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감벤에 관한 기사를 검색해보다가 얼마전에 읽게 된 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평론집 <얼굴 없는 노래>(문학과지성사, 2009)로 김달진문학상 젊은 비평가상을 수상한 함돈균씨의 인터뷰 기사다. '이론으로 무장된 세대'라고도 칭해지는 젊은 세대 비평가들이 어떤 태도로 문학에 임하는가를 엿볼 수 있다(최근에 나온 김화영 선생의 <소설의 숲에서 길을 묻다>는 그 대척점에 놓여 있다). 

 

주간한국(09. 09. 22) "2000년대 혁신적 작품 소개하고 싶어" 

2000년대 중반 이후, 젊은 비평가 그룹이 한국문학의 새 기류로 떠올랐다. 강계숙, 복도훈, 신형철, 이수형, 정여울 등 70년대 생 비평가들은 2000년대 초중반 비평을 발표한 이후 각종 문예지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며 문학지형도를 그리고 있다. 문학평론가 함돈균은 젊은 비평가 그룹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2006년 <문예중앙> 봄호에 평론 '아이들, 가족 삼각형의 비밀을 폭로하다'를 발표하며 비평 활동을 시작한 그는 불과 2~3년 사이 각종 문예계간지에 잇따라 굵직한 평론을 발표하며 주목받았다.

"2000년대 비평가들은 자기의 평론을 해석에서 나아가 하나의 '읽힐 수 있는 텍스트'로 만들고자 하는 욕망을 전례 없이 가장 많이 드러내는 세대 같아요. 또 비평은 시, 소설처럼 물질적 기반을 가져야 하는데, 2000년대 한국문학은 다양한 층위의 문학작품이 나오고 있고요."

이들 젊은 비평가들의 특징 중 하나는 외국의 문예사조를 적극적으로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의 평론에서는 이미 일반인에게도 익숙한 자크 랑시에르와 조르조 아감벤, 알랭 바디우 등 해외 철학자들의 이론을 국내 문학 텍스트 분석에 끌어들인 분석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철학은 하나의 세계를 바라보는 세계관인데 우리 문학을 볼 수 있는 방식 중 하나라면 이론을 도입하는 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다만 잘 변형되어 우리 문학을 분석하는 돋보기가 될 수 있는가, 도입하는 부분에서 자의식이 있어야 하겠지요."

'이론으로 무장된 세대'(문학평론가 정홍수)란 찬사와 '새로운 정치에 대한 모색인지 회피인지 우려와 기대가 엇갈린다'(문학평론가 황정아)란 지적이 함께 따라다닌다. 이는 평론가 함돈균에게도 해당되는 사항이다. 난해한 작품 설명이 독자와의 소통을 멀게 한다는 지적에 대해 그는 "문학적 형식의 소통은 일상의 방식과 다르다"라고 말했다.

"문학은 일상어가 갖는 이데올로기를 거스르는 방식으로 소통하려고 하거든요. 때문에 문학적 소통이 낯선 경우가 많죠. 명쾌하고 쉽게 풀이되는 말과 난해한 말, 다양한 층위의 말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지난 몇 년간 발표한 비평은 몇 달 전 평론집 <얼굴 없는 노래>로 엮였다. 제목인 '얼굴 없는 노래'는 그의 문학관을 드러낸 말이기도 하다. 평론가 함돈균이 생각하는 문학은 한 시대의 상식과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무언가 결핍된 말이다. 그러니까, 사람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신체인 '얼굴'이 없는 '노래'는 한 시대의 보편적 상식을 거슬러 그 시대에 억압된 것을 드러내는 말이다.

그는 종전 문학관에서 시와 소설로 볼 수 없는 자유로운 작품을 선호한다. 그가 김민정, 황병승, 진은영 등의 작품에 주목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400여 페이지, 총 4개의 장으로 구성된 이 책에서 그는 2000년대 문학, 그중에서도 시를 중점적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그는 2000년대의 언어 현상, 문학계 전위적인 실험에 주목한다. 시인 겸 문학평론가 권혁웅은 "불과 2년 만에 이만한 두께에, 이만한 수준의 논의로 묶어 냈다"란 말로 그에 대한 신뢰를 내비췄다. 함돈균은 이 평론집으로 얼마 전 김달진문학상 젊은 비평가상을 수상했다.

"문학의 정치성"에 주목한다는 그는 문학의 형식과 내용 모두 혁신적인 2000년대 작품을 소개하고 싶다고 말했다. "한국 문학의 아이러니 중 하나는 미학적 전위(형식의 새로움)와 정치적 진보(혁신적인 내용)가 만나지 못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미학적 전위의 작가들이 정치적으로 보수적이고, 진보적인 작가들은 미학적으로 가장 보수적인 태도를 갖고 있습니다. 모든 전위는 만난다고 생각해요. 그들을 만나게 하고 싶은 게 저의 바람입니다."(이윤주 기자) 

09. 11.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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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동 2009-11-09 0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70, 80, 90, 2000년말의 시간속에 작가-비평-독자의 유기적인 관계는
마치 여당-야당-국민같습니다.

로쟈 2009-11-09 19:02   좋아요 0 | URL
재밌는 비유시네요.^^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의 <목적 없는 수단>(난장, 2009)이 출간됐다. 지난달에 나온 <예외상태>(새물결, 2009)에 이어진 것인데, 앞으로도 그의 저작 대부분이 번역될 예정이어어서 '아감벤의 모든 것'을 한국어를 읽을 수 있는 날이 언젠가는 오게 될 듯하다. 이처럼 주목받게 된 건 '호모 사케르' 연작이 '9.11 이후의 철학'으로 평가되면서부터이지만, 고유한 문제의식과 정치에 대한 깊이 있는 사유는 아감벤을 읽는 일을 즐겁게 한다(독서에서 적당한 난이도는 적당한 운동과 마찬가지의 개운함을 낳는다). 간략한 소개와 옮겨놓으며 아캄벤 읽기 리스트를 만들어둔다. 아감벤에 관한 많은 자료는 태그를 이용하시기 바란다.  

서구 정치사상의 주요 범주를 근본적으로 되돌아보며 도래할 정치의 윤곽을 제시한 책. 9.11 사건으로 문제의식의 적실성이 인정된 '호모 사케르' 연작의 조르조 아감벤은 이 책을 스스로 '사유의 실험실'이라고 불렀다. 저자의 실험실에는 아리스토텔레스, 칼 맑스, 미셸 푸코와 같은 수많은 동시대인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인간의 자연적 생명, 강제수용소, 언어활동, 순수 수단과 몸짓의 영역 등의 경험과 현상을 이야기한다.

이 책에 수록된 각각의 텍스트는 특정한 정치적 문제를 나름의 방식으로 사유한다. 오늘날 정치가 하위에 있다면 그 이유는 정치가 그 자신의 존재론적 지위를 의식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을 전제로 하여 저자는 흔히 정치적인 것으로 간주되지 않는 경험과 현상 속에서 고유하게 정치적인 패러다임을 탐구한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목적 없는 수단> 한국어판은 200자 원고지 170매 분량의 해설을 수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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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에 가장 눈에 띄는 재출간 도서는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비봉출판사, 2009)이다. 지난 1996년에 출간됐다가 절판됐었는데, 액면가는 2만원에서 2만 5천원으로 올랐다. 상대적으로 초판이 얼마나 비쌌던가를 알 수 있다(새삼 적시하는 것은 내가 책을 구입하지 못한 이유이기도 했기 때문). 이번엔 소장도서로 마련해둠직하다(게다가 전면개역판이라고 한다). 리뷰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한겨레(09. 11. 07) 철학자’ 애덤 스미스의 역지사지 도덕론 

애덤 스미스(1723~1790·그림)의 가장 유명한 저작은 <국부론>이다. 근대 경제학의 탄생을 알린 저작이기도 하다. 그러나 스미스를 유명인사로 만든 출세작은 <국부론>보다 앞서 집필한 <도덕감정론>(1759)이다. 1996년 한 차례 번역·출판된 바 있는 이 책이 출판사의 전면적인 번역 수정을 거쳐 명료한 문장으로 새롭게 나왔다. 



스미스는 ‘경제학의 아버지’로 불리지만, 그 자신은 경제학자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경제학이 분과학문으로 독립한 것은 20세기의 일이다. <도덕감정론>으로 명성을 얻었을 때 사람들은 그를 ‘철학자 스미스’라고 불렀다. 스코틀랜드 소도시에서 유복자로 태어난 스미스는 글래스고대학과 케임브리지대학을 나온 뒤 1752년 글래스고대학 도덕철학 교수로 임용됐다. 그 자리는 전 시대에 도덕철학자로 이름을 날린 스미스의 스승 프랜시스 허치슨의 뒤를 이어받은 것이었다. 도덕철학은 오늘날의 사회철학에 해당한다. 스미스는 이 시기에 유창한 강의로 학생들의 사랑을 받았다. 도덕철학자 스미스의 강의가 책으로 열매를 맺은 것이 바로 <도덕감정론>이다.

<도덕감정론>은 <국부론>만큼이나 오해의 안개에 쌓여 있는 저작이다. <국부론>이 인간의 이기심을 찬양하는 저작인 데 반해 <도덕감정론>은 이타심을 강조한 저작이라는 것이 그런 오해의 한 양상이다. <국부론>의 이기심을 <도덕감정론>의 이타심으로 제어하고 교정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국부론>에서 시장원리주의를 설파한 스미스가 그보다 먼저 <도덕감정론>에서 복지국가론·후생경제학을 주창했다는 주장도 나온다. 그러나 이런 식의 이해는 스미스의 사상을 통합적으로 인식하지 못한 데서 오는 오류임이 분명하다.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은 동일한 원리 위에 세워진 중층 건물과도 같은 저작이다. <도덕감정론> 위에 <국부론>이 얹힌 모습인 것이다.

‘도덕감정론’ 하면 도덕심 또는 이타심이 떠오르기 십상인데, 도덕감정을 이타심으로 한정하여 이해한 사람은 스미스의 스승 허치슨이었다. 스미스는 스승의 생각을 비판하고, 이타심뿐만 아니라 이기심도 도덕감정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가 도덕감정의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동감(sympathy·공감) 능력’이다.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의 기쁨·슬픔·욕구·분노를 함께 느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감정에 공감할 경우 즐거움을 느끼고 그 감정에 공감하지 않을 경우엔 불쾌함을 느낀다.

스미스는 공감하느냐 공감하지 않느냐를 가르는 기준은 ‘적정성’이라고 말한다. 이타심이라고 해서 꼭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자신과 가족을 팽개치고 남을 돕는 행위는 그것이 아무리 이타적이라고 해도 공감을 얻기 어렵다. 마찬가지로 자기 이익을 도모하는 이기적 행위도 그것이 적정한 수준이라면 공감을 불러올 수 있다. 처지를 바꿔 생각해보는 역지사지의 상상력이야말로 공감 능력의 비밀이다. 그렇다면 그 적정성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스미스는 여기서 ‘제3의 공정한 관찰자’를 제시한다. 인간 행위의 경험적 축적 위에서 그런 관찰자를 상정할 수 있으며 사람들 각자의 마음속에도 그런 관찰자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 관찰자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면, 이기심이든 이타심이든 도덕성을 획득했다고 볼 수 있다.

요컨대 스미스가 규명하려고 하는 것은 이기심이 사회적 조화와 질서를 깨뜨리지 않고 개인의 발전과 사회의 발전을 동시에 가져올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 스미스는 공감의 원리가 이기심을 조절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조화와 발전이 가능하다고 본다. 마치 중력의 법칙에 따라 하늘의 행성들이 태양 주위를 질서 있게 운행하듯이, 인간의 이기심도 질서에 위배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도덕감정론>의 이런 규명 위에서 <국부론>의 논의가 펼쳐진다.

그렇다고 해서 스미스가 인간의 이기심을 무조건 찬양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냉정한 경험적 관찰을 통해 이기심의 강력성을 인정하고, 그 이기심이 적정하게 제어되고 공정하게 관리될 경우 사회적 이익 증진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보았을 따름이다. 스미스가 활동하던 시대는 매뉴팩처(공장제 수공업) 시대였다. 노동과 자본이 분화되지 않고, 자본가도 다른 노동자들과 함께 일하고 먹고 자고 하던 시대였다. 스미스가 생각한 ‘보이지 않는 손’의 조화와 질서는 소박한 단순상품생산 시대의 목가적 세계상을 반영하고 있다. 그의 이론을 노동과 자본이 극단적으로 분화된 현대 독점자본주의·금융자본주의 시대에 곧바로 적용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옮긴이는 말한다. 신자유주의 이론가들이 스미스의 ‘자유방임’ 논리를 자신들의 근거로 끌어들인 것은 시대착오인 셈이다.  

더구나 스미스의 ‘자유방임’ 주장은 그 시대의 상업자본가들의 독점과 특권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었다. 그는 이기심이 제어되지 않고 폭주할 경우에 사회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인애가 없어도 사회는 존속할 수 있지만, 정의가 부재하면 사회는 붕괴한다.” 모든 반칙과 특권에 반대하는 ‘급진적 철학자’가 스미스였던 것이다.(고명섭 기자) 

09. 11. 07.   

P.S. '급진적 철학자'로서 혹은 '윤리학자'로서의 애덤 스미스를 재조명한 책들이 없진 않다. 조나단 와이트의 경제학 소설 <애덤 스미스 구하기>(생각의나무)가 대표적이다. 개인적으론 1998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아마티아 센의 <윤리학과 경제학>(한울아카데미, 1999) 덕분에 <도덕감정론>의 의의에 대해서 알 수 있었다(센은 펭귄판 <도덕감정론>의 서문을 쓰고 있기도 하다). 제목은 '윤리학과 경제학'이지만, 센은 경제학의 두 가지 기원으로 '윤리학'과 '공학'을 든다(각각 윤리학적 기원과 계산논리적 기원이다). 경제학이 오늘날과 같이 탈윤리적 성격을 갖게 된 것은 윤리학적 기원에 대한 망각이라고 할 수 있다. '절반의 경제학'이라고 할 수 있을까? 센은 이렇게 지적했다.  

이른바 '현대 경제학의 시조'로 불리는 애덤 스미스는 글라스고 대학의 도덕철학 교수였다. 더구나 경제학의 주제는 오랫동안 윤리학의 한 분야 같은 것이라고 여겨졌다.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꽤 최근까지 경제학을 '도덕철학 우등졸업시험'의 한 분야로서 가르치고 있었다는 사실은 경제학의 본질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를 보여주는 한 예이다.(17쪽)    

해서 이러한 전통에서 일탈한 현재의 '주류 경제학'은 일종의 '돼먹잖은 경제학'이다(거기에 비한다면 센코노믹스는 좀 '돼먹은 경제학'이겠다). 돈은 많이 벌어서 으스대지만 안하무인이고 근본을 모르는 망나니. 소위 '경제학'에 대해 내가 가진 불편한 느낌의 기원도 그런 데 있다. 고등학교 때 '경제'를 배웠지만, 기억에 <국부론>의 애덤 스미스만이 조금 언급되었을 뿐 <도덕감정론>은 다뤄지지 않았고, 경제학의 윤리학적 기원에 대한 소개도 없었다. 그 때문인지 단 한순간도 경제학을 전공하겠다는 생각은 갖지 않았고, 대학에 들어와서도 경제학은 단 한 과목도 수강하지 않았다. 경제학이 도덕철학의 일부였다는 것만 알았어도 생각을 조금 달리했을 지 모를 일이다...   

P.S.2. 대출도서를 반납하기 위해 동네 도서관에 잠깐 들렀다가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에 관한 참고도서를 살펴봤다. 별다른 선택의 여지도 없이 몇 권의 책에서 관련 장을 복사했는데, 일단 제임스 버컨의 <애덤 스미스 경제학의 탄생>(청림출판, 2007)이 전체적인 윤곽을 잡는 데 요긴해 보인다. "<도덕감정론>은 흄과 허치슨, 맨더빌, 샤프츠버리, 로크, 홉스를 거슬러올라가, 17세기 시민전쟁의 정치적, 종교적 소용돌이에 말려드는 도덕적 문제에 대한 영국의 오랜 전통의 절정이자 최후를 장식하는 백조의 노래다."(83쪽)라는 게 서두의 평. 저자가 경제학자가 아니라 영국의 소설가이자 비평가라는 점이 이상하지 않다. 한 대목 더 인용하면,  

이 책의 제목은 철학적 저작의 의도를 정확히 대변해준다. <도덕감정론>은 왜 어떤 행동은 옳고 어떤 행동은 그른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외적 권위가 필요 없는 세상에서 어떻게 옳거나 그르다고 느끼게 되는가 하는 문제를 설명하려 한다. 이 책은 인간에게 언제나 옳고 좋은 것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경우에 인간이 어떻게 옳고 그른 것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가 하는 문제를 탐구한다. '왜 여자가 정숙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왜 남자는 여자가 정숙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를 따진다.(86쪽)  

홍훈 교수의 <인간을 위한 경제학>(길, 2008)은 제목보다는 '고전으로 읽는 경제사상사'란 부제가 더 적합한 책인데, <도덕감정론>에 대해서도 내용을 잘 정리해주고 있다. 박순성 교수의 <아담 스미스와 자유주의>(풀빛, 2003)은 생각 밖으로 알찬 소개서이자 연구서. 스미스의 경제학과 윤리, 혹은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의 관계에 대해서는 7장과 8장, 두 장에 걸쳐서 자세히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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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애덤 스미스를 다시 읽는다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12-16 23:26 
    애덤 스미스에 관한 책은 드물지 않게 나와 있고, 그의 <도덕감정론>이 <국부론>만큼 중요하게 간주돼야 한다는 것도 '상식'에 속하지만, 분량이 만만치 않아서 직접 읽어볼 엄두를 못 내는 독자가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도메 다쿠오의 <지금 애덤 스미스를 읽는다>(동아시아, 2010)은 그런 독자들을 위한 책으로 보인다. 이미 일본에서는 베스트셀러였다고 하니 '좋은 입문서'에 대한 관심으로도 읽어봄직하다는
 
 
목동 2009-11-07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술의 기본 미덕은 '공감'인데요. 쌍방의 적정 수준을 유지함으로서
의식이나 물질의 흐름(소통)이 일어난다는 말같습니다. 대학1학년때
경제학개론(고교때 정치경제) 수강후로 오늘 처럼 일상의 경제용어를
공부했습니다. 윤리학과 경제학 문장들은 선문답같아 쉽지 않습니다.

로쟈 2009-11-07 17:27   좋아요 0 | URL
사실 주류 경제학은 '경제공학'이라고 개명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첨단의 '금융공학'처럼). 인간과 삶에 대한 지극히 협소한 이해에 근거하고 있으니까요. '제몫 찾아주기'가 필요한 듯싶습니다...

[해이] 2009-11-07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헛 사야지 ㅋㅋ

로쟈 2009-11-07 22:01   좋아요 0 | URL
^^

다이조부 2009-11-07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에는 2만원에서 5천원 올랐는데 그렇게 많이 오른건가 싶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까

당시 책값이 비쌌네요.

제가 2001년 대학신입생때 김밥집에서 서빙을 하면 꼴랑 시간당 2000원을 받았는데,

요즘 그런 일을 하면 5000원까지 받을 수 있거든요.

로쟈 2009-11-07 22:01   좋아요 0 | URL
네, 요즘 책값들에 견주면 3만원은 넘어갈 텐데, 재판이라서 그 정도로 매겨진 듯해요. 초판은 정말 비쌌죠. 요즘이라면 4만원대 책이었습니다...

koreack 2009-11-11 0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제공학' 공부하고 있는 박사과정생입니다. 경제학에 대한 그 불편하신 감정은 이해가 갑니다마는.. 지극히 협소한 이해라고 하시면 경제학자들 많이 섭섭하겠군요. 주류(어디까지를 '주류'라고 봐야할지도 모르겠네요. 맑스경제학 하시는 분들에게는 어지간한 비판적 학자도 전부 '주류'로 보일테니...) 경제학의 세상을 보는 시각과 방법론, 현실적 영향력에 관해서는 미국에서도 활발한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저도 그렇고 많은 학자들이 크루그만이 말한 것처럼 현란한 수식을 통해 당연한 사실을 하나 증명해 놓고 그 틀을 세상 전체로 확대하고 때로는 남들이 그렇게 보기를 강요하려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수리적, 체계적 연구방법과 분석적 시각 자체가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또 수리적 틀을 통해 세상을 분석하는 것이 낸 성과와 그 시각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됩니다.
어쩌면 그래서 다른 학문분야와의 결합이 더욱 가속화되어가는 거겠죠. 오히려 다른 학문 영역을 침범한다고 "제국주의적"이라는 비판을 하시는 분들도 많지 않던가요? ^^ 경제와 인간의 복지, 자유 등에 대한 센의 철학적 논의 역시 의사결정론과 일반균형이론 영역에서 남긴 수리적 분석에 기반하여 나온 것이랍니다. 센의 후기 저작이 아닌 그 논의들만 보셨다면, 역시 "협소하다"는 평을 내리셨을 것 같습니다만. ^^

로쟈 2009-11-08 10:53   좋아요 0 | URL
섭섭해할 경제학자들이 많다면 오히려 다행인데, 정말 그럴지는 의문입니다.^^; 경제공학이란 '비아냥'을 면하기 위해선 경제학의 목적과 용도에 대한 성찰이 필요할 듯해요. 이번 경제위기에 직면해서도 경제학자들의 무능력이 도마에 오른 적이 있는데, 특히나 한국에서는 경제학자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C급 경제학자 우석훈씨의 푸념이기도 하지만...

목동 2009-11-08 12:03   좋아요 0 | URL
자연과학은 통제된 실험을 할 수 있지만 경제학은 경제자체가 우리들 이야기이기(경제할동) 때문에 모형을 만들어 예측하기 쉽지 않을 것같아요. 인간의 뇌, 자연의 기후, 경제의 공통점은 '답이없다'지만 예측성 해설만으로는 쉽지 않을 것같습니다. 그런 연유로 다른 학문과 결합이 가속화될 것같구요. 우리의 현실에 유능하고 겸손한 경제학자와 포용적이며 거시적인 정치가가 필요함을 느낍니다. 최근에는
well-being GDP 를 제시한 학자도 있다는데요.

yamoo 2010-07-19 18:30   좋아요 0 | URL
수리적 틀을 통해 세상을 분석하는 성과과 그 시각...인문분야에서 경제학만 그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설득력 있는 깔끔한 설명방식..원츄입니다~ㅎㅎ

노이에자이트 2009-11-08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민경국은 요즘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시장의 자유를 강조하는 글을 많이 쓰더군요.아담 스미스는 탐욕스런 상인들을 그 누구보다도 비판했지요.저는 다카시마 젠야<아담 스미스>가 좋았습니다.문고판에 값도 싸구요.저자는 사람들이 아담 스미스를 기업하는 자유를 이론적으로 다져놓은 인물로 오해하는 것에 대해 바로잡으려고 그 책을 썼다고 말했습니다.

로쟈 2009-11-08 18:45   좋아요 0 | URL
대개는 하이예크주의자를 자처하는 학자들이죠. 아담 스미스는 좀 특이한 포지션인 거 같습니다. 같은 자유주의라 하더라도...

koreack 2009-11-11 0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흠.. 또 왔습니다. ㅎㅎ 이거 괜히 잘못 적었다가 욕얻어먹는게 아닌가 싶긴 하지만... 사실 로쟈님의 블로그를 즐겨 보고, 선배의 선배님이라서 개인적인 이야기도 몇번 들은 적도 있습니다. ㅋ 그러니 미워하진 말아주시고 귀엽게 봐주시길. ^^
말씀하셨다시피 경제학의 목적과 용도, 성격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거리가 있겠죠.. 저는 현재의 모습에 불만이 있지만, 한편으로 백안시하는 시각 역시 공정하지 못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practice로서의 성격을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면 (제 생각에는 경제학이 이 측면에 있어서 과도한 기대를 받는 측면이 분명 있다고 생각합니다. 큰 학문 규모에 따른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르지만요) 학문의 성격 자체에 대한 회의까지 도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구체적 개별 사례를 설명하는 것보다는 일반적 원리를 설명하는 것이 과학의 본질 아니던가요. 베이컨 등등의 시기 정립된 과학의 성격이라는 것도 그러하고요. 물론 모형의 구축과 일반화는 예측을 위한 시도입니다. 하지만 그 결과에 대한 비판이 "쟤는 왜 경제위기를 예측도 못해?"라는 식으로 이어진다면 모든 학문이 유사한 짐을 짊어질 수 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인문학에 구체적인 처방을 내놓으라고, 그렇지 못하니 뜬구름 잡기라고 한다면 그것 역시 공정하지 못한 것 아니겠습니까?
이제 변호 대신 자아비판(?)을 해보자면... 경제학을 공부하면 기본적으로 normative하기보단 positive한 면을 배웁니다. 방법론을 엄밀히 한다는 점에서 나쁘게 보지 않지만, 결국 이것이 개별 학자들의 세계관을 고정시키는 측면이 있습니다. 물리학적인 세계관과 방법론을 원용한 것까지는 좋은데, 잘못하면 프로크루테스의 침대 꼴이 되기 십상이라는 것이지요. 다른 중요한 문제점은 경제학계의 에너지가 "보다 정밀한 모델의 구축"과 "경제학적 틀로 구체적 현상을 설명"하는데 많이 쓰인다는 것입니다. 케인즈와 같이 "천재의 시대"가 가고, 아주 작은 것들의 설명 내지 개선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겨진 시대의 단면이지요. 저는 이게 틀렸다고는 말할 자신이 없지만, 그만큼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명쾌한 답을 주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고, 이것은 분명 시정되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 구조적 담론을 제시하는 (주로 좌파경제학 하시는 분들이지요) 분들에게서는 (수리/계량적 방법을 기반으로 하는 입장에서 보기에) 체계성이 떨어지거나, normative한 부분이 너무 많이 보입니다. 창조적인 시각을 제시하기에는, 학계의 분위기도 그렇고 "직업상" 분위기가 주류나 비주류나 너무 빡빡하죠.
하지만 각각 저는 기여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경제학자들이 반드시 사회의 큰 틀을 설명해야 할 의무는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오히려 어설피 거대담론을 제시하는건 입과 귀만 피로하다고 생각하고요. 임금, 산업, 금융 등 이슈에서 구체적인 기준 하나를 잘 설정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도 경제학자들이 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또한 사회적 자본, 건강 불평등이 갖는 심리적, 문화적 함의 등 우리 사회의 보다 복합적인 측면을 보려는 시도들이 계속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래봐야 저는 아직 일개 학생이지만) 아직 대안적 시도들은 한계가 많습니다. 단적인 예로 스티글리츠가 MEW를 만든다고 하는데, 이것이 의미가 있으려면 역사적, 보편적 분석이 가능한 수준까지 가야 하는데 어느 정도까지 가능할지는 모르겠네요..
글이 너무 길었는데, 어쨌든 제 말씀은 이런겁니다. 경제위기로 인해 합리성 가정이 송두리째 날아가고 갑자기 행태경제학에 의존하려는 등의 행동 역시 그다지 생산적이지는 않다는 것이죠. 그런 움직임은 다른 대안에서도 곧 실망을 맛보게 될겁니다. 비판은 활발하게 이루어져야 하지만, "당연하게 여겨지는" 사실들을 발견하는 노력에도 정당한 credit은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스미스가 가졌던 혜안을 상당부분 잃은 것은 아쉽지만, 그것을 다시 얻는 방식이 반드시 옛날식이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지금 경제학자들의 몫이겠쬬.
시간이 있으시다면, 크루그만 등과 주류경제학자들의 논쟁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다른 것을 떠나 이런 논쟁 자체가 사실 상당히 부럽습니다. ^^
http://www.nytimes.com/2009/09/06/magazine/06Economic-t.html
http://modeledbehavior.com/2009/09/11/john-cochrane-responds-to-paul-krugman-full-text/

로쟈 2009-11-11 20:21   좋아요 0 | URL
네, 자세한 댓글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류동민 교수의 <프로메테우스 경제학>을 보니 문제의 지형이 짐작가능했습니다. normative한 맑스주의 경제학도 positive한 설명(수학적 논리에 기초한 설명)을 제시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려고 한다고 저자는 썼더군요. 거꾸로 이제 positive 위주의 경제학도 어떤 normative를 계획할 수 있는지 보여주면 좋겠습니다...
 

한겨레에서 박혜영 교수의 '시대를 읽는 문학' 칼럼을 옮겨놓는다. 미국 민주주의의 토대를 마련한 정치가 토마스 제퍼슨의 사상을 소개하고 있는데, 상업과 농업에 대한 그의 생각이 흥미를 끈다(나도 <로쟈의 인문학 서재>에서 '장사꾼들의 자유'와 '농부들의 자유'를 대비시켜서 자유의 문제를 다룬 바 있다). 하지만, 제퍼슨에 관한 책을 찾아보니 '썰렁'하다. <토마스 제퍼슨의 이해>(세종출판사, 2005) 정도인데 그나마 품절된 상태. 캠브리지 컴패니언 시리즈의 <토마스 제퍼슨>과 <게티즈버그 연설, 272단어의 비밀>(돋을새김, 2004) 등의 저자 게리 윌스의 <미국의 발명> 정도를 참고문헌으로 찾아놓는다. 윌스의 책은 번역되면 좋겠다.   

 

한겨레(09. 11. 07) '자본의 애완견’ 민주주의에 바치는 추도사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이해하는 게 갈수록 어려운 일이 되고 있다. 민주주의 사회인데 왜 용산참사의 피해자들이 법정에서 징역형을 선고받아야 하는지, 왜 농민들이 아우성을 치며 반대하는데도 4대강 사업으로 여의도의 13배가 넘는 옥토를 막무가내로 절단해야 하는지, 나아가 왜 납세자들의 허락도 없이 내년도 급식비 지원을 갑자기 중단하여 25만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당장 굶주리게 만드는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이른바 민주주의 시대인데 왜 데모스(demos)인 우리들은 이토록 무기력하게 되었는가? 우리 시대의 이 ‘불가사의’한 민주주의의 정체를 파악하는 데 미국 건국의 아버지인 토머스 제퍼슨의 경제사상은 중요한 실마리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미국 민주주의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너무나 ‘부도덕한’ 민주주의로 변질된 지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몬티첼로의 성인’으로 불렸던 제퍼슨은 미국의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제3대 대통령을 역임하며 건국 초기 미국 민주주의의 사상적 토대를 마련한 정치가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가 생각한 민주주의가 지금의 신자유주의와는 전혀 다른 경제체제를 전제로 한 것임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한 국가를 건설함에 있어 어떤 경제체제를 근간으로 할 것인가를 두고 제퍼슨은 이른바 ‘해밀턴주의자’로 불리던 중상주의자들과 대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상공업에 토대를 둔 강력한 선진국을 만들려던 초대 재무장관 해밀턴과 달리 초대 국무장관이었던 제퍼슨은 소규모 농업에 토대를 둔 도덕적인 민주국가를 꿈꾸었다. 왜냐하면 그가 보기에 농부들이야말로 가장 독립적이고, 자유로우며, 덕성스러운 시민이기 때문이다.  

그는 한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사회 속에서 살도록 되어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도덕성은 이 목적을 위해 형성되어야 한다. 사회와 관련하여 옳고 그름을 인식할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이런 도덕적 능력은 보고, 듣고,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 본성의 일부이다. 도덕적인 사례를 농부와 교수에게 던져보라. 전자가 후자보다 더 나은 판단을 하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농부는 교수처럼 인위적인 법칙에 이끌려 나쁜 쪽으로 빗나가지 않기 때문이다.” 땅을 돌보며 사는 농부가 땅에 대한 아무 감각도 없이 인위적인 논리만 만들어내는 교수보다 훨씬 도덕심이 뛰어나다는 제퍼슨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긴 어렵다. 사실 교수는 궤변만 늘어놓을 뿐 옳고 그름을 판단할 도덕능력이 없기 일쑤라는 것은 이미 지난번 총리지명 청문회에서도 다 드러난 일이다.

도덕적인 사회의 근간은 상업이 아닌 농업이라는 생각에서 제퍼슨은 해밀턴이 주장한 중앙은행 설립에도 반대하였다. 왜냐하면 은행이 설립되면 주기적인 인플레이션과 디플레이션을 통해 은행가들이 사람들의 돈을 다 털어갈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제퍼슨은 미국 독립의 정당성과 신생 민주국가의 정통성은 정치권력뿐 아니라 모든 경제권력도 인민에게서 나오는 그런 민주주의의 수립에 있다고 밝힌 적이 있다.  

“나는 상비군보다도 은행이라는 기관이 우리의 자유에 더 위험천만하다고 믿는다. 만약 미국 인민들이 자신들의 화폐발행권을 사설은행이 통제하도록 허용한다면 처음엔 인플레이션으로, 그다음에는 디플레이션으로, 은행과 은행 주변을 맴돌며 성장한 기업들이 모든 재산을 인민에게서 강탈하여 마침내 아버지들이 정복한 미 대륙에서 그 자식들은 눈떠 보니 노숙자 신세가 되도록 만들 것이다. 은행으로부터 화폐발행권을 빼앗아 원래 귀속되어야 마땅한 인민에게로 돌려주어야 한다.”  

주권재민과 함께 경세제민이 민주주의의 근간임을 적시한 제퍼슨의 생각이 옳았음은 지금도 반복되는 월가의 파생상품 남발과 미국 은행의 도미노 파산공포로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제퍼슨의 소망과 달리 경세제민의 핵심인 화폐발행권은 결코 인민의 손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달러 발행과 미국 통화정책을 쥐락펴락하는 연방준비은행이 경세제민보다는 상업적 이해관계에 철저할 수밖에 없음은 12개의 준비은행의 우두머리 격인 뉴욕준비은행의 대주주가 바로 체이스맨해튼과 시티은행이라는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제퍼슨이 은행을 반대한 이유는 국가건 개인이건 간에 은행의 핵심 기능이 바로 돈을 벌기 위해 빚을 늘리는 데 있기 때문이다. 국채건 사채건, 투자건 대출이건, 융자건 저당이건 간에 모든 빚은 원금 플러스 이자이기에 전체 통화량은 항상 화폐발행량보다 늘어날 수밖에 없다. 즉 이자로 인해 처음부터 인플레이션이 불가피한 것이다. 따라서 이런 사회에서는 경세제민이 아닌 ‘위기관리’가 경제의 핵심이 될 수밖에 없으며, 돈의 가치는 점점 떨어지는데도 항상 빌린 돈보다 더 많은 돈을 갚아야 하는 구조이기 때문에 개인이건 국가건 언제나 무기력하게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게 된다.  

빚에 토대를 둔 경제체제가 지속되는 한 사람들이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독립선언서’에 명시된 ‘자유’와 ‘생명’과 ‘행복’을 추구하며 살 수 없음은 물론이다. 이런 경제는 당연히 사회를 부도덕하게 만든다. 제퍼슨은 “공공 부채만큼 정부를 그토록 타락시키고, 국가를 그토록 부도덕하게 만들 동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부채는 외부의 어떤 적보다도 더 심각한 파멸을 내부에 야기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 우리는 미국과 마찬가지로 터무니없이 부도덕한 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 4년에 한 번씩 선거를 하고, 입법부, 사법부가 있다고 민주주의라고 할 수는 없다. 정치사상가 더글러스 러미스에 따르면 민주주의란 모든 권력의 집중을 막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자유시장의 창녀가 되지 않으려면 무엇보다도 경제 권력부터 사람들에게 되돌려줘야 할 것이다.(박혜영/인하대 교수·영문학) 

09. 11.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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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동 2009-11-07 15:21   좋아요 0 | URL
한국형 워싱턴 Statemanship은 없을까요? 실은 '한국형'이라는 말은 좋아하지 않지요.

로쟈 2009-11-07 17:28   좋아요 0 | URL
미국이 타산지적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미국 민주주의가 가지 않은 길...

게슴츠레 2009-11-09 13:08   좋아요 0 | URL
민주주의, 인민주권을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의 측면에서도 사유하고 실천하려는 노력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고진도 LETS에서는 통화발행권이 모두에게 있다며 이는 허울뿐인 인민주권의 실질화라고 말한 바 있죠. 물론 그 현실성은 의심스럽지만 인민주권을 물질적인 차원에서 보충하려는 시도는 평가되어야 할 몫이 분명히 있는 것 같습니다. 최근에 자비나 시혜가 아닌 권리로서의 보편적 복지, '기본소득'에 관련된 논의들이 나오고 있는데 이런 맥락에서 좀 주목받았으면 하는 개인적인 소망이 있습니다.

로쟈 2009-11-09 19:01   좋아요 0 | URL
네, 그래서 정치경제학이 필요한 것이죠. 사실 예전 교과서는 정치/경제라고 같이 묶여 있기도 했었지만.^^;
 

이번달 '고교독서평설'에 실은 갑론을박 꼭지를 옮겨놓는다.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다루고 있고, 연재의 마지막 회였다(역시나 분량상 생각만큼 자세하게 다루진 못했다). 지난 1일까지 산울림소극장에서 공연된 <고도를 기다리며>를 여러 여건상 보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기다리다 보면 또 기회가 오겠지...  

고교 독서평설(09년 11월호) 고독한 인간의 끝없는 기다림 

인간 존재의 본질에 질문을 던지는 부조리극

블라디미르 : 자, 갈까?
에스트라공 : 그래, 가자.
(그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아일랜드계 프랑스 작가 새뮤얼 베케트(1906~1989)의 대표작이자 가장 유명한 희곡인 <고도를 기다리며>는 이렇게 끝난다. 고도에 대한 두 주인공의 막연한 기다림으로만 채워진 이 연극은 고도라는 이름과 작가 베케트를 ‘20세기의 문학적 신화’로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정작 ‘고도’가 누구이며 그들의 ‘기다림’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여전히 모호하다.  

그렇다고 작가에게 의지할 수도 없다. ‘고도가 누구인가?’란 질문에 대해 베케트가 “내가 그걸 알았다면 작품에 직접 써넣었을 것”이라고 답한 일은 유명한 일화다. 분명 기이하면서도 한편으론 매력적인 이 작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번 시간에는 극의 구성과 성격 묘사가 불합리하고 낯설다는 의미에서 대표적인 ‘부조리극’으로 분류되는 <고도를 기다리며>를 읽으며, 작품이 품고 있는 수수께끼와 모호함을 풀어 보도록 하자.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는 작품인 만큼, 그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조금 깊어질 수 있는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자, 그럼 고도를 만나러 가 볼까?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기다림
먼저 ‘2막의 희비극’이란 부제가 붙은 이 작품의 간단한 줄거리를 소개한다. 1막에서는 두 주인공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등장하여 황량한 시골길에 서 있는 한 그루의 나무 아래서 고도를 기다린다. 둘은 고도를 기다리는 지루한 시간 동안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도둑 이야기, 갈보(남자들에게 몸을 파는 여자를 속되게 이르는 말) 집에 간 영국인 이야기 등을 하며, 다투기도 하고 이내 화해하기도 한다. 또한 나무에 목을 매달고 자살하자는 말까지 주고받지만, 결국 실행에 옮기지는 못한다. 

그런 그들 앞에 끈에 목이 묶인 채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가는 ‘럭키’와 채찍을 들고 그의 주인 행세를 하는 ‘포조’가 나타난다. 에스트라공은 럭키를 불쌍하게 여겨 손수건을 건네주려고 하나 오히려 발로 걷어차인다. 포조는 대화 상대가 되어 준 대가로 두 사람에게 럭키의 춤을 보여 주고 그가 생각을 말하게 한다. 그러나 럭키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장황한 연설을 늘어놓을 뿐이다. 포조와 럭키가 무대에서 퇴장하고, 한 소년이 나타나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에게 고도가 오늘 오지 않고 내일 올 거라는 소식을 전한다. 

2막은 다음 날, 같은 시간, 같은 장소로 설정돼 있다. 나무에 잎이 조금 돋은 게 달라졌을 뿐이다. 블라디미르는 활기차게 등장하여 기이한 노래를 부르고, 에스트라공은 풀이 죽은 상태로 등장한다. 블라디미르가 그를 위로하면서 어제의 일을 화제 삼아 보지만, 에스트라공은 포조와 럭키를 기억도 하지 못한다. 1막에서 떨어진 럭키의 모자를 블라디미르가 발견하고, 두 사람은 서로의 모자와 럭키의 모자를 빠르게 바꿔 쓰는 놀이를 한다. 

그들 앞에 다시 포조와 럭키가 등장한다. 포조가 럭키를 잡아끄는 끈의 길이가 더 짧아졌다. 그 사이 포조는 장님이 되었고, 럭키는 벙어리가 되어 있다. 포조와 럭키는 넘어지고, 포조는 살려 달라고 소리친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가 그를 도와준다. 블라디미르는 포조를 일으켜 세운 뒤 어제 일을 물어보는데, 포조 역시 전날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고, ‘언제부터 장님이 되었느냐’란 질문에는 버럭 화까지 낸다. 포조와 럭키가 퇴장하자 소년이 다시 등장한다. 소년 또한 블라디미르에게 어제의 일을 모른다고 하면서 1막에서와 똑같이 고도는 오늘 오지 않고 내일 올 거라는 소식을 전한다.    



구원에 대한 기대와 절망
이렇듯 2막은 1막의 상황을 대동소이하게 반복하며 두 사람의 기다림이 지속될 것임을 암시한다. 베케트는 앞에서 나온 부제를 통해 이 반복적인 기다림, 또는 기다림의 반복을 ‘희비극’으로 연출할 것을 요구했다. 이 작품의 비극성이 주로 기다림의 부조리한 본질과 말의 한계 그리고 삶의 유한성 등과 같은 무거운 주제와 연관된다면, 희극성은 부랑자, 광대 같은 인물들의 모양새 및 그들의 서커스적인 행동과 관련이 있다. 무거운 주제와 가벼운 표현 기법 사이의 이질적인 결합이 이 연극의 주된 정조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더불어 이 희비극성은 ‘기다림’ 자체가 갖는 정조이기도 하다. 기다림은 시간의 흐름을 가장 직접적으로 체험하도록 요구하지만, 동시에 그 시간을 무의미한 것으로 체감하게 한다. 만남이란 사건이 지속적으로 유예된다면 기다림이 갖는 무의미함도 그만큼 커질 것이다. 그렇다면 <고도를 기다리며>는 그 무의미함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작품일까?  

<고도를 기다리며>를 단순히 ‘부조리한 기다림’의 드라마로만 간주하는 것은 작품에 등장하는 숱한 기독교적 상징을 간과하는 것이다. 아일랜드의 개신교 가문에서 태어난 베케트는 자신이 기독교 문화권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자연스레 기독교적 모티프를 많이 활용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가 이 작품에서 ‘구원’이라는 전통적인 주제를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은 무시하기 어렵다.  

사실 <고도를 기다리며>는 구원에 대한 기대와 절망의 ‘베케트식 형상화’로도 읽을 수 있다. 그는 블라디미르의 입을 빌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두 도둑의 이야기를 작품에 직접 도입하고 있기도 하다. 베케트는 이 작품의 주제를 묻는 질문에 아우구스티누스의 다음 문장을 자주 인용했다. “절망하지 마라. 도둑놈 중 한 명은 구원받았다. 기대하지 마라. 도둑놈 중 한 명은 저주받았느니라.” 관념들을 믿지는 않지만 관념의 형상화에는 늘 매료된다고 하면서, 베케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이 말에 관념이 놀랄 만큼 잘 형상화되어 있다'고 평했다.   

1막 서두에서부터 늘 ‘마지막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인물로 소개되는 블라디미르는 두 도둑놈 가운데 하나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두고 “확률치고는 괜찮지.”라고 말한다. 구원받을 가능성이 반반이니까 나쁜 건 아니라는 얘기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확실한’ 확률이 아니라는 데 있다.

블라디미르 :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어. 복음서를 쓴 네 사도 가운데 단 하나만이 그때의 상황을 그런 식으로 전하게 됐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네 사람이 다 그 자리에 있거나 어쨌든 그 근처에 있었을 텐데 말이야. 그런데 그중 한 사람만 구원받은 도둑놈 얘기를 써놓았거든. (사이) 이봐, 고고, 가끔은 맞장구를 쳐 줘야 할 것 아냐?
에스트라공 : 그래. 아주 아주 흥미롭네.
  
블라디미르 : 넷 중에 한 사람만 말이야. 나머지 셋 중에서 둘은 숫제 언급도 없고, 나머지 한 사람은 그 두 도둑놈이 욕설을 퍼부었다는 거야.

여기서 ‘네 사도’란 4대 복음서의 저자를 말한다. 그런데 ‘둘은 언급조차 없고, 나머지 한 사람은 그 도둑놈이 욕설을 퍼부었다고 했다.’는 블라디미르의 말과는 달리, 실제로 <요한복음>에서는 추가적인 언급 없이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못 박혔다고 기술되었으며,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두 도둑이 모두 예수를 비웃고 모욕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오직 <누가복음>에서만 도둑 한 명이 예수를 모욕하는 다른 한 명을 꾸짖으면서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예수에게 간청하자, 예수는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답한다. 그의 영혼을 구원하리라 약속한 것이다. 이 약속은 물론 ‘복음(福音)’이라는 말뜻 그대로 ‘좋은 소식’이다. 

다시 말해, 블라디미르의 의문은 ‘네 명의 사도 가운데 한 사람만 구원받은 도둑 얘기를 하고 있는데도, 왜 나머지 세 사람의 얘기는 제쳐 놓고 그 사람의 말만 믿느냐’는 것이다. 에스트라공은 사람들이 다 바보라서 그렇다고 대답한다. 산술적으로 네 명의 사도 가운데 한 사람만 반반의 구원 가능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므로,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는 확률은 절반이 아니라 8분의 1, 곧 12.5%가 된다. 그리고 물론 이는 ‘썩 괜찮은 확률’이 아니다. 이것이 블라디미르의 근심이자 고통이며, <고도를 기다리며>를 이끌고 가는 작가의 문제의식이다.

고고와 디디, 인간이란 종족의 대표자
절반의 구원 가능성이 보통의 사람들, 곧 바보들이 갖는 희망이고 기대치라면,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두 ‘광대’의 구원은 훨씬 낮은 기대치를 갖는다. 따라서 그에 대한 기다림 또한 헛된 것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그 기다림을 지속한다면, 그것은 합리적인 계산이 아니라 ‘부조리’에 근거한 것이다. 우리가 어떠한 삶을 살든지 간에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던 두 도둑처럼 모두 지옥에 떨어진다면 삶은 의미를 갖기 어렵다. 게다가 영구한 시간에 비하면 삶의 유한함은 ‘순간’에 불과하지 않은가. 

포조의 말을 빌리면, “어느 날 우리는 태어났고, 어느 날 우리는 죽을” 운명이다. 태어남과 죽음 사이의 거리가 ‘순간’에 불과하다면 삶과 죽음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게 된다. “여자들은 무덤 위에 걸터앉아 아이를 낳는 거지. 해가 잠깐 비추다간 곧 다시 밤이 오는 거요.”라는 포조의 대사는 이러한 세계관을 집약하고 있다.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볼 때 구원이 없다면 삶의 지속은 무의미하다. 만남이 실현되지 않는다면 기다림이 무의미한 것과 마찬가지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더는 버틸 수가 없다며 자꾸만 자살을 꿈꾸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2막의 후반부에서 두 사람의 대사는 이 문제를 간결하게 정리해 준다.

에스트라공 : 이 지랄은 이제 더 못하겠다.
블라디미르 : 다들 하는 소리지.
에스트라공 : 우리 헤어지는 게 어떨까? 그게 나을지도 모른다.
블라디미르 : 내일 목이나 매자. (사이) 고도가 안 오면 말이야.
에스트라공 : 만일 온다면?
블라디미르 : 그럼 구원받는 거지.


이 대목에서 고도가 갖는 상징적 의미는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능하다. ‘고도’가 누구인지는 확정할 수 없더라도 ‘삶의 구원을 가능하게 해 주는 그 무엇’이라고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구원이 없는 삶, 곧 고도와의 만남이 이루어질 수 없는 삶은 차라리 목을 매다는 것이 더 나은 삶이다. 물론 더 좋은 것은 ‘아예 태어나지 않는 일’일 것이다. 적어도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생각은 그렇다. 다만 그들을 붙들어 매는 것은 희박한 가능성에 대한 기대다.  

애초에 막이 오르면 에스트라공이 낮은 돌무덤에 앉아 구두를 벗으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결국 포기하면서 내뱉는 첫 대사는 “되는 일이 없어(Nothing to be done.).”다. 이 대사는 “더는 못 하겠어”란 뜻도 갖는다. 반면에 블라디미르는 이렇게 중얼거린다. “평생 그런 생각을 멀리하려고 애써 왔지. 블라디미르, 잘 따져 봐, 아직 다해 본 건 아니잖아, 라고 말하면서 말이야.” 

여기서 “되는 일이 없어.”라는 체념, 혹은 “더는 못 하겠어”라는 포기 그리고 “아직 다해 본 건 아니잖아.”라는 분발의 촉구는 삶에 대한 두 가지 태도를 대표한다. 더불어 무대 위의 두 주인공은 블라디미르의 말대로 “인간이란 종족의 대표자”이기도 하다. 마치 아벨과 카인 그리고 예수 곁의 두 도둑이 인간의 대표자인 것과 마찬가지다. 덧붙이자면, 이 작품에 등장하는 블라디미르는 러시아식 이름이고, 에스트라공은 프랑스식 이름이며, 포조와 럭키는 각각 이탈리아와 영어식 이름이다. 이름에서부터 이들은 ‘인류’라는 대표성을 갖는다. 

‘8분의 1’의 기대와 ‘8분의 7’의 절망
그런데 삶에 대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각기 다른 태도는 과연 구원에 대한 판정을 가능하게 할 만큼 ‘의미 있는 차이’일까? 서로를 ‘디디’와 ‘고고’라 부르는 이 단짝은 여러모로 다르긴 하다. 블라디미르는 이성적이고 현실적이며, 에스트라공은 자신이 ‘시인’이었다고 떠들어 댄다. 블라디미르는 끈기가 있는 반면에 에스트라공은 비약을 잘하고, 블라디미르는 과거의 사건들을 잘 기억하지만 에스트라공은 모두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는 블라디미르는 입에서, 에스트라공은 발에서 냄새가 나는 것처럼 사소한 차이로 수렴된다. 1막과 2막 끝에서 두 사람이 모두 “가자.”라고 얘기하면서도 가만히 있음으로써 ‘간다’와 ‘가지 않는다’라는 행동의 차이를 무화(無化)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다. 1막에서 ‘주인과 하인’으로 등장한 포조와 럭키조차도 2막에서는 ‘장님과 벙어리’가 되어 등장하면서 신분적 차이가 흐릿해지며 그들을 연결해주는 끈의 길이도 짧아진다. 성취되지 않는 기다림 속에서 모든 차이는 그 의미를 잃게 된다. 

이 연극에서 가장 긴장되는 대목은 2막에서 누군가 오는 것을 보고 고도로 착각한 블라디미르가 환호하며 흥분하는 장면이다. “우리는 구원받았다!”라 만세를 부르는 블라디미르와 대조적으로 에스트라공은 “난 지옥에 떨어졌군!”이라며 낙담한다. 하지만 결국 아무도 오지 않으며 두 사람은 다시 화해하며 서로 껴안는다.   

결국 두 사람의 운명은 아무런 차이도 갖지 않는다. 이렇듯 그들의 차이를 지우고, 그들의 탄원을 공허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다시 산술적으로 답하자면, 그것은 구원에 대한 ‘8분의 1’의 기대와 ‘8분의 7’의 절망이다. 이 부조리한 배합 비율이 <고도를 기다리며>를 현대인의 희비극적인 자화상으로 만든다. 

09. 11. 07.  



P.S. 베케트의 드라마와 관련하여 가장 요긴한 참고문헌은 그의 연출노트이다. 파버앤파버 출판사에서 내는 <새뮤얼 베케트의 연출 노트(The Theatrical Notebooks of Samuel Beckett)> 시리즈는 네 권으로 구성돼 있는데, 제1권이 <고도를 기다리며>(1993)이다. 1부에서는 본문과 자세한 주석, 그리고 2부에서는 1975년에 베케트가 직접 연출한 베를린 실러-극장 공연의 연출노트를 사진판으로 수록하고 있다. 오래전 영풍문고 양서부에서 보았던 책인데, 이번에 도서관에서 대출해 읽어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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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조부 2009-11-07 2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쉽네요. 이 책에서 선생님 글 읽는게 일상의 낙이었는데 말이죠. 이제는 이 잡지에서는

샘 글을 못 보는군요

로쟈 2009-11-07 21:59   좋아요 0 | URL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데, 여러 가지 일들 때문에 매번 지각원고를 보내서 편집자에게 좀 미안한 연재였습니다. 좀더 여유가 있을 때 50매짜리 연재를 해보면 좋을 거 같다는 생각은 하지만. 그래도 일이 하나 준 만큼 마음은 편합니다.^^;

비로그인 2009-11-08 0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함께 읽으면 좋을 거 같은 책 "인간 그 속기 쉬운 동물"

로쟈 2009-11-08 10:55   좋아요 0 | URL
자기 자신에게 속는 건지도 모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