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트르의 죽음과 철학
'지식인의 시대'는 종언을 고했는가
'지식인의 지식인'을 다룬 기사를 옮겨놓고 나니 20세기 '원조' 지식인이라고 할 사르트르에 관한 평전 소식도 빼놓을 수 없겠다. 사르트르 세대 이후 가장 '대중적인' 지식인의 한 사람인 베르나르 앙리 레비가 쓴 <사르트르 평전>(을유문화사, 2009). 역자는 사르트르 전문가인 변광배 교수다. 968쪽에 달하니까 얼추 안니 코헨 솔랄의 세 권짜리 평전 <사르트르>(창, 1993)에 이어서 가장 두툼한 분량을 자랑하는 게 아닌가 싶다. 시간만 된다면 작년말에 나온 박홍규 교수의 <카페의 아나키스트, 사르트르>(열린시선, 2008)와 함께 묶어서 읽어보고 싶다. 20대로 다시 돌아간 듯한 느낌이 좀 들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가 되기도 하고. 초심자라면 사르트르의 <지식인이란 무엇인가>(이학사, 2007)와 함께 폴 존슨의 <지식인의 두 얼굴>(을유문화사, 2005)을 같이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레비를 당혹하게 만든 사르트르의 '선'과 '악'을 미리 만나볼 수 있다.
문화일보(09. 05. 01) '진리의 화신’ 사르트르를 발가벗기다
“사르트르는 그저 국가원수처럼 환영받고 신망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하나의 국가였다. 그는 진리의 화신이었다. 그는 전 지구적 차원의 도덕적 권위를 가진 자였으며 사람들은 그의 면죄부를 먼저 획득하고자 서로 다투었다. 실제로 1950년대는 물론 1960년대에도 도움을 청하기 위해 그에게 밀사를 파견하지 않은 민족해방운동, 혁명집단, 소수과격파, 압제의 피해자들, 같은 정신 신조를 가진 자들, 반란을 일으키고, 총살당하고, 박해당하던 학생들의 연합은 거의 없었다.”
책이 프랑스 철학자 클로드 란츠만의 저작을 인용, 장 폴 사르트르를 설명한 말이다. 책에 따르면 사르트르는 한 사람의 철학자나 문학가가 아니라 하나의 브랜드였다. 어떤 철학적, 정치적, 문학적 사유로 그는 소란과 열정으로 가득했던 20세기를 그처럼 완벽하게 그 자신 속에 구현할 수 있었을까.
책은 제목 그대로 사르트르 평전이다. 하지만 “사르트르는 40세였다”라는 책의 첫 문장에서 보이듯 그의 전 생애가 오롯이 담긴 평전은 아니다. ‘세기의 인간’으로서 사르트르의 삶을 다루되, 사르트르의 사상과 문학의 공정한 평가에 무게 중심을 두고 내적 일관성과 모순을 파헤치는 데 치중했다. 문제는 잣대다.
책의 저자는 프랑스 신철학의 기수이자 대표적인 참여 지식인으로 꼽히는 베르나르 앙리 레비. 처녀작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에서 스탈린 독재와 집단수용소의 존재를 묵인한 서구 좌파를 통렬히 비판, 프랑스 지성계를 들쑤신 이력에서 보이듯 사르트르를 보는 눈은 착잡하다. 어떻게 ‘존재와 무’, ‘구토’로 대표되는 절대 자유를 추구하며 니체주의적 경향을 가진 인물이 모택동주의자의 기관지 ‘인민의 대의’를 지지하고, 마르크스주의적 경향의 전체주의를 신봉하는 정치인 사르트르가 될 수 있는가. 어떻게 한 사람이 이것을 하고, 또 저것을 할 수 있는가.
책이 출간되기 20년 전, 레비가 사르트르의 장례식에 몰려든 수많은 사람들을 보며 책을 쓸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예감한 이유다. 당연히 책은 사르트르가 두 인간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이 중에서 한 사르트르는 ‘선(善)’이고, 또 다른 사르트르는 ‘악(惡)’이다. 현존 프랑스 최고 지성이자 작가인 레비는 20년 동안 “가슴에 안고 지내며 꿈을 꾸고 되새김질하다” 쓴 책에 걸맞게 책은 풍성한 전거(典據)에 바탕해 바람몰이하듯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 자체가 한 국가였던 사르트르의 면모는 보부아르를 비롯한 수많은 여성 편력에서 그의 문학과 사상, 그리고 만년의 건강에 이르기까지 속도감 있게 전개된다. 특히 2차세계대전을 계기로 완전히 바뀌고 어느 순간 철학적인 실패를 예감하다 끝내는 과거의 스스로를 부정하게 되는 사르트르 사상의 여정은 보다 적나라하게 파헤쳐진다. 레비가 이 책에 ‘철학적 탐구’라는 부제를 붙인 배경이다.
약 1000페이지에 이르는 책은 묵직하고, 다루는 내용 또한 20세기 지성사를 종횡무진하지만 책을 읽기는 의외로 경쾌하다. ‘아메리칸 버티고’에서 보여준 예리하고 유머러스하면서도 속도감 있는 문체가 여기서도 빛을 발한다. 사르트르의 삶과 사상의 단절, 이중성에 주목한 책은 그 후 적잖은 반박을 불러왔다지만 평전으로서 근래 보기 드문 수작임에 틀림없다. 쉽잖은 내용을 우리말로 옮기면서도 책의 내용은 물론, 레비 특유의 문체와 책읽는 재미까지 고스란히 살려 놓은 번역자의 역량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김종락 기자)
09. 05. 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