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황실 지리학회 탐사대원이 쓴 대한제국  견문록 <코레야 1903년 가을>(개마고원, 2006)이 번역돼 나왔다. 개인적으론 번역자들 안면도 있고, 책의 번역/출간 소식은 간간이 접하던 터였다. 관련 리뷰 두 편을 미리 읽어본다.  

 

 

 

 

서울신문(06. 07. 22) 서양인의 눈으로 본 한국의 사회상은 우리를 ‘객관화’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항상 관심을 끌어왔다.1668년에 나온 <하멜 표류기>는 조선의 존재를 처음으로 유럽에 각인시켰던 책으로 지금까지도 기념비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구한말 러시아와의 관계가 매우 활발했던 시기 많은 러시아의 탐험가와 군인들이 조선을 소개하는 책자를 선보였는데, 곤차로프의 <전함 팔라다>, 가린 미하일로프스키의 <한국과 만주, 요동반도 기행> 등을 찾아볼 수 있다(*물론 이 분야의 '고전'은 이사벨라 비숍의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이겠다).

-당시 러시아의 속국이던 폴란드 출신의 작자 바츨라프 세로셰프스키가 1903년 조선에 체류하면서 겪은 바를 서술한 <코레야 1903년 가을>은 제국러시아의 마지막 견문록이다. 몽골 계통의 여성과의 결혼한 저자가 조선 방문을 결행하고 이를 글로써 남기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 책은 조선의 사회, 경제, 문화, 대외관계 등 거의 모든 분야를 다루고 있으며, 특히 세로셰프스키의 지리와 풍경에 대한 묘사는 문학가의 기질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조선의 종교인 불교, 유교, 동학 그리고 확산되고 있던 가톨릭, 프로테스탄트 등의 위상과 각 종교의 현재성을 묘사한 부분은 저자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부분이며 사료적으로도 가장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다.

-일반 백성들에 대한 그의 시선은 따뜻함이 배어 있으며, 때로 그는 그들의 진취성에 감탄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조선에 대한 저자의 시선은 항상 긍정적이지만 않았다. 때문에 그는 조선의 어두운 모습들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데, 이를 테면 위계화된 신분제도에 대해 실생활과 연관지어 하층민의 비참한 생활상과 상층부의 부패를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그의 눈에 비친 ‘서로의 죄를 은폐해주는’ 관리들의 연대의식은 세계 어디에도 없는 것이었다.

-가부장제하에서 조선여성들이 겪는 숙명적인 삶은 저자에게는 커다란 안타까움으로 다가왔으며, 아마도 그 연장선에서 서술된 기생들의 일상이 그려졌을 터였다. 그가 조선의 기생제도를 자유롭게 다루고 나중에 소설 ‘기생 월선이’를 출간한 것도 저자의 자유분방한 사고방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책에서 껄끄럽게 다가설 수 있는 부분은 일본에 대한 서술이다. 세로셰프스키는 일본에 의한 철도 부설을 일본의 커다란 이익을 가져다 줄 것으로 보면서도 “일본이 진보와 휴머니즘의 정신으로 이 불쌍한 한국 또한 일으켜 세워주리라 기대해 본다.”는 표현도 서슴지 않았다. 훗날 그는 조선의 식민지화를 조국 폴란드의 현실과 비슷하고도 동정했지만 한일합병 이전에 쓰여진 이 책은 일본에 의한 개화를 긍적적으로 묘사하였다. 대개의 견문록들이 저자들의 조국에 대한 이해관계에 충실한 데 반해 폴란드인으로서 세로셰프스키의 관점은 여기에서 벗어나 있다.

-이 책은 단순한 한 외국인의 조선 견문록을 넘어 다양한 실증자료와 통계수치를 활용한 ‘사회과학적인’ 치밀성이 담겨 있는 것은 저자가 그만큼 조선의 삶에 고민한 흔적으로 볼 수 있다. 훗날 폴란드 저자동맹 의장까지 역임한 저자의 필치는 화려함을 넘어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저자의 의도를 잘 살린 번역이 깔끔해 보인다. 역사는 반복된다 했던가. 외세와 얽힌 당시의 한반도 모습과 오늘날의 현실을 비교해보는데도 충분히 도움을 주고 있다.(기광서/ 조선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한국일보(06. 07. 22) 우리를 훑는 외부의 시선을 의식할 때, 기분이 참으로 미묘해진다. 우리를 과하게 긍정하는 것도, 반대로 지나치게 깍아내리는 것도 부담스럽고 불편하다. 그런데도 외부의 시선은 더 궁금해진다. 그들은 우리를 어떻게 볼까.

-<코레야 1903년 가을>이 보여주는 것은 100년 전 한국 사회다. 폴란드인 바츨라프 세로셰프스키가 러일전쟁 발발 직전인 1903년, 러시아 황실지리학회 탐사대의 일원으로 부산에 도착한 뒤 뱃길을 이용해 원산으로 갔다가 다시 금강산, 평강, 양담, 안양, 양주, 서울로 이어온 여행의 기록이다. 그러나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다. 여로에서 만난고 본 많은 사람의 증언과 사회 현상, 그리고 자연 모습을 통해 당시 한국을 종합적으로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중 눈에 띄는 대목은 남루한 현실, 관료에 대한 원성, 사회 곳곳에 밴 일본의 영향이다. 그가 본 한국 사회는 “모든 것이 억눌려 있어 옆 나라 일본에서 느껴지는 생동감이나 진취성을 찾아볼 수가 없”고, 그가 가본 곳은 “어디나 예의 그 황량한 폐허와 먼지, 혐오스러운 불결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물에 씻겨 내려 진흙에 반쯤 파묻힌 작물과, 폭우가 휩쓸고 가 흙빛으로 변한 논도 자주 보았다. 백성의 삶이 얼마나 피폐했을 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생활이 어려울수록 관료에 대한 원성은 컸다. 사또나 관리, 정부의 파발꾼이 지나갈 때 사람들은 “강도 납신다”고 할 정도였다. 그래서 저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양반과 관리들은 민중을 끝없이 핍박하고 강탈하면서 마치 온 나라가 자기들만을 위한 것 인양 행세하고 있다”고 꼬집는다. 한달 남짓 짧은 여행기간 동안, 관료의 부패와 무능을 목격ㆍ체험하는 데 한계가 있었을 텐데도 이 같은 표현이 책에 가득한 것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그런 원성을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의 영향력은 이미 사회 깊은 곳까지 스며 있었다. 금강산 석왕사의 승려들은 검은 빛의 일본식 기모노를 입고 검은 빛의 일본식 두건을 쓰고 있었다. 일본인은 서울, 부산에 자기들만의 깔끔하고 편리한 주거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들은 산 채로 우리 목에 올가미를 걸고 있어요…우리 모두 곧 그들의 노예가 될 겁니다. 서울 땅의 삼분의 일이 벌써 그들 소유라는 것을 아십니까?” 젊은 관료 신문균은, 현실화하는 일본의 침략상에 울분을 토하기도 했다.

-한국의 종교, 산, 사찰, 농업, 음식, 기후, 학교, 가축, 공동묘지와 장례의식, 여성의 지위, 상공업과 해외교역, 신분, 심지어 기생사회에 이르는 방대한 내용을 읽을 수 있다. 호랑이를 잡기 위해 역할을 나누고 깊게 쌓인 눈 더미로 녀석을 유인한 뒤 공격과 도망치기를 반복하면서 힘을 뺀 다음 제대로 걸려들면 창으로 마구 찔러내는 식의 사냥법 등 재미있는 내용이 많다.

-거슬리는 대목도 있다. 우리를 낮춰 보고 일본을 문명국으로 인정한 부분이 특히 그렇다. “일본인들이 유능한 민족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들은 동양 여기저기에 자기 식의 생활방식을 주입하고 중국인과 한국인은 일본인을 형제로 보기 때문에 그들에게 기꺼이 복종한다.” “일본이 진보와 휴머니즘의 정신으로 이 불쌍한 한국 또한 일으켜 세워주리라 기대해본다.”

-민족운동, 사회주의 운동에 가담한 그의 이력을 볼 때, 이 같은 표현이 등장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러시아 식민지인 조국 폴란드의 독립을 누구보다 갈구했을 그가, 일본의 침략 야욕을 읽지 못한 채 겉모습만 보고 한국과 일본을 대비시킨 것이 아쉽다.(박광희 기자)

06. 07. 22. 

P.S. 저자 바츨라프 레오폴도비치 세로셰프스키(1858-1945)의 모습이다. 아래는 그가 쓴 편지(1922년에 씌어질 걸로 보인다). 러시아어 글씨가 가지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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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프랑스인 눈에 비친 제국의 흔적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5-02 11:55 
    이번주에 내가 관심도서 분류한 인문서는 대담집 두 권이나 아직 언론리뷰가 뜨지 않는다. 내주로 넘어간 모양이다. 덕분이 일이 헐거워졌는데, 가뜩이나 일이 많은 터라 다행이긴 하다. 대담집 대신에 잠시 눈길이 간 책은 프랑스인 고고학자가 쓴 <대한제국 최후의 숨결>(글항아리, 2009). 기사에서 언급된 대로 19세기말과 20세기초에 한국 관련서가 유럽에서 다수 쏟아져나왔는데, 이 책은 내용이 충실해서 당시 베스트셀러
 
 
2010-06-25 20: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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