997)에는 '1844년의 경제학 철학 초고'가 발췌돼 실려 있다.   

신간의 출간과 관련하여 '강유원'을 검색해보다가 발견한 글은 재작년 교수신문에 실렸던 한 칼럼이다('독서유감'이란 제하에 당시 대학강사이던 강유원의 연재칼럼이 게재된 바 있다). '소설읽기의 괴로움'이란 제목이 달려 있으니 눈에 띌 수밖에 없는데 이 깐깐한 서평가에게 '소설읽기의 괴로움'이란 '철학읽기의 즐거움'이 갖는 이면이 아닐까란 생각도 들었다. 그의 '서평들'을 읽는 데 참고가 될 듯하여 옮겨놓도록 한다. 읽고나서 남는 게 없기 때문에 소설은 읽을 게 못된다, 그나마 보르헤스의 문학론 정도는 정보량이 많아서 읽을 만하다, 라는 게 대략적인 요지이다.  

교수신문(04. 04. 09) 소설읽기의 괴로움

솔직히 말해서 나는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끝까지 읽지 못했다. 그의 다른 대하소설들 ‘아리랑’이나 ‘한강’도 마찬가지다. 대하소설, 견뎌내기 힘들다. 아무리 얇아도 소설 읽긴 너무 힘들다.

소설 읽기가 힘든 이유는 첫째, 소설은 논리적으로 전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종잡을 수가 없다. 대강이라도 앞을 예측하지 못하는 건 불안만 안겨줄 뿐이다. 영화를 보러 갈 때도 미리 스토리를 다 알아야 하며, 유념해서 봐야 할 장면들을 챙겨서 가는 나로서는 소설의 이러한 돌발성을 감당하는 게 상당히 힘든 일이다.

두 번째로 소설은 몇몇을 제외하고는 읽고나도 남는 게 없다는 것이다. 진한 감동을 남기지 않느냐고 반문할 사람도 있겠지만, 글쎄 그렇게 남은 감동이 도대체 내 행동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하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별로라는 대답이 저절로 나온다. 오히려 내가 소설을 읽고나서 감동을 느끼는 것은 그 소설에 아주 풍부한 정보가 담겨 있을 때뿐이다.

그런 점에서 이른바 판타지 문학은 전혀 아니올시다다. 이것만은 꼭 읽어야겠다 싶어서 톨킨의 ‘반지의 제왕’을 붙잡고 낑낑대다가 결국 손에서 놓고 말았다. 뭔 책인들 제대로 읽었겠는가마는, 어쨌든 판타지 문학은 남는 거 없고 시간낭비에 작가의 상상력을 따라가지도 못하는 내 빈곤함 때문에 늘 실패로 돌아간다.

보르헤스는 톨킨과 마찬가지로 한참 '유행'할 당시, 한번 읽어보기나 해야겠다 싶어서 잡은 것이었다. 그런데 톨킨의 책을 내팽개쳤다면 보르헤스는 그러지 않았다. 보르헤스가 뭐 대단한 소설가여서가 아니라 그의 소설들은 짧았기 때문이다. 내가 보르헤스를 그 뒤로 계속 읽은 것은 그 소설들의 짧음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곧바로 그의 소설들이 재미없다는 것을 느꼈고, ‘허구들’(녹진 刊), ‘불한당들의 세계사’(민음사 刊), ‘셰익스피어의 기억’(민음사 刊)만을 읽고 말았다. 역시 소설은 소설인 것이다.

나에게는 보르헤스가 소설가로서가 아니라 문학과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으로서 매력이 있다. 그래서 그의 소설 보다는 문학론, 책 이야기에 관한 책은 반드시 사서 읽게 된다. 그의 이런 책들은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정보가 풍부한 책들인 셈이다.

‘칠일 밤’에 들어있는 이야기도 예외는 아니다. 여기에서 그가 이야기하는 일곱 개의 주제들 중, '신곡', '천 하룻밤의 이야기', '카발라' 등은 오랫동안 날 매혹시켜온 주제들이다. 소설이 아니니 앞에서부터 읽지 않아도 그만이고, 그 주제들만을 골라서 읽어도 무방하다. 그러는 가운데 만나게 되는 몇몇 구절들은 나를 더없이 흥분시킨다.

이를테면 이런 것, "우선 헤로도토스의 ‘역사’ 9권에서 머나먼 이집트의 존재에 대해 밝힌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여기서 내가 '머나먼'이라고 말한 것은 공간은 시간에 의해 측정되고, 여행은 그지없이 위험한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인들에게 이집트라는 세계는 가장 오래되고 위대한 세상이었고, 그들은 이집트를 미스터리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공간은 시간에 의해 측정된다"는 말에서 나는 '현대의 시공간 압축'을 떠올리면서 그 말을 음미하며, 선진국 이집트를 동경했던 플라톤을 생각한다.

또 이런 것. "그러나 나는 그렇게 믿습니다. 적어도 괴테의 나선형식 진보를 믿습니다." 여기서 나는 괴테와 헤겔이 동시대인이었으며, 헤겔의 변증법적 전개가 나선형이었음을 상기하면서, 또는 칼 뢰비트의 ‘헤겔에서 니체에로’의 내용들을 이어 붙이면서 텍스트를 즐긴다. 어디선가 보르헤스가 말했듯이 책들끼리의 대화가 내 머리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내가 과독한 탓인지 내게 이런 즐거움을 주는 한국 작가는 아주 드물다. 당대의 소설가라는 사람들이 신문에 덜 익은 정견이나 발표하고, 무슨 정당에 가서 공천 심사나 하는 건 본 적이 있다. 이제 그런 거 그만하고, 일단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가의 각오’에 들어있는 '소설가가 작품의 전면으로 나설 때'를 읽은 뒤, 방에 들어  앉아서 공부들이나 좀 했으면 싶다.(강유원 / 동국대 철학)

06. 12. 21.

 

 

 


P.S. "무슨 정당에 가서 공천 심사나 하는" 작가가 알다시피 작가들의 공부방을 마련해놓고 강유원 이상으로 '교양'을 강조해마지 않는 소설가 이모씨라는 건 아이러니컬하다. 여하튼 이 칼럼은 '서평가' 강유원에 대해서 많은 걸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기에 유용하다. 거기에 덧붙여 읽어볼 만한 것은 서평집 <주제>(뿌리와이파리, 2005)의 서문이다(이 책은 얼마전 한겨레 고명섭 기자의 <담론의 발견>(한길사, 2006)과 함께 한국출판평론상을 수상했다. '출판평론'이란 이 경우에 '서평집'을 말한다).  

"내가 보기에 세상에는 '책'이 몇 권 있다. 아니 다섯 권 있다. <길가메시 서사시>, <오디세이아>와 <오이디푸스 왕>, <신곡>과 <정신현상학>. 이 책들 중에서 <정신현상학>을 제외하고는 원어로 읽어보지 못하였다. 죽기 전에 진심으로 기원하여, 다음 생에서 다시 사람으로 태어난다면 두 권 정도 더 읽어볼 수 있을 듯하다. 다시 또 죽은 뒤 사람으로 태어난다면 나머지 두 권을 읽어보겠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다."

보르헤스의 문학을 평하여 '진지한 농담'이라고도 하지만 이런 '소망'이야말로 진지한 농담의 전형 아닌가? 그의 분류를 그대로 적용하자면, '강유원 서평집'이란 부제를 달고 '니 주제를 알라!'란 표어를 내세운 이 서평집에서 그가 다루고 있는 책들은 <신곡>을 제외하면 모두 '책 아닌 것들'이겠다. 그러니 "여기에 묶인 글들은 주석이나 해설이나 베낀 것에 대한 하찮은 푸념일 뿐이요, 주석도 해설도 베낀 것도 아닌 것들에 대한 비웃음이다."란 자평은 액면 그대로 접수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 푸념과 비웃음에 또 '출판평론상'이란 게 주어졌으니 이 또한 고난도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고. 초급 아이러니스트인 내가 명함도 못내밀한 이유가 다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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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2-21 15:48   좋아요 0 | URL
학창시절 어느 땐가 읽은,
소설 읽는 것은 "일종의 시간낭비"라는 쇼펜하우어의 언명에 세뇌되어
소설은 좀체 읽지않게 되더군요.
그래도 학생 때는 세계문학전집은 공부삼아 일견했었지요.
학창시절 읽었던 소설 중 가장 인상깊었던 소설이
'카라마죠프가의 형제들'이었답니다. 깊이있는 소설이지요.
당시에는 낑낑대며 어렵사리, 그렇지만 흥미진진하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현재는 외국 소설은 두어 권 서가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의 '하드리아누스의 회상록'
보르헤스의 '모래의 책'
아니 에르노의 소설 두 권
강유원 선생의 소설에 관한 관점에 얼마간 공감합니다.


로쟈 2006-12-21 16:10   좋아요 0 | URL
소설을 읽는 게 시간낭비라는 데에는 저도 동의합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쇼펜하우어적인 인생론을 본따서 인생이란 것 자체가 시간낭비일 터에... 그게 아니라면, 이유를 갖다붙일 게 아니라 그냥 "나는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다"로 충분하지요(저는 만화를 좋아하지 않고 또 드라마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이죠)...

비로그인 2006-12-21 17:27   좋아요 0 | URL
로쟈님의 '소설 읽기의 즐거움' 의 반론을 기대해봅니다....
덧붙여 소펜하우어는 괴테의 소설에는 환장했던 사람이지요. ㅋㅋ

로쟈 2006-12-21 17:33   좋아요 0 | URL
반론이랄 게 없지요. 취향에 대한 자기고백에 불과한 거 아닌가요. <태백산맥>이 읽기 힘들다, 고로 <태백산맥>은 읽을 필요가 없는 소설이다, 이게 논리적인 결론은 아니니까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정신현상학>은 읽기/견뎌내기 힘든 책입니다. 문학이니 철학이니 시간낭비하지 말고 '유명학원' 혹은 부동산 '목'이나 알아보는 게 유익하고 실용적이겠죠...

sommer 2006-12-21 17:32   좋아요 0 | URL
취향을 곧장 위계로까지 비약시키는 것...진지함이 그 자신을 견디는 허약함이 아닌지 생각이 드네요. '상징계의 대진표'를 만들어 가면서...

닉네임을뭐라하지 2006-12-21 18:01   좋아요 0 | URL
간혹 강유원 홈페이지 가서도 느꼈던 거지만, 소설 독자로서 강유원은 확실히 별로예요. 물론, 서평가나 강연자로서 강유원은 좋구요.ㅎ
아, 새로나온 책 페이지 수가 늘어난 건, 글자 크기와 행간의 간격 때문이 아닌가 싶네요. 예전 건 한 페이지에 31줄 이번 건 21줄. 살까말까 하다가 번역 상의 미묘한 차이에 흥미를 느껴 사긴 했는데, 에, 독일어도 좀 알았으면 좋을 텐데 말이죠.

토마스 2006-12-21 23:15   좋아요 0 | URL
강유원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문득 들뢰즈는 왜 그토록 소설과 영화에 미쳐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드네요. 들뢰즈가 중시하는 생성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소설의 예측 불허성이야말로 중요한 것이 되겠지요. 그 점에서 보자면, 강유원씨는 생성의 사유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위의 글로만 알 수 없는 단견이기는 합니다만 비트겐슈타인도 영화를 즐겨보면서도 영화에 대한 코멘트는 거의 하지 않았다고 하지요. 니체와 들뢰즈처럼 다양한 문학(혹은 영화)을 흥미진진하게 읽어가는 철학자들의 매력이 상대적으로 느껴지는 순간입니다.

yoonta 2006-12-22 01:22   좋아요 0 | URL
강유원이라는 분의 그 솔직담백?한 성향을 처음에는 가식적이지 않고 위선적이지 않은 학자의 모습으로 봤는데 가만히 살펴보니 그것은 지나친 자기 방어본능에 의한 독선에 가깝더군요. 로쟈님 말씀대로 소설에 대한 자기 취향일 뿐인 이야기를 소설에 대한 일반론으로 확대하여 이야기하는 것도 일종의 자기 합리화의 방식중 하나인 것으로 보이는군요. 한때 강유원홈피에 들락거리다가 사고쳐서 강제퇴출당한적이 있는데 그때의 경험을 돌이켜생각해보니 그분의 성향이랄까 스타일에 대해서 쪼금이나마 이해할수있게 되더군뇨..-_-;;

로쟈 2006-12-22 17:43   좋아요 0 | URL
연랑님/ 그렇군요. 역시나 비밀은 행간에 숨어 있나 봅니다...
모모님/ 저 또한 소설/예술과 근친적인 철학에 더 매력을 느낍니다...
yoonta님/ '쓰라린' 기억이 있으시군요.^^

Runa 2006-12-22 22:20   좋아요 0 | URL
문학을 사랑하는 철학도로서 뒤늦게 사족 한마디 붙여 봅니다.^^
제 전공도 프랑스쪽이고 원래 문학철학에 관심있어 성향대로 전공도 찾아가는 법인가 싶다가도 시대적인 영향, 이런 게 또 개인을 넘어서는 거 같거든요.
전 지방에 있어 강유원씨랑 무관하지만, 그 연배의 선생들의 일반적인 경향 아닐까 합니다. 더구나 독일철학 전공잔 더욱 그렇지요(물론 아도르노나 벤야민 공부하는 분들은 다르겠죠).평소에도 인간적으론 좋아도 정서적 결이 다르다 느끼죠. 문학은 물론 영화까지..
일화 하나, 제가 존경하는 선생님과 거의 10년 전에 <시네마>1을 본 적이 있는데 그때 책에 나온 영화들 외국에서 비됴 주문해 편집복사해서 보여주고 열성적으로 들뢰즈 영화철학에 입문하게 해 주셨죠. 근데 선생님, 영화 보는 시간 너무 아깝다고 맨날 FF로 보시고,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같은 책 넘 지겹고 길다고 핵심 요약 정리 같은 거 없냐고 농담하시곤 했죠.^^
여러분껜 어떻게 들려도 문학과 영화, 이런 거 철학하는 데 아주 중요하다 생각하시는 선생님이셨죠. 근데 철학동네엔 이런 선생님이 그리 많진 않답니다. 논리성에 대한 일면적인 맹신이기도 하지만, 그러한 맹신을 요구했던 70, 80년대의 비합리적인 사회상도 한 몫 했겠죠. 선배 철학도들은 아마도 철학이 논리와 합리를 담보한단 자부심으로 그 어려운 책과 싸우며 어두운 시대를 비켜가거나 이겨갔을 겁니다. 그때 문학과 철학이 소통하긴 어려웠겠지요.
전 다른 세대라 예전엔 답답했지만 이젠 이해해봅니다. 그래서 소위 전통철학(플라톤, 칸트, 헤겔 등) 하는 분들이 이런 전통(?)의 자장에 있을 수밖에 없는 거겠구요. 강유원씨도 그런 분위기의 철학적 세례를 받은 세대가 아닐까 짐작합니다.
하지만, 최근 들뢰즈는 물론 여러 프랑스 철학자들이 소개되고, 유행이니 뭐니 하지만 철학동네가 위기 속에서도 풍성해진다고 봅니다. 블랑쇼 같은 이들도 조명되고 로쟈님 같은 분도 있고(^^;), 이제 문학철학이 한 자리를 만들어 가리라 예상해 보는 거죠.

yoonta 2006-12-23 01:14   좋아요 0 | URL
저두 갠적으로 문학보다는 철학에 더 끌리는 편입니다만 강유원씨같은 냉철한? 철학자분들보다는 때로는 좌충우돌?하면서 보다 인간적인 면모를 풍길줄 아는 사람들 (그게 꼭 문학이나 예술과 관련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에게서 더 많은 매력이 느껴지더군요. 자신의 실수나 오류를 두려워하지 않고 또 그것을 인정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자신의 진지하고 냉철한 분석이 다른 사람에게는 "진지한 농담"으로 보일때 조차도 상대방에게 독설을 퍼붓는게 아니라 웃어넘길줄 아는 여유가 있는 사람들 저는 그런 사람들이 좋더라구요..^^ 그런데 소위 책많이 본다는 식자층에서는 그런 인간적 매력을 느낄수있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아요. 대부분 어떻게 하면 하나라도 더 남들보다 뛰어난 지식과 합리성으로 자신을 무장할까에만 혈안이 되어있다보니 자연스럽게 논리적인 자기방어에만 치중하게되고 타인에 대한 배려는 부족해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철학자 강유원' 같은 분들보다는 '그리스인 조르바' 같은 사람들이 더 좋더라구요.. 비록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살다가 가면 세상에 "남는게 별로 없는" 인생을 산다구 하더라두요..^^

로쟈 2006-12-23 11:50   좋아요 0 | URL
고해성사 무드네요.^^ 이전에 관련 페이퍼를 쓰기도 했지만, 철학적 로고스와 문학적 로고스의 길이 겹치면서 갈리는 거라 생각합니다. 자기가 갈 수 있는 가장 먼 데까지 가보는 거라면 별문제겠죠. '그쪽은 아냐'라고 참견하는 대신에...

yoonta 2006-12-24 13:52   좋아요 0 | URL
오랫만에 로쟈님 서재에 놀러와서 끄적이다보니 쓰잘데기 없는 이야기가 다 나온것 같네요. 남이야기하기전에 자기 자신이나 돌아봐야되는데..ㅋㅋ

기인 2007-01-04 21:23   좋아요 0 | URL
음; 쫌 뒤늦게 퍼갑니다. 경철수고 읽어볼까 해서 ^^; 땡스투도 합니다.
경철수고 강유원 선생 번역본을 살까, 아니면 역시 빨간책에 있는 발췌본으로 만족할까 고민중입니다...
에잇; 그냥 사야겠습니다 ㅜㅠ

로쟈 2007-01-04 21:29   좋아요 0 | URL
월급도 고려하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블루비니 2007-10-26 14:39   좋아요 0 | URL
로자/ 무대뽀식 알라딘 도배질뒤의 잔상은 공허한 느낌나열과 애처로운 자기PR(돈이 있는,책 좀읽은, 비정규직 강사라는..)일뿐, 이런 '자기고백'은 속으로만 하고, 논리로 비판하는 것이 훨씬 '공익'스럽지 않을까?

로쟈 2007-10-26 14:48   좋아요 0 | URL
'공익'근무하시나 보군요. 수고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