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 새로 들어온 책을 대출하기 위해서 반납할 책을 고르다가 데이비드 호크스의 <이데올로기>(동문선, 2003)을 빼들었다. 예전에 한번 대출했다가 지젝에 관련된 절이 오역으로 범벅이 돼 있길래 반납하고 원본을 복사해두었던 책인데, 혹 앞부분은 낫지 않을까 싶어서 지난달에 다시 대출한 바 있다. 지젝에 관한 오역이 어느 정도냐면, 이미 2002년에 번역이 나온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혹은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을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목적>으로 옮기는 식이다. 아직 번역/출간되진 않았지만, 헤겔, 셸링 등을 다룬 (도서출판b의 근간목록으론) <부정성과 함께 머물기>(알라딘 제목으론 <부정태와 함께 체류하기>)를 <소극적으로 지체하기>로 옮기는 식이다. 역자가 헤겔 철학 등과는 전혀 '인연'이 없다는 걸 보여주는 것.



그런데, 마르크스주의에서의 이데올로기를 다룬 장에서 난데없이 '디외르디 루카치'란 표기가 튀어나온다(역시나 사단은 루카치이다). "모스크바로부터 후퇴: 디외르디 루카치"(119쪽)란 절제목에서인데, 원서에는 "THE RETREAT FROM MOSCOW: GEORG LUKACS"로 돼 있음에도 말이다. 사실 'Georg'는 독일식 표기이며, 그가 헝가리 출신비평가이지만, 우리는 흔히 '게오르그(게오르크) 루카치'라고 불러왔다. 그게 말이 안되진 않는 것이 그가 자신의 주저들을 대부분 독어로 쓴 데다가 헤겔-마르크스 사상의 계승자로서 그의 정신적인 조국 또한 '독일'이라고 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헝가리어로 표기된 그의 이름은 'György Lukács'이며, 이 경우 '지외르지' 혹은 '죄르지'로 발음하는 걸로 안다. 이런 경우 나로선 '게오르그 루카치'나 '지외르지 루카치'나 모두 무방하다고 본다. 그가 헝가리인이기 때문에 '게오르그'라고 부르는 것은 '틀렸다'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는 모양인데, 그런 '티내기'는 폼나는 루카치 연구서를 내는 식의 보다 생산적인 방향으로 투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개인적인 생각으론, 헝가리에서 현실정치가로도 활동했던 루카치는 '지외르지 루카치'로 독일 문예비평가이자 미학이론가로서의 루카치는 '게오르그 루카치'로 불러주는 게 어떨까 싶다.
하여간에 그런 정도가 내가 아는 상식인데, '디외르디'라는 건 어떻게 가능한 건지 모를 일이다(루카치의 이름을 러시아어로 옮길 경우 '연음d'로 표기하는데, 그 경우에도 발음은 '죄르지' 정도이다). 'Georg'를 굳이 '디외르디'라고 옮겼으므로 이 경우는 'Lukacs'를 '루칵스'라고 옮기는 것과는 사정이 좀 다르다. 여기에 개입돼 있는 것은 '무지'가 아니라 '과도한 지식'이다. 출처를 알 수 없는. 물론 어느 경우든 상식을 넘어선다는 점에서는 공통되지만.

역자의 과도한 지식은 '원주'에서 인용 도서명을 표기하는 데에서도 발휘된다. 가령, 니체의 <도덕의 계보>의 경우, 원서에는 영역본 'On the Genealogy of Morals'이 사용되고 있는데, 역자는 굳이 'Genealogie de Moral'이라고 독어 원서명을 병기해준다. 그리고는 '도덕 계통학'이라고 옮긴다. 물론 '계보(학)'을 '계통학'이라고 옮길 수도 있을 것이다. 영역본 제목 대신에 원저명을 표기한 걸로 보아 '계통학'은 역자 나름의 신념을 반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어쩌면 새로운 니체 연구서라도 나올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 효과는 코믹하다.
푸코의 책 <사물의 질서: 인문과학의 고고학>의 경우에는 희한하게도 부제만을 불어로 표기했는데, 알다시피 <사물의 질서>는 영역본의 제목이고, 불어본의 원제가 <말과 사물>이다. 역자 나름의 원칙을 지키자면, 이 또한 불어본 제목으로 고쳐주었어야 했다. 물론 '원칙'이랄 것도 없는 것이 푸코의 영역본 제목들을 전부 불어로 병기해주면서 역자는 보드리야르를 비롯한 다른 저자들의 영역본 제목들은 그대로 놔두었다(아직 보드리야르는 못 읽으셨던 모양이다). 사정이 이러하면, 경의를 표해야 할 대상이 역자의 '노력'인지 '박식'인지 헷갈린다.

번역서들의 경우 책의 체제, 곧 제목이나 각주, 참고문헌 번역만을 둘러보더라도 그 수준을 어림짐직해볼 수 있다. 최근에 재번역돼 나온 마단 사럽의 <후기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조형교육)의 경우도 그러한데, 증보판을 옮긴 이 책의 초판 번역본이 <데리다와 푸꼬,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인간사랑, 1991)이다. 제목에 '후기구조주의' 대신에 '데리다와 푸꼬'가 들어간 것은 제일 처음 나오는 '라캉'을 (임의로) 제외하고 번역했기 때문이다(물론 이런 '바보 같은' 책을 무릅쓴 건 역자의 '과도한' 사명감이나 과시욕 때문인지 모를 일이지만, 아쉽게도 그걸 뒷받침할 만한 수준높은 번역은 못 되었다).
저자인 사럽은 <알기 쉬운 자끄 라깡>(백의, 1994)를 낸바 있는 나름대로 라캉 전문가이다. 그리고 그의 책 <후기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은, 원제에는 '입문(Introduction)'이란 말이 들어가 있는 데에서도 알 수 있지만, 후기구조주의 철학자들에 대한 적절한 입문서이다. 170쪽쯤 되던 초판에 30여 쪽을 덧붙여 증보판을 내면서 사럽은 프랑스 페미니스트들과 리오타르 등에 관한 장을 보강했다고 한다. 입문서로 개정증보판을 내는 걸 보면 영어권에서 그만큼 반응이 좋다는 얘기도 된다. 그런 사례로 내가 아는 건 리처드 커니의 <현대유럽철학의 흐름>(한울, 1997)인데, 여러 번 지적한 바 있지만, 이 조악한 국역본 대신에 원저 개정판에 대한 새 번역본이 빨리 나왔으면 싶다.
거기까지는 좋다. 나는 서점에서 신간을 매만지며 잠시 지갑에도 손이 갔었는데, 웬걸 갑자기 '영혼'이 눈에 띈 것이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영혼의 현상학>이라고 옮겨놓은 것. 영역본 'Phenomenology of Spirit'를 그렇게 옮긴 것인데, 'spirit'에 그런 뜻이 없는 건 아니므로 역자에게 분격할 일은 아니겠다. 하지만, 인문서를 번역하면서 '정신현상학'이란 책 제목조차도 들어본 적이 없다면 좀 심하게 딱한 일이다. 혹 역자의 '신념'을 반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지만(대개 우리는 저마다 쓸데없는 신념들로 무장하고 있으므로), 그 신념이 대다수 헤겔 전공자들을 설득할 수 있을 만한 것인지는 지극히 의문스럽다. 게다가 마르크스-루카치의 용어 '사물화(reification)'를 '구체화'로 옮긴 걸 보면, 사정은 '오만'보다는 '무지'쪽이다.


이미 지난번에도 주장한 바 있지만, 이런 사소한 실수들로 굳이 애써서 창피를 당할 일은 무어란 말인가? 조금만 주의하면 되고, 조그만 상식을 존중하면 될 일 아닌가? 들뢰즈와 관련한 책들에 요즘 붙드려 있다가 보니 두해 전에 사둔 <들뢰즈 철학과 영미문학 읽기>(동인, 2003)도 들추게 됐는데, "들뢰즈를 통해 나는 어떻게 영미문학을 다시 좋아하게 되었는가?"란 서론을 띄엄띄엄 읽으면서 나는 영미문학자들이 싫어졌다. 프랑스 철학자 '피에르 클로소프스키(Pierre Klossowski)를 '피에르 클로소위스키'라고 새로운 위스키(?) 이름으로 부르는 것도 어색한데, 두어 페이지 넘기면 '크로소위스키'로 진화하는 게 아닌가? 그리고는 다시 '클로소브스키'로도 돌아오는바, 도대체 '다중-필자'가 이 서론을 쓴 것인지 아니면 '분열증자'가 쓴 것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영미문학의 우수성'에 대해서(국역본 <디알로그>의 제2장은 '영미문학의 탁월함에 대하여'이다) 예찬하는 들뢰즈에 잔뜩 고무되어 있다고는 쳐도 같은 책에서 표기의 일관성 같은 기본적인 건 지켜줘야 하지 않을까?
또, '마조히즘'이란 말을 낳은 오스트리아의 작가 '자허 마조흐(Sacher-Masoch)'는 왜 '사커 마조크'로 계속 표기되는 것일까? 그리고 영국식 경험론(empiricism)에 짝이 되는 '이성주의(rationailsm)'는 관례에 따라 '합리론'이라고 표기하는 게 낫지 않을까? 이런 표기상의 '문제들'이 내용과 무관할 수 없다는 것을 다음의 인용문은 보여준다. 들뢰즈에게서 흄의 철학이 갖는 의의를 설명하는 대목인데, 필자는 <경험론과 주체성> 영역본 역자의 해설을 이렇게 요약/인용하고 있다(바운다스는 <의미의 논리>의 영역자이기도 한데, 최근에 나온 <들뢰즈 맑스주의>의 추천사를 쓰고 있기도 하다. 역자에 따르면, 그의 아내가 한국 여성이라고):
"<경험주의와 주체성>의 영어 번역판 서문에서 콘스탄틴 바운다스는 들뢰즈가 흄의 경험주의 철학을 통해 모든 종류의 초월철학에 대항하였고, 흄의 차이의 경험주의적 원리, 즉 모든 관계의 외재성 이론을 통해 소수자 담론을 구성해으며, 병렬적 나열물의 문제틀을 수립하였고, 초월의 장에 바로 주체적인 동격자들을 부여하는 모든 이론들의 미해결의 전제에 기초를 두고 입론하는 오류에 반대했다고 말한다." 이 정도면 들뢰즈보다 읽기 어려운 난해한 문장이다(참고로, '주체적인 동격자'란 'subjective coordinates'의 번역인데, 내 생각에 그건 '주체가 형성되는 좌표(계)' 정도의 뜻이다).
책에 실린 모든 논문들이 다 정신없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이런 서론만큼은 정신없다. '꼼꼼함'이란 학자로서 갖춰야 할 기본 덕목이다. 그건 들뢰즈적인 다양체의 논리, 리좀의 논리, 도주/탈주의 논리를 따르더라도 마찬가지이다. 그러한 '꼼꼼함'의 시작은 고유명사의 표기부터 정확하고 일관되게 해주는 것이다. 그건 책이 신뢰받을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다...
05. 10. 11.



P.S. '루칵스'란 표기로 애초에 이런 글을 쓰게 만든 역자의 또다른 책 <들루즈건축>(접힘과펼침)을 도서관에서 대출했다. 도서관에 책이 들어왔을 때 대출예약을 해둔 것인데, 그간에 장기대출중이었다. 짐작에 별로 기대할 게 없는 책이지만, '들뢰즈와 건축철학'이란 주제에 관해서는 어떤 얘기들이 오고가는지 잠시 귀동냥이라도 해보기 위해서 빌려온 것인데, 예상대로 도로 반납할 책이다(그냥 원서를 읽는 게 빠르겠다).
한번 지적한 적이 있는데, 저자 '라흐망(Rajchman)'은 '라이크만'이라고 표기하는 게 옳다(르페브르님이 직접 저자에게 확인한 것이다). 책의 서문은 (역시나 르페브르님이 번역한 바 있는) 폴 비릴리오(Paul Virilio)가 썼는데, 이 번역서에선 '파울 비리리오'로 표기돼 있다(후주에서는 또 '비릴리오'). 라캉의 스승인 프랑스의 정신의학자 '끌레랭부(Clerambault)'의 바른 표기는 '클레랑보'이다. '헤르메스' 연작으로 잘 알려진 철학자 '미셸 세르(Michel Serres)'를 '미셸 세리스'로 표기한 걸로 보아 역자는 프랑스어나 철학에 별로 '관심'이 없는 듯하다. 하다 못해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도 '르 코르부지에'로 표기했는데, '건축철학계'에선 둘다 쓰이는 것인지? '뒤샹(M. Duchamp)'은 어인 일로 '듀상'이라 읽으며, '베르그송(베르그손)'은 어쩌다 '베르크송'이 되는지? 프랑스 시인 '랭보(Rimbaud)'를 '링부'로 읽고, 독일 철학자 '프레게(Frege)'를 '프레헤'로 읽으며, 미국 철학자 '퍼트남(H. Putman)'을 '푸트남'으로 읽게 되면, 역자와 공유할 수 있는 '상식'이 무엇인지 알길이 없다.
요컨대, 책은 '비커뮤니케이션'을 온전하게 실행하고 있는, 그래서 들뢰즈가 경탄해 할 만한 '예술작품'이다. 아티스틱한 형태 외에 아무런 '의미'도 전달하지 않으므로. 그러니 시작부터 "세간에 떠도는 이야기의 근원으로 회귀하는 경향을 거스르는 직조기의 북의 속도가 흐르는 시간의 속도를 시사하듯 존 라흐망은 새로운 철학자다."(8쪽)라는 문장이 무슨 뜻인가를 묻는 일은 부질없다. 이건 '새로운 종의 책'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비릴리오 서문의 마지막 문장 "Such are the unanswered questions that press urgently upon us."(9쪽, 이 번역서엔 원서의 쪽수도 병기돼 있다!)이 "이미 해결된 물음은 우리를 향해 화살을 돌리고 있다"라고 전혀 엉뚱하게 번역돼 있다 하더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 일이다. 잘못은 세상을 만만하게 본 우리에게 있을 뿐이다.
역자는 책의 발행인이기도 한데, 대학원 시절 "라흐망의 현대 건축에의 들루즈 철학 응용"에 필을 받아서 "이 책이 우리말로 옮겨져 나오기를 진심으로 기다리다 지쳐 직접 번역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잘못은 제때 책을 번역하지 않은 '우리'에게 있다). 그리고 "이내 후회하였"다고 한다(책이 '끝내' 나온 걸 보면 후회가 부족했던 모양). "매끄럽지 못한 옮김과 오역의 가능성에 평생 느끼게 될 죄책감을 생각하면 식은 땀이 흐릅니다"라고 역자답지 않게 써놓았는데, 이 무슨 자학인 것일까? 애초에 문제는 그의 소견이었던 듯하다. "오역과 곡해가 난무할지라도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낫다'는 것이 저의 소견"이라고 밝혀놓았는데, '오역과 곡해가 난무'하고 있으니 소원은 성취한 셈이겠다. 그러나 충고하자면, '이런 번역은 없는 게 낫다'.
우리사회에 건축학 전공자가 기여할 분야는 많으며 따로 식은 땀을 흘리면서까지 '건축이론계'를 염려하실 일은 아닌 듯하다. 그러니 "이 책은 들루즈적 건축 담론의 시발로서 우리 건축이론계에 조금이나마 논의의 원인제공이 되었으면 하는 작은 바램입니다."라는 역자의 '바램'은 역자만의 것으로 되돌려줌이 맞겠다. 그나마 역자나 독자 모두에게 다행인 것은 지난 11월에 나온 책이 벌써 절판된 것. 때로 '없는 책들'은 우리를 편안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