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두 주간에도 여전히 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손길이 가는 책은 많지 않았다. 그래도 눈길을 끈 책들 가운데 비교적 언론의 포커스를 받지 못한 책들을 중심으로 간단히 소개한다.





레비나스의 책 2권이 연이어 나왔다. 한권은 그의 3대 주저 가운데 하나인 <존재에서 존재자로>(민음사)이고 다른 한권은 절친한 친우에 대한 책 <모리스 블랑쇼에 대하여>(동문선)이다(블랑쇼의 비평에 대한 개괄적인 소개는 김현의 <프랑스비평사-현대편>을 참조). 이전까지는 나는 그냥 ‘임마누엘 레비나스’라고 알고 있었는데(임마누엘 칸트처럼) 새로 나온 번역서들을 보니 ‘에마뉘엘’ 혹은 ‘에마누엘’이라고 불러야 하는 듯하다.(*레비나스에 대해선 얼마전에 여러 차례 다룬 바 있기에 좀 새삼스럽다).
<존재에서 존재자로>는 믿을 만한 역자의 자세한 해제를 싣고 있기 때문에 굳이 부연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블랑쇼에 대한 책 역시 블랑쇼 연구로 학위를 받은 이의 번역이므로 믿어봄 직하다. 그런데, 100쪽이 안되는 책이 9,000원이나 하는 것은 좀 심하다는 생각도 든다. 일부 마니아나 도서관을 염두에 둔 책값이지 싶다(그 마니아에 내가 속한다니!). <블랑쇼>는 불어로는 단행본으로 출간됐지만, 내가 갖고 있는 영역본에서는 <고유명사들Proper Names>(스탠포드대학, 1996)에 합본돼 있는데, 분량은 44쪽에 불과하다. 프랑스 철학이나 비평서들에 자주 손길이 가는 탓에 동문선의 책들을 자주 소개하게 되는데(요즘은 ‘서문선(西文選)’이나 ‘불문선(佛文選)’이라고 개명해야 할 듯싶다), 그들이 제값의 번역서들을 내고 있는지는 좀 의심스럽다.
레비나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건 10년이 넘었다. 애초에 하이데거의 책에 눈을 뜨기 시작하다가 ‘타자’에 대한 윤리학이란 구호에 매료된 거 같은데, 덕분에 관련서만 서가 한칸을 채우고 있다(에스토니아 출신인 그는 러시아문학의 영향을 많은 받은 철학자이다. 특히 그가 자주 언급하는 책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이다). 이런 까닭에 그간 드문드문 그의 책들이 소개될 때마다 반가운 마음을 갖게 된다. <전체성과 무한>, <존재와 다른 것, 혹은 존재 사건 저편>과 같은 나머지 주저들도 마저 번역되기를 기대한다. 레비나스 얘기가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이기상 교수의 <하이데거의 존재사건학>(서광사)이 출간됐다. 정신문화원 김형효 교수의 묵직한 책들과 함께 국내 하이데거학의 수준을 말해주는 지표이다.





동문선에서 나온 신간으론 롤랑 바르트의 <작은 사건들>도 있다(*바르트의 책은 이후에 5-6권이 더 출간되었다). 역자는 동문선의 간판역자인 김주경씨(<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의 역자). 바르트 전집이 잠시 주춤하고 있는 사이에 기습적으로 출간된 이 책은 바르트 애호가들의 장서용 책이다. 주저는 아니라는 뜻이고, <카메라 루시다>에 매혹됐던 이들에게는 좋은 선물이 될 만하다. 아울러 바르트를 좋아하는 이들은 이번 봄호 <세계의 문학>에 실린 쇠이유의 편집자 프랑수아 발과의 인터뷰를 놓치지 마시길 바란다. 발은 바르트 생전에 매주 저녁식사를 같이 했던 친구이자 전담 편집자이고 철학자이다(그리고 바르트와 마찬가지로 동성연애자이다).
곁다리로 덧붙이자면, 프랑수아 도스의 <구조주의의 역사4>가 마저 출간됨으로써 전 4권이 동문선에서 완간됐다. 번역은 2, 3권에서와 마찬가지로 김웅권. 도스는 역사학자로서 폴 리쾨르의 제자인데, 그가 쓴 <폴 리쾨르>도 동문선의 근간 리스트에 올라가 있다. 한번 기대해봄 직하다(*이 책은 작년에 이미 출간되었다). 또 하나, 피에르 부르디외의 <맞불2>도 동문선에서 나왔다(*<맞불>은 <맞불2>보다 더 나중에 출간됐다). 부르디외의 책 리스트를 나도 웬만큼은 꿰고 있는데, 처음 들어보는 책이다. 당연히 아는 바가 없다. 시사적인 글 모음이 아닐까 싶다.

모처럼 사회학 이론서를 한권 샀는데, 스티븐 마일스의 <현실세계와 사회이론>(일신사)이 그것이다. 저자는 그다지 잘 알려진 인물이 아니고, 다만 비교적 얇은 분량에서 대중사회, 탈산업사회, 소비사회, 탈근대사회, 맥도널드화된 사회, 위험사회, 지구사회 등 20세기의 다양한 사회이론의 흐름과 그 관계들은 잘 정리하고 있다는 게 장점인 책이다. 일종의 지도이자 매뉴얼인 셈(실제 독서에선 이런 책들이 유용하다). 책은 일신사의 사회과학신서의 한권인데, 출간된 60권의 책 가운데 내가 갖고 있는 건 고작 3권뿐이었다(나는 얼마나 책을 안 사는 것인지!). 근간 목록에 유까 그루너브의 <취향의 사회학>이 눈길을 끈다(*아직 출간되지 않았다).

야나부 아키라의 <번역어 성립 사정>(일빛)이 번역돼 나왔다. 사실 이 책은 두 주전 구내서점에서 우연히 눈에 띄길래 바로 구입한 책이었고, 은근히 괜찮을 물건 하나 건졌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바로 그주 언론의 북리뷰란에서 가장 크게 다루어졌다. 한때 '사회'라는 말이 언제쯤 우리말 쓰임새를 갖게 됐을까 궁금하기도 했었는데(현진건의 '술권하는 사회'란 단편을 떠올려 보라), 그런 류의 궁금증을 시원하게 씻어주는 책이 신간이다. 11개의 주요 단어들이 일본어로 옮겨지게 된 사정을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있는데, 그 일본어들은 곧 우리말이기도 하기 때문에 '일본어 사정'이라고 치부해 버릴 수만은 없다. 이런 류의 우리말 번역어 성립 사정도 누가 좀 풀어주었으면 싶다.






이론서들을 제쳐놓는다면, 가장 반가웠던 책은 조루주 벨몽의 <나의 프루스트씨>(시공사)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작가 프루스트를 만년에 8년간 돌보았던 셀레스트 알바레의 회고담인데, 역자후기에 따르면 아주 오래전에 출간됐던 것이 이번에 재출간됐다. 재정 문제 때문에 아직 책세상에서 나온 <마르셀 프루스트1,2>를 구입하진 못했지만, 이 신간 덕분에 프루스트에 관한 연구서 두어 권을 복사했다. 언젠가 처박아놓은 책들을 찾아서 읽을 시간이 오기를 바란다.(*열화당에서 나오는 만화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현재 3권이 출간돼 있다.)




니콜 키드먼 주연의 영화 <디 아워스>의 영향으로 버지니아 울프의 책들이 번역되고 있다. 대학에 들어올 때 내가 서점에서 본 울프의 책은 삼중당문고본 <댈러웨이 부인> 정도가 전부였다. 그리고 그걸 (고생스레) 읽고 있던 친구가 그렇게 부럽진 않았다. 솔출판사에서 전공자들로 울프 전집 간행위원회를 구성하여 더디지만, 지난 96년부터 전집을 출간하는데, 이미 댓 권이 나왔고, 이번에 <댈러웨이 부인>이 다시 나왔다(*이미지를 찾지 못하겠다). 이미 허마이오니 리의 정평있는 전기 <버지니아 울프 1,2>(책세상, 2001)도 나와 있기 때문에 이젠 버지니아 울프도 마음놓고 읽을 만한 때가 되었다.



<러시아현대희곡>(전3권)이 열린책들에서 나왔다. <오리사냥>의 밤필로프를 제외하면 과문한 나로서는 대부분 낯선 현대 작가들의 희곡들이 얇은 책 3권으로 묶였다. 읽어보지 않았기에 뭐라 말할 수는 없지만, 사실 내용을 살펴보고 좀 실망했다. 더 중요한 작가들의 더 중요한 작품들이 먼저 번역됐어야 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20세기 초반 씌어진 다수의 작품들이 그들인데, <러시아희곡1,2>(열린책들)과 <러시아현대희곡> 사이에 끼인 그 작품들은 언제쯤 우리말로 읽을 수 있을까?




장정일 등이 쓴 <삼국지 해제>(김영사)가 두툼한 책으로 나왔고(알다시피 장정일은 문화일보에 삼국지를 연재하고 있다), 서유기의 새 번역본(임홍빈 역)도 문학과지성사에서 10권짜리고 나온다고 한다. 당분간은 이들을 챙길 여력이 없음이 유감이다. 反중화주의를 기치로 내건 <삼국지 해제>가 특별히 강조하는 건 두 가지라고 한다. 하나는 삼국지 최고 전략가가 제갈량이 아닌 가후라는 것. 그리고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천하통일에 실패했기에 유비와 조조는 역사의 실패자라는 것.
이 책에 대한 소설가 조성기(<삼국지>의 역자 중 한 명이다)의 서평(<한국일보>, 4월 5일자) 중 마지막 대목은 이렇다: "<삼국지>는 사실 우리가 반면교사로 삼을 만한 내용이 있을지는 모르나 배워 본받을 만한 내용은 별로 없는 책이다. <삼국지>가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는 나라는 불행한 나라이다. 정치, 문화, 경제가 삼국지 수준에 머물고 있는 나라인 셈이다. 이라크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세계도 삼국지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의 의견에 공감한다.




교양과학서로 사두고 싶은 책은 제임슨 왓슨의 (사이언스북스)이다. 1953년 프란시스 크릭과 함께 DNA의 이중나선구조를 발견하여 분자생물학 혁명을 가져온 왓슨의 지적 여정을 담고 있는 책이다. 개인적으론 상당히 고집이 세고 오만한 성격이라는데(에드워드 윌슨의 자서전 <자연주의자>에 따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물학의 시대를 지혜롭게 살아가기 위해선 한번쯤 읽어볼 만한 책이겠다.
수학자 폴 에어디쉬의 전기 <우리 수학자는 모두 약간 미친 겁니다>(승산, 1999)를 좀 뒤늦게 읽고 있는데, 그는 생애 만년의 25년간 하루 19시간씩 수학에 매달렸고, 하루 10-20밀리그램의 벤제그린, 강한 에스프레소 커피, 카페인 알약을 복용했다. 그러면서 그가 즐겨 한 말. “수학자는 커피를 정리(定理)로 둔갑시키는 기계이다.” 수학이 아닌 모든 것을(심지어 여자도) 귀찮게 여겼던 그가 한 말 중에 인상에 남는 것: “몇몇 프랑스 사회주의 사상가들은 사유재산이 훔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사유재산이 귀찮은 것이라고 말하겠어요.” 자본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수학 공부를 열심히 하거나 하루 19시간씩 엉뚱한 책을 읽어야겠다.





끝으로, 음미해볼 만한 기사는 <중앙일보>(4월 5일자) 죽비소리에 실린 북디자이너 정병규의 인덱스 없는 출판관행에 대한 비판이다. 필자가 거명하고 있는 책들은 메를로퐁티의 <지각의 현상학>(문학과지성사), 리쾨르의 <시간과 이야기>(문학과지성사), 소광희 교수의 <시간의 철학적 성찰>(문예출판사) 등이다. 나도 다 갖고 있는 책인데, 이 두툼한 책들의 공통점은 인덱스가 빠져 있다는 것. 대표적인 인문학출판사를 자처하는 곳들에서 나오는 책들이 이렇듯 (비용을 좀 줄이려는) 얄팍한 계산하에 출간된다는 것은 새삼 부끄러운 일이다. 정신 좀 차릴 일이다!


보너스. 당대비평 특별호로 나온 <탈영자들의 기념비>(생각의나무)가 이 주에 읽어볼 만한 저널북이다. 책갈피에 인용된, 네그리/하트의 <제국>에서 재인용된 대목: "탈영자들을 위한 기념비들은 전쟁에서 죽은 사람들을 대표할 것이다. 왜냐하면 전쟁에서 죽은 사람들 모두는 전쟁을 저주하면서 그리고 탈영자들의 행복을 부러워하면서 죽어갔기 때문이다. 저항은 탈영에서 생겨난다."(한 반파시스트 파르티잔, 1943) 미국이 승리를 선언한 이라크전에서 무고하게 희생된 이라크인들의 명복을 빈다. 더불어 그 무모한 전쟁에서 탈영한 이들에게 축복이 있기를!...
2003. 04. 17.
P.S. 본문중에 '동성연애자'란 표현이 나오는데, 나는 '동성애자'란 뜻으로 쓴 것이지만, 오해의 소지가 있다는 지적이 있어서 '동성애'와 '동성연애'의 의미를 보충하도록 한다. 별다른 건 아니고, 인터넷의 지식검색 내용을 옮겨놓는다(사실 문제는 좀 복잡한데, 나의 기본적인 생각은 동성애란, 동성을 이성으로 인지/간주하는 성향이 아닐까라는 것이다. 가령, 동성애자들은 이성애자들에게 당신들이 이성에 대해서 갖는 감정을 우리도 동성에게 똑같이 갖고 있습니다, 라고 주장/호소하기도 하는데, 나는 거기에 '진실'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즉, '동성애란 없다!' 다만, 있는 것은 성의 불확정성이다. 생물학적 성과 자신의 정체성 사이에 간극이 있는 것. 때문에 '동성애'는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동성애, homosexuality 동성애란 성 지향성 (sexual orientation)이 자신과 같은 성향의 사람에게 향하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성 지향 성이란 마음 속 깊이 내재되어 있는 것으로 단순한 성적 취향과는 구별됩니다. 동성애는 동성을 향한 지속적인 감정적, 정서적, 신체적, 성적 끌림을 수반합니다. 즉 단순히 동성과의 성경험이 있다거나 동성과의 성행위 자체를 동성애라고 할수는 없습니다. 다시 이야기 하면 동성이나 이성과의 어떤 개인적인 성적 경험이 반드시 그를 동성애자 또는 이성애자로 결정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동성애자임에도 불구하고 이성과 성적인 경험을 할 수도 있고, 이성애자임에도 동성과 성적인 경험을 가질수 있습니다.
-실제로 어떤 동성애자들은 자신의 성향을 고쳐 볼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이성과의 성적인 경험을 갖기도 합니다.그리고 군대, 교도소, 기숙사등의 이성과 차단된 환경에서 이성애자들이 경험하는 동성과의 성접촉도 드문 일은 아닙니다. 이렇듯 성행위 자체가 개인의 성지향성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동성애라는 용어를 이해할 때는 동성에 대한 지속적인 끌림과 동성과의 성적인 경험 사이에 중요한 차이가 있음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성 지향성을 무시한 채 동성과의 성 행위 자체를 동성애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동성애'와 '동성연애'의 개념 차이를 구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성적인 성향이 궁금하십니까? 여러분이 "동성애자"인지, "이성애자"인지 궁금하십니까? 그렇다면 자신이 어떤 성의 사람에게 감정적, 정서적, 신체적, 성적으로 가장 끌리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동성연애, same-sex acts 일반적으로 대중 매체에서는 동성애에 대한 기사를 다룰때 거의 '동성애'와 '동성연애'를 동일한 개념으로 사용합니다. 일반인들도 동성연애라는 표현에 훨씬 더 익숙해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동성애자들은 동성애와 동성연애를 구별합니다. 이러한 관점의 차이는 동성애에 대한 이해부족에서 기인하 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동성애를 바라보는 태도의 차이 에서 그 원인을 찾을수 있습니다.
-'동성연애'라는 용어는 기본적으로 동성과의 어떤 성적인 경험 내지는 성행위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동성애를 삶 자체로 보기보다는 삶의 어떤 선택적인 경험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성애는 변태 아니면 이성과의 섹스에 싫증난 사람들의 도착적인 행동이나 노력만 하면 언제든지 그만 둘 수 있는 도덕적인 일탈행위로 치부됩니다. 즉 동성연애라는 말속에는 동성애를 치료 가능한 정신질환의 일종이나 타락한 인간들의 행태, 할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으로 간주할려는 시각이 담겨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일차적으로 동성애는 doing이 아니라 being입니다. 곧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입니다. 행위는 존재에 수반되어 나타날수 있는 것이겟지요. 어떤 외국의 천주교 신부는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하나님과의 약속을(사제로서 독신으로 살겠다는)실천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즉 어떤 성관계도 갖지 않겟다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지요.

-이성애자와 마찬가지로 동성애자 중에는 동성과 성적인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들도 상당수 있습니다. 물론 그들이 나중 에 동성의 사람을 사귀고 섹스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에게 는 기본적으로 이성애자인 사람이 이성을 사귀고 섹스를 하는 것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자연스러운 행동인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동성애'를 성적인 행동만 없다면 인정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이성애'를 성적인 행동만 없다면 인정하겠다는 억지 주장과 동일합니다. 동성애자에게 있어서 동성과의 성적인 경험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이 이성과 성 경험을 갖는 것이 부자연스러운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