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2006년 새해의 목표로 세운 것 중 하나는 매주 꾸준히 시를 한두 편씩 읽는 것이다(연말에 책 한권 분량을 묶는 게 멋쩍지 않은 한해를 보내기 위한 한 가지 계획이다). 우연이긴 하지만, 첫주에 내가 읽고자 하는 것은 <성경>의 '시편'(1편)과 20세기 최고 시인으로 꼽히기도 하는 칠레의 거장 파블로 네루다(1904-1973)의 초기시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1924)이다.

 

재작년이 그의 탄생 100주년이어서 이를 기념한 평전이 출간됐었고, 그게 작년에 우리에게도 번역/소개된 애덤 펜스타인의 <빠블로 네루다>(생각의나무, 2005)이다. 이왕이면 이전에 소개됐던 네루다의 회고록 <추억>(녹두, 1994)도 재출간되었더라면 더 좋았을 듯하다(정현종 시인에 따르면, "그렇게 재미있고 신나며 감동적인 회고록을 나는 본 일이 없"다고. 물론 우리 번역본도 그렇게 재미있고 신나며 감동적으로 옮겨졌는지는 확인해보지 못했다).

 

 

또 연말에는 그리스 작곡가 미키스 테오도라키스가 네루다의 시에 곡을 붙인 <모두의 노래(Canto General)>(알레스뮤직)도 출시되어 막판 분위기를 띄웠다. 경향신문의 소개 기사에 따르면, "저항시인 파블로 네루다가 남긴 최고의 걸작 ‘모두의 노래’. 그리스의 작곡가 미키스 테오도라키스가 네루다의 시 13편에 웅장하고 애수 넘치는 선율을 입힌 오라토리오 ‘모두의 노래’가 국내에서 처음으로 출시됐다. ‘예술’과 ‘혁명’이라는 두 깃발을 온몸으로 끌어안고 살았던 거인들이 조우한, 기념비적 음반이다. 테오도라키스는 1973년에 망명지였던 프랑스 파리에서 이 음악을 작곡했고,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초연해 환호를 받았다. 지금 우리가 듣는 ‘모두의 노래’는 초연 당시의 음악을 다시 다듬어 완성한 것이다." 

 

그럼 (내겐 생소한) 테오도라키스는 누구인가? "국내 음악팬들은 아그네사 발차의 음반 ‘조국이 내게 가르쳐준 노래들’로 테오도라키스의 선율과 친해졌다. 이 음반에 담긴 ‘기차는 8시에 떠나네’의 멜로디를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영화 ‘그리스인 조르바’에서도 그의 음악들이 흘러나온다. 하지만 이는 테오도라키스 음악에서 그저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그는 민중가곡 1,000여곡, 교향곡 5곡, 발레음악 2곡, 오라토리오 2곡, 오페라 4곡 외에도 다수의 영화음악을 작곡해낸 그리스의 음악적 ‘국보’(國寶)다. 이 음반은 테오도라키스가 직접 지휘하고, 그리스를 대표하는 가수 마리아 파란두리와 페트로스 판디스가 성야곱합창단과 호흡을 맞춘 실황이다. 웅장한 서정미. 특히 마리아 파란두리의 영성(靈性) 넘치는 목소리는 가슴을 파고 든다. 70여쪽에 달하는 해설지에 네루다의 서사시 ‘모두의 노래’가 국내 최초로 번역돼 실려 있다."

 

<모두의 노래>가 번역돼 실려 있다는 얘기에, 그리고 <빠블로 네루다> 평저도 끼워준다는 얘기에 솔깃하여 나는 이 음반(과 책)을 올해의 첫 구입품으로 골랐다. 그런 만큼 스무 살의 청년 네루다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다준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를 새해에 읽은 첫번째 시로 고른 것이 억지스럽거나 근거없는 것은 아니겠다. 네루다의 시집에는 '사랑의 시' 20편과 '절망의 노래' 1편, 도합 21편이 수록돼 있는데, 일단 먼저 읽을 것은 첫번째 사랑의 시(Poema 1)이다(이 첫번째 시의 영역본들은 대개 첫 구절인 '한 여자의 육체'란 제목을 달고 있다).(*이후에 30분 정도 쓴 분량을 날려먹었다. 자주 '등록'을 해도 왜 이 모양인지! 다시 쓸 기운/시간이 없는 까닭에 본론으로 바로 들어간다.)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20살의 청년시인 네루다에게 전세계적인 명성을 가져다준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편의 절망의 노래>의 시작은 아주 '관능적'이다(아주 노골적으로 에로틱하다). 그가 '에로스의 시인'이고 '디오니소스의 시인'이란 걸 여실히 보여주는 것. 이 시들을 쓸 때의 네루다의 모습이 평전의 표지를 장식하기도 한 가운데 사진이다. 맨 왼쪽 사진이 그가 3살 때, 그리고 두번째 사진은 사춘기인 16살 때의 모습이다. 오른 편의 사진들은 장년과 노년의 네루다를 보여준다(노년의 네루다는 영화 <일 포스티노>에서 필립 느와레가 연기했던 그 네루다이다). 

 

 

 

 

 

 

 

 

 

<사랑의 시>는 (적어도 책자 형태로 출간된 걸 기준으로 한다면) 내가 알기에 3종의 우리말 번역이 있다. 이 중 가장 먼저 나온 것은 정현종 시인의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민음사, 1989/2007)이다. 하지만 네루다 시선집 형태의 이 중역본 시집에는 <사랑의 시> 4편만이 다른 시들과 함께 번역돼 있다('정현종과 네루다'에 대해서 따로 페이퍼를 쓸 계획이다. 그는 2004년에도 <100편의 사랑의 소네트>(문학동네)를 번역/출간한 바 있다. 탄생 100주년인가를 기념해서 칠레정부로부터 전세계 100명의 시인에게 주어진 네루다 메달을 수상하기도 했고. 차후에 정현종 연구자들이 논문을 쓴다면 가장 자주 들먹이게 될 이름이 아마도 바슐라르와 네루다가 될 것이다).

 

두번째 번역은 영역본이 아닌 스페인어본을 직역한 것으로 추원훈의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청하, 1992)가 있다. 절판된 책이라 요즘은 구하기 어려운 시집. 원시집의 시 21편이 고스란히 옮겨져 있는 게 장점이다. 그리고 세번째 번역은 김남주 시인의 옥중 번역시집 <은박지에 새긴 사랑>(푸른숲, 1995)에 포함돼 있는 '스무 편의 사랑의 시'. 특이하게도 김 시인은 '한 편의 절망의 노래'는 뺀 스무 편의 말 그대로 '사랑의 시'들만을 옮겨 놓았다. 정현종, 김남주 두 시인의 번역은 영역본에서 옮긴 중역본이다(시 번역에서 원어역이 특별한 권위를 갖는 건 아니다. 번역시도 '시'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면 특히나).

 

이제 이 시를 읽기 위해서 스페인어 원문과 영역, 그리고 3종의 우리말 번역을 아래에서 나열해놓겠다.

Cuerpo de mujer, blancas colinas, muslos blancos,
te pareces al mundo en tu actitud de entrega.
Mi cuerpo de labriego salvaje te socava
y hace saltar el hijo del fondo de la tierra.

 

Fui solo como un túnel. De mí huían los pájaros
y en mí la noche entraba su invasión poderosa.
Para sobrevivirme te forjé como un arma,
como una flecha en mi arco, como una piedra en mi honda.

 

Pero cae la hora de la venganza, y te amo.
Cuerpo de piel, de musgo, de leche ávida y firme.
Ah los vasos del pecho! Ah los ojos de ausencia!
Ah las rosas del pubis! Ah tu voz lenta y triste!

Cuerpo de mujer mía, persistirá en tu gracia.
Mi sed, mi ansia sin limite, mi camino indeciso!
Oscuros cauces donde la sed eterna sigue,
y la fatiga sigue, y el dolor infinito. 
 

***

Body of a woman, white hills, white thighs,

you look like a world, lying in surrender.

My rough peasant's body digs into you

and makes the son leap from the depth of the earth.

I was alone like a tunnel. The birds fled from me,

and night swamped me with its crushing invasion.

To survive myself I forged you like a weapon,

like an arrow in my bow, a stone in my sling.

But the hour of vengeance falls, and a love you.

Body of skin, of moss, of eager and firm milk.

Oh the goblets of the breast! Oh the eyes of absence!

Oh the pink roses of the pubis! Oh your voice, slow and sad!

Body of my woman, I will persist in your grace.

My thirst, my boundless desire, my shifting road!

Dark River-beds where the eternal thirst flow

sand weariness follows, and the infinite ache.

***

한 여자의 육체, 흰 언덕들, 흰 넓적다리,

네가 나를 내맡길 때, 너는 세계처럼 벌렁 눕는다.

야만인이며 시골사람인 내 몸은 너를 파들어가고

땅 밑에서 아들 하나 뛰어오르게 한다.


나는 터널처럼 외로웠다. 새들은 나한테서 날아갔다.

그리고 밤은 그 막강한 군단으로 나를 엄습했다.

살아남으려고 나는 너를 무기처럼 벼리고

내 활의 화살처럼, 내 投石器의 돌처럼 벼렸다.

허나 인제 복수의 시간이 왔고, 나는 너를 사랑한다.

피부의 육체, 이끼의 단호한 육체와 갈증나는 밀크!

그리고 네 젖가슴 잔들! 또 放心으로 가득 찬 네 눈!

그리고 네 둔덕의 장미들! 또 느리고 슬픈 네 목소리!

내 여자의 육체, 나는 네 경이로움을 통해 살아가리.

내 갈증, 끝없는 내 욕망, 내 동요하는 길!

영원한 갈증이 흐르는 검은 河床이 흘러내리고,

피로가 흐르며, 그리고 가없는 슬픔이 흐른다.(정현종, 1989)

***

여자의 몸, 하얀 구릉, 하얀 허벅지,

너를 내어주는 모습은 꼭 이 세상을 빼어 닮았구나.

우악스런 농사꾼 내 몸뚱이는 너를 파헤쳐

대지의 밑바닥에서 아들놈이 튀어나오게 한다.

터널처럼 나는 홀로였다. 새들은 내게서 도망쳤고

밤은 엄청난 침략으로 내게 쳐들어왔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 너를 벼리었다 무기처럼,

내 활에 재어진 화살처럼, 내 투석기(投石機)의 돌멩이처럼.

그러나 복수의 시간은 다가왔다, 그리고 내가 너를 사랑하고 있다.

가죽의, 이끼의 갈증나고 단단한 젖의 몸.

아 젖가슴의 사발들! 아 넋나간 눈동자!

아 음부(陰部)의 장미들! 아 너의 느릿한 슬픈 음성!


내 여인의 몸이여, 나는 네가 상냥하길 고집하리라.

나의 목마름, 끝없는 나의 번민, 막막한 나의 행로여!

영원한 목마름이 계속되는 어두운 수로(水路)들,

끊이지 않는 피로, 그리고 한없는 고통.(추원훈, 1992)

***

여자의 육체, 하얀 언덕, 하얀 허벅지,

몸을 맡기는 네 모습은 이 세계를 닮았다

거칠기 짝이 없는 농부의 육체가 너를 파헤쳐

땅 속 저 깊은 곳에서 아이 하나 세차게 솟아나오게 한다


나는 터널처럼 고독했다 새들은 도망치듯 날아가버리고

침략처럼 밤은 그 막강한 힘으로 나를 파고들었다

그러나 나는 살아남기 위해 너를 단련시켰다 무기처럼

화살처럼 투석기의 돌처럼


이제 복수의 시간이 다가오고 나는 너를 사랑한다

피부와 이끼와 우유로 만들어진 갈증과 욕망의 육체여

오 가슴의 두 컵이여! 오 딴전을 부리고 있는 두 눈이여!

오 불두덩의 장미여! 오 느리고 슬픈 목소리여!


나는 너의 매력에 사로잡히리라, 오 여자의 육체여

이 목마름, 이 끝없는 욕망, 이 정처 없는 나의 길이여!

영원한 갈증이 흐르고, 피로가 흐르고

밑 모를 고통이 흐르는 검은 하상(河床)이여(김남주, 1995)

 

***

 

그럼, 이제 시를 읽어보도록 하자. 이 시는 전체 4연 16행으로 이루어져 있고(각 연의 2, 4행이 각운을 맞추고 있는 행이다), 의미상으로도 네 개의 마디로 돼 있다. 시제상으론 '현재-과거-현재-미래' 순으로 진행된다. 그러니까 1연과 3연이 현재의 시간을 다루고 있다면, 중간에 끼인 2연은 일종의 플래시백이다. 그럼 1연의 내용은 무엇인가? 청년 네루다는 비유적으로 에둘러 말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한 여자의 육체'에 대해서. 

 

이 육체에 대한 묘사를 세 번역본은 각각 "한 여자의 육체, 흰 언덕들, 흰 넓적다리," "여자의 몸, 하얀 구릉, 하얀 허벅지," "여자의 육체, 하얀 언덕, 하얀 허벅지,"로 옮겼는데(영역은 "Body of a woman, white hills, white thighs,") 이 대목의 경우 나로선 정현종의 번역이 가장 적절하다고 본다. 여기에선 '여자' 일반이 아니라 내 앞에 누워있는 '한 여자'에 초점이 맞추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한 여자의 육체'는 여기서 지형학적인 비유들을 거느리고 있는데, 그것은 3-4행의 비유를 예비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즉, 1연의 묘사를 따라가자면, 흰 언덕들(아마도 가슴 혹은 엉덩이)과 흰 넓적다리(허벅지)를 가진 한 여자가 지금 마치 '세계(=대지)'처럼 누워있고('세계로서의 한 여자'라는 비유는 흔한 듯해보이지만 대담한 것이다), 그 '대지'를 이제 파고들어가 새로운 생명을 싹튀우게 하려는 '나'는 농부에 비유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야만인이며 시골사람'(정현종)보다는 '우악스런 농사꾼'(추원훈)이나 '거칠기 짝이 없는 농부'(김남주)가 '나'에 대한 기술로서 보다 타당하다. 1연에서 핵심이 되는 비유는 '대지(=한 여자): 농부(=한 남자로서의 나)'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3-4행의 번역으로는 추원훈의 것을 고르고 싶다. 그런 식으로 1연을 재조합해 보면 이렇게 된다. 

 

한 여자의 육체, 흰 언덕, 흰 허벅지,

네가 나를 내맡길 때, 너는 이 세계처럼 벌렁 눕는구나.

우악스런 농부인 내 몸뚱이는 너를 파들어가고

대지의 밑바닥에서 아들놈이 튀어나오게 한다.

 

 

원시의 1행은 "꾸에르뽀 데 무헤르, 블랑까스 꼴리나스, 무슬로스 블랑꼬스(Cuerpo de mujer, blancas colinas, muslos blancos)" 정도로 읽히는 듯한데, 여기서 주된 리듬을 만들어내는 건 '-아스 -아스, -오스 -오스'라는 유사운의 반복이다. 시번역에서 메시지의 전달 못지 않게 고려해야 하는 것은 이러한 리듬의 전달이다(사진은 'blancas colinas'나 'muslos blancos'로 검색된 이미지).

 

" 여자의 육체, 덕들, 적다리"라는 정현종의 번역은 '한 - 흰 -흰'이라는 유사운의 반복과 '언/넓'에서 '어'운의 반복 등으로 리듬감을 살리고 있지만, '언덕들'의 조사 '들'이 '산문적'이고(이에 따르자면 '넓적다리'도 '넓적다리들'이 돼야 한다), '넓적다리'는 육감적인 시어이지만 리듬상 다소 튄다. "여자의 몸, 하얀 구릉, 하얀 허벅지"라고 옮긴 추원훈의 번역에서는 '블랑꼬스'라는 형용사를 '하얀'이라고 반복해줌으로써 리듬감을 부여하고 있지만, '구릉'과 '허벅지' 간의 리듬상의 연관성이 좀 약하다.

 

"여자의 육체, 하얀 언덕, 하얀 허벅지"라고 한 김남주의 번역이 이 1행에 한정하자면 리듬을 가장 잘 살린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하얀'의 반복 외에도 '언덕' '허벅'에 쓰인 유사운들이 리듬을 만들어내기 대문이다. 때문에 '여자의 육체'라고 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여기서 '블랑꼬스'의 역어로 '하얀'과 '흰'은 선택적이라고 보지만, 나는 좀더 무표적인(unmarked) '흰'을 골랐다.     

 

 

이제 2연. 2연은 이미 지적한 대로 플래시백의 과거시제이다. '너'를 만나기 전의 '나'의 모습에 대한 되새김인데, 한 마디로 요약하면, "나는 터널처럼 외로웠다/홀로였다/고독했다"라는 것. 나는 '터널처럼'이란 비유가 스페인어 시에서 어느 정도 상투적/독창적인 것인지 모르겠지만, 의미상으론 '텅 비어있었다' 정도의 뜻을 전달하는 게 아닌가 싶다. "새들이 나한테서 날아갔다"는 표현에 이어지는 것은 '밤의 엄습'이다. 논리적으론 '밤의 엄습'을 피해서 새들이 날아간 것이 되는데, '밤'은 혼자라는 외로움이 극대화되는 시간으로 짐작에 혼자서 밤을 보내야 하는 괴로움이 "막강한 힘으로 나를 엄습하는 밤"이란 이미지를 낳은 게 아닌가 한다. 이러한 엄습을 맞이하여 '내'가 필사적으로 하던 일은 '너'를 무기처럼 벼리는 것이었다. 이때 2인칭 대명사 '너'는 다른 연들의 '너'와는 지시대상이 다르다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1, 3, 4연에서의 '너'는 현재에 비로소 실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따라서 과거에 '너'를 벼렸다는 건 '너'가 비유가 아니라면 논리상 모순된다). "내 활의 화살처럼, 내 투석기의 돌처럼"이란 이어지는 비유에 적합하게 읽으려고 한다면, '너'를 '나'의 '남성(男性)'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정현종의 번역을 근간으로 해서 2연을 정리해본다.     

 

나는 터널처럼 외로웠다. 새들은 나한테서 날아갔다.

그리고 밤은 그 막강한 군단으로 나를 엄습했으니.

나는 살아남기 위해 너를 무기처럼 벼렸다.

내 활의 화살처럼, 내 투석기의 돌처럼.

 

요는 내가 벼르고 별렀다는 얘기. 그리고 드디어 "복수의 시간이 왔다"! 짐작할 수 있는 바이지만, 3연의 내용은 관능적인 성애의 묘사와 영탄적인 환희의 표현이다. 그러니까 '너를 사랑한다(te amo)'란 표현은 여기서 비유적이거나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직설적이며 현재진행형인 사랑과 애무를 뜻한다. 국역본에서 2행의 번역이 "피부의 육체, 이끼의 단호한 육체와 갈증나는 밀크!"(정현종) "가죽의, 이끼의 갈증나고 단단한 젖의 몸."(추원훈) "피부와 이끼와 우유로 만들어진 갈증과 욕망의 육체여"(김남주)로 각기 다른데, (1)피부 (2) 이끼 (3)갈증나고 단단한 젖이 모두 '육체'에 걸리는 걸로 보인다(정현종의 번역에서는 '갈증나는 밀크'를 따로 취급했다. 밀크?). 

 

여기서 묘사되고 있는 대상이 '한 여자의 육체'인 걸 고려하면, '피부' '이끼'(이건 '대지'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단단한 젖'이 무얼 지시하는지 아는 건 어렵지 않다. 그건 이어서 영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가슴과 눈동자, 둔덕과 목소리에 대한 묘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3연을 정리해보면 이렇게 된다(나는 2행을 좀 의역했다). 이 3연에서는 김남주 시인의 번역을 가장 많이 참조했다(정현종 시인의 '에로티시즘'은 그의 시구를 빌면 '헐벗은 가지의 에로티시즘'이다. 그는 도취적이지만 한편으로 경건하다. 비록 네루다의 시를 열애한다고 해도 그는 '육체파' 시인은 아닌 것이다).     

 

허나 인제 복수의 시간이 왔고,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네 육체의 피부, 이끼, 그리고 갈증이 난 단단한 젖. 

오 젖가슴의 두 사발이여! 오 넋나간 눈동자여!

오 불두덩의 장미여! 오 느리고 슬픈 너의 목소리여!

 

이제 마무리인 4연이다. 이제 1연의 '한 여자의 육체'는 '내 여자의 육체'가 되었다(김남주 번역에서는 이 점이 드러나지 않는다). 1-3연까지 서술된 것은 그러한 의미전이의 과정이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런데, 번역번들로는 가장 의미파악이 어려운 게 이 4연이다. 당장 1행만 하더라도 "내 여자의 육체, 나는 네 경이로움을 통해 살아가리."(정현종), "내 여인의 몸이여, 나는 네가 상냥하길 고집하리라."(추원훈), "나는 너의 매력에 사로잡히리라, 오 여자의 육체여"(김남주)라는 세 번역은 제각각이어서 의미를 종잡을 수가 없게 돼 있다. 

 

네루다의 이 사랑의 시편들에 대한 저명한 연구자, 레네 데 코스타의 해설은 추원훈 번역본에 발췌되어 실려 있다('The Poetry of Pablo Neruda', 하바드대출판부, 1979, 제1장). (번역돼 있지는 않지만) 꼬스따의 책 서론에 따르면, 이 연작 시집은 당초 1923년에 출간될 예정이었으나 너무 '열정적인' 내용이 포함된 탓에 출판사측으로부터 출간을 거부당했다고 한다. 청년 네루다는 여러 문인들에게 도움을 청하고 페드로 프라도란 중견 시인이 '보증'을 서 준 덕분에 1924년 출간될 수 있었다고. 어쨌든 이 밀리언셀러 시집의 대성공으로 '시인'으로 인정받은 네루다는 23세 때, 젊은 시인들에게 외교관의 자격을 부여하던 남미식 전통에 따라 극동 주재 영사로 임명 받는다. 해서 이후 5년 동안 그는 미얀마, 타이, 중국, 일본, 인도 등지에서 살았다고(하지만, 아주 외롭고 고립되었던 시기였다고).

 

맨마지막 시행과도 관련되는 것이지만, 내가 읽은 한 국내 논문에서는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의 기조를 이루고 있는 정서는 우울(멜랑콜리아)이라고 한다. 네루다 자신의 회고록에 따르면, 이 시집은 "가장 고통스러웠던 청춘기의 열정과 칠레 남부의 황폐한 자연이 혼합된 목가적 시들이 망라된 '고통의 책'"이었다고도 하고. 그 고통, 우울은 어쩌면 육체를 가진 존재로서 인간이 갖게 되는 필연적인 정서가 아닌가 싶다(곽지균 감독의 영화 <그 후로도 오랫동안>(1989)의 대사. 강수연: "육체는 슬퍼요." 김영철: "슬픈 건 섹스지").

 

 

"육체는 슬퍼라, 나는 모든 책을 읽었노라"라고 말라르메는 노래했지만, 책으로도 모자라고 정사(情事)로도 모자란 우리의 '무량의 슬픔'은 어디에서 보상받아야 하는 것인지? 네루다의 나머지 시편들에서는 알아볼 수 있을까?.. 

 

06. 01. 02 - 04.

 

 

 

 

 

 

 

 

P.S. 네루다 평전의 '옮긴이의 말'을 읽고 알게 된 것인데, 네루다를 처음으로 만나본 한국 작가는 상허 이태준이며(1951년 베이징에서 개최된 아시아문학좌담회), 본격적인 번역소개는 1969년 김수영의 번역을 통해 이루어졌다. 물론 1971년 노벨문학상 수상직후 네루다가 활발하게 소개되었을 것임은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바톤을 이어받은 사람은 김남주 시인으로 그의 네루다 번역은 정현종 시인보다 한 해 빠르다. 나는 1995년판 <은박지에 새긴 사랑>에서 인용하였지만, 이미 1988년에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남풍)가 출간되었던 것. 하이네와 브레히트, 네루다 등의 시 번역서인데, 푸른숲에서 다시 나온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1995)와는 편제가 다르다. 해서, 본문에서의 시 인용은 김남주-정현종-추원훈 순이어야 했다. '사랑의 시'만을 놓고 보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참고로, 네루다 시에서의 '사랑'의 테마를 분석하고 있는 한 논문에서의 번역을 여기에 옮겨둔다. 원어 번역의 또 다른 사례가 될 것이기에 비교해봄 직해서이다. 1, 3, 4연만의 번역이긴 하지만.

 

여자의 몸, 하얀 언덕, 흰 허벅지,

그대는 몸을 맡기는 행위에서 대지를 닮았구나.

거치른 농부, 내 육신이 그대를 파헤치면,

땅의 밑바닥으로부터 아들이 뛰쳐나오니까.

(...)

그러나 복수의 시간이 덮치지만, 나는 그대를 사랑하오.

이끼의 피부에다 탐욕스런 탄탄한 가슴을 가진 몸.

아아, 우유의 잔들이여! 아아, 딴전부리는 눈들이여!

아아, 내밀한 곳의 장미여! 아아, 느리되 구슬픈 그대의 음성!


내 여인의 몸이여, 그대의 매력을 지탱하리.

나의 갈증, 끝없는 나의 갈망, 내 정처없는 길이여!

영원한 목마름이 이어지고 피곤이 계속되고,

또 무한의 고통이 여울져가는 어두운 강바닥이여!

 

일단 스페인어 'gracia'에 해당하는 영어 'grace'를 정현종, 김남주 두 시인은 '경이로움'과 '매력'으로 각각 옮겼고(흔히는 '우아함'이나 '세련미'를 지칭하는 단어), 추원훈은 '상냥함'으로 옮겼다. 그리고 스페인어 동사 'persistirá', 혹은 영어의 'persist (in)'를 두 시인은 '살아가리', '사로잡히리라'라고 옮긴 데 반해서 추원훈은 '고집하리라'로 옮겼다. '보기 나름'이 아니라면 어느 한 편은 오역인 셈이 된다. 여기서 고려해야 할 것은 '내 여자의 육체'와 등가어로 제시되고 있는 2행의 내용이다. 이 2행의 경우는 세 번역본이 대동소이한데, 대략 "나의 갈증, 나의 끝없는 욕망, 나의 정처없는 길이여!" 정도로 정리될 수 있다. '너의 상냥함'은 이러한 2행과 조화를 이루기에는 너무 미약하다. 반대로 가장 시적인 표현은 정현종의 '경이로움'이며, 나는 이에 따르도록 하겠다. 3행에서 '검은 하상(河床)'이 받는 것은 문맥상 앞에 나온 '나의 길'이겠다. 그러니까 '나의 길'이란 이러이러한 하상이다, 라는 게 3-4행의 내용. 이 '검은 강바닥'에 흐르는 건 영원한 갈증과 피로, 그리고 무한한 고통(슬픔)이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해본다.

 

내 여자의 육체, 나는 네 경이로움을 살아가리라.

나의 갈증, 끝없는 나의 욕망, 나의 정처없는 길이여!

검은 강바닥을 따라 영원한 갈증이 흘러내리고,

피로와 무량(無量)의 슬픔이 흘러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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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침 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from 오선지위의 딱정벌레 2008-10-28 12:55 
    그린비의 네루다에 관한 세상의 모든 까칠이들에게 추천합니다! - 파블로 네루다를 보고 다시금 그의 시집을 꺼내 보았다. 단지 네루다를 꺼낸것이 아니라 고 김남주 시인을 보았다. 88년 김남주 시인의 번역으로 에서 네루다를 처음 알게되었다. 하이네, 브레히트, 네루다 3인의 번역시집이다. 김시인이 투옥 중에 번역한 것으로 많은 곳에 나와있다. 하지만 투옥되기 전에 번역한 것으로 나와 있다. 시기로 보면 78, 79년 즈음..
 
 
이리스 2006-01-31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루다를 처음 만난분이 이태준 선생이었는지 몰랐습니다. 세가지 버전의 번역, 잘 보았습니다. ^^; 추천 누르고 갑니다.

로쟈 2006-01-31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좀 길죠?^^

김도마 2006-02-18 0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땡투한번더~~로쟈님지금처럼좋은글많이올려주세요~~
몰래몰래읽고가는거..죄송해서요~

섬나무 2007-10-23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창고에 묵은 물건들 뒤지는 중입니다. 썩지 않아서 참으로 고마운 것들이군요.ㅎㅎ
 

 

 

 

 

 

 

 

필요 때문에 연말연초 며칠간을 정현종 읽기에 할애하고 있다(덕분에 정현종에 관한 페이퍼를 몇 개 쓸지 모르겠다). 주로 그의 회갑을 맞이하여 출간되었던 <정현종 깊이 읽기>(문학과지성사, 1999)와 작년 그의 정년을 맞아 출간된 <영원한 시작>(민음사, 2005)에 실린 글들과 함께 <상상력과 인간/시인을 찾아서>(문학과지성사, 1991)에 실린 김현의 글들을 읽는 건데, 물론 그의 시집들을 읽는 것도 포함해서이다(강의의 가장 좋은 점은 책읽기에 대한 '강제적 의지'를 수반한다는 데 있다. 게으른 천성을 알기 때문에 나는 종종 자발적 등떠밀리기에 나서는데, 그걸 '적극적 수동성'이라 불러야 하나, 아니면 '수동적 적극성'이라 불어야 하나?).

 

어쩌다 보니 정현종의 시들을 많이 읽게 되었지만, 나는 역시나 1999년에 출간된 2권짜리 <정현종 시전집>은 안 갖고 있다. 그건 1972년에 나온 첫시집 <사물의 꿈>(1972)를 제외하고는 이후에 출간된 거의 모든 시집을 갖고 있어서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론 아직 '현역'인 그의 시작이 아직 종결되지 않았기에 '전집'이 갖는 의미가 불충분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시를 쓰는 사람으로서 말씀드리자면, 시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가장 적절하지 못한 일 중의 하나입니다. 시는 우리가 그것에 대해 생각하기 전에 이미 있는 것이고, 그것에 대해 생각하기 전에 시는 우리에게 오며, 그것에 대해 생각하기 전에 우리는 시 속에서 살고 또 시는 우리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나무가 공기나 햇빛 또는 물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지만 나무는 그것들 속에서 그것들에 의해서 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연이 그 속에서 수많은 작은 태(胎)와 씨앗을 품고 있는 하나의 커다란 태이듯 시의 공간은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는 태이며 씨앗입니다. 특히 시의 언어는 다른 종류의 언어에 비해 이러한 태의 성질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시를 읽을 때 감동한다는 것, 시를 읽을 때 우리의 감정과 의식이 팽창한다는 것은(아이를 밴 배에 대한 연상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지각할 수 있듯이) 시적 언어의 공간이 우리를 뱄다는 이야기이며 그리하여 우리가 새로 태어난다는 말에 다름아닙니다. 시는 새로운 존재의 모태입니다. 그리고 옛날이나 지금이나, 아니 오늘날에는 더욱더, 사람의 새로운 탄생에 대한 요구는 우리의 가장 강력한 요구로 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과 세계가 살 만한 과정이며 살 만한 자리이기를 바라는 모든 사람들의 꿈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와 우리의 접촉양상을 드러내는 가장 적절한 말은 무엇일까요? 나는 이렇게 말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시를 숨쉰다고. 우리는 시를 읽는다기보다는 시를 숨쉽니다. 시를 숨쉰다는 것은 나의 개인적인 체험으로는 그 말 이외의 다른 말로 설명될 수 없는 말입니다만, 그래도 그렇게 말하는 까닭을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마치 무용가가 높이 뛰어올라 용약(踊躍)의 정점에 이를 때 중력으로부터 해방되듯이 시는 우리의 마음에 숨을 불어 넣어 정신으로 하여금 용약하게 함으로써 우리를 무거움에서 해방합니다. 모든 예술이 다 그렇겠지만 시는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해방이나 열림의 순간을 체험케 하기 때문에 우리는 시를 자유의 숨결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숨이란 또 활기의 다른 이름입니다.(...)


우리가 죽음이라는 말을 쓸 때, 그것은 사실적인 의미로 쓰이기도 하고 은유적인 의미로 쓰이기도 합니다만 오늘날 우리는 세계의 도처에서 죽음을 봅니다. 실제 죽음은 물론 산 죽음이라고 할 수 있는 현상도 미만해 있습니다. 우리의 의식과 감수성이 충분히 신선하고 민감할 때 우리가 정말 살아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시는 이러한 신선함과 민감성을 회복시키는 숨결입니다. 시는 우리를 마비시키는 모든 것에 대한 저항이기 때문에 우리는 시를 또한 생명의 숨결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시를 읽는다기보다는 시를 숨쉰다고 말하는 것도 위와 같은 연유에서이며 그래서 시를 산다는 말도 가능해집니다.(...)


그런데, 숲이 산소의 원천이듯이, 시의 숨의 원천, 따라서 우리의 숨의 원천이 꿈입니다.(...) 돌이켜보면 나는 그동안 꿈이라는 말을 되풀이해서 써왔습니다. 약 10년전 나는 <사물의 꿈>이라는 일련의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고 그 제목이 의미하는 바를 에세이로 쓰기도 했습니다. 그때의 나의 믿음은 사물이 꿈이 곧 나의 꿈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나의 시적 대상들, 내가 노래하는 것들은 나를 통해서 그들의 꿈을 실현한다는 것입니다.(...) 시의 언어를 유추적 언어라고 하는 것은 잘 알려진 얘기입니다만, 내가 나이면서 동시에 나무일 수 있는 공간이 시의 공간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와 나 아닌 것, 이것과 저것, 서로 다른 것들이 자기이면서 동시에 자기 아닌 것이 될 수 있는 공간이 시의 공간입니다. 시를 가리켜 예술과 역사, 인간과 자연, 성(聖)과 속(俗)을 연결하는 다리라고 하는 까닭도 그런 데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있는 것과 있어야 하는 것 사이의 긴장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있어야 하는 것은 있는 것으로부터 나옵니다.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볼 때 그것은 있어야 하는 것을 낳기 시작합니다.(...) 꿈은 그러니까 있는 것과 있어야 하는 것 사이에 있는 어떤 공간이며, 시가 꿈의 소산이라고 할 때 그것은 있는 것과 있어야 하는 것을 연결하는 운동이며 접합의 현장입니다.


결핍은 괴로움이고 충족은 기쁨입니다. 우리의 삶과 역사가 괴로운 것이라면 그것은 뭔가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그럴 터인데, 이 결핍은 그러나 우리로 하여금 꿈꾸게 하고 노래 부르게 하며, 여기에 노래의 위대성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가난하더라도 꿈은 가난한 법이 없으며 그것이 노래인 한 그것은 슬픔의 꿈을 충족시키며 기쁨의 아늑함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모든 창조행위가 그렇겠습니다만, 시를 쓰는 일은 어렵고 괴로운 일입니다. 이 괴로움은 사물의 꿈이 곧 나의 꿈이고자 할 때 오는 것입니다. 또 달리 말해보자면 예컨대 우리가 자유를 그리워하고 평화를 그리워하고 사랑과 정의를 그리워할 때 그리고 시인이 그 그리움을 노래할 때 시인 자신이 다름아니라 자유요 사랑이요 평화이어야 하기 때문에 시를 쓰는 일은 괴로운 일입니다. 또 달리 말해보자면 시는 모순과 갈등이 부딪쳐서 화해하는 현장이며 이것과 저것, 있는 것과 있어야 하는 것이 만나는 현장입니다. 부딪치면 아프고 화해하면 기쁩니다. 시인의 고통은 ‘이상한 기쁨’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현실과 역사는 끊임없이 우리의 꿈의 실현을 유예하면서 미래화하지만 지복(至福)의 순간을 허락하는 시는 우리의 현재를 탈환하고 회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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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1월 1일에 "시편 1편에 대한 읽기"라고 운을 떼고서 한참 늑장을 부린 글을 대충 정리하도록 한다. 어느덧 1월의 중순이다. 딸아이의 성화에 못 이겨(같이 안 가면 혼자만 지옥에 간다고 아이가 엄포를 놓는다) 얼떨결에 주일마다 교회에 다니고 있는데, 또 놀면 뭐하겠느냐고 가서 하는 짓이 영한 성경을 펼쳐놓고 '고전'을 음미하는 것이다. 그건 코란이건 불경이건 마찬가지이다.

특별한 신앙심을 갖고 있지 않은 탓에(참고로 나는 '신은 없다'라고 주장하는 무신론자가 아니다. 나는 그냥 '신이 있으나 없으나'를 믿는다. 더불어 내가 존중하는 팩트는 신이 존재하는지는 불확실하지만 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의 존재는 확실하다는 점이다. 모든 팩트는 존중되어야 한다), '성경'을 읽으며 감동을 받는 일은 좀처럼 없지만, 인류의 한 '고전'으로서만큼 언제든지 읽어볼 용의가 있다. 초등학교 시절에 <성서 이야기>를 읽은 지도 오래된 만큼 이 참에 '시편' 정도는 읽어두는 게 도리일 것 같기도 하고.

 

 

 

 

겸사겸사 구한 책은 지난 여름에 출간된 이원우의 <성서>(살림, 2005). "서양문화의 뿌리이자 원류인 고전, <성서>"라고 규정해놓은 것이 일단 마음에 든다(한데, 책은 그다지 많이 팔린 것 같지 않다). 400쪽 정도의 분량이므로 '부피'에 대한 나의 요구도 얼마간 충족시키고 있다. 다만, '관련서'라고 참고문헌을 나열해 놓은 대목에서 '허걱'했는데, 모두가 영문으로 된 신학 원서였던 것. 한국어 참고문헌이 왜 하나도 없는 것일까, 의아했는데, 저자가 미국의 한 대학 종교학과 교수였다. 그러니 한국어 책을 읽어볼 기회가 아예 없었던 것. 사정은 이해할 만하지만, 참고문헌에 대한 실제적인 도움을 전혀 받을 수 없다는 건 유감이다. 이전에 사놓고 읽다 만 <인간을 옷을 입은 성서>(책세상, 2001)을 다시 들춰봐야겠다.

참고로, 내가 갖고 있는 관련서는 디스커버리 총서의 <성경>(시공사, 2001)이 거의 유일하다, 아니다, 생각해보니, 성서의 기호학적, 정신분석학적 해석에 대한 책들도 갖고 있고, <예수는 신화다>(동아일보사, 2002)나 오강남의 <예수는 없다>(현암사, 2001) 등도 소장도서이다. 지젝 덕분에 바울에 관한 책들도 몇 권 되고. 하니 엄살을 부릴 일은 아니고 게으름이나 탓해야 할 일이겠다.

 

 

 

 

하지만 욕심은 또 욕심 나름이니, 더 여유가 된다면 클라시커 시리즈의 <성서>(해냄, 2002)와 <아시모프의 바이들>(들녘, 2002) 정도를 서가에 꽂아두고 싶다. 2권짜리 <기독교 죄악사>(평단문화사, 2001)도 읽어두고 싶은 책이고. 비록 종교학 강의들은 몇 과목 들은 바 있으나, 기독교에 대해서는 '문외한' 수준이니만큼(보다 정확하게는 '무관심'이었지만) 나머지 책들은 대개 리뷰 등을 참조해야 하는 형편이다. 내가 '관련서'나 '참고문헌'에 민감한 이유이다. 

  

 

 

 

낮에 아서 단토의 책을 구하기 위해 구내서점에 들렀었는데, 아가페출판사에서 나온 <쉬운성경>(2004/2005)이 눈에 띄었다. 실상은 공동번역 성경의 고답적인 어투가 마음에 들지 않아 성경 읽기를 미루어두기도 했는지라(비슷한 이유에서 나는 우리 법전들을 읽지 않으며 의학서적들을 읽지 않는다. 모두가 어휘나 통사 모든 면에서 아직 일본어투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내 경우, 아버지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고시 공부를 하지 않은 이유는 6법전서의 '문장들'이 맘에 들지 않아서이다. 최근에 나오고 있는 '순한글' 법전들의 경우 얼마만큼 개선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번쯤 훑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읽고자 했던 시편 1편은 이렇게 번역돼 있었다.    

A

1 행복한 사람은 나쁜 사람의 꼬임에 따라가지 않는 사람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죄인들이 가는 길에 함꼐 서지 않으며
   빈정대는 사람들과 함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입니다.
2 그들은 여호와의 가르침을 즐거워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깊이 생각합니다.
3 그들은 마치 시냇가에 옮겨 심은 나무와 같습니다.
   계절을 따라 열매를 맺고 그 잎새가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하는 일마다 다 잘 될 것입니다.
4 나쁜 사람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들은 마치 바람에 쉽게 날아가는 겨와 같습니다.
5 그러므로 나쁜 사람들은 하나님꼐서 내리시는 벌을 
   견뎌 낼 수가 없을 것입니다.
   죄인들은 착한 사람들과 함께 있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6 착한 사람들이 가는 길은 여호와께서 보살펴 주시지만
   악한 사람들이 가는 길은 결국 망할 것입니다.

이와 비교해 볼 것은 기존의 성경 번역이다.  

 

 

 

 

B

1.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3.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4.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5.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6.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이걸 우리말답게 약간 푼 번역도 있었다.

C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 지 아니하며,

2. 오로지 주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이다.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함 같으니, 하는 일마다 잘 될 것이다.

4. 그러나 악인은 그렇지 않으니, 한낱 바람에 흩날리는 쭉정이와 같다.

5. 그러므로 악인은 심판받을 때에 몸을 가누지 못하며, 죄인은 의인의 모임에 참여하지 못한다.

6.그렇다. 의인의 길은 주님께서 인정하시지만, 악인의 길은 망할 것이다

그리고 영역본(그밖에 러시아어본도 참조했지만, 여기에 옮겨놓지는 않겠다). 물론 영역본에도 여러 종류가 있으며 아래에 옮겨온 것은 그 중 한 가지일 뿐이다. 시편 1-2편에는 따로 제목이 붙어 있지 않으며 영역에 붙은 제목은 주석상의 필요 때문에 달려 있는 것이다. 1편의 내용인즉슨, '의인의 길과 악인의 종말'이라는 것.

PSALM 1: The Way of the Righteous and the End of the Ungodly

1. Blessed is the man
   Who walks not in the counsel of the ungodly.
   Nor stands in the path of sinners,
   Nor sits in the seat of the scornful;

2. But his delight is in the law of the LORD,
   And in His law he meditates day and night.

3. He shall be like a tree
   Planted by the rivers of water,
   That brings forth its fruit in its season,
   Whose leaf also shall not wither;
   And whatever he does shall prosper.

4. The ungodly are not so,
   But are like the chaff which the wind drives away.

5. Therefore the ungodly shall not stand in the judgment,
   Nor sinners in the congregation of the righteous.

6. For the LORD knows the way of the righteous,
   But the way of the ungodly shall perish.

 

 

여기까지 옮겨놓고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애초에 가졌던 글에 대한 '열정'도 식어버렸다(아무래도 나는 '쭉정이'인 모양이다). 그간에 시편 1-2편에 대한 제법 많은 분량의 (영어)주석을 읽어본 것이 그냥 나대로의 수확이다. 하고픈 이야기의 '알곡'은 제시한 번역들을 세심하게 비교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전달될 수 있으리라고 본다. '태신자'의 성경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진행하기로 한다.

06. 01. 01 - 0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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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ta 2006-01-01 1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는 성경까지..-_- 다음편은 코란인가여? ^^

지난 한해동안 좋은글 많이 읽을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새해복많이 받으세요..^^

로쟈 2006-01-01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yoonta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오늘 억지로(?) 교회에 잡혀갔다가 들은 설교 말씀이 시편 1편이었습니다. 목사님 설교가 제 딴에는 성에 차지 않아서 제 식으로 다시 읽어보려고 합니다. '복이 있는 사람'이 주제인데,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라고 덕담을 건넬 때 그 '복'과 어떤 관련이 있을지 생각해보려는 것뿐입니다. 제가 갖고 있는 (몇 안되는) 관련서들이 흩어져 있어서 짤막한 글 한편 쓰는 것도 불편하네요...

Viator 2006-01-22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글번역 중에서는 200주년 기념성서가 가장 희랍텍스트에 충실한 것 같더군요. 개신교쪽에서는 표준새번역 개정판이 괜찮은 것 같고요. 비교해서 읽으실때 참고하시면 좋을듯 싶습니다.

로쟈 2006-01-22 1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연변처녀 2006-04-15 2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성경을 오랫동안 접해와서인지 쉬운성경은 매우 낯설군요.
우선 "복"이라는 의미가 매우 다르게 다가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무슨일이든 다 잘 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그 삶에 이루어지는 것을 복이라고 말하고, 때로는 고난이 주어지는 것이기도 하죠... 개역개정판 3판을 읽고있는데, 그 편이 낫게 여겨지네요^^(시편 1편에 한해서~^^다른 부분은 못 읽어봐서 잘 모르겠네요!)
하지만, 완전히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에겐 도움이 될수 있겠어요!
믿는 사람들도 어려운 단어가 많이 쓰인 보편적으로 쓰이는 개정판 또는 개역개정판과 비교해가면서 읽으면 도움이 많이 될것 같아요. 한번 사서 보아야겠네요!
좋은 글 감사^^*
 

 

 

 

 

메일 확인을 위해 PC방에 왔다가 시간이 약간 남아서 진행중인 페이퍼를 조금 더 적어둔다. 들뢰즈의 '문학과 삶'에 대한 정리 말이다. 바흐친에 대해서, 에밀 시오랑에 대해서, 그리고 벤야민에 대해서 써야 할 페이퍼들이 모두 해를 넘기게 되었다. 이럴 땐 '음력' 설을 핑계 되는 수밖에 없겠다. 2006년이지만, 아직 새해 인사를 건네지는 않는 시간에 나머지 일들은 모두 해치울 작정이다(해서 세밑이지만, 새해 인사는 당분간 생략하도록 하겠다). 물론 '작정'으로 모든 일이 해결되었다면 (내가 아니라) 내 아내의 팔자가 많이 달라졌을 테지만!

<비평과 진단>의 17쪽 맨마지막 문장, 그리고 <세계의 문학>(2000년 겨울호) 248쪽 중간 대목부터이다. "언어는 여성, 동물, 분자라는 우회로에 반드시 도달해야 하며 모든 우회로는 죽음의 생성이다. 사물에도 언어에도 직선이란 없다. 통사법은 사물 속에 삶을 현시하기 위해 매번 창조된 필요한 우회로들의 총체이다." 이 대목에 있어서 두 국역본의 차이는 거의 없다. 영역은 이렇다: "Language must devote itself to reaching these feminine, animal, molecular detours, and every detour is a becoming-mortal. There are no straight lines, neither in things nor in language. Syntax is the set of necessary detours that are created in each case to reveal the life in things."(2쪽)

 

 

 

 

'죽음의 생성(a becoming-mortal)'은 불어로 'un devenir mortel'이며, '죽어가는 것-되기'란 뜻이겠다. 그러니까 이 '죽는 것-되기' 혹은 '죽어가는 것-되기'가 '여성-되기, 동물-되기, 분자-되기를 모두 포괄한다는 것. 그리고 흔히 도주선/탈주선이라고 옮겨지는 그러한 생성(되기)으로의 여정은 언어학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새로운 통사론을 만들어내는 것에 다름아니다. 우리말로는 흔히 '활로'가 불려지는 것인데, 들뢰즈의 관심은 말하자면 '통사론적 활로'에 집중되며 이후에 그 사례들이 언급될 것이다. 황지우의 시 '활로를 찾아서'가 문득 떠오르는군. 

 

 

 

 

나갔다, 들어온다, 잠잔다, 일어난다.
변보고, 이빨닦고, 세수한다, 오늘도 또, 나가 본다.
오늘도 나는 제 5공화국에서 가장 낯선 사람으로,
걷는다. 나는 거리의 모든 것을.
읽는다. 안전 제일.
우리 자본. 우리 기술. 우리 지하철. 한신공영 제4공구간.
국제그룹사옥 신축 공사장. 부산뉴욕 제과점.
지하 주간 다방 야간 맥주홀. 1층 삼성전자대리점.
2층 영어 일어 회화 학원. 3층 이진우 피부비뇨기과의원.
4층 대한 예수교장로회 선민중앙교회.
5층 에어로빅 댄스 및 헬스 클럽. 옥상 조미료 광고탑.
그리고 전봇대에 붙은 임신. 치질. 성병 특효약까지.
틈이 안 보이는데. 들어가면.
또 틈이 잇는 벽보판까지.
그리고, 낯선 사람 살펴보고 수상하면 신고하자.
까지. 아 하루 종일 육교에.
빗과 손톱깎이와 혁대와 귓밥파기와 손수건과 동전 지갑을 놓고 앉아 있는.
노파의 일당 2천원내지 3천원의 現世를.
나는 건너왔다.
또합 2만원도 안 될 좌판을 들고.
단속반에 쫓기는. 아아 현세요. 아아아 육교여.
아아아아 현세의 척추가 휘청휘청하다.
아아아아앙 현세의 다리가 후둘후둘하다.
거리는 미래가 안 보이고.
미래가 빤히 보인다.
좃도 뭘 모르면서. 재잘거리고.
조잘거리고 소곤거리고 쌕쌕거리고 헉헉거리는.
거리는 여색이 가득하다. 썩기 전에.
잔뜩 달아오른 화농처럼. 부강한 근육이.
타워 크레인이. 철근 하나를 공중 100M 높이로 끌어올리고 있다.
아아아아아아 나는 모모성을 본다.
근면과 광기. 성실과 맹목. 나는 보고 또 보고.
굴착기는 맹렬하게 아스팔트를 뚫고. 자갈을 뚫고. 암반을 뚫고.
정신없이 퇴적층을 퍼올리는 포크레인이 그러나.
의외로 곱고 새하얀 그 순결한 흙을 퍼올리는
포크레인이 지하 20M에 있다는 것은.
열정도 신념도 아닌. 연민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으로서 나는.
하지만 세상을 연민으로 바라보는 것을 자제해야 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으로서 나는. 그러나
아아아아아아아 가엾어라. TNT 사제 폭탄을 들고
은행엘 쳐들어간 청년은 자폭했고(중앙일보 9월2일자).
술집 호스티스는 정부에게 알몸으로 목졸려 죽었고(한국일보 6월 15일자).
방범대원은 한밤에 강도로 돌변하고(경향신문 12월 7일자).
아들은 술 취한 아버지를 망치로 내리쳐 죽이고(서울신문 4월 11일자).
노름판을 덮친 형사가 판돈 몽땅 꼬불치고(MBC라디오12시 뉴스 7월 26일자).
교사가 여학생을 추행하고(조선일보 11월 30일자).
신흥사 주지들 칼질 뭉둥이질(KBS제2라디오 8월 3일자).
디스코홀서 청소년들 집단적으로 불타 죽고(연합통신 4월 14일자).
前 중앙정보부차장이 억대 사기를 치고(동아일보 3월 6일자).
아 세월은 잘 간다.
눈 먼 세월. 잘 간다.
나는 손 한번 못 댄 세월. 잘 간다.
아직 오지 않은 사고와 사건과 사태와 우발과 자발과 불발의 세월. 속으로.
잘 간다.

"나는 양식을 파괴한다. 아니 파괴를 양식화한다"라고 선언했었던 황지우의 '파괴시학'은 그 나름으로 통사론적 활로의 모색이었으며, 그 활로는 이 시에서 "나갔다, 들어온다, 잠잔다, 일어난다"란 표현을 얻고 있다. "아 세월은 잘 간다./ 눈 먼 세월. 잘 간다./ 나는 손 한번 못 댄 세월. 잘 간다." 또한 비아냥의 통사적 (재)구축이다. 시는 그렇게 읽히며 그렇게 다시 읽힐 수 있다. 그리하여 다시 질문하게 되는 것. 문학이란 무엇인가, 글쓰기란 무엇인가?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추억, 자신의 여행, 자신의 사랑과 슬픔, 자신의 꿈과 환상 등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것은 현실성이나 상상력 과잉이라는 결함을 갖는 것과도 같은 이치이다." <비평과 진단>에서 이 대목은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추억, 여행, 애상(哀傷), 꿈, 환상 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현실성이나 상상력 과잉으로 죄를 범하는 것도 같은 이치이다."라고 돼 있는데, 모두 오역이다(이 오역이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면, 뒤에 나온 번역이 앞엣것을 베낀 게 된다). 'Ecrire n'est pas'(To write is not to-)로 시작하는 부정문이 어찌하여 (억지스럽게도) 긍정문으로 옮겨졌는지 모를 일이다. 글쓰기에 대한 역자들의 선입견이 반영된 것인지?

 

 

 

 

다시 정정해서 말하자면, "글은 쓴다는 것은 나 자신의 추억이나 여행담, 나 자신의 사랑과 슬픔, 나 자신의 꿈과 환상 따위들을 늘어놓는 게 아니다." 이어지는 번역문 "그것은 현실성이나 상상력 과잉이라는 결함을 갖는 것과도 같은 이치이다."나  "현실성이나 상상력 과잉으로 죄를 범하는 것도 같은 이치이다."도 부정확한데, 일단  '그것은'이란 대명사는 가주어이기에 생략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문장은 앞의 문장과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뒷문장과 연계되는 것이다. 나대로 옮기면, "상상력의 과잉이나 현실성의 과잉이나 마찬가지로 죄를 범하는 것이다. 이 두 경우 모두에서 현실 속에 투사되거나 상상계에 투입/내사(內射)되는 것은 아빠-엄마라는 영원한 오이디푸스 구조이다."

사실, <앙띠-오이디푸스>란 대표적 저작의 제목이 상기시켜주는 바대로, 들뢰즈/가타리가 격렬하게 저항하는 것은 그 오이디푸스 구조이며(모든 내러티브의 오이디푸스적 종결/해석), 그 대표적인 이론가로 거명하고 있는 사람이 마르트 로베르이다: "문학에 대한 유아적인 인식 속에서, 꿈의 한가운데에서와 마찬가지로 여행의 끝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바로 아버지이다. 그의 아버지-엄마를 위해 글을 쓰는 것이다. 마르트 로베르는 사생아나 업둥이말고는 소설가에게 별다른 선택을 남기지 않으면서 문학의 이러한 유아화, 정신분석화를 끝까지 밀고 나갔다."(사진은 <정신분석혁명>의 저자이기도 한 마르트 로베르 여사. <카프카에게서 정체성의 문제>란 책을 내던 시절이라고.)

"문학에 대한 유아적인 인식 속에서, 꿈의 한가운데에서와 마찬가지로 여행의 끝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바로 아버지이다."란 문장은 <비평과 진단>에서 "꿈의 한가운데에서와 마찬가지로 여행의 끝에서 문학이라는 유치한 개념으로 찾게 될 것은 바로 아버지이다."로 옮겨져 있다. '문학에 대한 유아적인 인식'과 '문학이라는 유치한 개념' 간의 차이는 모든 것이 '아빠-엄마'로 종결되는, 문학에 대한 '유아기적 개념' 정도로 정리할 수 있겠다. 이러한 유아화, 혹은 '정신분석화'를 극단에까지 몰고 간 이론가가 마르트 로베르이며, 그녀의 대표적인 저서가 <기원의 소설, 소설의 기원>(문학과지성사, 1999)이다(로베르의 소설론에 대해서는 김현의 <마당 깊은 집>론에서 처음 언급된 걸 본 기억이 있다).  

책에 대한 소개를 참조해 보면, 이 이론서는 "프로이트의 <신경증 환자의 가족소설>을 이론적인 출발점으로 삼아 '소설이란 무엇인지'를 규명하고자 한 것으로, 독창적이며 설득력 있는 방법으로 높이 평가받는 문학이론의 고전이다. 마르트 로베르는 소설을 쓰는 방법을 두 가지로 나눈다. 그는 모든 작가들을 업둥이와 사생아, 다시 말하면 낭만주의적인 작가들과 사실주의적인 작가들이라는 두 범주로 나눈다. 낭만주의적인 작가는 오이디푸스 이전의 잃어버린 낙원으로 돌아가길 원하며 부모 양쪽을 모두 부정하는 업둥이다. 반면에 사실주의적인 작가는 오이디푸스의 투쟁과 현실을 수락하며 아버지를 부정하고 어머니를 인정하여 아버지와 맞서 싸우는 사생아이다."(강조는 나의 것) 즉, 아주 강력한 환원주의인데, 모든 작가는 '업동이거나 사생아'로 분류된다는 것.  

 

 

 

 

흥미로운 건 본래 독문학자인 마르트 로베르 또한 손꼽히는 카프카 전문가라는 사실. 국내엔 그녀의 <프란츠 카프카의 고독>(동문선, 2003)만이 소개돼 있는데, 들뢰즈/가타리의 <카프카>(동문선, 2001)와는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는 셈이겠다(이 '빅 매치'에 대한 관전평을 가까이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게 유감이다). 참고로, 이 '빅 매치'를 관전할 요량이 있는 독자라면 카프카의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국내에는 2종의 번역본이 나와 있다)를 먼저 일독하는 게 순서일 것이다('아버지 전상서'로 씌어졌지만, 카프카 생전에는 발송되지 않았던 소위 '오프 더 레코드' 편지이며, 카프카 문학의 많은 수수께끼를 풀어준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쨌든 '안티-오이디푸스'로서의 들뢰즈는 그런 식의 오이디푸스적 환원에 비판적이다. 심지어는 '나의 고양이, 나의 개'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조차 경계한다: "동물로의 생성(동물-되기)조차도 오이디푸스적 환원을, '나의 고양이, 나의 개' 같은 오이디푸스적 환원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그 사례로 들뢰즈는 로렌스를 인용한다. "내가 기린이고, 나에 대해 글을 쓰는 보통의 영국인들이 잘 키운 얌전한 개들이라면, 모든 진실이 여기 있으니 동물들은 서로 다르다... 당신은 나라는 동물을 본능적으로 싫어한다." 

이 대목에 대한 <비평과 진단>의 번역은 내가 기린이라면, 잘 키운 얌전한 개들을 갖고 있는 나에 관해서 글을 쓰는 보통의 영국인들이 모두 거기 있다면, 동물들이 서로 다르다면 당신은 나라는 동물을 본능적으로 싫어한다.”인데, 예전에 모스크바통신에서도 한번 지적한 바 있지만, 말도 안되는 오역이다. 당시에 러시아어본에서 내가 다시 옮긴 바는 이랬다: 내가 만일 기린이라면, 그리고 나에 대해 글을 쓰는 보통의 영국인들이 애교있고 잘 길들여진 강아지들이라면, 이걸로 모든 게 설명이 된다. 동물들이란 서로 닮은 구석이 없는 법이니까 당신은 본능적으로 나 같은 동물을 싫어하는 것이다. 로렌스가 자신을 비판하는 여론에 대해 한 편지에서 일갈하고 있는 대목.

이제 정리 모드. "일반적으로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환상은 부정관사를 인칭사 혹은 소유사의 가면으로만 취급한다. '한 아이가 매를 맞았다'는 금세 '내 아버지가 나를 때렸다'로 바뀐다. 하지만 문학은 정반대의 길을 따라가며, 겉으로 드러난 인칭들 밑에서 결코 보편성이라고 할 수 없으며 오히려 극도에 달한 개체성이라고 할 수 있는 비인칭 - 남성, 여성, 짐승, 복부, 어린이... - 의 힘을 발견했을 경우에만 존재한다." 마지막 문장을 <비평과 진단>은 "하지만 문학은 반대의 길을 따라가다가, 보편성이 전혀 아닌 최상의 특수성인 어떤 비인칭의 힘을 명백한 인격체의 모습으로 발견하면서 비로소 멈춰선다."라고 옮기는데, 역시나 요령부득이다(특히 '겉으로 드러난 인칭들 밑에서(sous les apparentes personnes)'를 '명백한 인격체의 모습으로'라고 옮긴 대목).

다시, 문학은 언제 존재하는가? "겉으로 드러난 인칭들 밑에서 결코 보편성이라고 할 수 없으며 오히려 극도에 달한 개체성이라고 할 수 있는 비인칭의 힘을 발견했을 경우에만 존재한다."(Literature ... exists only when it discovers beneath apparent persons the power of an impersonal - which is not a generality but a singularity at the highest point: a man, a woman, a beast, a stomach, a child...) 인용한 번역문은 여기서 '극도에 달한 개체성'의 사례를 '남성, 여성, 짐승, 복부, 어린이...'라고 옮겼는데, '보편성'이 아닌 '비인칭적 개체성'의 사례이므로, ''한(=어떤) 남자, 한 여자, 한 마리 짐승, 하나의 복부, 한 아이...' 등으로 옮겨지는 게 타당할 것이다. 문제는 '내 아버지가 나를 때렸다'를 거슬로 올라가 '한 아이가 매를 맞았다(a child is being beaten)'라는 익명적, 비인칭적 사태에 도달하는 것이다.

요컨대, "문학적 발화행위의 조건으로 기능하는 것은 처음의 두 인칭들, 즉 일인칭과 이인칭이 아니다. 문학은 우리에게서 를 말할 수 있는 힘을 앗아가는 삼인칭(블랑쇼가 말하는 '중성')이 우리 내부에서 태어날 때 시작된다." <비평과 진단>의 번역으론 "문학적 발화의 조건 구실을 하는 것은 두 1인칭이 아니다. 나(블랑쇼의 표현을 빌면 '중성')를 말할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서 앗아가는 3인칭이 우리 내우베서 태어날 때만 문학은 시작된다." '두 1인칭'이란 표현은 오류이며, 블랑쇼의 '중성'을 1인칭과 동일시하는 것도 오류이다.

 

들뢰즈에 따르면, 문학은 '나'와 무관하다. 그리고 '너'와도 무관하다. 앞에서 "글은 쓴다는 것은 나 자신의 추억이나 여행담, 나 자신의 사랑과 슬픔, 나 자신의 꿈과 환상 따위들을 늘어놓는 게 아니다."라고 단언한 것은 그 때문이다. 대신에 그것은 어떤 비인칭의 공간을 펼쳐놓는 것이다. '어떤 개인 날' 의 '어떤 미소'처럼 말이다(사강의 <어떤 미소>는 고등학교 때 읽은 듯하다. 20년도 더 전의 일이다!). '너'에 대한 모든 기억을 이젠 지우고 떠나는 자의 발걸음 처럼 말이다... 

 

 

 

나의 마음속에 항상 들려오는 그대와 같이 걷던 그 길가에 빗소리
하늘은 맑아 있고 햇살은 따스한데 담배연기는 한숨 되어

하루를 너의 생각하면서 걷다가 바라본 하늘엔
흰 구름 말이 없이 흐르고 푸르름 변함이 없건만

이대로 떠나야만 하는가 너는 무슨 말을 했던가
어떤 의미도 어떤 미소도 세월이 흩어가는걸...

05. 12. 31- 06. 01. 02.

 

 

 

 

P.S. 아마도 가장 강력한 비인칭적 공간은 '세월'이 펼쳐지는 공간일 것이다. 어제로써 새해가 밝았고, 나는 전년에 못다한 일들과 올해 해야 할 일들 사이에서 망연하다. 거듭 인용하자면, "아 세월은 잘 간다./ 눈 먼 세월. 잘 간다./ 나는 손 한번 못 댄 세월. 잘 간다." 하지만, 한번쯤 손봐줄 때가 올 수도 있지 않을까(부지런히 칼을 갈아야겠다). '문학'을, 그리고 삶'을 이대로 흘려보내기엔 아무래도 좀 멋쩍은 일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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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6-01-01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도 새해 복많이 받으십시오.

니브리티 2006-01-03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이란 무엇인가?>와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는 그 용법에 있어서 차이가 있는 것 같은데요...
마르트 로베르가 여자였군요... <기원의 소설, 소설의 기원>의 서장이던가.. 아직 정의되지 않은 문학에 대한 시론은 아주 감명깊게 읽었는데, 그 뒤부터 업둥이 어쩌고 하는데에서는 그의 서론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인상을 받았었습니다...
요즘 쓰고 있는 글의 요지가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어떻게 문단에 문학적 알리바이와 윤리적 면죄부로 기능하는가에 대한 건데요... 완성되면 한번 봐주세요...^^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로쟈 2006-01-03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쓰기가 문학을 포괄하는 더 넓은 개념이라면, 글쓰기의 조건은 문학의 조건이기도 하지 않을까요? 요즘 쓰시는 글이 혹 '소설'이신지요?^^ 니브리티님도 새해 복많이 받으시길...

니브리티 2006-01-03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넵...소설은 아니고, 소설집 뒤에 들어갈 작가후기 겸 저의 소설론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실제로 작가나 시인들이 자신의 문학관을 피력할 수 있는 기회는 매우 한정되어 있습니다. 시인들의 경우는 짧은 '서시'(문지 시인선의 경우 책 뒤에 원고지2~3매 분량 정도)가 전부이고, 소설가들의 경우 10매 남짓의 작가후기가 전부죠. 그나마 주어진 분량을 누구누구에게 감사의 말씀...으로 채우고 보면, 정말 없다고 봐야하겠죠. 비록 비평을 하지는 않지만, 전 이 기회에 좀 길지만(60매 정도) 작가후기를 충실하게 쓸 생각입니다...반 정도 썼는데...

음...작가란 종류의 인간들은 좀 뉘앙스에 민감하니 로쟈님이 비록 의도하지 않으셨다고 해도 사실 로쟈님의 말이 가시가 되어 저를 폭폭 찌르기도 합니다....^^ 그치만 로쟈님의 편집증을 사실 저도 즐기고 있다고 말해도 그닥 틀리지는 않는 거 같아요.... 새해에는 돈 버는 글도 좀 쓰시기를...^^;;;

로쟈 2006-01-04 2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돈버는 글'의 노하우를 좀 전수해주시길!..

니브리티 2006-01-05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걸 알면 제가 이렇게 버벅 거리겠어요...ㅋㅋㅋ
 

한 교외강좌에서 3주 연속으로 한국 현대시에 대한 강의를 맡게 됐다. 오늘이 첫날이었는데,  대략 '한국 현대시 개관'이란 제하의 강의였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강좌이기 때문에(모두 여성이고 대부분이 주부) 가급적 평이해야 한다는 게 제1원칙이고, 웬만큼은 재미있어야 한다는 게 제2원칙이다(요즘은 대학강의에서도 이런 원칙들이 요구되는 듯해서 유감스럽지만). 모두가 경청해주신 건 아니지만 고개를 끄덕이시는 분들이 더러 계셔서 보람이 없지는 않았다(요즘은 대학에서도 고개를 끄덕이는 학생은 드물게 만난다).

강의자료로 쓴 것 중 일부는 이미 6년전에 써두고 강의했던 것이어서 이번이 말하자면 '재탕'이었는데, 그간에 늘어난 건 시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이래저래 순발력을 발휘하는 '능청'이 아닌가 싶다. 이전에 '기형도 시에 대한 편집증적 읽기, 분열증적 읽기'에 포함돼 있었던 간략한 현대시사를 조금 보충해가며 다시 올려놓는다. 이 또한 '재탕'일 텐데, '이미지-버전'이란 핑계가 없지는 않다(능청과 핑계가 어쩌면 나의 왼팔과 오른팔인가?). 읽기에/보기에 편하면 좋은 것 아니겠는가? 대신에 군더더기말들을 더러 집어넣었다.

강의는 시 일반론에 대한 얘기로 시작해서 20세기 초반부터 최근에 이르는 한국시의 대표적 시인들을 거명하는 식이었는데, 여기서는 20세기 시사에 대한 간략한 리뷰만을 정리해둔다.

 

 

 

 

<황무지>(1922)의 시인이자, 아마도 가장 유명한 20세기 시인, T. S. 엘리엇은 시뿐만 아니라 시론에서도 정력적이었는데, 그가 유달리 강조한 것은 전통과 역사의식이었다(러시아에서 '토마스 엘리어트'의 두툼한 비평적 에세이 선집이 작년에 나왔었는데, 나는 그가 '티. 에스. 엘리엇'이란 걸 뒤늦게야 알았다. '토마스'란 이름이 너무 낯설었기에! 거기에 러시아어로 번역된 평문 '전통과 개인의 재능' 등이 포함돼 있었을 터인데, 애석하게도 책을 구입할 여유가 내겐 없었다. 참고로, 엘리엇은 우리 시단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외국 시인의 한 사람이다. 비록 요즘은 '4월은 잔인한 달(April is the cruelest month)'이란 <황무지>의 시구를 읊조리는 중고생들을 만나기가 아주 힘들 뿐더러 젊은 시인들조차도 '열심히' 읽는 것 같지 않지만).

 

 

 

 

모름지기 25세 이후에도 시를 쓰려는 자는 역사에 대한 '감'을 먼저 연마해야 한다는 것. 그가 말하는 역사는 단순한 시사(詩史)를 넘어서 종교사, 종교적/상징적 상상력의 역사에 걸쳐 있지만, 하여간에 시란 것이 젊은 날의 겉멋이나 치기가 아니라는 것을 그는 줄곧 강조하였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김춘수는 (25세 이후에도?) 시론(詩論)을 갖고 있지 않은 시인은 천재이거나 아마추어라고 평했는데(<시의 위상>), 시에 대한 자신만의 주관, 혹은 관념(idea)이 없다면 일찌감치 시는 그만두는 것이 좋다는 뜻을 그의 주장은 함축하고 있는 듯하다(참고로, 시작법이 아니라 작시법이 거의 부재하는 한국 현대시에서 '천재'가 나오기는 매우 힘들다. 그것이 우리의 '언어적 조건'이다. 그러니 '치기'나 '도취'로 시를 쓰는 경우가 아니라면 시론은 필수적이다. 새삼 확인해두자면, '시론'이란 시에 대한 로고스, 즉 논리를 갖추는 걸 말한다).

그런데, 시론이란 것이 모국어에 대한 감각과 시사(詩史)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 없이 가능하지 않다고 할 때, 모름지기 시인이라면 시의 전통과 역사적 전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며 그에 대한 부단한 의식 속에서, 그것과 맞서며 아주 조금씩 전진해나갈 따름이다. 시에 대한 이러한 태도를 편집증적이라 부를 수 있을까?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시인은 그 이전에 씌어진 모든 시를 다 읽고 나서야 거기에 한 문장, 혹은 한 글자 덧붙일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한 시의 역사를 재구성할 때, 20세기 한국시란 무엇이었나?(한국 현대시의 세 가지 원천으로 나는 민요, 한시, 그리고 번역시를 꼽는다. 김소월과 이육사는 각각 민요적 전통과 한시적 전통의 핵심에 놓여 있는 시인들이다. 이상은 많이 밝혀진 바이지만, '한국어'라는 자연어가 아닌 '기호'로 시를 썼던, 보다 정확하게는 문학행위를 했던 시인/작가이다) 20세기 초에 한국시의 기초를 이룬 시인들의 이름으로 김소월(혼의 시), 이육사(정신의 시), 이상(기교의 시) 등등의 계보를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김윤식의 분류이다). 

 

 

 

 

 

 

 

 

 

하지만, 20세기를 통틀어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시인을 꼽으라면, 단연 시업(詩業) 60년을 넘긴 미당 서정주를 들 것이다(물론 미당에 버금가는 시인으로 백석을 꼽을 수 있겠지만, 그의 시업은 상대적으로 너무 짧았다. 때문에 백석은 '제도로서의 문학'과는 거의 무관한 시인이다. 물론 그의 계보를 따르는 시인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가령, <외롭고 높고 쓸쓸한>의 시인 안도현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그의 정치적 과오 때문에 폄하되기도 하지만 그가 우리 부족시의 족장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이 '부족시'는 상대적으로 '국가'나 '민족'과는 무관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현역’을 자임하던 그의 시를 보라.

 

 

 

 

 

 

 

 

내 나이 80이 넘었으니/ 시를 못쓰는 날은

늙은 내 할망구의 손톱이나 깎어주자./ 발톱도 또 이쁘게 깎어주자.

훈장 여편네로 고생살이 하기에/ 거칠대로 거칠어진 아내 손발의

손톱 발톱이나 이뿌게 깎어주자.

내 시에 나오는 초승달같이/ 아내 손톱밑에 아직도 떠오르는

초사흘 달 바래보며 마음 달래자./ 마음 달래자. 마음 달래자.


 

 

 

 

 

 

 

시를 못쓰날에 할망구 손톱 발톱 깎어주며 마음 달래는 일도 '이뿌게' 시로 만드는 그의 솜씨는 대가급이다. 그러나 서정주의 시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되어 있는, 체념적 달관 혹은 달관적 체념의 세계(비평가 김현은 서정주의 정신주의에 대해서 “그의 정신주의는 그가 그의 삶을 정면에서 바라보지 않는 데서 기인하는 태도의 희극”이라고 적은 바 있다. 김윤식/김현의 <한국문학사> 참조)는 이념(idea), 혹은 형이상(形而上)을 배제한 세계이다(“西으로 가는 달 같이는/ 나는 아무래도 갈 수가 없다”(<추천사(鞦韆詞)>는 구절에는 그의 체념적 달관이 집약되어 있다(참고로, 요즘 중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는 '친일파' 미당의 시들이 거의 빠져 있다고 한다. 문학 교과서에서 경우 명맥을 유지할 정도라고. 대개 학생들은 교과서에 실린 시들을 '부정적으로' 인지하곤 하므로, 역설적이지만 미당 시의 독자들에겐 유감스러운 일이 아니겠다. 학생들에게 미당의 시를 안 읽히는 방법은 교과서에서 빼는 게 아니라 너무 많이 집어넣어서 '물리도록' 혹은 '신물이 나도록' 하는 것이다). 

 

이 이념-이후에 그는 “가난이란 한낱 襤樓에 지나지 않는다/.../ 靑山이 그 무릎 아래 芝蘭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엔 없다”(<無等을 부며>)는 사실에 만족한다. 그것이 또한 달관적 체념의 세계이다). 참고로, 한국시에 형이상학적 깊이가 결여돼 있다는 비판은 김우창 교수의 평문 '한국시와 형이상'을 참조할 수 있다(<궁핍한 시대의 시인> 혹은 <김우창 전집1> 참조. 나는 이 절판된 전집에 재출간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기이하며 유감스럽다. 더불어 유감스러운 건 김화영 교수의 <미당 서정주의 시에 대하여>(민음사, 1984)도 절판된 채로 다시 구해보기 어렵게 된 것. 본격적인 시인론이자 시분석론인데 당시로서는 드문 시도였다).


 

 

 

 

 

 

 

‘시인부락’의 동인으로 같이 활동했던('부락'은 일본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천민집단'을 뜻하는 걸로 안다) 청마 유치환은 서정주와 달리 이념적 ‘깃발’을 표나게 내세운 바 있으나, 언어적 조탁에 있어서 그에 미치지 못했고, 한자어투로 이루어진 그의 남성적 어조는 계보를 얻지 못했다(청마를 가까이 한 이에 김춘수가 있지만, 김춘수의 여성적 세계는 유치환의 남성적 세계와 대조적이다. 김춘수 자신이 시인하는 바이지만, 그의 초기시는 서정주의 계보에 속한다). 그리고 그의 시업(詩業) 또한 너무 일찍 한국시사에서 단절되었다. 그리하여 멀리는 40년대부터, 한국시단은 미당과 그 일가(一家)에 의해 접수된다(이른바, '미당스 패밀리' 되시겠다. 문단 용어로는 '미당 사관학교'라 하고).

 

 

 

 

 

 

 

 

한편으로, 한국시사에서 지나치게 과대평가된 사례인 ‘청록파’의 경우, 박두진의 몇몇 시편들을 제외하면 비이념적 정관적(靜觀的) 세계관에 침윤되어 있다. 박목월의 경우가 대표적이지만, “구름에 달가듯”한 세계엔 이념이 틈입할 여지가 없다. 그림(=풍경)만 남고 목소리가 빠진 시는 왜소하다(지난주 고종석도 자신의 연재 '시인공화국의 풍경들'에서 지적한 것이지만, 이러한 '과대평가'에 한몫한 것은 이 세 시인이 모두 훌륭한 인격으로 후배 시인들이나 학인들에게 존경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덕분에, 이들과 다른 경향의 시(인)들이 문학사에서 상대적으로 소홀한 대접을 받았다).    

 

 

 

 

 

 

 

 

그리하여 여기에 유사-오디푸스 콤플렉스가 개입한다. 미당 이후의 시인은 하여간에 시인으로서 자신의 이름을 얻기 위해서는 미당과 싸워야 했다(김현의 어투이다). 그를 넘어서거나 그와 다른 세계로 질주해야만 했던 것이다. 50년대 모더니즘 시운동이 잠시 시림(詩林)을 떠들썩하게 했지만(박인환, 김수영 등이 참여한 사화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이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곧 빈수레였다는 것이 들통난다. 그들은 木馬를 타고간 소녀의 옷자락 얘기만 잠시 늘어놓았을 뿐이었다. ‘언어(말부림)’를 가지고 미당에 맞서 그보다 윗길로 나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고은 정도가 서정주의 어법을 가지고도 자신의 이름으로 살아남은 희귀한 사례이다. 그의 시업이 60년을 넘길 수 있을는지? 한편, 미당학교의 '장학생'이었던 박재삼 등도 거명할 수 있을 것이다). 

 

 

 

 

 

미당을 넘어설 수 있는 가능한 대안이라는 것은 미당의 이념적 ‘퇴행’을 걸고 넘어질 수 있는 이념이어야 했다. 60년대 김수영과 김춘수는 이 점에서 제각각의 방식이긴 하지만, 뚜렷하다. 60년대 한국사회를 지배했던 이념적 화두가 ‘자유’였다는 점에서 김수영은 6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손색이 없다. “달나라의 장난” 같은 그의 시가 처음부터 끝까지 줄기차게 노래, 아니 절규한 것이 바로 자유였기 때문이다. 산문적인 그의 시의 어법 또한 미당과는 전혀 종류를 달리하였다. 4.19 이후에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 버렸다”(<그 방을 생각하며>)고 그는 적고 있는데, 조금 다른 맥락에서, 김수영은 미당의 그늘 아래 놓인 해방 이후 한국시사에서 자신의 ‘방’을 마련한 드문 예에 속한다. “그 방의 벽에는 싸우라 싸우라 싸우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어둠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김춘수는 조금 다른 방향에서 미당의 빈 자리를 물고 늘어진다. 그는 언어의 이념(이라기보다는 관념)을 자신의 탐구 대상으로 삼는다. 이 또한 의미(=역사)로부터의 도피, 혹은 퇴행이라는 혐의를 지우기 힘든 경우지만, 어쨌거나 언어의 가지 끝에 매달리는 데는 성공한다. 이념의 부재로 미당의 시를 특징지울 수 있다면, 김춘수의 시는 한술 더 떠서 의미의 부재를 지향한다. 언어적 자의식을 대표하는 그에게 시는 “未知의 까마득한 어둠”이고 “얼굴을 가리운 나의 新婦”이다. 그것은 말부림의 세계가 아니라, 말 비우기의 세계, 의미의 빈 그릇의 세계이다. 그리하여 어쨌거나 김수영과 김춘수에 와서 한국시는 미당시에서 탈색된 근대성(=시대성)을 다시 획득한다. 그러나 그것은 김수영의 이른 죽음을 대가로 치른 것이었다. 그리고 맞은 70년대에도 미당시는 여전히 도전/극복의 대상이다.

 


 

 

 

 

 

 

젊은 전사들의 이름으로 평론가 김현은 황동규, 정현종, 오규원 등을 지목하고 있는데,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즐거운 편지>)의 황동규는 “물 빛 라일락의 빛과 香”을 가진 미당의 '永遠' 대신에 비극적 세계인식의 '자세'를 대립시키고, “...女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女子, 눈물 같은 女子, 슬픔 같은 女子, 병신 같은 女子, 시집 같은 女子...”(<한 잎의 女子>)의 오규원은 대상과 언어와의 관계를 의혹이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연기(緣起)론 세계인식에 딴지를 건다. 거기에 “나는 별아저씨, 바람 남편이지”의 시인 정현종의 '숨통'과 '걸음걸이'가 미당의 행보를 뒤쫓는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분명하게 70년대를 증언할 수 있는 시인은 70년대의 포문을 연 <오적(五賊)>(1970)의 김지하이다. 그는 대뜸 이렇게 시작하지 않았던가. “詩를 쓰되 좀스럽게 쓰지 말고 똑 이렇게 쓰럇다” 이 황토(黃土)의 땅에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를 외치는 일에 비하면, 조곤조곤한 시들은 좀스럽지 않을 수 없다. 그가 70년대의 대부분을 감옥에서 보낸 것 또한 그의 ‘대표성’을 수긍하게 한다. 시 또한 감옥에 들어가 있어야 마땅했을 시기가 아니었던가.

 

 

 

 

 

 

 

 

 

80년대 한국시는 80년 광주에서 시작된다. 그보다 조금 먼저 등단한 이성복은 이 “정든 유곽”의 땅에서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는 진단서를 제출한 바 있지만, 가장 명료하게 80년대를 규정한 이는 황지우이다. “여기는 초토입니다/ 그 우에서 무얼 하겠습니까”(<에프킬라를 뿌리며>) 여기서 황지우의 '초토'는 김지하의 '황토'에 견줄 만하다. 80년대는 죽음의 연대였고, 시인들은 네크로필리야(necrophilia)에 들린 파리떼처럼 몰려들어 그 죽음을 파헤치고 음미하였다. 죽음에 분노하였고, 그 부채의식에 통곡하였다. 간혹 미치기도 하였다. “아싸라비야, 도로아미타불”이나 “내가 살아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일찍이 나는>)고 한 최승자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성복의 어법을 빌리자면, “모두 죽었는데, 아무도 죽은 줄 몰랐다.”고 할 수 있을까. 이러한 죽음의 기운이 조금씩 떨쳐지는 것은 87년 이후이다. 그 이후 한국사회는 개량적․형식적 민주화의 길로 접어든다. 그리고 이어진 90년대에 80년대는 이미 '과거'가 돼 버리고, '후일담'이 횡행한다(한국사회는 가끔 (나쁜 쪽으로) 정신분열증적이다. 과거-망각(청산이 아니다!)에 있어서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을 듯하다. 정신분열증적인 포스트-모던사회에서의 선전을 기대해볼 수 있을까?). 이 '시대의 우울'을 이렇게 정리해볼 수 있을까? "서른, 잔치는 끝났다, 이 돼지들아!"

 

 

 

 

 

 

 

90년대적인 시(현상)으로 장정일과 유하의 경우를 들고 싶다(비록 그들이 등장한 건 80년대 말이지만). <햄버거에 대한 명상>(1987)의 장정일과 <무림일기>(1989),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의 유하는 키치적인 상상력과 패러디적인 기법으로 무장하고 “진지한 시”의 전통에 냉소를 퍼붓는다(이미지가 지원되지 않는군. 이게 언제적 유하인가?). “쇠고기와 돼지고기를 곱게 다졌으면,/ 이번에는 양파 1개를 곱게 다져 기름 두른 프라이팬에 넣고/ 노릇노릇할 때까지 식혀놓는다/ 소리내며 튀는 기름과 기분 좋은 양파 향기는/ 가벼운 흥분으로 당신의 맥박을 빠르게 할 것이다...”; “그 무렵 하남 땅에서 민초들의 항쟁이 있었다/ 아, 이름하여 하남의 대혈겁(大血劫)/ 광두일귀는 공수무극파천장(空輸無極破天掌)을 퍼부어 무림잡배의 폭동을/ 무사히 제압했다고 공표, 무림의 안녕을 거듭 확인했다”

 

 

이들의 “가벼운 흥분”과 재미의 세계는 80년대적인 무거움과 극적이면서 단호하게 결별한다. 이는 새로운 시이면서, 시의 끝(=종말)이다. 근황? 장정일은 일찍이 시를 그만 두었고(소설을 쓰다가 급기야는 <삼국지>까지 옮기고 방송진행자까지 되었다. 오래 살고 볼일이다!), 유하는 영화계 주변을 맴돌다가 다시 시의 초심(初心)으로 되돌가겠다며 “나의 사랑은 나비처럼 가벼웠다”를 발표하고 욕을 먹는다. 하지만, 다시 영화를 만들고 이번엔 성공한다. 영화를 만든다는 건 생각만큼 미친짓은 아니다. 특히 요즘은.

 

 

 

 

 

 

 

 

 

그리고 기형도. 그의 시가 자리하는 건 80년대 말이다. 이 글은 전체가 사실 기형도론의 서론으로 씌어진 것이기도 했다. 물론 100년의 한국시사가 두 쪽 분량으로 요약될 리는 만무하지만, 적어도 (편집증적인 시읽기에 있어서) 시의 전사(前史)를 모르고 한 시인에 대해 말한다는 건 어불성설이기 때문에 이러한 사전공작이 필요하다고 당시엔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시에 대해선 얼마전에도 몇 자 적어둔 바 있다. 언젠가 제대로 된 규모의 글을 쓴다면, 아마도 이 전사(前史) 또한 제대로 된 규모로 재구성되어야 하리라. 제대로 읽는다는 건 제대로 사는 것만큼이나 어렵고도 힘든 일이다...   

 

05. 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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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shot 2005-12-28 1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으로 공들인 글이네요. 잘 읽고 갑니다~~

poptrash 2005-12-29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 학기에 미당의 제자이신 노교수님께 한국 문학사를 배웠어요. 비록 달리고 달려도 해방직전까지 겨우 배울 수 있었을 뿐이었지만. 좋은 글 잘봤습니다.

jiwok 2005-12-29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십니까? 로쟈님.
잘 읽었습니다.
저는 2차대전 러시아 사회에 대해 관심이 있는 회사원 입니다. 실례되는 것은 알지만 마땅한 자료를 구하지 못해서요. 궁금한 것은 한국에 번역된 서적 중 1940년대 독-소 전쟁 시기에 대한 경험담/개인적인 회고록/소설/ 역사서 등이 있는지요? "여기 들어오는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와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은 읽었습니다만 자주 인용되는 서적 중에 Vasilli grossman의 "Life & Fate"가 있던데 매우 궁금했습니다만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부탁드립니다

로쟈 2005-12-29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서관을 검색해보니까, 그로스만의 책은 8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이고 불역본이 들어와 있네요(원저는 물론 러시아어본입니다). 말씀대로라면 영역본도 있겠습니다. 스탈린시대에 관한 회고록 등은 차고 넘치치 않을까 싶습니다. 최근에 그와 관련한 국내 논문들을 교정할 일이 있었는데, 요즘은 학술논문들이 원문 서비스가 되므로 그쪽을 검색해보셔도 되겠습니다. 톰슨의 20세기 러시아사 책도 참고할 만하겠고, 역자가 전문가이므로 저보다는 더 확실한 답변을 드릴 수 있을 듯합니다. 한번 문의해보시길...

jiwok 2005-12-29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답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1.
스탈린 시대에 관한 회고록 등이 차고 넘친다고 말씀해 주셨는데 모두 학술논문인가요?

2. 저의 구체적인 관심사는 독-소 전쟁 시기의 전쟁을 경험한(전선 또는 후방에서) 사람들의 이야기 입니다. 전투 그 자체에 대한 자료들은 많이 보유하고 있거든요.

건강하십시오.

추신) 로쟈님의 글을 읽을 때마다 직업적 연관성이 높다해도 이다지도 분야의 포괄성과 깊이를 모두 안고 갈 수 있다는데 신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로쟈 2005-12-29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회고록'들을 다룬 논문들도 많이 씌어지고 있고, 당연히 그 재료가 되는 회고록들은 넘쳐날 거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올해가 러시아에서는 승전 60주년이었기에 이에 대한 관련서들이 쏟아져나왔을 거라는 짐작도 보태보고요. 개인적으론 스탈린주의와 그 시대 문학에 관심을 갖고 있지만, '회고록' 같은 1차 자료는 문학도들보다는 역사학도들의 관심대상입니다. 때문에, 제가 자세한 도움의 말씀을 드리지는 못합니다. 혹 관련서 집필 계획을 갖고 계신 건가요?

니브리티 2005-12-30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jiwok님/2번 항목의 독-소 전쟁 경험과 관련한 소설이라면 볼프강 보르헤르트의 <이별없는 세대>가 잘 알려져 있는 거 같아요.(꽤 유명한 소설임)

니브리티 2005-12-30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전에 말씀드렸던 공간 오픈겸 해서 사람들을 오늘 30일 저녁 7시에 초대했거든요. 너무 늦게 말씀드리는 것 같은데,,;;;; 혹시 관심있으시면 나중에라도 한번 들러주시면 고맙겠습니다....www.800.or.kr (800은 서지분류상 문학 항목...--;;)

로쟈 2005-12-30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니브리티님/ 저는 아이와 함께 지금 코엑스몰에 와 있습니다. 초대에 응하지 못해서 죄송하지만, 좋은 시간, 공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로쟈 2005-12-31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햇빛비둘기님/ 새해 인사에 감사드립니다. '내년에도' 열씸히 쓰겠습니다(생계에 지장을 초래하지 않는 한도에서). 열씸히 읽어주시고 가끔은 코멘트도 해주시길. 물론 생계에 지장을 받으시지 않는 한도 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