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터지면 전쟁에 대한 책들이 쏟아져 나온다(*이 글은 2003년 3월말에 씌어진 것이다). 그걸 출판시장에서는 '현실'이라고 부를 것이다. 어제 읽은 한 칼럼에서는 '전쟁'과 '전장(戰場)'을 구분하고 있었는데, 전쟁은 언제나 승자와 영웅을 탄생시키지만, 전장에서는 패자만이 있을 뿐이라는 점에서 둘은 다르다. 보다 많은 관심이 두어져야 하는 것은 물론 '전쟁'이 아니라 '전장'이다.

 

 

 



그런 의미에서 2차대전 당시의 독소전쟁을 다룬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지식의풍경, 원제는 Russia's War)의 출간은 의미있어 보인다. 역자는 러시아사 전공자이다. 1941-5년 사이에 벌어진 이 전쟁에서 2천만명이 넘는 러시아인들이 희생됐고, 패퇴한 독일 또한 혹독한 대가를 치르면서 패전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이 시기 독일군의 만행에 대해서 러시아 영화 <컴 앤 씨>(1985)가 잘 증언하고 있기도 하다.

러시아는 역사상 세 번의 중요한 전쟁(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는데, 첫째는 13세기 타타르(몽고)의 침입을 받고 200여년간 복속되었지만, 결국 패퇴시킨 일이고(15세기), 둘째는 1812년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 군대를 패퇴시킨 일, 그리고 셋째가 바로 1945년 히틀러의 독일군을 패퇴시킨 일이다. 이번 전쟁에서 이라크 또한 미영 연합군을 패퇴시키길 기원한다(더불어 우리 공병대가 갈 일이 없기를).(*물론 턱없는 기대였다.)

 

 

 

 

 
지난주간에 나온 책들 가운데 가장 눈에 띈 건 슬라보이 지젝의 <믿음에 대하여>(동문선)이다(*물론 이 번역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최악'이었다. 믿음이란 얼마나 힘든 것인지!). 여기서 믿음이란 건 달리 신앙이라 번역해도 무방하다. 지젝은 '예수와 바울', '프로이트와 라캉'에 대응하는 또다른 짝패를 도입하는데, 그것은 마르크스와 레닌이다. 흔히 교조적 맑스주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지젝은 과감하게 복원하고자 한다. 이름하여 '레닌으로의 복귀'이다. 책의 서문조차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레닌까지"란 제목을 달고 있다. 지젝이 최근에 레닌주의에 골몰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듯 선명하게 레닌주의를 들고나올 줄은 몰랐다. 하여간에 이 희대의 재사가에 힘입어(한 출판인은 그를 가리켜 대단한 '구라꾼'이라고 했다) 레닌주의는 포스트맑수주의를 넘어서는, 아주 세련된 이론적 담론으로 재탄생한다. 예수와 더불어.



언제나 그렇듯이 책값이 좀 비싸지만(도서정가제 이후에도 동문선의 책값은 다운될 기미가 안 보이다), 얇은 분량이므로 모두가 사서 읽어보기를 권한다. 문제는 번역인데, 역자는 서양사 전공자로서 조르주 뒤비의 책 등 이미 여러 권의 번역서를 갖고 있다. 그래서 신뢰할 만하다? 그건 아니다. 역자로서는 최선을 다했다고 보아지지만(우리말로 그래도 읽히는 편이다), 역시나 이론의 대식가이자 대중문화광인 지젝을 따라잡기에는 식욕이 좀 모자라고 걸음이 좀 느리다. 그래서 영화/작품명들을 말끔하게 옮기지 못하고 있다. 언어학자 '야콥슨'은 '제이콥슨'으로 번역하고. 영화 <브라스트 오프>는 <싫증>으로 옮기는 식이다. 처음 몇 쪽을 읽어보았을 뿐이지만, 그럼에도 나쁜 번역은 아닌 듯하다. 적어도 김종주나 이만우보다는 나은 번역이다(*이건 오판이었다).

 

 

 

 

프랑스의 신예작가 우엘벡의 <소립자>(열린책들)가 번역돼 나왔다(*올해 재판이 나왔다). 98년인가 출간되어 논란이 많았다는 작품이다. 굳이 여기에 소개하는 것은 지젝이 <믿음에 대하여>에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겸사겸사 읽어보는 것이 좋겠다.

그렇게 겸사겸사 읽을 만한 책으로 제프 콜린스의 <데리다>(김영사)도 있다. 김영사에서 나오는 '하룻밤의 지식여행' 시리즈의 한권이고, 역자는 이 시리즈의 <라캉>을 번역했던 이수명 시인이다. 아직 읽지는 않았지만, 무난한 번역일 것이라 생각한다. 더불어 만화이기 때문에 데리다를 싫어하지만 평소에 읽을 기회가 없었던 이들에게 유익할 듯싶다(조금 알아야 욕을 할 수 있을 테니까). 참고문헌에 따르면 데리다는 1996년 현재 37권의 책과 250편 이상의 에세이, 인터뷰를 출간한 다작의 저술가이다. 아직까지 완간되지 않은 하이데거 전집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그는 하이데거와 경쟁한다). 그러니 좀 말려주기를...(*입방정이었다. 알다시피 데리다는 이미 투병중이었고, 이듬해 2004년 가을 우리 곁을 떠났다.) 

 

 

 



그리고 눈에 띈 책은 영국 철학자 러셀의 <러셀 자서전>(사회평론)이다. 상하권 합해서 12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이다. 문화과학사에서 나온 비트겐슈타인의 전기 <천재의 의무>와 나란히 읽을 만하겠다. 이 러셀과 같이 <수학의 원리>를 쓴 미국철학자 화이트헤드의 <사고의 양태>(다산글방)도 번역돼 나왔다. 역자는 화이트헤드 전문가들인 오영환, 문창옥 교수. 이로써 화이트헤드의 주저들이 대부분 번역된 듯싶다. 한때 화이트헤드 카페에서 활동한 적도 있었는데, 모아놓은 책들은 언제나 읽을는지...



 

 

 

고전번역으로는 막스 베버의 <문화과학과 사회과학의 방법론(1)>(일신사)이 번역돼 나왔다. 인터넷서점엔 아직 들어오지도 않은 모양이다. 좀 가벼운 책으론 셰리 터클의 <스크린 위의 삶>(민음사)이 있다. 저자 터클은 하버드에서 심리학을 전공하고 정신분석의로도 활동한 바 있는데, <라캉과 정신분석혁명>이 그녀의 저작이다. 현재는 MIT에서 과학사회학을 강의한다고 한다. 제목의 '스크린'은 '모니터'로 옮기는 것이 더 적절했을 듯싶다. 여기서 스크린은 영화를 얘기하는 게 아니라 컴퓨터 화면을 얘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용은 가벼워 보이지만 책은 좀 묵직하다(거의 500쪽).

진짜 가벼운 책으론 미디어학자 빌렘 플루서의 <디자인의 작은 철학>(선학사)이 있다. 플루서는 구대륙의 '맥루한'으로 불리는 인물인데, <코뮤니콜로기>(커뮤니케이션북스) <사진의 철학을 위하여>(커뮤니케이션북스) <디지털시대의 글쓰기>(문예출판사) 등이 번역돼 있다. 미디어학과 관련한 국내저작으로는 이기현의 <미디올로지>(한울)도 출간됐다. '사회적 상상과 매체문화'란 부제를 달고 있는데, 이전에 나는 부르디외에 관한 그의 글을 읽은 게 전부여서 책의 수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다. 카스토리아디스에 대한 언급이 좀 들어가 있는 게 흥미를 끄는 정도.

 

 

 



조지 커퍼드의 <소피스트 운동>(아카넷)이 김남두 교수의 번역으로 출간됐다. 플라톤 전공자인 김교수는 겸손하게도 아직 단한권의 단행본 연구서도 출간한 바 없다. 때문에 이 책은 저자보다도 역자가 더 눈에 띈 경우이다. 같은 서양고전철학 전공자인 윤구병 전 교수(현재는 농부)의 존재론강의 <있음과 없음>(보리)도 출간됐다. 여기에는 저자와 김남두 교수와의 대담이 실려 있다. 철학쪽 이야기가 나왔으니 마저 하면, 유독 헤겔 책들이 여럿 나왔다. 조극훈의 <이성의 복권>(리북)이 '헤겔철학과 이성사회 실현'란 부제를 달고 나왔고, 이정일의 <칸트와 헤겔: 주체성고 인륜적 자유>(동과서)도 출간됐다. 동과서에서는 클라우스 뒤징의 <헤겔과 철학사>도 번역 출간했다. 나로선 생소한 저자들이기 때문에 뭐라 말할 수가 없다.

 

 

 

 

국내 저작으론 인권운동가 서준식의 <서준식 생각>(야간비행)이 출간됐다. 읽거나 말거나 그의 책들을 사두기를 권한다. 인권운동에 작은 힘이라고 보태기 위해서. 그리고 두 저널리스트 김훈과 고종석의 글들이 각각 <김훈세설>(생각의나무)와 <히스토리아>(마음산책)으로 묶여서 나왔다. 이미 일간지 지면 등을 통해 발표된 글들을 모은 것으로 애독자들을 위한 장서용의 책이라 할 것이다. 내가 이들의 글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분량'과 '시간'이라는 조건 속에서의 글쓰기에서 자신들의 이름을 각인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들의 글에는 언제나 긴장이 배여 있다. 하지만, 내가 더 좋아하는 그들의 글은 좀 긴 시간을 갖고 길게 쓴 글들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장인 백대웅 교수의 <전통음악의 랑그와 빠홀>(통나무)도 출간됐다. 통나무에서 나왔다는 것은 김용옥 기자와 연분이 있다는 얘기인데, 사실이 그렇다. 내가 언제 이런 책까지 사서보랴 싶지만, 책이 나왔다는 사실 정도는 기록해 두고 싶다.

더불어 이번에 방한 틱낫한 스님의 책들도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너무 많은 책들이어서 이미지 나열은 생략한다), 나로선 고마운 일이다. 나는 명상서적이나 처세술책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에(*따라서 돈 들일 일이 줄어드니까). 틱스님은 화를 가라앉히는 <화>라는 책으로 유명해졌는데, 사실 나는 화를 잘 내지 않는 자신의 성격이 오히려 불만스러울 지경이니 틱스님과는 인연이 없는 셈이다. 몇 년전에 한 외국인 지인이 선물로 준 <평화로움>이 책꽂이 어딘가에 그냥 평화로이 꽂혀 있는 것도 그런 때문이다. 러시아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은 마음의 평화를 사랑할 수 없다!

 

 



 

끝으로 과학책 혹은 기타. 철학연구회 편, <진화론과 철학>(철학과현실사)은 내가 좋아하는 주제인 만큼 당연히 눈길이 가는 책이다. 여러 분야 전공자들이 진화론과 철학에 관한 몇 가지 주제들에 대해 쓴 논문들을 모았다. 이 주제에 대한 한국학계의 수준을 가늠하는 데 도움이 되는 책이다. 홀크 크루제 등이 쓴 <지능의 발견>(해바라기)도 흥미를 끄는 책이다. 부제는 '개미도 사고를 할 수 있는가'. 그리고 돈이 좀 있다면, <아인슈타인 파일>(이제이북스)도 사보고 싶다. 미국 FBI가 사회주의 성향이 농후했던 이 세기의 과학자를 대중에 무해한 인물로 포장하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가가 폭로된다. 연대출판부에서 '문학의 기본개념 시리즈'를 출간하기 시작했다. <환상> 등 네 권의 책이 먼저 출간됐는데, 특징은 얇다는 것(얄팍한지는 모르겠다)과 국내 필자들의 저작이라는 것.

한동안 미루어둔 숙제를 한 기분이다. 이젠 하고 싶은 걸 해야지!...

2003. 03.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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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12 18: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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