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권의 책을 쓰거나 번역한" '비정규직' 철학박사 강유원의 신간이 출간됐다. 마르크스의 <경제학-철학 수고>(이론과실천, 2006)이 그것이다. 흔히 '경철수고'라고 불리던 책인데, 지난 1987년에 같은 출판사에서 김태경씨의 번역으로 출간됐던 책이다. 그때 분량은 151쪽이었는데, 이번에 나온 번역본은 229쪽이다. 목차로 봐서는 후주의 분량이 많아진 탓인지 책의 판형 때문인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아직 책을 직접 보지 못했다).
이 '경철수고'와 관련하여 내가 갖고 있는 책은 국역본이 아니라 펭귄판 <초기 저작선(Early Writngs)>(1992)인데, 이 영역본의 분량으론 120쪽 가량이다. 책은 재작년에 모스크바대학의 구내 헌책방에서 50루블(당시 환율로 2,000원)에 구한 것이다. 국역본과 영역본의 표지를 나란히 놓고 보니까 마르크스의 사진이 비교될 수밖에 없는데, <공산당선언>이 발표되기도 전인 1844년에 나온 '경철수고' 자체가 청년 마르크스(1818-1883)의 저작인 만큼 영역본의 사진이 보다 어울려 보인다(그러니까 마르크스가 만 26세에 쓴 글이다).
짐작에 1841년에 쓴 박사학위논문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그린비, 2001)를 제외하면 가장 젊은 시절 마르크스의 단행본 저작이겠다. 참고로, 김태경 번역본은 절판되었고, 박종철출판사에서 나온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1>(1997)에는 '1844년의 경제학 철학 초고'가 발췌돼 실려 있다.
신간의 출간과 관련하여 '강유원'을 검색해보다가 발견한 글은 재작년 교수신문에 실렸던 한 칼럼이다('독서유감'이란 제하에 당시 대학강사이던 강유원의 연재칼럼이 게재된 바 있다). '소설읽기의 괴로움'이란 제목이 달려 있으니 눈에 띌 수밖에 없는데 이 깐깐한 서평가에게 '소설읽기의 괴로움'이란 '철학읽기의 즐거움'이 갖는 이면이 아닐까란 생각도 들었다. 그의 '서평들'을 읽는 데 참고가 될 듯하여 옮겨놓도록 한다. 읽고나서 남는 게 없기 때문에 소설은 읽을 게 못된다, 그나마 보르헤스의 문학론 정도는 정보량이 많아서 읽을 만하다, 라는 게 대략적인 요지이다.
교수신문(04. 04. 09) 소설읽기의 괴로움
솔직히 말해서 나는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끝까지 읽지 못했다. 그의 다른 대하소설들 ‘아리랑’이나 ‘한강’도 마찬가지다. 대하소설, 견뎌내기 힘들다. 아무리 얇아도 소설 읽긴 너무 힘들다.
소설 읽기가 힘든 이유는 첫째, 소설은 논리적으로 전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종잡을 수가 없다. 대강이라도 앞을 예측하지 못하는 건 불안만 안겨줄 뿐이다. 영화를 보러 갈 때도 미리 스토리를 다 알아야 하며, 유념해서 봐야 할 장면들을 챙겨서 가는 나로서는 소설의 이러한 돌발성을 감당하는 게 상당히 힘든 일이다.
두 번째로 소설은 몇몇을 제외하고는 읽고나도 남는 게 없다는 것이다. 진한 감동을 남기지 않느냐고 반문할 사람도 있겠지만, 글쎄 그렇게 남은 감동이 도대체 내 행동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하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별로라는 대답이 저절로 나온다. 오히려 내가 소설을 읽고나서 감동을 느끼는 것은 그 소설에 아주 풍부한 정보가 담겨 있을 때뿐이다.
그런 점에서 이른바 판타지 문학은 전혀 아니올시다다. 이것만은 꼭 읽어야겠다 싶어서 톨킨의 ‘반지의 제왕’을 붙잡고 낑낑대다가 결국 손에서 놓고 말았다. 뭔 책인들 제대로 읽었겠는가마는, 어쨌든 판타지 문학은 남는 거 없고 시간낭비에 작가의 상상력을 따라가지도 못하는 내 빈곤함 때문에 늘 실패로 돌아간다.
보르헤스는 톨킨과 마찬가지로 한참 '유행'할 당시, 한번 읽어보기나 해야겠다 싶어서 잡은 것이었다. 그런데 톨킨의 책을 내팽개쳤다면 보르헤스는 그러지 않았다. 보르헤스가 뭐 대단한 소설가여서가 아니라 그의 소설들은 짧았기 때문이다. 내가 보르헤스를 그 뒤로 계속 읽은 것은 그 소설들의 짧음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곧바로 그의 소설들이 재미없다는 것을 느꼈고, ‘허구들’(녹진 刊), ‘불한당들의 세계사’(민음사 刊), ‘셰익스피어의 기억’(민음사 刊)만을 읽고 말았다. 역시 소설은 소설인 것이다.
나에게는 보르헤스가 소설가로서가 아니라 문학과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으로서 매력이 있다. 그래서 그의 소설 보다는 문학론, 책 이야기에 관한 책은 반드시 사서 읽게 된다. 그의 이런 책들은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정보가 풍부한 책들인 셈이다.
‘칠일 밤’에 들어있는 이야기도 예외는 아니다. 여기에서 그가 이야기하는 일곱 개의 주제들 중, '신곡', '천 하룻밤의 이야기', '카발라' 등은 오랫동안 날 매혹시켜온 주제들이다. 소설이 아니니 앞에서부터 읽지 않아도 그만이고, 그 주제들만을 골라서 읽어도 무방하다. 그러는 가운데 만나게 되는 몇몇 구절들은 나를 더없이 흥분시킨다.
이를테면 이런 것, "우선 헤로도토스의 ‘역사’ 9권에서 머나먼 이집트의 존재에 대해 밝힌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여기서 내가 '머나먼'이라고 말한 것은 공간은 시간에 의해 측정되고, 여행은 그지없이 위험한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인들에게 이집트라는 세계는 가장 오래되고 위대한 세상이었고, 그들은 이집트를 미스터리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공간은 시간에 의해 측정된다"는 말에서 나는 '현대의 시공간 압축'을 떠올리면서 그 말을 음미하며, 선진국 이집트를 동경했던 플라톤을 생각한다.
또 이런 것. "그러나 나는 그렇게 믿습니다. 적어도 괴테의 나선형식 진보를 믿습니다." 여기서 나는 괴테와 헤겔이 동시대인이었으며, 헤겔의 변증법적 전개가 나선형이었음을 상기하면서, 또는 칼 뢰비트의 ‘헤겔에서 니체에로’의 내용들을 이어 붙이면서 텍스트를 즐긴다. 어디선가 보르헤스가 말했듯이 책들끼리의 대화가 내 머리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내가 과독한 탓인지 내게 이런 즐거움을 주는 한국 작가는 아주 드물다. 당대의 소설가라는 사람들이 신문에 덜 익은 정견이나 발표하고, 무슨 정당에 가서 공천 심사나 하는 건 본 적이 있다. 이제 그런 거 그만하고, 일단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가의 각오’에 들어있는 '소설가가 작품의 전면으로 나설 때'를 읽은 뒤, 방에 들어 앉아서 공부들이나 좀 했으면 싶다.(강유원 / 동국대 철학)
06. 12. 21.
P.S. "무슨 정당에 가서 공천 심사나 하는" 작가가 알다시피 작가들의 공부방을 마련해놓고 강유원 이상으로 '교양'을 강조해마지 않는 소설가 이모씨라는 건 아이러니컬하다. 여하튼 이 칼럼은 '서평가' 강유원에 대해서 많은 걸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기에 유용하다. 거기에 덧붙여 읽어볼 만한 것은 서평집 <주제>(뿌리와이파리, 2005)의 서문이다(이 책은 얼마전 한겨레 고명섭 기자의 <담론의 발견>(한길사, 2006)과 함께 한국출판평론상을 수상했다. '출판평론'이란 이 경우에 '서평집'을 말한다).
"내가 보기에 세상에는 '책'이 몇 권 있다. 아니 다섯 권 있다. <길가메시 서사시>, <오디세이아>와 <오이디푸스 왕>, <신곡>과 <정신현상학>. 이 책들 중에서 <정신현상학>을 제외하고는 원어로 읽어보지 못하였다. 죽기 전에 진심으로 기원하여, 다음 생에서 다시 사람으로 태어난다면 두 권 정도 더 읽어볼 수 있을 듯하다. 다시 또 죽은 뒤 사람으로 태어난다면 나머지 두 권을 읽어보겠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다."
보르헤스의 문학을 평하여 '진지한 농담'이라고도 하지만 이런 '소망'이야말로 진지한 농담의 전형 아닌가? 그의 분류를 그대로 적용하자면, '강유원 서평집'이란 부제를 달고 '니 주제를 알라!'란 표어를 내세운 이 서평집에서 그가 다루고 있는 책들은 <신곡>을 제외하면 모두 '책 아닌 것들'이겠다. 그러니 "여기에 묶인 글들은 주석이나 해설이나 베낀 것에 대한 하찮은 푸념일 뿐이요, 주석도 해설도 베낀 것도 아닌 것들에 대한 비웃음이다."란 자평은 액면 그대로 접수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 푸념과 비웃음에 또 '출판평론상'이란 게 주어졌으니 이 또한 고난도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고. 초급 아이러니스트인 내가 명함도 못내밀한 이유가 다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