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번역서에 대해 관심을 갖다 보면 번역된 개념어들에 대한 관심도 부수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데, 근래에 이 분야에 대한 책들이 나오고 있어서 반갑다. <국가 주권>(소화, 2009)만 구입하고 아직 읽어보진 않았는데, 나머지 책들도 사정이 허락하면 일독해 봐야겠다. 관련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유길준, 박영효 등 개화파들은 개인이나 경제 등 근대 서구 개념들의 의미를 파악하고 이를 현실에서 구현하려고 했으나 국내와 국제 정세의 벽을 뛰어넘지 못했다. 사진은 1883년 보빙사의 일원으로 미국에 건너간 유길준(뒷줄 왼쪽에서 세번째).

경향신문(09. 04. 29) 동·서양의 ‘개념’ 소통은 가능한가  

개념사 연구는 개념의 역사와 맥락을 고찰하는 작업이다. 단순히 어원사나 개념 도입 경로사를 연구하는 게 아니다. 개념은 역사 속 주체들의 치열한 사고 과정의 산물이다. 개념을 분석한다는 것은 개념을 매개로 정치·사회의 역사와 전개과정을 분석한다는 뜻이다. 개념사 연구 없이 인문학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과 연구가 불가능한 이유다.  

서구에선 수십년 전부터 심도있는 연구가 이뤄져온 개념사가 국내에 자리잡기 시작한 지는 10년 안팎. 지난해 9월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개념사 국제학술대회’가 열리면서 본격적으로 조명을 받았다. 학계에선 특히 하영선 서울대 외교학과 교수를 중심으로 한 ‘전파연구’ 모임과 ‘한국개념사총서’ 작업 등을 진행 중인 한림대 한림과학원(원장 김용구)이 주목받고 있다. 이들은 한반도에서 일어난 개념들의 충돌에 관한 연구를 진행해왔는데 최근 그간의 연구 성과들을 담은 책 출간과 학술대회가 잇따르고 있다.  



<근대한국의 사회과학 개념 형성사>(창비)는 1995년 시작된 ‘전파연구’ 모임이 15년 동안 한국 사회과학 개념들의 뿌리를 찾기 위해 노력한 결과물이다. 문명·권력·부국강병·세력균형·평화·국민·민주주의·경제·개인 등 근대 서구의 개념들이 19세기 한국에 전파된 후 변형·수용된 과정을 밝히는 동시에 개념들을 둘러싼 치열한 담론싸움을 역사적으로 탐구했다.  

책에 따르면 주권 개념이 처음 전해진 것은 윌리엄 마틴의 국제법 번역서인 <만국공법>의 전래와 함께였다. 신욱희 서울대 외교학과 교수는 “당시 주권 개념의 도입과 사용은 청을 중심으로 한 사대와 조공의 전통질서에서, 조약과 국제법의 서구 근대질서로의 이전을 의미했고, 이는 ‘세계관의 충돌’ 형태를 띠었다”고 밝혔다. 그는 “개념으로서의 근대적 주권이 실제 현실과 큰 차이가 있음을 알게 해준다”면서 “19세기 조선은 대외적이고 형식적인 주권에 기대게 되었지만 이와 관련된 대내적이고 실질적인 주권의 조건은 충족할 수 없었다”고 덧붙였다.  



19세기 일본에서 ‘individual’을 옮긴 ‘개인’ 역시 마찬가지다. 당시 개화파였던 박영효와 유길준은 대체로 그 의미를 파악하고 있었지만 문제는 개인이 당시 현실적인 주체로서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김석근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강사는 “개인의 과제는 자주독립, 부국강병 등의 절박한 과제 뒤념의 문명사적 각축, 서양 근대개념 도입의 국제정치적 싸움, 국내 정치·사회 세력 간 대결 등 개념논쟁의 삼면전에서 완패했다”면서 “개념화의 21세기적 식민성을 제대로 극복하지 못한 채 21세기의 변화를 어설프게 개념화한다면 19세기적 난관을 반복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편 한림대 한림과학원은 지난 24일 한국관광공사에서 ‘개념소통의 철학적 기반과 역사적 경험’을 주제로 학술대회를 열었다. 동·서양의 개념론을 비교하고 소통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자리였다. 이경구 한림과학원 HK교수는 “조선 후기 북학파의 타자 인식은 근대와 탈근대, 일원적 가치와 다원적 가치가 혼재하는 현재에 나와 타자 사이의 소통에 대한 긍정적 전망을 보여준다. 나의 존재가 타자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를 우주, 자연, 인간, 개인을 포함한 영역에서 고민하고 상호 의존에 대한 사유를 정밀히 전개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한림과학원이 지난해부터 내놓고 있는 ‘한국개념사총서’ 시리즈 세 번째 <헌법>(소화)도 최근 출간됐다. 김효전 동아대 교수가 19세기 중엽 ‘만국공법’과 함께 전래된 ‘헌법’ 개념이 종래의 개념과 만나 충돌·침투·갈등·저항을 거치며 선망·수용·모방·편입으로 이르는 과정을 역사적·실증적으로 추적했다. 김 교수는 “헌법 개념은 국가의식이나 국가사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면서 “서구의 헌법 또는 입헌주의 개념은 조선의 정치현실에서 정착하지 못하고 수구 반동이나 전제군주권의 강화로 좌절되었지만 권리사상이나 민권의식의 보급이라는 시대의 도도한 흐름은 막을 수 없었다”고 밝혔다.(김진우 기자) 

09. 04. 29.  

P.S. <근대한국의 사회과학 개념 형성사>(창비)에 대한 보다 자세한 소개기사도 옮겨놓는다.  

한겨레(09. 04. 30) '민주주의’ 개념 어떻게 자리잡았나

권력·주권·민주주의 등 오늘날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사회과학 개념이 어떤 경로를 거쳐 한국에 자리잡게 됐는지를 탐사한 책이 나왔다. 서울대 외교학과 하영선·최정운 교수 등이 쓴 <근대한국의 사회과학 개념 형성사>(창비)란 책이다. ‘형성사’라는 이름이 붙어있지만 엄밀히 얘기하면, ‘형성·전파·정착의 사회사’다. 책에서 다뤄지는 사회과학 개념들 대부분 18~19세기 서양에서 만들어진 뒤 중국·일본을 거쳐 19세기 한국에 전파되고, 이후 치열한 정치사회적 대결을 거쳐 한국적 담론 질서의 의미망 안에 뿌리내린 것들이기 때문이다.

책에 등장하는 개념은 13개다. 문명 개념을 필두로 부국강병, 세력균형, 국민·인종·민족, 민주주의, 경제, 개인, 영웅 등이 다뤄진다. 개인적인 관심분야와 개념의 전파 순서, 중요도 등을 고려했다는 게 글쓴이들의 설명이다. 책은 14년전 서울대에 만들어진 ‘전파(傳播) 연구’라는 작은 공부모임의 산물이다. 하영선·최정운 교수와 함재봉 미국 랜드연구소 선임연구원, 김영호·김용직 성신여대 교수, 손열 연세대 국제대학원 교수 등 10여명이 참여했는데, 이들의 문제의식은 명확했다. 한국 사회과학이 주문자생산 단계를 넘어 독자 브랜드로 성장하려면 공부의 목적과 대상, 방법, 실천에 대한 철저한 자기비판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 그 첫 단계로 주목한 것이 사회과학의 ‘말’이었다.

글쓴이들이 볼 때 한국의 사회과학 개념은 ‘삼중의 전선’을 뚫고 어렵사리 자리잡았다. 전통 개념과 근대 개념의 문명사적 충돌이 첫번째 전투였다면, 두번째는 번역의 판본, 곧 ‘중국판이냐 일본판이냐’를 두고 벌어진 대결이었다. 마지막으로 국내의 첨예한 정치사회적 갈등을 돌파해야 했다. 하 교수는 “19세기 조선 지식인들이 달라진 천하질서를 설명하기 위해 새로운 언어를 선택하는 것은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결단의 과정이었다”고 설명했다.

이 삼중대결의 현장답사를 위해선 무엇보다 당시 문헌을 꼼꼼하게 읽는 일이 중요했다. <서유견문> <독립신문> 같은 개화 문헌과 이항로·유인석 등의 척화파의 문헌에서, 전파의 길목에 있던 일본의 후쿠자와 유키치와 중국의 량치차오(양계초)의 글, 나아가 유럽 근대 사회과학의 기본서들을 새로운 눈으로 다시 읽어야 했다. 19세기 조선어와 중국어, 일본어 등 외국어 지식은 필수였다. 하 교수는 “내가 쓰는 말들이 내 것 같지 않고 불편해서 들어가 봤더니 첩첩산중이었다”며 초창기의 어려움을 회고했다.

글쓴이들의 바램이 있다면, 책에서 다룬 개념들이 식민지기와 냉전시대, 21세기 탈냉전기을 거치며 그 안에 어떤 사회·문화·정치적 의미들을 담아왔는지를 추적한 후속편을 내는 것이다. 하나의 개념이 ‘형성’이라 이름붙일 수준에 도달하려면 오랜 시간의 침식을 견디며 고유한 역사적·사회적 의미를 획득할 때에야 비로소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 교수는 “개념사 연구는 세대를 이어가며 수행해야 할 작업”이라며 “후학들에게도 연구를 권하지만 들이는 공력에 비해 반대급부가 턱없이 모자라니 좀체 뛰어들려는 제자가 없다”고 안타까워했다.(이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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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9-04-30 23:24   좋아요 0 | URL
이런 분야는 외래문화 수용의 역사라는 면에서 반드시 연구해야 한다고 봅니다.번역사와 연관해서 연구할 것이 많겠지요.

로쟈 2009-04-30 23:26   좋아요 0 | URL
연구하기가 까다로운 분야이기도 하지요.^^;

푸른바다 2009-05-01 19:01   좋아요 0 | URL
제가 있었으면 하고 바라던 책들이 출판되었군요^^ '근대 사회과학 개념형성사' 바로 주문했습니다^^ 포스트모던을 논하기 전에 반드시 엄밀하게 연구해야 할 분야가 바로 이 분야가 아닌가 싶습니다. 고전시대(조선 등등)와 서양+ 일본식 근대화 시대가 만나는 지점이기에 가장 연구하기 까다롭기도 하겠지만, 새로운 가능성을 창조적으로 모색하기 위해 반드시 깊이 연구해야 할 부분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로쟈 2009-05-01 23:55   좋아요 0 | URL
네, 이런 책들이 요긴하죠. 짐작엔 일본엔 진작에 다 나왔을 법한 책들이긴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