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젝의 <진짜 눈물의 공포>(울력, 2004)를 읽고 있다. 작년에 1부 1장까지 읽고 덮어두었던 책인데(주로 영화이론을 다루는 1부는 정색하고 읽어야 한다. 특히 '봉합'이론 같은 건 다른 일들을 봉합하고 읽어야 한다. 한데, 그럴 만한 여유를 갖기가 힘들다), 이번에 키에슬롭스키(1941-1996) 서거 10주기를 맞이하여(내주에는 영화제도 개최된다) 한번쯤 그의 영화세계를 돌이켜보고 싶었다. 내가 선택한 건 지젝을 경유하는 것인데, 최선의 선택이면서 동시에 다른 선택의 여지도 없다(국내 키에슬로프스키 관련서는 그밖에 <데칼로그> 정도가 유일하므로).

아마 이 책을 처음 접하고 어려움을 느낀 독자들이 더러 있을 법한데, 조금더 읽기 편한, 그리고 키에슬롭스키의 영화를 막바로 다루고 있는 제2부부터 읽는 게 나을 듯하다. 내가 그렇게 읽고 있는데, 훨씬 진도가 빨리 나간다. 우리말 번역본은 대충 무난하지만 섬세하지는 않다. 읽어나가면서 동의하지 않는 대목에 대해서는 지적하기로 한다. 먼저, 이 글에서는 4장 "이제 내겐 글리세린이 있소!"를 읽어보고 싶은데, 영화감독으로서 키에슬롭스키의 변신/이행 과정에 대해 지젝이 자신의 '논리'를  부여하고 있는 장이기에 키에슬롭스키에 대한 '개관'으로서 적절해 보인다.

지젝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키에슬롭스키가 다큐멘터리 리얼리즘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실재에 대한 충실성 때문이었다 - 어느 지점에서인가 우리는 현실 자체보다 더 실재 같은 어떤 것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125쪽) "It was precisely a fidelity to the Real that compelled Kieslowski to abandon documentary realism - at some point, one encounters something more Real than reality itself."(71쪽)

여기서 실재(the Real)와 현실(reality)은 모두 라캉-지젝의 용어이므로 이에 대한 사전 이해가 필요하다. 그것만 전제된다면 내용은 간명하다. 그 '내용'에 대해 말하기 전에 잠시 영화평론가 정성일이 오래전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나와서 키에슬롭스키에 대해 언급했던 대목을 참고삼아 일부 인용해본다. 우리에겐 다소 낯선 '다큐멘터리 감독' 키에슬롭스키에 대해 소개하고 있는 대목이다(이 방송을 들었던 기억이 새롭다).

 

 

 

 

정성일: "오늘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릴 감독은 크지쉬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입니다. 아마도 제 생각으로 지금 영화를 만들고 있는 감독 중에서는 이만큼 독창적이고 그리고 깊이 있는 영화를 만들어 내는 감독은 달리 없을 것입니다.(...) 키에슬로프스키 선풍이 다가온 것은 그러나 그렇게 오래된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은 음 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사실 키에슬로프스키의 이름은 폴란드의 영화 감독 중에 그저 낯설은 새로운 이름 정도밖에 되지 않았었고 그에게 주목하고 있는 영화 평론가들은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꾸준히 그의 작품이 깐느에 출품되기는 했었지만은 그러나 번번이 공식 경쟁 부분에 끼여들거나 아니면 'Un Certain Regard' 그러니까 '주목할 만한 시선'에 그 그의 영화를 찾아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됐었습니다. 하지만 88년도에 10편의 영화가 동시에 개봉되면서 그야말로 사정은 모두 바뀌었습니다. 그 영화가 그 유명한 십계입니다. 그 88년 십계를 발표하면서 그 영화 평론가들은 이 감독이 어쩌면 우리의 세기말에 다가온 우리 시대를 다음 시대에로 이어줄 유일한 이름일지도 모른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정성일: "만약에 여기 그 이 프로의 청취자 분들께서 만약 유럽에 영화를 공부하러 가신다면은 4개의 학교 중에 하나를 선택하시면 됩니다. 이 4개의 학교를 보통 최고의 학교라고 부르는데요, 영국의 그 BF'라는 학교가 있습니다. 이곳은 '런던 UNIVERSITY'와 같이 그 관계를 맺고 계속 세미나를 하는 학교이구요, 또 프랑스에는 이데끄가 있습니다. 최근에는 이름을 페미스로 바꿨는데요 입학 시험 1주일을 봐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베를린 영화학교가 있습니다. 벤더스가 떨어진 바로 그 학교입니다. 마지막으로 폴란드의 로쯔 스쿨이 있습니다."

정성일: "어....이 4개의 학교 출신들....학생들이 1년에 한 번씩 뮌헨 학생 영화 페스티벌을 벌리는데요, 우연히 한 번 이 페스티벌에서 영화를 볼 기회가 있었는데 이 4 학교 중에서 가장 영화를 새롭게 찍는 학교의 학생들은 프랑스 이데끄 출신이었습니다. 보면은 뭐 거의 눈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테크닉이 뛰어난 영화를 찍고 이렇게 기발한 생각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입을 벌리게 합니다. 또 BFI의 학생들의 영화를 보면 테크닉이 거의 완벽합니다. 마치 이것이 학생 영화가 아니라 헐리우드에서 와서 온갖 일류의 스텝 진을 갖고 만든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그리고 베를린 영화학교 작품들을 보면은 거의 정치적인 이슈, 아주 민감한 소재들을 다루어서 충격적으로 묘사하는데는 일가견들이 있습니다. 제일 따분한 것은 바로 로쯔 학교 출신들입니다. 이 학생들의 영화를 보면 스타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최고의 영화는 다 로쯔 학교 출신들 영화입니다.(...) 이들이 영화를 찍을 때는 스타일보다도 주제에 대해 아주 끈질긴 연출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 특징인데요, 바로 키에슬로브스키가 나온 학교가 이 학교입니다."(*요즘의 표기는 '키에슬로브스키'가 아니라 '키에슬롭스키'이지만, 수정하지는 않았다.)

정성일: "아, 크지쉬토프 키에슬로브스키는 1941년생입니다. 그러니까 벌써 나이가 꽤 되는 셈인데요, 키에슬로브스키는 원래 영화를 전공할 생각이 아니었었고 신부님이 되는 것이 자기의 인생 목표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25살이 되면서 자기의 인생관을 바꾸고 이제 영화를 하기로 결심하고 로쯔 필름 스쿨에 들어갔는데요, 이 학교에서 원래 전공한 것은 그 극영화가 아니라 다큐멘터리였다고 합니다. 이 당시 영화 공부를 하면서 존경했었던 영화 감독은 그 카메라를 든 사나이를 찍었었던 지가 베르토프 그리고 독일 영화 감독인 프리드리히 무르나우 또 북극의 나누크라는 그 무성 영화 시대 때의 다큐멘터리의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낸 로버트 플레어티 그리고 프랑스의 장세니스트라고까지 불리우는 엄격한 촬영감독, 타르콥스키도 그렇도록 존경했었던 영화 감독 로베르 브레송이였었습니다."

정성일: "어..이 키에슬로브스키는 학교를 졸업한 이후 꾸준히 다큐멘터리 작업을 해왔었는데요...사실 다큐멘터리에 대한 이해 없이는 키에슬로브스키를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최근 그 영화광을 자칭하시는 분들이 굉장히 많아졌었는 많아지고 있는데요 그 그런데 문제는 게으른 영화광들의 아주 그럴듯한 변명이 하나 있습니다. 그러니까 열심히 그 영화 소년들이 또는 후배들이 영화를 이리저리 토론하고 분석하고 제단하고 해부하고 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 빈정거리는 듯한 태도로 보고 있다 딱 한마디 근사한 표정을 지으며 던집니다. '영화는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받아들여야 되는 거야.' 저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정말 게으르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요, 사실 영화는 제 생각에는 머리와 가슴 모두를 따듯하게 만드는 것이 영화입니다."



정성일: "가슴만이 따듯해진다면 그거야말로 그것은 감정적이고 감성적인 것이지 그것이 영화의 본연의 자세라고 얘기할 순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다큐멘터리 정신입니다. 키에슬롭스키는 자기의 인터뷰 책인 최근에 그 BFI 에서 발행한 <키에슬로브스키 & 키에슬로브스키>란 책을 보고 있으면(*잘못 필사돼 있는데, '&'가 아니라 'on'이다) "영화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바로 그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답하였습니다. "머리와 가슴 그 모두를 따뜻하게 만들어야할 것이다." 동구 다큐멘터리는 그 유럽 다큐나 미국 다큐 또는 라틴 아메리카나 소련, 일본 다큐멘터리들과는 다소 그 다른 입장을 갖고 있습니다. 동구 다큐멘터리의 특징은 인간을 다루는 것입니다. 인간을 중심으로 놓는 사회주의가 왔는데 왜 자본으로부터의 해방된 사회주의에서 인간은 그 중심에 있지 않은가 라는 것이 사회주의 다큐멘터리, 그 중에서도 특히 동구권 다큐멘터리들이 자신들이 서 있는 조건에 대해서 던지는 아주 비판적인 질문일 것입니다."

정성일: "이러한 입장에서 키에슬로브스키는 약 10년간 다큐멘터리 작업을 계속 해왔습니다. 그는 지금도 영화를 찍으면서 이 시기에 찍었었던 그 자기의 작업 방식을 버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는 작업을 할 때 항상 하는 방법은...하얀 종이를 한 장 올려놓고 그리고 지금부터 찍어야될 영화의 스토리를 그 한 장에 요약한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는 그것을 이제 5페이지 정도 늘립니다. 5페이지로 늘린 것을 다시 10페이지로 늘립니다. 그리고 10페이지로 늘린 것을 이제 시나리오 작가를 대동해서 20페이지에서 30페이지로 늘린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늘려 논 다음엔 촬영 감독을 데려와서 100페이지로 늘려 논다고 합니다. 그리고 100페이지가 되어진 다음에는 배우를 불러서 거기서 그것을 낭독하게 하면서 시나리오 작가와 함께 그 배우의 엑센트를 들어가며 대사를 써 나간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감독이 그 대사를 만들어 놓고 배우보고 그것을 아무리 주문해봐야 그것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키에슬로브스키는 그것을 읽으면서 그 배우의 음색 그리고 그가 놓치고 있는 발음 같은 것들도 그가 필요 이상으로 격앙하는 대목들을 일일이 체크하여 그 배우에 맞는 대사를 만들어 줄 때, 그러니까 그의 작업 방법은 배우 그 자신에 대한 다큐멘터리이기도 합니다."(강조는 나의 것. 지젝도 비슷한 내용은 얘기를 한다.)

그렇게 다큐멘터리를 찍으면서 키에슬롭스키는 폴란드 사회현실(=리얼리티)에 대한 재현을 의도했지만(그는 1966년부터 1988년까지 25편 가량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었다), 어느 지점에서는 부득불 리얼리티 너머의 '실재'와 조우할 수밖에 없었고, 혹은 '실재'에로 침입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그로서는 어떤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는 처지에 내몰렸다. '실재에 대한 충실성' 혹은 예의 때문에.

가령, "<첫사랑>(1974)이라는 다큐멘터리의 마지막 부분에서 카메라는 결혼전에 임신한 젊은 커플을 따라가면서 그들이 결혼하여 아기를 낳고, 새로 태어난 아기를 손에 안고 우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준다. 키에슬롭스키가 '진짜 눈물의 공포'를 언급하는 것은, 타인의 내밀한 부분에 그렇게 허락도 없이 파고 들어가는 외설성에 대한 반응이었다. 그가 다큐멘터리에서 극영화로 넘어가기로 결심한 것은 따라서 가장 근본적인 수준에서 볼 때 윤리적인 결심이었던 것이다."(126-7쪽, 강조는 나의 것)

키에슬롭스키가 육성으로 말하는 바는 이렇다: "모든 것을 기술할 수는 없다. 그것이 다큐멘터리의 큰 문제이다. 다큐멘터리를 자기 덫에 걸린다... 사랑에 관한 영화를 만들고 있다 치자. 만약 실제 인물들이 거기에서 사랑을 나누고 있다 하더라도 내가 그 침실에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내가 깨달은 것은 한 개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려고 할수록 내 관심을 자아냈던 대상들은 스스로를 닫아버린다는 것이었다. 내가 극영화로 전환한 것은 아마도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극영화는 뭐가 다른가: "극영화는 아무 문제도 없다. 침대에서 사랑을 나눌 커플이 필요한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 물론 기꺼이 브라를 벗을 여배우를 찾기가 쉽지 않을 수 있지만 이내 그런 사람을 찾아낼 것이다... 나는 글리세린을 약간 살 수도 있다. 그것을 여배우의 눈에 몇 방울 떨어뜨리면 그녀는 울 것이다. 나는 몇 번이간 애써 진짜 눈물을 가까스로 찍은 적이 있다. 그것은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이다. 그러나 이제 내겐 글리세린이 있다. 진짜 눈물은 두렵다. 사실 내게 그 눈물을 찍을 권리가 있는지조차도 모르겠다.(...) 그것이 내가 다큐멘터리로부터 도망친 주된 이유이다."(127-8쪽, 강조는 나의 것)

이렇듯 다큐멘터리에서 극영화로 이행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를 지제은 키에슬롭스키의 영화 <카메라광>(1979)라고 본다. "이 영화는 카메라에 대한 열정으로 인해 아내와 아이, 일자리를 잃어버린 남자를 그린, 다뷰멘터리 영화감독에 관한 극영화이다(a fiction film about a documentary film-maker). 따라서 그 영화에는 '침범하지 마시오' 표시가 붙어 있는, 그래서 포르노그라피적인 외설을 피하려 한다면 오직 허구를 통해서만 접근해야 하는 환상적인 내밀함의 영역이 존재한다."(128쪽)

이러한 다큐멘터리 감독의 또다른 형상으로 지젝은 <베로니크의 두 개의 삶>(<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의 인형조종사와 <레드>의 판사를 든다: "어떤 점에서는 판사는 키에슬롭스키의 상당히 명백한 자화상이라 할 수 있을 터인데, 그렇다면 그는 키에슬롭스키 자신의 유혹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 유혹이란 외설적인 실재에의 유혹이다. 아래는 <레드>(1994)에서 이웃들의 사적인 전화통화를 은밀히 엿듣는 퇴직 판사역 장 루이  트랭티낭(1930- )의 모습(내게는 아누크 에미와 공연했던 클로드 를루슈 감독의 영화 <남과 여>(1966)의 주연으로 각인된 배우이다).

'진짜 눈물'을 찍는 건 포르노그라피적 외설과 다름없다(그런 의미에서 '몰래카메라'는 포르노그라피이다). 그걸 피하기 위해서는 오직 허구(극영화)를 경유해야 한다. '진짜 눈물' 대신에 '글리세린 눈물'. 다시 반복하자면, "인간에 대한 모든 알량한 휴머니즘적 찬사는 그저 '침범하지 마시오'라는 표시에 대한 외설적 위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적절한 일은 내밀하고 특이한 환상 영역과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성을 입증하는 이 깨지기 쉬운 요소들을 에둘러 넌지시 암시할 수 있을 뿐이다."(129쪽) 마지막 문장은 "one can only circumscribe, hint at, these fragile elements that bear witness to a human personality."(73쪽)의 번역이다. 여기서 'a human personality'는 '인간성 일반'이 아니라 어떤 한 인간의 고유한 '개인성'을 뜻한다.

흥미로운 것은 지젝이 진짜 눈물에 대한 키에슬롭스키의 금지를 구약에서 '이미지들'에 대한 금지와 열결짓는다는 점이다. 시간상/분량상 그 얘기는 다른 자리에서 마저 다루기로 한다.

06. 03. 08 -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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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shot 2006-03-08 2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눈물의 공포>...잘 읽히지가 않았는데 이번 기회에 다시 한번 봐야겠습니다.

이네파벨 2006-03-08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키에슬롭스키에 대한 글들...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주에 영화제를 한다구요...? 어디에서 하는지...좀 자세한 정보를 알 수 있을까요?

그의 영화들을 다시 보고 싶은 강렬한 마음이 들지만...
(그의 영화들이라기보다...사실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이라고 해야 옳겠죠.
삼색 시리즈나...또 다른 단편 하나는...그냥 키에슬롭스키 특유의 분위기만으로도 무척 좋았지만 지금까지 기억나는 뚜렷한 인상을 남기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베로니카>는........제가 본 가장 아름다운 영화로 주저없이 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한편으로 이 영화를 처음 접했을 때의 그 감동을 다시 만나지 못하면 어떡하나...
(영화는 그대로이나 나 자신의 내부에 있는 무언가가 다 닳고 휘발해버려서...)
하는 두려움이 있네요.
위의 글에 나오는 진짜 눈물에 대한 두려움과 비교할 수 있을까요? ^^

*딴소리*
혹시...<토토의 천국(Toto le Heros>이라는 영화 보신(그리고 기억하시는) 분 계신지요...
이 영화도 아...주....강렬한 인상을 남긴 영화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아...주...훌륭하고 아름다운 영화라고 생각하구요.
이 영화 좋아하시는 분 만나면 무척 반가울 거 같아요. ^^

로쟈 2006-03-09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키에슬롭스키 영화제는 다른 카페에서 안내한바 있는데(주최는 서울아트시네마입니다), 그냥 '키에슬롭스키 영화제'를 검색하시면 바로 뜰 겁니다. 자크 도마엘의 영화던가요? 저도 <토토의 천국>을 개봉관에서(뤼미에르에서 했던 듯) 잘 봤습니다. 두 번 본 거 같습니다. 라스 폰 트리에의 데뷔작 <유로파>와 거의 같이 개봉됐던 영화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