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패튼의 <들뢰즈와 정치>(태학사, 2005)를 읽고 있다(패튼은 <차이와 반복>의 영역자이다). '들뢰즈와 정치'는 '들뢰즈와 철학'(구체적으론 '들뢰즈의 경험론')에 이어서 이번 가을에 계획하고 있는 들뢰즈 읽기의 두번째 테마인바, 패튼의 책은 그 주제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안내서이다. 내가 읽은 건 책의 '서론'인데, '정치철학자로서의 들뢰즈'를 읽기 위한 몇 가지 기본사항을 소개하고 있다. 그걸 따라가보면서 몇 마디 덧붙이는 것이 이 '메모'의 목적이다.

 

 

 

 

일단 무엇을 읽어야 할 것인가? 들뢰즈와 정치란 주제를 염두에 둔다면, 가장 기본적으로 읽어야 하는 것은 <안티오이디푸스>와 <천 개의 고원>이다. 네그리와의 한 대담에서 들뢰즈 자신이 인정한 것이지만, <안티오이디푸스>는 하나의 완전한 '정치철학서'이며, <천 개의 고원>은 '정치철학적 문제들의 목록'이다.

한편, <들뢰즈와 정치>의 역자는 시종일관 <앙티외디푸스>와 <천의 고원들>이란 독자적인 역어를 사용한다(<질 들뢰즈>에서는 '안티외디푸스' '안티오이디푸스'란 역어들이 더러 튀어나오기도 했다). 그건 물론 번역서의 모든 인용이 기존의 국역본들에 대한 참조 없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대한 '노골적인' 암시이기도 하다. 어려운 원서들이 계속 번역되고 있지만 아무도 믿어주지/읽어주지 않으니 소모적이면서 비생산적인 노릇이다. 들뢰즈가 염려하는 커뮤니케이션(소통)의 시대에, 들뢰즈의 바람대로 '비커뮤니케이션(non-communication)'을 가장 잘 실행하고 있는 동네가 국내 들뢰지안들의 동네가 아닌가 싶다.   

 

 

 

 

<안티오이디푸스>, <천 개의 고원>과 함께 읽어야 할 텍스트는 (1)"'많은 정치'라고 제목이 붙여져 있는 클레르 파르네와 함께 쓴 책인 <대화들>의 한 장", (2)"푸코에 대한 책", (3)'통제사회들에 대한 후기'라고 제목이 붙어 있는 푸코적인 주제들에 대한 에세이" 등이다. (1)에 해당하는 것이 <디알로그>(동문선, 2005)라고 옮겨진 책의 제4장 '정치들'이다(영역본의 장제목은 'Many Politics'). 그리고 (2)에 해당하는 것이 <푸코>(동문선, 2003)와 <들뢰즈의 푸코>(새길, 1995), 두 권이다. 그리고 (3)에 해당하는 것이 <대담 1972-1990>(솔, 1993/1994) 5장에 실린 '추신: 통제사회에 대하여'란 글이다. 이 5장은 '정치'란 제목을 달고 있는데, '통제와 생성'이란 제목이 붙은 네그리와의 대담 또한 들뢰즈 정치철학의 윤곽을 파악하는 데 아주 중요한 대담 텍스트이다.  

 

 

 

 

1993년 초에 초판이 나온 <대담>은 내게 들뢰즈에 대한 영감을 불러일으켰던 책이며, 이후에 들뢰즈의, 들뢰즈에 대한 책들을 지속적으로 사들이도록 한 '죄목'을 갖고 있다. 한데, 이번에 5장에 묶인 두 편의 글을 읽으며 따져보니까 대담의 부분부분을 단편적으로 읽었을 뿐 제대로 읽은 적이 그간에 한번도 없었다(12년 동안!). 하긴 지금의 관점에서 보자면, <대담>의 번역은 '골동품적인' 성격을 강하게 드러낸다. 비록 1992년에 나온 <소수집단의 문학을 위하여>와 함께 <대담>은 국내에 들뢰즈를 처음 소개한 '공로'가 인정되지만 번역서로서의 실효성은 이미 다한 것이 아닌가 싶고.(참고로 책자 형태로 나온 최초의 들뢰즈 번역은, 비교적 덜 알려져 있지만 내가 아는 한, 이정우 편역의 <구조주의를 넘어서>(인간사, 1990)에 실린 '리좀' 번역이다. 아마도 지금의 역자라면 재번역의 욕구를 강하게 느끼겠지만). 

이미 들뢰즈의 카프카론이 <카프카>(동문선, 2001)로 재번역돼 출간된 것이 수년 전 일이다. 해서 <대담> 또한 제대로 다시 옮겨질 때가 되었다. <들뢰즈의 철학>(민음사, 2002)의 '문헌목록'에서 서동욱도 지적한 바 있지만, 국역본 <대담>은 전체 17편의 글 중에서 12편만을 옮긴 부분역이다. 들뢰즈의 육성을 담은 입문서로서 더없이 요긴한, 그리고 훌륭한 책이므로 조만간 새롭게 완역되기를 기대한다.  

 

 

 

 

패튼이 나열한 목록들에 덧붙여져야 할 책이 최근에 번역돼 나왔는데, 니콜래스 쏘번(N. Thoburn)이라는 젊은 학자의(나보다 젊다!) <들뢰즈 맑스주의>(갈무리)가 그것이다. 표지에도 그렇고 이 책의 원제가 'Deleuzian Marxism'처럼 돼 있는데, 내가 확인한 바로 책의 원제는  <들뢰즈, 맑스, 그리고 정치(Deleuze, Marx, and politics)>(Routledge, 2003)이다.

책은 들뢰즈가 미완으로 남겨놓은 마지막 유작 <맑스의 위대함(The Grandeur of Marx)>에서 실마리를 얻고 있다. 한 들뢰즈 연구자의 소개를 빌면, "쏘번의 책은, 맑스주의의 핵심 텍스트들에 대한 면밀한 독해 속에서, 들뢰즈와 안또니오 네그리의 유사성과 차이점에 대한 분석 속에서, 그리고 들뢰즈의 정치학과 친화성을 갖는 1960년대와 1970년대 이탈리아의 오뻬라이스모 운동과 아우또노미아 운동의 정치이론 및 전략들에 대한 유익한 설명 속에서 (전체로서의 삶과 그 삶을 고양시키는 탈주선의 창출을 자신의 목표로 삼는 맑스주의자이자 코뮤니스트로서의) 들뢰즈의 정치적 기여를 구체적으로 보여줌으로써, 들뢰즈주의 연구가 결정적으로 전진할 수 있도록 돕는다." 해서, 이 가을에 읽을 책이 하나 더 늘었다...

05. 10. 03.

 

 

 

 

P.S. 본문에서 들뢰지언 동네의 '비커뮤니케이션'에 관해 언급했는데, 가령 서동욱의 <들뢰즈의 철학>(민음사, 2002)은 들뢰즈의 문헌 인용시 원저와 함께 자신이 옮긴 두 권의 역서, 그리고 (<천 개의 고원> 대신에) 연구공간 '너머' 자료실의 <천의 고원>을 사용한다. 소위 '전문연구자'가 원전도 아니고 그렇다고 공간된 번역서도 아닌, 저작권에도 저촉되는 번역을 굳이 인용하는 것은 이해하기 곤란하다. <천 개의 고원> 번역이 부분적으로 불만족스러울 수 있을지라도 인용시에 '부분수정'을 하면 된다(그렇다고 <천의 고원> 번역이 그토록 탁월한가?).

예전에 한 저널에서는 <천 개의 고원>(새물결, 2001) 출간에 맞추어 이 들뢰즈 책에 대해 서평을 쓴다면서 <천 개의 고원>이 아닌 <천의 고원>을 서평 텍스트로 삼은 적도 있었다. 혹 번역에 미비한 대목이 있다면, 그걸 지적해야 하는 것이 서평 아닌가? 스피노자-들뢰즈의 표현을 빌자면, 참으로 '슬픈' 일이되, 옆에서 보기에 한심하고 어처구니없는 광경이었다. 참고로, <들뢰즈의 철학>에서 가장 재미있는 대목은 '경험론과 철학'이란 보론이다. 책은 들뢰즈 철학에 대한 '학술적인' 안내서로서 훌륭하지만, (소수적인 책이 아니라) '다수적인' 책이다('소수문학'을 옹호/주창하는 들뢰즈이지만, 그의 말마따나 그런 경우에도 얼마든지 '다수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법이다).   

들뢰즈의 <대담> 번역에 대해서는 이미 완역 개정판이 나오기를 기대한다고 했으므로 군말을 덧붙이지 않겠다. '나치 수용소(Nazi camps)'를 '나치 군대'로 옮긴다거나 '자본가(capitalist)'를 '자본주의자'로 옮긴 것 등은 원문과 대조해보지 않아도 오역임을 알 수 있다. 번역하기 까다롭지만 'people'을 '대중'이라고 옮긴 것도 상식밖이다(김재인은 '민족'이라고 옮기고, 이진경은 '민중'이라고 옮겼다. <들뢰즈와 정치>의 역자는 '사람(들)'이라고 옮기고. 참고로 러시아어본은 '나로드' 라고 옮긴다. 가장 적합한 역어는 '나로드'의 역어이기도 한 '인민(人民)'이라고 보지만, 이게 공산주의 용어로 등록돼 있는 탓에 역어로서 불편을 야기한다. 가령, 'people to come'을 어떻게 옮기는가? 도래할 민족? 도래할 민중? 도래할 사람들? 좀더 생각해볼 문제이다).

<질 들뢰즈>, <들뢰즈와 정치> 역자의 '전매특허'는 '아상블라주'이다(<들뢰즈와 정치>의 첫번째 역주도 이에 관한 것이다). 'assemblage'의 역어인데, 불어에도 같은 단어가 있지만, 들뢰즈의 영역 용어로서의 'assemblage'는 불어의 'assemblage'가 아니라 'agencement'의 역어이다(<천 개의 고원>, 12쪽 참조. 이 또한 첫번째 역주이다). 그러니 제대로 번지수를 맞추려면 '아장스망'이라고 했어야 하지 않을까? 한데, 거의 대부분의 들뢰즈 연구자들이 '배치(물)'라고 옮겨쓰는 단어를 굳이 '아상블라주'라고 (이상하게) 음역해주면 독자들의 이해가 용이해지는가? 제멋으로 하는 번역이라고 쳐도 좀 희한한 취향이 아닐 수 없다(이런 취향만 아니라면 내 생각에 역자는 더 완성도 높은 번역을 해낼 수 있는 역량을 갖고 있다).

내가 읽은 서론에서의 오역 두 가지. "그[들뢰즈]의 단언에 따르면 정치적이라고 불릴 가치가 있는 어떤 철학도 자본주의의 본성과 진화를 설명해야만 한다."(28쪽) 네그리와의 대담에서 나오는 대목인데, 맥락을 모르고 읽어봐도 '설명'에의 요구는 조금 과도하지 않을까? 역자가 옮긴 것은 'take account of'이고, 그건 '고려하다' '주의하다' 정도의 뜻이다('설명하다'는 'account for'이다). 역시 같은 대담에 나오는 것인데, "이것이 인간조건에 대한 염세주의나 허무주의, 네그리가 시사하는 것처럼 일종의 비극적인 약속어음을 초래하게 되는 것이라고 보야야 할까?"(33쪽) '비극적인 약속어음'? 이런 튀는 번역이 오역이 아닐 수가 없다. 'tragic note'를 옮긴 것인데, 의당 '비극적 음조'라고 옮겨져야 한다. 물론 'note'에는 '약속어음'이란 뜻도 있지만, 이 경우엔 (다른 오역들이 그렇듯이) 써먹을 수 없는 '부도어음'이다...

05. 10.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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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산 2005-10-03 2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비로그인 2005-10-03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헿헿... OTL

yoonta 2005-10-04 0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들뢰즈맑스주의라는 책..저도 저 책은 일단 사 두긴 했는데..갈무리에서는 왜 항상 자신들이 펴낸 책이름에서 맑스주의를 강조하는건지 모르겠더군요. 전에 나온 푸코와의 대담책도..ramarks on Marx라는 원재를 푸코의 맑스라고 바꾸었고..이번도 그렇고요..

맑스와의 친화성을 강조해야 책이 잘팔린다고 생각해서인지(이렇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네요-_-)..아니면 자율주의와 맑시즘의 관련성을 강조하는 것이 이론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해서인지.... 혹은 자율주의가 가지는 아나키즘적 지향성을 맑시즘의 이론적 정교함으로 보완하려는 성격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지요..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엔..자율주의(혹은 코뮨주의)와 들뢰즈와의 거리는 가까울지 몰라도 코뮨주의(혹은 아나키즘)와 맑시즘사이의 거리는 꽤 멀다고 생각하는데...이번에 나온 들뢰즈 맑스주의라는 책에서 들뢰즈주의?로 표현되는 코뮨주의(혹은 아나키즘)와 맑스주의와의 거리를 얼마나 좁히고 있는지는 일단 읽어보고 평가해 볼 일이군요.

로쟈 2005-10-04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산님/수정하고 첨가한 대목이 있으므로 참고하시기 바랍니다(다시 퍼가심이). yoonta님/정신분석에서는 '강박증'이라고 하잖아요. '독실한 신앙'이란 게 옆에서 보기엔 좀 불편하긴 하죠...

palefire 2005-10-04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eople(peuple)의 국역은 골치거리긴 한데, [시간-이미지]와 [질 들뢰즈의 시간 기계]는 모두 '민중'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나마 '인민' 빼고는 제일 나은 듯해 보입니다. 그리고 국내 들뢰지언들의 '비커뮤니케이션'은 한탄스러운 일이지만 쉽게 나아질 것 같지 않아보여서 역시 안타깝습니다.

로쟈 2005-10-05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맑스주의자'로서의 들뢰즈도 고려한다면 더욱 그렇지요). 아무래도 '민족'에는 다른 뉘앙스들이 많이 겹쳐져 있어서요(김재인씨가 어떤 의향에서 그렇게 옮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들뢰즈 커넥션>에서 좀 께름칙하더군요)...

myth 2005-10-05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동욱이 <들뢰즈의 철학>에서 수유판 '천의 고원'을 인용한 것은 김재인의 정식 번역본 '천 개의 고원'에 대한 불만이나 여타의 대단한 이유 때문이 아니라, 저술 당시 저자가 유학 중이었던 탓에 그 무렵 출간된 새물결판을 구해볼 수 없어서였다는 해명을 어디선가 본 것 같아요.

로쟈 2005-10-06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자 나름의 사정이 있겠지만, 제가 좀 이해할 수 없는 건 <천 개의 고원>만 원서로 읽을 수 없었다는 얘기도 되기 때문이죠. 그가 다른 학술적인 글들에서 번역본을 인용하는 경우는 거의 드물며, 들뢰즈는 자신이 전공하는 철학자인데 말입니다. 더불어, 유학중이어서 책을 구해볼 수 없었다는 건 아시겠지만, 넌센스입니다(필요한 책을 다 구해볼 수 있습니다). 구해볼 필요를 못 느꼈다고 해야 정확하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