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에서 자료를 검색할 때 가장 자주 애용하는 것은 구글이다. 그리고 구글에서 인명을 검색할 때면 어지간한 경우에 인터넷백과사전 '위키피디아'의 내용이 가장 먼저, 혹은 적어도 최초 화면에 뜨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이래저래 참조하는 일이 잦은데, 그와 관련한 기사를 읽게 되어 옮겨놓는다. 한국일보의 최근 기사는 중국 당국의 인터넷 검열에 대한 위키피디아와 구글의 각기 다른 대응방식을 지적하면서 언어권별로 게재항목의 양적, 질적 차이를 비교하고 있고(물론 한국어 자료는 대단히 빈약하다), 몇달 전 한겨레의 인터뷰기사는 현재 한국에서의 위키피디아의 현황에 대해서 알려준다. 한번쯤 읽어볼 만하다.

한국일보(06. 08. 31) 위키피디아

-역시 지미 웨일즈(40)였다. 인터넷 백과사전 위키피디아(http://en.wikipedia.org)의 창시자 웨일즈는 최근 중국어판 위키피디아 회의에서 "위키는 중국 본토에서 이용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하겠지만 원활한 접근을 위해 독립성을 희생시키는 일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구글과 같은 상업성 포털들이 돈벌이에 눈이 멀어 중국 정부의 정치적 검열을 받아들인 것과 대조된다. 전 세계 네티즌들의 헌신과 열정을 먹고 자라는 위키피디아의 이념을 다시 한번 분명히 했다는 점에서 갈채와 함께 경의를 보낸다.

■ 2001년 미국에서 시작된 위키피디아는 네티즌들이 항목을 고르고 집필ㆍ편집하는 온라인 백과사전이다. 지금은 200여 개 언어로 돼 있다. 위키 때문에 브리타니카 백과사전의 시대는 종언을 고했다. 영어 위키에 오른 항목만 130만 개. 브리타니카는 고작 7만5,000 항목 정도다. 네티즌들이 너나 없이 올린다니까 내용은 엉터리일 것이다? 천만의 말씀.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위키에 들어가서 어느 항목이라도 읽어 보면 그 분야 최고의 전문가가 아니면 절대 만들 수 없는 내용이라는 걸 알 수 있다.

■ 세계적 과학전문지'네이처'가 작년에 위키와 브리타니카의 과학 관련 항목 50여 개를 골라 신뢰성을 비교한 결과 대등한 것으로 나타났다. 업데이트 기능은 아예 게임이 안 된다. 작년 4월 교황 베네딕토 16세 기사를 쓰면서 위키피디아를 참고했는데 즉위식 시작 직후 그 내용이 바로 추가된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오늘 다시 베네딕토 16세를 검색하면서 예상은 했지만 또 한번 놀랐다. 영어 위키 22쪽, 독일어와 프랑스어 위키 각 11쪽, 일본어 위키 3쪽, 한국어 위키 3분의 1쪽. 지식기반사회라는 21세기에 각 나라(언어권)의 지식 수준이 상징적으로 드러나는 대목이었다.

■ 양적 차이보다 더 큰 것은 질의 수준이다. 영어 위키의 경우 단순 서술 외에 관련 내용 외부 링크가 아주 치밀하게 돼 있다. 클릭 한번으로 교황이 처음 발표한 회칙 전문을 라틴어 영어 등 10개 언어로 바로 볼 수 있다. 이런 수준이 가능하려면 우선 그만큼 아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또 그런 사람들이 시간과 노력을 들여 지식을 공유하려는 헌신이 있어야 한다. 한국어 위키(위키백과ㆍhttp://ko.wikipedia.org)는 이제 겨우 게재 항목이 2만 2,000여 개다. 우리는 영원히 게임이 안 될 것 같은 자괴감이 든다.(이광일 논설위원) 

한겨레(06. 05. 31) ‘위키백과’는 공산주의? 중립시각 ‘열린사전’이죠

-한국어명 ‘위키백과’인 위키피디아는 누리꾼에게 이제 생소하지 않다. 정보의 양에서 브리태니카 백과사전과 마이크로소프트의 엔카르타를 능가할 정도다. 350만 건 이상의 글이 수록돼 있으며, 방문자 조사 사이트 알렉사닷컴에 따르면 시엔엔닷컴을 앞지르고 16위에 올라있다. 그 성장 비결은 바로 누리꾼의 자유로운 참여에 있다.



-지난달 31일 낮 12시 현재 한국판 위키피디아에는 2만4146 건의 정보가 담겨있다. 영어권에 비해 정보량은 부족하지만 성장하고 있다. 한국판 위키피디아의 관리자 정경훈(20·서울대 컴퓨터공학과)씨를 만났다.

-위키피디아는 무엇인가?

=열린 백과사전으로, 배타적인 저작권을 갖지 않고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 및 출판할 수 있다. 위키백과는 리차드 스톨만이 설립한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Free Software Foundation)에서 만든 라이센스(GNU Free Document License) 형식으로 배포된다. 즉 상업적인 이용도 가능하지만 구입자나 인터넷 사용자나 별 차별 없이 이용할 수 있다.

-세계적인 현황은?

=위키피디아는 언어별로 제공돼 현재 214개 언어로 서비스된다. 한국어 위키백과 역시 한국어만 알고 있으면 국적에 상관없이 누구나 참여가 가능하다.

-다른 백과사전과의 차별성은?

=우선 공짜다. 돈이 없어도 정보의 공유 및 생산이 가능하다. 이론상으로는 컴퓨터가 없는 사람까지도 이용이 가능하다. 또 편집자가 없거나 전부일 수 있다. 이 때문에 중립적인 시각을 유지하도록 관리자가 노력한다. 예를 들어 독도 문제의 경우 한국 입장과 함께 일본 입장도 병기한다. 읽는 이들도 하여금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정확성에서 떨어질 수 있을텐데.

=한국판의 경우 3000여명이 계정을 갖고 있다. 이들 중 전문가도 있고, 비전문가도 있다. 하지만 의견을 공유하고 고쳐나가기 때문에 점점 정확성을 갖춰나갈 것이다. 또 다양성을 갖추고 있다. 기존의 기계적인 분류보다는 참여자의 관심사를 반영하기 때문에 색다른 항목도 나온다. 생일에 죽은 사람, 펠레의 저주 등 기존 백과사전에 찾아볼 수 없는 정보도 제공한다.

-관리자의 역할은?

=저작권 위반 여부나 낙서, 광고 등을 감시하는 등에 그친다.

-비판이나 해프닝도 있을 것 같은데.

=영어판에서도 있었는데 한국판에서도 ‘위키피디아는 공산주의다’ ‘위키피디아는 주체다’ 등의 악성 글이 남기도 한다. 또 유명인을 사칭해 약력이나 팬사이트를 소개하는 경우도 있었다.

-영어권에 비해서 정보량이 부족한데.

=국내 포털사이트처럼 저작권 개념이 없다. 일단 포털사이트에 자신의 정보를 제공하면 저작권은 사이트에 넘어가고 평점 등의 대가를 받는다. 저작권이 없는 대신 대가도 없어 아직 활동이 부족한 것 같다. 하지만 자유로운 참여가 가능하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활성화를 위한 방법을 쓰지는 않을 것이다.

-비용은 어떻게 충당하나?

=영어권의 경우 서버 관리를 위해 미국 플로리다주에 기술자 3명을 고용하고 있고, 나머지는 모두 자원봉사자다. 한국어판 역시 야후가 기증한 서버를 사용해 따로 비용이 들어갈 일이 없다.

-참여방법은 어떻나?

=영어판(www.wikipedia.org)이나 한국판(ko.wikipedia.org)을 방문해 계정을 만들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앞으로 전망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지식을 자발적으로 모아 우리 모두의 지식으로 공유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위키백과가 하는 일이다. 참여자가 많을수록 인터넷 상에서 이뤄지는 정보 불균형 등이 바로잡힐 것으로 생각된다.



위키피디아(Wikipedia)는?
200여개 이상의 언어로 서비스되고 있으며, 모두가 함께 만들며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는 다국어판 인터넷 백과사전이다. 또 배타적인 저작권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사용에 제약을 받지 않는다. 2001년 1월15일에 시작된 위키백과는 비영리 단체인 위키미디어 재단에서 운영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창립자는?
1995년 미국 컴퓨터 프로그래머인 워드 커닝햄이 네티즌들끼리 협동해서 웹 페이지를 만들어보자는 아이디어를 낸 것이 위키피디아의 시발점이 됐다. 이후 지미 웨일스 등이 비영리재단인 위키피디아재단을 설립해 온라인 서버를 관리하고 있다. 상근 편집진은 없으며, 1200명의 자원자들로 구성된 편집자들이 네티즌들이 올린 자료들의 정확성, 저자권 침해 여부 등을 검증한다. 웨일스는 올해 타임지가 선정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06. 08.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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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위키시대의 지식인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8-05 09:59 
    한겨레의 오피니언 란인 훅(hook)에 가끔 들러보는데, 인터넷 액티비즘에 관한 눈에 띄는 칼럼이 있어서 스크랩해놓는다(http://hook.hani.co.kr/blog/archives/9879). 필자는 이진순 교수다. 다른 기사를 보니 "1985년 김민석(민주당 최고위원)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장과 함께 총여학생회장으로 활동했던 그는 현재 미 올드도미니언대에서 시민저널리즘과 뉴미디어, 국제커뮤니케이션 등을 가르치고 있다." 
 
 
딸기 2006-09-04 16:52   좋아요 0 | URL
흐아앗 이거 기사 쓸까 하고 있었는데... ㅠ.ㅠ

로쟈 2006-09-04 21:21   좋아요 0 | URL
한발 늦으셨나 보네요.^^
 

따지고 보면 좀 유치한 습성이 있어서, 8월이자 여름의 마지막날이 되면 이성복의 시집 <그 여름의 끝>을 떠올리곤 한다(10월의 마지막밤에는 '잊혀진 계절'을 흥얼거리고, 비가 내리는 날에는 '빗속의 여인'을 듣고, 그날이 화요일이면 '화요일에 비가 내리면'을 하나 더 듣고 하는 식이다). 손에 잡히는 그의 시선집을 들춰서 몇 편의 시들을 서둘러 읽어보았다. 가령 표제시인 '그 여름의 끝'은 이런 식이다.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
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
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
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소위 '연애시편'들로 묶여진 <그 여름의 끝>은 표제작에서도 보듯이 몇몇 선명한 이미지들을 뽐내지만 나로선 관념적/추상적이란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라고 시인이 말미에 적을 때, 나는 그 장난이 '연애'와 '연애시' 전체에 두루 해당하는 게 아닌가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추상적 타자(=당신)를 두고 벌이는 감정의 자맥질은 비록 그것이 순도 높은 경우일지라도 맥빠진 서정에 불과하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가 아닌가 싶다. 거기에 비교되는 것이 시인의 데뷔시집인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이다(시집의 제목이 시인의 바람대로 '정든 유곽에서'가 되지 않은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유감스럽다). 가령, 언제 읽어도 가슴 뻐근한 시 '여름산' 같은 경우는 어떤가?

여름산은 솟아오른다
열기와 금속의 투명한 옷자락을 끌어 올리며
솟아오른다 발등에 못 안 박힌 것들은 다 솟아오른다 저기
비행기가 수술톱처럼 하늘을 끊어낸다 은빛 날개가 곤두선다

그 여자는 불란서에 가겠다고 이번 여름엔 꼭
다녀와야겠다고 그 여자는 잠자는 벌레를 밟았다 모르고
밟았다 부서지면서 물 같은 피가 솟아올랐다 내가 거듭 밟았다
그 여자는 불란서에 가겠다고

나는 속으로 욕했다
따지고 보면 욕할 이유가 없었다
당신은 남의 가난이 얼마큼 당신과 관계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 여자는 내가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다
당신은 백 사람 중에 하나가 병들어 아프면 당신도 아프다고 생각합니까
그 여자는 부질없는 말이라고 대답했다

여름산은 솟아오른다
여름산은 땀 흘리지 않는다 힘쓰지 않는다
여름산 여름산 여름산 우리는 그늘에서 콜라를 마셨다
콜라를 마시며 불란서를 생각하고 울었다 우는 시늉을 했다
우리는, 시멘트포를 등에 지고 사다리 오르는 여인들을 생각하며 울었다
우는 흉내를 냈다 우리는, 바빌론에 묶여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생각하며 울었다 우는 척했다

여름산은 솟아오른다
한숨 쉬지 않고 솟아오른다 반짝임과 몽롱함을 뿌리며 솟아오른다
우리는 손을 잡았다 잡힌 손에서 물 같은 피가 흘렀다 살려줘요!

여름산은 무겁게 솟아오른다
솟아오르지 않는다 솟아오르는 모습만 보여준다
여름산 여름산 여름산 먼지, 매연, 악취로 부서지는
여름산 여름산
여름산

 

 

 

 

'여름산'에 등장하는 '그 여자'는 '당신'과 같은 추상적인 타자가 아니다(이성복은 '당신'이 아닌 '그 여자'에 관해서 쓸 때 그다운 시를 쓴다). 해서 여기엔 긴장이 있다. 그리고 (끝나지 않는) 절망이 있다. 그 절망은 가령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절망이다. "시멘트포를 등에 지고 사다리를 오르는 여인들"에 대한 절망이고, "바빌론에 묶여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에 대한 절망이다. 그들을 생각하는 절망이고, 그런 생각을 하며 우는 척하는 절망이다(달리,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젊은 날을 고백하고 있는 아포리즘집 서두에 시인은 "나는 언저리를 사랑한다/ 언저리에는 피멍이 맺혀 있다"고 묘비명처럼 적었다. 이성복의 뜨거운 시들은 그 언저리에서 나온 피멍의 흔적들이었다. 그 흔적은 <그 여름의 끝>에서 "종이 위에 물방울이/ 한참을 마르지 않다가/ 물방울 사라진 자리에/ 얼룩이 지고 비틀려/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있다"로 반복되고 있다. 하지만, 이 '물방울'의 흔적은 '피멍'에 비하면 약소하며 엄살스럽기까지 하다(연애시편들이야말로 엄살과 주책의 파노라마 아닌가?). '그 여름의 끝'에서 '여름산'이 다시 그리워지는 이유이다...

06. 08.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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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6-08-31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나 파도치는 사진 넘 멋져요. 어떻게 하신 거에요? 정말 시원하네요

로쟈 2006-08-31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떻게 하는 건 아니고요, 그냥 그런 사진을 갖다 붙여놓았을 뿐입니다...

라이더 2006-08-31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도 그림 잘 보고 갑니다. 글은 머리가 아파서;; 좀 쉴려고 알라딘 왔기 땜시. 미안요.

푸른괭이 2006-08-31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성복은 그야말로 '타고난' 시인이었던 듯. 글구, 첫 시집은 뭣 때문인지 늘 <정든 유곽에서>로 각인되어 있네요. 어떻든, 안타깝게도, 이성복 시인도 더 이상 시를 쓰지는 못할 듯. 그렇게 보면, 김춘수, 서정주 같이 '평생' 시를 쓴 시인은 정말 대단해요.

로쟈 2006-08-31 16: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평생 쓸 수 있는 시들은 따로 있죠. 자신이 안 다치는 시, 가령 무의미시 같은...

lastmarx 2006-08-31 2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요일에는 빨간 장미를" 건네 주는 로맨스는 없나 보네요. ^^ 해마다 이성복을 읽으시는군요. 저도 그런 편인데. <그 여름의 끝>에서 제가 좋아하는 짧은 시 세 편입니다. http://blog.naver.com/lastmarx/70005165701

로쟈 2006-08-31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요일에는 빨간 장미를' 같은 건 태고적 이야기 같은데요(^^;). 연애를 밝히는 편도 아니고 소질도 없는지라...
 

어젯밤에 조회수를 보고 예상한 바이지만, 오늘로써 이서재에 10만명이 다녀갔다. 돌이켜보니 지난 2003년 11월 21일에 '나의 서재'에 최초로 페이퍼를 올린 듯하다. 그러니까 2년 9개월 가량이 지났고, 그간에 '즐찾'은 오늘 현재 777명이 되었다. 특별한 감회가 있는 건 아니지만 그런 숫자들이 잠시 지난 시간들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어쨌거나 이런 흔적들을 남기게 되었다니 그간의 처신이 깔끔했다고는 볼 수 없겠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돌이킬 수 없는 것은 돌이킬 필요가 없는 것으로 만드는 수밖에.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오래전에 써두고 재작년에 인용해두었던 시를 한번 더 호출한다. 그리고 그때 적어두었던 몇 마디까지. 시는 '중세의 가을'이란 제목. 그리고 사이사이 이미지는 모두 아브라멘코라는 러시아 화가의 그림들이다. 

oil abstract landscape painting In Mexico

나는 흔한 일들의 구세주, 아주 흔한 일들에 파묻혀
나는 이 흔해 빠진 일들을 밥 먹듯이 구원하리라!

acrylic cityscape painting Landscape with Sun

나는 천성이 좀 게으른 편이어서(나보다 게으른 이들도 적지 않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로맨스도 귀찮아 하고 여행도 즐기지 않는다. 물론 보다 본질적인 이유는 돈이 없다는 것이지만(나는 ‘돈 없는’ 오블로모프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최소한의 예의는 지킬 필요가 있기 때문에 “돈이 없어서 그런 거지?”라고 물어서는 안된다. “여행을 안 좋아하시나봐요?” “제가 좀 게을러서요.” 대신에, 내가 울며 겨자 먹기로 좋아하는 것은 ‘흔한 일들’로서의 일상이다. 일상을 좋아한다는 말은 “숨쉬는 걸 좋아해”란 말처럼 어폐가 있으므로 존중한다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리겠다. “숨쉬는 건 중요해.”
 
oil winter landscape painting Little Cypress

흔한 일들로서의 일상이란 건 물론 숨쉬는 걸 포함해서 밥 먹는 것, 걸어다니는 것, 뛰어다니는 것, 신문보는 것, 책보는 것(이게 나의 변변찮은 직업이다), TV뉴스를 보는 것, 잠자는 것, 꿈에서 군대에 또 가거나 수학시험을 보거나 간혹 날아다니는 것 등등이다. 아이가 하루하루 분유를 먹으면서 자라나듯이, 우리의 삶도 그러한 일상들로 채워지며 쑥쑥 성장해 왔으며, 앞으로는 그와 같은 속도로 쪼그라질 것이다. 그리하여 ‘흔한 일들’이란 우리의 DNA에 새겨진 일들이다(내가 생물학을 좋아하는 이유인바, 생물학은 내가 철이 들어서야 ‘발견한’ 학문이다). 나는 이 ‘흔해 빠진 일들’을 간과하는 어떠한 슬로건이나 이론도 신뢰하지 않는다. ‘흔한 아픔’에 대한 시.
 
acrylic figurative art painting Loo 1

정육점에 팔려간 날 그녀의 엉덩이는
흉악한 세월처럼 울었다 울음이 지워진 자리에
환한 햇빛이 찾아와 어루만져 주었다
나는 마른침을 뱉으며 구두끈을 다시 묶었다

흔한 아픔이 있다
정육점에는 정육점 창고에는
이골이 난 갈비들이 쇠갈고리에 매달려
지난 생의 무게를 견디고 있다
(오, 죽음이 무거운 게 아니리!)

정육점에 팔려간 날 그녀의 푸짐한 엉덩이는
예언자의 말처럼 가난한 사람들을 오죽 울렸으나
좋은 세상은 오지 않았다
정육점은 고기값을 흥정할 따름이다

정육점에 팔려가고 또 팔려간다
정육점은 돈을 벌고 도로를 닦고 공장을 짓고 대학을 세우고 노래를 부른다
정육점은 공화국을 바꾸고 정육점은 21세기를 준비한다
정육점에 팔려간 모든 엉덩이를 생각하며 나는 우는 시늉을 했다
곧 마른침을 뱉으며 다시 구두끈을 묶었다

acrylic abstract art painting Metaphysical Room

'정육점에서'란 시인데, "흉악한 세월"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혹은 내가 그나마 일상적으로 하는 일은 ‘우는 시늉’을 하며 ‘구두끈’을 다시 묶는 일 정도이다. “정육점에 팔려간 모든 엉덩이”는 나를 슬프게 하고 애닯게 한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마른 침’을 뱉는 것 정도이다. 나는 게으르며 더불어 좀스럽다. 그래서 부끄럽다. 나는 일진이 나쁜 것인가? 하지만, 내일은 또 내일의 태양이 떠오르고 어쩌면 근사한 일이 생길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7-7-7이면 나쁜 일진도 아니잖은가?..
 
oil still life painting Flowers and a Seashell
 
여하튼 나로선 이 흔해빠진 일들에 대한 연민을 주체할 수 없다. 턱없이 흘러가는 시간들을 걷잡을 수 없다. 구제 불능이다!..
 
06. 08.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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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shot 2006-08-30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리겠습니다. 염치없이 옹달샘에 와서 물만 먹고 갑니다.^^

마노아 2006-08-31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수서재군요. 네번째 그림과 마지막 그림이 인상적이네요. 님의 시도 좋습니다. 특히 첫번째 시와 그 설명이요. ^^

2006-08-31 00: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푸른괭이 2006-08-31 0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의 시엔 '바토스'가 있어요.(나는 '바토스'를 파토스와 (낭만적) 아이러니의 결합으로 보는데요.) 그래서 좋았는데, 왜 시 쓰기를 그만 두셨나요? 하긴 나도 진작에 그랬어야 했는데.... ;;;--

로쟈 2006-08-31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YiYi님/ 감사합니다...(물은 셀프입니다.^^)
마노아님/ '장수'서재가 되나요? 이제 세살배기인데.^^
**님/ 제가 넒은 세상에 일조하고 있군요.^^
푸른괭이님/ 마흔이 넘으면 다시 써볼까 생각중입니다...

이네파벨 2006-08-31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운 시와 그림과 글....
숙연해집니다.
감사드려요!

로쟈 2006-08-31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페일레스 2006-08-31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만 히트 축하드립니다.
앞으로도 로쟈님 스스로에겐 '자조'이자 '자족'일지 모르지만 읽는이들에게는 축복과도 같은 글을 부탁드립니다.

philocinema 2006-08-31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군에 와서 근무하는 동안 님의 글이 제 삶에 많은 보탬이 되어주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감상할 수 있기를...

로쟈 2006-08-31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일레스님/ 감사합니다. 제가 지옥에 가진 않겠네요.^^
risper3님/ 군대에 계시다면 좀더 '선정적인' 사이트들을 둘러보심이(물론 저도 간혹 포르노를 보여드리긴 하지만)...

hikrad 2006-09-03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만 히트가 '흔한 일'은 아니지요^^
축하드립니다...

로쟈 2006-09-03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흔한 '일상'의 축적이 흔하지 않은 결과들을 낳곤 하지요.^^
 

필요 때문에 '나폴레옹'에 관한 이미지들을 검색하는데, 느닷없는 포르노 이미지들까지 끼어 있었다. 알고보니 <나폴레옹>이란 제목의 포르노 필름이 있었던 것. <나폴레옹>(이탈리아, 1998).

Наполеон. Анальный секс. Порно Видео Филмс

이게 포르노비디오필름을 취급하는 러시아 사이트에 링크돼 있었는데 <나폴레옹>은 빙산의 일각이었고 아주 요지경의 세상이었다(세상은 넓다!). 포르노(혹은 AV) 산업이라면 이웃나라 일본이 가히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데(그건 그만큼 일본의 조직사회가 공식적인 사회적 관계에서 복종/굴종을 강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방면으론 이탈리아 또한 만만찮아 보인다. 틴토 브라스만 해도 그냥 '소프트'해 보이니까. 차이라면 일본 포르노가 대략 시나리오 불문이라면 이탈리아는 좀 '클래식'하다는 정도. 적어도 '포르노세계사' 내지는 '포르노 세계문학사'를 찍어대는 걸 보면(덧붙이자면, 포르노의 경우에도 '클래식'은 판매랭킹이 많이 떨어진다. 대중들은 '클래식'이라면 포르노도 잘 보지 않는 것!).

러시아는 거기에 비하면 아직 아마추어이다. 소비에트 시절에는 포르노'산업'이라는 게 가능하지도 않았고 따라서 유통되지도 않았었기에. 이전에 '범성욕주의자의 근대철학사'란 페이퍼를 만든 바 있는데, 이 페이퍼는 거기에 짝이 될 수도 있겠다('로망스 대 포르노'란 글도 참조할 수 있겠다). 자체 검열상 스틸사진들을 올려놓을 수는 없고, 포스터 정도만 옮겨놓는다(모두 러시아어로 출시된 것들이다). 아주 일부만. 이 목록에 마르키스 드 사드나 자허 마조흐가 올라와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만, <햄릿> 정도 되면 웃음이 나오고, <이상한 포르노 나라의 앨리스>나 고골 원작의 <비이> 정도 되면 입이 벌어진다...

 Маркиз Де Сад. Фильмы с сюжетом. Порно Видео Филмс<마르키스 드 사드>(이탈리아, 1996)

Барон Фон Мазох. Садомазо и фетиш. Порно Видео Филмс<폰 마조흐 남작>(이탈리아, 1998)

Гамлет. В костюмах. Порно Видео Филмс<햄릿>(이탈리아, 1996)

Робин Гуд. В костюмах. Порно Видео Филмс<로빈훗>(이탈리아, 1995)

Декамерон. В костюмах. Порно Видео Филмс<데카메론>(이탈리아, 1997)

Белоснежка и семь гномов. Фильмы с сюжетом. Порно Видео Филмс<백설공주와 일곱 난장이>(이탈리아, 1996)

Алиса в стране Порно Чудес. Фильмы с сюжетом. Порно Видео Филмс<이상한 포르노 나라의 앨리스>(미국, 1996)

Вий. Русское порно. Порно Видео Филмс<비이>(러시아, 2002)

그리고, 러시아에서 최근에 제작되고 있는 포르노시리즈 <백야: 상트 페테르부르크>. 페테르부르크의 주요 관광지를 다 둘러볼 수 있는 잉여효과도 챙길 수 있다(관광상품 수준이다). 4편까지 나온 모양이다.

Белые ночи Санкт-Петербурга. Ночь 1. Русское порно. Порно Видео Филмс<백야1>(러시아, 2001)

Белые ночи Санкт-Петербурга. Ночь 2. Русское порно. Порно Видео Филмс<백야2>(러시아, 2001)

Белые ночи Санкт-Петербурга. Ночь 3. Русское порно. Порно Видео Филмс<백야3>(러시아, 2001)

Белые ночи Санкт-Петербурга. Ночь 4. Русское порно. Порно Видео Филмс<백야4>(러시아, 2001)

참고로, 러시아 포르노에 대한 학술적인 연구로는 이문영, "포스트소비에트 시기의 러시아 포르노그래피 연구"(슬라브학보, 제21권 2호, 2006)가 있다. 동영상보다 아카데믹한 쪽에 관심있으신 분들은 읽어보시길...

 

 

 

 

06. 08. 29.

P.S. 러시아 포르노그래피의 역사와 현황에 대해 앞에서 거명한 논문의 결론으로부터 간략하게 인용하면, "제정 러시아는 종교에 의해, 스탈린 집권 이후 소련은 이념에 의해 섹슈얼리티에 대한 담론과 그 문화적 표현을 엄격히 금지하였고, 그 결과 포르노그래피가 전자의 경우에는 봉건적 가치에 대한 비판으로, 후자의 경우에는 국가에 의한 통제에 대한 저항으로 기능하였다..."

"자본주의로의 체제 전환 이후 현대 러시아의 포르노그래피는 한편으로는 과거 시기 포르노그래피의 정치성을 계승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이 시기 포르노그래피는 소련시기에는 공공의 문화영역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었던 새로운 문화현상으로 등장함으로써 과거 권력에 의해 강요되어온 획일적 성담론에 대한 극복을 보여주는 하나의 수단이 되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근대 초기 포르노그래피의 비판성을 상실하고 자본주의의 성 상품화 논리를 온전히 반영하는 보수적 매체가 되어버린 서구 포르노그래피가 새로운 시대를 보여주는 문화상품으로 수입되어 현대 포르노그래피의 모델이 되었다... 선정성과 상업성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현대 러시아 포르노그래피가 섹슈얼리티의 담론의 다양화와 표현의 자유의 신장, 이것이 상징하는 문화적 다원주의의 발전과 확산에 기여했다는 점은 부정될 수 없을 것이다..."(22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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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괭이 2006-08-29 2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화법을 빌자면, <저 동네>도 잘 되는 게 쉬운 건 아니죠. 열심히 '온고지신'하고 새로운 문법을 창조해내야 살아남지... -_- // [백야]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야]의 패러디, 아니면, 오도예프스키의 [러시아의 밤들] 패러디인가요??
// 그나저나, 다른 캐릭터야 성인이니까 그렇다치고, 우리의 저 앨리스 양은 <이상한 포르노 나라>에서 대체 뭘 한다요? ;;;--

로쟈 2006-08-29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백야'는 보통명사입니다. 그리고 얼굴을 보면 앨리스는 충분히 과년한 앨리스인데요...

이리스 2006-08-29 22: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무척 고루한 코멘트입니다만.. 여긴 초등학생도 보려면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곳 아닌가요? 이런것을 올려도 문제가 아니될런지..

로쟈 2006-08-29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염려하시는 바는 이해합니다. 그런데, 초등학생들이 '포르노' 구경을 하려고 번거롭게 알라딘까지 드나들진 않을 거라고 봅니다. 'porno'란 단어만 검색해도 널린 게 포르노인 걸요. 더불어, 저는 포르노가 하나의 (하위적)'장르'라고 생각합니다...

SMOKE 2006-08-30 0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낡은구두님. 요즘 초등학생들을 모르시는군요.......

마늘빵 2006-08-30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근데 별로 야할거 같진 않아요. -_- 모름지기 포르노는 보고 반응이 있어야 되는데 그냥 저거 봐서는 별 반응이 안생길듯.

로쟈 2006-08-30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러시아 작품들 빼고는 저도 별로 보고픈 생각이 없습니다...

이리스 2006-08-30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하핫.. 그.. 그렇군요.. -_-;;;
 

러시아 영화 <리턴>(2003)이 9월 개봉을 앞두고 있다. 영어 제목을 따서 '리턴'이라고 붙인 모양인데, 제목 자체는 <러브 오브 시베리아>만큼이나 짜증스럽다. 집을 나간 뒤 아무 소식이 없다가 12년만에 귀환한 아버지와 두 아들 사이의 대면을 다루고 있는 영화이므로 그냥 우리말 '귀환'이나 그 언저리에 있는 제목을 붙이는 게 타당했다('리턴'이라고 붙이면 관객이 더 드나?). 

 

영화는 여하튼 지난번에 소개된 러시아 영화 <러시안 묵시록>과는 레벨이 좀 다르다. 감독 즈뱌긴체프(1964- )의 데뷔작이면서 2003년도 최대의 문제작이었고, 그해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이기도 하다(영어 표기를 음역해서 '즈비야긴체프'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즈뱌긴체프'가 맞다). 재작년 모스크바 체류시 TV에서 영화와 함께 메이킹 필름을 부분적으로 보았던 기억이 있다. 비디오CD를 갖고 있는데, (지난여름을 아쉬워 하는 의미에서) 홍상수의 <해변의 여인>을 본 다음에 언제 시간을 내야겠다.

이 영화의 개봉소식은 아침에 이번주 <필름2.0>을 사서 읽다가 접하게 된 것인데 마침 티켓링크에서 소개기사를 제공하고 있기에 옮겨놓는다. 영화에 대한 이야기는 개봉 이후에 따로 자리를 마련해보도록 하겠다. 가능하다면... 

티켓링크(06. 08. 29) <리턴> - 성장의 아픔에 관한 끔찍한 우화

-할머니, 어머니와 함께 사는 형제 안드레이(블라디미르 가린)와 이반(이반 도브론라보프)은 12년 만에 갑자기 집에 돌아온 아버지(콘스탄틴 라브로넨코)와 마주하게 된다. 사진으로만 보았던 ‘아버지’의 존재 자체가 어색한 두 형제는 아버지와 친해지기 위해 낚시여행을 떠나지만, 강압적이고 권위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아버지와 친해지는 것이 쉽지가 않다. 12년 만에 만난 아들에게 하는 것 치고는 너무나 친절하지 않아서 진짜 아버지가 맞는지가 의심스러울 정도다. 그러는 사이 형 안드레이는 아버지에게 묘한 유대감을 느끼지만, 동생 이반은 자신을 꾸짖기만 하는 아버지가 밉기만 하다. 본래 목적은 사라지고 미움과 갈등만이 남은 세 부자의 여행은 계속되고, 아버지는 무엇을 하려는 심산인지 인적이 없는 섬으로 두 아들을 데려간다.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즈비야긴체프 감독의 데뷔작 <리턴 The Return>은 무시무시한 성장드라마다. 어머니 밑에서 자라던 두 형제 앞에 갑자기 나타난 아버지의 존재는 평온했던 삶을 뒤흔들어 혼란을 가져오는 테러리스트에 가깝다. 가족을 떠나있던 12년에 대해서 어떤 설명조차 해주지 않고(*영화의 핵심이기도 하다. 나로선 소비에트 해체 이후 '12년'이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버지' 부재의 시대), 그저 자신의 목적과 방법대로만 여행을 강요하는 아버지는 이미 아버지로서의 자격을 상실한 듯 보인다. 그래서 강압적인 아버지에게 반기를 드는 말썽쟁이 동생 이반에 비해 아버지의 방식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형 안드레이의 모습이 더 유약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아버지는 두 형제에게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일깨워주는 조력자이기도 하다. 표면적으로만 보자면 웅덩이에 빠진 자동차를 빼내는 방법이나 배의 노를 젓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형제는 폭력과 질타를 일삼는 아버지에게 대들거나 순응하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의지를 시험받는다. 마침내 아버지와의 갈등이 최고치에 달했을 때, 형제는 감당하기 힘들만큼의 끔찍한 비극을 마주하게 되고 아버지와 함께 왔던 길을 홀로 돌아가야만 한다. 그렇게 <리턴>이 보여주는, 아직 여리기만 한 마음 한구석을 섬뜩한 칼날로 도려내는 성장의 고통은 아버지를 죽여야했던 오이디푸스의 그것과도 닮아있다. 2003년 베니스영화제는 이 외면하기 힘든 한 편의 '끔찍한 우화'에 황금사자상을 선물했다.

HOT  우리에게 낯선 러시아 영화지만 <리턴>이 주는 재미는 적지 않다. 특히 악동의 이미지를 완벽하게 갖춘 이반 도브론라보프의 매력적인 연기가 쏠쏠한 웃음과 진한 감동을 이끌어낸다.

COLD 등장인물이 적고(영화 중반부터는 세 명밖에 나오지 않는다) 사건의 진폭이 작아서 흥미를 잃지 않고 끝까지 이해하는 것이 쉽지는 않을 듯.

06. 08. 28.

P.S. 참고로, 러시아 관객의 지적에 따르면, 영화속 아버지의 형상은 그리스도의 변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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