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러시아의 코레야 견문록

이번주에 내가 관심도서로 분류한 인문서는 대담집 두 권이나 아직 언론리뷰가 뜨지 않는다. 내주로 넘어간 모양이다. 덕분에 일이 헐거워졌는데, 가뜩이나 일이 많은 터라 다행이긴 하다. 대담집 대신에 잠시 눈길이 간 책은 프랑스인 고고학자가 쓴 <대한제국 최후의 숨결>(글항아리, 2009). 기사에서 언급된 대로 19세기말과 20세기초에 한국 관련서가 유럽에서 다수 쏟아져나왔는데, 이 책은 내용이 충실해서 당시 베스트셀러가 됐다고도 한다. 그게 어떤 수준인지 호기심을 가져봄 직하다.

경향신문(09. 05. 02) 프랑스인 눈에 비친 몰락앞둔 제국의 흔적 

“흥미로운 일이다. 이 정부에서는 항상 큰 개혁은 옷으로 하려니 말이다. 과거에는 주민에게 담뱃대 길이를 줄이라고 강요한 적이 있었다. 그 다음에는 옷소매를, 모자챙을 줄이라고 했다.”

프랑스의 고고학자이자 철도와 광산개발에 관련된 기술자문을 했던 에밀 부르다레는 대한제국을 이렇게 비판한다. 그런가 하면 오래된 왕조의 완숙한 예술과 장인들의 숨결, 직물·도자·그림·조각 등 문화유산의 아름다움에 탄복한다. 1904년 프랑스에서 출간된 이 책(원제 ‘En Core’e’)은 1900년대 초반 몇해의 한국을 세심하고도 애정 어린 눈길로 그려냈다.  

1882년 미국인 윌리엄 엘리어트 그리피스가 <은자의 나라 조선>을 펴낸 이후 1910년까지 영어·프랑스어·독일어·러시아어·이탈리아어 등으로 된 한국 관련 서적은 50종에 이른다. 그러나 한국에 관한 인상기나 견문기 수준에 머무는 게 대부분이다. 그에 비해 4년여의 체류에서 나온 부르다레의 책은 충실성 덕분에 프랑스에서 베스트셀러가 됐다.

필자는 고종이 이끈 대한제국이 변화하려는 노력에도, 스스로의 명백한 한계와 일본의 간교한 식민지 포섭활동으로 인해 무너질 수 없었던 슬픈 현실을 증언한다. 그는 앞선 인용문처럼 조선 정부나 관료들의 형식적인 개혁을 비판하는가 하면, 위조화폐로 조선의 쌀을 사들여 일본으로 가져간 뒤 비싼 값에 되파는 제국주의의 만행을 고발한다. ‘불결’하고 ‘악취’나는 조선의 근대화 필요성을 역설하는 한편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한다.

조선의 문화에 대한 세밀한 관찰도 돋보인다. 시내를 활보하고 극장에서 배우에게 추파를 던지는 양반의 거들먹거리는 모습, 강한 식탐으로 먹고 마시고 취하는 장면, 손님이 가격을 물어봐도 대꾸 않는 행상, 아무데나 쓰러져 자는 사람들의 모습을 생동감 있게 묘사했다. 건축에 대해서는 “건물은 풍경을 강조하는 기분을 자아내며 풍경은 건물의 개성을 의도적으로 부추긴다”면서 후한 점수를 준다.

특히 양반의 모습, 문화유적, 축제 등을 찍은 흑백사진 30장과 극장 ‘협률사’ 내부구조 및 공연장면, 궁중연회 식순, 전차를 타고 교외로 놀러가는 젊은이들의 유람문화 등은 사료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한윤정기자) 

09. 05. 02.  

P.S. 외국인들이 견문록은 집문당에서 '한말 외국인 기록' 시리즈로 출간되었다. 완간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기사에서 언급된 그리피스의 <은자의 나라 한국>(집문당, 1999)도 그 시리즈의 책이다(번역 수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러시아인의 견문록으로는 바츨라프 세로셰프스키의 <코레야 1903년 가을>(개마고원, 2006)과 곤차로프의 <러시아인, 조선을 거닐다>(한국학술정보, 2006) 등이 있다.   

이 주제에 대한 연구서도 나옴 직한데, '한말 외국인 기록' 시리즈를 기획한 신복룡 교수의 <이방인이 본 조선 다시 읽기>(풀빛, 2002) 외 다른 책이 있었던가 싶다. 비숍의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을 비롯해서 당시의 대표적인 한국 관련서들의 내용과 영향 등은 짚어볼 만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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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9-05-02 15:43   좋아요 0 | URL
주머니 사정만 허락된다면 이런 책들을 모조리 사서 읽고 싶습니다만...신복룡 씨 저 책은 상당히 재미있더군요.스웨덴의 구스타브 왕자가 일제 시대 때 우리나라에 와서 조선 총독부 후원하에 우리나라 야생동물을 왕창 잡아서 박제로 만들어 자기 나라로 가져간 사연이 있는데...나라를 빼앗기니 동물도 수난이죠.

로쟈 2009-05-02 18:19   좋아요 0 | URL
노이에자이트님이 관심을 가지실 줄 알았습니다. 헌책방에 아직 안 나온 건가요?^^

노이에자이트 2009-05-03 16:35   좋아요 0 | URL
다른 출판사에서 번역한 것 몇권은 저도 있어요. 헌책방에서 구한 게 대부분이죠.비숍 것은 이인화 번역본이에요.집문당에서 나온 시리즈는 도서관에 있더라구요.우리나라 동식물 연구서가 몇권 나와서 관심있게 본 적이 있습니다.혹시 관심 있으시면 얀코프스키에 대해 알아보세요.일제시대 때 부자가 북한에서 조선 호랑이 사냥하던 폴란드 계 러시아인입니다.작가는 아니라서 바이코프만큼 알려지지는 않았는데 최근에 북한에서 맹수사냥하던 이야기를 회고록으로 남겼다는 말이 있더라구요.

로쟈 2009-05-05 09:04   좋아요 0 | URL
특이하게도 폴란드 계 러시아인이 많네요...

노이에자이트 2009-05-05 15:56   좋아요 0 | URL
예.제가 소수민족으로 유명해진 사람들에 관심이 많아서요.바이코프도 우크라이나 사람이죠.그런데 고골리는 우크라이나 사람인가요,아니면 우크라이나에 산 러시아 사람인가요?

로쟈 2009-05-05 16:50   좋아요 0 | URL
고골은 우크라이나 태생입니다. 스무살에 페테르부르크로 상경합니다. 한데, 러시아어로만 작품을 썼습니다. 우크라이나인이란 정체성은 거의 없었던 듯싶어요. '러시아인'으로서 사고하고 작품을 썼습니다. '소수민족으로 유명해진' 경우는 아닌 듯해요...

노이에자이트 2009-05-05 17:02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2009-05-03 00:28   좋아요 0 | URL
집문당에서 나온 '한말 외국인 기록' 시리즈의 번역은 '논란이 있는' 수준이 아닙니다. 학생들한테 과제로 번역을 나눠 맡기고 모아서 책으로 펴낸 모양인데, 정말 비양심이랄 밖에...-_-^

노이에자이트 2009-05-03 16:36   좋아요 0 | URL
음...우리나라 학문이 발전하려면 제발 위계질서 속에서 일어나는 찢어쓰기 번역을 중단해야 합니다.
 
사르트르의 죽음과 철학
'지식인의 시대'는 종언을 고했는가

'지식인의 지식인'을 다룬 기사를 옮겨놓고 나니 20세기 '원조' 지식인이라고 할 사르트르에 관한 평전 소식도 빼놓을 수 없겠다. 사르트르 세대 이후 가장 '대중적인' 지식인의 한 사람인 베르나르 앙리 레비가 쓴 <사르트르 평전>(을유문화사, 2009). 역자는 사르트르 전문가인 변광배 교수다. 968쪽에 달하니까 얼추 안니 코헨 솔랄의 세 권짜리 평전 <사르트르>(창, 1993)에 이어서 가장 두툼한 분량을 자랑하는 게 아닌가 싶다. 시간만 된다면 작년말에 나온 박홍규 교수의 <카페의 아나키스트, 사르트르>(열린시선, 2008)와 함께 묶어서 읽어보고 싶다. 20대로 다시 돌아간 듯한 느낌이 좀 들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가 되기도 하고. 초심자라면 사르트르의 <지식인이란 무엇인가>(이학사, 2007)와 함께 폴 존슨의 <지식인의 두 얼굴>(을유문화사, 2005)을 같이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레비를 당혹하게 만든 사르트르의 '선'과 '악'을 미리 만나볼 수 있다.

문화일보(09. 05. 01) '진리의 화신’ 사르트르를 발가벗기다 

“사르트르는 그저 국가원수처럼 환영받고 신망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하나의 국가였다. 그는 진리의 화신이었다. 그는 전 지구적 차원의 도덕적 권위를 가진 자였으며 사람들은 그의 면죄부를 먼저 획득하고자 서로 다투었다. 실제로 1950년대는 물론 1960년대에도 도움을 청하기 위해 그에게 밀사를 파견하지 않은 민족해방운동, 혁명집단, 소수과격파, 압제의 피해자들, 같은 정신 신조를 가진 자들, 반란을 일으키고, 총살당하고, 박해당하던 학생들의 연합은 거의 없었다.”

책이 프랑스 철학자 클로드 란츠만의 저작을 인용, 장 폴 사르트르를 설명한 말이다. 책에 따르면 사르트르는 한 사람의 철학자나 문학가가 아니라 하나의 브랜드였다. 어떤 철학적, 정치적, 문학적 사유로 그는 소란과 열정으로 가득했던 20세기를 그처럼 완벽하게 그 자신 속에 구현할 수 있었을까.  



책은 제목 그대로 사르트르 평전이다. 하지만 “사르트르는 40세였다”라는 책의 첫 문장에서 보이듯 그의 전 생애가 오롯이 담긴 평전은 아니다. ‘세기의 인간’으로서 사르트르의 삶을 다루되, 사르트르의 사상과 문학의 공정한 평가에 무게 중심을 두고 내적 일관성과 모순을 파헤치는 데 치중했다. 문제는 잣대다.

책의 저자는 프랑스 신철학의 기수이자 대표적인 참여 지식인으로 꼽히는 베르나르 앙리 레비. 처녀작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에서 스탈린 독재와 집단수용소의 존재를 묵인한 서구 좌파를 통렬히 비판, 프랑스 지성계를 들쑤신 이력에서 보이듯 사르트르를 보는 눈은 착잡하다. 어떻게 ‘존재와 무’, ‘구토’로 대표되는 절대 자유를 추구하며 니체주의적 경향을 가진 인물이 모택동주의자의 기관지 ‘인민의 대의’를 지지하고, 마르크스주의적 경향의 전체주의를 신봉하는 정치인 사르트르가 될 수 있는가. 어떻게 한 사람이 이것을 하고, 또 저것을 할 수 있는가.

책이 출간되기 20년 전, 레비가 사르트르의 장례식에 몰려든 수많은 사람들을 보며 책을 쓸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예감한 이유다. 당연히 책은 사르트르가 두 인간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이 중에서 한 사르트르는 ‘선(善)’이고, 또 다른 사르트르는 ‘악(惡)’이다. 현존 프랑스 최고 지성이자 작가인 레비는 20년 동안 “가슴에 안고 지내며 꿈을 꾸고 되새김질하다” 쓴 책에 걸맞게 책은 풍성한 전거(典據)에 바탕해 바람몰이하듯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 자체가 한 국가였던 사르트르의 면모는 보부아르를 비롯한 수많은 여성 편력에서 그의 문학과 사상, 그리고 만년의 건강에 이르기까지 속도감 있게 전개된다. 특히 2차세계대전을 계기로 완전히 바뀌고 어느 순간 철학적인 실패를 예감하다 끝내는 과거의 스스로를 부정하게 되는 사르트르 사상의 여정은 보다 적나라하게 파헤쳐진다. 레비가 이 책에 ‘철학적 탐구’라는 부제를 붙인 배경이다. 



약 1000페이지에 이르는 책은 묵직하고, 다루는 내용 또한 20세기 지성사를 종횡무진하지만 책을 읽기는 의외로 경쾌하다. ‘아메리칸 버티고’에서 보여준 예리하고 유머러스하면서도 속도감 있는 문체가 여기서도 빛을 발한다. 사르트르의 삶과 사상의 단절, 이중성에 주목한 책은 그 후 적잖은 반박을 불러왔다지만 평전으로서 근래 보기 드문 수작임에 틀림없다. 쉽잖은 내용을 우리말로 옮기면서도 책의 내용은 물론, 레비 특유의 문체와 책읽는 재미까지 고스란히 살려 놓은 번역자의 역량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김종락 기자) 

09. 05.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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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르트르가 만난 사람들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6-24 18:34 
    두어달 전 베르나르 앙리 레비의 묵직한 <사르트르 평전>(을유문화사, 2009)이 출가된 데 이어 이번엔 사르트르 자신의 묵직한 책이 출간됐다. <시대의 초상>(생각의나무, 2009)이란 제목이 붙은 그의 <상황4>가 우리말로 번역된 것. 그의 다양한 시론(時論)들이 <상황> 시리즈에 묶인 건 알고 있었고, 그 중 <상황2>가 <문학이란 무엇인가>(민음사, 1998)이란 것도 알고
 
 
merci 2009-05-02 08:59   좋아요 0 | URL
오, 관심 가는 책이 또 하나 나왔군요! 어서 보아야겠네요. ㅋㅋ
그런데 위에서 추천해주신 <지식인의 두 얼굴>은 사르트르 부분만 관심이 있어서 예전에 봤었는데, (제 기억이 맞다면) 지극히 사적인 여성편력에 대한 비난만으로 - 심지어 비판도 아니고 - 가득했던 것 같은데.. 아닌가요? 제가 잘못 기억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노이에자이트 2009-05-02 15:46   좋아요 0 | URL
폴 존슨이 원래 진보파였다가 70년대에 전향한 뒤로 그런 책들을 많이 썼지요.특히 진보파들의 추문을 많이 파헤쳤구요.전향자들은 그런 심리가 있는 모양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5-02 15:45   좋아요 0 | URL
앙리 레비<자유의 모험>에도 사르트르를 많이 비난했더라구요.그렇다고 우익계열을 칭찬한 것도 아니고 나름대로 우상파괴 작업을 한다는 자부심이 있는 것 같아요.
 

'지식인들이 읽는 지식인'이란 의미에서 '지식인의 지식인'을 다룬 기사를 옮겨놓는다. 며칠 전인가 전화 인터뷰에 응한 적이 있는데, 그게 기사에 인용돼 있다. 좀 뻘쭘하다. 인터뷰이가 몇 사람은 될 줄 알았다. 기억에 내가 답한 질문은 '최근 한국에 어떤 사상가/이론가들이 많이 소개되고 있는가? 다른 나라에서도 이런 유행이 있는가?" 등이었다.

1-슬라보예 지젝(사진제공 : 마티 출판사)
2-가라타니 고진
3-안토니오 네그리(사진제공 : 세종서적)
4-조르조 아감벤(사진제공 : 새물결 출판사)
5-자크 랑시에르(사진제공 : 궁리)

주간한국(09. 04. 30) 지식인의 지식인은 누구일까 

들뢰즈, 벤야민, 라깡. 한때 한국의 지식인 사회를 뒤흔들었던 지식인이다. 해외 유명 저널에서 발표, 인용되는 지식인은 국내 지식인 사회에도 영향을 주게 마련이다. 일반 독자들이 신문과 전문잡지를 비롯한 매체를 통해 혜안을 얻듯, 지식인 역시 국내외 석학의 분석을 바탕으로 사회 현안을 분석하게 된다. 국내 지식인들의 저서, 비평, 칼럼, 강연, 토론 등을 통해 소개, 인용되는 이른바 ‘지식인의 지식인‘은 우리 지식사회와 현실에 적잖은 영향을 미친다.

최근 정보를 얻는 매체가 과거에 비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국내 지식인 사회에 소개되는 해외 석학의 숫자가 눈에 띄게 늘어났다. 소개된 사상이 인용되는 기간은 더 짧아 졌다. 국내 지식인 사회를 움직이는 ‘지식인의 지식인’은 누굴까? 2000년대 들어 최근까지 한국 지식인 사회 이슈가 된 지식인을 소개한다.

슬라보예 지젝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을 빼놓고 2000년대 한국 지식인 사회를 말할 수 없다고 할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수 년 전 젊은 평론가들을 중심으로 라깡을 더듬어 올라가 정신분석학을 비평에 도입했던 시도 역시 지젝의 영향이라 볼 수 있다.

1949년 슬로베니아에서 태어난 그는 류블랴나 대학에서 철학과 사회학을 전공해 1972년 철학 박사학위를, 파리 8대학에서 자크 라깡의 정신분석학을 전공해 두 번째 박사학위를 받았다. 라깡의 정신분석학과 마르크스주의, 헤겔의 독일 관념론 같은 철학적 주제를 SF 소설과 할리우드 영화, 모차르트와 바그너의 오페라 등 다양한 장르의 문화 예술을 통해 분석한다. 



1989년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을 출간하며 지식인 사회에 이름을 내민 그는 이후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1993)’, ‘까다로운 주체(1999)’ 등 논쟁적인 저서를 발표해 포스트모더니즘과 해체주의 이후 세계에서 가장 주목 받는 학자로 손꼽힌다. 또한 이라크 전쟁, 9.11테러, 전체주의 같은 정치적인 이슈에 대해 발언하면서 최고의 행동하는 지성인이 됐다. 



최근 국내에 그의 대표 저서 ‘시차적 관점(마티 출판사)’이 번역 출간됐다. 지젝은 ‘어떤 천체를 두 지점에서 보았을 때 대상의 위치가 달라 보이는 것’을 뜻하는 천문용어 ‘시차(Parallax)’에서 개념을 빌려와 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관점이 발생하는 ‘시차적 간극’에 대해 설명한다.

국내 지젝에 관한 지식인들의 발언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도올 김용옥은 최근 한 일간지의 대담에서 ‘효경’을 주해ㆍ번역하는 데 라깡의 정신분석에서 도움을 받았다는 것을 인정하는가 하면 동ㆍ서 문명을 비교하면서 ‘철학의 록스타’라는 슬라보예 지젝의 시각에 반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지난해 촛불시위가 한창일 때 논객 김정한은 ‘그대 왜 촛불을 끄셨나요?’에서 지젝의 말을 빌려 자신의 의견을 밝힌 바 있다.

최근 문학평론가 김홍중 씨는 비평 ‘행복의 예술, 그 희미한 메시아적 힘’에서 지젝의 이론을 빌려 한국문학의 새로운 현상을 분석한 바 있다. 문화연대 부설 연구기관의 무크지 ‘문화사회’ 3월 호에서는 발터벤야민의 역사철학과 슬라보예 지젝 이론을 다루기도 했다. 



가라타니 고진
지젝의 ‘시차적 관점’을 있게 한 지식인이 일본의 문학평론가 가라타니 고진(柄谷善男) 이다. ‘시차적 관점’의 서문에서 지젝은 이렇게 썼다. “가라타니 고진은 저서 ‘트랜스크리틱’에서 ‘시차적 관점’의 중요한 잠재력에 대해 주장하려고 노력한다.” 지젝의 책이 2006년에 출간된 점에 미루어 볼 때 2001년 작인 가라타니 고진의 책에서 ‘시차적 관점’이라는 근본 주제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1941년 일본에서 태어난 가라타니 고진은 문학평론가에서 출발해 역사, 건축, 철학 등 전방위 문화예술 평론가로 변신했다. 비서구인의 주변부적 문제의식과 서양의 근현대사상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결부시켜 세계적 보편성을 획득하는 사유방식으로 서구에서도 각광 받고 있다. ‘인문학계의 무라카미 하루키’라 할 만큼 국내 젊은 인문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2006년 국내 번역 출간된 ‘근대문학의 종언’은 국내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바 있다. 고진은 2003년 “미국은 1950년대에, 일본은 1980년대에, 한국은 1990년대 말부터 문학이 급속히 쇠퇴했다”고 지적한 바 있고, 그의 언급을 시발점으로 한국문학의 위기가 문학계 화두가 되어 왔다.

문학평론가 서영채 씨는 ‘역설의 생산: 문학성에 대한 성찰’(문학동네 2009년 봄호)에서 “문학 위기에 대한 담론은 199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인 유행이 시작되어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일상적인 것이 되었다”고 지적하며 2004년에 발표한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을 본격적인 논쟁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문학평론가 권성우 씨 역시 ‘추억과 집착- ‘근대문학의 종언’과 그 논의에 대하여’(‘안과 밖’ 2007년 상반기호)에서 “가라타니의 ‘근대문학의 종언’은 지금 이 시대, 우리에게 문학은, 비평은 무엇인가를 근본적으로 되묻고 있다”라는 말로 고진이 국내 문학계에 던진 파장을 설명한 바 있다.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을 직접 번역한 평론가 조영일 씨는 고진의 서적을 바탕으로 한국문학계를 비판한 ‘가라타니 고진과 한국문학’을 지난해 출간한 바 있다. 



안토리오 네그리
이탈리아 좌파정치 철학자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는 1933년 이탈리아 파노바에서 출생했다. 21세기 가장 급진적인 정치사상가이자 ‘아우토노미아(자율성, 자주성)’운동의 창시자다. 1957년 23세 때 독일 역사주의에 관한 논문을 발표, 박사학위를 받고 1960년대 후반 아우토노미아 사상을 발전시켜 이탈리아 비의회좌파운동에 참여했다. 현재 마르크스에서 들뢰즈, 마키아벨리와 스피노자를 아우르는 최고의 지성으로 평가 받는다. 대표적인 저서는 ‘지배와 사보타지(1977)’, ‘마르크스를 넘어선 마르크스(1978)’, ‘제국(2000)’ 등이 있다. 



지난 해 마이클 하트와 공저한 ‘다중(Multitude, 세종서적)’이 국내 출간됐다. 2000년 출간된 ‘제국’에서 한 발 더 나아간 형태다. 그는 제국주의 시대에서 지배 권력의 대항자였던 인민, 대중, 노동계급의 개념을 세계화시대를 맞아 ‘다중’으로 지칭한다. 네그리는 세계화의 네트워크 권력이 더 치밀하게 강화될수록 다중의 저항적 잠재력도 커진다고 말한다.

국내 젊은 소장학자들을 중심으로 그의 연구가 활발하다. 특히 그의 최근 저서 ‘다중’은 자율평론(http://waam.net)에 기고된 원고의 일부가 국내 유통되면서 원서 출간과 동시에 국내에 이론이 소개되기 시작했다. 인문·사회과학학 교육원 ‘다중지성의 정원’은 네그리의 ‘다중’개념에서 이름을 빌려온 것이다. 이곳에서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안토니오 네그리를 비롯해 마르크스, 들뢰즈 등의 강의를 하고 있다. 

 

조르조 아감벤과 자크 랑시에르
국내 지식인 사회에서 가장 핫(Hot)한 인물은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과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ere)다. 최근 문예지와 학술지를 중심으로 이들의 저작과 이론을 비평에 도입한 평론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지난해를 기준으로 이들의 저서가 번역, 출간되는 수가 부쩍 늘어났기 때문이다.

1942년 로마에서 출생한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은 미학적 시각을 지닌 비평가로, 현재 베네치아 건축대학 교수로 재직 중인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마르틴 하이데거와 발터 벤야민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그는 미학과 정치를 넘나들며 인간을 ‘말하는 동물’로 정의했다. 미셸 푸코의 생철학과 칼 슈미트의 비상사태를 토대로 로마시대의 호모 사케르(homo sacer)를 현대 정치를 비추어 쓴 책 ‘호모 사케르’로 주목받았다. 대표 저서로 ‘아우슈비츠의 남겨진 것’(1998), ‘예외상태’(2003) 등이 있으며 지난 해 ‘호모 사케르’가 국내 번역 출간됐다.

철학자 이진경은 저서 ‘모더니티의 지층들’에서 아감벤의 이론을 빌어 자신의 생각을 정리했다. 현대사회론을 포괄적으로 소개한 이 책에서 이진경은 현대자본주의와 인권의 개념을 설명하며 아감벤을 도입한다. 문학평론가 복도훈 씨 역시 ‘목소리가 사라지는 곳으로 문학이 가야한다’(문예중앙 2007년 가을호)에서 아감벤과 지젝의 이론을 소개하며 한국문학사에서 ‘소리’와 관련된 고찰을 시도하고 있다.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의 수제자였던 자크 랑시에르는 1960년대 ‘자본론 읽기’의 공저자로 이름을 알렸다. ‘자본론 읽기’가 1990년대에 한국어로 번역되면서, 랑시에르는 한국의 지식인 사회에도 크게 각광받기 시작했다. 1968년 프랑스 학생운동을 기점으로 랑시에르는 스승인 알튀세르를 엘리트주의자라고 비판하며 독자적인 길을 걷는다. 영화광인 그는 미학과 정치의 관계를 분석한 저술활동도 활발하게 하고 있다. 지난 해 ‘무지한 스승’, ‘불화’ 등 6권의 책이 잇따라 국내 번역 출간되면서 다시 주목 받게 됐다.

인문학, 특히 문학 비평분야에서 랑시에르는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최근 문학 비평이 ‘언어의 새로움’에 치중된 상태에서 ‘말 없는 말’(문학의 언어는 일상생활에서 쓰는 소통의 언어와 달라지며 문학성을 쟁취한다는 랑시에르의 문학 개념) 등 랑시에르의 이론은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분석하기 좋은 텍스트가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문학평론가 차미령은 비평 ‘소설과 정치’에서 작가 황정은의 소설을 분석하며 랑시에르의 저서 ‘감성의 분할’을 인용하고 있다. 평론가들의 반응을 반영하듯, 계간지 ‘문학과 사회’ 올해 봄호에서는 자크 랑시에르의 인터뷰를 특별기고 형식으로 소개했다.

이들 ‘지식인의 지식인’은 흔히 해외 유명 인문 사회과학 저널을 통해 국내 지식인 사회에 소개된다. 국내에서 발견되는 특징 중 하나는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지식인의 지식인’의 저서가 대중을 대상으로 한 ‘틈새 출판시장’을 형성했다는 점이다. 이미 하나의 브랜드가 된 지젝의 저서들과 최근 1,2년 사이 각광받기 시작한 조르조 아감벤과 자크 랑시에르가 이에 해당된다. 가라타니 고진의 저서 ‘근대문학의 종언’은 이미 ‘읽을 사람은 다 읽은’ 유명 저서가 됐다. 모두 포털사이트 서평 카페에서 인터넷 서평꾼을 통해 소개된 후 유명세를 탔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가장 영향력 있는 인터넷 서평꾼 중 한 명인 로쟈는 전공인 러시아와 비교할 때도 한국에 유독 많은 지식인이 소개되고, 이들 서적이 소비된다고 말한다. 그는 “러시아에서는 지극히 한정된 지식인 사회에서 사상가들의 이론이 소개된다. 대중에게 이름을 알린 것은 푸코와 들뢰즈 정도”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은 대학과 대학가 주변 등 이들 사상가들의 이론이나 고급 담론을 소비하는 시장이 형성되어 있는 듯하다. 새로운 사상가와 이론이 소개되고 맛보기 식으로 회자된 다음 (*다음) 지식인, 이론가로 넘어간다”라고 말했다. 한국의 인터넷 문화는 지식인의 이론과 저서를 소비하는 데도 영향을 미치게 된 셈이다.(이윤주 기자) 

09. 05. 01.  

P.S. 기사에서 랑시에르가 "지난 해 ‘무지한 스승’, ‘불화’ 등 6권의 책이 잇따라 국내 번역 출간되면서 다시 주목 받게 됐다."고 했지만, <불화>는 아직 출간되지 않은, 근간예정인 책이다. 대신에 놀랍게도 <문학의 정치>(인간사랑, 2009)가 최근 번역돼 나왔다. <미학 안의 불편함>과 마찬가지로 아직 영역본도 나오지 않은 책이다. 놀라운 속도라 아니할 수 없다. 비록 전례를 보아 읽을 수 있는 책인지는 의문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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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바다 2009-05-01 1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로운 사조들이 빠르게 국내에서 유통된다는 점은 긍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식인 그룹의 고담 준론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현실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물론 저는 '고담준론' 자체에 비판적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 고담준론을 어느정도 현실에서 실천할 수 있는 뛰어난 '정치가'의 부재가 안타까울 뿐입니다. 아울러 미국 철학자 로티의 (미국에서) 좌파들의 몰락은 그들이 실현될 수 없는 비현실적인 주장만을 일삼았기 때문이라는 비판도 새겨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사조들의 소화와 아울러 기존의 지배적인 담론들에 대한 재해석도 매우 중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랑시에르의 책들은 '분량이 적당하다'는 점이 강점인 것 같군요^^ 랑시에르의 '치안'과 '정치'의 구별은 참신하지만, 이미 우리나라에서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정치'라는 단어의 용례와는 그 개념이 다르고 너무 한정적인 의미로 축소되어 과연 일반적으로 받아들여 질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아무튼 랑시에르의 '치안'의 개념은 (제가 제대로 이해했는 지는 모르지)만) 영국의 보수주의 정치학자 옥쇼트의 '정치'의 개념과 유사한 면이 있지 않나 하는 느낌입니다. 보수적인 옥쇼트가 생각하는 '정치의 한계'를 넘어서는 곳에 '진정한 정치'가 있다는 게 랑시에르의 주장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드네요^^

로쟈 2009-05-01 23:54   좋아요 0 | URL
분량마저 '배신'한다면, 전혀 읽을 수가 없을 듯한데요.^^ 그래도 제가 읽고 싶은 책은 좀 두툼한 <프롤레타리아의 밤>입니다...

2009-05-01 22: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5-01 23: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5-02 01: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쁜 와중에 서재 이벤트를 한다고 해서 좀 어수선한데, 그래도 평소 하던 일은 해놓아야겠다. 어제 보선 결과가 그래도 약간은 기운나게도 하고. 프랑스 경제학자 미셸 아글리에타의 세계 자본주의 분석서로 <세계 자본주의의 무질서>(길, 2009)란 책이 출간됐다(아글리에타의 책은 <자본주의 조절이론>(한길사, 1994)이 오래 전에 출간됐다). 책을 자세히 읽고 평가할 만한 경제학 지식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리뷰 정도는 읽고 '판세'를 가늠해볼 수는 있다.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는 여러 책들, 혹은 이론가들과의 변별점은 따로 눈 밝은 서평도 기대해봐야겠다.   

한겨레(09. 04. 30) '신자유주의 파산’ 예언자 내수중심 경제 주문하다   

프랑스 조절이론(조절학파) 창시자 미셸 아글리에타 파리10대학 교수는 앞으로 20년 안에, 추격 불가능할 정도로 나머지 세계를 뒤처지게 만들었던 서방(구미)의 산업혁명 효과는 거의 소멸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아글리에타는 로랑 베레비와 함께 쓴 <세계 자본주의의 무질서>(도서출판 길 펴냄)에서 1997~8년 한국 등 아시아 신흥국들을 덮친 외환위기 이후 ‘워싱턴 컨센서스’로 대표되는 미국 주도 신자유주의체제에 “사망선고”가 내려졌다면서, 세계경제 장기전망을 그렇게 그렸다. 이에 따라 지금 서구의 지위를 신흥국들이 차지하는 등 국제 ‘거버넌스’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국제 제도들도 바뀌는 조정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아글리에타는 21세기 초 신흥국의 평균성장률은 6%, ‘선진국’은 2.5%였는데 이런 성장격차는 향후 20년 간 지속될 것으로 예상했다. 이런 추세를 장기 경제사 연구분야의 선구자 앵거스 매디슨 방식에 따라 구매력지수로 측정하면 1913년에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40%였고 1950년에 38%, 그리고 2005년에는 50%였던 비구미 신흥국들의 비중은 2030년에는 66%가 돼, 70%를 차지했던 아편전쟁 전 1820년 수준에 도달한다고 아글리에타는 계산했다. 이런 세력관계 변화는 아시아 통합의 주축이 될 중국을 국제 거버넌스의 정점에 올려놓고, 달러가 헤게모니를 쥔 지금의 국제통화체제를 다극체제로 바꿀 것이라고 그는 전망했다. 

미국발 금융공황과 세계경제 위기가 본격화하기 전인 2007년에 출간된 이 책에서 아글리에타는 이번 위기 발생의 시기와 경로까지 예측할 순 없었으나 세계경제의 작동방식과 내부모순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통해 ‘위기’와 새 출발을 위한 ‘조절’이 불가피한 이유를 실증적으로 제시했다. 세계경제 위기가 현재화한 지금 그의 20년 뒤 세계 예측에도 무게가 실리지 않을까. 경제학마저도 영미권 저작에 대한 편식이 심한 우리 풍토에서 서익진 경남대 교수 등 프랑스에서 공부한 이 분야 전문가들이 옮긴 유럽적 시각의 세계 자본주의 분석은 지적 다양성 추구라는 면에서도 의미가 있다.

아글리에타에 따르면, 외환위기 이후 금융적 탈진상태와 내수 감소로 질식상태에 빠진 아시아 신흥국들은 환율폭락 등을 무기로 공격적인 수출확대전략에서 활로를 찾았다. 그 결과 방대한 무역과 자본수지 흑자를 쌓은 신흥국들은 주권을 옥죄던 달러 채무에서 벗어나 미국에 대한 채권자가 됐으며, 서구 금융의 이익을 대변하는 국제통화기금(IMF)의 족쇄에서도 풀려났다. 아시아 신흥국들의 저가 수출은 아시아 위기가 야기한 디플레이션 충격을 대부분 흡수했던 미국 기업들을 더욱 거센 경쟁에 내몰았고 그들을 제품 판매가격 인하(가격파괴)와 노동시장의 임금인상 압박, 그리고 수익율 저하라는 곤경 속에 밀어넣었다. 수익성이 나빠진 미국 기업들은 차입금을 지렛대 삼아 자기자본이익률을 높이는 ‘레버리지 효과’를 더 많이 활용하기 시작했다. 곧 자사주 환수, 배당금 증가, 적대적 주식공개매수 등을 통한 외형성장방식을 위해 빚을 늘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부터 미국기업의 자금사정이 급속히 악화되기 시작했으며, 헤지펀드 등 파생금융상품이 상징하듯 은행 등 금융기관들도 거기에 맞춰 변했다. 이것이 대규모 금융위기로 귀결되는 건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아글리에타는 예측했다. 이로 인한 금융거품은 한편으로 가계들의 금융자산을 증가시킴으로써 가계소비를 촉진하고 기업들의 자금조달 비용을 줄여 기업투자를 촉진했다. 독일과 일본 기업들의 부진, 중국과 인도의 세계무대 본격 등장도 재화와 서비스의 구조적인 과잉생산체제 완성에 기여했다.

과도한 주가 상승을 조장한 주주가치 경영규범도 아글리에타는 파국 요인으로 꼽았다. 미래 배당에 대한 기대치의 극대화, 곧 주가의 극대화를 통한 주주들의 이익 극대화 추구는 임금과 노동조합, 투자, 소비를 망가뜨리고 양극화를 심화시켰으며, 이는 다시 차입금융에 의존하는 기업들의 ‘리스크 지향성’을 더욱 강화시켰다.

과소 저축, 과다 소비, 팽대한 재정·무역적자가 상징하는 미국경제 취약성은 그렇게 해서 체질화했다. 신흥국들의 광대한 무역흑자가 국채투자 등으로 미국에 환류해 미국의 천문학적 재정·무역적자를 메워주는 이른바 ‘글로벌 불균형’이 취약한 미국경제와 거기에 의존한 세계경제를 지탱해왔으나 경상적자가 국내총생산의 7%에 이르는 상황에서 그건 지속 불가능하다고 아글리에타는 지적했다. 결국 지금의 위기는 워싱턴 컨센서스가 아시아 위기를 불렀고, 아시아 위기가 다시 워싱턴 컨센서스를 끝장낸 악순환의 귀결인 셈이다.

신흥국들이 내수 주도 성장 정책을 펴서 나머지 세계의 내수 증가 속도가 미국보다 더 높아지도록 만들고 또 그런 상태가 지속될 수 있도록 만드는 것, 이것이 아글리에타의 새로운 성장체제로의 이행을 위한 해법이다. 이명박 정권의 수출주도 성장정책은 이것과도 충돌한다.(한승동 선임기자) 

09. 04. 30. 

P.S. 1월초에 한겨레에 연재된 세계 석학과의 대담에서 아글리에타 편은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31978.html 참조(그는 이매뉴얼 월러스틴에 이어서 두번째로 다루어진 '석학'이었다). 대담은 그의 '조절이론'을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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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9-04-30 09:28   좋아요 0 | URL
1월 아글리에타와의 인터뷰기사를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책이 나왔군요...아..로쟈님의 책도 기대하겠습니다.

로쟈 2009-04-30 23:29   좋아요 0 | URL
주말까지 또 교정을 봐야 하는데, 자꾸 보니까 보기 싫어지네요.^^;

[해이] 2009-04-30 23:44   좋아요 0 | URL
현재 구할 수 있는 아글리에타 글은 이게 유일하군요... 다른 주저들이 다시 번역됐으면 좋겠네요;;; 여튼 서익진씨는 요즘 정말 열심히 활동하시는듯.

로쟈 2009-05-05 09:04   좋아요 0 | URL
저에겐 생소한 분인데, 정말 그러네요...
 

인문 번역서에 대해 관심을 갖다 보면 번역된 개념어들에 대한 관심도 부수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데, 근래에 이 분야에 대한 책들이 나오고 있어서 반갑다. <국가 주권>(소화, 2009)만 구입하고 아직 읽어보진 않았는데, 나머지 책들도 사정이 허락하면 일독해 봐야겠다. 관련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유길준, 박영효 등 개화파들은 개인이나 경제 등 근대 서구 개념들의 의미를 파악하고 이를 현실에서 구현하려고 했으나 국내와 국제 정세의 벽을 뛰어넘지 못했다. 사진은 1883년 보빙사의 일원으로 미국에 건너간 유길준(뒷줄 왼쪽에서 세번째).

경향신문(09. 04. 29) 동·서양의 ‘개념’ 소통은 가능한가  

개념사 연구는 개념의 역사와 맥락을 고찰하는 작업이다. 단순히 어원사나 개념 도입 경로사를 연구하는 게 아니다. 개념은 역사 속 주체들의 치열한 사고 과정의 산물이다. 개념을 분석한다는 것은 개념을 매개로 정치·사회의 역사와 전개과정을 분석한다는 뜻이다. 개념사 연구 없이 인문학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과 연구가 불가능한 이유다.  

서구에선 수십년 전부터 심도있는 연구가 이뤄져온 개념사가 국내에 자리잡기 시작한 지는 10년 안팎. 지난해 9월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개념사 국제학술대회’가 열리면서 본격적으로 조명을 받았다. 학계에선 특히 하영선 서울대 외교학과 교수를 중심으로 한 ‘전파연구’ 모임과 ‘한국개념사총서’ 작업 등을 진행 중인 한림대 한림과학원(원장 김용구)이 주목받고 있다. 이들은 한반도에서 일어난 개념들의 충돌에 관한 연구를 진행해왔는데 최근 그간의 연구 성과들을 담은 책 출간과 학술대회가 잇따르고 있다.  



<근대한국의 사회과학 개념 형성사>(창비)는 1995년 시작된 ‘전파연구’ 모임이 15년 동안 한국 사회과학 개념들의 뿌리를 찾기 위해 노력한 결과물이다. 문명·권력·부국강병·세력균형·평화·국민·민주주의·경제·개인 등 근대 서구의 개념들이 19세기 한국에 전파된 후 변형·수용된 과정을 밝히는 동시에 개념들을 둘러싼 치열한 담론싸움을 역사적으로 탐구했다.  

책에 따르면 주권 개념이 처음 전해진 것은 윌리엄 마틴의 국제법 번역서인 <만국공법>의 전래와 함께였다. 신욱희 서울대 외교학과 교수는 “당시 주권 개념의 도입과 사용은 청을 중심으로 한 사대와 조공의 전통질서에서, 조약과 국제법의 서구 근대질서로의 이전을 의미했고, 이는 ‘세계관의 충돌’ 형태를 띠었다”고 밝혔다. 그는 “개념으로서의 근대적 주권이 실제 현실과 큰 차이가 있음을 알게 해준다”면서 “19세기 조선은 대외적이고 형식적인 주권에 기대게 되었지만 이와 관련된 대내적이고 실질적인 주권의 조건은 충족할 수 없었다”고 덧붙였다.  



19세기 일본에서 ‘individual’을 옮긴 ‘개인’ 역시 마찬가지다. 당시 개화파였던 박영효와 유길준은 대체로 그 의미를 파악하고 있었지만 문제는 개인이 당시 현실적인 주체로서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김석근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강사는 “개인의 과제는 자주독립, 부국강병 등의 절박한 과제 뒤념의 문명사적 각축, 서양 근대개념 도입의 국제정치적 싸움, 국내 정치·사회 세력 간 대결 등 개념논쟁의 삼면전에서 완패했다”면서 “개념화의 21세기적 식민성을 제대로 극복하지 못한 채 21세기의 변화를 어설프게 개념화한다면 19세기적 난관을 반복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편 한림대 한림과학원은 지난 24일 한국관광공사에서 ‘개념소통의 철학적 기반과 역사적 경험’을 주제로 학술대회를 열었다. 동·서양의 개념론을 비교하고 소통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자리였다. 이경구 한림과학원 HK교수는 “조선 후기 북학파의 타자 인식은 근대와 탈근대, 일원적 가치와 다원적 가치가 혼재하는 현재에 나와 타자 사이의 소통에 대한 긍정적 전망을 보여준다. 나의 존재가 타자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를 우주, 자연, 인간, 개인을 포함한 영역에서 고민하고 상호 의존에 대한 사유를 정밀히 전개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한림과학원이 지난해부터 내놓고 있는 ‘한국개념사총서’ 시리즈 세 번째 <헌법>(소화)도 최근 출간됐다. 김효전 동아대 교수가 19세기 중엽 ‘만국공법’과 함께 전래된 ‘헌법’ 개념이 종래의 개념과 만나 충돌·침투·갈등·저항을 거치며 선망·수용·모방·편입으로 이르는 과정을 역사적·실증적으로 추적했다. 김 교수는 “헌법 개념은 국가의식이나 국가사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면서 “서구의 헌법 또는 입헌주의 개념은 조선의 정치현실에서 정착하지 못하고 수구 반동이나 전제군주권의 강화로 좌절되었지만 권리사상이나 민권의식의 보급이라는 시대의 도도한 흐름은 막을 수 없었다”고 밝혔다.(김진우 기자) 

09. 04. 29.  

P.S. <근대한국의 사회과학 개념 형성사>(창비)에 대한 보다 자세한 소개기사도 옮겨놓는다.  

한겨레(09. 04. 30) '민주주의’ 개념 어떻게 자리잡았나

권력·주권·민주주의 등 오늘날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사회과학 개념이 어떤 경로를 거쳐 한국에 자리잡게 됐는지를 탐사한 책이 나왔다. 서울대 외교학과 하영선·최정운 교수 등이 쓴 <근대한국의 사회과학 개념 형성사>(창비)란 책이다. ‘형성사’라는 이름이 붙어있지만 엄밀히 얘기하면, ‘형성·전파·정착의 사회사’다. 책에서 다뤄지는 사회과학 개념들 대부분 18~19세기 서양에서 만들어진 뒤 중국·일본을 거쳐 19세기 한국에 전파되고, 이후 치열한 정치사회적 대결을 거쳐 한국적 담론 질서의 의미망 안에 뿌리내린 것들이기 때문이다.

책에 등장하는 개념은 13개다. 문명 개념을 필두로 부국강병, 세력균형, 국민·인종·민족, 민주주의, 경제, 개인, 영웅 등이 다뤄진다. 개인적인 관심분야와 개념의 전파 순서, 중요도 등을 고려했다는 게 글쓴이들의 설명이다. 책은 14년전 서울대에 만들어진 ‘전파(傳播) 연구’라는 작은 공부모임의 산물이다. 하영선·최정운 교수와 함재봉 미국 랜드연구소 선임연구원, 김영호·김용직 성신여대 교수, 손열 연세대 국제대학원 교수 등 10여명이 참여했는데, 이들의 문제의식은 명확했다. 한국 사회과학이 주문자생산 단계를 넘어 독자 브랜드로 성장하려면 공부의 목적과 대상, 방법, 실천에 대한 철저한 자기비판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 그 첫 단계로 주목한 것이 사회과학의 ‘말’이었다.

글쓴이들이 볼 때 한국의 사회과학 개념은 ‘삼중의 전선’을 뚫고 어렵사리 자리잡았다. 전통 개념과 근대 개념의 문명사적 충돌이 첫번째 전투였다면, 두번째는 번역의 판본, 곧 ‘중국판이냐 일본판이냐’를 두고 벌어진 대결이었다. 마지막으로 국내의 첨예한 정치사회적 갈등을 돌파해야 했다. 하 교수는 “19세기 조선 지식인들이 달라진 천하질서를 설명하기 위해 새로운 언어를 선택하는 것은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결단의 과정이었다”고 설명했다.

이 삼중대결의 현장답사를 위해선 무엇보다 당시 문헌을 꼼꼼하게 읽는 일이 중요했다. <서유견문> <독립신문> 같은 개화 문헌과 이항로·유인석 등의 척화파의 문헌에서, 전파의 길목에 있던 일본의 후쿠자와 유키치와 중국의 량치차오(양계초)의 글, 나아가 유럽 근대 사회과학의 기본서들을 새로운 눈으로 다시 읽어야 했다. 19세기 조선어와 중국어, 일본어 등 외국어 지식은 필수였다. 하 교수는 “내가 쓰는 말들이 내 것 같지 않고 불편해서 들어가 봤더니 첩첩산중이었다”며 초창기의 어려움을 회고했다.

글쓴이들의 바램이 있다면, 책에서 다룬 개념들이 식민지기와 냉전시대, 21세기 탈냉전기을 거치며 그 안에 어떤 사회·문화·정치적 의미들을 담아왔는지를 추적한 후속편을 내는 것이다. 하나의 개념이 ‘형성’이라 이름붙일 수준에 도달하려면 오랜 시간의 침식을 견디며 고유한 역사적·사회적 의미를 획득할 때에야 비로소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 교수는 “개념사 연구는 세대를 이어가며 수행해야 할 작업”이라며 “후학들에게도 연구를 권하지만 들이는 공력에 비해 반대급부가 턱없이 모자라니 좀체 뛰어들려는 제자가 없다”고 안타까워했다.(이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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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9-04-30 23:24   좋아요 0 | URL
이런 분야는 외래문화 수용의 역사라는 면에서 반드시 연구해야 한다고 봅니다.번역사와 연관해서 연구할 것이 많겠지요.

로쟈 2009-04-30 23:26   좋아요 0 | URL
연구하기가 까다로운 분야이기도 하지요.^^;

푸른바다 2009-05-01 19:01   좋아요 0 | URL
제가 있었으면 하고 바라던 책들이 출판되었군요^^ '근대 사회과학 개념형성사' 바로 주문했습니다^^ 포스트모던을 논하기 전에 반드시 엄밀하게 연구해야 할 분야가 바로 이 분야가 아닌가 싶습니다. 고전시대(조선 등등)와 서양+ 일본식 근대화 시대가 만나는 지점이기에 가장 연구하기 까다롭기도 하겠지만, 새로운 가능성을 창조적으로 모색하기 위해 반드시 깊이 연구해야 할 부분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로쟈 2009-05-01 23:55   좋아요 0 | URL
네, 이런 책들이 요긴하죠. 짐작엔 일본엔 진작에 다 나왔을 법한 책들이긴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