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라캉의 셋째딸이라는 '시빌 라캉'의 회고록이 출간됐다. <한 아버지: 수수께끼>(Un pere: puzzle)가 그것이다. 책은 최근에 나온 것이 아니라 지난 1994년 갈리마르출파사에서 나왔다(이후에 스페인어와 독어로도 번역됐다). 하지만 이 책에 관한 리뷰는 최근에 읽었다. 다음카페 '비평고원'에 김남시님이 올려놓은 리뷰 '부재하는 아버지에 대한 욕망 : Sibylle Lacan <한 아버지>'(06. 11. 19)를 옮겨놓는다(필자가 참조한 책은 독역본이다). 김남시님은 <발터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그린비, 2005)를 우리말로 옮긴 바 있으며 현재는 독일 유학중이다. 리뷰에서 '쟈크 라깡'이란 표기는 '자크 라캉'으로 통일했으며 원어는 우리말로 음역하고 일부 문단을 조정했다. 그리고 각주는 포함시키지 않았다.   

“내가 태어났을 때 이미 아버지는 없었다.” 시빌 라캉(Sibylle Lacan)의 회고록 <한 아버지 : 퍼즐>은 이 첫 문장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이건 이 책 전체를 관통해 흐르고 있는 ‘부재하는 아버지’를 자신의 아버지로 만들기 위한 그녀의 안쓰러운 투쟁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그녀가 태어날 때부터 부재했던, 바로 그 부재로 인해 그녀 생애 전체를 규정했던 그녀의 아버지 이름은, 쟈크 라깡이다.

시빌 라캉은 쟈크 라깡이 첫 번째 부인 마리-루이즈 블롱댕(Marie-Louise Blondin)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다. 쟈크 라깡은 그녀와의 사이에서 세 명의 아이를 낳았는데, 이후 교통사고로 죽게 되는 첫째 딸 카롤린(Caroline)과 둘째 아들 티보(Thibaut)에 이어 1940년, 이 회고록을 쓰게 되는 세 번째 딸 시빌을 낳는다. 그녀가 태어난 지 1년 후 라깡은 블롱댕과 이혼한다. 그녀의 말처럼, 아버지를 의식하게 될 나이의 그녀에겐 이미 자신의 아버지는 부재했던 것이다. 

시빌은 위의 문장으로 시작되는 자신의 회고록 앞에, 특이하게도 ‘일러두기(Hinweise)’ 라는 제목을 단 ‘서문’을 붙였다. 거기서 그녀는 ‘이 책은 소설도, 소설 형식을 띤 자서전도 아니다. 이 책엔 어떤 픽션도 없다. 독자들은 여기서 이야기를 극적으로 만들거나 책 부피를 늘리기 위한 어떤 꾸며진 이야기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내 기억 속에 있는 모든 중요하고 결정적인 것들을, 내 아버지와 나 사이에 일어났던 모든 것들을 기록하려 한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자크 라캉이라는 인간자체에 대한 것도, 정신 분석학자로서의 쟈크 라깡에 대한 것도 아니다. 이건 나의 아버지 쟈크 라깡에 대한 이야기다“라고 썼다.

실지로 그녀가 이 책에서 전해주고 있는 자크 라캉의 모습은 온전히 그의 ’버려진‘ 딸, 시빌의 관점으로 채색되어 있다. 그녀의 회고록은 자크 라캉에게 버림받은 후 광고 삽화가와 부띠끄 점원을 전전하며 어렵게 세 아이를 양육해야 했던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자신의 생부이지만 법적인 타자였던 라캉에 대한 그녀의 양가적 감정, 나아가 그가 두번째 부인 실비아 바티이유(Sylvia Bataille; 조르주 바타이유의 아내였다) 사이에서 낳은 딸 주디스 바타이유(Judith Bataille) - 그녀는 이후 라깡의 제자였던 자크-알렝 밀레르(Jacque Alain Miller)와 결혼해 주디스 밀레르(Judith Miller)라는 이름을 갖는다 - 에 대한 그녀의 깊은 열등감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저 유명한 정신분석 이론가는, 이미 세 명의 아이를 낳은 부인에게 또 아이를 낳기를 요구하다 그를 거부한 부인과 이혼하는 이기주의자이자, 전 부인과 자식들이 사는 거리 바로 맞은편 호텔에서 버젓이, 그것도 약속시간을 어기면서까지 여자와 동침하는 파렴치한으로, 나아가 이혼한 부인과 자식들에게 오랫동안 궁핍한 생활비만 제공했던 인색한으로 등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버지 자크 라캉에 대한 관계를, 그의 ‘아버지 역할’에 대한 요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이 책에서 그려지는, 혹은 읽어낼 수 있는, 아버지의 부재를 극복 혹은 부정하려는 그녀의 집요하고도 애처로운 의식적, 무의식적 노력은 이 책을 읽는 독자를 인간적 연민과 스노비즘적 경멸 사이를 오가게 한다. 부재하는, 유명한 아버지 자크 라캉에 대한 그녀의 권리 주장은 그녀의 깊은 피해의식과 열등감과 결합되어 있는데, 이는 라캉이 두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 주디스 바타이유에게로 집중되어 있었다. 이혼한 아버지의 성을 버리고 어머니 성을 따르자는 제안을 거부할 정도로, 아버지 라캉에 집착하고 있던 그녀에게, “Who‘s who” (유명인 인명사전)에 실린 'Jacque Lacan'의 소개 글은 충격적이었다. 거기엔 정신분석학자 라캉에겐 한 명의 딸, 'Judith Bataille'만 있는 것으로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아래 사진이 '주디스 라캉' 혹은 '주디스 밀레르').

자신에겐 태어날 때부터 부재했던 바로 그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현존하는 아버지로 인정받고 있는 배다른 동갑내기, 라캉이 자신의 진료실에 커다란 그녀 사진을 붙여놓을 정도로 자랑스러워 했던 유디트(*주디스?)의 첫 만남이 그녀에게 얼마나 깊은 상처를 남겼는지는 충분히 예상할 만 한 일이다. “유디트와의 첫 만남은 내겐 치명적이었다. 그녀는 너무도 사랑스럽고 완벽했고, 나는 너무도 조야하고 서툴렀다. 그녀는 완벽히 사교적이고 재치 있었고 나는 거칠고 직접적이었다. 그녀가 성숙한 여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던데 반해 나는 어린애 같았다...나는 완전히 내팽겨지고 버림받은 기분이었다. 게다가 내가 언어만 공부했던데 반해 그녀는 철학을 공부하기까지 했다. 아, 얼마나 자주 그녀가 소르본 앞에서 마치 모르는 사람인 양 내 앞을 스쳐지나 갔던가.”

그런데, ‘자신에겐 부재했던 아버지를 가지고 있는’ 유디트에 대한 그녀의 피해의식과 열등감은 자기 언니이자, 라캉이 어머니와의 사이에서 낳은 첫째 딸 카롤린에게도 향하고 있었다. 자신보다 네 살이 많았던, 그리하여 라캉을 4년이나 더 ‘아버지’로 가지고 있었던 카롤린에 대해 그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그녀는 모든 능력과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성숙하고 모든 여성스러움을 갖추고, 길고 탄탄한, 그리고 우리 가족 중에선 보기 드문 금발머리였으며 르노아르 그림의 주인공처럼 화사했다. (그에 반해 나는 우리 반에서 가장 작았고 버릇없는 소년 같았다.) 그녀는 모든 사람들에게 아름답다는 소리를 들었고 (나는 그냥 귀엽기만 했다), 특별히 재능이 많고 지적이었다. (그녀는 학생시절 내내 1등이었고, Concours General 상을 받고, 우수한 대학 성적을 거두었다. 난 성적이 좋긴 했지만 그를 위해 무척 애써야 했다.) 한마디로 말해, 그녀는 육화된 여신이었다. 그렇게 그녀는 우리 (나와 오빠)와는 다른 세계에서 살았다.”

그녀에 의하면 이 카롤린이 교통사고로 사망했을 때, 라캉은 그녀에게 두 번째로 - 첫 번째는 메를르 퐁티가 죽었을때 -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내 아버지 (라깡)는 어머니의 손을 잡았고, 그의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확실히 카롤린은 아버지와 어머니 이 둘의 유일한 자식이었던 것이다.”

아버지를 가지고 있었던 다른 딸들의 아름답고, 지적이며 성공적인 여성성을 아버지가 부재했던 자신의 볼품없고 초라한 삶과 대비시킴으로써 불러일으켜지는 꺼림칙한 연민의 감정은, 자크 라캉의 자식이기를, 태어날 때부터 부재하던 그를 자신의 아버지로 전취하려는 시빌의 파라노이드적(*편집증적) 집요함 앞에선 엽기적 섬뜩함으로까지 발전한다. 라캉이 죽은 후 그의 묘지를 방문한 그녀는, 함께 방문했던 남자 친구를 묘지 입구에서 기다리게 한다. “나는 아무 목격자도 없이, 내 아버지와 단둘이 있고 싶었다. (내 남자 친구의 모욕받고 기분상한 반응에 대해선 침묵하기로 하자.) 그건 사적이고도 내밀한 만남이었으니까.” 그녀는 아버지의 차가운 묘석에 손을 얹고는 마음 속으로부터 이야기한다. “내 아빠,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은 내 아버지에요. 그걸 아시겠지요.”

한편 또 한 명의 라깡의 딸, 철학자 주디스 밀레르 역시 아버지 라캉과 관련된 책을 출판했다. 1991년 Le Seuil 출판사에서 나온 <라캉 앨범. 내 아버지의 얼굴>이 그것이다.

06. 11. 19.


 

 

 

 

P.S. 알다시피 자크 라캉의 생애와 관련하여 가장 자세한 정보를 제공해주는 책은 엘리자베트 루디네스코의 <자크 라캉>(새물결, 2000)이다. 그리고 슈나이더맨의 <자크 라캉, 지적 영웅의 죽음>(인간사랑, 1997)도 참고할 만한 책이다. '생초보'라면 다리언 리더의 <라캉>(김영사, 2000)부터 읽는 것이 좋겠다.

흥미롭지만, '아버지'와 관련하여 읽어야 할 최적의 문헌은 '아버지의 이름(the Names-of-the-Father)'을 주제로 한 라캉의 세미나이다. 자크-알렝 밀레르가 편집한 이 세미나가 작년에 쇠이유출판사에서 출간됐으며, 곧 영어와 러시아어로 번역됐다. 영어본은 저널 'Lacanian Ink'(27호)에 들어 있는데, 그 일부 발췌내용은 아래와 같다.

The figure of the father is not a concept born in psychoanalysis, but rather a figure inherited by psychoanalysis. If the plural is an allusion to the end of this cursed tradition, it is because it is introduced in a logic of the Name-of-the-Father in which the latter appears as a function that can be sustained by diverse statements, which, from then on, play the role of said name.

Thus the Name-of-the-Father, as one of these elements, should not be the ultimate instance nor the ultimate response. It remains to be given a status and distinguished as element and as function. But, what function? If we refer to what Lacan denominated the paternal metaphor, it is the function of metaphorizing the desire of the mother, of barring it. In this sense, the Name-of-the-Father is, par excellence, an operator of metaphorization, to such an extent that, as element, it already is in itself the metaphor of the father, of the presence of the father. Let us write it this way:

The Name-of-the-Father can not only operate in the absence of the father (this is why Lacan criticizes the theories that relegate psychosis to the lack of the father), but it can also make him absent. If it is a matter of the father spoken through the mother, as a theme of the discourse, it is well to stress that it is an empty reference there, that he is made absent by the verb. And for that reason, without myth, one can affirm that it is a matter of the dead father as the subject of the signifier, which is writt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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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6-11-20 06:47   좋아요 0 | URL
마지막 “내 아빠,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은 내 아버지에요. 그걸 아시겠지요.”가 의미심장하네요.

로쟈 2006-11-20 08:19   좋아요 0 | URL
모든 딸들의 코멘트 아닐까요?..

비로그인 2006-11-20 11:12   좋아요 0 | URL
라캉.. 저는 어렵습니다.
유디트의 사진, 전형적 프랑스 엘리트계층 여인의 풍모입니다.
시빌이 열등감을 느낄법도 합니다.


2006-11-20 22: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11-20 22:59   좋아요 0 | URL
**님/ 블로그를 갖고 있지 않구요, 가보니까 (출처를 밝히지 않고) 무단으로 옮겨놓았더군요. 네티켓이 없는 분입니다...

2006-11-20 23: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깽돌이 2006-11-21 02:12   좋아요 0 | URL
자녀는 하나여야 안전한가?! ^^

로쟈 2006-11-21 08:38   좋아요 0 | URL
상팔자는 무자식이죠...

테렌티우스 2006-12-01 10:32   좋아요 0 | URL
로쟈님의 팬입니다...^^

중간 이름의 우리말 표기는 쥐디트 라캉, 쥐디트 밀레르가 맞습니다. 국어 연구원의 외래어 표기법을 보시면 됩니다...

http://korean.go.kr/06_new/rule/rule05.jsp


로쟈 2006-12-01 10:54   좋아요 0 | URL
지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국어연구원의 표기를 다 따르지는 않지만, 이 경우는 그게 맞는 거 같네요...
 

거창한 제목을 붙이긴 했지만, 지젝의 <혁명이 다가온다>(길, 2006)의 몇 문단을 읽었던 '패리스 힐튼과 카트린 밀레'란 페이퍼의 자투리이다. 거기서 내가 인용한 마지막 문단은 "거의 100년 전 버지니아 울프는 1912년경에 인간의 본성이 변했다고 썼다. 아마 이 모토는 오늘날 공과 사의 구분이 사라진 것을 신호로 '빅 브러더' 현실 드라마 같은 현상에서 파악되는, 주관성을 가진 지위이 급격한 이동을 지적하는 게 훨씬 더 적절하다."(106쪽)였다. 이 자투리는 그 마지막 문장에 붙은 각주5)에 관한 것이다. 이 각주가 거창하게 요악하자면, '디지털화와 형이상학의 정점'에 대한 것이다. 먼저 그 내용을 옮겨본다.

 

 

 

 

"그렇지만 이러한 급격한 단절 대신 오늘날의 디지털화는 정확히 형이상학 전통의 최고 지점을 형성하다. 아도르노는 어디에선가 위대한 철학은 신의 존재에 관한 존재론적 증명(즉 사유에서 존재로 직접 이동하려는 시도, 파르메니데스가 사유와 존재가 동일하다고 주장하며 이를 처음으로 정식화했다)의 변형이라고 언급했다(심지어 마르크스조차 이 선상에 있다. 그의 '계급의식'에 대한 생각은, 루카치가 <역사와 계급의식>에서 모범적으로 전개한 것처럼 정확하게 사회적 존재에 직접 개입하는 사고에 대한 게 아닌가?). 그리고 결론적으로 사이버공간에서의 디지털 이데올로기란, '비트에서 그것으로(from the bit to it)' 넘어가려는, 즉 디지털한 형식적 구조 질서에서 존재의 두려움을 형성하려는 점에서 이 발전의 마지막 단계가 아닐까."(106쪽)

먼저, 첫문장은 부정확하다. 영어본과 대조해볼 때, '이러한 급격한 단절 대신'이 아니라 '이러한 급격한 단절에도 불구하고'라고 옮겨져야 한다('Despite this radical rupture...'). 다시 옮기면, "하지만, 이러한 급격한 단절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디지털화는 정확히 형이상학적 전통의 정점(the culminating point)을 지시한다." 어떤 전통 말인가? '사유와 존재를 동일시하려는 전통'이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모든 위대한 철학은 신의 존재에 대한 존재론적 증명의 변주이다. 즉, '사유에서 존재로' 직접 이행해가려는 시도이다(신에 대한 사유 -> 신의 존재 입증).

 

 

 

 

그리고 이것은  '존재와 사유의 동일성'을 주장한 파르메니데스에 의해서 최초로 정식화되었다(가령, "Thinking and the thought that it is are the same; for you will not find thought apart from what is, in relation to which it is uttered." "For thought and being are the same." 등과 같은 파르메니데스의 언명들.) 그리고, 마르크스-루카치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에게서 '계급의식'이란 '사회적 존재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사유'를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결론: "Consequently, is not cyberspace digital ideology  - in its attempt to pass 'from the bit to the It', to generate the very density of being from the digital formal-structural order - the last stage of this development?" 번역문의 마지막 문장에 대응하는 영어본의 문장인데, '비트에서 그것으로'가 'from the bit to the It'이란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러한) 발전'이 가리키는 것은 서구 형이상학의 발전사이다. 그러니까 소위 '디지털 이데올로기'가 서구 형이상학의 마지막 발전단계가 아닌가?, 라는 게 지젝의 주장이다.

 

 

 

 

그 '디지털 이데올로기'란 무엇인가? 형이상학이 '사유에서 존재로' 이행해가려고 했던 것처럼 디지털화는 '비트에서 존재로' 넘어가려고 한다('being Digital'에서 'digital Being'으로?). 즉, 디지털적인 형식적-구조적 질서로부터 '존재의 두터움'(=존재감)을 창출해내고자 한다. 이에 대한 가장 탁월한 사례 중의 하나는 <매트릭스>의 원조격인 오시이 마모루의 <공각기동대>(1995)가 아닐까?..

06. 1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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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1-20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디지털화의 궁극은 디지털임이 간파되지 않을 정도의 아날로그화..
저의 생각입니다. 로쟈님.

로쟈 2006-11-20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동일성' 테제 정도가 되겠네요...
 

최근 젊은 작가들의 '근황'에 대해서 점검하고 있는 글을 옮겨온다.  이기호, 박민규, 박형서, 김중혁 등의 젊은 작가들이 보여주는 독특한 상상력과 질펀한 입담을 '작두 탄 구라의 향연'으로 정리하고 있는 글인데, '작두 탄 구라'란 표현보다 내게 직접적인 것은 '총알 탄 구라'이다(그래서 제목은 '총알 탄 소설가들'로 단다). 필자는 '에세이스트' 정여울씨이다. <아가씨, 대중문화의 숲에서 희망을 보다>(강, 2006)의 저자인데, 문화평론가 혹은 문학평론가가 어울림직한 직함이지만 그걸 통칭해서 저널에서는 '에세이스트'라고 부르기도 하는 모양이다. 여하튼 젊은 작가들의 '입담'에 애정을 주어봄 직하다. 그게 한국문학의 장래에 대한 '투자'이기에. 인용문의 강조는 나의 것이다.

 

 

 

 

한겨레21(06. 11. 17) 펴들기만 하면 내 웃을 줄 알았지~

이기호·박민규·박형서가 보여주는 한국소설 유머의 심상찮은 변화…질펀한 입담의 약장수, 고독의 복화술, 작두 탄 구라의 향연을 즐겨라

요즘 <개그야>의 ‘사모님’을 보며 한국 코미디의 경이로운 진화를 실감한다. ‘사모님’의 성공 요인 중 하나는 무대장치의 과감한 생략이다. 의자 하나 달랑 놓고 모든 무대장치를 제거하니, 그 텅 빈 암흑의 공간은 시청자에게 다채로운 상상의 여백을 제공한다. ‘운전해’, ‘어서’라는 짧은 대사는 그때마다 다른 뉘앙스로 변주되며, 화려함 이면에 도사린 사모님의 권태와 고독, 그녀의 못 말리는 백치미를 구현한다. ‘아마데우스’라는 코너는 더욱 놀랍다.


△ 문학은 사소한 상황 설명이나 극적 암시조차 ‘문자’로 설정해야 하는 수공업적 장르인 탓에 유머의 경제성을 발휘하기가 힘들다. 이런 한국 소설 유머에 드디어 지각변동이 시작되었다. 이기호, 박민규, 박형서(왼쪽부터)는 그 대표적 소설가이다.(사진/문학과지성사 제공, 이장욱,문학과지성사 제공)

이 코너를 보면 인간의 표정 안에 숨겨진 소우주, 그 코믹성의 극치를 볼 수 있다. 언어도 무대장치도 그 무엇도 없이 오직 삼총사의 표정만으로 교향곡을 연주한다. 이 세 사람은 가히 얼굴 근육의 움직임 하나로 우주를 연주해내는 기막힌 내공을 보여준다. 이렇듯 무대 위의 개그는 표정만으로도 시청자를 무장해제시킬 수 있다. 이것은 스탠딩 코미디가 굳이 ‘의미’를 추구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문학은 이런 표현의 경제성을 발휘하기 어렵다. 문학은 사소한 상황 설명이나 극적 암시조차 ‘문자’로 설정해야 하는 수공업적 장르인 탓이다. 그러나 최근 한국 소설의 유머도 드디어 심상치 않은 지각변동을 시작한 것 같다.

애들은 가라? 꼰대들은 저리 가!

이기호식 유머의 키워드는 친밀성이다. 그의 유머는 흔히 구어체적 현장성에서 발원한다. 그는 ‘독자와 작가 사이의 거리감’을 ‘이야기꾼과 청자의 온기’로 극복하곤 한다. 그의 문체는 강한 구어성을 지니고 있기에, 독자는 머릿속에서나마 묵독의 폐쇄성을 지우며, 동네 남녀노소를 잔뜩 모아놓고 질펀한 입담을 풀어내는 이야기꾼의 과장된 몸짓과 신명난 목소리를 상상하게 된다.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는 이기호식 유머의 에너지를 명쾌하게 보여준다. 의도와 목적과 진심을 매번 배반하는 시트콤적 상황의 무한 연쇄들. 이기호의 인물들은 우연의 퍼레이드에 온몸을 맡긴 채 기꺼이 ‘하느님의 코미디 채널’이 될 수밖에 없다. 이기호는 작품에서 ‘독자의 상상력’을 유난히 강조한다. 옛날옛적 입담 좋은 약장수들은 온갖 구라를 읊조리며 ‘애들은 저리 가!’라고 외쳤지만, 우리 시대의 새로운 약장수 이기호는 ‘꼰대들은 저리 가!’ 혹은 ‘애들만 이리 와!’라고 외치는 듯하다.

여기서 꼰대와 애들을 가르는 기준은 ‘상상력’이다. 이 대목에서 상상력을 바쁜 일상에 저당 잡힌 어른들은 주눅들기 쉽다. 그러나 그 상상력의 울타리가 그다지 높지 않다는 것에 이기호식 유머의 ‘친밀성’이 자리한다. 이기호의 소설을 읽다 보면, 좀처럼 걷지 않던 후미진 샛길을 문득 걸어보고, 평소에는 서먹한 사람에게 실없는 농담을 훌쩍 건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상상력의 코마 상태를 벗어날 수 있을 것만 같다.

박민규 소설의 독자는 가끔 자신의 ‘조로’를 의심하게 된다. 박민규의 주인공들은 애어른 할 것 없이 대책 없는 유아적 순수로 물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의 소설 앞에서 우리는 매번 ‘너무 닳고 닳은 어른들’이 되어버린다. 읽을 때는 키득키득 웃지만 읽고 나면 문득 자신의 길들여진 일상이 부끄러워지는 것, 그것이 박민규식 유머의 빛깔이다. <핑퐁>의 왕따 소년은 이렇게 말한다. “다음엔 못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 못이라면, 일생에 한 번만 맞으면 그만일 테니까.”

그의 유머는 동화적 무구함과 아릿한 슬픔에 물들어 있다. 그러나 이 유아적 순수에는 왕따 아닌 모든 인간들을 향한 서늘한 저주가 묻어 있다. 핼리혜성이 지구에 와서 충돌해주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임, 그곳에 드나들며 왕따 소년은 교실에서만 ‘다수결로 묵인되는 왕따’가 자행되는 것이 아님을 배운다. “인류라는 인스톨을 유지할 것인가, 언인스톨할 것인가. 결정은 승자의 몫이란다.” 이 중차대한 인류의 운명을 왕따 소년들에게 맡기는 것이야말로 박민규식 유머의 메커니즘이다. 이러한 설정은 단순한 유아적 상상력이 아니라 인류가 내팽개친, 인류가 ‘깜빡’한 존재들의 필연적 복수혈전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박민규의 유머는 정서와 문체 사이, 욕망과 표현 사이의 미묘한 거리감에서 탄생한다. 그의 작품 표면에 드러난 유머가 빙산의 1%라면, 독자는 보이지 않는 99%의 빙산, 그 거대한 스케일의 고독과 슬픔의 복화술을 읽어낸다. 그의 유머는 일단 독자를 웃겨놓은 다음 그 웃음을 애도하게 만드는 성찰적 유머다. 상큼한 유머 뒤에 드리운 짙은 비애의 그림자를 상상하게 만드는 것이다.

더 없이 이지적인 블랙유머

아마 한국 독자들에게 가장 낯선 유머는 박형서식 유머일 것이다. <자정의 픽션>에 실린 <‘사랑손님과 어머니’의 음란성 연구>는 박형서식 유머의 코드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엄격한 먹물적 수사학을 노골적으로 조롱하면서도 능란하게 이용하는 이중적 태도가 유쾌상쾌통쾌하다. 화자는 선행연구에 대한 분노를 무시무시한 공격적 수사학으로 과격하게 표현하는가 하면(“그는 가금류의 뇌를 가진 비평가이며 문장은 흑사병 수준이라 별로 언급하고 싶지 않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리카르도 호킨스의 <못된 유전자>라는 식으로 패러디하기도 한다.


△ 이 작가들의 발랄한 상상력이 독자의 영혼에 유쾌하게 물들 때 거기서 유머라는 스파클이 발생한다. 복잡미묘한 뒷맛을 남기는 유머, 짠하고도 애잔한 뒷맛을 남기는 유머는 언제나 감동의 원천기술이다.

수많은 탁상공론에 맞서는 더 많은 탁상공론을 조롱하는 이 작품은 그 어디에서도 통과될 수 없는 ‘논문’이지만 더없이 이지적인 블랙 유머로 가득한 흥미만점의 ‘소설’이다. “필자와 같이 잘난 연구자”가 “요새 좀 바쁘긴 하지만” 써낸 이 장대한 스케일의 논문은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로 범람한다. ‘닭알’을 ‘불알’과 동격에 놓은 다음, <사랑손님과 어머니>에 수십 번 등장하는 달걀의 상징을 해석하기 위해, “남근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불알 중심적 사고로 옮겨가야 한다”는 식이다. 이렇듯 천연덕스레 자신의 ‘독창적’ 학설을 읊어대는 능청이 배꼽을 잡는다(*'논문'으로서 이 작품의 결함을 한 가지 지적하자면, 각주에서 제시하고 있는 참고문헌들에 '춢판사'가 모두 빠져 있다. 즉, 논문의 기본적인 작성요령을 지키고 있지 못하다. 하지만, 논문의 내용은 독창적이며 훌륭하다. 가금류의 뇌를 가진 기득권 학자들이 아니라면 그 독창성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모든 잡설·요설·독설들이 논문의 테마를 요리하는 데 너무나 ‘논리적으로’ 복무한 나머지, 독자들은 깜빡, 혹은 기꺼이, 이 ‘논문’에 자발적으로 속아 넘어가고프다. 이 논문의 핵심 가설은 옥희가 6살이 아니라 가임기의 “처녀애”이며 아저씨와 옥희의 성교로 인해 질투에 눈먼 어머니가 아저씨를 내쫓는다는 것. 결국 외할머니-어머니-옥희는 “음란삼각편대”이며 옥희의 집은 “한 남성을 두고 아귀다툼을 하는 매음굴”이란다. 박형서는 우리가 가장 도전하기 어려운 습속과 제도와 상식들을 한낱 유희의 장난감으로 만듦으로써, 사소함과 중요함이 서로 전복된 ‘픽션 언리미티드’의 세계를 창조한다.

모든 진정성의 강박이 사라진 세계, 진실은 몽둥이와 발길질과 전기고문으로 조작되는 세계, 존재나 고통이나 사랑 따위는 “시시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 되어버리는 세계. 여기서 박형서적 그로테스크 유머가 탄생한다. 그의 소설을 읽다 보면 이 악동적 기괴함이 가득한 문체에 강력한 거부감이 들면서도 이상하게 그 ‘싸가지와 재수가 동시에 외출한’, 잘난 척하는 말투를 모방하고 싶어진다. 그의 주인공들은 메피스토펠레스의 이지적인 악마성과 <사탄의 인형> 주인공 처키의 악동적·요괴적 이미지가 교차하는 캐릭터들이다.

박형서 유머의 핵심은 갈 데까지 간다는 것, 한없이 막 나간다는 것이다. 끝간 데 없는 기괴한 허구의 파노라마가 박형서식 유머를 수놓는다. 그의 소설은 인과성의 제어로부터 완전히 탈주한, 작두 탄 구라의 향연이다. 게다가 그는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유머를 구사한다. 자신의 두뇌 속 주름 하나하나까지도 독자들에게 거의 MRI 촬영의 해상도로 보여주는 뻔뻔함이 그의 매력이다.

진정한 공통분모는 ‘상상력’

최근의 단편소설 중에는 김중혁의 <유리방패>가 새로운 유머의 경지를 보여준다. 김중혁은 읽는 이를 공격적 웃음의 수혜자로 만들지 않는다. 그는 등장인물의 천진함 앞에 독자를 뼛속 깊이 무장해제시킨다. 그의 유머는 공격성도 방어성도 없으며, 이 질긴 생의 링 밖으로 잠시 뛰쳐나와 마음의 모든 매듭을 잠시나마 풀고, 소설 속 주인공들과 소주 한잔 나누고 싶어지는, ‘비움’의 유머다.

그러나 위의 작가들의 진정한 공통분모는 ‘상상력’ 자체이지 유머코드는 아니다. 이들의 발랄한 상상력이 독자의 영혼에 유쾌하게 물들 때 거기서 유머라는 스파클이 발생하는 것뿐이다. 상상력이 뜻하지 않게 유머를 낳을 수는 있지만 유머 자체가 상상력을 낳을 수는 없다. 그 어떤 마음의 파문도 일으키지 않는 말초적 유머는 가독성의 도구로 전락할 뿐이다. 유머의 첫맛과 뒷맛이 일치하는 유머는 독자의 상상력을 간질이지 못한다. 복잡미묘한 뒷맛을 남기는 유머, 짠하고도 애잔한 뒷맛을 남기는 유머는 언제나 감동의 원천기술이다.(그래서 나는 아직도 박완서의 걸쭉하고도 새침한 구식 유머가 좋다.) 문학의 유머는 <개콘>이나 <웃찾사>와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지식과 세상의 모든 역사와 세상의 모든 억압과 경쟁한다. 문학적 유머의 원천기술은 의미를 삭제한 쾌락이 아니라, 의미 자체와 질펀하게 놀아나는, 예술과 지성과 상상력의 비빔밥이다.(정여울 에세이스트) 

06. 11. 19.

P.S. <총알 탄 사나이> 시리즈의 원제는 <벌거벗은 총(Naked Gun)>이다. 나는 젊은 작가들의 소설에서 벌거벗고 뛰어노는 아이들의 '천진함' 같은 것을 읽는다(그것이 가장된 것이라 하더라도). 그들이 들려주는 발랄한 이야기들은 때로 <개그야>나 <개그콘서트>의 뺨을 치며 우리의 배꼽을 고무줄처럼 늘어나게 한다. 하지만, 그들이 쏜 '총알들'이 현실의 과녁을 제대로 맞힐 수 있는 건지는 의문이다(해서, 이 천진한 악동들의 반항과 일탈이 미더운 것인지에 대해서는 장담할 수 없다. 

다시 반복하자면, "문학의 유머는 <개콘>이나 <웃찾사>와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지식과 세상의 모든 역사와 세상의 모든 억압과 경쟁한다." 아니, 경쟁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라도 우리의 '총알 탄 소설가들'은 구두끈을 더 바짝 조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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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6-11-20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그야의 '사모님'은 정말 기발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죠. 마지막 글이 참 많이 와 닿는군요.^^

로쟈 2006-11-20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개그 프로그램을 잘 보지 않는데, 하도 입소문이 돌아서 '사모님'은 두어 번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동네도 살기 힘들더군요.^^
 

일본 히토쓰바시대 교수로 있으면서 국내 언론에도 칼럼을 연재하곤 했던 이연숙 교수의 주저가 지난달에 출간됐었다(저자의 이름은 사카이 나오키의 <국민주의의 포에시스>(창비, 2003)에서부터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진작에 보관함에는 넣어놓았었지만 근대 일본에서의 '국어 이데올로기'를 파헤치고 있는 저작의 성격상 (관심이 가는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언제 읽겠는가 싶어서 구입은 차일피일 미뤄두고 있었다. 다행히 이번에 본격적인 리뷰서평이 눈에 띄기에 옮겨놓고 길잡이 삼아 읽어보고자 한다.  

 

 

 

 

그 전에 책에 대한 소개를 잠시 옮겨오면, "폭력적인 근대 일본의 '국어' 이데올로기의 모순을 지적하며 1996년 일본 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던 저작. '국어' 개념의 성립과 전개를 축으로 하여, 근대 일본의 언어 인식의 근저를 새롭게 밝히고자 했다. 한국인 학자가 일본어로 쓴 책으로, 1996년 이와나미서점에서 출간되어 이듬해 산토리학예상을 수상했다. '일본'에 살고 있는 '일본인'은 동일한 '일본어를 말한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이러한 담론은 일본이 근대 국민국가로서 구축되어 가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담론을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이 책에서 말하는 '국어라는 사상'이다."

문제는 이 '국어라는 사상'이 일본에만 해당되는 건 아니잖겠는가라는 점. 이 문제적인 대목에 대해 명쾌하게 해명해줄 수 있는 책이 또한 기다려진다. 아래의 서평은 정선태 교수의 것인데, 이미 코모리 요이치의 <일본어의 근대>(소명출판, 2003) 등을 번역하고 근대어와 근대문학에 관련된 다수의 논저들을 발표한 바 있기에 최적의 서평자라 할 수 있겠다.

경향신문(06. 11. 18) ‘국어’는 ‘제국주의’이념·수단이었다

모든 사람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표준어를 사용하는(또는 표준어를 사용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본다. 왜 아니겠는가.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을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은 ‘교양이 없는’ ‘조금 모자라는’ 사람으로 간주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그리하여 어떻게 해서든 ‘표준 국어’를 사용하기 위해 애쓰는 ‘촌놈’들의 무의식 속에는 ‘교양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완강하게 자리잡는다.

그렇다면 표준어는 누가 왜 정하는가. 왜 표준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고상하게 보이고, 사투리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저열하게 보이는가. 우리가 아무런 이의 없이 사용하는 ‘국어’라는 용어에 대해서도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흔히 한국의 ‘국어’에는 민족 정신이 깃들어 있으며 ‘국어’의 보존과 순화야말로 민족 정신을 지키는 보루라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처음부터 그러했을까.



“‘국어’라는 표현은 그 자체는 ‘정치적 개념’이면서도 실은 그 정치성을 은폐하고 언어를 자명화하며 자연화하는 작용을 띠고 있다”는 도전적인 결론을 끌어내는 ‘국어라는 사상’은 일본에서 ‘국어’라는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유포되는지를 방대한 실증적 자료를 동원하여 증명한다. 일본 근대 언어학의 대부로 일컬어지는 우에다 가즈토시(上田萬年)와 그의 충직한 제자 호시나 고이치(保科孝一)를 두 주인공으로 하여 일본의 ‘국어학’과 ‘국어 정책’의 이면을 파헤치고 있는 이 책은 자명한 것으로 간주되는 ‘국어’라는 말이 사실은 ‘대일본제국’의 욕망을 현실로 옮기는 강력한 무기였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저자는 “언어는 이것을 쓰는 인민에게 있어서는 흡사 그 혈액이 육체상의 동포를 나타냄과 같이 정신상의 동포를 나타내는 것으로, 그것을 일본 국어에 비유해서 말하면 일본어는 일본인의 정신적 혈액이라 할 수 있다”는 우에다의 선언을 조목조목 비판한다. 이 일본인의 ‘정신적 혈액’이야말로 일본의 ‘국체(國體)’를 유지하는 근간이며 일본인을 가장 강하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저자에 따르면 우에다 이전에는 ‘국어’라는 이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국어’라는 이념과 제도는 일본이 근대 국가를 스스로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창안해 낸 하나의 작품이자 픽션이었다.

물론 일본만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한국을 포함하여 근대 국민 국가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거의 모든 국가들이 자신의 ‘국어’에 국민 통합의 이념을 새겨넣었고, 이를 통해 국민의 ‘평준화’와 ‘동질화’ 프로젝트를 실천에 옮겼다. 우에다와 그의 제자 호시나가 하나의 모델로 삼았던 독일의 예가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예컨대, 야콥 그림(Jacob Grimm)은 “독일이 진정한 통일체가 되기 위해서는 정치에도, 경제에도, 종교에도 도움을 청할 수가 없었다. 거기에서 독일어라는 언어가 국민적 통합의 상징이 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말했다. 독일이란 무엇보다도 ‘언어 민족(Sprachnation)’으로서밖에 존재할 수 없었던 것이다.

국민 의식의 형성을 위해 창안된 ‘국어’는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내부를 통일하고 급기야 외부(=식민지)로 향한다. ‘언어와 민족의 정신적 유기적 결합’을 강조함으로써 ‘국민’이라는 신화를 작성한 근대 국민국가 일본은 자신의 ‘국어’를 무기로 하여 제국 건설에 나선다. 근대 국민국가는 필연적으로 제국을 욕망한다. 그리하여 일본의 ‘국어’는 ‘제국의 국어’를 욕망한다. ‘대일본제국’이 식민지를 확장함에 따라 일본의 ‘국어’는 ‘대동아공영권어’를 지향한다. 자연스러운 이치다!

우에다는 ‘국어’에 의한 ‘국민’의 동질화·획일화가 근대 국가의 존립에 있어서 필요불가결한 과제라는 것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국어’의 대외 진출을 위해서는 표준어 제정과 표기법의 통일 등 ‘국어 개혁’이 불가피했다. ‘대일본제국’은 ‘새로운 영토’, 곧 조선과 대만을 비롯한 식민지에 ‘국어’를 전파하기 위해 부심한다. 국어 정책을 학문적으로 총괄한 사람이 바로 우에다 가즈토시의 충직한 제자 호시나 고이치였다.

반대가 없진 않았지만 호시나 고이치가 주도한 ‘국어 정책’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식민지 조선에서도 예외 없이 관통한다. 즉, 조선에서도 ‘대일본제국’의 ‘국어’는 유감없이 그 힘을 발휘하여 ‘내지인’은 ‘국어를 상용하는 자’, ‘조선인’은 ‘국어를 상용하지 않는 자’로 법적으로 규정되었고, 그 결과 조선의 독자적인 민족성은 완전히 부정되기에 이른다. 제국을 욕망하는 국가의 지원을 등에 업은 ‘국어’는 이렇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국어라는 사상’을 읽으면서 주시경을 비롯하여 한국의 ‘국어학자’들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한국의 ‘국어’가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는 강력한 무기 중 하나였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시점에서 우리는 다시 우리의 ‘국어’란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한국이라는 국가의 ‘국어’가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 안에 웅크리고 있는 이념의 실체는 어떠한지, 우리는 진지하고도 성실하게 묻고 또 대답해야 한다. 이 책이 한국의 ‘국어’와 ‘국어학계’에 몰고 올 파고는 예사롭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은 필자만의 것이 아닐 것이다.(정선태|국민대 교수·국문학)

06. 11. 18.

P.S 서평의 마지막 문장, "이 책이 한국의 ‘국어’와 ‘국어학계’에 몰고 올 파고는 예사롭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은 필자만의 것이 아닐 것이다" 대해선 관행에 비추어 좀 회의적이다. 과연 '파고'가 일어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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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1-18 14:47   좋아요 0 | URL
'개념'에 대한 담론은 주관적 요소가 강하지요..

 

자기계발서 붐과 심리학 열풍이 최근 가장 눈에 띄는 출판 트렌드로 자리잡은 게 아닌가 싶다(그러니까 이건 2006년 출판사회학의 중요한 주제이다). 한해를 정리하기엔 조금 이른 감도 있지만, 이러한 트렌드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시류와 무관하게)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일단은 참고자료가 될 만한 기사들을 모아놓는다.

 

북데일리(06. 11. 16) 자기계발서를 위한 변명

우리는 흔히 문학을 경외의 대상으로 본다. 그리고 인문학은 어렵고 실생활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대체로 외면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자기계발 도서들이 베스트셀러 수위에 오르는 것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를 낸다. 충분히 공감 가는 말이다. 기초학문의 기반 없이 응용학문의 발전이 있을 수 없듯이 인문학의 토대 없이 수준 높은 문화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모든 문학과 인문학 서적들이 외면 받지는 않듯이 모든 자기계발 도서들이 각광 받지는 않는다.

기초적인 교양이 부족한 시대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스스로 바뀌고, 자기관리를 통해 자신을 수양을 할 수 있는 계기를 주고, 동기 부여를 하게 하는 '자기계발' 도서에 대해 너무 인색한 평가를 하는 것은 아닌가. 자기계발 도서로 분류되는 책들은 비슷비슷한 내용들을 이리저리 다른 색깔로 편집하고, 누가 말하느냐 등의 차이만 있을 수도 있다. 제목만 다를 뿐 얘기하는 것들은 다들 별 차이가 없는 '말들의 향연'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독자들이 그런 책을 찾는 이유는 제도권 교육에서 배우지 못한 삶에 대한 태도와 자기 자신에 대한 경영 등을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식에 비해 삶의 지혜를 얻는 것에 무지한 경우가 많다. 현대사회 이전까지만 해도 이런 것들은 소위 '가정교육'을 통해 부모로부터, 대가족 생활을 통해 습득하고, '고전'들을 통해서 배웠지만 이제 그 역할을 '자기계발' 도서가 대신하는 것은 아닐까?

늘 계승하고 발전시켜야 할 전통과 고전도 꼭 필요하지만, 지금 현재의 현실을 다룬 실용서들도 필요하다. 실용서적에 대한 천대는 조선시대에 경학(유교 경전)만 중시하고, 실학(잡학)을 천시하던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아 보인다. 또 현대사회는 복잡한 생활만큼이나 챙겨야 하고 기본적으로 알아두어야 할 것들 투성이다.

학문의 근간인 인문학의 중흥 못지 않게 실용서적에 대한 정당한 권리 찾기도 중요하다. 더이상 '처세서'라는 부정적인 인식으로 자기계발, 실용서적에 대한 서자 취급은 그래서 온당하지 않은 처사다. 개인적으로 <가슴 두근거리는 삶을 살아라>(시대의 창. 2004)는 책을 보고 정작 내가 하고 싶은 건 무엇인지, 행복한 일을 하는 건 죄의식을 가질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행복한 이기주의자>(21세기북스. 2006)는 이런 나의 마음을 더 튼튼하게 굳히게 하고, 더 큰 용기를 준 책이다. 이 책은 비슷한 내용을 말하지만, 말하는 방식이나 받아들여지는 느낌이 또 다르다. 사람마다 좋아하는 스타일이 있듯이 자신에게 맞는 상품을 고르면 된다.

책도 이미지 상품이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소비하는 제품 중에 디자인을 고려하지 않는 제품이 있는가? TV나 MP3, 문구, 어느 회사 제품이든 성능의 차이는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지식상품인 책도 결코 다르지 않다. 예술영화만 영화가 아니듯 같은 메시지라도 어떻게 풀어가고, 설득하고 표현해 내느냐에 따라 A급 영화가 되기도 하고, B급 영화가 되기도 한다. 어떤 상품을 만드는 회사가 소비자가 자신들의 물건을 구매하지 않는다고 소비자를 비난하는가? 소비자가 원하는 책, 독자들이 찾는 책에 대한 고민은 진정으로 했던가?

책도 이젠 어렵고 난해한 책은 좋은 것이고, 쉽고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책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거두어야 한다. 인문학이 더 낮게, 더 쉽게 독자들에게 다가가야 그 가치를 발견할 것이다. 지식와 학문의 성채를 높이 쌓아 위세를 보일 게 아니라, 함께 논의하고 즐길 수 있도록 문턱을 낮추어야 한다. 빵을 먹는 사람들에게도 수준이 있다. 앙코 있는 빵이 맛있다는 사람은 빵에 관한 한 초보자고, 앙코 없이 달지도 않고, 그윽한 뒷맛을 아는 사람이 고급 빵을 먹을 줄 아는 소비자이듯이 독서에도 수준이 있다. 스토리는 별 상관도 없는 액션영화를 좋아하면서 영화 보는 재미를 붙이듯이 처음엔 다들 그렇게 시작한다. 그렇게 차츰차츰 영화 보는 눈이 생겨 내용이 심오한 영화로 넘어가듯이 독서도 마찬가지다.

인생의 '사부'를 만난다는 건 정말 삶에 있어서 한 줄기 '태양'이다. 역할 모델을 가진다는 건 내게 있어 확고한 가치관을 갖는 것 이상이다. 책은 그런 점에서 나를 수양하게 하는 전범이기도 하지만, 늘 나를 게으르지 않게 하고, 깨어 있게 하는 활력소다. 그리고 그런 책들 중에서 자기계발 도서로 분류되는 책들이 나에겐 수위를 차지함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고급 인문학을 즐기지 못하는 질 낮은 독자라는 혐의를 씌워도 어쩔 수 없다.(신기수 시민기자)

한겨레(06. 11. 03) 행복찾는 언니들의 ‘눈칫밥’ 해결

행복을 바라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 행복만 찾는다면 이기주의자라는 소리를 듣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21세기북스에서 낸 <행복한 이기주의자>는 행복해지고 싶은 사람들의 불안을 정면으로 찌르고 들어간 책이다.

이른바 ‘자기계발서’는 미국 시장과 국내 시장이 짧은 시차를 두고 연동하는 분야다.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면 거의 즉각 한국에서도 번역돼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른다. 그런 점에서 보면 <행복한 이기주의자>는 예외에 속한다. 미국에서 출간된 지 20년이나 된 이 분야의 고전이기 때문이다. 20년이면 자기계발서 분야에선 거의 선사시대에 속한다고 할 터인데, 2000년대 한국에서 싱싱한 현재형으로 통했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이 책은 전 세계에서 1500만부 가까이 팔렸다고 한다. 국내에서 지난 4월 말에 출간돼 15만부 넘게 독자 손에 들어갔다. 초대형 베스트셀러는 아니지만, 독자의 마음을 잔잔히 그리고 단단히 사로잡은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제목의 호소력을 제쳐 놓으면 이 책은 우선 디자인이 눈에 띈다. 형광빛이 도는 짙은 분홍으로 표지를 덮은 것은 이전의 자기계발서에서는 흔치 않은 시도다. 인터넷서점 예스24에 서평을 올린 한 독자(아이디 do8633)는 “올해 읽은 책 중 가장 훌륭한 편집 디자인”이라고 평가했다. 캘리그래퍼 강병인씨가 손으로 쓴 제목 글씨도 독자의 시선을 자극한다. 강병인씨는 전통술 ‘산사춘’의 글씨를 쓴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데, 21세기북스에서 그의 글씨를 채택한 것이 선도를 높인 것으로 보인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도 시원시원한 필선이 이 책이 전하려는 행복의 이미지와 맞아 떨어진 듯하다. 이 책의 출간 이후로 여러 종의 책에서 강병인씨의 글씨가 제목으로 등장했다. 디자인의 흐름을 주도한 책이 된 것이다.

책의 내용은 사회생활에서 좌우의 눈치를 봐야 하는 젊은 세대의 고민을 풀어준다. 특히 사회적 약자의 처지에 놓여 자신의 소망이나 욕망을 차압당하기 쉬운 젊은 여성들에게 호소력을 발휘한다. 책을 기획한 21세기북스 류혜정씨는 “독자의 70% 정도가 여성이고, 그 중에서도 20~30대 여성이 주요 독자층을 이룬다”고 밝혔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기 뜻대로 행복을 찾아 누리고 싶은데, 그렇게 살면 욕먹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덜어주고 있는 것이다.

지은이 웨인 다이어는 심리학자로서 임상심리를 통해 터득한 ‘행복 비법’을 독자에게 털어놓는다. 그가 강조하는 요점은 ‘합리적 개인주의자’인데, 그것은 ‘저밖에 모르는 에고이스트’와는 다른 사람이다. 남들이 뭐라 하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자기답게 삶으로써 자신의 행복도 얻고 주위에 그 행복을 나누어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가 제시하는 행복 쟁취 전략은 이렇다. 1.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말라. 2. 자신에게 붙어 있는 꼬리표를 떼라. 3. 자책도 걱정도 하지 말라. 4. 미지의 세계를 즐겨라. 5. 의무에 끌려다니지 말라. 6.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말라. 7. 화에 휩쓸리지 말라.

지은이의 조언 가운데 특히 이채로운 것이 ‘정의의 덫을 피하라’이다. 지은이는 “정의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단언한다. 정의가 중요하지 않다라는 뜻이 아니라, 내가 받은 부당함이나 불공평에 대한 분노로 괴로워하기보다는 내 마음을 다잡음으로써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메시지다. 행복한 이기주의자의 전형적인 태도를 지은이는 이렇게 요약한다.

나의 가치는 다른 사람에 의해 검증될 수 없다. 내가 소중한 이유는 내가 그렇다고 믿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나의 가치를 구하려 든다면 그건 다른 사람의 가치가 될 뿐이다.”

“다른 사람의 평가에 연연해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들은 너무도 열심히 살아가는 나머지 주위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 알아차릴 여유가 없다.”

한겨레(06. 11. 10) 심리학 '빅뱅'

“무엇에 기대 살아야 하는지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는 세상이 됐습니다. 이제는 삶의 근거를 저마다 자기 내부에서 찾아야 합니다. 자기의 삶, 자기의 사랑의 서사를 스스로 써야 하는 때가 된 거죠. 자기 정체성을 다시 세우는 데 심리학만큼 좋은 길잡이가 있을까요?”

심리치료에 관심이 많은 작가 ㄱ씨는 심리학에 보통사람들의 흥미가 커지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연인관계, 부부 관계, 부모-자식 관계를 비롯한 수많은 인간관계의 숲 속에 외로운 나그네처럼 떨어져 있는 상황인데, 날은 어두워지고 길은 보이지 않는다. 각자 나그네가 된 사람들은 혼돈 속에서 갈팡질팡한다. 이럴 때 심리학이 등불 구실을 해준다는 것이다.

심리학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인터넷서점 ‘예스24’ 검색창에서 ‘심리학’으로 검색하면 무려 900종 가까운 책이 뜬다. 행복·공감·욕망·만족·성격 따위 수많은 주제어 뒤에 ‘심리학’이 따라붙은 책들이 사흘이 멀다 하고 출간된다. 가히 심리학의 시대다. 심리학 책들이 출판 시장의 흐름을 형성한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1990년대에 한 차례 출간됐고 2002년 개정판이 나온 <설득의 심리학>(로버트 치알디니 지음, 21세기북스 펴냄)은 지금까지 수십만 부가 팔렸다. 그러나 이 책은 엄밀히 말하면 영업 기술을 알려주는 책에 가깝다. 타인 혹은 고객의 심리를 정확히 읽어냄으로써 판매 목표를 달성하려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실용서인 셈이다.

심리학 책의 최근 흐름에서 나타나는 두드러진 특징은 관심의 방향이 ‘나’로 돌아섰다는 데 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엿보는 눈치의 심리학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정확하게 보는 자기 분석 심리학이 사람들의 관심사가 된 것이다.

‘나’를 주목한 전환점 <사람 풍경>

<나르시시즘의 심리학>을 펴낸 교양인 출판사의 이승희 편집집은 “책을 읽은 사람들이 자기 블로그에 올린 글을 읽어보니 대다수가 ‘나를 알고 싶어 이 책을 샀다’고 쓴 게 의외였다”고 말했다. 타인의 심리가 아니라 자기의 심리가 1차적 관심사인 셈이다. <미친 뇌가 나를 움직인다>를 낸 사이 출판사 권선희 대표도 같은 말을 한다.

“책을 내기 전에 시장조사를 했는데, 대형서점 심리학 코너를 찾는 독자들이 하나같이 책의 내용을 꼼꼼히 살펴봍는 거예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는다는 호기심 차원을 넘어 나를 제대로 알아봐야겠다는 진지한 태도가 잡히더라고요. ‘이거 내 얘긴데’ 느낄 때 책을 사는 거죠. 그래서 일부러 ‘나’를 넣어 책 제목을 지었습니다.”

<미친 뇌가 나를 움직인다>는 지난 7월에 나와 지금까지 7천부 정도가 팔렸다. 가볍지 않은 내용인 걸 감안하면 만만찮은 부수다. 심리학 책 흐름을 ‘자기’로 돌린 상징적 계기가 된 책으로 소설가 김형경씨의 <사람 풍경>(예담 펴냄)을 꼽는 이들이 많다. ‘심리 여행 에세이’라는 부제를 단 이 책은 지은이가 자기 자신의 심리를 알아가는 과정을 홀로 떠난 세계 여행과 겹쳐놓음으로써 설득력 있게 읽힌다. 여행중에 만난 사람들의 풍경이 곧 자기 안에 펼쳐진 내면의 풍경임을 이 책은 알려준다. 2004년 12월에 초판 발간 후 5만부 남짓 나간 이 책은 지난달 출판사를 바꾸고 책표지도 재단장해 새로 나온 뒤 1만4천부 정도가 더 나갔다.

최근에 나온 정신과 전문의 하지현씨가 쓴 <관계의 재구성>(궁리 펴냄)도 ‘관계의 가시에 찔려 휘청거리는 내 마음’을 이해하고 치유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사람 풍경>과 비슷한 노선에 서 있다. 다만 <사람 풍경>이 여행을 소재로 했다면, 이 책은 영화를 소재로 했다는 점이 다르다.

심리학에 관한 관심이 진지해지면서 처세서의 심리 실용서와는 무게가 다른 책들도 속속 출간되고 있다. 지난해 7월 나온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로렌 슬레이터 지음, 에코의서재 펴냄)는 미국에서 발달한 실험심리학 속으로 직진해 들어간다. 행동주의 심리학 창시자 버러스 프레데릭 스키너의 심리학을 비롯해 10가지 심리 실험을 흥미로운 이야기체로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은 출간 이후 4만부나 팔렸다. 비슷한 시기에 북폴리오 출판사에서 나온 <유혹의 심리학>(파트리크 르무안 지음)도 그리 만만한 책이 아니다. 그런데도 1만5천부 가량 팔렸다. 내용만 좋으면 사서 읽는다는 독자군이 형성된 셈이다.

북폴리오는 <유혹의 심리학> 성공에 힘입어 아예 ‘마인드북스’라는 심리 시리즈를 세우고 <욕망의 심리학> <마음의 치유>를 잇따라 펴냈다. 이 시리즈의 하나로 최근에 나온 책이 <여자의 심리학>이다. 나르시시즘 문제 가운데 특히 ‘여성의 나르시시즘’에 초점을 맞춘 이 책은 화려함과 초라함, 자주성과 의존성 사이를 극단적으로 오가는 ‘자기애적 인격장애’ 여성들의 자기 진단과 자기 치유를 돕는다. 지은이는 이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여성적 나르시시즘에 빠진 이들의 가장 큰 특징은 자립과 의존이라는 두 개의 대조적인 행동양식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극단적인 방법으로 그 딜레마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즉 자기 정체성을 상실할 정도로 남에게 의존하거나, 타인의 도움을 일절 거부하면서 지나치게 자주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모 아니면 도’라는 식의 이런 해결방식은 이들의 삶 전체를 관통한다.”

사회과학의 시대 가니 심리학이…

이 책은 나르시시스트 여성들의 고통과 극복을 보여줌으로써 같은 장애로 힘들어하는 여성들에게 ‘마음의 길찾기’ 를 함께 해보자고 권유한다. 책의 부제도 그래서 ‘자신감과 열등감 사이에서 방황하는 당신을 위한 심리분석’이다.

박미라(한겨레문화센터 ‘치유 글쓰기’ 진행자·전 <이프> 편집장)씨는 “먹고사는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다보니 사람들이 심리적 고통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부모 세대는 ‘가족 부양’이라는 지상과제 앞에서 목숨 걸고 돈만 벌었는데, 그 거친 삶이 자식 세대의 내면에 상처를 안겼고, 그 결과로 자기 마음을 알고 다스리는 데 관심이 커졌다는 것이다.

지난 시대가 사회과학의 시대였다면, 지금은 심리학은 시대라고 해야 할 것 같아요. 고통의 원인을 구조적 불합리에서 찾았던 것인데, 이제는 내 마음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치유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인식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는 겁니다. 구조적 고통은 그것대로 극복해야 하지만, 그 구조를 바꾸는 것도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죠. 저마다 마음이 평화로워지면 그만큼 세상을 개선하는 일도 잘 할 수 있겠죠.”(고명섭 기자)

06.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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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6-11-17 12:43   좋아요 0 | URL
'베스트 트렌드'라고 해야겠군요(제가 기억하는 기점은 류시화의 책들입니다). 그렇다면, 최근의 경향은 새로운 '공세국면'인가 봅니다...

가을산 2006-11-17 13:39   좋아요 0 | URL
서점에 가보면 신간 서적매대에 갈 수록 많은 면적을 차지해 가는 자기계발서, 부자되기 책들 보면 심란해요.

비로그인 2006-11-18 14:53   좋아요 0 | URL
행복한 이기주의자는 다른 명칭으로 오래전 출간된 적이 있었지요..
워낙 번역이 엉망이라서 독자가 재해석 해야할 지경이었는데..
이번 책은 좀 낫더군요. 괜찮은 책입니다.

내가 견지하는 삶의 양상이, 또는 아이덴티티가 크게 빗나간 것은 아니라는
안도 감을 주는 책.. 자기계발서


로쟈 2006-11-18 23:57   좋아요 0 | URL
저는 성격이 좀 고약해서인지 저를 '불안하게' 만드는 책들을 더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