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강의가 끝나고 집으로 오는 좌석버스에서 내일자 한겨레를 읽다가 점찍어둔 기사를 옮겨놓는다. 포퓰리즘에 관한 두 권의 책이 근간 예정이라는 걸 알려준다.   



한겨레(10. 03. 18) 포퓰리즘 민주주의 ‘병리현상’ 아닌 ‘필수요소’ 

4대강 포퓰리즘, 세종시 포퓰리즘, 교육 포퓰리즘, 등록금 포퓰리즘, 무상급식 포퓰리즘…. 무슨 말이든 ‘붙이는 족족’ 언표화돼 인구에 회자되니, 말 그대로 ‘언어의 인플레’가 따로 없다. 정견이 다른 상대방을 향해 언제든 ‘포퓰리스트’란 화살을 날려보낼 준비가 돼 있다는 점에서도 집권당과 야당, 좌파와 우파가 다르지 않은데, 이것이 한국사회에서 갖는 의미는 비교적 명확해 보인다. 포퓰리즘이란 상징이 좌파를 공격하기 위한 우파의 전유물이던 시대는 지났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한국에서 포퓰리즘은 여전히 ‘선동’과 ‘중우정치’, ‘대중영합주의’라는 부정적 정치현상을 일컫는 비난의 수사, 경멸의 언어로 통용된다



눈여겨볼 대목은 포퓰리즘 이론의 진원지인 서구 학계가 최근 포퓰리즘을 현대 정치의 병리적 이상 징후로만 바라보던 관점에서 벗어나, ‘현대정치의 일반화된 특성’이자 ‘민주주의의 필수불가결한 구성요소’란 차원에서 새롭게 조명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는 점이다. 이런 흐름을 주도하고 있는 학자가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이론>으로 유명한 아르헨티나 출신의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자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오른쪽 사진)와 멕시코 출신의 소장 정치학자 벤자민 아르디티(왼쪽)인데, 포퓰리즘을 재해석한 이들의 문제작인 <포퓰리즘의 근거에 관하여>와 <자유주의 가장자리의 정치>가 각각 후마니타스와 그린비 출판사에서 출간을 기다리고 있다. 

이들의 이론이 주목받는 것은 ‘인민에 대한 호소’나 ‘선동적 지도자에 의한 감성 자극 정치’를 포퓰리즘의 특성으로 규정해온 종래의 시도들이 20세기 말 본격화 된 정치지형의 변화 때문에 설득력을 잃게 된 상황과 무관치 않다. 냉전이 해체되고 좌·우파의 구분이 모호해지면서 대부분의 서구 정당은 전통적인 계급노선을 포기하고 국민 전체를 상대로 지지표를 구하는 대중주의 전략을 취하게 됐는데, 이에 따라 정책이나 논리보다는 수사와 이미지로 유권자의 감성을 움직이는 정치가 세력과 진영을 막론하고 각광을 받는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실제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 국면에서 오바마 진영이 취한 선거 전략이나 이후 금융위기 수습 국면에서 오바마 행정부가 펼친 정책들 역시 전형적인 포퓰리즘 양상을 띠고 있다는 데 이견을 다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렇다면 라클라우는 대체 포퓰리즘을 어떻게 정의하는가. 그의 포퓰리즘론은 “모든 정치는 기본적으로 포퓰리즘”이란 진술 안에 집약돼 있다. 그가 포퓰리즘을 정치와 동일시하는 것은, 포퓰리즘이 주어진 질서에서 소외되거나 배제된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그들을 새로운 정치적 주체로 구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기 때문이다. 요컨대 좌파든 우파든 그들이 추구하는 정치는 기존의 합의구조에서 밀려난 다양한 인민의 요구를 관통하는 통일된 슬로건을 제시하고, 이를 통해 그들을 기존 질서에 대항하는 정치 주체로 맞세우는 전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다를 게 없다는 얘기다. 이런 포퓰리즘의 세 가지 유형으로 라클라우는 아르헨티나의 페론주의와 미국 인민당, 터키의 케말 파샤를 꼽는데, 이들은 각각 좌와 우, 중도파의 포퓰리즘을 대변한다.

책을 번역한 임승준 인권의학연구소 연구원(정치학 박사)은 “라클라우의 저작은 대표작인 <사회주의와 헤게모니 전략> 이후 자신의 오랜 이론활동을 마무리하는 작업으로, 소외된 대중을 정치적 주체로 구성하는 포퓰리즘이 일탈이나 비정상이 아니라 모든 정치 행위를 관통하는 근원적 특성임을 보여주는 중요한 저작”이라고 평가한다. 



반면 아르디티는 포퓰리즘을 ‘민주주의의 증상’으로 이해한다. 여기서 ‘증상’이란 개념은 프로이트에게서 빌려온 것인데, 자아의 형성을 위한 본능의 억압과정에서 만들어지는 ‘대리표상’이자 ‘내부의 주변부’ 같은 것이다. 요컨대 포퓰리즘이란 민주주의에 이질적인 어떤 것이나 적대적 타자가 아니라, 민주주의에 속하면서 동시에 민주주의에 불안과 소요를 일으키는 ‘민주주의의 내적 주변부’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아르디티의 판단 근거는 민주주의에 내장된 이중성이다. 민주주의는 일상적으로는 정치인·관료 등 전문가 집단에 의해 관리되고 운영되지만 동시에 선거라는 대중의 직접 참여를 통해 자신의 정당성과 작동 근거를 확보해야 한다. 이 때문에 민주주의는 정치의 영역 안으로 주기적으로 대중의 개입을 초래하게 되는데, 이런 이중성이야말로 포퓰리즘의 존재론적 뿌리가 된다는 게 아르디티의 견해다. 따라서 민주주의가 이 두 측면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포기하지 않는 한, ‘인민 의지의 직접적 표현에 대한 열망’으로서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에서 결코 사라질 수 없다고 아르디티는 단언한다.

그러나 이들의 포퓰리즘 재해석 역시 약점은 있다. 진태원 고려대 연구교수는 “라클라우의 재해석은 포퓰리즘을 정치 일반과 무리하게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며 “이 경우 포퓰리즘이 아닌 것은 정치가 아니라거나, 좌파의 포퓰리즘이 극우파의 포퓰리즘(심지어 파시즘)과 아무런 차이도 갖지 않는다는 결론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고 꼬집는다. 하지만 이런 약점에도 불구하고 ‘포퓰리즘 다시보기’가 오늘의 변화된 지형에서 갖는 정치적 의미는 반감될 수 없다고 진 교수는 말한다. 가난한 이들을 정치의 영역에서마저 추방하고 배제하는 신자유주의의 ‘반(反)정치’가 지속되는 한 포퓰리즘에 드리운 어둠과 비합리의 그늘을 걷어내려는 사상적·이론적 신원작업 역시 꾸준히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이세영기자) 

10. 03. 17.  

P.S. 라클라우의 <포퓰리즘의 근거에 관하여>는 <레닌 재장전>(마티, 2010)에 실린 지젝의 글 '오늘날 레닌주의적 제스처란 무엇인가: 포퓰리즘의 유혹에 맞서'에서 자세하게 검토/비판하고 있어서 개인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는 책이다(국내서로는 서병훈 교수의 <포퓰리즘>(책세상, 2008)이 있다). 다지원에서의 강의도 있고 해서 이달 안으로 출간되면 좋겠다. 참고로, 기사에서 오른쪽 인물사진은 '에르네스토 라클라우'가 아니라 '리처드 로티'다. 비슷하게 보여서 담당자가 혼동한 모양이다. 아래가 라클라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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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자유민주주의를 옹호하는 법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3-19 11:53 
    지방선거를 앞둔 때문인지 정치 관련서가 많이 나오고 있는데, 정치인들이 홍보용 책자도 있지만 정치이론서나 비평서도 드물지 않다. 인터넷 논객으로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는 안병길 박사의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방법>(동녘, 2010)도 그런 범주에 속한다. '대통령도 모르는 자유민주주의 바로 알기'가 책의 부제인데, 대략 '자유민주주의를 옹호하는 법'으로도 읽힌다. 포퓰리즘에 관한 참고사항이 있어서 메모해두
 
 
비로그인 2010-03-18 0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빌딩 숲 콘크리트 바닥에 꽃들이 참 많이도 뒤엉켜 피었네^^ 참! 멋진 사진..

로쟈 2010-03-18 09:21   좋아요 0 | URL
그런 시절이 있었죠...

푸른바다 2010-03-18 2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 새번역본은 작년 출간 예정이었는데 왜 안나오는 지 모르겠군요.^^ 그 이후 많은 논의의 바탕이 된 '현대의 고전'인 것 같은데... 번역본 기다리다 지쳐서 원서라도 사서 볼까 고민 중입니다^^

로쟈 2010-03-19 10:42   좋아요 0 | URL
네, 나온다던 책 나오지 않고, 네요...

비로그인 2010-03-19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혹시,라클라우의 사진으로 업로드하신 것이,실은 리차드 로티의 그것이 아닌지요?^^;아무리 봐도 로티의 사진으로 보여서 구글에서 라클라우의 이미지를 검색해보니 아뿔싸! 둘이 너무도 닮은 얼굴이네요ㅠ 지나가는 길에,외람되이 로쟈님의 페이퍼에서 '옥의 티'하나 발견하여 폭로(?)하고 갑니다^^;

로쟈 2010-03-19 10:42   좋아요 0 | URL
한겨레 기사에도 제가 올려놓은 사진으로 수정돼 있던데요. 외모는 비슷하지만 인상이 좀 다릅니다...

비로그인 2010-03-19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가요? 다시 보니까 그런 것도 같네요. 라클라우가 좀 더 꼬장꼬장하게 생긴 것같은^^;모쪼록 로쟈님 환절기에 감기 조심하시고...참 그런데 로쟈님의 빼어날 지젝 번역은 단행본으로 언제쯤 볼 수 있을까요? 무척이나 고대하고 있습니다만^^

로쟈 2010-03-20 09:16   좋아요 0 | URL
번역은 저도 고대하고 있지만 일들의 쓰나미 때문에 좀 미뤄지고 있습니다.--;

하영-이룰수없는아련한첫사랑- 2010-03-19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같은 세태에서는 포풀리즘이 오히려 필요하다고 느껴지는 건 왜일까요? 누가 우리 편 좀 들어줬으면 좋겠다(?)는 느낌 말입니다.^^
내용과 관계없지만 늘 궁금했던 거 여쭙니다. 저희 같은 지식 없는 사람들이야 여기나 파란 여우님 같은 분들의 권유(?)로 책을 선택하면 되는데...(값없이 얼마나 큰 일을 해주시는지~믿을만한 분들의 소개가 있어야 안심하고 책을 집어들 수가 있게 되어 버렸으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읽을 책을 고르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워낙 부지런하신 분들이라...다 따라가려면 직업도 버리고 책속에서 헤엄치는 즐거운 삶이라야 가능할 듯합니다.) 이전부터 있던 책들,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번역서, 다양한 장르의 책들이 있는데 로쟈님은 어떤 기준으로 책을 선택하고 추천(-제가 여기서 대부분의 책을 추천받고 있기에...)하시는지요^^ (-믿을 만한 작가, 번역가, 출판사의 삼박자이면 금상첨화이겠요-)

로쟈 2010-03-20 09:17   좋아요 0 | URL
관심도서는 언론의 리뷰와 제 관심사에 따라 고르고 있습니다. 일률적인 기준이 있는 건 아니고요. 그냥 오래하다 보면 생기는 '감'입니다.^^;

하영-이룰수없는아련한첫사랑- 2010-03-20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그 단순하지 않을 감...부러울 따름입니다.^^
 
로쟈와 함께하는 인문학 여행

한겨레교육문화센터의 제안에 따라 5월에도 '로쟈와 함께하는 인문학 여행' 강좌를 꾸리게 됐다(http://www.hanter21.co.kr/jsp/huser2/educulture/educulture_view.jsp?category=academyGate7&tolclass=&searchword=&subj=F90754&gryear=2010&subjseq=0001). 어제 낮에 협의를 했는데, 바로 공지가 올라왔다. 이번엔 '현대철학' 두번째 편으로 데리다부터 가라타니 고진까지 다섯 명의 철학자에 대한 '입문' 강의다(철학자는 한겨레측에서 선정했고, 교재는 내가 골랐다). 첫번째 강의의 경험을 살려서 조금 더 편하게 접근할 수 있는 책들들 골랐다. 현대철학자들이 혼자 읽기 버겁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참고하시길 바란다. 이번 강의는 5월 6일부터 5주간 매주 목요일 저녁 7:30-9:30에 진행된다.   

1. 5월 6일_ 데리다와 해체철학 : 니콜라스 로일, <자크 데리다의 유령들>(앨피, 2007) 



2. 5월 13일_ 라캉의 정신분석학 : 지젝, <HOW TO READ 라캉>(웅진지식하우스, 2007) 



3. 5월 20일_ 푸코와 지식의 고고학 : 사라 밀즈, <현재의 역사가 미셸 푸코>(앨피, 2008) 



4. 5월 27일_ 아감벤과 호모 사케르 : 아감벤, <목적 없는 수단>(난장, 2009) 



5. 6월 3일_ 가라타니 고진의 트랜스크리틱 : 가라타니 고진, <정치를 말하다>(도서출판 b, 2010) 

 

10. 03.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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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3-18 0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호! 좋아요.. 4월엔 세계문학작품을 더 읽고 이강좌 부터 본격적으로 이 책들을 파야겠어요. 지속적으로 공부에 불을 지필수 있게 해주어 고맙습니다.

로쟈 2010-03-18 09:21   좋아요 0 | URL
아, 그런 의미의 '뻬치카'이셨군요.^^

사과나무 2010-03-22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와 함께 하는 인문학 여행>이라....재미있기도 하고, 어렵기도 하겠습니다. 몸이 한국 땅에 있지않은 것이 아쉽군요. 올려주신 책들을 구해서 읽어야겠군요. 좋은 책소개와 서평 글들, 저를 포함한 여러 사람에게 도움이 될것입니다.
 

중앙대학교 독어독문학과와 독일연구소가 주최하는 학술 콜로키움 '중앙게르마니아'의 이번 학기 일정을 소개한다(http://ikdk.net/germania.html). 이번주 3월 19일(금)부터 3주에 한번 꼴로 진행이 되는데, 세번째 순서가 슬라보예 지젝이고 나는 지난 겨울에 발표자로 초청을 받았다. 일정을 확인하기 위해서 중대신문의 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중대신문(10. 02. 28) 2010 학내 콜로키움 프리뷰 : 중앙게르마니아  

독어독문학과와 독일연구소가 11회에 거쳐 공동으로 기획 시행해온 <중앙게르마니아>가 올해는 21세기 담론 지형에 대해 탐구한다. 류신 교수(문과대 독어독문학과)는 “과거에 포스트모더니즘이 폐기한 진리들인 ‘역사’, ‘정치’, ‘윤리’ 등을 살아있는 현역 학자들의 책들로 재조명 하려고 한다” 고 말하였다.   

올해 첫번째 일정인 3월 19일엔 프랑스 학자인 자크 랑시에르의 『감성의 분할』이 예정되어 있다. 『감성의 분할』은 부재로 “미학과 정치”를 내세우는데, 이는 랑시에르가 『무지한 스승』에서 얘기한 것과 유사하다. 랑시에르는 『무지한 스승』에서 현재 교육의 문제점을 교육이 아닌 정치로 삼았었다. 이와 유사하게 예술에서도 정치와 연관시켜서 설명한 책이 바로 감성의 분할이다. 자크 랑시에르의 『감성의 분할』은 경희대 이택광 교수가 진행할 예정이다.   

그리고 4월 9일엔 이탈리아의 학자인 조르조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가 준비되어 있다. 『호모 사케르』는 『감성의 분할』과는 다르게 생명과 정치에 대하여 풀어내는 책이며 연세대 박진우 교수가 진행한다.   

그리고 4월 30일에는 동구권의 지성이라 불리는 슬라보예 지젝의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로 선택되었다. 지젝은 라캉과 마르크스 그리고 헤겔을 접목한 학자로서 책 제목의 ‘대의’는 마르크스를 지칭하며 한림대 이현우 교수가 진행할 예정이다.   

5월 14일에는 노르베르트 볼츠의 『구텐베르크 은하계의 끝에서』로 정해졌다. 『구텐베르크 은하계의 끝에서』는 유현주 교수(첨단영상대학원 영상예술학과)가 맡는다. 유현주 교수는 “볼츠는 문자매체와의 결별과 동시에 미디어믹스 시대가 왔다고 이야기한다. 볼츠의 글을 택한 이유는 볼츠가 현대시대를 매력적으로 해석하였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마지막 6월 4일에는 한스 요아스 『행위의 창조성』으로 막을 내린다. 『행위의 창조성』은 현 사회과학계의 합리주의적 행위이론과 진화론적 근대화 모델에 대한 깊이 있는 비판을 담은 저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중앙게르마니아는 대학사회에서 인문학의 위상이 낮아진 현실을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동시에 인문학의 위기를 극복하겠다는 취지로 만들어졌다. 콜로키움이란 ‘함께 모여 이야기한다’는 라틴어 콜로키움의 어원적 의미에 따라 지적, 사회적 지위와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이 동등한 자격으로 함께 모여 이야기하는 자리라는 뜻이다. 2000년도 당시엔 콜로키움이라는 단어는 유럽 대학들에서는 상당히 익숙한 반면 국내대학에서는 심포지엄이나 학술대회로 일축되었다. 이로 인해 학생들의 참여가 낮아지고 결국 인문학이 위기를 맞게 되었다고 판단한 독어독문학과와 독일연구소에서는 콜로키움이라는 단어를 필두로 지정 토론자 없이 참석자 모두가 동등한 자격으로 담론 생산의 현장에 직접 참여하는 ‘끝장 토론’의 문화를 만들어 냈다. 중앙게르마니아의 성공은 다른 학과와 다른 대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중앙대 안에서는 영문과 사회학과 등에 학부생이 참여하는 정기 콜로키움이 생겼고, 서울대 독일어문화권 연구소도 2005년부터 ‘현대를 다시 읽는다’는 주제로 관악 블록세미나를 시작했다. 중앙게르마니아의 목표는 학생들에게는 생소한 인문학에 대해서 깊이 있고 즐겁게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학생들에게 지적 자극을 주고, 이를 바탕으로 국내 대학들에서 인문학이 살아 숨쉬는 풍토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10. 03. 15. 

 

P.S.중앙게르마니아 콜로키움의 결과물은 책으로 묶인 것도 있다. <현대문화 이해의 키워드>(이학사, 2007) 같은 경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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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민주주의에서 신의 폭력으로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5-01 00:13 
    엊저녁에 중앙게르마니아 강좌 강의가 있었다. '21세기 담론의 지형'이란 전체 주제에서 내가 맡은 건 슬라보예 지젝의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그린비, 2009)였다. '슬라보예 지젝과 '잃어버린 대의'에 대한 옹호'라는 발표문 가운데, 마지막 절은 <민주주의는 죽었는가?>(난장, 2010)에 실린 지젝의 글 가운데 후반부를 발췌한 거였다. 따로 주석을 붙일 만한 시간이 없었지만, 그냥 읽어도 대충 지젝의 주장
 
 
노이에자이트 2010-03-16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림대 교수로 소개되어 있는 게 눈에 들어옵니다.

로쟈 2010-03-16 23:23   좋아요 0 | URL
앞에 '연구'를 빼먹었네요...

hikrad 2010-03-16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한림대에 오신 줄 몰랐네요. 춘천에도 오시나요?

로쟈 2010-03-16 23:23   좋아요 0 | URL
가끔 갑니다.^^

2010-03-19 00: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19 10: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0-03-18 0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반인도 참석가능한 거예요?

로쟈 2010-03-18 09:21   좋아요 0 | URL
대학내 행사이지만 제한은 없는 걸로 알아요.^^

비로그인 2010-03-19 0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마.. 이아가씨 스토커아니야? 하시는 것 아니겠죠?

로쟈 2010-03-19 10:43   좋아요 0 | URL
흠, 강연 스토커는 환영합니다.^^
 

이번주 교수신문에 실은 칼럼을 옮겨놓는다. 원래는 지난주에 나갔어야 할 칼럼이지만 기한을 못 맞춘 탓에 한 주 늦춰졌다(그러니 이번주 원고로는 가장 빨리 내지 않았을까 싶다). <리영희 프리즘>(사계절, 2010)을 읽은 소감을 몇 마디 적었다.   

교수신문(10. 03. 15) [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사상의 오빠’  

리영희 선생의 팔순을 기념한 책 『리영희 프리즘』(사계절, 2010)을 읽고 지난 시대 ‘사상의 은사’를 다시금 생각해볼 기회를 가졌다. 어떤 은사였던가. 강준만 교수는 예전에 이렇게 적었다. “멀쩡하던 대학생들이 리영희의 책만 읽으면 충격을 받고 이상하게 변해갔다. 자신과 가족을 위해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한 공부에만 몰두하겠다던 ‘청운의 꿈’을 내던지고 진실과 인권과 상식의 가치에 입각해 이 사회와 나라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선생의 ‘한국현대사의 길잡이’ 역할은 주로 70년대 후반, 혹은 80년대 초반의 학생·청년들에게 해당하는 얘기였다. 『전환시대의 논리』(1974)가 해방 이후 한국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의 하나로 꼽히지만, 80년대 후반 학번인 나에겐 이미 ‘지나간’ 책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리영희와 책읽기’를 다룬 천정환 교수에 따르면, 그것은 1980년대 중반 이후 달라진 대학가의 독서문화와 관련된다. 『강철서신』이나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 같은 젊은 세대의 책이 대학가를 주름잡던 시기여서 “리영희 같은 경험 많고 나이 든 스승을 경유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는 진단이다. 여느 80년대 대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세미나 세대’였던 나도 학회나 세미나 자리에서 읽은 책은 『철학에세이』였고 『페레스트로이카』였다. 게다가 ‘교조주의자’들이 많았던 80년대에 리영희는 ‘수정주의자’로 내비치기도 했다는 전언이다.   
 
안수찬 기자가 들려주는 1990년대 후반의 풍경도 다르지 않다. 1997년 겨울 한겨레신문의 수습기자들이 사내 교육으로 리영희 선생의 강의를 들었지만 “모두 잤다. 누구는 허리를 세우고 잤고, 누구는 엎드려 잤다”는 고백이다. 시대가 다르다고, 최소한 달라졌다고 믿은 때문일 것이다. 무엇이 달라진 것인가. 대학생 자유기고가 한윤형이 정확하게 짚어준 대로, 대학 진학률이 달라졌다. 1970~80년대 대학생 비율은 청년층의 30%였고, 바로 그 대학생들이 청년문화와 정치의식을 주도했다. 그것이 말하자면, “어떠한 사상이 대중화되기 위해서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처음의 소수가 필요”하다는 리영희의 ‘소수의 전위부대’론, 곧 ‘인텔리겐치아’론과 대학문화가 접목될 수 있는 토대였다. 

그렇지만 오늘날 대학 진학률이 OECD 국가들 가운데서도 가장 높은 86% 수준이라고 하면 사정은 많이 달라진다. 대학생이 더 이상 운동의 동력도, 사회의 전위도 아니게 된 것이다. 그 결과 리영희와 청년문화의 대립항 자체가 상실됐고, 오늘날의 청년은 각자의 고립된 공간에서 고립된 주체로 살아간다는 것이 한윤형의 진단이다. “자본주의가 노동자를 착취하지 않고도 돈만 굴리면 이윤을 얻을 수 있다고 발악하는 금융자본주의의 시대에, 예비 노동자인 대학생들은 자본이 자신을 착취해 주기를 간절하게 바랄 수밖에 없다. 오늘날의 대학생들이 바라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편입’”이라는 것이 이 시대 젊은이들의 정직한 토로다. 이러한 현실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다시금 ‘사상의 은사’를 반추하게 된다. 

20대 에세이스트 김현진과의 대담에서 리영희 선생은 ‘변혁’은 반드시 온다는 신념을 거듭 피력했다. 현실사회주의가 패배한 것처럼 미국식 자본주의의 종말 또한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국가 사회의 지배세력이 계속해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없는 사람들을 박탈하고 모두에게 공정히 돌아가야 할 기회를 빼앗는다면 투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역사의 변증법이 그의 오랜 확신이다. 그의 이러한 신념은 ‘레닌을 반복하라’고 말하는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의 주장과도 겹친다.     

지젝은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그린비, 2009)에서 혁명적 과정의 두 가지 계기를 ‘극단적인 부정의 제스처’와 ‘새로운 삶의 창안’으로 정리한다. 리영희 선생의 설명대로, 의사와 같은 특권계급을 필수적으로 1년씩 시골로 보내 똥지게를 지게 한다든가 궂은일을 하게 하는 것이 중국의 문화대혁명이었다. 가난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의 삶을 생생하게 알게 한 다음 다시 자신의 일터로 복귀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그렇듯 새로운 경제적 조직과 일상생활의 재조직을 겨냥했지만, 문화대혁명은 새로운 일상의 형식을 창조하는 데는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지젝은 그 실패가 문화대혁명이 과격했기 때문이 아니라 충분히 과격하지 못했기 때문에 빚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마오쩌둥 자신이 인민에게는 반란의 권리가 있다고 독려하고 부추겼지만, 정작 백만 명의 노동자가 국가와 당 자체의 소멸을 요구하면서 직접 코뮌적 사회를 조직하고자 시도하자 군대를 동원해 소요를 진압하고 질서를 회복했다. 그렇다고 이러한 실패가 자본주의적 질서에 대한 전적인 투항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지젝은 베케트의 말을 인용해 “다시 시작하라, 다시 실패하라. 더 잘 실패하라”고 말한다. 리영희 선생이라면 노신을 인용해 “물에 빠진 개는 두들겨 패라”고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의식화의 원흉’이 아닌 ‘사상의 오빠’(김현진)로서 그의 말과 글은 여전히 우리 곁에 숨 쉬고 있다

10. 03. 15.  

P.S. 올해는 대학진학률이 작년보다 약간 떨어졌다고 하는데, 그래도 80%를 상회하는 것은 변함이 없다. 계간지 봄호 특집들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건 <황해문화>의 '대졸자 주류 사회와 위기의 대학'인데, 바로 대학 진학률 80% 사회의 초상과 문제를 짚고 있다. 보다 본격적인 진단과 분석이 필요한 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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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0-03-16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환시대의 논리><우상과 이성><강철서신><사회구성체와 사회과학방법론>의 공통점은 읽은 척하는 사람은 많으나 실제로 이 책을 읽은 사람은 거의 없다는 거죠.강철서신은 책이라고 하기엔 좀...

로쟈 2010-03-16 23:24   좋아요 0 | URL
팸플릿인데, 겹낫표를 해서 책처럼 돼 버렸네요.^^;

comorin 2010-03-19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또 지나가는 공돌이입니다.^^; 전 90년대 후반 학번인데, 강준만 교수의 리영희 입문서를 읽은 뒤에 뒤늦게나마 "전환시대의 논리"(이하 전논)를 읽었습니다. 사실 "전논"은 그 당시의 상황을 생각해 볼 때 획기적인 서적이었겠지만, 저에게는 그렇게 대단하게 진실을 '폭로'하는 수준으로 다가오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역시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생각해보고, 행간의 뜻을 살펴보면 정말 명불허전이란 생각이 절로 들더군요. 사실 "리영희"가 예전보다 않읽히고, 찾지 않아졌으면 하는게 "리영희" 선생의 소망이라고 하는데, 과연 앞으로도 그게 진지하게 이루어질지 궁금합니다. 앞으로 더 찾게 되지나 않을지 하고..

로쟈 2010-03-19 10:51   좋아요 0 | URL
명불허전이 맞습니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그는 '과거의 지식인'이 아니구요...
 
16세기 장인들의 문화혁명

이번주 한겨레21에 실은 서평기사를 옮겨놓는다. 야마모토 요시타카의 <16세기 문화혁명>(동아시아, 2010)을 다루고 있다. 이미 일간지 리뷰들에서도 크게 주목받은 책이지만, 초점을 조금 달리하여 한번 더 언급하게 됐다. 대단한 역작이어서 제쳐놓기가 어려웠다. 

 

한겨레21(10. 03. 22) 16세기 직인, 지식사회에 도전하다 

마르크스는 <자본>에서 “16세기에 세계무역과 세계시장이 형성된 때로부터 자본의 근대사가 시작된다”고 적었다. 세계체계론자인 월러스틴도 근대세계체계는 16세기(1450-1640년대)에 형성돼 오늘날까지 이어진다고 주장한다.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기원을 16세기로 잡는 것이다. 그런 것이 경제사에서 ‘16세기’가 갖는 의의로 보인다. 하지만, 문화사적으로 16세기는 보카치오나 라파엘로가 활동한 14-15세기의 르네상스와, 갈릴레오나 뉴턴으로 대표되는 17세기 과학혁명 사이의 계곡처럼 간주돼온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를테면 들러리다.   

대학과 성직자 VS 미술가와 장인
‘자력과 중력의 발견’을 다룬 <과학의 탄생>의 저자 야마모토 요시타카는 또 다른 역작 <16세기 문화혁명>(동아시아 펴냄)을 통해서 이러한 통념에 이의를 제기하고 17세기를 준비하는 지식세계의 ‘지각변동’으로 16세기를 재평가한다. 히말라야 산맥의 고봉들이 대륙판들의 충돌로 인한 대규모 지각변동의 결과인 것처럼, 17세기 과학 천재들의 혁혁한 업적도 16세기 문화혁명이 밀어올린 지반 위에서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16세기가 과소평가돼왔다면, 그것은 16세기 문화혁명을 주도한 직인이나 기술자의 활동에 대한 사회적 평가절하와 무관하지 않다.   

중세 서유럽의 대학에서 육체노동은 멸시 대상이었으며, ‘기계적’이란 말은 ‘손으로 하는’ 혹은 ‘머리를 사용하지 않는’의 의미였다. ‘기계적 기예’는 자유인이 익혀야 할 학예를 뜻하는 ‘자유학예’와 대비됐다. 그것은 육체와 정신의 대비였으며, 라틴어를 사용하는 엘리트 지식인과 직인 사이의 대비였다. 저자는 중세의 지식이 특정한 구성원들에게만 전수되었던 데 반해서 16세기는 이러한 비밀들이 벗겨지기 시작한 시대로 지목한다. 대학과 성직자가 독점하던 문자문화에 대해 선진적인 미술가나 장인이 도전장이 내민 형국이었고, 이로써 지식의 분단 상황은 와해돼간다.  

저자가 16세기 문화혁명의 지표로 내세우는 것은 대학과 인연이 없던 직인, 예술가, 외과의들이 속어(각국의 언어)로 과학서와 기술서를 쓰기 시작한 점이다. 알다시피 로마제국의 유산인 라틴어는 통치를 위한 공용어였고 문명어였다. 하지만 동시에 유럽의 권력자들에겐 지배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이자 수단이었다. 민중의 생활과는 단절된 소수 지적 엘리트의 전유물로서 라틴어는 비록 지역 간 언어의 장벽을 없애긴 했지만, 소수 엘리트와 민중의 사이에는 높은 장벽을 쌓았다. 그럼으로써 민중을 학문세계로부터 배제했다. 수도원 내부에서조차도 라틴어를 해독할지 못하는 사람은 ‘노무 수사’로 불리며 육체노동과 잡일에 종사했을 정도다. 라틴어 구사 능력의 유무가 사회적 지위를 결정했던 셈이다(그것은 오늘날 ‘영어 시대’에도 얼추 들어맞지 않을까).   

'과학혁명'이 누락한 것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도 중세 스콜라학에 이의를 제기한 건 맞지만 학문 세계의 배타성까지 타파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속어는 물론이고 속어가 섞인 라틴어조차도 저급한 것으로 경멸했다. 자연에 대한 비밀도 민중의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스레 숨겨놓아야 한다는 것이 당시 지식계급이 생각한 ‘도덕적 책무’였다. 이러한 사정은 갈릴레오에 대한 종교재판에도 적용되었으리라는 것이 저자의 판단이다. 지동설을 그냥 주장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천문대화>를 라틴어가 아닌 이탈리아로 저술함으로써 누구라도 알 수 있게끔 한 것이 더 큰 문제였다는 것이다. 애초에 루터가 교회의 면죄부 판매를 비판한 ‘95개 논제’를 라틴어로 썼을 때에도 파문은 크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을 독일어로 번역․요약해 인쇄하자 그의 주장은 순식간에 독일 전역의 대중에게 전파되었다. 이런 것이 16세기 문화혁명에 수반된 언어혁명의 양상이었고, 이 과정에서 형성되고 성장한 ‘국어’는 국민국가 형성으로까지 이어진다.  

16세기 문화혁명의 성과는 17세기에 들어서 엘리트 지식인들이 계승하게 된다지만, 그사이의 ‘단절’도 간과하긴 어렵다. 지식과 과학기술이 누구를 위한 것인가란 질문을 과학혁명의 ‘승리의 진군’은 누락한 듯싶어서다.   

10. 03. 15.

 

P.S. 분량상 발췌독을 했지만 <16세기 문화혁명>은 서평거리로 읽은 책들 가운데 발군이다. 힐베르크의 역작 <홀로코스트 유럽 유대인의 파괴>(개마고원, 2008)를 떠올리게 할 정도다. 그래서 그의 전작 <과학의 탄생>(동아시아, 2005)도 긴급하게 구했다. 제2부의 한 장 제목이 '과학혁명의 여명 - 16세기 문화혁명과 자력의 이해'다. <16세기 문화혁명>은 그 주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후속작인 셈. 두 권은 과학사와 문화사의 걸작이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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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orin 2010-03-19 0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마모토씨의 저작이 또 나왔군요. 전공투의 힘이 느껴집니다...

로쟈 2010-03-19 10:46   좋아요 0 | URL
대단한 역량의 저자인 건 맞습니다...

괄호밖 2010-12-16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의 저공비행]을 읽고 접속하게 되었고, 지금껏 이 서재의 글과 댓글을 탐독하며 읽고 있습니다. 덕분에 읽고 싶은 책이 매일 늘어만 갑니다. 읽을 책이 늘지만 오히려 기분은 짜릿하네요. 고맙습니다.

P.S. 잘못된 부분이 있기에 씁니다.

"수도원 내부에서조차도 라틴어를 해독할지 못하는 사람은 ‘노무 수사’로 불리며"를

"수도원 내부에서조차도 라틴어를 해독하지 못하는 사람은 ‘노무 수사’로 불리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