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와 경험론'이란 주제에 대해서 생각해온 지 한달쯤 됐다. 라이크만의 <들뢰즈 커넥션>(현실문화연구)을 읽으면서부터이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동의나 공감의 여부와 무관하게 현대 영화나 문학 전공자라면 '들뢰즈'란 이름을 쉽게 무시할 수 없다. 푸코의 예언대로, 20세기가 들뢰즈의 세기로 기록될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그가 하나의 '문턱'을 이룬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누구나 들뢰지언이 될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한때 들뢰즈에 빠져볼 필요는 있는 것이다. 왜? 더 멀리 나가기 위해서. 더 멀리 도주하기 위해서.

 

 

 

 

그런 필요성이라면 다수가 공감할 수 있을 테지만, 실제적으로 들뢰즈에 빠져보는 건 쉽지 않다. 즉, 들뢰즈를 읽어나간다는 게 결코 쉽지 않다는 말이다. 그건 당신이 <천 개의 고원>(새물결)이나 <차이와 반복>(민음사) 어디를 들춰봐도 대번에 알 수 있는 일이다. 가령, <차이와 반복>의 옮긴이 해제에서 김상환 교수는 이렇게 고백한다: "이 책을 처음 여는 독자는 첫 대목부터 어떤 주름운동 속에 놓여 있는 재빠른 문장들 앞에서 강렬한 인상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애매한 개념들이 혼잡하게 난무하고 있다는 느낌도 받기 십상이다. 적어도 내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는 그렇다. 남들이 어렵다고 내팽개친 철학 책들을 별 불만 없이 읽곤 했던 나로서도 들뢰즈의 이 저서 앞에서 느낀 처음의 당혹감은 예외적이었다. 두세 번 반복해서 읽은 다음에야 겨우 번역할 용기를 얻을 정도였으니까."(685쪽)

프랑스 철학 전공의 엘리트 독자마저도 두세 번 반복해서 읽은 다음에야 겨우 감을 잡을 수 있었다는 책을 일반 독자들이 어찌 한번 읽고 이해할 수 있으랴(더구나 번역서로)? 철학에는 아마추어 독자인 나도 어제 <차이와 반복>의 '머리말'과 '사유와 이미지' 장에 나오는 한 대목, '어리석음의 문제'를 복사해서 귀가길 전철 안에서 읽었는데, '머리말'은 대충 읽을 수 있었지만, '어리석음의 문제'는 새삼 나의 둔함만을 확인하게 해주었다. 그래서 오늘 영역본과 러시아어본에서 해당 대목을 복사한바(책들이 무겁기 때문에 들고 다니면서 읽을 수가 없다) 이따 귀가길에 다시 도전해볼 작정이다(두세 번까지는 읽어줘야 한다지 않은가?).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두세 번 읽는 일이 효과를 볼 리는 만무하다. 들뢰즈로 가는 길, 혹은 들뢰즈를 읽는 방법에는 여럿이 있겠지만(들뢰즈 또한 리좀적 다양체일 테니까), 내가 가장 권하고 싶은 건 흄의 경험론을 통하는 길이다(무턱대고 <차이와 반복>에 달려드는 일은 아무런 훈련 없이 에베레스트 등정에 나서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사실 이러한 사실의 발견이 나로선 <들뢰즈 커넥션>을 읽은 가장 큰 성과이다. 책의 역자가 백미라고 권한 건 '감각'을 다룬 6장이지만,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2장 '실험'이었으며, 나머지 장들은 모두 그 변주로 이해되었다('실험'은 'experimentation'의 역어이며, 언제나 '경험'과 대체될 수 있는 용어이다. 우리식으로 '한번 해보는 것'이 거기에 해당한다. "한번 맛 좀 보지 그래?"라거나 "그런 게 다 경험이지!"라고 말할 때의 '경험'이 '실험'이기도 한 것).

알다시피 들뢰즈의 첫번째 책은 1953년 그가 26세의 나이에 펴낸 <경험론과 주체성>이다. 지금 생각에 희한한 일이지만, 국내의 많은 들뢰지언들이 유독 얇은 분량의 이 책만을 아직까지의 번역 목록에서 제쳐놓은 이유를 모르겠다(<들뢰즈 커넥션>을 읽으면서 나는 부랴부랴 영역본을 입수했다). 라이크만에 따르면, "들뢰즈는, 경험론의 비밀은 철학 그 자체에 속하는 것이지, 지식이나 과학을 보는 단순한 철학적 입장에 속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비밀은 바로 흄에서 드러났다. 흄과 함께, 경험론은 새로운 역량들을, 심지어 새로운 논리를 발견했다."(43쪽) 나는 거기에 이후에 펼쳐지게 될 들뢰즈 철학의 모든 포텐셜이 담겨져 있다고 생각한다.  

 

 

 

 

해서, 라이크만의 교훈을 되새기자면, "그대 들뢰즈를 읽으려는가, 흄을 들고 가는 걸 잊지 말기를!"이다. 참고로, 흄의 책으론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예전에 흔히 <인성론>이라고 불렸던 책)을 비롯해서 비교적 많은 책들이 번역돼 있으며 국내의 연구 수준 또한 낮지 않다. 참고할 만한 책들을 약간 나열하면 아래와 같다.

 

 

 

 

김효명 교수의 <영국 경험론>(아카넷, 2001)은 영국 경험론 전반에 대한 모범적인 개관이며, 최희봉 교수의 <흄>(이룸, 2004)은 흄 철학에 대한 평이한 입문서이다. <흄의 인과론>(서광사, 1998), <흄의 자연주의와 자아>(울산대출판부, 1999) 등은 '전문서' 범주에 속한다. 그나마 내가 예전에 읽었던 건 에이어 경의 <흄의 철학>(서광사, 1989)이라는 얇은 책이었는데, 대부분의 독자들이 그렇지 않을까 싶지만, 당시 흄에 대한 관심은 칸트를 읽기 위한 예비적인 성격의 것이었다(물론 흄은 문학적 필치가 뛰어난 철학자로 분류되기에 따로 읽어볼 만하다는 생각을 했었지만). 이른바 칸트를 '독단의 잠'에서 깨웠다는 이가 흄 아닌가? 내 생각에 그런 흄의 파워(역량)을 가장 잘 보여주는 철학자가 20대의 젊은 들뢰즈가 아니었나 싶다(1950년대 들뢰즈의 흄 강의가 소르본느의 전설이었다는 것은 '들뢰즈의 적' 바디우 또한 <존재의 함성>에서 언급하고 있는 바이다. 바디우 자신은 듣지 않았다지만).  

 

 

 

 

아쉬운 것은 들뢰즈의 가장 '평이한' 책이기도 한 <경험론과 주체성>에 대해서 국내의 들뢰지언들이나 흄 전공자들 모두가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 테면, 자신의 역량이 다 펼쳐지기 이전의 '배아적 들뢰즈'를 보여주고 있기에 일반 독자들이 접근하기에 가장 용이함에도 불구하고 <안티 오이디푸스>나 <천 개의 고원>으로 내모는 것은 조금 '잔인해' 보인다(들뢰즈? 거기서 좀 굴러보면 알게 될 거야!). 들뢰즈 '전문가'인 서동욱의 <들뢰즈의 철학>(민음사, 2002)에서도 들뢰즈의 '초월적 경험론'을 다루면서 흄 철학과의 관련이 아닌 '들뢰즈 인식론의 칸트적 배경'을 해명하고 있는데, 평탄한 길을 놔두고 굳이 험한 길을 에둘러 가야 하는지는 의문이다(물론 저자에게 칸트는 '쉬운' 철학자일 수 있지만, 일반 독자에게도 과연 칸트가 흄보다 만만하며 읽기 편한 철학자인지? 고명하신 <순수이성비판>을 과연 몇 명이나 읽었겠는가?).  

하지만, 정작 들뢰즈-라이크만의 흄은 (비판철학을 가능하게 한) '칸트 이전의 흄'이 아니라 (비판철학을 넘어선) '칸트 이후의 흄'이다: "이처럼, 흄은 칸트와 '가능성의 초월론적 조건들'에 대한 탐구의 막다른 골목 이후에 올 것이 무엇인지를 예견하고 있었다. 흄은 공통감의 경계들 또는 틀들을 교차시키고 공통감에 앞서는 관계들과 연결접속들을 만들어내는 개념적 실험가라는 유형을 예견했던 것이다."(25쪽, 강조는 나의 것) 여기서 '개념적 실험가'는 'conceptual experimenter'의 번역인데, '개념의 실험가'로 이해하면 되겠다. '개념의 실험가'이자 '발명가'가 바로 흄-들뢰즈가 말하는 '철학자'이며, 이것은 이성의 법정을 주관하는 '판사(judge)'로서의 철학자 형상과 대비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유한다는 것은 실험한다는 것이며, 무엇보다도 판단하는 것이기 아니기 때문이다.(For to think is to experiment and not, in the first place, to judge.)"(23쪽). 

요컨대, 철학에는 초월론과 경험론의 두 가지 계보가 있으며, 흄-들뢰즈가 권유하는 것은 '경험론으로의 개종', '경험론의 개종(empiricist conversion)'이다. 들뢰즈는 흄에게서 그가 발견한 경험론(이후에 자신의 경험론을 '초월적 경험론'이라고 명명)을 그가 애호했던 모든 시인, 작가, 철학자, 화가, 영화감독들에게서 반복적으로 발견한다. 경험론에서만 '사건의 철학'이 구성될 수 있다고 믿었던 그는 오직 영국인과 스토아학파만이 '사건'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었노라고 유머러스하게 이야기하기도 했다. 들뢰즈를 동시대의 다른 철학자들과 구별시켜주는 것이 바로 이 '경험론'이었다: "동시에 들뢰즈의 '경험론'은 들뢰즈를 프랑스 동시에 학자들과 구별시켜 놓았다. 푸코에 따르면, 경험론은 들뢰즈가 현상학에서 벗어나는 방법이었다."(48쪽).

들뢰즈와 동시대 철학자들은 전후 3H(헤겔, 후설, 하이데거)의 압도적인 영향하에 자신의 철학을 전개했던 이들로, (제도권 밖의) 사르트르뿐만 아니라 (제도권 안의) 메를로-퐁티, 리쾨르, 레비나스, 데리다 할 것 없이 모두 현상학자이거나 현상학에서 출발했던 철학자들이다. 그러한 풍경에서 비껴나 있었던 이로는 영미철학뿐 아니라 영미문학에 대한 예찬자이기도 했던 들뢰즈가 유일하다 싶을 정도인바, 그의 철학적 조국은 다른 철학자들처럼 그리스나 독일이 아니라 영국이었다고 해야 온당할지도 모른다. 요컨대, 그는 '블루오션'의 철학자였던 것이다.

05. 10. 11.

P.S. 이 글은  '들뢰즈와 경험론'이란 짤막한(!) 글을 쓰기 위한 '노트'의 일부분이다. 이런 종류의 토막글은 이후에 짬짬이 몇 차례 더 씌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일단은 <들뢰즈 커넥션>을 근거로 해서 들뢰즈에게서 흄 철학과 경험론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사실 <들뢰즈 커넥션> 자체도, 내 경험에 의거하자면, 2장을 가장 먼저 읽는 게 효과적이다(번역상 미덥지 않은 대목들은 차후에 다시 지적하겠다). 그리고 1장을 읽는 식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 읽어야 할 것은 콜브룩의 <질 들뢰즈>(태학사, 2004)에서 '초월론적 경험론'이란 장이다(거기서도 '경험론'이란 절부터 읽어보시길). 그럼, 들뢰즈 철학의 윤곽이 잡힐 것이다.

'가장 쉬운 들뢰즈 입문서'로서 콜브룩의 책은 제값을 하는 책이지만, 들뢰즈의 핵심 아이디어를 제시하면서 '영화(론)'부터 소개하는 것은 불만스럽다(초보자에겐 아무리 그래도 '순서'가 중요한 법이다). 여하튼 그녀의 책에서 핵심적인 장을 셋만 고르라고 한다면, '사유의 역량들(역능들)', '초월적 경험론', '생성'을 고르고 싶다(바쁘신 분들은 참조하시길). 그리고, 이어서, 서동욱의 <들뢰즈의 철학>에 실린 보론 '경험론과 철학'을 읽어보시길. 내 경험상 들뢰즈에 접근하는 가장 평탄하면서도 용이한 루트이다. 다음 글에서는 그런 내용들에 대해서 좀더 부연하도록 하겠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4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자인간 2005-10-11 2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마디즘'을 읽고도 '천개의 고원'을 다 읽지 못하고 중도에 쉬고 있습니다. 로쟈님의 친절한 안내를 받아서 흄 등으로 내공을 쌓은 후 내년 쯤 다시 도전해 봐야겠습니다. 그나저나 이정우님의 베르그송 인터넷 강의 수강하면서 사서는 첫 페이지에 기겁을 하고 지금껏 책장에 꽃혀 있는 '영화 1'도 언젠가는 읽어야 할텐데... 가야 할 길이 참으로 멀군요.

yoonta 2005-10-12 0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콜브룩의 책은 분명 들뢰즈 입문서임에도...어떻게 보면 제일 난해하다 할수있는 씨네마를 앞에다 배치했으니..아마도 많은 독자들이 이책의 영화편을 읽다가 집어 던졌을지도..^^

저에겐 초기사상의 형성과정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는 콜브룩이나 라이크만의 책보다는 <들뢰즈 사상의 진화>라는 마이클하트의 책이 훨씬 들뢰즈를 쉽게 이해할수있게 만든 책이더군요...<경험론과 주체성>과 관련된 들뢰즈의 작업은 "총체를 가로질러 특정한 한 단편만 취했다"고 저자 스스로도 고백했다시피 스킵하긴 했지만 말이죠..베르그송으로부터 니체..스피노자로 나아가는 사상의 발전과정은 잘 서술한 책인 것 같더라고요..니체나 스피노자관련 해석은 좀 강한 해석이라는 견해도 있지만..말이죠..

로쟈 2005-10-12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자인간님/ 쉬엄쉬엄 즐기면서 가시길.^^ yoonta님/ 하트의 책도 (아직 다 읽지 못했지만)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겁니다. 들뢰즈 철학의 키워드를 저는 '경험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고 있는) 흄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되는 것인데요, 물론 들뢰즈로 가는 루트는 베르그송을 경유하거나, 니체를 따라가거나 스피노자를 길잡이로 삼는 등 여러 갈래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짐작에 흄이 가장 평탄하며 쉬운 길입니다(독자마다 편차는 있겠지만). 더불어, <니체와 철학> 등이 들뢰즈의 '초기사상'이라곤 하나 그러한 초기사상을 이해하게 해주는 배아적 사상을 <경험론과 주체성>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봅니다...

로쟈 2005-11-04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기준으로 삼은 건 전문가가 아닌 일반독자입니다. 그리고 제 요점은 일반독자의 '들뢰즈 독해'에 칸트가 덜 필요하다는 게 아니라 흄이 더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칸트를 공부하셨다면, 일반독자들에게도 보시하시길...
 

도서관에 새로 들어온 책을 대출하기 위해서 반납할 책을 고르다가 데이비드 호크스의 <이데올로기>(동문선, 2003)을 빼들었다. 예전에 한번 대출했다가 지젝에 관련된 절이 오역으로 범벅이 돼 있길래 반납하고 원본을 복사해두었던 책인데, 혹 앞부분은 낫지 않을까 싶어서 지난달에 다시 대출한 바 있다. 지젝에 관한 오역이 어느 정도냐면, 이미 2002년에 번역이 나온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혹은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을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목적>으로 옮기는 식이다. 아직 번역/출간되진 않았지만, 헤겔, 셸링 등을 다룬 (도서출판b의 근간목록으론) <부정성과 함께 머물기>(알라딘 제목으론 <부정태와 함께 체류하기>)를 <소극적으로 지체하기>로 옮기는 식이다. 역자가 헤겔 철학 등과는 전혀 '인연'이 없다는 걸 보여주는 것.

 

 

 

 

그런데, 마르크스주의에서의 이데올로기를 다룬 장에서 난데없이 '디외르디 루카치'란 표기가 튀어나온다(역시나 사단은 루카치이다). "모스크바로부터 후퇴: 디외르디 루카치"(119쪽)란 절제목에서인데, 원서에는 "THE RETREAT FROM MOSCOW: GEORG LUKACS"로 돼 있음에도 말이다. 사실 'Georg'는 독일식 표기이며, 그가 헝가리 출신비평가이지만, 우리는 흔히 '게오르그(게오르크) 루카치'라고 불러왔다. 그게 말이 안되진 않는 것이 그가 자신의 주저들을 대부분 독어로 쓴 데다가 헤겔-마르크스 사상의 계승자로서 그의 정신적인 조국 또한 '독일'이라고 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헝가리어로 표기된 그의 이름은 'György Lukács'이며, 이 경우 '지외르지' 혹은 '죄르지'로 발음하는 걸로 안다. 이런 경우 나로선 '게오르그 루카치'나 '지외르지 루카치'나 모두 무방하다고 본다. 그가 헝가리인이기 때문에 '게오르그'라고 부르는 것은 '틀렸다'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는 모양인데, 그런 '티내기'는 폼나는 루카치 연구서를 내는 식의 보다 생산적인 방향으로 투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개인적인 생각으론, 헝가리에서 현실정치가로도 활동했던 루카치는 '지외르지 루카치'로 독일 문예비평가이자 미학이론가로서의 루카치는 '게오르그 루카치'로 불러주는 게 어떨까 싶다. 

하여간에 그런 정도가 내가 아는 상식인데, '디외르디'라는 건 어떻게 가능한 건지 모를 일이다(루카치의 이름을 러시아어로 옮길 경우 '연음d'로 표기하는데, 그 경우에도 발음은 '죄르지' 정도이다). 'Georg'를 굳이 '디외르디'라고 옮겼으므로 이 경우는 'Lukacs'를 '루칵스'라고 옮기는 것과는 사정이 좀 다르다. 여기에 개입돼 있는 것은 '무지'가 아니라 '과도한 지식'이다. 출처를 알 수 없는. 물론 어느 경우든 상식을 넘어선다는 점에서는 공통되지만.

 

 

 

 

역자의 과도한 지식은 '원주'에서 인용 도서명을 표기하는 데에서도 발휘된다. 가령, 니체의 <도덕의 계보>의 경우, 원서에는 영역본 'On the Genealogy of Morals'이 사용되고 있는데, 역자는 굳이 'Genealogie de Moral'이라고 독어 원서명을 병기해준다. 그리고는 '도덕 계통학'이라고 옮긴다. 물론 '계보(학)'을 '계통학'이라고 옮길 수도 있을 것이다. 영역본 제목 대신에 원저명을 표기한 걸로 보아 '계통학'은 역자 나름의 신념을 반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어쩌면 새로운 니체 연구서라도 나올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 효과는 코믹하다.

푸코의 책 <사물의 질서: 인문과학의 고고학>의 경우에는 희한하게도 부제만을 불어로 표기했는데, 알다시피 <사물의 질서>는 영역본의 제목이고, 불어본의 원제가 <말과 사물>이다. 역자 나름의 원칙을 지키자면, 이 또한 불어본 제목으로 고쳐주었어야 했다. 물론 '원칙'이랄 것도 없는 것이 푸코의 영역본 제목들을 전부 불어로 병기해주면서 역자는 보드리야르를 비롯한 다른 저자들의 영역본 제목들은 그대로 놔두었다(아직 보드리야르는 못 읽으셨던 모양이다). 사정이 이러하면, 경의를 표해야 할 대상이 역자의 '노력'인지 '박식'인지 헷갈린다.

 

 

 

 

번역서들의 경우 책의 체제, 곧 제목이나 각주, 참고문헌 번역만을 둘러보더라도 그 수준을 어림짐직해볼 수 있다. 최근에 재번역돼 나온 마단 사럽의 <후기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조형교육)의 경우도 그러한데, 증보판을 옮긴 이 책의 초판 번역본이 <데리다와 푸꼬,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인간사랑, 1991)이다. 제목에 '후기구조주의' 대신에 '데리다와 푸꼬'가 들어간 것은 제일 처음 나오는 '라캉'을 (임의로) 제외하고 번역했기 때문이다(물론 이런 '바보 같은' 책을 무릅쓴 건 역자의 '과도한' 사명감이나 과시욕 때문인지 모를 일이지만, 아쉽게도 그걸 뒷받침할 만한 수준높은 번역은 못 되었다).

저자인 사럽은 <알기 쉬운 자끄 라깡>(백의, 1994)를 낸바 있는 나름대로 라캉 전문가이다. 그리고 그의 책 <후기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은, 원제에는 '입문(Introduction)'이란 말이 들어가 있는 데에서도 알 수 있지만, 후기구조주의 철학자들에 대한 적절한 입문서이다. 170쪽쯤 되던 초판에 30여 쪽을 덧붙여 증보판을 내면서 사럽은 프랑스 페미니스트들과 리오타르 등에 관한 장을 보강했다고 한다. 입문서로 개정증보판을 내는 걸 보면 영어권에서 그만큼 반응이 좋다는 얘기도 된다. 그런 사례로 내가 아는 건 리처드 커니의 <현대유럽철학의 흐름>(한울, 1997)인데, 여러 번 지적한 바 있지만, 이 조악한 국역본 대신에 원저 개정판에 대한 새 번역본이 빨리 나왔으면 싶다.   

거기까지는 좋다. 나는 서점에서 신간을 매만지며 잠시 지갑에도 손이 갔었는데, 웬걸 갑자기 '영혼'이 눈에 띈 것이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영혼의 현상학>이라고 옮겨놓은 것. 영역본 'Phenomenology of Spirit'를 그렇게 옮긴 것인데, 'spirit'에 그런 뜻이 없는 건 아니므로 역자에게 분격할 일은 아니겠다. 하지만, 인문서를 번역하면서 '정신현상학'이란 책 제목조차도 들어본 적이 없다면 좀 심하게 딱한 일이다. 혹 역자의 '신념'을 반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지만(대개 우리는 저마다 쓸데없는 신념들로 무장하고 있으므로), 그 신념이 대다수 헤겔 전공자들을 설득할 수 있을 만한 것인지는 지극히 의문스럽다. 게다가 마르크스-루카치의 용어 '사물화(reification)'를 '구체화'로 옮긴 걸 보면, 사정은 '오만'보다는 '무지'쪽이다.  

 

 

 

 

이미 지난번에도 주장한 바 있지만, 이런 사소한 실수들로 굳이 애써서 창피를 당할 일은 무어란 말인가? 조금만 주의하면 되고, 조그만 상식을 존중하면 될 일 아닌가? 들뢰즈와 관련한 책들에 요즘 붙드려 있다가 보니 두해 전에 사둔 <들뢰즈 철학과 영미문학 읽기>(동인, 2003)도 들추게 됐는데, "들뢰즈를 통해 나는 어떻게 영미문학을 다시 좋아하게 되었는가?"란 서론을 띄엄띄엄 읽으면서 나는 영미문학자들이 싫어졌다. 프랑스 철학자 '피에르 클로소프스키(Pierre Klossowski)를 '피에르 클로소위스키'라고 새로운 위스키(?) 이름으로 부르는 것도 어색한데, 두어 페이지 넘기면 '크로소위스키'로 진화하는 게 아닌가? 그리고는 다시 '클로소브스키'로도 돌아오는바, 도대체 '다중-필자'가 이 서론을 쓴 것인지 아니면 '분열증자'가 쓴 것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영미문학의 우수성'에 대해서(국역본 <디알로그>의 제2장은 '영미문학의 탁월함에 대하여'이다) 예찬하는 들뢰즈에 잔뜩 고무되어 있다고는 쳐도 같은 책에서 표기의 일관성 같은 기본적인 건 지켜줘야 하지 않을까?

또, '마조히즘'이란 말을 낳은 오스트리아의 작가 '자허 마조흐(Sacher-Masoch)'는 왜 '사커 마조크'로 계속 표기되는 것일까? 그리고 영국식 경험론(empiricism)에 짝이 되는 '이성주의(rationailsm)'는 관례에 따라 '합리론'이라고 표기하는 게 낫지 않을까? 이런 표기상의 '문제들'이 내용과 무관할 수 없다는 것을 다음의 인용문은 보여준다. 들뢰즈에게서 흄의 철학이 갖는 의의를 설명하는 대목인데, 필자는 <경험론과 주체성> 영역본 역자의 해설을 이렇게 요약/인용하고 있다(바운다스는 <의미의 논리>의 영역자이기도 한데, 최근에 나온 <들뢰즈 맑스주의>의 추천사를 쓰고 있기도 하다. 역자에 따르면, 그의 아내가 한국 여성이라고):

"<경험주의와 주체성>의 영어 번역판 서문에서 콘스탄틴 바운다스는 들뢰즈가 흄의 경험주의 철학을 통해 모든 종류의 초월철학에 대항하였고, 흄의 차이의 경험주의적 원리, 즉 모든 관계의 외재성 이론을 통해 소수자 담론을 구성해으며, 병렬적 나열물의 문제틀을 수립하였고, 초월의 장에 바로 주체적인 동격자들을 부여하는 모든 이론들의 미해결의 전제에 기초를 두고 입론하는 오류에 반대했다고 말한다." 이 정도면 들뢰즈보다 읽기 어려운 난해한 문장이다(참고로, '주체적인 동격자'란 'subjective coordinates'의 번역인데, 내 생각에 그건 '주체가 형성되는 좌표(계)' 정도의 뜻이다).    

책에 실린 모든 논문들이 다 정신없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이런 서론만큼은 정신없다. '꼼꼼함'이란 학자로서 갖춰야 할 기본 덕목이다. 그건 들뢰즈적인 다양체의 논리, 리좀의 논리, 도주/탈주의 논리를 따르더라도 마찬가지이다. 그러한 '꼼꼼함'의 시작은 고유명사의 표기부터 정확하고 일관되게 해주는 것이다. 그건 책이 신뢰받을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다...

05. 10. 11. 

 

 

 

 

P.S. '루칵스'란 표기로 애초에 이런 글을 쓰게 만든 역자의 또다른 책 <들루즈건축>(접힘과펼침)을 도서관에서 대출했다. 도서관에 책이 들어왔을 때 대출예약을 해둔 것인데, 그간에 장기대출중이었다. 짐작에 별로 기대할 게 없는 책이지만, '들뢰즈와 건축철학'이란 주제에 관해서는 어떤 얘기들이 오고가는지 잠시 귀동냥이라도 해보기 위해서 빌려온 것인데, 예상대로 도로 반납할 책이다(그냥 원서를 읽는 게 빠르겠다).

한번 지적한 적이 있는데, 저자 '라흐망(Rajchman)'은 '라이크만'이라고 표기하는 게 옳다(르페브르님이 직접 저자에게 확인한 것이다). 책의 서문은 (역시나 르페브르님이 번역한 바 있는) 폴 비릴리오(Paul Virilio)가 썼는데, 이 번역서에선 '파울 비리리오'로 표기돼 있다(후주에서는 또 '비릴리오'). 라캉의 스승인 프랑스의 정신의학자 '끌레랭부(Clerambault)'의 바른 표기는 '클레랑보'이다. '헤르메스' 연작으로 잘 알려진 철학자 '미셸 세르(Michel Serres)'를 '미셸 세리스'로 표기한 걸로 보아 역자는 프랑스어나 철학에 별로 '관심'이 없는 듯하다. 하다 못해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도 '르 코르부지에'로 표기했는데, '건축철학계'에선 둘다 쓰이는 것인지? '뒤샹(M. Duchamp)'은 어인 일로 '듀상'이라 읽으며, '베르그송(베르그손)'은 어쩌다 '베르크송'이 되는지? 프랑스 시인 '랭보(Rimbaud)'를 '링부'로 읽고, 독일 철학자 '프레게(Frege)'를 '프레헤'로 읽으며, 미국 철학자 '퍼트남(H. Putman)'을 '푸트남'으로 읽게 되면, 역자와 공유할 수 있는 '상식'이 무엇인지 알길이 없다.

요컨대, 책은 '비커뮤니케이션'을 온전하게 실행하고 있는, 그래서 들뢰즈가 경탄해 할 만한 '예술작품'이다. 아티스틱한 형태 외에 아무런 '의미'도 전달하지 않으므로. 그러니 시작부터 "세간에 떠도는 이야기의 근원으로 회귀하는 경향을 거스르는 직조기의 북의 속도가 흐르는 시간의 속도를 시사하듯 존 라흐망은 새로운 철학자다."(8쪽)라는 문장이 무슨 뜻인가를 묻는 일은 부질없다. 이건 '새로운 종의 책'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비릴리오 서문의 마지막 문장 "Such are the unanswered questions that press urgently upon us."(9쪽, 이 번역서엔 원서의 쪽수도 병기돼 있다!)이 "이미 해결된 물음은 우리를 향해 화살을 돌리고 있다"라고 전혀 엉뚱하게 번역돼 있다 하더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 일이다. 잘못은 세상을 만만하게 본 우리에게 있을 뿐이다.

역자는 책의 발행인이기도 한데, 대학원 시절 "라흐망의 현대 건축에의 들루즈 철학 응용"에 필을 받아서 "이 책이 우리말로 옮겨져 나오기를 진심으로 기다리다 지쳐 직접 번역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잘못은 제때 책을 번역하지 않은 '우리'에게 있다). 그리고 "이내 후회하였"다고 한다(책이 '끝내' 나온 걸 보면 후회가 부족했던 모양). "매끄럽지 못한 옮김과 오역의 가능성에 평생 느끼게 될 죄책감을 생각하면 식은 땀이 흐릅니다"라고 역자답지 않게 써놓았는데, 이 무슨 자학인 것일까? 애초에 문제는 그의 소견이었던 듯하다. "오역과 곡해가 난무할지라도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낫다'는 것이 저의 소견"이라고 밝혀놓았는데, '오역과 곡해가 난무'하고 있으니 소원은 성취한 셈이겠다. 그러나 충고하자면, '이런 번역은 없는 게 낫다'. 

우리사회에 건축학 전공자가 기여할 분야는 많으며 따로 식은 땀을 흘리면서까지 '건축이론계'를 염려하실 일은 아닌 듯하다. 그러니 "이 책은 들루즈적 건축 담론의 시발로서 우리 건축이론계에 조금이나마 논의의 원인제공이 되었으면 하는 작은 바램입니다."라는 역자의 '바램'은 역자만의 것으로 되돌려줌이 맞겠다. 그나마 역자나 독자 모두에게 다행인 것은 지난 11월에 나온 책이 벌써 절판된 것. 때로 '없는 책들'은 우리를 편안하게 한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니브리티 2005-10-11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서문에 굳이 아내가 한국여성이라고 따위의 시덥잖은 얘기를 왜 쓰는지 모르겠네요. 옛날에 대학 다닐 때 한 교수가 한국근대사를 강의했는데, 한 학기 내내 '이양선'과 이양선에 탄 선원의 족보--선원 제임스는 어디에서 살았는데, 아내는 누구고 무슨 일을 했으며 따위--만 강의하다 종쳤던 적이 있습니다...--;;

로쟈 2005-10-11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확하게 옮기면, "한국어판을 위해 특별히 추천의 글을 써준 콘스탄틴 바운다스와 그의 한국인 아내, 그리고 스티브 라이트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들뢰즈 맑스주의>, 30쪽)입니다. 제 생각엔 역자가 바운다스 부부와 안면이 있는 듯하고, 사적인 고마움이야 표할 수 있는 거 아닐까요?..

니브리티 2005-10-11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정확하게 옮기는 게 중요하죠..^^;; 기왕 말난 김에 창비의 원어에 가까운 인명/지명 표기의 원칙 때문에 가끔 분통을 터트리는 사람들을 봤는데 그건 어떻게 생각하세요? 로쟈님의 견해는 기왕에 불리던 이름들(비록 잘못 불려진 것이라 해도)에 지나치게 큰 잘못이 없는 한 그대로 가자...인 것 같은데요. 저야 로쟈님의 견해를 존중하지만..--;;

로쟈 2005-10-11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창비의 표기'원칙'에 대해선 불편해 하는 쪽입니다(물론 그것도 나름의 '체계'이긴 하죠). '원음'주의라는 건 요컨대, 과학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이니깐요. 거기서 원음주의란 건 (가능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비민주적'입니다. 소위 '현지인'이나 '전문가'만 알 수 있기 때문에(언제부턴가 백낙청 교수의 전공인 '로렌스'가 '로런스'로 바뀌어 있더군요). 게다가 외국어 표기는 외국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한글을 사용하는 한국인을 위한 것입니다(흔히 그렇게 발음하면 외국인이(!) 못알아듣는다고 걱정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런 게 걱정할 일이라면 세상은 파라다이스죠. 우리끼리 알아먹으면 됩니다).

제 의견은, 언어마나 사정이 다르긴 하지만, 철자 표기를 원칙으로 하되 발음을 고려하는 것입니다. 그게 그나마 다수의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는 체계입니다. 가령, 러시아어 표기의 경우, 경음체계(똘스또이), 격음체계(톨스토이) 두 가지가 상용되는데(일관성만 지켜주면 됩니다), '똘스또이'라고 해야 러시아인들이 알아들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착각입니다(정말로 못 알아 듣습니다. 강세가 '또'에 있기 때문에 '딸스또이'라고 해야 합니다). 문제는 남들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입니다...
 

폴 패튼의 <들뢰즈와 정치>(태학사, 2005)를 읽고 있다(패튼은 <차이와 반복>의 영역자이다). '들뢰즈와 정치'는 '들뢰즈와 철학'(구체적으론 '들뢰즈의 경험론')에 이어서 이번 가을에 계획하고 있는 들뢰즈 읽기의 두번째 테마인바, 패튼의 책은 그 주제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안내서이다. 내가 읽은 건 책의 '서론'인데, '정치철학자로서의 들뢰즈'를 읽기 위한 몇 가지 기본사항을 소개하고 있다. 그걸 따라가보면서 몇 마디 덧붙이는 것이 이 '메모'의 목적이다.

 

 

 

 

일단 무엇을 읽어야 할 것인가? 들뢰즈와 정치란 주제를 염두에 둔다면, 가장 기본적으로 읽어야 하는 것은 <안티오이디푸스>와 <천 개의 고원>이다. 네그리와의 한 대담에서 들뢰즈 자신이 인정한 것이지만, <안티오이디푸스>는 하나의 완전한 '정치철학서'이며, <천 개의 고원>은 '정치철학적 문제들의 목록'이다.

한편, <들뢰즈와 정치>의 역자는 시종일관 <앙티외디푸스>와 <천의 고원들>이란 독자적인 역어를 사용한다(<질 들뢰즈>에서는 '안티외디푸스' '안티오이디푸스'란 역어들이 더러 튀어나오기도 했다). 그건 물론 번역서의 모든 인용이 기존의 국역본들에 대한 참조 없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대한 '노골적인' 암시이기도 하다. 어려운 원서들이 계속 번역되고 있지만 아무도 믿어주지/읽어주지 않으니 소모적이면서 비생산적인 노릇이다. 들뢰즈가 염려하는 커뮤니케이션(소통)의 시대에, 들뢰즈의 바람대로 '비커뮤니케이션(non-communication)'을 가장 잘 실행하고 있는 동네가 국내 들뢰지안들의 동네가 아닌가 싶다.   

 

 

 

 

<안티오이디푸스>, <천 개의 고원>과 함께 읽어야 할 텍스트는 (1)"'많은 정치'라고 제목이 붙여져 있는 클레르 파르네와 함께 쓴 책인 <대화들>의 한 장", (2)"푸코에 대한 책", (3)'통제사회들에 대한 후기'라고 제목이 붙어 있는 푸코적인 주제들에 대한 에세이" 등이다. (1)에 해당하는 것이 <디알로그>(동문선, 2005)라고 옮겨진 책의 제4장 '정치들'이다(영역본의 장제목은 'Many Politics'). 그리고 (2)에 해당하는 것이 <푸코>(동문선, 2003)와 <들뢰즈의 푸코>(새길, 1995), 두 권이다. 그리고 (3)에 해당하는 것이 <대담 1972-1990>(솔, 1993/1994) 5장에 실린 '추신: 통제사회에 대하여'란 글이다. 이 5장은 '정치'란 제목을 달고 있는데, '통제와 생성'이란 제목이 붙은 네그리와의 대담 또한 들뢰즈 정치철학의 윤곽을 파악하는 데 아주 중요한 대담 텍스트이다.  

 

 

 

 

1993년 초에 초판이 나온 <대담>은 내게 들뢰즈에 대한 영감을 불러일으켰던 책이며, 이후에 들뢰즈의, 들뢰즈에 대한 책들을 지속적으로 사들이도록 한 '죄목'을 갖고 있다. 한데, 이번에 5장에 묶인 두 편의 글을 읽으며 따져보니까 대담의 부분부분을 단편적으로 읽었을 뿐 제대로 읽은 적이 그간에 한번도 없었다(12년 동안!). 하긴 지금의 관점에서 보자면, <대담>의 번역은 '골동품적인' 성격을 강하게 드러낸다. 비록 1992년에 나온 <소수집단의 문학을 위하여>와 함께 <대담>은 국내에 들뢰즈를 처음 소개한 '공로'가 인정되지만 번역서로서의 실효성은 이미 다한 것이 아닌가 싶고.(참고로 책자 형태로 나온 최초의 들뢰즈 번역은, 비교적 덜 알려져 있지만 내가 아는 한, 이정우 편역의 <구조주의를 넘어서>(인간사, 1990)에 실린 '리좀' 번역이다. 아마도 지금의 역자라면 재번역의 욕구를 강하게 느끼겠지만). 

이미 들뢰즈의 카프카론이 <카프카>(동문선, 2001)로 재번역돼 출간된 것이 수년 전 일이다. 해서 <대담> 또한 제대로 다시 옮겨질 때가 되었다. <들뢰즈의 철학>(민음사, 2002)의 '문헌목록'에서 서동욱도 지적한 바 있지만, 국역본 <대담>은 전체 17편의 글 중에서 12편만을 옮긴 부분역이다. 들뢰즈의 육성을 담은 입문서로서 더없이 요긴한, 그리고 훌륭한 책이므로 조만간 새롭게 완역되기를 기대한다.  

 

 

 

 

패튼이 나열한 목록들에 덧붙여져야 할 책이 최근에 번역돼 나왔는데, 니콜래스 쏘번(N. Thoburn)이라는 젊은 학자의(나보다 젊다!) <들뢰즈 맑스주의>(갈무리)가 그것이다. 표지에도 그렇고 이 책의 원제가 'Deleuzian Marxism'처럼 돼 있는데, 내가 확인한 바로 책의 원제는  <들뢰즈, 맑스, 그리고 정치(Deleuze, Marx, and politics)>(Routledge, 2003)이다.

책은 들뢰즈가 미완으로 남겨놓은 마지막 유작 <맑스의 위대함(The Grandeur of Marx)>에서 실마리를 얻고 있다. 한 들뢰즈 연구자의 소개를 빌면, "쏘번의 책은, 맑스주의의 핵심 텍스트들에 대한 면밀한 독해 속에서, 들뢰즈와 안또니오 네그리의 유사성과 차이점에 대한 분석 속에서, 그리고 들뢰즈의 정치학과 친화성을 갖는 1960년대와 1970년대 이탈리아의 오뻬라이스모 운동과 아우또노미아 운동의 정치이론 및 전략들에 대한 유익한 설명 속에서 (전체로서의 삶과 그 삶을 고양시키는 탈주선의 창출을 자신의 목표로 삼는 맑스주의자이자 코뮤니스트로서의) 들뢰즈의 정치적 기여를 구체적으로 보여줌으로써, 들뢰즈주의 연구가 결정적으로 전진할 수 있도록 돕는다." 해서, 이 가을에 읽을 책이 하나 더 늘었다...

05. 10. 03.

 

 

 

 

P.S. 본문에서 들뢰지언 동네의 '비커뮤니케이션'에 관해 언급했는데, 가령 서동욱의 <들뢰즈의 철학>(민음사, 2002)은 들뢰즈의 문헌 인용시 원저와 함께 자신이 옮긴 두 권의 역서, 그리고 (<천 개의 고원> 대신에) 연구공간 '너머' 자료실의 <천의 고원>을 사용한다. 소위 '전문연구자'가 원전도 아니고 그렇다고 공간된 번역서도 아닌, 저작권에도 저촉되는 번역을 굳이 인용하는 것은 이해하기 곤란하다. <천 개의 고원> 번역이 부분적으로 불만족스러울 수 있을지라도 인용시에 '부분수정'을 하면 된다(그렇다고 <천의 고원> 번역이 그토록 탁월한가?).

예전에 한 저널에서는 <천 개의 고원>(새물결, 2001) 출간에 맞추어 이 들뢰즈 책에 대해 서평을 쓴다면서 <천 개의 고원>이 아닌 <천의 고원>을 서평 텍스트로 삼은 적도 있었다. 혹 번역에 미비한 대목이 있다면, 그걸 지적해야 하는 것이 서평 아닌가? 스피노자-들뢰즈의 표현을 빌자면, 참으로 '슬픈' 일이되, 옆에서 보기에 한심하고 어처구니없는 광경이었다. 참고로, <들뢰즈의 철학>에서 가장 재미있는 대목은 '경험론과 철학'이란 보론이다. 책은 들뢰즈 철학에 대한 '학술적인' 안내서로서 훌륭하지만, (소수적인 책이 아니라) '다수적인' 책이다('소수문학'을 옹호/주창하는 들뢰즈이지만, 그의 말마따나 그런 경우에도 얼마든지 '다수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법이다).   

들뢰즈의 <대담> 번역에 대해서는 이미 완역 개정판이 나오기를 기대한다고 했으므로 군말을 덧붙이지 않겠다. '나치 수용소(Nazi camps)'를 '나치 군대'로 옮긴다거나 '자본가(capitalist)'를 '자본주의자'로 옮긴 것 등은 원문과 대조해보지 않아도 오역임을 알 수 있다. 번역하기 까다롭지만 'people'을 '대중'이라고 옮긴 것도 상식밖이다(김재인은 '민족'이라고 옮기고, 이진경은 '민중'이라고 옮겼다. <들뢰즈와 정치>의 역자는 '사람(들)'이라고 옮기고. 참고로 러시아어본은 '나로드' 라고 옮긴다. 가장 적합한 역어는 '나로드'의 역어이기도 한 '인민(人民)'이라고 보지만, 이게 공산주의 용어로 등록돼 있는 탓에 역어로서 불편을 야기한다. 가령, 'people to come'을 어떻게 옮기는가? 도래할 민족? 도래할 민중? 도래할 사람들? 좀더 생각해볼 문제이다).

<질 들뢰즈>, <들뢰즈와 정치> 역자의 '전매특허'는 '아상블라주'이다(<들뢰즈와 정치>의 첫번째 역주도 이에 관한 것이다). 'assemblage'의 역어인데, 불어에도 같은 단어가 있지만, 들뢰즈의 영역 용어로서의 'assemblage'는 불어의 'assemblage'가 아니라 'agencement'의 역어이다(<천 개의 고원>, 12쪽 참조. 이 또한 첫번째 역주이다). 그러니 제대로 번지수를 맞추려면 '아장스망'이라고 했어야 하지 않을까? 한데, 거의 대부분의 들뢰즈 연구자들이 '배치(물)'라고 옮겨쓰는 단어를 굳이 '아상블라주'라고 (이상하게) 음역해주면 독자들의 이해가 용이해지는가? 제멋으로 하는 번역이라고 쳐도 좀 희한한 취향이 아닐 수 없다(이런 취향만 아니라면 내 생각에 역자는 더 완성도 높은 번역을 해낼 수 있는 역량을 갖고 있다).

내가 읽은 서론에서의 오역 두 가지. "그[들뢰즈]의 단언에 따르면 정치적이라고 불릴 가치가 있는 어떤 철학도 자본주의의 본성과 진화를 설명해야만 한다."(28쪽) 네그리와의 대담에서 나오는 대목인데, 맥락을 모르고 읽어봐도 '설명'에의 요구는 조금 과도하지 않을까? 역자가 옮긴 것은 'take account of'이고, 그건 '고려하다' '주의하다' 정도의 뜻이다('설명하다'는 'account for'이다). 역시 같은 대담에 나오는 것인데, "이것이 인간조건에 대한 염세주의나 허무주의, 네그리가 시사하는 것처럼 일종의 비극적인 약속어음을 초래하게 되는 것이라고 보야야 할까?"(33쪽) '비극적인 약속어음'? 이런 튀는 번역이 오역이 아닐 수가 없다. 'tragic note'를 옮긴 것인데, 의당 '비극적 음조'라고 옮겨져야 한다. 물론 'note'에는 '약속어음'이란 뜻도 있지만, 이 경우엔 (다른 오역들이 그렇듯이) 써먹을 수 없는 '부도어음'이다...

05. 10. 04.


댓글(8)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을산 2005-10-03 2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비로그인 2005-10-03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헿헿... OTL

yoonta 2005-10-04 0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들뢰즈맑스주의라는 책..저도 저 책은 일단 사 두긴 했는데..갈무리에서는 왜 항상 자신들이 펴낸 책이름에서 맑스주의를 강조하는건지 모르겠더군요. 전에 나온 푸코와의 대담책도..ramarks on Marx라는 원재를 푸코의 맑스라고 바꾸었고..이번도 그렇고요..

맑스와의 친화성을 강조해야 책이 잘팔린다고 생각해서인지(이렇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네요-_-)..아니면 자율주의와 맑시즘의 관련성을 강조하는 것이 이론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해서인지.... 혹은 자율주의가 가지는 아나키즘적 지향성을 맑시즘의 이론적 정교함으로 보완하려는 성격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지요..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엔..자율주의(혹은 코뮨주의)와 들뢰즈와의 거리는 가까울지 몰라도 코뮨주의(혹은 아나키즘)와 맑시즘사이의 거리는 꽤 멀다고 생각하는데...이번에 나온 들뢰즈 맑스주의라는 책에서 들뢰즈주의?로 표현되는 코뮨주의(혹은 아나키즘)와 맑스주의와의 거리를 얼마나 좁히고 있는지는 일단 읽어보고 평가해 볼 일이군요.

로쟈 2005-10-04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산님/수정하고 첨가한 대목이 있으므로 참고하시기 바랍니다(다시 퍼가심이). yoonta님/정신분석에서는 '강박증'이라고 하잖아요. '독실한 신앙'이란 게 옆에서 보기엔 좀 불편하긴 하죠...

palefire 2005-10-04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eople(peuple)의 국역은 골치거리긴 한데, [시간-이미지]와 [질 들뢰즈의 시간 기계]는 모두 '민중'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나마 '인민' 빼고는 제일 나은 듯해 보입니다. 그리고 국내 들뢰지언들의 '비커뮤니케이션'은 한탄스러운 일이지만 쉽게 나아질 것 같지 않아보여서 역시 안타깝습니다.

로쟈 2005-10-05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맑스주의자'로서의 들뢰즈도 고려한다면 더욱 그렇지요). 아무래도 '민족'에는 다른 뉘앙스들이 많이 겹쳐져 있어서요(김재인씨가 어떤 의향에서 그렇게 옮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들뢰즈 커넥션>에서 좀 께름칙하더군요)...

myth 2005-10-05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동욱이 <들뢰즈의 철학>에서 수유판 '천의 고원'을 인용한 것은 김재인의 정식 번역본 '천 개의 고원'에 대한 불만이나 여타의 대단한 이유 때문이 아니라, 저술 당시 저자가 유학 중이었던 탓에 그 무렵 출간된 새물결판을 구해볼 수 없어서였다는 해명을 어디선가 본 것 같아요.

로쟈 2005-10-06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자 나름의 사정이 있겠지만, 제가 좀 이해할 수 없는 건 <천 개의 고원>만 원서로 읽을 수 없었다는 얘기도 되기 때문이죠. 그가 다른 학술적인 글들에서 번역본을 인용하는 경우는 거의 드물며, 들뢰즈는 자신이 전공하는 철학자인데 말입니다. 더불어, 유학중이어서 책을 구해볼 수 없었다는 건 아시겠지만, 넌센스입니다(필요한 책을 다 구해볼 수 있습니다). 구해볼 필요를 못 느꼈다고 해야 정확하다고 봅니다...
 

비가 제법 많이 내리는, 어느덧 9월의 마지막날이다. 지난번 연재의 글을 쓴 게 '그 여름의 끝'이었는데, 그 새 한달이 지난 것. 10월의 마지막 날(정확히는 '밤')만큼 운치가 있거나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건 아니지만, 9월의 마지막 날을 '기념'해서 몇 권의 책을 꼽아본다. 사실 지난 한달은 지난 2월에 귀국한 이래 나의 취향에  맞는 책이 가장 적게 출간된 달이기도 하다. 해서, 이 연재가 다소 늦어진 것은 나의 게으름과 무관하다는 걸 미리 알려드린다(소수의 애독자분들이 있기 때문에).

 

 

 

 

그럼에도 첫손가락에 꼽고 싶은 책은 브라이언 매기의 <트리스탄 코드>(심산)이다. '바그너와 철학'이란 부제를 갖고 있는데, 소개에 따르면 "바그너의 음악에 미친 철학의 영향"을 주로 밝히면서 "그 영향이 그의 오페라 - '트리스탄과 이졸데',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파르지팔', 그리고 특히 '니벨룽의 반지' - 에 실제로 어떻게 나타나 있는지 보여준다." 계속 옮겨오자면, "또한 지은이는 예술적 천재인 바그너뿐만이 아니라 역겨울 정도로 심한 편집증과 이기주의 성향을 지닌 바그너까지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바그너가 어린 니체와 나눈 길고도 친밀한 친교와 영향 관계도 다루고 있다. 그 다음으로 저자는 바그너가 가장 크게 오해받는 나치와의 연관이 허상이라는 해명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였다."

알다시피 지난 토요일부터 어제까지 러시아의 거장 게르기예프의 지휘로 바그너의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가 국내 초연되었다(4부작의 18시간짜리 공연).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규모나 지명도로 봐서는 '올해의 공연'으로 꼽힐 만한 대작이다. 이와 무관하지 않겠지만, 이 달에는 바그너와 그의 오페라에 관련된 책들이 몇 권 출간됐고, <트린스탄 코드>도 그 중 하나이다. 일단 시의성이 있는 책. 게다가 나로선 저자의 책들을 읽어본 경험이 있어서 친숙하고 또 600쪽이 넘는 분량도 미덥기 때문에 이 책에 높은 점수를 주게 된다.

저자인 브라이언 매기는 전형적인 옥스포드 철학자라는 인상을 주는데, 내가 읽어본 그의 책은 <현대 철학의 쟁점들은 무엇인가>(심설당, 1989)란 두툼한 책과 <칼 포퍼>(문학과지성사, 1982)란 얇은 책이다(내가 읽지 않았지만, 철학입문서로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철학의 역사>(시공사, 2002)도 나와 있다. 원제는 '철학 이야기'). <현대 철학의 쟁점>은, 기억에 여러 철학자/작가들과 나눈 방송대담인데, '철학과 문학'이란 주제에 대해서는 영국 최고의 지성파 여성작가 아이리스 머독과 나눈 대담을 기록하고 있다. 철학입문서로 추천할 만하다.

바그너의 음악에 대해서 문외한이기 때문에, 니체와의 관련(<바그너의 경우>)을 제외하면 바그너란 이름이 내게 떠올려주는 이는 대학 1학년때 교양영어를 강의하신 시인-교수님이다. 교재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글이 괴물-천재 음악가 바그너에 관한 에세이였고, 그걸 빌미로 해서 바그너와 그의 음악세계에 대해 귀동냥을 했던 것이 바그너에 대한 나의 상식/교양의 8할을 차지한다. 나머지 2할? 코폴라의 영화 <지옥의 묵시록>에 등장하는 주제음악(바그너와 영화음악을 얘기할 때 빠지지 않는 단골 레퍼토리이다). 그것이 내가 경험한 '바그너'의 거의 전부인바, 작년에 나는 이 영화의 러시아판 비디오CD(감독판)를 사서 보기도 했다. 혹 10년쯤 후엔 <니벨룽의 반지>를 '경험'하고픈 욕심과 여유를 갖게 될는지 모를 일이다.(한편, 1952년에 독어본이 나왔던 아도르노의 바그너론이 <바그너를 찾아서(In Search of Wagner)>란 제목으로 1981년에 영역됐었고, 올해 개정판이 나왔다. 개정판의 서문은 '오페라광' 슬라보예 지젝이 쓰고 있다).  

 

두번째 책은 미술에 관한 것이다. 스티븐 컨의 <문학과 예술의 문화사 1840-1900>(휴머니스트). 원제는 '사랑의 눈길들: 1840-1900년 영국과 프랑스의 회화와 소설에 나타난 시선'이다. 원제는 책의 내용과 주제에 대해서 대부분을 이미 말해주는데, 작년에 나온 같은 저자의 <시간과 공간의 문화사 1880-1918>(휴머니스트)와 짝을 이루는 책이다. 저자는 "19세기 문화의 중심이었던 영국과 프랑스의 회화와 문학 속 '남녀의 시선'에 주목"하며, <시간과 공간의 문화사>에서와 마찬가지로 "19세기를 다양한 각도에서 관찰하고 전방위적으로 조명하는 솜씨를 보여준"다고. "보들레르, 빅토르 위고, 조지 엘리엇, 토머스 하디, 샬럿 브론테 등의 시와 소설, 그리고 130여 점의 고갱, 르누아르, 드가, 마네, 밀레이, 로세티, 티소, 번 존스 등의 회화 작품들이 풍성하게 등장"한단다. 그러니 19세기 문화사 도감으로라도 서가에 꽂아둘 만하지 않은가? 참고로 20세기 프랑스 철학에서의 시선의 문제를 다룬 책으론 마틴 제이의  <내리깐 시선(Downcast eyes : the denigration of vision in twentieth-century French thought)>(1993, 632쪽)이 방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일종의 지성사. 마틴 제이는 <변증법적 상상력: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역사와 이론, 1923-1950>(돌베개, 1981)의 저자이다.

 

 

 

 

세번째 책은 세 권의 시집이다. <유랑시인>(한길사)은 "우크라니아의 역사와 시정(詩情)을 탁월하게 묘사해 우크라이나의 국민시인으로 추앙받는 타라스 셰브첸코의 대표 장시(長詩) 21편을 엄선해 묶은 책. 맑고 순수한 개인적 정서를 노래한 서정시나 환상적 담시뿐만 아니라, 뛰어난 작품성을 인정받는 우크라이나의 역사와 현실을 소재로 삼거나 억압적 정치 체제와 농노제를 반대하는 혁명적 정치사상을 담고 있는 주요 시들을 싣고 있다." 더불어 꽤 많은 분량의 충실한 해체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평전의 역할도 겸하고 있다고. 작년인 2004년 겨울 '오렌지 혁명'으로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우크라이나는 얼마전 유센코(유시첸코) 대통령이 혁명의 동지이자 상징이었던 티모센코 총리와 갈라섬으로써 다시금 외신란에 오르내렸는데(정치의 꽃 또한 '화무십일홍'이다), <유랑시인>은 좀 다른 역사적 맥락과 시각에서 우크라이나를 바라볼 수 있도록 해줄 듯하다.

 

 

 

 

 

참고로, 우크라이나 출신의 가장 위대한 작가는 니콜라이 고골(1809-1852)이지만, 그는 (우크라이나어가 아닌) 러시아어로 썼다. 그는 우크라이나 민속과 민담을 소재로 한 <지칸카 근촌 야화>(8편의 이야기 가운데, 6편이 우리말로 번역돼 있지만 절판됐다)로 러시아문단에 데뷔하게 되며 우크라이나를 배경으로 한 역사소설 <대장 불바(불리바)>를 쓰기도 했다(우리에겐 주로 '아동물'로 소개돼 있다). 드라마작가로서의 그의 대표작은 <검찰관>(1836)인바, 이 책은 얼마전에 새 번역본이 출간됐다(조주관 역, 민음사). 그리고 이 작품은 10월에 러시아의 저명한 연출가 발레리 포킨이 이끄는 알렉산드린스키 극단에 의해 '(수원)경기도문화의전당'과 '(서울)예술의전당'에서 공연된다. 포킨의 <검찰관>은 1910-20년대 혁신적인 연출가 메이에르홀드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한데, 메이에르홀드의 <검찰관> 초연은 지난 1926년 겨울에 있었고, 벤야민은 그 공연을 직접 본 소감을 <모스크바 일기>(그린비)에 간단히 적고 있다(이 '전설적인' 공연에 대해서 벤야민이나 당대 관객들은 다소 불만이었는데, 배우였던 메이에르홀드의 아내가 너무 '설쳤다'는 것도 불만의 한 이유였다). 나는 오늘 포킨의 공연을 예매했다. 

 

 

 

 

두번째 시집은 한국계 러시아 음유시인 율리 김의 내한공연에 맞춰 출간된 <율리 김, 자유를 노래하다>(뿌쉬낀하우스)이다. 공연은 10월말로 예정돼 있는데, 이번에 나온 시집에는 그의 음반 2장이 부록으로 포함돼 있다. 율리 김이란 이름을 나는 작년에 모스크바에 체류하면서 처음 듣게 되었는데, 한국계 가수로는 대중가요를 부르는 '아니타 최'(빅토르 최와는 어떤 관계인지 모르겠지만, 이름 자체는 빅토르 최를 연상시킨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요절한 로커 빅토르 최는 러시안 록의 '전설'이다)와 함께 두드러진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20세기 후반 러시아의 가장 대표적인 음유시인은 아르바트거리에 동상이 세워져 있기도 한 오쿠자바(아꾸자바)이다. 그의 시집은 <나의 사랑, 나의 인생>(새미, 2001)으로 번역/소개돼 있다. 오쿠자바가 서정적이라면 내가 TV에서 자주 들은 율리 김의 노래는 경쾌하면서도 서정적이고 유머러스했다. 동시대 러시아 음유시인의 계보를 한국계 러시아인이 잇고 있다는 사실은 기분 좋은 일이다.

 

 

 

 

세번째 시집은 평론가를 겸하고 있는 권혁웅 시인의 <마징가 계보학>(창비)이다. 오늘자 한겨레의 북리뷰란에서 크게 소개된바 있으므로 중언부언할 필요는 없겠다. 그 리뷰는 '산동네의 추억, 아픔 삭인 너스레'란 제목을 달고 있는데, 그것만으로도 요즘시의 대표적인 경향이라고 하는 '추의 미학' 혹은 '엽기시'로부터 그의 시들이 한 걸음 떨어져 있다는 걸 암시받을 수 있다. 최재봉 기자의 연상대로, 시집은 유하의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나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 같은 시집들을 떠올리게도 하는데, 권혁웅은 '성북구 삼선동' 키드쯤 된다. 삼선동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70년대말 서울 산동네의 풍경이라는 것은 어림짐작할 수 있는 바다. 산동네 이야기라는 점에서 최기자는 이번 시집을 요절 작가 김소진의 <장석조네 사람들>의 시적 버전이라고도 평한다. 아무려나 그 시절, 그 동네의 얘기가 마음을 잡아끌 만한 독자들이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이다.  

시인 권혁웅보다 내게 익숙한 건 평론가, 혹은 문학연구자 권혁웅이다. 나는 그의 학위논문이기도 한 <한국 현대시의 시작방법 연구>(깊은샘, 2001)를 좀 읽어본 적이 있는데, 거기서 그는 은유, 환유, 제유라는 세 가지 수사학(적 전략)으로 한국 현대시작법의 계통을 세우려고 시도했다. 적어도 나의 견문으론 우리시 연구에서 시의 의미론이나 주제론 이전에 통사론에 주목하고 이를 자세하게 분석해 들어가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 그것이 전문연구서들을 그닥 많이 들여다보는 편이 아니면서도 그의 책을 사서 읽어본 이유이다.(한편으로 얼마전 나는 한 술자리에서 이 시인-평론가와 몇 마디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엽기시' 계열을 쓸 수 없을 것 같은, 푸근하고 마음씨 좋은 시인이었다. 단, '고스톱에 관한 보고서' 같은 제목의 시들로 미루어보건대, 그와 고스톱을 치는 것만은 삼가해야 할 듯. 짐작에 그는 마음좋게 피박, 광박 다 덮어씌울 '실력자'이므로).  

 

 

 

 

 

다시 책얘기로 돌아와서, 네번째 책은 원로 철학자 박이문 선생의 <논어의 논리>(문학과지성사)이다. 그의 <노장사상>(문학과지성사, 2004, 개정판)을 읽어본 독자라면 이번의 '논어 이야기'에도 눈길이 갈 만하다. 저자가 비록 서양철학 전공자이긴 하나 글에서 논리(로고스)를 끌어내는 일에서 동서양의 분별은 사소하다. 고려대에서 동양철학을 가르치는 이승환 교수는 "나 자신을 보기 위해서 우리는 거울을 필요로 한다. 때로 거울은 내가 모르고 지내던 나의 모습을 드러내주기도 한다. 박이문 교수의 <논어의 논리>는 정작 우리 자신이 모르고 지내던 <논어>의 가치를 새롭게 드러내주는 거울과도 같은 책이다."라고 추천하고 있기도 하다. 너무도 많은 '논어'들 가운데, 분량이 가장 컴팩트하다는 것도 이 책의 장점이다. 우리도 때로는 얇고 투명한 책들을 읽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다. '논리'를 다룬 책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끝으로 다섯번째 책은 김경만 교수의 <담론과 해방>(궁리). '비판이론이 해부'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데, 국내에서 나온 책으론 드물게도 서구 사회학 이론과 정면으로 대결하고 있는 책이다. 소개에 따르면 "저자는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모든 지식인이 이론적 비판을 통해 사회.정치.문화적 변동에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는 믿음'이 강조되어 왔다고 지적하고, 이렇게 우리가 당연시하는 지식인들의 사회적.정치적 역할이 우리가 당연하다고 상정한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저자의 말을 좀더 옮기면, "우리는 이제 고도로 추상적인 이론적 논의를 사회나 정치개혁에 도움이 안 된다는 구실로 외면하면서 하버마스 같이 평생 고도로 추상적인 이론을 추구해 온 이론가들을 한편으로는 존경하고 대접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버려야 할 때가 됐다" 더불어, "독자적 한국사회이론을 만들어 내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서양의 이론에 의존해왔다는 자성만으로는 가능하지 않고, 그들 이론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그들과의 '비판적 대화'를 유도해냄으로써만 가능할 것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바로 그러한 '비판적 대화'의 시도인 셈.

한국과 미국에서 동시에 출간된 이 책에 대한 반응은 뜨거운 듯하다. 단적으로 대가급 철학자인 지그문트 바우만의 추천사는 이렇다(바우만의 책들은 러시아어로도 번역돼 있다): "김경만은 <담론과 해방>에서 우리 시대 가장 강력하고 영향력 있는 사상가들이 극복하려고 했던 장애물들, 즉 그들이 제기했지만 결국 적절한 답을 찾지 못했던 문제들, 또한 그들의 저작에서 제기되었어야 했지만 그들이 피하거나 간과했던 문제들이 무엇인가에 대해 폭넓게 분석하고 있다. 지식이 가지는 윤리적 영향력과 지식이 인간의 자유를 획득하는 데 할 수 있는 역할이 무엇인가에 관심을 가진 어느 누구도 김경민의 분석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 문제를 풀려는 미래의 모든 시도는 이 책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이 정도 반응이라면, '비판적 대화'의 물꼬는 트인 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경만 교수의 다른 책으론 작년초에 나온 <과학지식과 사회이론>(한길사)과 번역서 <지식과 사회의 상>(한길사, 2000)이 있다. 그런 '전력'에서 알 수 있지만, 저자는 과학/이론 사회학에 정통한, 한국에서는 좀 희귀한 사회학자이다. 참고로, 분야는 조금 다르지만, 도전적인 자세로 '이론 다시 읽기'를 시도하고 있는 책으론 두달쯤 전에 나온 산본마쓰의 <탈근대군주론>(갈무리)도 기억해둘 만하다. 나는 이 책의 번역서가 나오자마자 원서를 도서관에 주문해놓았었는데,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아마도 겨울쯤에나 읽어보게 될 듯하다. 그래, 그렇게 또 겨울이 올 것이다. 이 가을이 지나가면...

05. 09. 30.

 

 

 

 

P.S. 다섯 권에 꼽지는 않았지만, 눈에 띄는 책 중의 하나는 로베르 마조리의 <동물원에서 사라진 철학자>(마티)이다. 철학자들을 다루고 있는 책으론 좀 특이한데, "책에 실린 33개 항목들은 마치 연극의 한 장면이나 촌극을 찍은 즉석사진과도 같다. 그 안에서 철학자는 특정 동물들에 대해 말하는데, 때로는 위대한 사상가들이 어리석은 소리를 하기도 하고 때로는 새나 개나 옴벌레를 묘사하면서 사상의 본질을 몇 마디 우화로 표현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힐데가르트는 고래를, 칸트는 코끼리를 전설의 동물처럼 생각했다. 디오게네스는 낙지를 먹다가 개에게 물려죽었다는 일화가 있고, 루소는 오랑우탄을 일종의 유사 인류로 보았다. 소크라테스의 전기가오리나 니체의 사자는 그들의 사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기호라 할 만하다. 저자는 농담을 하는 척하면서, 한 철학자의 사상 세계를 슬쩍 일별하게 한다."(저자에 따르면, 들뢰즈/가타리는 '진드기', 데리다는 '고양이'와 짝지을 수 있다.) 

재치가 돋보이는 경쾌한 책인데, 프랑스에서 2005년 2월에 발간된 이 책은 2004년 7월 19일부터 8월 28일까지 프랑스 일간지 '리베라 시옹'에 여름 특집으로 연재되었던 것이라고 한다. (얇은 분량이긴 해도) 굉장히 빨리 번역/소개되는 셈. 특별히 이 책이 눈에 띈 것은 책의 몇 장을 몇 달 전에 미리 읽어볼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정인즉슨, '저명한' 역자께서 몇몇 장의 검토를 의뢰해오셨기 때문인데, 돌이켜 생각하면 과분한 일이었다. 내가 의견을 덧붙일 만한 여지가 없는 깔끔한 번역이었기에...

그나저나 '동물원에서 사라진 철학자'들은 다 어디로 간 건가? 이들을 다시 데려와야 하나? 이젠 철학을 제대로 공부하려면 수의학도 배워야 하는 건가?!..


댓글(5) 먼댓글(0) 좋아요(4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05-09-30 22:20   좋아요 0 | URL
오늘도 감사합니다. 잘 읽겠습니다.

마냐 2005-09-30 22:27   좋아요 0 | URL
지식동냥 잘하구 갑니다. 꾸벅.

Tamino 2005-09-30 22:48   좋아요 0 | URL
님의 부지런함이 부럽습니다. 덕택에 저같은 게으른 사람에게는 이책저책 사서 보고 실망하고 본전생각하는 일이 줄어드니 말입니다.

비로그인 2005-10-01 07:38   좋아요 0 | URL
오늘도 좋은 책소개 받고 갑니다. 꾸벅.

로쟈 2005-10-03 13:05   좋아요 0 | URL
찾아들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는 체'하는 도리를 간간이 실천하고 있을 뿐입니다...
 

'고유명사'란 말로 내가 지칭하고자 하는 것은 번역서들에 등장하는 인명과 작품명 등이다. 독자에게 생소한 고유명사라면 역자가 '특권'을 가지고 몇 가지 원칙(가령, 원음 표기나 교육부의 외국어 표기안 등)에 따라 '처음'으로 이름을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의 이름을 불러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관례(상식)에 따르거나 그에 준하여 표기하는 것이 옳다고 보며, 그를 따르지 않을 경우에는 타당한 이유를 명시해주는 것이 바람직하다(가령, 왜 '베르그송' 대신에 '베르그손'이라 표기하는지 등). 아무런 이유 없이, 역자의 독단에 따라 '임의로' 표기하는 것은, 그리하여 '오역'을 만드는 것은 착오가 아니라면 대개 무지의 결과이거나 오만의 소산이다. 그걸 '관습'에 대한 '도전'으로 미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갑자기 이런 얘기를 꺼내드는 것은 낮에 도서관에서 유진 홀랜드의 <프로이트의 거짓말>(접힘과펼침, 2004)이라는 '괴이한' 책을 잠시 들춰보다가(번역서의 제목 자체가 '거짓말'이다) 찾아보기에서 '루칵스'란 인명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루칵스? 눈치빠른 이라면 짐작할 수 있을 텐데, 헝가리 출신의 독일 비평가 'Lukacs(루카치)'를 그렇게 표기한 것. 가뜩이나 역자는 '들뢰즈'를 '들루즈'로 '가타리'를 '과타리'로 표기함으로써 자신만의 독자성(singularity!)을 과시하고 있는데, '루칵스'란 표기를 보니까 그 독자성이 무지/오만과 먼 거리에 있지 않다는 걸 알겠다. 본문의 내용이야 어떠하든 이 정도면 책을 집어들었다가 다시 놓을 수밖에.

사실 고유명사를 제대로 옮겨주는 건 생각만큼 쉽지 않은 일이지만, 어느 정도 지명도 있는 저자/작가들의 이름을 잘못 표기해주는 것은, 번역의 수준과 무관하더라도, 역자의 '무지'를 에누리 없이 드러내주는 것이므로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그런 '사소한' 오역으로 인상을 구긴다면, 억울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만한 '지명도'의 저자/작가명, 혹은 작품명이라면 요즘은 인터넷을 통해서 얼마든지 쉽게 검색하고 교정할 수 있다. 그러니까 그러한 무지와 오만을 거드는 것은 불찰과 다소간의 게으름이다. 가령, 리처드 커니의 <이방인, 신, 괴물>(개마고원, 2004)처럼 나름대로 잘 읽히는 번역서에서 프랑스의 비평가 '블랑쇼(Maurice Blanchot)'를 '블랑코'(40쪽)로 읽어주게 되면, 역자가 적어도 문학비평쪽으론 감감하다는 사실이 폭로되는 것이므로 유쾌하지 않은 일이겠다(현대미학사에서 나온 다른 책의 경우지만,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를 '바데스'로 옮기는 것도 마찬가지의 무지를 폭로한다).

비교적 양호한 번역서인 콜브룩의 <질 들뢰즈>(태학사, 2004)에서도 고유명사 표기에 대한 무신경함은  역자의 체면을 깎아먹는다.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를 초지일관 '보들리야르'라고 옮겨준 것은 착각에 의한 거라고 쳐도, 디킨스의 소설 <위대한 유산(Great Expectations)>을 <위대한 기대>로 옮기게 되면 무지와 함께 무교양이 한꺼번에 드러나버린다. <지하생활자의 수기> 혹은 <지하로부터의 수기>로 번역된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지하로부터 온 기록들(Notes from Underground)>이라고 영역본 제목을 직역하게 되면, '들뢰즈와 문학'에 대해서 역설하고 있는 저자 콜브룩과 역자는 코드가 잘 맞지 않는다고 밖에는 볼 수 없다. 조금만 검색해 보더라도 그런 정도는 충분히 '아는 체' 할 수는 있는 일인데, 역자가 고집을 부린 것은 (反들뢰즈적이게도) 문학을 너무 무시한 처사가 아닐까?

 

 

 

 

그런 경우에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에 나오는 단편 <고통스러운 경우(A painful Case)>가 한 부인이 기차에 치여죽은 사건을 다루고 있기에 <참혹한 사건>(김종건 역)이라고 옮겨져야 한다든가, 역자가 '레이몽 카버(Ramond Caver)'의 <짧은 컷들(Short Cuts)>이라고 옮긴 작품이 '레이몬드 카버'의 <숏컷>(집사재, 1996)으로 소설이 우리말로 번역돼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로버트 알트만의 '걸작' <숏컷>이라는 사실은 '초과적인' 지식일 수 있겠다. 그렇다면,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를 다시 쓴, 노벨상 수상작가 쿳시(J. M. Coetzee)의 <포(Foe)>(책세상, 2003)를 역자가 '코에체의 <적>'으로 옮긴 것도 이해할 만하지만, 좋은 번역서를 내놓고서 굳이 이런 류의 사소한 실수들로 '무식하다'는 인상을 줄 필요가 있는지?

물론 실수라고 하기엔 좀 불성실한 대목도 있긴 한데, 카프카의 <단식 광대(The Hunger Artist>를 '굶주린 예술가'(74쪽)와 '배고픈 예술가'(227쪽)로 다르게 번역해놓고 찾아보기에서도 각기 다른 항목으로 설정한 것은 좀 희극적이다. 이 모두가 피할 수 있었던 오류들이라는 건 너무도 분명하지 않은가?(참고로, 콜브룩이 164쪽에 '돈 데릴로의 위대한 포스트모던 소설 <하얀 소음>'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작품은 얼마전에 국역본이 나왔다. 돈 드릴로, <화이트 노이즈>(창비))

하여간에 이런 '사소한'(하지만, 무시하면 창피한) 오류들은 거의 모든 번역서들에서 튀어나온다. 하지만, 동구권이나 동남아 등 우리에게 표기가 생소한 지역 언어들의 표기에서가 아니라면(이런 건 좀 어렵다. 가령, 흔히 '무카로프스키'로 불리는 체코의 미학이론가의 바른 표기는 '무카르좁스키'이며, '벨라 발라즈'로 표기되는 헝가리 출신의 영화이론가는 '벨라 발라슈'이다, 등등).  웬만큼은 상식과 관례에 따라 착오/오류를 피해볼 수 있다. 이젠 피해도 좋을 러시아어 인명표기의 오류를 몇 가지 지적하면서 잔소리 같은 이 글을 마친다(나의 결론은 굳이 쓸데없이/억울하게 무식하다는 소리는 듣지 말자는 것이다. 무릇 아는 체하는 것은 지식인의 도리이다).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민음사, 2004)에 고골(고골리), 도스토예프스키와 함께 등장하는 몇 안되는 러시아인이면서, 유일하게 등장하는 러시아 철학자 '체스토프(L. Chestov)의 바른 표기는 '셰스토프'이다. 그의 책으론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니체: 비극의 철학>(현대사상사, 1987)이 우리말로 번역돼 있다(불어로 'Chestov'를 '체스토프'라고 읽는가? 그럴 법하지 않으므로, 아마도 '체스토프'는 '상상해본 러시아어'인 듯하다). 물론 <차이와 반복>은 훌륭한 번역서이므로 이런 옥의 티가 개정판에서는 교정되기를 기대한다.

독일의 러시아문학 애호가인 엘스베트 볼프하임 여사의 <마야코프스키와 에이젠슈테인>(아카넷, 2005)은 읽을 만한 저작이자 듀오그라피의 한 전범이다. 이 책을 최근에 재미있게 읽고 있는데, 역시나 고유명사 표기는 실수들을 포함하고 있다. 좀 낯선 인명으로 1920년대 연극이론가이자 극작가로 '추츠학(Chuzhak)'이라고 옮겨진 이는 '추작'(니콜라이 추작)이라고 표기해야 옳다('추츠학'은 독어식으로 읽어준 것인가?).

올랜도 파이지스의 훌륭한 러시아 문화사 <나타샤 댄스>(이카루스미디어, 2005)도 양호한 번역서인데, 유감스럽게도 러시아사의 가장 '위대한' 황제 '표트르 대제'를 모두 영어식으로 '피터 대제(Peter the Great)'라고 표기했다(영어의 '알렉산더'는 전부 러시아어로 '알렉산드르'이다). '피터'란 표현이 입에 더 익숙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경우엔 '예카테리나 2세'도 '캐더린 2세'라고 표기해야 하며, '모스크바'도 '모스코우'라고 읽어줘야 일관적인 것이 된다. 이 또한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거나 러시아 전공자의 교정을 거쳤더라면 피할 수 있었던 오류들이다...

05. 09. 29.


댓글(8)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palefire 2005-09-29 23: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다가 더 놀란 건 돈 드릴리오의 [화이트 노이즈]가 번역되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이제 핀천의 [중력의 무지개]를 기대해도 되는 걸까요?) 그래도 현재까지 가장 재미있었던(안타깝다기보다는 그냥 알고 깔깔 웃었던) 고유명사 오기는 보르헤스 전집 중 하나에 실렸던 '두레르'가 아니었을까 싶네요.(화가 중 한 명입니다)
Balasz가 '발라즈'로 표기되고 있는 건 오래도록 떠돌아서 저로서도 사실 약간은 낯섭니다. 이런 사례들이 영화 쪽에도 종종 등장합니다. Jean Epstein의 경우 국내에는 불어식 발음으로 '엡스탱'으로 거의 쓰지만 Epstein 본인은 유태계였고 생전에 자신을의 이름을'엡슈타인'으로 불렀다고 합니다.

딸기 2005-09-30 0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루칵스...는 심하군요. 저도 아는 이름을...

딸기 2005-09-30 0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하면 '조지 루칵스'도 될 수 있겠군요 ^^

로쟈 2005-09-30 11: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palefire님/ 지적하신 대로, 고유명사 표기는 사실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쿳시'만 하더라도 처음 보면 '코에체' 정도 거든요. 역자가 저자에게 문의한 결과 '쿳시'라고 읽어달랬답니다. 물론 '읽는 대로' 표기해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철자도 발음만큼 중요합니다), 인명의 경우 존중해줄 필요는 있는 것이죠. 스트롱베리님/ 예, '루칵스'는 좀 심한 경우죠. 제가 이런 글까지 쓰게 만들었으니...

마냐 2005-10-01 10: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루칵스. 지하로부터의 노트....모두 기절할 노릇임다. 어이없다 못해 웃음이 나오는.
근데, 로쟈님...국제뉴스 정리하다보면, 고유명사 표기 무지 어려버요. 동구권 이름의 경우도 여전히 어렵구, 포르투갈어도 어렵죠. 음음.

로쟈 2005-10-03 14: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냐님/ 어려운 거 맞습니다. 근데, 우리에게 이미 소개돼 있는 좀 이름있는 작가/작품들 정도는 '알아서' 써줘야 하지 않을까라는 것이죠. 안 그래도 어려운데...

숨은아이 2005-10-06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로쟈님 서재에는 처음 옵니다. 자료로 간직하고 싶어 퍼갑니다. 꾸벅.

수퍼겜보이 2005-10-08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오옷. 루카치 스펠링이 그런 것이었군요. 저도 퍼갑니다.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