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06. 05. 10) '이-만-희 전작을 보고 싶다' 김은형 기자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한국영화 회고전으로 재조명했던 고 이만희(1931~75) 감독의 전작전 ‘영화천재 이만희’가 12일부터 30일까지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에 있는 한국영상자료원(원장 이효인) 고전영화관에서 열린다. 지금까지 거장 감독의 대표작들을 상영하는 회고전은 종종 열려왔지만 전작을 상영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부산에서 상영됐던 10편을 포함한 총 22편이 상영된다. 엄밀히 말해 이번에 상영되는 22편이 이만희 감독의 ‘전작’은 아니다. 61년 <주마등>으로 감독 데뷔한 이만희는 생전에 51편의 영화를 만들었지만 대표작 <만추>를 비롯해 이십여 편의 필름이 분실되거나 소실됐기 때문에 이번 상영작들이 현재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이만희 영화세계의 전부다.

상영금지된 지 37년만에 지난해 발견된 ‘휴일’로 개막
데뷔작 ‘주마등’ 대표작 ‘만추’ 등 20여편은 필름 없어

1931년 서울 왕십리에서 태어난 이만희는 한국 전쟁 뒤 연기자를 꿈꾸며 영화 이력을 시작했다. 단역배우와 조감독 생활을 거쳐 61년 감독 데뷔를 했으며 62년 스릴러 영화인 <다이알 112를 돌려라>로 연출력과 흥행력에서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다음해 연출한 대작 <돌아오지 않는 해병>은 이만희를 당대 최고의 흥행감독으로 끌어올렸으며 볼 거리로서 한국영화의 수준을 한 단계 도약시켰다는 평을 얻었다.

이후 당시 한국 영화감독에게는 두통거리 숙제와도 같던 반공영화를 제작하면서 고초를 겪기도 했다. <7인의 여포로>(1964)에서 북한군이 인간적으로 그려졌다는 이유로 반공법 위반으로 수감됐으며 당국의 검열로 누더기가 된 이 영화가 흥행에 실패해 큰 상처를 입자 이번에는 “진짜 반공영화를 만들자”고 작심해 만든 <군번없는 용사>(1966)역시 북한군의 제복이 너무 멋지다는 이유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조사를 받아야 했다.

“이만희는 당대 감독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모든 다른 종류의 영화들에서 자기의 작가적 인장을 새긴 인물”이라고 평한 부산국제영화제 이만희 회고전의 기획자 허문영 프로그래머의 말대로 이만희 감독은 스릴러에서 전쟁 스펙터클, 문예영화, 웨스턴, 멜로드라마까지 종횡무진했다. 때로는 모더니즘의 미학을, 때로는 리얼리즘 미학을 구사하면서 독특한 스타일을 일구어갔으며 편집 도중 쓰러져 영영 일어나지 못한 <삼포 가는 길>(1975)을 유작으로 남겼다.

이 가운데 아직 필름을 찾지 못한 <만추>(1966)는 이만희 영화세계의 전환점으로 꼽힌다. 당시 한국영화로는 파격적으로 대사가 거의 없었던 이 영화는 상업적 영화문법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작가주의로 진입했던 작품으로 평가받으며 어둡고 절망적인 감독의 시선은 <휴일>(1968)에서 정점을 이루게 된다. 이 영화는 “우울하고 퇴폐적인 정서”라는 이유로 개봉이 무산됐다가 지난해 영상자료원 필름보관고에서 극적으로 발견돼 완성된 지 37년만에 관객에게 처음 공개됐다.

<휴일>을 개막작으로 시작되는 전작전에는 <검은 머리> <돌아오지 않는 해병> <마의 계단> <쇠사슬을 끊어라> 등 지난해 부산에서 상영된 대표작 외에도 <여자가 고백할 때> <생명>등 잠깐 개봉했다가 몇십년 동안 창고 속에 보관되어온, 알려지지 않은 작품도 대거 상영된다. 또 이만희와 함께 작업했던 시나리오 작가 백결, 촬영감독 이석기, 배우 백일섭, 양택조씨와 김경형, 김지운, 류승완, 정지우, 허진호 등 이만희 감독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받은 현역 감독들이 관객과의 대화에 참여한다.

 

편집장이 독자에게  '1960년대를 위하여' 남동철 (05. 12. 23)

최근 CJ-CGV가 발표한 2005년 한국영화산업 결산자료를 보니 올해 극장관객수는 1억4천만명을 돌파할 것이라고 한다. 올 상반기엔 관객수가 마이너스 성장으로 돌아섰다는 지표가 나왔으나 하반기 개봉한 한국영화들이 호조를 보이면서 영화시장이 9년 연속 성장을 멈추지 않게 됐다고 이 자료는 덧붙였다. 산업의 흐름에 관심있는 관계자들이라면 이런 성장세에도 불구하고 성장폭이 줄고 있다는 점을 우려할 수 있겠으나 크게 봐서 한국영화산업은 아직 괜찮아 보인다. 새삼스럽게 한국영화산업이 호황이라는 걸 강조할 생각은 없다. 오히려 관심을 끈 것은 최근 30년간 최고라는 올해 극장관객수가 역대 관객수 기록에선 고작 7번째라는 사실이다. 1969, 1968, 1970, 1967, 1966, 1971년 관객수가 1억4천만명보다 훨씬 많았다는 얘기다. 요즘 관객 가운데 한국영화산업의 전성기가 1960년대 중후반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그때가 지금보다 호황이었던 건 분명한 사실이다.

이번호 특집기사에서 <씨네21>의 편집위원을 맡고 있는 김소영, 정성일, 허문영 세 평론가는 올해의 영화로 이만희 감독의 1968년작 <휴일>을 들었다. 실체를 확인할 수 없던 영화를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한 결과다. 그들은 <휴일>을 볼 수 있음으로 인해 한국영화의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이름이 이만희라는 걸 확인하게 됐다고 입을 모았다. 잊혀진 전통을 발견한 이 짜릿한 희열이 극소수 전문가들만의 것일 이유는 없다. 한국영상자료원이 이런 기회를 제대로 활용해서 관객과 옛 한국영화 사이에 놓인 거리를 좁혀주길 기대해본다.

관객수 통계와 <휴일>의 예로 확인하듯 1960년대 한국영화의 실체는 아직 드러난 것보다 알려져야 할 것이 더 많다. 군사정권 시절에 생긴 단절이 한국영화사의 공백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공백이 안타까운 이유는 역사에 대한 호기심 때문만이 아니다. 할리우드가 그들의 전통을 화려한 신화로 포장해 반복 재생산하는 걸 보노라면 한국영화가 그렇게 못할 이유는 뭔가, 라는 생각이 든다. 고전기 할리우드를 무대로 삼은 영화들이 수없이 쏟아지는 것처럼 이제는 60년대 충무로에 관한 한국영화가 나올 때도 되지 않았을까? 이번에 <씨네21>이 출판하는 김수용 감독의 회고록 <나의 사랑, 씨네마>을 읽으면서 퍼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수많은 문예영화를 연출한 이 노감독의 글은 대단히 영화적이다. 일례로 이만희 감독의 영결식을 묘사한 글을 보자. “나는 어린 유자녀들을 보니 목이 메어 조사를 읽을 수 없었다. 시간을 끌다가 겨우 감정을 가다듬고 마이크 앞에서 입을 뗄 때였다. 갑자기 민방위 훈련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렸고, 사람들은 우르르 지하 다방으로 몰려 들어갔다. 20분 후 다시 마이크 앞에 섰지만 어쩐지 슬픔은 가고 마음도 가라앉았다. 나는 두루마리 조사를 움켜쥐고 즉흥적으로 입을 열었다.” <나의 사랑, 씨네마>는 사료적 가치 못지않게 드라마로서 흥미진진하다.

1960년대를 어떻게 복원할 것인가? 이것은 호황의 절정을 맞은 한국영화가 기꺼이 맡아야 할 숙제 가운데 하나다(여기엔 <씨네21>이 맡아야 할 몫도 있을 것이다. <나의 사랑, 씨네마>의 출간처럼). 피터 잭슨이 1933년 원작영화를 보고 감독의 꿈을 키워 지금의 <킹콩>을 만든 것 같은 일이 한국영화에서 일어나지 못할 이유는 없다. 그러고보니, 우리에게 이만희의 <휴일>을 보여달라. 그러면 진짜 멋진 영화를 만들겠다, 고 어디선가 누군가 외치고 있는 듯도 하다.

 

필름2.0(05. 09. 09) '잊혀진 거장 이만희의 영화에 대하여' 김영진 편집위원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대대적인 이만희 감독 회고전을 연다. 이어 내년에는 영상자료원에서 이만희 감독 전작전을 준비하고 있다. 너무 뒤늦은 감이 있지만 이만희 감독에 대한 본격적인 조망이 막 시작되는 참이다. 이것이 왜 너무 뒤늦었는가, 하는 것은 이만희가 동시대의 감독들뿐만 아니라, 그의 영화를 본 이들에게는 누구나 찬탄과 질시를 불러일으켰던 창작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40대 초반의 나이에 일찍 세상을 떴고 그후 한동안 망각에 묻혔다. 때로 명예의 월계관은 살아남은 이들의 전리품이 된다. 단절된 한국영화 역사의 연구에서 이만희는 저만치 밀려 있었다. 그 와중에 이만희에 대한 여러 영화인들의 회고는 거의 전설 수준으로 옮겨지곤 했다.

언젠가 이만희 감독 밑에서 조감독 생활을 한, 반 은퇴 상태에 있는 감독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이만희와 함께한 현장 생활이 거의 경이적인 것이었다고 했다. 이만희는 군사정권 체제 하에서 영화를 만든다는 것에 혐오감을 품고 있었고 자기 창작 생활을 거의 방기하듯이 했다. 그는 늘 술을 마셨고 현재 영화를 찍고 있는 상태에서 이미 다음 영화의 연출료를 받아 다 써버릴 만큼 애주가였다. 그의 때 이른 죽음은 바로 이 술로 인한 간 기능의 악화 때문이었다. 시나리오도 완성하지 않고 곧잘 영화를 찍은 그는 촬영 당일 아침이면 거의 난수표 수준의 암호 같은, 알아볼 수 없는 글씨로 대사를 아무렇게나 갈겨쓴 콘티를 조감독에게 줬는데 거기에 적힌 소도구를 재빨리 동원하는 게 조감독의 가장 큰 임무였다고 한다. 그런 식으로 찍었는데도 미스터리 스릴러영화를 잘 만들었던 이만희의 재능은 그것 자체로 미스터리였다는 것이다.

동세대의 감독들에게도 이만희는 연구 대상이었다. 이를테면 누구도 자신을 넘어서는 감독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고 김기영 감독도 이만희의 영화에 대해서는 깜짝 놀란 적이 있다고 회고했다. 김수용 감독도 다른 사람이 넘어설 수 없는 경지에 가 있었던 감독이 이만희였다고 말했다. 이는 다른 한편으로는 요절한 동료감독에 대한 예우일 수도 있지만 그 분들이 모두 동의했던 것은 이만희가 생전에 보여 준 것 이상의 것을 훨씬 더 보여 줄 수 있는 감독이었다는 점이다. 영세한 산업 규모로 굴러가던 60년대와 군사정권의 통제가 엄혹했던 70년대에 만들었던 이만희의 영화는 그런데도 빛나는 성취를 티내고 있었다. 그의 영화 중에는 거의 태작이 없다. 빠른 속도로 되는 대로 찍어낸 그의 영화에 미치광이 같은 시정신이 늘 살아 있었다는 것은 수수께끼다. 임권택 감독도 평론가 정성일 씨와 나눈 인터뷰에서 이만희 감독이 살아 있었으면 자신이 영화를 더 잘 만들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어떤 경쟁에 있는 자로서, 아, 저 사람에게 지면 안 되겠다는 경쟁심을 불러일으키는 감독이 있다면 내게는 이만희 감독인 거요. 왜 그런 얘기를 할 수 있냐면 내가 <증언>을 찍고 있었을 때 이만희 감독은 나와 마찬가지로 전쟁영화 <들국화는 피었는데>를 만들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 영화가 중간에 말썽이 많이 나고 해서 나머지를 임 감독이 좀 대신해줄 수 없냐고 해서 막장까지 갔는데, 남이 만들던 영화를 할 수는 없는 거요. 바보가 아니면. 그때 내가 속으로 생각을 해본 거요. 내가 만약 대신한다면 이만희 감독이 찍은 영화를 흔적 없이 해낼 수 있겠는가. 그런데 아니더라고. 내가 흉내낼 수 없는 이 감독만의 세계가 있는 거요. 거기에는. 내게는 한국영화에 특히 그 두 사람이야. 김기영 씨하고. 도저히 그 사람들의 스타일은 내가 흉내 내서 비슷하게 할 수가 없겠다는 거지. 독특한 자기 양식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야.”

<들국화는 피었는데>는 1973년에 영화진흥위원회의 전신인 구 영화진흥공사에서 직접 대규모 예산을 들여 제작한 국책 반공 전쟁영화였다. 영화진흥공사는 전쟁영화 연출 경험이 있는 이만희와 임권택에게 각각 <들국화는 피었는데>와 <증언>의 연출을 맡겼다. 사단 병력 규모의 군부대가 엑스트라로 동원되고 한 마을 전체가 세트로 지원된, 당시로선 상상할 수 없는 규모의 대작이었다. <들국화는 피었는데>는 극우 논객으로 유명했던 소설가 선우휘가 각본을 썼지만 감독 이만희의 관심은 각본에 담긴 선전영화의 의도에는 관심이 없었다. 특히 영화 초반 수십 분간 전개되는, 북한군의 탱크 위용을 보여 주는 장면은 압권이다. 탱크가 마을과 사람을 짓밟고 지나갈 때 장비가 열악했던 당시의 남한군은 그저 무력하게 당할 수밖에 없었다. 웬만한 총이나 화기에도 끄떡하지 않는 탱크에 맞서 남한군 병사들은 아예 수류탄을 지고 탱크에 뛰어드는 무모한 방법으로 목숨을 버린다. 그것은 영웅적인 활약으로 보인다기보다는 가공할 기계에 맞서는 인간의 힘겨운 투쟁을 그리면서 거의 무력감에 가까운 느낌을 안겨주는 것이었다. 영화가 완성됐을 때 북한군의 잔학상과 그런 북한군에 맞서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기를 바랐던 정부 당국으로부터 전쟁의 스펙터클에서 비극적인 무력감을 표현한 이 영화가 눈밖에 난 것은 당연했다. 제작 직후 가진 시사회에서 정보 당국은 이 영화에 대해 전면 개작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영화 곳곳에 반공과 애국을 역설하는 상투적인 연설 투의 대사가 수시로 깔리고 화면의 연결이 성긴 흔적이 역력하지만(심지어 밤 전투 장면을 낮에 찍어 이어붙여 놓기도 한다) 감독 이만희는 당시의 제작 현실에서 거의 불가능했던 풍부한 제작 조건에서 작업하면서 찍은 이 전쟁 스펙터클의 초점을 반공이나 북한에 대한 적대심이 아닌, 탱크에 짓밟히는 인간의 모습을 통해 전쟁에 대한 훨씬 더 추상적인 두려움을 보여 준다.

정부가 지원하는 국책 홍보영화조차도 자기 배짱대로 찍어버린 이 강골의 영화감독은, 그러나 또한 매우 서정적인 감성을 지닌 창작자였다. 이번에 영상자료원에서 발견돼 9월 2일 상영됐으며 부산국제영화제에서도 공개될 이만희의 <휴일>은 지금까지 한번도 상영된 적 없는 작품으로, 이만희의 진면목의 일부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이 영화는 제작 당시 너무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상영 금지 처분을 당했다. 전옥숙이 기획하고 백결이 시나리오를 썼으며 신성일과 전지연이 주연한 이 영화는 일요일에 만나 데이트 하는 가난한 연인의 하루를 포착한 것이다. 이렇게 내용을 소개하면 매우 달콤한 영화인 듯싶지만 실은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허무한 정조를 띠며 전개된다. 신성일이 연기하는 허옥은 무일푼 백수 청년으로 가진 것도 능력도 없으면서 턱없는 허풍으로 세상을 대하는 청년이다. 택시비도 없으면서 택시를 잡아타고 목적지 근처에 택시를 세워두곤 구멍가게에서 담배를 사는 척하며 거스름돈은 택시 운전사에게 받으라고 사기를 치며 달아나는 대책 없는 청년이다. 그런 그가 애인을 만나기 위해 약속 장소에 도착했을 때 애인은 다방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커피값이 없기 때문이다. 다방에서 만날 돈조차 없는 가난한 연인은 그렇게 일요일의 데이트를 시작한다. 나무들이 늘어선 비탈길을 나란히 걸으며 그들은 자신들의 비루한 사랑의 미래를 이야기한다. 꽤 문학적 감성으로 치장된 이들의 대화는 결국 여자가 감추고 있던 비밀을 꺼내는 것으로 이어진다. 여자는 임신을 했고 여자뿐만 아니라 남자도 그 뱃속의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여자는 무기력한 남자를 비난하지만 결국 아이를 떼는 데 동의한다. 남자는 낙태 비용을 얻기 위해 친구들을 만나러 간다. 그가 돌아올 때까지 여자는 바람이 몰아치는 남산 중턱 벤치에서 하염없이 남자를 기다린다.

이렇게 펼쳐지는 <휴일> 도입부는 사건이 전개될수록 더 암담한 분위기로 치닫는다. 허옥이 돈을 빌리러 간 친구들은 다 제멋대로다. 여자를 후리는 데만 골몰하는 놈, 사회의 낙오자가 되어 술집에서 개똥 철학만 주워대고 있는 놈, 돈을 모아 현대식 아파트에 살며 목욕을 즐기며 으스대는 놈(그 당시에는 집에서 목욕을 한다는 것이 사회적 신분 상승의 자기 확인 행위였던 모양이다)들을 만나 새삼 깨닫는 것은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폐허에 있다는 자각이다. 진부한 음악과 문학적 대사를 끼고 이만희는 이런 상황을 이미지로 다룬다. 술집에서 백수들과 ‘대학을 나오고도 사회에서 낙제한 것은 내 책임이 아냐’라는 따위의 시시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친구를 허옥이 찾아갔을 때 카메라는 그들이 벽을 마주하고 대화하는 모습을 잡는다. 그들을 비추던 카메라는 그들이 화면 바깥으로 움직여 나갔을 때도 잠시 그들 배경의 벽을 응시하듯 잡는다. 의미 없는 낙서들이 깨알같이 적혀 있는 그 벽에서 잠시 응시한 끝에 우리가 카메라를 통해 얻어내는 감정은 모멸감이라는 것이다. 어떤 지향으로 묶일 수 없는 삶에 대한 모멸이 거기 스며 있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남자는 방황하고 여자는 기다린다. 남자가 담배를 빼어물고 부스럭거리며 성냥을 찾으면 여자가 핸드백에 남자를 위해 지니고 다니는 성냥갑을 꺼내준다. 그러나 남자는 결코 여자의 마음에 아무것도 점화해줄 수 없다. 산부인과에서 낙태할 차례를 기다리며 초조하게 대기실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는 남녀 주인공의 모습을 담은 영화 속 한 장면에서 카메라는 그들의 꽉 움켜잡은 손을 포착한다. 간호사의 발걸음이 들리고 진료를 받을 것을 채근하는 그녀의 목소리 끝에 내미는 손길은 남녀 주인공의 움켜쥔 손을 떼어놓는다. 사회적으로 공인되지 못한 이들의 결합은 그렇게 무력하다. 더 자세히 밝힐 수는 없으나, 이후 영화 내내 포착되는 주인공의 방황 장면은 60년대 말의 서울의 아름답지만 동시에 흉물스러운 표정을 간직한 풍경을 절묘하게 묘사하고 있다. ‘우리들의 우울한 일요일을 위하여, 우울한 사람들끼리, 내일을 위하여, 어제를 위하여, 여자를 바람 맞힌 그 남자를 위하여, 남자를 바람 맞힌 그 여자를 위하여.’ 따위의 김승옥 소설 풍의 대사들이 술집에서 나누는 건배의 술잔 위로 겹쳐지는 이 영화의 분위기는 극한의 퇴폐와 무기력한 애상으로 치닫는다. 당시의 권력자와 그의 취향을 집행하는 관료들은 이런 퇴폐적인 우울함을 좋아하지 않은 나머지 상영 금지 처분이라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했다. 그런 시대적 맥락까지 더해서 이만희의 <휴일>은 보고 나면 뇌리에 서걱서걱하는 톱밥 소리가 들리는 듯한 감동을 준다. 영상자료원의 시사실에서, 그리고 곧 열릴 부산영화제의 대규모 회고전에서 이만희 감독 영화의 진가를 한번 음미하시길 바란다.

 


씨네21(06. 05. 12)

허문영 평론가가 말하는 지금 이만희 영화를 봐야 하는 이유

이 사람은 도대체 어디까지 갔던 것일까

이만희는 그의 영화를 보면 볼수록 더 말하기 힘든 감독이다. 이 말은 한 사람의 관객이자 평자로서 내가 한 감독에게 바칠 수 있는 최상의 찬사다. 이것은 그가 만든 모든 영화가 걸작이라는 뜻은 아니다. 실은 그렇다고 말할 자격도 없다. <만추>를 제외하고도 그의 영화 50편 가운데 우리는 반도 만나지 못했다. 이만희는 이제 막 말해지기 시작했고 앞으로 더 많이, 더 맹렬하게 말해져야 할 감독이다.

그의 작품들은 아예 행방조차 알 수 없거나(<만추> <시장> <7인의 여포로> 등등), 40년의 망각을 넘어 이제 막 도착했거나(<휴일>), 일부의 소리를 잃어버려 혹은 괴상한 계몽영화로 치부돼 창고에 처박혀 있었지만(<물레방아> <생명>), 그들을 한편씩 만날 때마다 보는 사람을 전율케 한다. 이 사람은 도대체 어디까지 갔던 것일까.

이만희의 영화를 볼 때 우리는 1년이면 30여편에 출연하는 배우를 불러놓고 기껏해야 2주에 한편을 촬영하며 그렇게 1년에 대여섯편을 찍어댄, 그러고서도 검열과 삭제와 금지의 지옥을 경유해야 하는 끔찍한 제작환경을 감안해 가산점을 줄 필요가 없다(이 가산점은 실은 정당한 것이지만). 이 천재가 모든 걸 극복했다는 말이 아니며 지혜롭게 타협했다는 말도 아니다. 오히려 그는 그 저주받을 만한 존재 조건을 자신의 내부로 끌어들여 유의미한 상처로 만들어낸다. 이만희의 영화는 그 모든 악조건과 저주와 상처를 끌어안고, 영화를 사랑한 한 사내가 영화라는 매체의 심장에 기어이 이르려는 순간들의 숨막히는 기록이다.

<생명>
<생명>

여기선 다만 <생명>(1969)에 관해 말하고 싶다. <생명>은, 그의 영화 가운데 단 한편만 보기를 권해야 한다면, 가장 마지막에 권하고 싶은 영화다. 이 영화가 가장 나쁘기 때문이 아니라 가장 개인적이기 때문이다. 한 시간 남짓한 짧은 영화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다. 영화의 첫머리에 이런 구호가 떠오른다. “삼천만 한몸 되어 분쇄하자 북괴만행.” 이 영화는 탄광 매몰과 광부 구출 사건을 다루고 있으므로 ‘북괴만행’과는 무관하다. 그 구호 다음에는 이것이 ‘기록영화’라고 스스로 말한다. 이 영화는 실제 사건을 소재로 한 픽션이므로 이것 역시 말이 안 된다. 이런 어이없는 자막이 들어간 자세한 경위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것은 이만희라는 인물이 당대의 질서와 맹렬하게 대립한 자취 혹은 그로 인한 상처의 흔적으로 읽힌다. <생명>은 한몸 되어 분쇄하자고 말해놓고 한몸이 되지 않는다. 기록영화라고 말해놓고 기록하지 않는다(여기선 기록영화라는 장르가 아니라 ‘기록’이라는 말이 함축하는 리얼리스트의 계율이 중요하다). 이만희는 자기가 가장 무관심하고 가장 끌어안기 싫은 표지를 내세우고 그 안에서 완전히 반대편으로 가버린다.

이 영화에서 갱도 붕괴는 사실적으로 묘사되는 게 아니라 “무너졌다”는 외침 하나로 처리된다. 곧이어 우왕좌왕하는 사람들, 몰려드는 기자들, 슬퍼하는 매몰 광부의 가족 등등 이런 영화가 기록해야 할 대상들은 모두 등장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영화는 그 모든 걸 무성의하게 보일 만큼 간략히 처리한다. 이만희는 정말 기록에 무관심하다. 그러나 한 장면은 자꾸 변주되면서 반복된다. 무너진 갱도에 홀로 갇혀 죽어가는 사내(장민호)의 모습. 그는 갱도에 갇혀 반쯤 실신한 상태로 꿈을 꾼다. 포성과 총소리, 비명이 환청으로 들려온다. 잠에서 깨면 좁은 갱도에는 물 떨어지는 소리만 청명하게 울려퍼진다. 이 영화는 이상하게 조용하다. 울부짖음도 분노도 환호도 없다. 그저 광부는 갇혀 죽어가고 있고 그의 가냘픈 신음 소리와 맑은 물소리가 전쟁의 기억이 만들어낸 간헐적인 환청과 함께 폐쇄공간을 채운다.

<생명>이란 영화는 놀랍게도 이것이 거의 전부다(구출 과정도 매몰과 마찬가지로 얼렁뚱땅 묘사된다). <생명>은 오직 갇혀서 죽어가는 사내의 형상에 관한 영화다. 이 영화의 가장 냉혹한 대사. 신문기자(허장강)가 몰려든 사람들로 바빠진 다방 종업원에게 묻는다. “살아날 것 같은가요?” 종업원이 대답한다. “관심 없어요. 다만 빨리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가장 놀라운 순간은 마지막 장면에 등장한다. 매몰 사건이 일어난 첫 장면에서 갱도 아래로부터 지상으로 올라가던 카메라는, 광부가 구출된 뒤에 지상에서 갱도 아래로 수직 낙하한다. 그리고 영화는 끝난다. 저 카메라는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걸까. 이미 무너져버린 그 갱도로 다시 가서 우리에게 뭘 보여주려는 걸까. 이 기괴한 카메라의 움직임보다 더 가혹한 절망의 영화언어를 기억해내기 힘들다.

이렇게 엉성하고 절충적인 영화에서 이처럼 숭고한 영화적 순간이 등장한다는 사실은 믿겨지지 않는다. 나는 이만희의 모든 영화가 그런 순간을 또 어디엔가 감추고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버리지 못하겠다. 그의 영화를 자꾸만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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