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봄에 쓴 독서일기의 일부분을 옮겨온다. 칼 뢰비트(1897-1973)의 <지식, 신앙, 회의>에 관한 대목인데, 그의 책으론 <헤겔에서 니체로>(민음사, 2006)가 얼마전에 새단장을 하고 재출간된 바 있다. 기억에 뢰비트는 하이데거의 제자로서 가다머급의 지명도를 갖고 있었던 철학자이다. 저서로는 <역사의 의미>(문예출판사) 등이 더 번역돼 있다.

 

 

 

 

도서관에서 서머셋 모옴의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 김성한 옮김(신양사. 1958)와 칼 뢰비트의 <지식, 신앙, 회의>, 임춘갑 옮김(창림사, 1961)을 대출했다. 앞엣것은 The Art of Fiction(1955)의 일부를 옮긴 것이고, 나중것은 Wisen, Glaube und Skepsis(1956)를 옮긴 것이다.

뢰비트 책은 양질의 종이로 되어 있어서 거의 새책이나 다름이 없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고급스러운 교양서적이었을 것이다(*가끔 도서관에서 1960년대에 나온 책들을 찾아보고 감탄할 때가 있다). 물론 키에르케고르와 도스토예프스키 때문에 대출한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의 <그리스도교의 훈련>은 70년대말에 평화출판사에서 나온 걸로 돼 있다.

(*)임춘갑 선생 번역의 <그리스도교의 훈련>은 2005년말에 다산글방에서 재출간됐다. 가라타니 고진의 <탐구1>(새물결)에서 키에르케고르에 대한 언급을 참조할 수 있다. 아마 그 책에 대한 관심은 고진에게서 비롯됐을 것이다. <탐구1>에서는 일역본을 따라 <그리스도교의 수련>이라고 옮기고 있다. 아마 이 글은 고진의 책들을 읽던 시절의 일기인 듯하다. 아래 사진은 칼 뢰비트.  

주말에 뢰비트의 <지식, 신앙, 회의>를 다 읽고, 야스퍼스의 전기를 읽고 있다. 뢰비트의 책은 얇은 분량이지만, 힘과 재미가 느껴지는 책이다. 문제의식이 살아있고, 초점도 명확하다. 역자는 저자의 주장을 “철학은 다시금 철학의 본영토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직도 그리스도교의 창조설의 사상에 물들지 않은 그리스철학의 모습으로 돌아가야만 한다”고 요약한다.

하이데거와 사르트르를 비판하면서 니체야말로 유일한 현대철학자라고 추켜세우고 있는 점도 이채롭다. 또 데카르트의 인식론적 아르키메데스의 점과, 키에르케고르의 종교적 아르키메데스의 점에 대한 비교의 꼬투리(이건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이다.)

3장에서 키에르케고르에 대한 비판: “키에르케고르의 역설적 그리스도교는 오로지 세계를 잃고 실존하는 외톨이와, 마찬가지로 세계를 잃은 신, 이 두 개밖에는 모른다. 인간과 세계가 창조주를 통하여 서로 연결되고 서로 병렬케 하는 그런 창조에의 신앙이 키에르케고르에게는 결핍되어 있다. 창조에 관한 이 실존신학적인 결함은 이미 데카르트파의 파스칼에게서 시작되었지만, 이와 마찬가지로 온갖 종류의 실존철학에 있어서는 언제나 존재하고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 그리고 그 속에서 인간이 자연적으로 살고, 또 죽는 것, 그러한 것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자연적인 개념이 결핍되어 있다.”(123쪽, 강조는 나의 것)

각주에는 “니체의 동일물의 영겁회귀의 철학“이란 글을 참조하도록 되어 있다. 아무튼 이 세계라는 개념의 결핍은 비단 키에르케고르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리다. 생물학과 형이상학, 두 가지만은 사고의 축으로 삼아온 나에게도 근래에 경험하는 현실은 또 다른 실세에게 관심을 갖도록 부추긴다. 그것은 돈, 혹은 경제적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 듯하다.

 

 

 

 

돈의 철학으로서의 경제학, 거기에 숨겨져 있는 법칙과 비약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다(*그런데 이런 건 누구에게 배워야 하나?). 이건 물론 포지티브한 관심은 아니다. 문제를 배제하고 소거시키기 위한 관심이다. 내가 거기에 얽매여 있기 때문.

마지막 4장 “창조와 실존”은 실존철학에 잔재하고 있는 그리스도교의 흔적을 비판하고 있다. 그것은 일종의 토미즘이라는 것이다. “파스칼에서 시작하여 사르트르에 이르러 극단화되어, 비그리스도교화 되고만 현대의 실존 개념은 창조설을 제거한 그리스도교적, 토마스학파적인 존재론이라고 할 수 있다.”(158쪽)

(*)'유령-독자들'을 의식하지 않을 때 나는 그냥 인상적인 구절들과 그에 대한 짤막한 코멘트만을 기록했었다. 이런 빛바랜 글을 밖으로 꺼내놓으니까 좀 머쓱하군. 창고에나 집어넣어야겠다...

06. 0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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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13 00: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twoshot 2006-05-13 0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머쓱해서 창고에 집어넣으시면 안됩니다. 삼삼오오, 귀를 쫑긋세우고 모여드는게 어디 유령 뿐이겠습니까...

2006-05-13 01: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5-13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여기에 댓글을 달도록 하겠습니다. '문자로 창작되지 않은 것은 문학이 아니다'란 주장에서 방점은 '문자'가 아니라 '창작'에 있었던 모양입니다. '구술된 것을 받아적은 것'은 같은 '기록성'을 갖지만 문학이 아니다라고 하신 걸 보면요. 거기에는 아마도 "'문학'은 '문학을 한다'는 자의식을 가진 개인에 의해서 창작된 것"이라는 주장이 암묵적으로 전제돼 있는 듯합니다('넓은 의미의 문학'도 아니라는 뜻은 모순적인 거 같습니다. 구비문학, 구술문학이란 용어를 우리가 사용하고 있으니까요).

더불어, 저는 개인적으로 네 가지 다른 문학적 태도(문학관)을 분류하는데, 그것들이 반드시 일치될 필요는 없습니다(이념적 태도에서와 마찬가지로). 음유시인적 전통에서 진정한 시인은 (기록된) '시를 쓰지 않은 사람'으로 정의됩니다. 쓴다는 건 어떤 타락이나 진정성의 훼손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즉, 그 경우에 '기록된 시'는 '텍스트'가 아니었습니다('텍스트'는 그 가치에 대한 인준을 요구합니다). 아마 이 문맥에서는 '문학'이 아니라고 말씀드릴 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 '문학'이 너무나도 외연이 넓은 용어인지라 그 개념에 대해서 논란을 벌이는 건 좀 소모적인 듯합니다. 다만, 역사적/형식적으로 정의될 수 있고, 그 경우에도 태도에 따라서 몇 가지 분류/유형학이 가능하다는 것 정도가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2006-05-13 12: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5-13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음유시인에 관해서 제가 읽은 건 러시아 기호학자의 논문이기 때문에 별로 도움이 안되실 거 같습니다. 그리고, 후배님의 경우에 '근대문학'을 상당히 폭넓게 정의하는 거 같습니다. '문자'만이 문학의, 근대문학의 충분한 정의를 제공하는 건 아니니까요. 거기에 근대적인 의식, 혹은 문학에 대한 자의식이 수반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더불어, '철학'이란 말도 말씀처럼 그렇게 '엄밀하게' 정의될 수 있는 건지는 의문입니다(특히나 한국어에서 '철학'이란 말!). 우리에게 주어진 건 '철학들' 아닌가요?..

2006-05-13 13:2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