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두 주간에도 여전히 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손길이 가는 책은 많지 않았다. 그래도 눈길을 끈 책들 가운데 비교적 언론의 포커스를 받지 못한 책들을 중심으로 간단히 소개한다. 

 

 

 

 

 
 레비나스의 책 2권이 연이어 나왔다. 한권은 그의 3대 주저 가운데 하나인 <존재에서 존재자로>(민음사)이고 다른 한권은 절친한 친우에 대한 책 <모리스 블랑쇼에 대하여>(동문선)이다(블랑쇼의 비평에 대한 개괄적인 소개는 김현의 <프랑스비평사-현대편>을 참조). 이전까지는 나는 그냥 ‘임마누엘 레비나스’라고 알고 있었는데(임마누엘 칸트처럼) 새로 나온 번역서들을 보니 ‘에마뉘엘’ 혹은 ‘에마누엘’이라고 불러야 하는 듯하다.(*레비나스에 대해선 얼마전에 여러 차례 다룬 바 있기에 좀 새삼스럽다). 

<존재에서 존재자로>는 믿을 만한 역자의 자세한 해제를 싣고 있기 때문에 굳이 부연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블랑쇼에 대한 책 역시 블랑쇼 연구로 학위를 받은 이의 번역이므로 믿어봄 직하다. 그런데, 100쪽이 안되는 책이 9,000원이나 하는 것은 좀 심하다는 생각도 든다. 일부 마니아나 도서관을 염두에 둔 책값이지 싶다(그 마니아에 내가 속한다니!). <블랑쇼>는 불어로는 단행본으로 출간됐지만, 내가 갖고 있는 영역본에서는 <고유명사들Proper Names>(스탠포드대학, 1996)에 합본돼 있는데, 분량은 44쪽에 불과하다. 프랑스 철학이나 비평서들에 자주 손길이 가는 탓에 동문선의 책들을 자주 소개하게 되는데(요즘은 ‘서문선(西文選)’이나 ‘불문선(佛文選)’이라고 개명해야 할 듯싶다), 그들이 제값의 번역서들을 내고 있는지는 좀 의심스럽다.

레비나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건 10년이 넘었다. 애초에 하이데거의 책에 눈을 뜨기 시작하다가 ‘타자’에 대한 윤리학이란 구호에 매료된 거 같은데, 덕분에 관련서만 서가 한칸을 채우고 있다(에스토니아 출신인 그는 러시아문학의 영향을 많은 받은 철학자이다. 특히 그가 자주 언급하는 책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이다). 이런 까닭에 그간 드문드문 그의 책들이 소개될 때마다 반가운 마음을 갖게 된다. <전체성과 무한>, <존재와 다른 것, 혹은 존재 사건 저편>과 같은 나머지 주저들도 마저 번역되기를 기대한다. 레비나스 얘기가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이기상 교수의 <하이데거의 존재사건학>(서광사)이 출간됐다. 정신문화원 김형효 교수의 묵직한 책들과 함께 국내 하이데거학의 수준을 말해주는 지표이다.

 


 

 

 

동문선에서 나온 신간으론 롤랑 바르트의 <작은 사건들>도 있다(*바르트의 책은 이후에 5-6권이 더 출간되었다). 역자는 동문선의 간판역자인 김주경씨(<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의 역자). 바르트 전집이 잠시 주춤하고 있는 사이에 기습적으로 출간된 이 책은 바르트 애호가들의 장서용 책이다. 주저는 아니라는 뜻이고, <카메라 루시다>에 매혹됐던 이들에게는 좋은 선물이 될 만하다. 아울러 바르트를 좋아하는 이들은 이번 봄호 <세계의 문학>에 실린 쇠이유의 편집자 프랑수아 발과의 인터뷰를 놓치지 마시길 바란다. 발은 바르트 생전에 매주 저녁식사를 같이 했던 친구이자 전담 편집자이고 철학자이다(그리고 바르트와 마찬가지로 동성연애자이다).

곁다리로 덧붙이자면, 프랑수아 도스의 <구조주의의 역사4>가 마저 출간됨으로써 전 4권이 동문선에서 완간됐다. 번역은 2, 3권에서와 마찬가지로 김웅권. 도스는 역사학자로서 폴 리쾨르의 제자인데, 그가 쓴 <폴 리쾨르>도 동문선의 근간 리스트에 올라가 있다. 한번 기대해봄 직하다(*이 책은 작년에 이미 출간되었다). 또 하나, 피에르 부르디외의 <맞불2>도 동문선에서 나왔다(*<맞불>은 <맞불2>보다 더 나중에 출간됐다). 부르디외의 책 리스트를 나도 웬만큼은 꿰고 있는데, 처음 들어보는 책이다. 당연히 아는 바가 없다. 시사적인 글 모음이 아닐까 싶다.

 

 

 



모처럼 사회학 이론서를 한권 샀는데, 스티븐 마일스의 <현실세계와 사회이론>(일신사)이 그것이다. 저자는 그다지 잘 알려진 인물이 아니고, 다만 비교적 얇은 분량에서 대중사회, 탈산업사회, 소비사회, 탈근대사회, 맥도널드화된 사회, 위험사회, 지구사회 등 20세기의 다양한 사회이론의 흐름과 그 관계들은 잘 정리하고 있다는 게 장점인 책이다. 일종의 지도이자 매뉴얼인 셈(실제 독서에선 이런 책들이 유용하다). 책은 일신사의 사회과학신서의 한권인데, 출간된 60권의 책 가운데 내가 갖고 있는 건 고작 3권뿐이었다(나는 얼마나 책을 안 사는 것인지!). 근간 목록에 유까 그루너브의 <취향의 사회학>이 눈길을 끈다(*아직 출간되지 않았다).

 

 

 



야나부 아키라의 <번역어 성립 사정>(일빛)이 번역돼 나왔다. 사실 이 책은 두 주전 구내서점에서 우연히 눈에 띄길래 바로 구입한 책이었고, 은근히 괜찮을 물건 하나 건졌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바로 그주 언론의 북리뷰란에서 가장 크게 다루어졌다. 한때 '사회'라는 말이 언제쯤 우리말 쓰임새를 갖게 됐을까 궁금하기도 했었는데(현진건의 '술권하는 사회'란 단편을 떠올려 보라), 그런 류의 궁금증을 시원하게 씻어주는 책이 신간이다. 11개의 주요 단어들이 일본어로 옮겨지게 된 사정을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있는데, 그 일본어들은 곧 우리말이기도 하기 때문에 '일본어 사정'이라고 치부해 버릴 수만은 없다. 이런 류의 우리말 번역어 성립 사정도 누가 좀 풀어주었으면 싶다.

 

 



 

이론서들을 제쳐놓는다면, 가장 반가웠던 책은 조루주 벨몽의 <나의 프루스트씨>(시공사)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작가 프루스트를 만년에 8년간 돌보았던 셀레스트 알바레의 회고담인데, 역자후기에 따르면 아주 오래전에 출간됐던 것이 이번에 재출간됐다. 재정 문제 때문에 아직 책세상에서 나온 <마르셀 프루스트1,2>를 구입하진 못했지만, 이 신간 덕분에 프루스트에 관한 연구서 두어 권을 복사했다. 언젠가 처박아놓은 책들을 찾아서 읽을 시간이 오기를 바란다.(*열화당에서 나오는 만화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현재 3권이 출간돼 있다.)

 

 

 

 

니콜 키드먼 주연의 영화 <디 아워스>의 영향으로 버지니아 울프의 책들이 번역되고 있다. 대학에 들어올 때 내가 서점에서 본 울프의 책은 삼중당문고본 <댈러웨이 부인> 정도가 전부였다. 그리고 그걸 (고생스레) 읽고 있던 친구가 그렇게 부럽진 않았다. 솔출판사에서 전공자들로 울프 전집 간행위원회를 구성하여 더디지만, 지난 96년부터 전집을 출간하는데, 이미 댓 권이 나왔고, 이번에 <댈러웨이 부인>이 다시 나왔다(*이미지를 찾지 못하겠다). 이미 허마이오니 리의 정평있는 전기 <버지니아 울프 1,2>(책세상, 2001)도 나와 있기 때문에 이젠 버지니아 울프도 마음놓고 읽을 만한 때가 되었다.

 

 

 



<러시아현대희곡>(전3권)이 열린책들에서 나왔다. <오리사냥>의 밤필로프를 제외하면 과문한 나로서는 대부분 낯선 현대 작가들의 희곡들이 얇은 책 3권으로 묶였다. 읽어보지 않았기에 뭐라 말할 수는 없지만, 사실 내용을 살펴보고 좀 실망했다. 더 중요한 작가들의 더 중요한 작품들이 먼저 번역됐어야 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20세기 초반 씌어진 다수의 작품들이 그들인데, <러시아희곡1,2>(열린책들)과 <러시아현대희곡> 사이에 끼인 그 작품들은 언제쯤 우리말로 읽을 수 있을까?

 

 

 



장정일 등이 쓴 <삼국지 해제>(김영사)가 두툼한 책으로 나왔고(알다시피 장정일은 문화일보에 삼국지를 연재하고 있다), 서유기의 새 번역본(임홍빈 역)도 문학과지성사에서 10권짜리고 나온다고 한다. 당분간은 이들을 챙길 여력이 없음이 유감이다. 反중화주의를 기치로 내건 <삼국지 해제>가 특별히 강조하는 건 두 가지라고 한다. 하나는 삼국지 최고 전략가가 제갈량이 아닌 가후라는 것. 그리고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천하통일에 실패했기에 유비와 조조는 역사의 실패자라는 것.

이 책에 대한 소설가 조성기(<삼국지>의 역자 중 한 명이다)의 서평(<한국일보>, 4월 5일자) 중 마지막 대목은 이렇다: "<삼국지>는 사실 우리가 반면교사로 삼을 만한 내용이 있을지는 모르나 배워 본받을 만한 내용은 별로 없는 책이다. <삼국지>가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는 나라는 불행한 나라이다. 정치, 문화, 경제가 삼국지 수준에 머물고 있는 나라인 셈이다. 이라크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세계도 삼국지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의 의견에 공감한다.

 

 

 



교양과학서로 사두고 싶은 책은 제임슨 왓슨의 (사이언스북스)이다. 1953년 프란시스 크릭과 함께 DNA의 이중나선구조를 발견하여 분자생물학 혁명을 가져온 왓슨의 지적 여정을 담고 있는 책이다. 개인적으론 상당히 고집이 세고 오만한 성격이라는데(에드워드 윌슨의 자서전 <자연주의자>에 따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물학의 시대를 지혜롭게 살아가기 위해선 한번쯤 읽어볼 만한 책이겠다.

수학자 폴 에어디쉬의 전기 <우리 수학자는 모두 약간 미친 겁니다>(승산, 1999)를 좀 뒤늦게 읽고 있는데, 그는 생애 만년의 25년간 하루 19시간씩 수학에 매달렸고, 하루 10-20밀리그램의 벤제그린, 강한 에스프레소 커피, 카페인 알약을 복용했다. 그러면서 그가 즐겨 한 말. “수학자는 커피를 정리(定理)로 둔갑시키는 기계이다.” 수학이 아닌 모든 것을(심지어 여자도) 귀찮게 여겼던 그가 한 말 중에 인상에 남는 것: “몇몇 프랑스 사회주의 사상가들은 사유재산이 훔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사유재산이 귀찮은 것이라고 말하겠어요.” 자본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수학 공부를 열심히 하거나 하루 19시간씩 엉뚱한 책을 읽어야겠다.

 

 

 



끝으로, 음미해볼 만한 기사는 <중앙일보>(4월 5일자) 죽비소리에 실린 북디자이너 정병규의 인덱스 없는 출판관행에 대한 비판이다. 필자가 거명하고 있는 책들은 메를로퐁티의 <지각의 현상학>(문학과지성사), 리쾨르의 <시간과 이야기>(문학과지성사), 소광희 교수의 <시간의 철학적 성찰>(문예출판사) 등이다. 나도 다 갖고 있는 책인데, 이 두툼한 책들의 공통점은 인덱스가 빠져 있다는 것. 대표적인 인문학출판사를 자처하는 곳들에서 나오는 책들이 이렇듯 (비용을 좀 줄이려는) 얄팍한 계산하에 출간된다는 것은 새삼 부끄러운 일이다. 정신 좀 차릴 일이다!

 

 

 

 

보너스. 당대비평 특별호로 나온 <탈영자들의 기념비>(생각의나무)가 이 주에 읽어볼 만한 저널북이다. 책갈피에 인용된, 네그리/하트의 <제국>에서 재인용된 대목: "탈영자들을 위한 기념비들은 전쟁에서 죽은 사람들을 대표할 것이다. 왜냐하면 전쟁에서 죽은 사람들 모두는 전쟁을 저주하면서 그리고 탈영자들의 행복을 부러워하면서 죽어갔기 때문이다. 저항은 탈영에서 생겨난다."(한 반파시스트 파르티잔, 1943) 미국이 승리를 선언한 이라크전에서 무고하게 희생된 이라크인들의 명복을 빈다. 더불어 그 무모한 전쟁에서 탈영한 이들에게 축복이 있기를!...

2003. 04. 17.

P.S. 본문중에 '동성연애자'란 표현이 나오는데, 나는 '동성애자'란 뜻으로 쓴 것이지만, 오해의 소지가 있다는 지적이 있어서 '동성애'와 '동성연애'의 의미를 보충하도록 한다. 별다른 건 아니고, 인터넷의 지식검색 내용을 옮겨놓는다(사실 문제는 좀 복잡한데, 나의 기본적인 생각은 동성애란, 동성을 이성으로 인지/간주하는 성향이 아닐까라는 것이다. 가령, 동성애자들은 이성애자들에게 당신들이 이성에 대해서 갖는 감정을 우리도 동성에게 똑같이 갖고 있습니다, 라고 주장/호소하기도 하는데, 나는 거기에 '진실'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즉, '동성애란 없다!' 다만, 있는 것은 성의 불확정성이다. 생물학적 성과 자신의 정체성 사이에 간극이 있는 것. 때문에 '동성애'는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동성애, homosexuality 동성애란 성 지향성 (sexual orientation)이 자신과 같은 성향의 사람에게 향하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성 지향 성이란 마음 속 깊이 내재되어 있는 것으로 단순한 성적 취향과는 구별됩니다. 동성애는 동성을 향한 지속적인 감정적, 정서적, 신체적, 성적 끌림을 수반합니다. 즉 단순히 동성과의 성경험이 있다거나 동성과의 성행위 자체를 동성애라고 할수는 없습니다. 다시 이야기 하면 동성이나 이성과의 어떤 개인적인 성적 경험이 반드시 그를 동성애자 또는 이성애자로 결정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동성애자임에도 불구하고 이성과 성적인 경험을 할 수도 있고, 이성애자임에도 동성과 성적인 경험을 가질수 있습니다.

-실제로 어떤 동성애자들은 자신의 성향을 고쳐 볼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이성과의 성적인 경험을 갖기도 합니다.그리고 군대, 교도소, 기숙사등의 이성과 차단된 환경에서 이성애자들이 경험하는 동성과의 성접촉도 드문 일은 아닙니다. 이렇듯 성행위 자체가 개인의 성지향성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동성애라는 용어를 이해할 때는 동성에 대한 지속적인 끌림과 동성과의 성적인 경험 사이에 중요한 차이가 있음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성 지향성을 무시한 채 동성과의 성 행위 자체를 동성애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동성애'와 '동성연애'의 개념 차이를 구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성적인 성향이 궁금하십니까? 여러분이 "동성애자"인지, "이성애자"인지 궁금하십니까? 그렇다면 자신이 어떤 성의 사람에게 감정적, 정서적, 신체적, 성적으로 가장 끌리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동성연애, same-sex acts 일반적으로 대중 매체에서는 동성애에 대한 기사를 다룰때 거의 '동성애'와 '동성연애'를 동일한 개념으로 사용합니다. 일반인들도 동성연애라는 표현에 훨씬 더 익숙해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동성애자들은 동성애와 동성연애를 구별합니다. 이러한 관점의 차이는 동성애에 대한 이해부족에서 기인하 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동성애를 바라보는 태도의 차이 에서 그 원인을 찾을수 있습니다.

-'동성연애'라는 용어는 기본적으로 동성과의 어떤 성적인 경험 내지는 성행위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동성애를 삶 자체로 보기보다는 삶의 어떤 선택적인 경험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성애는 변태 아니면 이성과의 섹스에 싫증난 사람들의 도착적인 행동이나 노력만 하면 언제든지 그만 둘 수 있는 도덕적인 일탈행위로 치부됩니다. 즉 동성연애라는 말속에는 동성애를 치료 가능한 정신질환의 일종이나 타락한 인간들의 행태, 할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으로 간주할려는 시각이 담겨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일차적으로 동성애는 doing이 아니라 being입니다. 곧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입니다. 행위는 존재에 수반되어 나타날수 있는 것이겟지요. 어떤 외국의 천주교 신부는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하나님과의 약속을(사제로서 독신으로 살겠다는)실천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즉 어떤 성관계도 갖지 않겟다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지요.

 

 

 

 

-이성애자와 마찬가지로 동성애자 중에는 동성과 성적인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들도 상당수 있습니다. 물론 그들이 나중 에 동성의 사람을 사귀고 섹스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에게 는 기본적으로 이성애자인 사람이 이성을 사귀고 섹스를 하는 것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자연스러운 행동인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동성애'를 성적인 행동만 없다면 인정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이성애'를 성적인 행동만 없다면 인정하겠다는 억지 주장과 동일합니다. 동성애자에게 있어서 동성과의 성적인 경험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이 이성과 성 경험을 갖는 것이 부자연스러운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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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13 23: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최근에(*이 글은 2003년 4월초에 씌어졌다) 나온 책들 혹은 눈에 띈 책들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역시나 그린비에서 나온 고전 리라이팅 시리즈이다. 고미숙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고병권의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권용선의 <이성은 신화다, 계몽의 변증법> 3권이 1차분으로 먼저 나왔는데, 기획으로서는 책세상의 우리시대에 비견할 만하다.

 

 



 

 

 

 

 

내가 먼저 산 책은 <니체의 위험한 책>이다. 아마도 정서적인 친화성 때문일 텐데, 이 책은 니체 입문서로서 아주 훌륭하다. 무엇보다도 니체에 대한 저자의 사랑 혹은 우정이 아주 잘 전달된다. 요컨대 저자는 도체로서의 역할을 훌륭하게 해내고 있기 때문에 이 책을 통해서라도 누구든지 니체에 '감전'될 만하다. 책의 말미에는 '니체를 알고 싶을 때 도움이 되는 책들'이란 제목으로 니체에 관한 책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 또한 유익하다. 여러 책들 가운데, 저자가 가장 먼저 꼽는 것은 오이겐 핑크의 <니이체 철학>(형설출판사, 1984)(저자는 <니이체의 철학>이라고 오기하고 있지만)과 네하마스의 <니체-문학으로서의 삶>(책세상, 1994)이다.

 

 

 

 



 

 

 

네하마스의 책은 나도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지만(특히 영원회귀에 대한 해석), 하기락 선생이 옮긴 오이겐 핑크의 책은 몇년 전 한창 찾을 때 구하지 못했던 책이다. 최근에 도서관 장서들을 검색해 보니까 일부 도서관들에 책이 소장돼 있었다. 그리고 역시나 저자가 최고의 책으로 꼽는 것은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민음사, 1998, 이 책은 인간사랑에서도 <니체, 철학의 주사위>란 제목으로 번역돼 나왔다)이다. 고미숙과 권용선의 책은 여유를 두고 읽을 작정이다(*나중에 사두긴 했지만, 아직은 탐독하지 않았다).

 

 

 

 

 

 

 

 

 

'러시아 형식주의'를 유럽(프랑스)에 최초로 소개한 것으로 잘 알려진 불가리아 출신의 문학이론가 츠베탕 토도로프의 <산문의 시학>(예림기획)이 번역돼 나왔다(*토도로프에 관해서는 이전에 다룬 바 있다). 토도로프를 아는 이라면, 그거 번역이 있지 않어? 란 생각이 들텐데, 맞다. 지난 92년에 문예출판사에서 <산문의 시학>이라고 번역돼 나왔고, 아직 절판되지 않았다. 두 번역본의 차이점은 전자가 불어 원본의 번역이고, 후자는 영역본의 번역이라는 점이다. 영역본에는 조나단 컬러가 쓴 서문이 들어가 있고, 불어본에는 영역본에 빠져 있는 '형식주의가 남긴 방법론상의 유산'이 1장으로 들어가 있다(그래서 더 두껍다). 참고로, 이 <산문의 시학>에는 아주 난해한 20세기 러시아 시인 흘레브니코프에 대한 글도 한편 실려 있다.

 

 

번역은 새로 나온 예림기획본이 더 낫다. 문예출판사본은 연대 국문과 대학원생들의 번역인데(역자는 신동욱 교수로 돼 있다), '시제'를 '시대'로 '인칭'을 '인물'로 번역하는 식이다. 멀찍이 두고 읽는다면 눈에 띄지 않겠지만, 정독하기엔 좀 무리가 있는 책. 그렇다고 해서 예림기획본이 맘에 드는 것도 아니다. 흔히 narrative의 의미를 갖는 불어의 'recit'를 역자는 생경하게도 '술화'라고 옮겼다. 술화는 페터 지마 번역자들이 'discourse'를 옮기던 말이다. 어쨌든 울며 겨자먹기로 사두긴 했다.

 

 

 



 

 

 

 

두어권이 나오다 만 '토도로프 선집'을 비롯하여 토도로프의 책은 국내에 비교적 많이 소개되었고, 10년쯤 전에는 방한하기도 했지만, 나의 견식으론 그에 관한 단행본 연구서가 국내는 물론 구미에서도 나오지 않은 듯하다. 다소 과소평가되는 듯한 기분인데, 60년대 문학적 구조주의에 관해 말하기 위해서는 그를 빼놓을 수 없다는 것만을 먼저 지적해 두기로 한다. 특히 언어학적 전회 이후 언어학과 문학과의 관계를 질문하는 데 있어서 그에 대한 참조는 필수적이다. 참고로, 이 주제에 대한 국내 저작으론 고대 김인환 교수의 <언어학과 문학>(고대출판부, 1999)이 있다. 기대를 충족시켜줄 만한 분량은 아니지만 호기심은 북돋아준다.

야콥슨의 실어증론을 30년대 모더니즘 소설에 적용시켜본 문홍술의 <한국모더니즘소설>(청동거울)도 출간됐다(오늘 서점에서 눈에 띄길래 샀다). 특별히 저자를 신뢰하는 것도 아니고, 한국문학 단행본 연구서를 즐겨 사보는 편도 아니지만, 방법론에 관심이 가서 구입한 것. 역시나 야콥슨의 방법론을 원용한 한국시 연구서로는 권혁웅의 <한국 현대시의 시작방법 연구>(깊은샘, 2001)이 있다.

 

 

 

 



 

 

 

독일철학자 프레게의 <산수의 기초>(아카넷)가 번역돼 나왔다. 프레게는 후설과 비교되는 수리/논리 철학자로서 흔히 비트겐슈타인과 함께 분석철학의 창시자로 불리며 언어학(의미론)에서도 곧잘 언급되는 인물이다. 프레게에 대해서는 안토니 케니의 <프레게>(서광사, 2002)가 출간돼 있고, 박이문의 <현상학과 분석철학>(일조각, 1990)이 참고할 만하다(아주 쉬운 입문서이다). 참고로, 철학자 김재권 교수는 20세기의 가장 영향력있는 철학자로서 (비트겐슈타인이 아닌) 프레게를 꼽은 바 있다.

 

 

 

 

 


 

 

 

 

번역된 고전 몇 권. 부조리 극작가 외젠 이오네스코의 <대머리 여가수>(민음사)가 번역돼 나왔다. 표제작과 <수업><의자> 3편이 묶여서 나왔는데, 흔히 그의 反연극 3부작이라 불리는 작품들이다(물론 기존 번역들이 있긴 하다).

 

 

 

 

 

 

 

 

 

그리고 괴테의 <색채론>(민음사)이 괴테 전집의 일환으로 번역돼 나왔다. 일종의 과학론인 이 책은 괴테의 책으로는 <파우스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다음으로 많이 읽힌다고 한다. 그리고 세르반테스의 단편 4개가 <유리 학사>(문학과지성사)란 제목으로 묶여서 출간됐다. <모범소설집>이란 그의 단편집에 실린 12편 가운데 4편을 고른 것이라고 하는데, 그 전편이 번역되지 않은 것은 유감스럽다(*바로 그달에 <세르반테스 모범소설>이 두 권짜리로 출간됐다).

막간에, 베르테르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최근 문학동네에서 나온 <독일문학의 장면들>이란 책에선 '젊은 베르테르'를 '젊은 베르터'로 표기하고 있다. 나는 원래의 독어 발음이 '베르터'에 가까운지는 모르겠으나 그와 같은 번역에는 동의할 수 없다. 우리말의 '베르테르'에는 '베르터'가 갖고 있지 않은 문화(사)적 의미가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를 읽노라!"). '베르터'란 이름은 실연으로 상심하기엔 너무 사무적인 이름이다(마치 무슨 하인의 이름같다).

 

 

 

 



 

 

 

쿤데라와 조금 관련있는 책으로 외대 체코어과 김규진 교수의 <체코현대문학론>(월인)이 출간됐다. 쿤데라와 보후밀 흐라발 등 20세기 체코 문학의 거장들에 대한 리뷰성 글들이 실려 있다. 좀 다른 책이지만, <한국신소설선집>(서울대출판부)도 나오기 시작했다. 전부 10권짜리로 기획돼 있고, 이번에 두 권이 나왔다(*계속 나오고 있다).

 



 

 

 

 

 

 

끝으로 읽을 만한 교양과학서. 서울대 생명과학부 최재천 교수의 신간 <여성시대에는 남자도 화장을 한다>(궁리)를 읽어볼 만하다. 부제는 '한 사회생물학자가 바라본 남자와 여자'이다. 최교수는 사회생물학의 창시자인 하버드대학의 에드워드 윌슨부터 사사한 정통 사회생물학자이고, 곤충과 거미류의 짝짓기에 대한 연구서를 영미의 권위있는 출판사에서 출간한 바도 있다.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효형출판, 2001), <알이 닭을 낳는다>(도요새, 2001) 등의 칼럼집들이 다소 짧은 글들을 모아놓아 아쉬웠는데, 이번에 좀 긴 글들이 실려 있어서 반갑다.

 



지젝 관련 소식으로 마무리를 지을까 한다. 지젝이 4권으로 편집한 <자크 라캉Jacques Lacan>이 작년말에 Routledge에서 나왔다(바로 도서관에 주문했었는데,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는 건 그때 얘기고 오래전에 이미 복사했다). 부제는 Critical Evaluations in Cultural Theory이고, 4권짜리인데, 1600여쪽에다 책값은 100만원 상당. 지젝만을 다룬 최초의 단행본 연구서 'Zizek: A Critical Introduction'도 이번 4월에 출간 예정이다(*물론 이미 출간되었고 나는 복사본을 갖고 있다. 참고로 이 책은 국역본이 근간예정이라고 한다, 는 아니고, 근간예정인 책은 아래의 이안 파커의 책이다. 제목은 둘이 거의 같다. 현재까지 지젝 연구서는 3-4종이 더 출간되었다.) 

 

 

2003. 04.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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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 2006-05-13 13:57   좋아요 0 | URL
'Zizek: A Critical Introduction'란 아이언 파커Ian parker의 책을 말하는 것인가요?
슬로베니아,계몽주의(헤겔), 정신분석학(라깡), 정치(맑스)로 엮여있던 책의 개요가 일목요연하면서도 흥미로웠는데요. b에서 근간된다는 것을 책날개에서 본 적이 있었는데 벌써 3년이나 지난건가요-.,-?

로쟈 2006-05-13 14:55   좋아요 0 | URL
아, 제가 잘못 말씀드렸네요. 거의 같은 제목이지만 도서출판b에서 근간예정인 책은 사라 케이의 것이 아니라 이안 파커의 것입니다...
 

2000년 봄에 쓴 독서일기의 일부분을 옮겨온다. 칼 뢰비트(1897-1973)의 <지식, 신앙, 회의>에 관한 대목인데, 그의 책으론 <헤겔에서 니체로>(민음사, 2006)가 얼마전에 새단장을 하고 재출간된 바 있다. 기억에 뢰비트는 하이데거의 제자로서 가다머급의 지명도를 갖고 있었던 철학자이다. 저서로는 <역사의 의미>(문예출판사) 등이 더 번역돼 있다.

 

 

 

 

도서관에서 서머셋 모옴의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 김성한 옮김(신양사. 1958)와 칼 뢰비트의 <지식, 신앙, 회의>, 임춘갑 옮김(창림사, 1961)을 대출했다. 앞엣것은 The Art of Fiction(1955)의 일부를 옮긴 것이고, 나중것은 Wisen, Glaube und Skepsis(1956)를 옮긴 것이다.

뢰비트 책은 양질의 종이로 되어 있어서 거의 새책이나 다름이 없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고급스러운 교양서적이었을 것이다(*가끔 도서관에서 1960년대에 나온 책들을 찾아보고 감탄할 때가 있다). 물론 키에르케고르와 도스토예프스키 때문에 대출한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의 <그리스도교의 훈련>은 70년대말에 평화출판사에서 나온 걸로 돼 있다.

(*)임춘갑 선생 번역의 <그리스도교의 훈련>은 2005년말에 다산글방에서 재출간됐다. 가라타니 고진의 <탐구1>(새물결)에서 키에르케고르에 대한 언급을 참조할 수 있다. 아마 그 책에 대한 관심은 고진에게서 비롯됐을 것이다. <탐구1>에서는 일역본을 따라 <그리스도교의 수련>이라고 옮기고 있다. 아마 이 글은 고진의 책들을 읽던 시절의 일기인 듯하다. 아래 사진은 칼 뢰비트.  

주말에 뢰비트의 <지식, 신앙, 회의>를 다 읽고, 야스퍼스의 전기를 읽고 있다. 뢰비트의 책은 얇은 분량이지만, 힘과 재미가 느껴지는 책이다. 문제의식이 살아있고, 초점도 명확하다. 역자는 저자의 주장을 “철학은 다시금 철학의 본영토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직도 그리스도교의 창조설의 사상에 물들지 않은 그리스철학의 모습으로 돌아가야만 한다”고 요약한다.

하이데거와 사르트르를 비판하면서 니체야말로 유일한 현대철학자라고 추켜세우고 있는 점도 이채롭다. 또 데카르트의 인식론적 아르키메데스의 점과, 키에르케고르의 종교적 아르키메데스의 점에 대한 비교의 꼬투리(이건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이다.)

3장에서 키에르케고르에 대한 비판: “키에르케고르의 역설적 그리스도교는 오로지 세계를 잃고 실존하는 외톨이와, 마찬가지로 세계를 잃은 신, 이 두 개밖에는 모른다. 인간과 세계가 창조주를 통하여 서로 연결되고 서로 병렬케 하는 그런 창조에의 신앙이 키에르케고르에게는 결핍되어 있다. 창조에 관한 이 실존신학적인 결함은 이미 데카르트파의 파스칼에게서 시작되었지만, 이와 마찬가지로 온갖 종류의 실존철학에 있어서는 언제나 존재하고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 그리고 그 속에서 인간이 자연적으로 살고, 또 죽는 것, 그러한 것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자연적인 개념이 결핍되어 있다.”(123쪽, 강조는 나의 것)

각주에는 “니체의 동일물의 영겁회귀의 철학“이란 글을 참조하도록 되어 있다. 아무튼 이 세계라는 개념의 결핍은 비단 키에르케고르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리다. 생물학과 형이상학, 두 가지만은 사고의 축으로 삼아온 나에게도 근래에 경험하는 현실은 또 다른 실세에게 관심을 갖도록 부추긴다. 그것은 돈, 혹은 경제적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 듯하다.

 

 

 

 

돈의 철학으로서의 경제학, 거기에 숨겨져 있는 법칙과 비약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다(*그런데 이런 건 누구에게 배워야 하나?). 이건 물론 포지티브한 관심은 아니다. 문제를 배제하고 소거시키기 위한 관심이다. 내가 거기에 얽매여 있기 때문.

마지막 4장 “창조와 실존”은 실존철학에 잔재하고 있는 그리스도교의 흔적을 비판하고 있다. 그것은 일종의 토미즘이라는 것이다. “파스칼에서 시작하여 사르트르에 이르러 극단화되어, 비그리스도교화 되고만 현대의 실존 개념은 창조설을 제거한 그리스도교적, 토마스학파적인 존재론이라고 할 수 있다.”(158쪽)

(*)'유령-독자들'을 의식하지 않을 때 나는 그냥 인상적인 구절들과 그에 대한 짤막한 코멘트만을 기록했었다. 이런 빛바랜 글을 밖으로 꺼내놓으니까 좀 머쓱하군. 창고에나 집어넣어야겠다...

06. 0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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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13 00: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twoshot 2006-05-13 0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머쓱해서 창고에 집어넣으시면 안됩니다. 삼삼오오, 귀를 쫑긋세우고 모여드는게 어디 유령 뿐이겠습니까...

2006-05-13 01: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5-13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여기에 댓글을 달도록 하겠습니다. '문자로 창작되지 않은 것은 문학이 아니다'란 주장에서 방점은 '문자'가 아니라 '창작'에 있었던 모양입니다. '구술된 것을 받아적은 것'은 같은 '기록성'을 갖지만 문학이 아니다라고 하신 걸 보면요. 거기에는 아마도 "'문학'은 '문학을 한다'는 자의식을 가진 개인에 의해서 창작된 것"이라는 주장이 암묵적으로 전제돼 있는 듯합니다('넓은 의미의 문학'도 아니라는 뜻은 모순적인 거 같습니다. 구비문학, 구술문학이란 용어를 우리가 사용하고 있으니까요).

더불어, 저는 개인적으로 네 가지 다른 문학적 태도(문학관)을 분류하는데, 그것들이 반드시 일치될 필요는 없습니다(이념적 태도에서와 마찬가지로). 음유시인적 전통에서 진정한 시인은 (기록된) '시를 쓰지 않은 사람'으로 정의됩니다. 쓴다는 건 어떤 타락이나 진정성의 훼손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즉, 그 경우에 '기록된 시'는 '텍스트'가 아니었습니다('텍스트'는 그 가치에 대한 인준을 요구합니다). 아마 이 문맥에서는 '문학'이 아니라고 말씀드릴 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 '문학'이 너무나도 외연이 넓은 용어인지라 그 개념에 대해서 논란을 벌이는 건 좀 소모적인 듯합니다. 다만, 역사적/형식적으로 정의될 수 있고, 그 경우에도 태도에 따라서 몇 가지 분류/유형학이 가능하다는 것 정도가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2006-05-13 12: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5-13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음유시인에 관해서 제가 읽은 건 러시아 기호학자의 논문이기 때문에 별로 도움이 안되실 거 같습니다. 그리고, 후배님의 경우에 '근대문학'을 상당히 폭넓게 정의하는 거 같습니다. '문자'만이 문학의, 근대문학의 충분한 정의를 제공하는 건 아니니까요. 거기에 근대적인 의식, 혹은 문학에 대한 자의식이 수반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더불어, '철학'이란 말도 말씀처럼 그렇게 '엄밀하게' 정의될 수 있는 건지는 의문입니다(특히나 한국어에서 '철학'이란 말!). 우리에게 주어진 건 '철학들' 아닌가요?..

2006-05-13 13: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전쟁이 터지면 전쟁에 대한 책들이 쏟아져 나온다(*이 글은 2003년 3월말에 씌어진 것이다). 그걸 출판시장에서는 '현실'이라고 부를 것이다. 어제 읽은 한 칼럼에서는 '전쟁'과 '전장(戰場)'을 구분하고 있었는데, 전쟁은 언제나 승자와 영웅을 탄생시키지만, 전장에서는 패자만이 있을 뿐이라는 점에서 둘은 다르다. 보다 많은 관심이 두어져야 하는 것은 물론 '전쟁'이 아니라 '전장'이다.

 

 

 



그런 의미에서 2차대전 당시의 독소전쟁을 다룬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지식의풍경, 원제는 Russia's War)의 출간은 의미있어 보인다. 역자는 러시아사 전공자이다. 1941-5년 사이에 벌어진 이 전쟁에서 2천만명이 넘는 러시아인들이 희생됐고, 패퇴한 독일 또한 혹독한 대가를 치르면서 패전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이 시기 독일군의 만행에 대해서 러시아 영화 <컴 앤 씨>(1985)가 잘 증언하고 있기도 하다.

러시아는 역사상 세 번의 중요한 전쟁(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는데, 첫째는 13세기 타타르(몽고)의 침입을 받고 200여년간 복속되었지만, 결국 패퇴시킨 일이고(15세기), 둘째는 1812년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 군대를 패퇴시킨 일, 그리고 셋째가 바로 1945년 히틀러의 독일군을 패퇴시킨 일이다. 이번 전쟁에서 이라크 또한 미영 연합군을 패퇴시키길 기원한다(더불어 우리 공병대가 갈 일이 없기를).(*물론 턱없는 기대였다.)

 

 

 

 

 
지난주간에 나온 책들 가운데 가장 눈에 띈 건 슬라보이 지젝의 <믿음에 대하여>(동문선)이다(*물론 이 번역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최악'이었다. 믿음이란 얼마나 힘든 것인지!). 여기서 믿음이란 건 달리 신앙이라 번역해도 무방하다. 지젝은 '예수와 바울', '프로이트와 라캉'에 대응하는 또다른 짝패를 도입하는데, 그것은 마르크스와 레닌이다. 흔히 교조적 맑스주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지젝은 과감하게 복원하고자 한다. 이름하여 '레닌으로의 복귀'이다. 책의 서문조차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레닌까지"란 제목을 달고 있다. 지젝이 최근에 레닌주의에 골몰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듯 선명하게 레닌주의를 들고나올 줄은 몰랐다. 하여간에 이 희대의 재사가에 힘입어(한 출판인은 그를 가리켜 대단한 '구라꾼'이라고 했다) 레닌주의는 포스트맑수주의를 넘어서는, 아주 세련된 이론적 담론으로 재탄생한다. 예수와 더불어.



언제나 그렇듯이 책값이 좀 비싸지만(도서정가제 이후에도 동문선의 책값은 다운될 기미가 안 보이다), 얇은 분량이므로 모두가 사서 읽어보기를 권한다. 문제는 번역인데, 역자는 서양사 전공자로서 조르주 뒤비의 책 등 이미 여러 권의 번역서를 갖고 있다. 그래서 신뢰할 만하다? 그건 아니다. 역자로서는 최선을 다했다고 보아지지만(우리말로 그래도 읽히는 편이다), 역시나 이론의 대식가이자 대중문화광인 지젝을 따라잡기에는 식욕이 좀 모자라고 걸음이 좀 느리다. 그래서 영화/작품명들을 말끔하게 옮기지 못하고 있다. 언어학자 '야콥슨'은 '제이콥슨'으로 번역하고. 영화 <브라스트 오프>는 <싫증>으로 옮기는 식이다. 처음 몇 쪽을 읽어보았을 뿐이지만, 그럼에도 나쁜 번역은 아닌 듯하다. 적어도 김종주나 이만우보다는 나은 번역이다(*이건 오판이었다).

 

 

 

 

프랑스의 신예작가 우엘벡의 <소립자>(열린책들)가 번역돼 나왔다(*올해 재판이 나왔다). 98년인가 출간되어 논란이 많았다는 작품이다. 굳이 여기에 소개하는 것은 지젝이 <믿음에 대하여>에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겸사겸사 읽어보는 것이 좋겠다.

그렇게 겸사겸사 읽을 만한 책으로 제프 콜린스의 <데리다>(김영사)도 있다. 김영사에서 나오는 '하룻밤의 지식여행' 시리즈의 한권이고, 역자는 이 시리즈의 <라캉>을 번역했던 이수명 시인이다. 아직 읽지는 않았지만, 무난한 번역일 것이라 생각한다. 더불어 만화이기 때문에 데리다를 싫어하지만 평소에 읽을 기회가 없었던 이들에게 유익할 듯싶다(조금 알아야 욕을 할 수 있을 테니까). 참고문헌에 따르면 데리다는 1996년 현재 37권의 책과 250편 이상의 에세이, 인터뷰를 출간한 다작의 저술가이다. 아직까지 완간되지 않은 하이데거 전집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그는 하이데거와 경쟁한다). 그러니 좀 말려주기를...(*입방정이었다. 알다시피 데리다는 이미 투병중이었고, 이듬해 2004년 가을 우리 곁을 떠났다.) 

 

 

 



그리고 눈에 띈 책은 영국 철학자 러셀의 <러셀 자서전>(사회평론)이다. 상하권 합해서 12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이다. 문화과학사에서 나온 비트겐슈타인의 전기 <천재의 의무>와 나란히 읽을 만하겠다. 이 러셀과 같이 <수학의 원리>를 쓴 미국철학자 화이트헤드의 <사고의 양태>(다산글방)도 번역돼 나왔다. 역자는 화이트헤드 전문가들인 오영환, 문창옥 교수. 이로써 화이트헤드의 주저들이 대부분 번역된 듯싶다. 한때 화이트헤드 카페에서 활동한 적도 있었는데, 모아놓은 책들은 언제나 읽을는지...



 

 

 

고전번역으로는 막스 베버의 <문화과학과 사회과학의 방법론(1)>(일신사)이 번역돼 나왔다. 인터넷서점엔 아직 들어오지도 않은 모양이다. 좀 가벼운 책으론 셰리 터클의 <스크린 위의 삶>(민음사)이 있다. 저자 터클은 하버드에서 심리학을 전공하고 정신분석의로도 활동한 바 있는데, <라캉과 정신분석혁명>이 그녀의 저작이다. 현재는 MIT에서 과학사회학을 강의한다고 한다. 제목의 '스크린'은 '모니터'로 옮기는 것이 더 적절했을 듯싶다. 여기서 스크린은 영화를 얘기하는 게 아니라 컴퓨터 화면을 얘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용은 가벼워 보이지만 책은 좀 묵직하다(거의 500쪽).

진짜 가벼운 책으론 미디어학자 빌렘 플루서의 <디자인의 작은 철학>(선학사)이 있다. 플루서는 구대륙의 '맥루한'으로 불리는 인물인데, <코뮤니콜로기>(커뮤니케이션북스) <사진의 철학을 위하여>(커뮤니케이션북스) <디지털시대의 글쓰기>(문예출판사) 등이 번역돼 있다. 미디어학과 관련한 국내저작으로는 이기현의 <미디올로지>(한울)도 출간됐다. '사회적 상상과 매체문화'란 부제를 달고 있는데, 이전에 나는 부르디외에 관한 그의 글을 읽은 게 전부여서 책의 수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다. 카스토리아디스에 대한 언급이 좀 들어가 있는 게 흥미를 끄는 정도.

 

 

 



조지 커퍼드의 <소피스트 운동>(아카넷)이 김남두 교수의 번역으로 출간됐다. 플라톤 전공자인 김교수는 겸손하게도 아직 단한권의 단행본 연구서도 출간한 바 없다. 때문에 이 책은 저자보다도 역자가 더 눈에 띈 경우이다. 같은 서양고전철학 전공자인 윤구병 전 교수(현재는 농부)의 존재론강의 <있음과 없음>(보리)도 출간됐다. 여기에는 저자와 김남두 교수와의 대담이 실려 있다. 철학쪽 이야기가 나왔으니 마저 하면, 유독 헤겔 책들이 여럿 나왔다. 조극훈의 <이성의 복권>(리북)이 '헤겔철학과 이성사회 실현'란 부제를 달고 나왔고, 이정일의 <칸트와 헤겔: 주체성고 인륜적 자유>(동과서)도 출간됐다. 동과서에서는 클라우스 뒤징의 <헤겔과 철학사>도 번역 출간했다. 나로선 생소한 저자들이기 때문에 뭐라 말할 수가 없다.

 

 

 

 

국내 저작으론 인권운동가 서준식의 <서준식 생각>(야간비행)이 출간됐다. 읽거나 말거나 그의 책들을 사두기를 권한다. 인권운동에 작은 힘이라고 보태기 위해서. 그리고 두 저널리스트 김훈과 고종석의 글들이 각각 <김훈세설>(생각의나무)와 <히스토리아>(마음산책)으로 묶여서 나왔다. 이미 일간지 지면 등을 통해 발표된 글들을 모은 것으로 애독자들을 위한 장서용의 책이라 할 것이다. 내가 이들의 글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분량'과 '시간'이라는 조건 속에서의 글쓰기에서 자신들의 이름을 각인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들의 글에는 언제나 긴장이 배여 있다. 하지만, 내가 더 좋아하는 그들의 글은 좀 긴 시간을 갖고 길게 쓴 글들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장인 백대웅 교수의 <전통음악의 랑그와 빠홀>(통나무)도 출간됐다. 통나무에서 나왔다는 것은 김용옥 기자와 연분이 있다는 얘기인데, 사실이 그렇다. 내가 언제 이런 책까지 사서보랴 싶지만, 책이 나왔다는 사실 정도는 기록해 두고 싶다.

더불어 이번에 방한 틱낫한 스님의 책들도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너무 많은 책들이어서 이미지 나열은 생략한다), 나로선 고마운 일이다. 나는 명상서적이나 처세술책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에(*따라서 돈 들일 일이 줄어드니까). 틱스님은 화를 가라앉히는 <화>라는 책으로 유명해졌는데, 사실 나는 화를 잘 내지 않는 자신의 성격이 오히려 불만스러울 지경이니 틱스님과는 인연이 없는 셈이다. 몇 년전에 한 외국인 지인이 선물로 준 <평화로움>이 책꽂이 어딘가에 그냥 평화로이 꽂혀 있는 것도 그런 때문이다. 러시아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은 마음의 평화를 사랑할 수 없다!

 

 



 

끝으로 과학책 혹은 기타. 철학연구회 편, <진화론과 철학>(철학과현실사)은 내가 좋아하는 주제인 만큼 당연히 눈길이 가는 책이다. 여러 분야 전공자들이 진화론과 철학에 관한 몇 가지 주제들에 대해 쓴 논문들을 모았다. 이 주제에 대한 한국학계의 수준을 가늠하는 데 도움이 되는 책이다. 홀크 크루제 등이 쓴 <지능의 발견>(해바라기)도 흥미를 끄는 책이다. 부제는 '개미도 사고를 할 수 있는가'. 그리고 돈이 좀 있다면, <아인슈타인 파일>(이제이북스)도 사보고 싶다. 미국 FBI가 사회주의 성향이 농후했던 이 세기의 과학자를 대중에 무해한 인물로 포장하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가가 폭로된다. 연대출판부에서 '문학의 기본개념 시리즈'를 출간하기 시작했다. <환상> 등 네 권의 책이 먼저 출간됐는데, 특징은 얇다는 것(얄팍한지는 모르겠다)과 국내 필자들의 저작이라는 것.

한동안 미루어둔 숙제를 한 기분이다. 이젠 하고 싶은 걸 해야지!...

2003. 03.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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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12 18: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한겨레 (06. 05. 10) '이-만-희 전작을 보고 싶다' 김은형 기자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한국영화 회고전으로 재조명했던 고 이만희(1931~75) 감독의 전작전 ‘영화천재 이만희’가 12일부터 30일까지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에 있는 한국영상자료원(원장 이효인) 고전영화관에서 열린다. 지금까지 거장 감독의 대표작들을 상영하는 회고전은 종종 열려왔지만 전작을 상영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부산에서 상영됐던 10편을 포함한 총 22편이 상영된다. 엄밀히 말해 이번에 상영되는 22편이 이만희 감독의 ‘전작’은 아니다. 61년 <주마등>으로 감독 데뷔한 이만희는 생전에 51편의 영화를 만들었지만 대표작 <만추>를 비롯해 이십여 편의 필름이 분실되거나 소실됐기 때문에 이번 상영작들이 현재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이만희 영화세계의 전부다.

상영금지된 지 37년만에 지난해 발견된 ‘휴일’로 개막
데뷔작 ‘주마등’ 대표작 ‘만추’ 등 20여편은 필름 없어

1931년 서울 왕십리에서 태어난 이만희는 한국 전쟁 뒤 연기자를 꿈꾸며 영화 이력을 시작했다. 단역배우와 조감독 생활을 거쳐 61년 감독 데뷔를 했으며 62년 스릴러 영화인 <다이알 112를 돌려라>로 연출력과 흥행력에서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다음해 연출한 대작 <돌아오지 않는 해병>은 이만희를 당대 최고의 흥행감독으로 끌어올렸으며 볼 거리로서 한국영화의 수준을 한 단계 도약시켰다는 평을 얻었다.

이후 당시 한국 영화감독에게는 두통거리 숙제와도 같던 반공영화를 제작하면서 고초를 겪기도 했다. <7인의 여포로>(1964)에서 북한군이 인간적으로 그려졌다는 이유로 반공법 위반으로 수감됐으며 당국의 검열로 누더기가 된 이 영화가 흥행에 실패해 큰 상처를 입자 이번에는 “진짜 반공영화를 만들자”고 작심해 만든 <군번없는 용사>(1966)역시 북한군의 제복이 너무 멋지다는 이유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조사를 받아야 했다.

“이만희는 당대 감독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모든 다른 종류의 영화들에서 자기의 작가적 인장을 새긴 인물”이라고 평한 부산국제영화제 이만희 회고전의 기획자 허문영 프로그래머의 말대로 이만희 감독은 스릴러에서 전쟁 스펙터클, 문예영화, 웨스턴, 멜로드라마까지 종횡무진했다. 때로는 모더니즘의 미학을, 때로는 리얼리즘 미학을 구사하면서 독특한 스타일을 일구어갔으며 편집 도중 쓰러져 영영 일어나지 못한 <삼포 가는 길>(1975)을 유작으로 남겼다.

이 가운데 아직 필름을 찾지 못한 <만추>(1966)는 이만희 영화세계의 전환점으로 꼽힌다. 당시 한국영화로는 파격적으로 대사가 거의 없었던 이 영화는 상업적 영화문법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작가주의로 진입했던 작품으로 평가받으며 어둡고 절망적인 감독의 시선은 <휴일>(1968)에서 정점을 이루게 된다. 이 영화는 “우울하고 퇴폐적인 정서”라는 이유로 개봉이 무산됐다가 지난해 영상자료원 필름보관고에서 극적으로 발견돼 완성된 지 37년만에 관객에게 처음 공개됐다.

<휴일>을 개막작으로 시작되는 전작전에는 <검은 머리> <돌아오지 않는 해병> <마의 계단> <쇠사슬을 끊어라> 등 지난해 부산에서 상영된 대표작 외에도 <여자가 고백할 때> <생명>등 잠깐 개봉했다가 몇십년 동안 창고 속에 보관되어온, 알려지지 않은 작품도 대거 상영된다. 또 이만희와 함께 작업했던 시나리오 작가 백결, 촬영감독 이석기, 배우 백일섭, 양택조씨와 김경형, 김지운, 류승완, 정지우, 허진호 등 이만희 감독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받은 현역 감독들이 관객과의 대화에 참여한다.

 

편집장이 독자에게  '1960년대를 위하여' 남동철 (05. 12. 23)

최근 CJ-CGV가 발표한 2005년 한국영화산업 결산자료를 보니 올해 극장관객수는 1억4천만명을 돌파할 것이라고 한다. 올 상반기엔 관객수가 마이너스 성장으로 돌아섰다는 지표가 나왔으나 하반기 개봉한 한국영화들이 호조를 보이면서 영화시장이 9년 연속 성장을 멈추지 않게 됐다고 이 자료는 덧붙였다. 산업의 흐름에 관심있는 관계자들이라면 이런 성장세에도 불구하고 성장폭이 줄고 있다는 점을 우려할 수 있겠으나 크게 봐서 한국영화산업은 아직 괜찮아 보인다. 새삼스럽게 한국영화산업이 호황이라는 걸 강조할 생각은 없다. 오히려 관심을 끈 것은 최근 30년간 최고라는 올해 극장관객수가 역대 관객수 기록에선 고작 7번째라는 사실이다. 1969, 1968, 1970, 1967, 1966, 1971년 관객수가 1억4천만명보다 훨씬 많았다는 얘기다. 요즘 관객 가운데 한국영화산업의 전성기가 1960년대 중후반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그때가 지금보다 호황이었던 건 분명한 사실이다.

이번호 특집기사에서 <씨네21>의 편집위원을 맡고 있는 김소영, 정성일, 허문영 세 평론가는 올해의 영화로 이만희 감독의 1968년작 <휴일>을 들었다. 실체를 확인할 수 없던 영화를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한 결과다. 그들은 <휴일>을 볼 수 있음으로 인해 한국영화의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이름이 이만희라는 걸 확인하게 됐다고 입을 모았다. 잊혀진 전통을 발견한 이 짜릿한 희열이 극소수 전문가들만의 것일 이유는 없다. 한국영상자료원이 이런 기회를 제대로 활용해서 관객과 옛 한국영화 사이에 놓인 거리를 좁혀주길 기대해본다.

관객수 통계와 <휴일>의 예로 확인하듯 1960년대 한국영화의 실체는 아직 드러난 것보다 알려져야 할 것이 더 많다. 군사정권 시절에 생긴 단절이 한국영화사의 공백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공백이 안타까운 이유는 역사에 대한 호기심 때문만이 아니다. 할리우드가 그들의 전통을 화려한 신화로 포장해 반복 재생산하는 걸 보노라면 한국영화가 그렇게 못할 이유는 뭔가, 라는 생각이 든다. 고전기 할리우드를 무대로 삼은 영화들이 수없이 쏟아지는 것처럼 이제는 60년대 충무로에 관한 한국영화가 나올 때도 되지 않았을까? 이번에 <씨네21>이 출판하는 김수용 감독의 회고록 <나의 사랑, 씨네마>을 읽으면서 퍼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수많은 문예영화를 연출한 이 노감독의 글은 대단히 영화적이다. 일례로 이만희 감독의 영결식을 묘사한 글을 보자. “나는 어린 유자녀들을 보니 목이 메어 조사를 읽을 수 없었다. 시간을 끌다가 겨우 감정을 가다듬고 마이크 앞에서 입을 뗄 때였다. 갑자기 민방위 훈련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렸고, 사람들은 우르르 지하 다방으로 몰려 들어갔다. 20분 후 다시 마이크 앞에 섰지만 어쩐지 슬픔은 가고 마음도 가라앉았다. 나는 두루마리 조사를 움켜쥐고 즉흥적으로 입을 열었다.” <나의 사랑, 씨네마>는 사료적 가치 못지않게 드라마로서 흥미진진하다.

1960년대를 어떻게 복원할 것인가? 이것은 호황의 절정을 맞은 한국영화가 기꺼이 맡아야 할 숙제 가운데 하나다(여기엔 <씨네21>이 맡아야 할 몫도 있을 것이다. <나의 사랑, 씨네마>의 출간처럼). 피터 잭슨이 1933년 원작영화를 보고 감독의 꿈을 키워 지금의 <킹콩>을 만든 것 같은 일이 한국영화에서 일어나지 못할 이유는 없다. 그러고보니, 우리에게 이만희의 <휴일>을 보여달라. 그러면 진짜 멋진 영화를 만들겠다, 고 어디선가 누군가 외치고 있는 듯도 하다.

 

필름2.0(05. 09. 09) '잊혀진 거장 이만희의 영화에 대하여' 김영진 편집위원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대대적인 이만희 감독 회고전을 연다. 이어 내년에는 영상자료원에서 이만희 감독 전작전을 준비하고 있다. 너무 뒤늦은 감이 있지만 이만희 감독에 대한 본격적인 조망이 막 시작되는 참이다. 이것이 왜 너무 뒤늦었는가, 하는 것은 이만희가 동시대의 감독들뿐만 아니라, 그의 영화를 본 이들에게는 누구나 찬탄과 질시를 불러일으켰던 창작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40대 초반의 나이에 일찍 세상을 떴고 그후 한동안 망각에 묻혔다. 때로 명예의 월계관은 살아남은 이들의 전리품이 된다. 단절된 한국영화 역사의 연구에서 이만희는 저만치 밀려 있었다. 그 와중에 이만희에 대한 여러 영화인들의 회고는 거의 전설 수준으로 옮겨지곤 했다.

언젠가 이만희 감독 밑에서 조감독 생활을 한, 반 은퇴 상태에 있는 감독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이만희와 함께한 현장 생활이 거의 경이적인 것이었다고 했다. 이만희는 군사정권 체제 하에서 영화를 만든다는 것에 혐오감을 품고 있었고 자기 창작 생활을 거의 방기하듯이 했다. 그는 늘 술을 마셨고 현재 영화를 찍고 있는 상태에서 이미 다음 영화의 연출료를 받아 다 써버릴 만큼 애주가였다. 그의 때 이른 죽음은 바로 이 술로 인한 간 기능의 악화 때문이었다. 시나리오도 완성하지 않고 곧잘 영화를 찍은 그는 촬영 당일 아침이면 거의 난수표 수준의 암호 같은, 알아볼 수 없는 글씨로 대사를 아무렇게나 갈겨쓴 콘티를 조감독에게 줬는데 거기에 적힌 소도구를 재빨리 동원하는 게 조감독의 가장 큰 임무였다고 한다. 그런 식으로 찍었는데도 미스터리 스릴러영화를 잘 만들었던 이만희의 재능은 그것 자체로 미스터리였다는 것이다.

동세대의 감독들에게도 이만희는 연구 대상이었다. 이를테면 누구도 자신을 넘어서는 감독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고 김기영 감독도 이만희의 영화에 대해서는 깜짝 놀란 적이 있다고 회고했다. 김수용 감독도 다른 사람이 넘어설 수 없는 경지에 가 있었던 감독이 이만희였다고 말했다. 이는 다른 한편으로는 요절한 동료감독에 대한 예우일 수도 있지만 그 분들이 모두 동의했던 것은 이만희가 생전에 보여 준 것 이상의 것을 훨씬 더 보여 줄 수 있는 감독이었다는 점이다. 영세한 산업 규모로 굴러가던 60년대와 군사정권의 통제가 엄혹했던 70년대에 만들었던 이만희의 영화는 그런데도 빛나는 성취를 티내고 있었다. 그의 영화 중에는 거의 태작이 없다. 빠른 속도로 되는 대로 찍어낸 그의 영화에 미치광이 같은 시정신이 늘 살아 있었다는 것은 수수께끼다. 임권택 감독도 평론가 정성일 씨와 나눈 인터뷰에서 이만희 감독이 살아 있었으면 자신이 영화를 더 잘 만들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어떤 경쟁에 있는 자로서, 아, 저 사람에게 지면 안 되겠다는 경쟁심을 불러일으키는 감독이 있다면 내게는 이만희 감독인 거요. 왜 그런 얘기를 할 수 있냐면 내가 <증언>을 찍고 있었을 때 이만희 감독은 나와 마찬가지로 전쟁영화 <들국화는 피었는데>를 만들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 영화가 중간에 말썽이 많이 나고 해서 나머지를 임 감독이 좀 대신해줄 수 없냐고 해서 막장까지 갔는데, 남이 만들던 영화를 할 수는 없는 거요. 바보가 아니면. 그때 내가 속으로 생각을 해본 거요. 내가 만약 대신한다면 이만희 감독이 찍은 영화를 흔적 없이 해낼 수 있겠는가. 그런데 아니더라고. 내가 흉내낼 수 없는 이 감독만의 세계가 있는 거요. 거기에는. 내게는 한국영화에 특히 그 두 사람이야. 김기영 씨하고. 도저히 그 사람들의 스타일은 내가 흉내 내서 비슷하게 할 수가 없겠다는 거지. 독특한 자기 양식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야.”

<들국화는 피었는데>는 1973년에 영화진흥위원회의 전신인 구 영화진흥공사에서 직접 대규모 예산을 들여 제작한 국책 반공 전쟁영화였다. 영화진흥공사는 전쟁영화 연출 경험이 있는 이만희와 임권택에게 각각 <들국화는 피었는데>와 <증언>의 연출을 맡겼다. 사단 병력 규모의 군부대가 엑스트라로 동원되고 한 마을 전체가 세트로 지원된, 당시로선 상상할 수 없는 규모의 대작이었다. <들국화는 피었는데>는 극우 논객으로 유명했던 소설가 선우휘가 각본을 썼지만 감독 이만희의 관심은 각본에 담긴 선전영화의 의도에는 관심이 없었다. 특히 영화 초반 수십 분간 전개되는, 북한군의 탱크 위용을 보여 주는 장면은 압권이다. 탱크가 마을과 사람을 짓밟고 지나갈 때 장비가 열악했던 당시의 남한군은 그저 무력하게 당할 수밖에 없었다. 웬만한 총이나 화기에도 끄떡하지 않는 탱크에 맞서 남한군 병사들은 아예 수류탄을 지고 탱크에 뛰어드는 무모한 방법으로 목숨을 버린다. 그것은 영웅적인 활약으로 보인다기보다는 가공할 기계에 맞서는 인간의 힘겨운 투쟁을 그리면서 거의 무력감에 가까운 느낌을 안겨주는 것이었다. 영화가 완성됐을 때 북한군의 잔학상과 그런 북한군에 맞서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기를 바랐던 정부 당국으로부터 전쟁의 스펙터클에서 비극적인 무력감을 표현한 이 영화가 눈밖에 난 것은 당연했다. 제작 직후 가진 시사회에서 정보 당국은 이 영화에 대해 전면 개작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영화 곳곳에 반공과 애국을 역설하는 상투적인 연설 투의 대사가 수시로 깔리고 화면의 연결이 성긴 흔적이 역력하지만(심지어 밤 전투 장면을 낮에 찍어 이어붙여 놓기도 한다) 감독 이만희는 당시의 제작 현실에서 거의 불가능했던 풍부한 제작 조건에서 작업하면서 찍은 이 전쟁 스펙터클의 초점을 반공이나 북한에 대한 적대심이 아닌, 탱크에 짓밟히는 인간의 모습을 통해 전쟁에 대한 훨씬 더 추상적인 두려움을 보여 준다.

정부가 지원하는 국책 홍보영화조차도 자기 배짱대로 찍어버린 이 강골의 영화감독은, 그러나 또한 매우 서정적인 감성을 지닌 창작자였다. 이번에 영상자료원에서 발견돼 9월 2일 상영됐으며 부산국제영화제에서도 공개될 이만희의 <휴일>은 지금까지 한번도 상영된 적 없는 작품으로, 이만희의 진면목의 일부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이 영화는 제작 당시 너무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상영 금지 처분을 당했다. 전옥숙이 기획하고 백결이 시나리오를 썼으며 신성일과 전지연이 주연한 이 영화는 일요일에 만나 데이트 하는 가난한 연인의 하루를 포착한 것이다. 이렇게 내용을 소개하면 매우 달콤한 영화인 듯싶지만 실은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허무한 정조를 띠며 전개된다. 신성일이 연기하는 허옥은 무일푼 백수 청년으로 가진 것도 능력도 없으면서 턱없는 허풍으로 세상을 대하는 청년이다. 택시비도 없으면서 택시를 잡아타고 목적지 근처에 택시를 세워두곤 구멍가게에서 담배를 사는 척하며 거스름돈은 택시 운전사에게 받으라고 사기를 치며 달아나는 대책 없는 청년이다. 그런 그가 애인을 만나기 위해 약속 장소에 도착했을 때 애인은 다방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커피값이 없기 때문이다. 다방에서 만날 돈조차 없는 가난한 연인은 그렇게 일요일의 데이트를 시작한다. 나무들이 늘어선 비탈길을 나란히 걸으며 그들은 자신들의 비루한 사랑의 미래를 이야기한다. 꽤 문학적 감성으로 치장된 이들의 대화는 결국 여자가 감추고 있던 비밀을 꺼내는 것으로 이어진다. 여자는 임신을 했고 여자뿐만 아니라 남자도 그 뱃속의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여자는 무기력한 남자를 비난하지만 결국 아이를 떼는 데 동의한다. 남자는 낙태 비용을 얻기 위해 친구들을 만나러 간다. 그가 돌아올 때까지 여자는 바람이 몰아치는 남산 중턱 벤치에서 하염없이 남자를 기다린다.

이렇게 펼쳐지는 <휴일> 도입부는 사건이 전개될수록 더 암담한 분위기로 치닫는다. 허옥이 돈을 빌리러 간 친구들은 다 제멋대로다. 여자를 후리는 데만 골몰하는 놈, 사회의 낙오자가 되어 술집에서 개똥 철학만 주워대고 있는 놈, 돈을 모아 현대식 아파트에 살며 목욕을 즐기며 으스대는 놈(그 당시에는 집에서 목욕을 한다는 것이 사회적 신분 상승의 자기 확인 행위였던 모양이다)들을 만나 새삼 깨닫는 것은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폐허에 있다는 자각이다. 진부한 음악과 문학적 대사를 끼고 이만희는 이런 상황을 이미지로 다룬다. 술집에서 백수들과 ‘대학을 나오고도 사회에서 낙제한 것은 내 책임이 아냐’라는 따위의 시시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친구를 허옥이 찾아갔을 때 카메라는 그들이 벽을 마주하고 대화하는 모습을 잡는다. 그들을 비추던 카메라는 그들이 화면 바깥으로 움직여 나갔을 때도 잠시 그들 배경의 벽을 응시하듯 잡는다. 의미 없는 낙서들이 깨알같이 적혀 있는 그 벽에서 잠시 응시한 끝에 우리가 카메라를 통해 얻어내는 감정은 모멸감이라는 것이다. 어떤 지향으로 묶일 수 없는 삶에 대한 모멸이 거기 스며 있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남자는 방황하고 여자는 기다린다. 남자가 담배를 빼어물고 부스럭거리며 성냥을 찾으면 여자가 핸드백에 남자를 위해 지니고 다니는 성냥갑을 꺼내준다. 그러나 남자는 결코 여자의 마음에 아무것도 점화해줄 수 없다. 산부인과에서 낙태할 차례를 기다리며 초조하게 대기실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는 남녀 주인공의 모습을 담은 영화 속 한 장면에서 카메라는 그들의 꽉 움켜잡은 손을 포착한다. 간호사의 발걸음이 들리고 진료를 받을 것을 채근하는 그녀의 목소리 끝에 내미는 손길은 남녀 주인공의 움켜쥔 손을 떼어놓는다. 사회적으로 공인되지 못한 이들의 결합은 그렇게 무력하다. 더 자세히 밝힐 수는 없으나, 이후 영화 내내 포착되는 주인공의 방황 장면은 60년대 말의 서울의 아름답지만 동시에 흉물스러운 표정을 간직한 풍경을 절묘하게 묘사하고 있다. ‘우리들의 우울한 일요일을 위하여, 우울한 사람들끼리, 내일을 위하여, 어제를 위하여, 여자를 바람 맞힌 그 남자를 위하여, 남자를 바람 맞힌 그 여자를 위하여.’ 따위의 김승옥 소설 풍의 대사들이 술집에서 나누는 건배의 술잔 위로 겹쳐지는 이 영화의 분위기는 극한의 퇴폐와 무기력한 애상으로 치닫는다. 당시의 권력자와 그의 취향을 집행하는 관료들은 이런 퇴폐적인 우울함을 좋아하지 않은 나머지 상영 금지 처분이라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했다. 그런 시대적 맥락까지 더해서 이만희의 <휴일>은 보고 나면 뇌리에 서걱서걱하는 톱밥 소리가 들리는 듯한 감동을 준다. 영상자료원의 시사실에서, 그리고 곧 열릴 부산영화제의 대규모 회고전에서 이만희 감독 영화의 진가를 한번 음미하시길 바란다.

 


씨네21(06. 05. 12)

허문영 평론가가 말하는 지금 이만희 영화를 봐야 하는 이유

이 사람은 도대체 어디까지 갔던 것일까

이만희는 그의 영화를 보면 볼수록 더 말하기 힘든 감독이다. 이 말은 한 사람의 관객이자 평자로서 내가 한 감독에게 바칠 수 있는 최상의 찬사다. 이것은 그가 만든 모든 영화가 걸작이라는 뜻은 아니다. 실은 그렇다고 말할 자격도 없다. <만추>를 제외하고도 그의 영화 50편 가운데 우리는 반도 만나지 못했다. 이만희는 이제 막 말해지기 시작했고 앞으로 더 많이, 더 맹렬하게 말해져야 할 감독이다.

그의 작품들은 아예 행방조차 알 수 없거나(<만추> <시장> <7인의 여포로> 등등), 40년의 망각을 넘어 이제 막 도착했거나(<휴일>), 일부의 소리를 잃어버려 혹은 괴상한 계몽영화로 치부돼 창고에 처박혀 있었지만(<물레방아> <생명>), 그들을 한편씩 만날 때마다 보는 사람을 전율케 한다. 이 사람은 도대체 어디까지 갔던 것일까.

이만희의 영화를 볼 때 우리는 1년이면 30여편에 출연하는 배우를 불러놓고 기껏해야 2주에 한편을 촬영하며 그렇게 1년에 대여섯편을 찍어댄, 그러고서도 검열과 삭제와 금지의 지옥을 경유해야 하는 끔찍한 제작환경을 감안해 가산점을 줄 필요가 없다(이 가산점은 실은 정당한 것이지만). 이 천재가 모든 걸 극복했다는 말이 아니며 지혜롭게 타협했다는 말도 아니다. 오히려 그는 그 저주받을 만한 존재 조건을 자신의 내부로 끌어들여 유의미한 상처로 만들어낸다. 이만희의 영화는 그 모든 악조건과 저주와 상처를 끌어안고, 영화를 사랑한 한 사내가 영화라는 매체의 심장에 기어이 이르려는 순간들의 숨막히는 기록이다.

<생명>
<생명>

여기선 다만 <생명>(1969)에 관해 말하고 싶다. <생명>은, 그의 영화 가운데 단 한편만 보기를 권해야 한다면, 가장 마지막에 권하고 싶은 영화다. 이 영화가 가장 나쁘기 때문이 아니라 가장 개인적이기 때문이다. 한 시간 남짓한 짧은 영화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다. 영화의 첫머리에 이런 구호가 떠오른다. “삼천만 한몸 되어 분쇄하자 북괴만행.” 이 영화는 탄광 매몰과 광부 구출 사건을 다루고 있으므로 ‘북괴만행’과는 무관하다. 그 구호 다음에는 이것이 ‘기록영화’라고 스스로 말한다. 이 영화는 실제 사건을 소재로 한 픽션이므로 이것 역시 말이 안 된다. 이런 어이없는 자막이 들어간 자세한 경위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것은 이만희라는 인물이 당대의 질서와 맹렬하게 대립한 자취 혹은 그로 인한 상처의 흔적으로 읽힌다. <생명>은 한몸 되어 분쇄하자고 말해놓고 한몸이 되지 않는다. 기록영화라고 말해놓고 기록하지 않는다(여기선 기록영화라는 장르가 아니라 ‘기록’이라는 말이 함축하는 리얼리스트의 계율이 중요하다). 이만희는 자기가 가장 무관심하고 가장 끌어안기 싫은 표지를 내세우고 그 안에서 완전히 반대편으로 가버린다.

이 영화에서 갱도 붕괴는 사실적으로 묘사되는 게 아니라 “무너졌다”는 외침 하나로 처리된다. 곧이어 우왕좌왕하는 사람들, 몰려드는 기자들, 슬퍼하는 매몰 광부의 가족 등등 이런 영화가 기록해야 할 대상들은 모두 등장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영화는 그 모든 걸 무성의하게 보일 만큼 간략히 처리한다. 이만희는 정말 기록에 무관심하다. 그러나 한 장면은 자꾸 변주되면서 반복된다. 무너진 갱도에 홀로 갇혀 죽어가는 사내(장민호)의 모습. 그는 갱도에 갇혀 반쯤 실신한 상태로 꿈을 꾼다. 포성과 총소리, 비명이 환청으로 들려온다. 잠에서 깨면 좁은 갱도에는 물 떨어지는 소리만 청명하게 울려퍼진다. 이 영화는 이상하게 조용하다. 울부짖음도 분노도 환호도 없다. 그저 광부는 갇혀 죽어가고 있고 그의 가냘픈 신음 소리와 맑은 물소리가 전쟁의 기억이 만들어낸 간헐적인 환청과 함께 폐쇄공간을 채운다.

<생명>이란 영화는 놀랍게도 이것이 거의 전부다(구출 과정도 매몰과 마찬가지로 얼렁뚱땅 묘사된다). <생명>은 오직 갇혀서 죽어가는 사내의 형상에 관한 영화다. 이 영화의 가장 냉혹한 대사. 신문기자(허장강)가 몰려든 사람들로 바빠진 다방 종업원에게 묻는다. “살아날 것 같은가요?” 종업원이 대답한다. “관심 없어요. 다만 빨리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가장 놀라운 순간은 마지막 장면에 등장한다. 매몰 사건이 일어난 첫 장면에서 갱도 아래로부터 지상으로 올라가던 카메라는, 광부가 구출된 뒤에 지상에서 갱도 아래로 수직 낙하한다. 그리고 영화는 끝난다. 저 카메라는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걸까. 이미 무너져버린 그 갱도로 다시 가서 우리에게 뭘 보여주려는 걸까. 이 기괴한 카메라의 움직임보다 더 가혹한 절망의 영화언어를 기억해내기 힘들다.

이렇게 엉성하고 절충적인 영화에서 이처럼 숭고한 영화적 순간이 등장한다는 사실은 믿겨지지 않는다. 나는 이만희의 모든 영화가 그런 순간을 또 어디엔가 감추고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버리지 못하겠다. 그의 영화를 자꾸만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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