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신문에 연재된 '미술 밖 미술비평' 꼭지의 마지막회를 옮겨놓는다. 그간에 <1>김현 <2>김화영 <3>서경식 <4>김우창 <5>이가림 <6>박완서 <7>박정자와 박홍규 등이 다루어졌고, 마지막은 문학비평가 김윤식 편이다. 그의 '예술기행'을 살펴보고 있는데, 나열된 8권의 책들 대부분을 읽은 듯하다(기행문집은 이후에도 몇 권 더 있다). 특히 <문학과 미술 사이>는 기억에 학부 1학년때 읽은 책이어서 이런저런 추억도 떠올리게 해준다(더불어 내가 좋아했던 책은 <낯선 신을 찾아서>이다). 그런 용도의 스크랩이다.  

교수신문(09. 07. 14) 幻覺 또는 허무에 맞선 ‘포플라’의 운명

문학비평가 김윤식과 미술의 인연을 말할 때 가장 먼저 언급해야 하는 책은 그가 1979년에 내놓은 『문학과 미술사이』이다. 이 책은 그의 많은 글쓰기 가운데 한줄기를 이루는 이른바 예술기행 양식의 출발점이다. 이후 그는 『황홀경의 사상』(1984), 『작은 생각의 집짓기』(1985), 『낯선 신을 찾아서』(1988), 『환각을 찾아서』(1992), 『설렘과 황홀의 순간』(1994), 『풍경의 계시』(1995), 『머나먼 울림, 선연한 헛것』(2001) 등으로 이어지는 ‘예술기행’ 모음집을 꾸준히 발표했다. 여기 실린 글들은 대부분 그가 직접 발품을 팔아 작품이 존재하는 현장, 또는 그 작품이 탄생된 공간을 찾아가 거기서 자신이 느끼고 생각한 바를 에세이로 정리한 것들이다. 물론 여기에는 문학, 미술, 건축 같은 작품들이 두루 포함된다.   



그런데 그는 왜 기행을 떠나야 했는가. 1996년 발표된 『김윤식 선집』 6권 해제에 따르면 김윤식의 예술기행은 ‘낯선 풍경과 환각을 향한 그리움’에서 발원한다. 환각(유토피아)을 향한 영원한 동경이야말로 그로 하여금 이 세계의 무수한 곳을 편력하도록 이끌고 그 흔적을 남기게 만든 결정적인 추동력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김윤식은 환각, 또는 유토피아를 찾아 떠난 나그네다. 그에 따르면 이 환각, 유토피아는 “지상에 존재한 공상 중 가장 황당무계한 것”이지만 그것은 “모든 민족은 이것 없으면 산다는 일을 원치 않을뿐더러 죽는 이조차 불가할 정도”의 열도를 가진 황홀경의 환각이다(동양정신과의 감각적 만남). 인간은 이 ‘황홀경의 환각’ 없이는 살 수 없다. 그것은 김윤식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가 환각에 집착하고, 유토피아에 집착하는 것은 남다른 데가 있다. 그는 환각을 그리워해 찾아 나서지만 자신의 환각을 만들고 그 안에 칩거하지 않는다. 그는 환각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아니 좀 더 정확히는 환각에 맞선다. 하지만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두려움 또는 유토피아에 집착하기
그는 이렇게 말하지 않던가. “떠날 때는 언제나 설레였고 돌아올 땐 한결같이 피로하였다. 이 가슴 설렘이란 내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누구나 갖고 있는 그리움이랄까, 에로스적인 것이라 할 수 없을까? …누가 이 장대한 황당무계한 환각 앞에 감히 알몸으로 맞설 수 있으랴. 내 피로함은 이 환각의 너무나 큰 압력에서 왔다. 나는 그 환각 속에 빨려 들어가지 않기 위해 필사적이어야 했다.” (설렘과 황홀의 순간) 

그렇다면 그는 피로를 무릅쓰고 기행에 나서 어떤 환각들과 만났을까. 가령 그는 중국 서안에서 만난 대안탑 앞에서 이렇게 말한다.  “탑이란 무엇인가. 인간 염원의 하나이리라. 그것은 빈공간을 향한 발돋음의 표상이다. 이를 기도하는 자세라 부른다. 그것은 하늘 위로 솟아야 한다. 빈 하늘만 있으면 인간은 참지 못한다. 백지의 공포인 까닭이다. 이 빈 하늘의 아득함에서 그 두려움에서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의 끝이 마침내 탑을 지어내었던 것. 빈 하늘을 조금이라도 가리고 채우기의 한 가지 방식, 그것이 탑이다.” (풍경의 계시)  



그러니까 탑을 만들어내고, 그 탑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하늘이다. 그런데 이 하늘은 빈 하늘, 곧 허공이다. ‘비어있음’의 공포가 그것을 초극하려는 어떤 집단적 의지를 작동시키고 환각을 만든다. 그 초극 의지가 절박할수록 탑은 더욱 아름다울 것이다. 이렇듯 허공의 공포를 초극하기 위해 환각을 만드는 일은 자기 정체성 찾기와 짝을 이룬다. 김윤식에 따르면 자기 정체성 찾기는 자기 위기의식의 산물이다. 가령 일본 예술의 특질로 ‘사비’라든가 ‘유현’을 소리 높여 외치고 그럼으로써 일본예술을 서양의 그것과 구별하고자 했던 사람들은 오히려 서양의 그것과 끊임없이 ‘닮고자 하는 지향성’을 암암리에 내포하고 있다(머나먼 울림, 선연한 헛것).

‘비어있음’에 대한 공포는 환각을 통해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실 그 환각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말 그대로 ‘幻覺’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일본적인 것’도 ‘조선적인 것’도 ‘서양적인 것’도 모두가 환각이다. 그는 야나기 무네요시의 朝鮮美論를 이렇게 평한다. “조선의 미란 실제하는 것이 아니라 서양(일본)이 멋대로 창출해 낸 헛것에 지나지 않는 것. 실제와는 상관없이 일본(서양)인 야나기가 멋대로 자기 취향에 맞게 조선의 미를 線으로 창출해 낸 것일 따름.”(머나먼…) ‘허공’에의 공포는 결코 초극될 수 없다. 대개의 사람들은 그러나 이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인식하더라도 외면할 것이다.  



에세이 정신과 ‘여로형’ 글쓰기
“성현의 학문을 머리에 이고 하늘의 별을 바라본 집단”으로서 젊은 집현전 학사들이 그렸던 유토피아, 곧 「몽유도원도」는 텅 비어있지만 아름답다. 그러나 분열을 경험한 자는 다시는 그런 종류의 아름다운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 이렇게 분열을 경험한 자가 ‘허무와의 대결’을 통해 순도 높은 고통을 드러내는 것, 그것이 김윤식이 생각하는 예술이다(동양정신과의…).

허무와 대결한다는 것은 ‘환각’을, 달리 말해 유토피아가 환각임을 알지만 포기하지 않는 일이다. 그것은 김윤식 자신에게도 해당된다.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표지화로 건 『문학과 미술 사이』의 머리글에서 그는 일찍이 이렇게 토로한 바 있다.  “철들면서 먼 도회지로 끊임없이 떠나고 싶었다. 그것은 생각컨대 근대적인 것에의 지향성이었으리라. 그 근대적인 것이 노예나 시녀의 길이었음을 깨닫고 황망히 돌아서려 하자 나의 들길은 근대적인 것이 통째로 삼켜 버리고 아무데도 없었다. 허무가 앞뒤를 가로막아 나아갈 길은 이제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 허무의 안개 저편에 솟아오르는 선명한 이미지가 있었다. 포플라의 모습이 바로 그것… 포플라는 줄지어 섰든 혼자 서있든 모습은 외로움이었다. 그러기에 포플라의 이미지는 내겐 릴케의 용담화이고 고호의 삼나무이다. … 포플라는 고독의 표상이기보다 고독 자체였다. 예술이나 문학이란 내게는 이와 같은 표상의 추구일 따름이리라.”

『문학과 미술 사이』에서 김윤식은 이 그림을 이렇게 묘사한다. “밤도 아니고 낮도 아닌 곳, 그러기에 태양도 달도 11개의 별도 함께 출석한 곳. 하늘엔 이것뿐이다. 이 무게 중심에 ‘나’가 놓여 있다. 그것은 실상 나가 아니라 꿈틀거리는 은하수이다. 별도 달도 태양도 이 성운에 휘말려 있다. 아니다. 성운이 별을, 달을 태양을 낳고 있는 중이다. 그러니까 새로운 세계의 자궁 속, 胎 내의 모습을 그대로 보이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포플라의 이미지를 곁에 두고 그는 집을 떠난다. 이렇게 집을 떠난 상태란 ‘여로에 접어들었음’을 의미하는데 그 여로는 “뚜렷한 목적도 없지만 그렇다고 방랑도 아닌 여로”다.  

그의 예술기행의 근간을 이루는 에세이 정신은 그러한 접점에 깃드는 정신이다. 그 접점에 정신이 깃들 때 “세상과 사물은 본래의 자리에 놓인 것으로 보이게” 될 것이라고 그는 믿는다. 이렇게 그는, 발레리의 표현을 빌면, 이질적인 것을 동시에 수용하는 모더니스트다. 따라서 그에게 문학에 대한 논의가 미술에 대한 논의와 겹치고 공존하는 것은 전혀 어색하지 않은 일이다. 아니 필연적이다. 이 모습은 어쩐지 모더니스트 이상의 그것과 닮아 있다. 

김윤식은 화가로서의 이상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셀 수 없이 많은 기괴하기 짝이 없는 병들이 카페를 둘러싸고 자라고 있었는데 이러한 병들을 가장 통렬하게 앓아본 사람은 오직 이상뿐이었다. 그 많은 정신질환을 이상은 사랑하고 한 몸에 그들을 감쌌다. 그러기에 그는 아달린과 아스피린을 수없이 장만하고 그 알약들을 보석처럼 『날개』의 삽화에 그려넣었던 것이다. 그가 그의 죽음조차 초월할 수 있는 방식은 오직 이러한 길뿐이었던 것이다.” (김윤식 선집 5)   

“별이 총총한 하늘이 갈 수 있고 가야만 하는 길들의 지도인 시대, 별빛이 그 길들을 훤히 밝혀주는 시대는 복되도다”라고 (젊은 시절 김윤식을 매료시켰던) 루카치는 말했다. 그러나 이 복된 시대가 아니라(내적)분열의 시대에 김윤식은 산다. 그는 복된 시대를 꿈꾸나 돌아갈 수 없음을 알고 있다. 하여 그가 누릴 수 있는 최선의 자유는 “뚜렷한 목적도 없지만 그렇다고 방랑도 아닌 여로”에 나서는 일이다. 이 여로에 나서는 일은 그 자신에게나 그것을 지켜보는 자에게 똑같이 고통스러운 일, 권태롭고 피로한 일이다. 그러나 고통, 그 권태, 그 피로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자신의 주어진 상황에서 사람들이 치열하게 구축한 개개의 유토피아들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설령 그것이 곧 무너질 운명에 놓여있다 해도 말이다.(홍지석 객원기자·미술평론가)   

09. 07.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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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동 2009-07-18 1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글에 대한 평론을 읽다보면 공감된 부분이 있다.
명확한 근거와 식견 부족에 의한 불투명을 맑게 해준다.

"문학과 미술",황홀경의 사상,셀렘과 황홀의 순간,~기행,
고흐의 그림 등,, 제목만으로도 궁금해진다.

그는 환각을 그리워해 찾아 나서지만 자신의 환각을 만들고
그 안에 칩거하지 않는다. 즉, 환각에 맞선다.

김윤식님의 탑은 빈 하늘을 향한다.
곧 허공으로 어떤 집단적 의지를 작동시킨다. 하지만 마을영화
신감독의 돌탑은 하늘을 의식하지 않는다. 탑의 몸체에 주목한다.

신감독은 돌마다 조화롭게 쌓아짐에 몰입되어 있다.
옛부터 탑은 기원의 경유지였다.

김윤식님 탑은 환각을 쫒는 벡터에 해당된다. 제동을 걸수있다.
신감독의 탑은 하늘로 향한 그리움보다는 탑을 이룬 돌간의
조화에 더 집중한다.

감독은 허공을 향한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과 영화를 만든다. 그 작업을 즐기며, 밀폐된
공간과의 단절을 극복하려 하려한다.



로쟈 2009-07-19 18:41   좋아요 0 | URL
한두 권 읽어보시면 좋을 듯합니다.^^
 

이런저런 할일과 시름에 머리가 무겁고 어지럽던 차에 조금이라도 마음을 가라앉히게 되는 글을 읽었다.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소장이 며칠전 타계한 중국의 '국보급' 학자 지셴린 선생을 추모하는 글이다. 한국에 다른 제자가 더 있는지 모르겠지만 연배로 보아 정수일 선생이 한국인으로서는 수제자가 아닌가 싶다. 고인의 학덕과 사제간의 학연이 학문의 길에 대해서 한번쯤 생각해보게 한다.   

프레시안(09. 07. 16) 스승 지셴린 선생을 기리며 

지난 11일 향년 98세로 타계한 지셴린 베이징대 명예교수는 12개 언어에 능통한 중국의 대학자로 중국언론에서는 그를 '인간 국보'로 불러왔다. 특히 베이징대 동방어문학부를 창설한 그는 우리나라 문명교류학의 대가인 정수일 선생의 스승이기도 하다. 1952년 베이징대 동방어문학부에 입학한 그는 지셴린 선생의 권유로 아랍어를 공부하게 됐으며 그 이후 문명교류학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현재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는 정수일 선생이 자신을 학문의 길로 이끈 옛 스승을 기리는 글을 보내왔다. 편집자  

백수(白壽)를 눈앞에 둔 노스승 지셴린(季羨林) 선생님이 타계하셨다는 비보를 접한 순간 슬픔과 애달픔을 금할 수 없다. '국학의 대사', '학계의 태두', '국보'로 높이 추앙 받아온 선생님의 타계는 중국뿐만 아니라 세계 학계의 크나큰 손실이다. 옷을 여미고 머리 숙여 심심한 애도의 뜻을 표하는 바이다.

노스승과의 첫 인연은 5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52년 여름, 중국에서 처음으로 실시된 국가통일시험에 합격되었다는 소식만 듣고 한달음으로 베이징대학에 찾아갔을 때, 대학은 시내에서 지금의 자리로 이사하느라 개교를 미루고 한창 기숙사를 짓고 있었다. 신입생이 기거할 곳은 아직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아득히 먼 변방 옌벤에서 마차와 버스, 기차를 번갈아 타며 나흘이나 걸려 찾아온 곳에서 다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동방어문학부 신입생으로서 의지할 곳은 학부 주임(학장)이신 지 선생님뿐이었다. 학자풍의 인자하신 선생님께서는 사연을 들으시고 나서 무턱대고 자택에 와 지내라는 것이다. 초면에 차마 그럴 수는 없어 사양하니, 친히 대학 관리부서로 이끌고 가 대책을 신신 당부한다. 결국 실내 체육관 2층에 매트리스를 깔고 임시 거처를 마련하게 되었다. 거기서 달포나 지내는 동안 선생님은 몇 번이고 찾아오셨다. 

학기가 시작되자 동방어학 중(당시는 9개 어학) 전공어학을 선정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물론 전공은 학교 당국으로부터 최종 배정하지만, 학생들의 지망은 참고하기 때문에 사색이 필요하다. 역시 상의를 드릴 분은 선생님이시었다. 12개 언어에 달통하신 선생님께서는 한국어와의 상관성을 들어 몽골어나, 아니면 전망성으로 미루어 아랍어를 공부하는 것이 좋겠다는 조언을 주셨다. 사실 한국어와 몽골어와의 관련성은 어슴푸레하게나마 알고 있었지만, 아랍어의 '전망성'에 관해서는 전혀 문외한이었다. 결국 아랍어과로 배정되었다. 선생님의 뜻 깊은 배려였었을 것이다. 이렇게 아랍어와의 인연은 시작되었고, 그 후 지금까지 50여년간 내내 아랍-이슬람 세계와 씨름하면서 선생님의 그 탁월한 원경지명과 사려에 거듭거듭 감복하곤 한다.

선생님은 인문학의 모든 분야를 두루 통섭하신 학계의 태두이시며 동양학의 거장이시다. 선생님의 학문적 연구분야만 해도 인도 고대언어, 토카리스탄어, 인도 고대문학, 인도불교사, 중국불교사, 중앙아시아불교사, 당사(唐史), 중국-인도 문화교류사, 중국-외국 문화교류사, 중국-서구 문화의 비교, 미학과 중국 고대 문학예술론, 독일 및 서양 문학, 비교문학, 민간 문학, 산문창작 등 실로 다종다양하며 분야마다에서 발군의 업적을 남기셨으니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난 80년대에 이미 『지셴린문집』24권이 출간되었다. 그래서 선생님께는 고문자학자. 사학자. 동방학자. 사상가. 번역가. 불교학자. 산스크리트어학자. 작가 등 근 열 가지 학문적 전문가 칭호가 따라 다닌다.

특히 산스크리트어 고전 학문분야에서는 세계적 석학으로서 명성이 높다. 해박한 고전 지식으로 동양학의 원류를 밝히시는 선생님의 강의와 논저는 구지욕에 불타는 우리 젊은 학도들의 가슴속을 깊이 파고들었다. 40여년이 지나서 이순(耳順)을 훨씬 넘긴 나이에 이 제자가 감방에서 만학으로나마 산스크리트어를 익히려고 한 것은 바로 선생님이 일찍이 심어주신 학문인자(因子)의 싹 돋음이다. 이것이야말로 제자가 스승의 학문을 이어받는 '사자상승(師資相承)'일진대, 학문은 그래야 이어지고 살찌는 법이다. 

1955년 말, 카이로대학 유학을 앞두고 선생님 댁에 들렀다. 만면에 환한 웃음을 지으시며 제자의 두 손을 꼭 잡고 축하를 보내주셨다. 한 말씀 부탁드리니, 잠시 사색에 잠기셨다가 '아랍은 고전의 보고'이니 고전부터 독파하라고 당부하시면서 아랍 고전에 관한 연구는 독일이 가장 앞섰다고 덧붙이신다. 학문에 달관한 스승의 그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짐작하고는 그대로 하리라 마음먹었다. 유학기간 어렵지만 고전에로의 접근만은 끈을 놓지 않았다. 그 접근을 위해 스승이 예시한대로 독일어에도 손을 댔다. 고전은 학문의 샘이다. 샘물만이 참 물이다. 강물이나 냇물은 이미 참 물이 아니다. 뿌리 없이 휘젓기만 하는 얄팍한 학문적 세태를 탈피하는 첩경은 '고전벽(癖)'이다. '고전벽'에 미쳐야 학문의 경지에 미치게 된다. 이것은 스승의 가르침에서 터득한 제자의 학문적 신조다. 스승을 떠나보내는 이 순간, 이 신조가 새삼 되새겨진다.

세월은 어느새 10년을 훌쩍 뛰어넘어 환국을 앞둔 어느 날 인사차로 노스승을 찾아갔다. 그날도 선생님은 고적 속에 파묻혀 계셨다. 이제 머리에는 서리가 내려앉기 시작한다. 찾아온 사연을 말씀드리니, 처음엔 섬뜩 놀래시다가 이내 평정을 되찾으시면서 특유의 인자함과 소탈함으로 동정을 표시하신다. 앞에서도 보다시피, 선생님은 늘 제자를 중국 경내에 사는 한 소수민족인 조선족의 일원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조선(한국)의 한 젊은이로 보셨기에 제자의 환국을 오히려 의젓하게 생각하시는 것이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 모를 노스승과의 만남은 아쉬움을 감싸는 환담으로 이어졌다. 인생과 학문에 관해 또 한 차례 많은 귀중한 가르침과 당부를 주셨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위국효용'(爲國效用), 즉 '나라(조국)를 위해 배운 것을 효과 있게 쓰라'는 독려였다. 그러시면서 산스크리트어 번역시 한 권을 송별 선물로 주셨다. 노스승은 참으로 학문도 바닥 없이 깊거니와 도량도 한량없이 넓으신 분이다.

선생님은 높은 학덕만큼이나 인품 또한 고매하다. 늘 빛바랜 중산복 차림에 천으로 지은 책가방을 자전거 핸들에 걸쳐놓고 대학 캠퍼스를 누비던 그 수수하고 소탈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선생님은 부드러우면서도 결코 불의 앞에선 굽히지 않는 유약한 지식인이 아닌, 강인한 지성인의 표상이시다. 선생님의 삶의 좌우명은 도연명의 시 한 수에서 따온 "거칠고 변화 많은 세상에 무엇을 기뻐하고 무엇을 두려워하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면 걱정할 것이 없으리"다. 얼마나 호방하고 떳떳한 인생관인가. 뒤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 무지막지한 '문화대혁명' 때는 죽음을 무릅쓰고 앞장서 맞받아 나가셨다고 한다. 



당시를 회고한 책 『우붕잡억(牛棚雜憶)』(『외양간의 갖가지 기억』, 여기서 '외양간'은 '문화대혁명' 때 비판 대상자들이 갇혀있던 장소를 빗댄 말)에 의하면, 스승은 연금상태에서 낮에는 홍위병들로부터 '비판'을 받으면서도 밤에는 서양시를 중국어로 번역하셨다고 한다. 지성인의 참 모습이다. 그래서 국무총리 원자바오(溫家寶)는 병석에 누워계시는 선생님을 다섯 차례나 방문해 치국(治國)의 가르침을 구하면서 '정신적 스승'으로 높이 모셨다고 한다. 지금 학계의 거목이 쓰러졌으니 세상이 다시 방황하게 될 것이라고 중국인들이 우려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학문이 중히 여겨지고, 학자가 대접 받는 사회만이 진정한 문명사회이고 바람직한 미래사회다.

스승이란 자신의 삶을 일깨워주고 이끌어주는 사표이다. 스승의 가르침과 이끄심이 있기에 사람은 성숙하고 사회는 발전한다. 참 사표, 참 제자가 고갈된 사회는 병들고 썩은 사회, 무망(無望)의 사회다. '하루 스승 백년 어버이'(一日之師 百歲之父)라는 말은 스승의 가르침이 얼마나 소중하고 영원한가를 일러준다. 스승과 제자의 인연이야말로 전세와 현세, 그리고 내세까지 이어지는 '사제삼세'(師弟三世)라고 하니, 인연치고는 가장 끈질긴 인연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럴진대 스승이 남기고 간 유업은 제자가 맡아 수행해야 한다. 학문에 국경이 없듯이 사제 간에도 국경이 따로 있을 수 없다. 노스승과 같이 덕재(德才)를 겸비한 세기의 '사건 창조적 인물'에겐 더더욱 그러하다. 

스승이시여, 저승에서 이승의 학문개화(學問開花)를 지켜보시면서 고이 잠드시소서. 다시 한번 머리 숙여 명목을 비는 바이다.

2009년 7월 15일
불초제자 정 수 일 삼가  

09. 07. 16. 

P.S. 지셴린 선생의 산문집 <다 지나간다>(추수밭, 2009)에도 '나를 이끈 참 스승'이란 인상적인 글이 실려 있다. 그의 스승으로 베이징대 총장을 역임한 저명한 학자이자 지식인 후스(胡適, 1891-1962) 선생을 추모하는 글이다. 독일에서 학위를 받은 지셴린은 후스 선생의 초빙과 보증으로 베이징대에 자리를 얻게 되었다고 한다. 알라딘에서 검색되는 후스(호적)의 저작으론 <중국 현대 단막극선>(한국학술정보, 2007)과 <중국의 지성 5인이 뽑은 고전 200>(예문서원, 2000)이 있다(찾아보니 후스의 <중국고대철학사>가 60년대에 소개된 적이 있다). 둘다 공저이고 공편이다. 중국 현대 지성사에 관한 마땅한 책이 있는지 모르겠다. 생각나는 건 육건동의 <진인각, 최후의 20년>(사계절출판, 2008) 정도다(지셴린을 후스에게 소개한 이가 진인각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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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지셴린 선생의 인생 이야기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2-21 00:57 
    작년에 세상을 떠난 중국의 석학 지셴린(계선림) 선생의 에세이집이 두 권 더 출간됐다. 며칠 전에 우연히 알게 됐는데, <인생>(멜론, 2010), <병상잡기>(뮤진트리, 2010)가 그 두 권의 책이다. <우붕잡억>(미다스북스, 2004)이 품절상태라 현재 읽을 수 있는 건 <다 지나간다>(추수밭, 2009)까지 세  권이다. 노(老)석학의 담담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겠다.
 
 
Sati 2009-07-17 03:35   좋아요 0 | URL
정수일역의 <왕오천축국전>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프로필이 특이해서, 비장한 느낌을 받았던 기억이... 역사의 한 페이지를 보는 느낌이랄까.

로쟈 2009-07-18 10:38   좋아요 0 | URL
학문후속세대가 제대로 이어지지 않아서 요즘은 한 학자의 죽음이 한 시대의 종언처럼도 여겨집니다...

카스피 2009-07-17 10:33   좋아요 0 | URL
정수일 교수라면 '무하마드 깐수'란 이름으로 간첩 활동을 하다 검거된 분인가요?
체포당시에 출중한 아랍어 실력과 동남아인 같은 외모로 우릴 깜짝 놀라게 했죠.근데 오늘 사진보니 완전히 한국사람이군요^^

로쟈 2009-07-18 10:38   좋아요 0 | URL
네, 오래 수감되셨었죠...

얼음동자 2009-07-17 15:56   좋아요 0 | URL
이런 글을 보면 고전이 어려워서 멀리하다가도 고전을 읽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다시금 들어요~

로쟈 2009-07-18 10:41   좋아요 0 | URL
우리가(인간의 뇌가) 고전을 읽도록 태어나지 않은 건 확실하지만, 그런 만큼 고전읽기는 자기극복의 한 양태란 생각도 듭니다...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고 지난주에 배송된 책들을 나르기 위해 '폭우'에도 불구하고 오전에 학교에 갔었다. 가방에 잔뜩 포개넣어 들고 온 책들 가운데 하나는 마누엘 데란다의 <강도의 과학과 잠재성의 철학>(그린비, 2009). 이미 입소문이 돌던 저자이고 책인데, '과학철학 이론으로 분석한 들뢰즈의 생성존재론!'이란 카피가 책의 성격을 잘 요약해줄 듯싶다(원서는 오래전에 구해두었지만 또 필요할 때라고 찾으니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젠장). 당장은 들춰보기 어렵지만 내달에는 시간을 내봐야겠다. 참고로, 데란다의 책은 '리좀총서'의 '시즌2' 첫권이다('시즌2'의 리스트를 보니 아홉 권 가운데 데란다의 책만 세 권이 들어가 있다. 가히 비중을 알 만하다). 작년 가을 한 대학원신문에 공역자 중 한 사람인 이정우 원장의 소개글이 실린 바 있어서 스크랩해놓도록 한다. 

 

중앙대 대학원신문(08. 09. 03) 마누엘 데란다, ‘들뢰즈 이후’의 철학자  

‘들뢰즈 이후’ 철학의 향방을 주도하고 있는 사람들 중 하나인 데란다(Manuel de Landa, 1952~)는 실험영화 제작자, 컴퓨터 프로그래머, 건축가 등 다채로운 이력을 지닌 독특한 인물로서, 군사(軍事)계통의 기관에서 일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영화, 컴퓨터, 건축 등을 단지 스쳐지나가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가 이 계통들에서 이룬 성과는 모두 수준 높고 영향력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도 한 인터뷰에서 당신이 정말 되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데란다는 철학자라고 답하고 있다. 

데란다 철학의 출발점은 질 들뢰즈이다. 그러나 다양한 경력이 암시하듯이 데란다는 제도적 의미에서 철학수업을 철저히 받은 인물은 아니다. 그의 저작에는 깊이 있는 철학사적 논의가 그다지 나오지 않는다. 반면 일반적인 철학자들의 저작에서 기대하기 어려운 독자적인 지식과 분석이 등장한다. 다시 말해 데란다의 주석은 일반적인 인문적 주석가들의 것과는 전혀 다른 성격을 띤다. 그의 주석은 다른 주석서로는 해결되지 않는 많은 문제들의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데란다가 행하고 있는 작업의 중요한 의미 중 하나는 영미철학과 프랑스철학의 경계선을 무너뜨리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마누엘’이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데란다가 스페인계 멕시코인이라는 배경을 갖고 있기 때문이기도 한데, 그는 들뢰즈의 철학을 영미적 맥락에서 새롭게 전유함으로써 단순한 주석가가 아니라 하나의 새로운 담론형태를 창조해내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데란다는 들뢰즈에 관해 상당수의 논문을 썼다.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풍부한 그의 논문은 들뢰즈 연구자라면 꼭 읽어봐야 할 글들이다. 특히 <강렬도의 과학과 잠재성의 철학>(2002)은 자신의 들뢰즈 관련 논문들을 전반적으로 정리해 들뢰즈의 존재론을 일관되게 해명하고 있는 주요 저작이다.  

이밖에도 데란다는 <비선형 역사 100년>(1997)이라는 흥미로운 저작을 펴냈다. 서기 1000년에서 2000년에 이르는 1천 년간의 역사를 독특한 방식으로 해명하고 있는 이 저작은 들뢰즈/가타리의 <천 개의 고원>을 잇는 속편이라 할 수도 있을 듯하다. 또 <인공지능 시대의 전쟁>(1991)에는 컴퓨터, 군사, 건축 등에 대한 그의 지식이 잘 나타나 있으며 폴 비릴리오의 저작과 함께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작년에는 <새로운 사회철학: 배치이론과 사회적 복잡성>이라는 흥미진진한 저작을 펴내 들뢰즈/가타리의 사회철학을 계승하고 있다.(이정우/ 연구공간 ‘소운서원’ 원장)   

※ 데란다의 글 전체는 www.cddc.vt.edu/host/delanda에 게시되어 있다. 

09. 07.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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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바다 2009-07-15 0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분 경력이 상당히 마음에 드는 군요 ~ ^^

로쟈 2009-07-15 22:54   좋아요 0 | URL
철학자 대신에 작가를 해도 성공할 경력이에요.^^

목동 2009-07-15 2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데란다(Manuel de Landa, 1952~)는 실험영화 제작자, 컴퓨터 프로그래머, 건축가 등 다채로운 이력을 지닌 독특한 인물로서, 군사(軍事)계통의 기관에서 일하기도 했다.", 운전이나 컴퓨터프로그랭은 예술적인 감각이 뛰어난 사람이 더 잘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경계가 없는 응용력과 상상력이 부럽습니다.

로쟈 2009-07-15 22:55   좋아요 0 | URL
운전도 그런가요?^^

목동 2009-07-16 05:08   좋아요 0 | URL
춤,글,운전의 경우 마음의 흐름과 손발 동작이 일치되면 잘 풀리던 경험이 있습니다. 제가 예술적 감각이 뛰어나다는 말은 아니고요.

로쟈 2009-07-16 08:49   좋아요 0 | URL
예술적 감각의 운전이라면 레이서 수준인데요.^^
 

지각 원고를 쓰느라 월요일 아침부터 긴장된 상태로 보내다 보니 세상 소식도 늦게 접했다. 좋은 소식이 있을 턱이 없다. 박노자 교수의 칼럼이 그나마 말문을 트이게 해주어 스크랩해놓는다. 홍세화 한겨레 기획위원의 칼럼도 같이 옮겨놓는다.  

레디앙(09. 07. 13) MB식 국가, 정의 없는 강도 조직  

제가 오늘 언론에서 쌍용차 사태에 대한 보도에서 '경찰이 출입문을 확보했다'는 식의 보도를 접하면서 그냥 경악해버리고 말았습니다. '확보'라니, 마치 적군과 전쟁하는 아군에 대해서 보도를 하는 모양인 셈이지요. 파업하는 노동자들이 과연 거점 하나 하나씩 확보해서 결국 진압, 박멸해야 할 '범법자' 집단인가요? 잔인한 어법, 잔인한 사고이기도 하지만, 이 잔인성 이외에 커다란 문제는, 여기에서 거의 1천 명이 되는 노동자의 일자리뿐만 아니라 '정의' 그 자체가 짓밟힌다는 것입니다.

정의가 짓밟히는 현장
그리고 아무리 - 애당초의 이명박씨의 비과학적 소설 격인 공약대로 - 연간 7%씩 성장한다 해도 정의 없는 나라는 결코 행복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부동산 버블이 터져 마이너스 7% 성장이나 안됐으면 좋겠지만, 성장이 되든 말든 인간들의 한 집단으로서는 정의는 먼저입니다.

정의의 개념에서 핵심적으로 중요한 부분은 '과실에 대한 책임'과 '약자에 대한 배려'입니다. 즉, 대표적인 약자 집단인 피고용자의 경우에는, 그들에게 비록 책임의 일부분이 있다손 치더라도 일단은 강자 (자본/국가)는 최대한 그들의 이해관계를 배려하는 것은 롤즈와 같은 이들이 이야기하는 사회적 정의이지요.

그런데 이 쌍용차의 경우에는 해고라는 이름의 사회적 사형을 당하는 이들에게는 아예 이렇다 할만한 책임질 과실은 전혀 보이지도 않아요. 세계 자동차 업계의 위기부터 정부가 허용, 추진한 상하이차에의 매각까지, 노동자들과 하등의 관계가 없는 상황이거나 정부 직무유기의 과실입니다. 즉, 약자에 대한 배려의 의무를 지는데다 과실(불량 자본에의 졸속 매각 등)에 대한 책임을 다해야 하는 입장에 처한 정부로서는 공적 자금 투입을 통해 해고를 막는 길 이외에 정의롭게 행동할 도리란 따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만약 이 도리를 행하는 대신에 공권력, 즉 합법의 탈을 쓰는 폭력을 행할 경우에는 과연 '국가'란 무엇이 될 것인가요? 성 아우구스티누스께서 일찌기 '정의 없는 국가'를 뭐라고 불렀나요? 맞아요, 강도 조직이라고 불렀지요. 강도 조직이 통치(점령?)하는 영토 안에서 태생적으로 살게 되신 여러 분, 탈주라도 꿈꾸지 않으시겠어요?

국민통합의 여러 모습
이건 정말로 큰일입니다. 쌍용차 노동자에게도 일생의 대불행, 잘못하면 인생의 파괴지만, 나라 전체로서도 도덕적 파탄으로의 길이지요. 사실 국가란 원래 그 국민을 통합시킬 만한 중심축 같은 게 필요해요. 예컨대 우리가 잘 아는 일본의 경우에는 근대 국가의 국민적 통합의 중심축은 천황이라는 신화이었는데, 인위적으로 조절하기 쉬운 신화인 만큼 이와 같은 형식의 통합은 큰 불행을 자초했어요. '중화 민족 웅비'를 중심축으로 하는 오늘날 중국의 인민 통합의 위험성이란 지금 회골(위구르)자치구에서의 피식민 민족에 대한 유혈 탄압을 보면 다들 아실 만도 하지요. 아니면 '조선민족제일주의'와 '육탄이 되어서 불구대천의 원수 미제를 파괴하겠다'는 걸 골수로 하는, 필연적으로 핵 프로젝트 등의 군사주의적 낭비를 필요로 하는 북한 식 인민 통합은 어떤가요? 역시 별로 바람직하지 않게 보이지요.

이와 대비해서 예컨대 북구 국가들의 국민 통합의 중심축은 '상호 양보, 타협, 그리고 인권 실현'쯤일 거에요. 이와 같은 세팅에서 노동계급이 진정한 사회주의를 포기한 게 문제지만, 어쨌든 적어도 국민 집단 안에서의 계급갈등 시 무력 사용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갈등이 있으면 협상과 타협이 있어야 한다는 게 그런 나라들의 국체라면 국체입니다. 미래 지향으로서의 공산 사회 건설을 포기한 것이 문제라면 문제지만, 어쨌든 그 포기를 대가로 해서 얻은 이와 같은 기본 설정은 그나마 현존하는 사회적 체제로서는 가장 '덜 나쁜' 것이겠지요. 대한민국도 살만 한 곳이 되자면 이쪽으로 가지 않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할 터인데, 지금은 우리가 아주 정반대 쪽으로 행진합니다.

남한식 국민통합의 위험성
1990년대까지는 남한의 국민 집단 통합 이데올로기란 반공주의와 개발주의(잘 살아보세!), 그리고 혈통주의적 민족주의(우리는 다 단군의 자손!)의 중첩이었어요. 일부 농촌지역에서 국제 결혼이 전체 결혼의 40%나 되는 이 시점에서는 단군 이야기는 일단 접게 되는 것이고, 부동산 경제의 몰락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는 '부자 되기' 이야기하는 것도 의미가 없어요.

전체 부동산의 65%를 소유하는 최고상류층 1%나 그 주변 집단을 제외하면 이 나라에서 이렇다 할만한 경제적 희망이 있는 사람이란 극히 예외적이지요. 그러면 후자의 두 개 요소를 빼면 남은 게 뭐에요? 맞아요, 반공주의, 즉 뉴라이트 식의 반북, 멸북, 북한 붕괴론 등에 기반을 두고 있는 군사주의적 국민주의에요.

그러니까 우리 국민 통합의 기초로 우리가 상생, 타협, 인권, 비폭력을 삼지 않는 이상, 여전히 이 국민 집단을 하나로 묶는 기초 구조란 '대한민국의 아들'이라면 누구나 가야 할, 북한이라는 '적'을 상대로 할 군대일 것입니다. 우리가 정부의 책임과 약자에 대한 배려, 사회적 정의를 골자로 하는 온건 좌파의 길을 걷지 않는다면 유일하게 남은 게 이스라엘, 터키, 싱가포르 식의 군국형 국민 통합과 특히 이스라엘 식의 영속 전시 상태입니다.

물론 한국의 지배자들도 대북 전면전을 전혀 원하지도 않지만, 불장난하다가 또 무슨 사고가 일어날는지 전지전능하신 하늘만 아실 것이고요. 그러니까 쌍용차 노동자를 짓밟는 것은 결국 우리가 자멸적인 군사주의적 통합의 길을 걷는다는 징조지요. 차라리 망조라고나 할까요? 정의 없는, 강도 조직 수준의 나라는 필히 재앙을 맞게 돼 있고 그 궁극에 가서 망국을 맞게 돼 있습니다. 근대 일본의 예언자이자 함석헌의 스승 우찌무라 간조가 군국 일제보고 하던 소리인데, 지금 대한민국보고 해야 할 이야기인 듯합니다...(박노자/ 오슬로대)     

한겨레(09. 07. 13) [홍세화칼럼] 파시즘 경고와 언론법

지난 1일 인권연대 10돌 기념 강연에서 리영희 선생은 우리 사회가 파시즘 초기 단계에 들어섰다고 지적했다. <거대한 전환>의 저자 칼 폴라니는 영혼을 가진 존재로서 인간을 부정하는 게 파시즘이라고 강조했다. 이명박 정권을 파시즘 정권으로 볼 것이냐, 경찰 독재로 볼 것이냐의 논란은 학계의 몫으로 남겠지만, 우리로선 파시즘을 경계하는 목소리를 가볍게 넘겨선 안 될 것이다.

이명박 정권이 바라보는 세상은 영혼 없는 시장경제와 돈이 인간과 사회를 지배하는 사회인 게 분명해 보인다. 오는 20일이면 용산참사가 일어난 지 반년이다. 아직 장례도 치르지 못한 주검들은 차가운 영안실에서 인간 영혼이 실종된 사회를 증언하고 있다. 철거민들은 법 바깥에서 활개 친 용역 깡패들에게 쫓겨 망루에 올라 정권과 시민사회에 억울한 사정을 알리고자 했는데, 범법자인 양 경찰 진압작전의 대상이 되어야 했고 참화를 당해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국민을 대상으로 진압작전을 벌이는 정권, 그것은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조를 짓밟은 행위였다. 정상 국가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지만 국가를 대표하는 이명박 대통령은 참사 현장을 찾아 원혼들과 유족들에게 사과하는 대신 재래시장의 어묵 파는 집을 찾아 떡볶이를 사먹으며 대형마트를 규제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진정성이 없는 만남이지만 이미지들은 신문 지면과 방송에서 요란스레 춤을 춘다.

3000쪽의 수사기록을 공개하지 않는 뻔뻔스러움은 그들에게서 사회적 약자들과 더불어 사는 공동체 지향의 인간 영혼을 기대할 수 없다는 점을 공개한다. 이른바 ‘서민 행보’를 하고 민생과 중도를 말하지만 진정성이 없다는 점을 그들 스스로 알기 때문일까, 비판의 목소리를 공권력으로 억압하는 동시에 <한국방송>(KBS) 사장 해임 사태, <와이티엔>(YTN) 노조원 해고와 기소에서 보듯 언론 장악을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한다.

그들은 2만1000개의 일자리를 항출한다며 언론법을 민생법안이라고 주장했다. 비정규직법 시행과 관련하여 그들이 주장했던 ‘100만 해고설’처럼 순전한 거짓이었다. 그 수치가 국책연구기관인 정보통신정책연구원(KISDI)이 발표한 잘못된 통계치에 근거한 거짓 보고서를 기준으로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음에도 막무가내로 이번 회기 통과를 꾀하고 있으며, 김형오 국회의장은 직권상정을 기정사실화한 발언을 하고 있다. 그들이 내심으로 바라는 바인 <문화방송>(MBC) 대신 ‘조중동+대기업’ 방송이 들어설 때 그들의 표상인 뻔뻔스러움과 거짓은 드러나는 대신 그럴듯한 이미지로 포장될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민생 나들이처럼.

사람은 태어났을 때 비어 있던 의식세계를 사회화 과정을 통해 채워나간다. 그 과정에서 교육과 미디어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점은 누구나 알 수 있다. 주입과 암기 위주 교육으로 제도교육을 장악한 데 이어 미디어를 완전히 장악한다면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줄 모르는 채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매트릭스 체제가 완성될 것이다.

오늘도 사회 구성원들의 의식세계에는 사회정의나 연대의 가치보다 질서 이념이나 물신주의가 강력하게 주입돼 있다. 용산참사에 맞선 ‘거룩한 분노’가 다만 소수에게서만 발현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앞으로 언론법은 우리들을 거룩한 분노는커녕 분노 자체를 상실한 새로운 유형의 인간으로 만들지 모른다. 언론법을 기필코 막아야 한다. 우리의 인간 영혼을 지키기 위함이며, 파시즘 체제로 다가서는 것을 용인해선 안 되기 때문이다.(홍세화 기획위원)  

09. 07. 13. 

P.S. KBS 노조의 성명도 옮겨놓는다.  

[성명] "권력의 개가 될 것인가? 개과천선할 것인가?"

또 다시 대통령 라디오 주례연설이 KBS의 전파를 타며 공영방송의 자존심을 손상시켰다. 게다가 이번엔 주례연설 제작진이 참여도 못한 채 해외에서 일방적으로 제작해 던진 내용을 여과 없이 방송했다. 이는 글자 그대로 KBS가 '정권의 홍보방송'으로써 역할을 충실히 하겠다는 것 외엔 다른 생각이 없음을 여실히 증명한 셈이다.

우리는 이병순 사장 부임 이후 근 1년간 이어온 공영방송 위상 갉아먹기 작업을 지켜봤기 때문에 더 이상 놀라지도 않는다. 하지만 선배이자 최초의 KBS 출신 사장이라는 자가 정권 눈치 보기를 역대 어느 사장보다 앞장서는 모습에 과연 공영방송 KBS의 미래가 있는지 심히 우려된다. 그리고 그 사장 밑에서 노사의 약속도, 언론인의 자존심도 팔아먹는 사측 간부들의 행태를 보면 우려감을 넘어 존재에 대한 분노가 끓어오른다.

우리는 분명 기억한다. 수개월전 공방위에서 잘못된 대통령 주례연설 도입을 노사가 공히 인정했고, 이를 극복하기위해 주례연설 방송형태의 변경을 노사가 합의했다. 이후 노조는 이를 위한 대안도 내고 성실히 협상에도 임했다. 하지만 사측은 그 어떤 대안이나 협의 노력도 보이지 않은 채 시간만 끌다가 결국 노사합의를 불이행하며 논의 테이블을 결렬 시켰다. 그 뒤로도 라디오PD를 중심으로 한 조합원들의 압박이 이어지자, 사측은 청와대와 지속적으로 접촉하고 있고 조만간 가시적인 결과가 있을 것이라는 애드벌룬만 띄울 뿐 협상의 내용과 진전 상황 그리고 전망에 대해선 전혀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라디오PD 조합원들은 지난 주 금번 가을개편부터는 '주례연설 폐지' 혹은 '노조가 제시한 방향으로 방송형태 변경' 둘 중 하나를 이행하겠다는 공식적 약속을 이달 말까지 해달라고 사측에 제안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상대가 청와대이므로 사측이 결정할 수 없다며 거절했다. 다시 한 번 묻는다! 사측은 국민의 수신료를 받는 공영방송 KBS인인가? 아니면 정권의 눈치를 보며 기생하는 권력의 개인가?

우리는 이병순 사장에게 분명히 요구한다!

- KBS의 위상을 갉아먹으며 권력의 시녀노릇을 하는 사측 인사들의 인적 쇄신을 즉각 단행하라!
- 또한 공영방송의 이념을 훼손하는 대통령 주례연설을 즉각 폐지하라!
 

그렇지 않으면 최초의 KBS 출신 사장이라는 그 이름 석자는 공영방송 KBS를 망친 최악의 사장으로 기억될 것임을 분명히 명심하라! 그리고 공영방송을 되살리기 위해 KBS 노동조합은 어떤 투쟁도 불사할 것임을 선포한다!

2009년 7월 13일
KBS 노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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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13 22: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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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교수신문의 '출판 트렌드' 기사를 옮겨놓는다. '책으로 들여다 본 책들의 풍경'을 다루고 있다. <로쟈의 인문학 서재>도 언급되고 있지만, 그보다는 근간에 나온 '책읽기 책'들을 구경해본다는 의미가 있다. (픽션들을 잘 챙기지 않은 탓에) 몇 권의 책은 나도 기사를 보고 처음 알게 되었다... 

 

교수신문(09. 07. 06) 우리는 모두 통한다… 책으로 들여다 본 책들의 풍경  

카를로 프라베티의 장편소설 『책을 처방해드립니다(Calvina)』(김민숙 옮김, 문학동네, 2009) 한국어판 제목이 가리키는 것은 소설의 일부분이다. 네 번째 꼭지 제목인 ‘남자애야, 여자애야?’로는 다소 미흡하다. 전체 내용은 ‘칼비노야, 칼비나야?’라는 식의 제목이 걸맞다. 이 소설은 양자택일로 일관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일거양득한다. 둘 중에 굳이 어떤 것을 선택하지 않으면서도 둘 다 얻는다.

이러한 양자택일의 역설은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성취한 바 있다. 거의 모든 격언이 그렇듯, ‘살 것인가, 아니면 죽을 것인가’의 문제 또한 삶과 죽음의 극한 대비(혹은 그것의 들이밂)보다 앞뒤 맥락이 더 중요하다. “마음에 더 숭고한 태도는, 고통으로 난폭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견디는 것인가. 아니면 무기를 쳐들어 난관의 바다에 맞서는, 그리고, 거부하며 그것을 끝장내는 것인가.”(김정환 옮김)

아무튼 프라베티의 소설에 등장하는 노부인은 책을 처방한다. 노부인은 책장에서 책을 꺼내 창백한 남자에게 건네며 이렇게 말한다. “아침에 열 쪽, 정오에 또 열 쪽, 그리고 자기 전에 스무 쪽 읽으세요.” 독서가 정신건강을 돕는다는 게 그 이유다.

서평집을 두 권이나 펴낸 ‘회사원 철학자’는 회사원이 아니라 ‘철학자’다. 회사에 다닌다고 철학박사학위 소지자를 ‘일반’ 회사원이라 할 수는 없다. 인문학 서재의 주인 역시 ‘평범한’ 사람은 아닐 것으로 여겼다. 맞다. 『로쟈의 인문학 서재』(이현우 지음, 산책자, 2009), 바꿔 말해 블로그 ‘로쟈의 저공비행’을 운영하는 ‘곁다리 인문학자’는 세칭 명문대를 다녔다. 그는 문인자격증을 갖고 있다. 



나는 로쟈가 20대인 줄 알았다. <한겨레21> 칼럼 ‘로쟈의 인문학 서재’에 실린 필자 사진을 보고선 30대로 생각했다. 나보다 한 살 어린 그는 이제 40대에 들어섰다. 로쟈는 로자 룩셈부르크가 아니고 『죄와 벌』의 로지온 라스콜리니코프다. 로쟈는 “로지온의 애칭이다. ”고전에 대해 약간 배타적인 나는 로쟈의 고전론에 반발한다. “우리가 고전을 읽으며 고전에서 배워야 하는 삶은 당당한 삶이고 기품 있는 삶이다.” 과연 그러하고, 정말 그래야 하나?

『Calvina』에도 살짝 등장하는 소설가 이탈로 칼비노의 고전관이 외려 미덥다. 칼비노가 말하는 고전은 다시 읽는 것을 강조하는 책이다. 여기서 “‘다시’라는 말은 유명 저작을 아직 읽지 않았음을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의 궁색한 위선을 드러낸다.” 나는 『안나 카레니나』를 이제야 읽고 있지만 별로 안 부끄럽다. 로쟈가 우리말로 옮긴 러시아 영화감독 안드레이 콘찰로프스키의 인터뷰는 매우 인상적이다. 그리고 사르트르는, 확실히, 깬다. 노벨상은 거부하지만 상금은 받겠다고 했다니



『번역가의 서재』(한길사, 2008)는 번역가 김석희의 ‘역자 후기’ 모음으로, 첫 10년간의 번역 작업을 정리한 『북마니아를 위한 에필로그 60』(1997)에 이은 두 번째 10년 동안의 매듭이다. 번역가는 세 번째 ‘역자 후기 모음집’을 펴내면서 은퇴하길 바란다. 



루이스 버즈비의 『노란 불빛의 서점』(정신아 옮김, 문학동네, 2009)은 ‘서점에서 인생의 모든 것을 배운 한 남자의 이야기’다. 나도 한때는 거의 매일 서점을 드나들었다. 도서관에도 자주 갔다. “마음은 뜨겁게 불타오르는데 몸은 조용히 가라앉는 그 비밀스러운 곳”(뒤표지)은 서점일까, 도서관일까. 도서관일 것도 같지만 서점이 정답이다. 고등학생 때부터 서점 취업문을 두드린 버즈비는 서점에서 10년 일하고 출판사 외판원을 7년 했다. 지금은 현업에서 손을 뗀 상태지만 일주일에 다섯 번은 서점에 간다는 그가 부럽다. 디지털도서관이 도서관이 아닌 것처럼 인터넷서점은 서점이 아니다. 인터넷서점에선 뜨겁게 불타오르는 마음과 조용히 가라앉는 몸이 연출하는 ‘황홀한’ 형용모순을 체험하게 어려워서다. 



조지 오웰과 알베르토 망구엘은 서점에서 일한 적이 있는 작가다. 산문선집 『코끼리를 쏘다』(박경서 옮김, 실천문학사, 2003)에 실린 「서점의 추억」에 나타난 오웰의 헌책방 점원 경험담은 다분히 부정적이다. “내가 서점을 경영하고 싶지 않은 진짜 이유는, 책방에 있는 동안 책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피그말리온 서점의 16살짜리 알바였던 망구엘은 서점에 들른 보르헤스에게 책을 읽어주며 강한 문학적 영감을 얻는다. 



“출판인은 ‘책의 공화국’을 꿈꾼다. 책을 통해 지성과 이성의 유토피아를 추구한다.” 한길사 김언호 대표는 『책의 공화국에서-내가 만난 시대의 현인들, 책만들기 희망만들기』(한길사, 2009) ‘책머리에 부치는 말’을 마무리하며 종로서적 폐업의 안타까움을 토로한다. “참으로 의미 있는 문화적 인프라를 우리 사회는 내팽개치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고마움의 표현으로 ‘책머리에 부치는 말’을 맺는다. “고맙습니다./책 만드는 일을 하게 되어/정말 고맙습니다.” 나는 ‘책 공화국’의 일개 시민인 것이, 책 동네 주민의 한사람인 것이 참말 감사하다.(최성일 출판평론가) 

09. 07. 12. 

 

P.S. 말이 나온 김에 '서평집' 혹은 '독서 에세이' 범주에 속하는 신간을 몇 권 더 꼽자면, 이권우의 <죽도록 책만 읽는>(연암서가, 2009)와 장석주의 <취서만필>(평단문화사, 2009), 그리고 구본준, 김미영의 <서른 살 직장인, 책읽기를 배우다>(위즈덤하우스, 2009). 앞의 두 저자는 각각 도서평론가와 문학평론가이니 '업자들'의 책이고, 뒤엣책은 기자인 두 사람이 '책읽기'에 대한 답을 찾아 취재여행한 내용을 정리한 책이다. '독서 에세이'라기보다는 '독서인 에세이'라고 해야 할까.    

 

'업자'가 아닌 순수 직장 독서인의 책으론 성수선의 <밑줄긋는 여자>(웅진윙스, 2009)도 신간이다. 굳이 더 소개가 필요하진 않겠지만, 제목은 카롤린 봉그랑의 <밑줄긋는 남자>에서 따온 것이다. 특이한 책으론 도서관 사서들의 이야기를 적은 스콧 더글라스의 <쉿, 조용히!>(부키, 2009). 이 또한 '독서 에세이'라기보다는 '사서 에세이'라고 해야 할 듯하니 새로운 하위장르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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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동 2009-07-14 23:35   좋아요 0 | URL
최초로 책을 샀던 서점을 기억합니다. 그 서점은 작은 구멍가게 같았읍니다. 그때 구입한 소월 시집은 지금도 제 책장에 있읍니다. 걸어 갔다, 걸어 온 그 길이 제 최초의 사유의 길이었습니다.(중1)

로쟈 2009-07-13 23:03   좋아요 0 | URL
저는 기억을 못하겠는데요.^^;

푸른바다 2009-07-15 01:26   좋아요 0 | URL
요즈음 베르나르 앙리 레비의 <사르트르 평전>을 읽고 있는데, 거기는 사르트르가 노벨상 거부는 물론 돈도 받지 않은 걸로 되어 있던데요^^ 어느 것이 진실인지 모르겠네요^^

로쟈 2009-07-15 22:51   좋아요 0 | URL
몇 쪽인가요? 저도 내막이 궁금합니다.^^

푸른바다 2009-07-16 01:55   좋아요 0 | URL
454-458쪽을 보면 노벨 문학상과 관련된 절들이 있습니다. 레비의 글이 문제를 제기하는 식으로 되어 있어서 다른 해석의 여지를 남기지만, 레비는 왜 사르트르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고 그 상금을 멋지게 사용하지 않았는지, 예를 들어 그가 칭송해 마지 않던 남아메리카의 민주화 투사 중의 한명(체 게바라?)에게 주지 않았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만약 사르트르가 노벨상 수상을 '상징적'으로만 거부하고 상금을 받아서 개인적인 목적으로 사용했다면 그에 대한 기술도 있어야 할 맥락입니다^^ 처음에는 노벨상을 거부하다 입장을 바꿔 수상하고 상금 전액을 스웨덴 문학을 위해 자선 사업에 기부한 버나드 쇼와 노벨상 상금을 개인적 사치를 위해 사용한 모리악을 대비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 알게된 사실은 사르트르가 레지옹 도뇌르 훈장도 거부했고, 학술원과도 거리를 두었으며, 심지어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자리도 거절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상황에 대한 설명이 없어서 역시 '해석'의 여지를 남기기는 합니다만, 미셸 푸코도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강의한 것을 생각해 보면 사르트르의 철저함이 숙연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거의 완벽한 비제도권 철학자였던 것 같습니다^^

2009-07-16 03: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목동 2009-07-16 04:33   좋아요 0 | URL
고등학교를 졸업한 비제도권 철학자, "맘대로 하데, 책임저라!", 남이 '예'라고 할때, 본인 '노'라고 한 격입니다. 음, 거창한 이유보다는 본인의 성격일 수도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로쟈 2009-07-16 08:44   좋아요 0 | URL
상을 거절하면 상금도 받지않는 게 당연한 일이어서, 저도 그때 기사를 읽으며 의외였습니다. 제가 잘못 읽지 않았다면 다른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는가 싶어서요. 레비에 책에도 자세하게 나오진 않았는데요...

푸른바다 2009-07-16 11:39   좋아요 0 | URL
비밀글이 제게 보이는데요? 로쟈님에게도 보이는 지 모르겠네요. 러시아 어로 되어 있으니 로쟈님은 이해하실 수 있겠네요^^ 구글 번역기로 영역해보니 내용 파악은 가능하군요. 사르트르 인터뷰인데, 돈 문제로 고민했으나 결국은 받지 않은 것으로 보이네요.
구글 번역기로 쥬판치치의 슬로베니아로 된 인터뷰를 영역해서 읽어 본적이 있는데, 내용 파악은 가능하더군요^^ 서구어들이 얼마나 서로 밀착되어 있는지 새삼 느낄 수 있었습니다^^

펠렉스님: 사르트르는 고졸자는 아니라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고등사범은 고등학교가 아니라 프랑스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 최고의 대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자로서 사르트르 정도의 영향력을 발휘했다면 더 평가를 받을 수 있었겠지만 아쉽게도 사르트르 역시 최고 학력의 소유자였습니다...

로쟈 2009-07-16 12:16   좋아요 0 | URL
네, 그건 사르트르의 공식 거부 성명이구요. 문제는 이후에 그가 상금은 받겠다고 수정 제안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실현되지 않은 듯하지만). 저는 그 얘기를 좀 자세히 알고 싶었어요...

푸른바다 2009-07-16 13:47   좋아요 0 | URL
저도 궁금한 건 반드시 확인하는 성격이라, 점심시간에 인터넷을 뒤져서 아래와 같은 문장을 찾아냈습니다^^

"In 1964 he was awarded the Nobel Prize in Literature, but he declined it stating that "It is not the same thing if I sign Jean-Paul Sartre or if I sign Jean-Paul Sartre, Nobel Prize winner. A writer must refuse to allow himself to be transformed into an institution, even if it takes place in the most honorable form". However, he later wrote to the Swedish Academy asking for the monetary prize to be sent on to him in confidence; a request that was refused." (http://profiles.friendster.com/90800214).

말씀대로 상금을 받으려는 시도는 했던 것 같군요^^

위키피디아에 아래와 같은 내용도 있습니다^^
He was the first Nobel Laureate to voluntarily decline the Nobel Prize,[19] and he had previously refused the Légion d'honneur, in 1945. The prize was announced 1964 22 October; on 14 October, Sartre had written a letter to the Nobel Institute, asking to be removed from the list of nominees, and that he would not accept the prize if awarded, but the letter went unread;[20] on 23 October, Le Figaro published a statement by Sartre explaining his refusal.

However, Lars Gyllensten, long time member of the Nobel prize committee has claimed in his autobiography that Sartre later tried to access the prize money, but was subsequently turned down.[21] Allegedly, the French philosopher in 1975 wrote a letter to the Nobel Prize committee saying that he had changed his mind about the prize, at least when it came to the money. At which point the prize committee is said to have declined the request, stating that the funds had been reinvested in the Nobel institute.

노벨상 커미티 중의 한 사람이었던 Gyllensten, Lars이 밝힌 모양이고 그 출전은 다음과 같답니다^^ "Gyllensten, Lars (2000), Minnen, bara minnen, Stockholm: Albert Bonniers förlag, p. 282, ISBN 9100571407"

편지를 10년이나 지난 1975년에 쓴 것을 보니, 병으로 고생하던 시절이었고 돈이 궁했을 수도 있었겠다는 추측이 듭니다...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상금을 요청하는 편지가 10년 후에 씌여졌다는 걸 알게 된게 새로운 것 같네요...

로쟈 2009-07-16 13:16   좋아요 0 | URL
네, 그런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었을 텐데, '평전'들에선 다루지 않아서요.^^;

지양 2009-07-15 01:08   좋아요 0 | URL
저는 아직도 <서재 결혼시키기>보다 재미있는 독서 에세이를 만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

목동 2009-07-16 05:35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저도 읽어봐야 겠습니다.

사람들은 중독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던데요.
기부 중독이니 뭐니 하면서요. 책 중독이라는 말도 있겠죠?

기억에 남는 TV문학관이 있었는데요.
어떤 노인이(학자같았는데) 자신의 서재에 꽉 찼던 책들을 어느 날
한 권도 없이 텅비워 놓고, 매우 만족해 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찾아봐야 겠습니다)

어떤 친구집에 갔었는데, 의외로 친구의 방에는 별 책이 없었습니다.
책이 차 있을 줄 알았는데, 많이 읽는 것과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과는 다른듯 합니다.

저는 '서재'가 부럽지만, 별로 좋아한 말(서재)은 아닙니다.
스님 방을 본적이 있었는데, 그 방에는 책이 없었습니다.
학자의 방에 책이 없다면 죽음이죠.

좋아하는 것과 소유는 다른 듯합니다. 물론 수도자와 학자는
다르지만요. 독서 중독도 그 나름이라 생각했읍니다. 고수들은
선별을 잘 한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