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를 마시면서 재작년 이맘때 모스크바에서 무슨 일을 했던가 잠시 둘러보다가 '두 개의 서평에 대하여'란 페이퍼에 눈길이 머물렀다. 모스크바통신에 올렸다가 지금은 비공개로 돌렸던 것인데, 이미지 버전으로 정리해서 창고에 넣어두도록 한다. 바로 언급이 되지만, 제목의 두 서평은 각각 이언 와트의 <근대 개인주의 신화>와 지젝의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에 관한 것이다. 그럼 2년전 가을로 되돌아가보도록 하겠다.

 

 

 

 

(얼마전) 인터넷에서 카피해온 두 개의 서평에 대해서 몇 마디 참견하도록 하겠다. 하나는 이언 와트의 <근대 개인주의 신화>(문학동네, 2004)에 대한 쿤데라님의 서평(다음카페 ‘비평고원’)이고, 다른 하나는 지젝의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인간사랑, 2002)에 대한 발마스님의 서평(‘알라딘’)이다.

특별히 두 서평에 대해서 참견하는 것은 이 책들이 현재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들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전자는 최근에 내가 읽고 싶어한 책이며, 후자는 최근에 다시 읽고 있는 책이다). 서평들은 내게 유익했던 만큼 내가 동의할 수 없는 대목들을 포함하고 있었는바, 그에 대해서 몇 마디 하고자 하는 것. ‘-’로 시작하는 문단은 인용이며(인용문의 오타들은 교정했으며, 필요에 따라 약간의 수정을 가했다), ‘*’를 단 건 참견의 말들이다). 먼저, 쿤데라님의 서평을 따라가 본다.

-<소설의 발생>으로 유명한 영문학자인 이언 와트의 책 <근대 개인주의 신화>는 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유용한 교양서다. 즉 이 책은 특별한 문학수업을 받지 않은 사람도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심지어는 이 책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작품들, 말로/괴테의 <파우스트>, 티르소의 <돈 후안>,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를 읽지 않은 사람도 읽고 이해할 수 있다. 저자가 작품 줄거리까지 제공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저자는 전통적인 아카데미 학자인 것 같다. 그 이 책의 말미에서 대중매체에 의해 저하되고 있는 독서인구에 대한 한탄하고 있다. “ 이 점은 대학교수로서의 나의 경험에 비춰보아도 마찬가지다. 이제는 학생들이 매우 유명한 책들 - 이를테면 <돈키호테>나 <로빈슨 크루소> - 을 당연히 읽었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누군가 그 책을 읽었다면 다른 강의에서 그 책을 다루었기 때문인 것이다.”(384쪽)

-어떻게 보면 이 책은 바로 이런 세대들을 위한 책인지 모른다. 그러나 여기엔 어떤 순진함, 시대착오적인 느낌이 없지 않아 있다. 그가 아무리 중요성을 설파하더라도, 여전히 그들은 <돈키호테> 따위는 읽지 않을 것이다(*쿤데라님이 걱정할 일은 아니다. 그의 이문열 옹호론에서도 알 수 있는 바이지만, 사람들이 너나없이 <돈키호테>를 읽는 분위기였다면 쿤데라님은 거꾸로 <돈키호테> ‘무용론’을 들고 나왔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런 것이 소위 ‘키호테주의’일 것이다).



 

 

 

-<돈키호테>를 읽지 않더라도 대학원 과정을 마칠 수 있으며, 비평가가 될 수 있으며, 문학박사학위도 받을 수 있다(*쿤데라님이 굳이 억울할 일은 무엇인가?). 그런데도 이언 와트는 근대문학의 대표적 네 유형을 마치 대단한 가치가 있는 유산처럼 다루고 있다. 그의 조급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안쓰러울 뿐이다.(*그럼에도 쿤데라님 또한 “고전을 읽자!”는 모토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조급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좀 안쓰럽다. 거기에 가로놓여 있는 것은 어떤 순진함과 시대착오이다. 거꾸로, 필요한 사람은 다 읽으며 읽기 마련이다. 쿤데라님이 굳이 안쓰러워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이 책의 원제는 'Myths of Modern Individualism'이다. 흔히 하는 식으로 번역하자면, <근대 개인주의의 신화>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러나 역자들은 <근대 개인주의 신화>라고 번역했다. 따라서 ‘근대의 개인주의 신화’로도 읽힐 수 있으며, ‘근대 개인주의의 신화’로도 읽힐 수 있다. 또 ‘근대’ ‘개인주의’ ‘신화’라는 키워드의 나열로도 볼 수 있다. 내 생각에, 전체적인 내용으로 볼 때 어느 쪽으로 읽어도 무방하며, 어느 것을 선택해도 의미 차이는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액센트를 문제 삼는다면, 당연 중심은 ‘개인주의(Individualism)’에 놓여진다. 저자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개인주의’이라는 단어가 만들어진 것은 19세기(다시 말해 낭만주의 이후)이다. 물론 단어상의 의미로 볼 때 고대 그리스나 로마에도 개인주의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근대의’ 개인주의자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단어 자체가 근대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근대(Modern)’를 붙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여긴 그냥 넘어가도 될 듯하다.)

-나쓰메 소세키의 글 중에 <나의 개인주의>라는 유명한 강연문이 있다(*최근에 번역/소개된 걸로 안다). 여기서 소세키는 ‘개인주의’란 말을 사용하면서, 이 단어를 이기주의와 같은 것으로 혼동하지 말하고 주의를 주고 있다. 그가 이런 주의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본래 ‘개인주의’가 어떤 ‘경멸적/비하적’ 단어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기록상 ‘개인주의자’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반동적 가톨릭 사상가 조제프 드 메스트르라고 한다. 그는 혁명적 민주주의의 지적 분위기를 깎아 내리기 위해 이 단어를 썼다.

-왕당파였던 발자크도 ‘개인주의’를 경멸의 뜻을 담아서 사용하였으며, 벤야민이 <파사젠베르크>에서 높이 평가한 초기 공산주의자 블랑키 역시 마찬가지다(*<파사젠베르크>는 <아케이드 프로젝트>로 번역돼 있다). 이와 같은 단어사용에 변화의 조짐이 보인 것은 토크빌에 와서다. 하지만 그 역시 <미국의 민주주의에 대하여>에서는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했다(*우리말 번역은 <미국의 민주주의> 아닌가? 아마도 쿤데라님은 일역본을 읽은 듯하다). 왜냐면 개인주의라는 단어에 들어있는 반-전통적 입장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감탄한 미국 민주주의가 개인주의와 관련이 있다는 점 역시 (*그는) 인식하고 있었다.

 

 

 



-‘개인주의’와 마찬가지로 ‘신화(myth)’ 역시 낭만주의 이후의 용어라고 한다. 여기서 우린 그리스로마 신화와 같은 특정 신화체계 전반을 가리키는 단어인 ‘mythology’와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신화’는 사회를 지탱하는 무의식 체계를 의미한다. ‘신화’는 오늘날 별로 인기가 없다. 이를테면 아도르노(<계몽의 변증법>)나 롤랑 바르트(<신화론>)는 ‘신화’가 자본주의적 상부구조의 허위성을 떠받치고 주고 있다고 비판한다(*바르트의 <신화론>의 원제는 ‘Mythologies’이며 <현대의 신화> 등으로 번역돼 있다. 바르트는 myth와 mythology를 혼동하고 있다!). 그런데 와트나 투르니에는 이와 정반대의 의견을 한다. ‘신화’가 사회에 대한 개인의 저항을 담보하고 있다고 말이다. 둘 다 맞는 말이다. 서로 핀트가 다를 뿐이다. 이언 와트나 미셸 투르니에가 긍정하려는 ‘신화’는 주로 문학적 범위에 국한된다(*문화현상 전반에 대한 기호학적 ‘신화’비평을 가하고 있는 바르트는 그렇다 치고, 아도르노의 경우는?).

-이언 와트가 근대의 대표적인 신화로 드는 것은 파우스트, 돈 후안, 돈 키호테, 그리고 로빈슨 크루소다. 여기서 우린 시대적으로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로빈슨 크루소 대신 햄릿을 넣고 싶은 충동을 느낄 것이다. 투르게네프는 근대적 인물의 두 가지 유형으로 돈 키호테형 인물, 햄릿형 인물로 구분하지 않았던가(*1860년쯤의 한 강연에서였다. 강연문 <햄릿과 돈키호테>는 우리말로 번역돼 있다. 한 ‘세계 에세이선집’에). 하지만, 그(와트)는 햄릿이 유명한 것은 그의 영향력이나 대표성에서보다는 순전히 ‘문학적인 측면’에 의한 것이라고 거부한다(이는 투르니에도 마찬가지다).

-그는 이 네 신화 대부분(로빈슨 크루소만 빼고)이 반종교 개혁 시기에 탄생했다는 것에 주목하고, 그것은 개인성을 발현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 르네상스와 그것의 왜곡인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에서 찾는다. “반종교개혁 사상가들에게 주로 문제가 된 것은 르네상스의 긍정적 이데올로기가 더 이상 합당하지 않다는 현실이 아니었다. 오히려 르네상스의 가치를 계속 추구하려 애쓰는 사람들이 결국에는 환멸감에 빠지거나 혼란상태에 귀착한다는 것이 문제였다.”(189쪽)

-그 증거는 대부분의 인물들이 개인적 욕망에 의해 모두 ‘벌’을 받는다는 것에서 찾는다.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이언 와트에게 있어 반종교개혁은 종교개혁의 반대라기보다는 종교개혁을 과격화를 의미한다. 참고로 마녀사냥이란 우리의 상식과는 반대로 중세가 아닌 바로 이때(종교개혁 이후) 집중적으로 행해졌다는데, 독일에선 루터파가 이를 주도했다. 파우스트는 실존인물로 악마라기보다는 광대나 사기꾼의 성격이 강했다. 그런데 루터가 그를 악마와 연관시켰고, 그 후 파우스트는 루터적 편견에 따라 구성되어 갔으며 오늘날 가장 원초적인 형태의 파우스트 형상이 완성되었다. 역으로 말하면, 악마와 타협하는 파우스트는 루터가 만들어낸 형상에 다름 아닌 셈이다(*맨마지막 주장은 와트의 것인지 쿤데라님의 것인지 모호하다).

-이와 같이 독일에서 형성된 파우스트(<파우스트 서>)는 영국으로 건너가 크리스토퍼 말로에 의해 <파우스트 박사>라는 희곡으로 재탄생한다(*말로의 원작이 <파우스투스 박사>인 듯하지만, <파우스트 박사>로 통일했다). 사실 오늘날 우리가 막연히 떠올리는 파우스트 이미지는 괴테의 것이 아니라, 말로의 것이다. 말로에 의해 파우스트는 고뇌하는 개인주의자로서의 모습을 갖춘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이언 와트가 말로의 파우스트가 탄생할 수 있던 것을 당대 ‘교육의 문제’에서 찾고 있다는 것이다. 16세기는 대학들 갑자기 증가한 시기이다. 영국의 예를 들자면 30년 간(1560년-1590년 사이) 입학생의 수가 무려 3배나 증가했다.

-이로 인해 파생되는 사회적 문제(대학생 실업자 문제)는 오늘날에도 능히 짐작 가능하다. 대학이 부여한 기대치와 사회가 제공하는 빈약한 실현 사이의 간극이 사회에 대해 적대감을 품게 되었고(따라서 홉스는 어딘가에서 “반역의 핵심은 대학이다”라고 썼다), 그것이 바로 파우스트에게 반항/고뇌하는 형상(환멸)을 부여했다는 것이다(*그러니까 와트에 의하면, 어떤 ‘사회적 잉여’가 파우스트적 형상을 낳았다는 것이다. 고학력의 ‘파우스트-백수들’! 참고로, 푸슈킨도 <파우스트의 한 장면>이란 아주 짤막한 ‘드라마’를 썼는데,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의 대화 장면으로만 구성돼 있다. 파우스트와 돈 후안은 푸슈킨의 대표적인 자기-이미지이다).

-이언 와트는 파우스트 분석에 이어 돈키호테를 분석한다. 하지만 그의 돈키호테 분석은 파우스트 분석에 훨씬 못 미친다. 이는 그의 능력부족이라기보다는 <돈키호테>라는 작품이 가지고 있는 완결성(완벽성)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실제, 파우스트 신화나 돈 후안 신화는 <파우스트 서>나 티르소의 <돈 후안> 이후에도 새로운 버전으로 읽을 만한(괜찮은) 작품들이 창작되어 나왔으나(말로 <파우스트 박사>, 괴테의 <파우스트>, 토마스 만의 <파우스트 박사>, 몰리에르 <돈 주앙>, 소리야 <돈 후안 테노리오> 등), <돈키호테>에는 그런 쓸 만한 아류작이 존재하지 않는다. 투르니에는 ‘소설 주인공’은 ‘소설가’보다 유명하지 않으나 ‘신화적 주인공’은 ‘작가’보다 유명하다고 주장하고 이언 와트도 그에 동조하지만, 적어도 <돈키호테>만큼은 그렇지 않다.

-세르반테스는 꼭 돈 키호테만큼 유명하다. 이로 인해 그의 꽤 괜찮은 다른 작품들이 부당한 평가를 받고 있지만 말이다. 이언 와트는 쩔쩔매면서 돈키호테에 대해 이야기한다. 마치 무리한 숙제를 해결하려고 끙끙대는 아이처럼. 사실 나는 이 부분을 읽고 있는 동안만큼은 그가 안쓰러웠다(*쿤데라님이 또다시 안쓰러워하는 대목인데, 그의 <돈키호테론>을 기대해봄 직하다). 그는 푸코가 <말과 사물>에서 한 과도한 추상화를 거부하면서 뭔가 새로운 것을 이야기하려 하지만, 그것이 성공적이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돈키호테>는 완전히 이해 불가능한 경의의 책이다(*‘경의’는 ‘경이’의 오타일 듯하다). 헤르더는 평생 <돈키호테>를 연구했다고 한다. 이점에서 <돈키호테>에 비견될 수 있는 것은 단테의 <신곡> 정도일 것이다.

-참고로, 이언 와트는 세르반테스의 후계자로 19세기 러시아 소설가 도스토예프스키(<백치>)를 들고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한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심판의 날에 이승에서의 삶을 이해했는지 또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질문을 받는다면, <돈키호테>를 내놓으며 이것이 삶에 대한 나의 결론이라고 말할 생각이다.”(*참고로, 투르게네프가 계속적으로 시도한 것도 돈키호테적 인물을 자신의 소설에서 형상화하는 것이었다. <아버지와 아들>에서의 바자로프도, 적어도 서두에선, 돈키호테적인 인물로 등장한다. 비록 햄릿적인 인물로 죽게 되지만.)

-다음은 돈 후안에 대해서다. 많은 사람들의 편견 중 하나는 돈 후안이 파우스트처럼 민중설화에서 기인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티르소의 돈 후안은 셰익스피어가 ‘햄릿’을 창조해낸 것보다 더 창조적인 인물이다. 즉 티르소라는 개인이 창작해낸 인물이다. 이는 장 루세의 <돈 주앙의 신화>만 읽어봐도 쉽게 알 수 있다. 설화와 유사성을 문제삼는 것은 어디까지나 마지막 부분(사자(死者)에 대한 조롱과 사자의 방문)뿐이다. 단적으로 말해 거침없는 난봉꾼으로서의 돈 후안은 티르소 없이는 존재하지 않았을 인물이다(*내가 알기에 티르소의 ‘공적’은 ‘돈 후안’과 ‘죽은 자의 조롱/방문’이라는 두 가지 신화소를 ‘결합’시켜놓은 것이다. 즉,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티르소의 ‘돈 후안’은 <돈 후안+석상손님>이다. “거침없는 난봉꾼으로서의 돈 후안은 티르소 없이는 존재하지 않았을 인물이다”는 와트의 견해인지 쿤데라님의 견해인지 모르겠지만, 나로선 동의할 수 없는 견해이다. 돈 후안이 “티르소라는 개인이 창작해낸 인물”이라면 ‘돈 후안’은 ‘신화’가 아니다.)

 

 

 



-이점에서 이언 와트의 티르소의 돈 후안 분석은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사실 나는 몰리에르의 <돈 주앙>에서는 어떤 감흥도 느끼지 못했다. 알렌카 주판치치의 말대로 그것은 돈 후안의 가장 세련된 판본일지 몰라도 가장 재미없는 판본이기도 하다. 내가 좋아하는 돈 후안 판본은 티르소의 것과 소리야의 것이다(푸슈킨의 것은 너무 짧아 재미니 내용이니 논할 게 없다). 돈 후안에 대해서는 이언 와트의 이 책과는 나중에 다시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쿤데라님의 개인적인 취향에 대해서 참견할 생각은 없다. 아마도 조만간 쿤데라님이 스페인어책을 들고 다니는 걸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푸슈킨의 것은 너무 짧아 재미니 내용이니 논할 게 없다”는 건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라는 걸 밝혀둔다. 푸슈킨은 이미 ‘고전’이기 때문에, 그의 텍스트 역시 짧아도 텍스트-무한이다. 그리고, ‘간명함’이란 건 거의 푸슈킨의 시학적 원칙이며, <석상손님>은 그래도 ‘소비극’ 중 가장 긴 작품이다. 이 작품에 대한 자세한 분석은 조만간 올리도록 하겠다. 참고로 푸슈킨의 <석상손님>에서 가장 특이한 것은 돈 후안이 ‘시인’이라는 점이다. <석상손님>의 국역은 <보리스 고두노프> 등에 수록돼 있다).

-사실 몇 달 전 돈 후안에 관한 글을 쓰고자 여러 작품들(티르소, 몰리에르, 푸슈킨, 소리야, 버나드 쇼, 막스 프리쉬 등의 작품)과 장 루세의 연구서를 읽다가 포기한 적이 있다(*왜 포기하셨을까 궁금하면서 또한 아쉽다. 재미있는 글이 나왔을 듯한데 말이다. 한편으로 장 루세의 연구서 <돈 주앙 신화>(1978)는 아직 우리말로도 영어로도 번역되지 않은 걸로 아는데, 일역본으로는 나와 있는지?) 하여튼 이언 와트의 설명으로 돌아오면 그의 돈 후안 해석 중 한 가지 주목할 게 있다. 그것은 돈 후안의 방탕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죄의식의 부재에 대한 설명이다. 어떻게 해서 돈 후안은 아무런 죄의식도 느낄 수 없었던 것일까?



-여기서 이언 와트는 말로의 <파우스투스 박사>를 설명할 때와 연관지을 수 있는 설명을 한다. 그것은 돈 후안이 젊은이였기 때문이다. “저는 아직 청년입니다” (티르소, <세비야의 난봉꾼과 석상손님>(번역서 제목: <세빌랴의 난봉꾼 석상에 맞아죽다)>, 김창환 옮김, 울산대학교출판부, 24쪽)(*또 다른 번역본은 <돈 후안 – 세비야의 난봉꾼과 석상의 초대>, 안영옥 옮김, 서쪽나라, 2002이다). 다시 말해 돈 후안이 죽음(그리고 그로 인한 심판)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죽음과 심판은 믿고 있었지만, 그것이 오래 동안 지연되리라 믿었기 때문에 아무런 죄의식 없이 방탕할 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언 와트는 <돈 후안>이 사기꾼(방탕아)과 ‘유예된 응보’를 두 축으로 삼고 석상을 통해 이 둘을 연결시키고 있다고 보고 있다(*참고로, ‘돈 후안’ 신화의 사회적 기능에 대한 분석으로는 James Mandrell의 'Don Juan and the Point of Honor: Seduction, Patriarchal Society, and Literary Tradition'(The 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Press, 1992)가 자세하다. 나는 티르소의 <돈 후안> 러시아어본을 갖고 있는데, 자잘하지만 한국어본과 다른 대목이 많아서 좀 당혹스럽다).



-그럼 여기서 우린 잠깐 다른 스페인극과 <돈 후안>을 비교해 보자. 황금기 스페인극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사건의 중심이 ‘명예’에 걸려 있으며, 그것은 자주 딸을 보호(여성의 정절을 지켜주기)하는 아버지(가족)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단적인 예로 우린 칼데론의 <살라메아 시장>을 떠올려도 좋을 것이다) 돈 후안 역시 당대의 인물들처럼 ‘명예’를 소중히 여긴다. 사실 그가 석상의 초대를 받아들인 것(그로 인해 그는 결국 지옥에 떨어진다)은 ‘명예’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런 그의 명예가 공동체(가족)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으며(그는 타인(가족)의 명예를 전혀 신경 쓰지 않으며 무참히 짓밟기까지 한다), 오직 자신하고만 관계한다는 점이다(*그런 점에서 돈 후안은 ‘청년’이면서 아직 ‘어린애’이다).

-돈 후안은 말로의 파우스트와 마찬가지로 청년의 형상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자기 자신에만 집중하며 기존 사회체제에 대해 불만을 토로한다. 악마와 결탁하거나 방탕에 몸을 맡기거나 한다. 하지만 아직 젊기 때문에 심판(형벌)이 무한한 지연될 것이라고 믿는다. 따라서 도덕이 사회체제를 유지시키는 바탕이라고 한다면, 그들은 도덕적으로 ‘무(無)’가 되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언 와트는 파우스트, 세르반테스, 돈 후안을 함께 평가하면서, 이 세 사람 다 편집광적 인물들로 집을 떠난 방랑자(유목민)이며, 이들에게 가정사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며, 그들과 세상을 연결시켜 주는 인물로 하인들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수긍할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결정적인 것을 놓치고 있다. 말로의 파우스트와 티르소의 돈 후안이 청년인데 반해, 돈키호테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또 파우스트와 돈 후안의 마지막 장면(신성모독에 의한 징계)과 돈키호테의 마지막 장면(임종)은 전혀 관계가 없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잠정적인 결론은 설득력이 없다. “이들 세 주인공의 상징적인 최후의 형벌은 반종교개혁 세력이 르네상스 개인주의자들에게 한 수 가르쳐주려 한 재미없는 교훈이 아닌가 싶다. 최소한 티르소, 세르반테스, 말로 모두 고난과 역경을 겪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이들은 모두 외로운 인간이었으며 다양한 종류의 소외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자신의 주요 작품에서 결국 실패하고 마는 개인주의의 상징이 되는 영웅을 생산해 냈다.”(201쪽)(*개인주의의 실패는 적어도 ‘돈 후안’에 대한 비평으로서는 유효하다.)

 

 

 



-다음은 <로빈슨 크루소>다. 하지만 나는 이에 대해 그다지 하고 싶은 말이 없다. 애당초 이언 와트의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나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는 로빈슨 크루소가 아니라, 작품 년대가 비슷한 <햄릿>을 선택해야 했다. 그래야 좀더 일관성 있는 설명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로빈슨 크루소>를 분석한 후(<소설의 발생>도 이 소설에 대한 분석이다), 그에 대한 패러디인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과 비교한다. 나름대로 의미 있는 분석이지만, 나에게는 좀 따분했다. 대신 괴테(의 <파우스트>)에 대한 견해에 대해선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읽어본 이들은 알겠지만, 괴테의 <파우스트>는 괴물 같은 작품이다. 거기엔 우리가 생각하는 파우스트도 메피스토펠레스도 없다. 축약본이나 공연되는 연극에서는 분량을 이유로 많은 부분을 줄이는데, 그리고 나면 괴테의 파우스트가 아니라 말로의 파우스트가 된다. 해서 이언 와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한번도 괴테 같은 타고난 천재성을 누린 적이 없다. 오히려 괴테에 대해 짐짓 아이러니한 난색을 표하는 츠베탕 토도로프에 동의한다. “괴테를 좋아하기란 쉽지 않다. 이 발언을 좀 덜 일반적이면서 동시에 좀더 정당한 것으로 하기 위해선 어쩌면 ‘오늘날에는’이라든가, ‘게르만 문화에서 성장한 사람이 아니고선’이라든가, 아니 어쩌면 훨씬 더 겸손하게 ‘나로서는’ 같은 말을 덧붙여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괴테의 <파우스트>가 근대 개인주의의 가장 중요한 업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 이유는? 물론 그것의 엄청난 인기 때문이다.”(293쪽)

-나는 이언 와트의 솔직한 표현에 공감을 표하고 싶다. 솔직히 파우스트나 메피스토펠레스라는 인물에 중심점을 두고 읽으면, 괴테의 <파우스트>는 그야말로 따분하기 그지없는 책이다. 그들을 둘러싼 사건들은 전혀 설득력이 없으며, 이는 파우스트의 구원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오래 전 루카치가 분석했던 것처럼(그리고 그 관점을 이어받은 모레티의 분석처럼) 이 책을 자본주의의 서사시로 읽는다면 사태를 달려진다. 물론 이언 와트도 이런 점들을 잘 알고 있고 또 그에 대해 언급도 하고 있다(296-297쪽). 하지만 깊게 들어가지는 않는다. 기억하자. 이언 와트의 이 책은 파우스트라는 신화적 존재에 대한 분석임을.



 

 

 

-이제 마무리를 해보기로 한다. 이언 와트의 이 책은 4명의 근대적 인물을 분석하고 있는데, 그가 무게중심은 르네상스의 좌절(그리고 그로 인해 환멸감)에 놓여있다. 그런데 이 환멸감은 그 뒤를 잇는 로빈슨 크루소를 거치고 루소의 <에밀>이나 괴테와 <파우스트>에 이르러 어떤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나는데, 징벌적 결론은 사라지고 로빈슨 크루소의 ‘고독상태’는 도덕적 판단의 객관성을 담보하는 수단이 찬양을 받고(루소), 파우스트는 자본가의 모습으로 나타나며, 사회구조에 적대적이었던 젊음은 사회진보의 원동력으로 평가받는다(덧붙이자면, 여기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루소의 크루소 ‘고독’ 해석이 가진 함의다. 루소는 4대 신화적 인물이 가진 ‘무절제(방탕/광기)’라는 문제를 ‘교육’이란 문제로 바꾸어 놓고 있다).

-이후 현대 작품으로는 토마스 만의 <파우스트 박사>와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이 언급된다. <파우스트 박사>는 이전 모든 파우스트 판본(특히 최초의 판본인 <파우스트 서>)을 패러디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토마스 만은 기막힌 뒤집기를 시도하는데,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의 역할을 바꾸는 것이다. 냉소주의자는 아드리안이고, 악마야말로 낭만적 낙관론자의 형상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제레누스라는 화자를 내세워 새로운 서사층위를 구축해 내고 있다.

-투르니에 역시 디포의 소설을 완전히 뒤집어 놓는다. 그 전복의 강도로 말하자면, 정말 놀라울 정도다(들뢰즈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하지만 이언 와트는 일정 정도 유보적인 태도를 보인다. 왜냐면 투르니에가 프라이데이와 크루소의 역할 바꾸기에는 성공했지만, 디포와 마찬가지로 프라이데이의 ‘내면’은 여전히 미지의 것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로빈슨 크루소는 무인도를 떠나길 거부하는데, 이는 프라이데이의 교육적 효과라는 형태를 띠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영원한 청춘’(379쪽)이라는 디포적 명제 밖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해서 이언 와트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투르니에의 크루소는 진정한 1960년대식 낙오자 영웅이다”(381쪽)

-<근대 개인주의 신화>는 아카데믹한 영문학 연구자의 냄새가 나는 책이다. 친절하지만 규범적이고, 솔직하지만 그뿐이다(*‘아카데믹하다’는 게 ‘친절하고 솔직하다’는 뜻인가?!). 하지만 근대문학에서 가장 문제적 인물 그것도 네 명을 어떤 연관 속에서 한꺼번에 다루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이 책은 실제작품들을 읽기 위한 교양서(개론서)로서 손색이 없다. 하지만 실제작품은 읽고 나면 이 책의 가치는 빛을 잃을 것이다(*“네 명을 어떤 연관 속에서 한꺼번에 다루었다는 점”의 가치는? 구슬이 너 말이라도 꿰어야…). 그러나 실제작품을 읽을 시간이 없거나 굳이 읽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럴듯한 교양을 축적하기에는 최상의 책이다(*쿤데라님의 ‘고전주의자’는 ‘그럴듯한 교양주의자’인 것인지?).

(*)쿤데라님의 긴 서평을 길게 인용한 것은 <근대 개인주의 신화>를 한번쯤 읽어보시라는 뜻에서이다(나는 서울에 돌아가서야 읽게 되겠지만). “그럴듯한 교양을 축적하기는 최상의 책”이라고 하는데, 사실 그런 책은 많지 않다는 점에서 이 책은 한 독일어권 교양서 <교양>만큼 팔려나갈/읽힐 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더불어 이언 와트의 출세작 <소설의 발생>도 재출간되었으면 한다. 하긴 거기에서 다뤄지는 책들이 먼저 번역/소개되어야 하겠지만. 나는 아주 오래 전에 책의 서두에 나오는 리처드슨의 <파멜라>을 원서를 조금 읽다가 만 경험이 있다(가끔 그토록 많은 영문학도들이 다 어디에 소용이 되고 있는지 궁금하다). 절판된 토마스 만의 <파우스트 박사>도 굳이 헌책방을 순례하지 않아도 구할 수 있었으면 한다. 불행하게도 우리의 처지는 “실제작품을 읽을 시간이 없거나 굳이 읽을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작품을 읽는 것이 불가능한 경우가 더 많다. 왜? 없으니까!.. 이어서 발마스님의 서평(이건 길지 않다).

-남한에는 두 종류의 지젝 독자들이 있다(*북한에는 세 종류가? 서두에서 알 수 있는 바이지만, 발마스님의 서평은 지젝에 대한 ‘삐딱하게 보기’이다. 그것도 ‘취향’이긴 하지만, 나로선 그 근거가 불충분하다고 여겨진다). 한 부류의 독자들은 대중문화를 다루는 지젝의 절묘한 솜씨에 매료되어 있다. 사실 정부와 학계, 산업계와 언론계가 한 목소리로(이는 참 보기드문 일이다. 그러나 정말로?) 21세기는 문화산업의 시대이고, 우리의 살 길은 문화산업을 육성하는 데 있다고 소리 높여 합창하는 시기에.

(*)그러니까 발마스님은 ‘문화산업’에 대해서 비판적이며), 지젝은 더할 나위없이 매력적인 문화적 소비대상이자 벤치마킹의 모델일 수밖에 없다(*지젝은 ‘문화산업’과 아주 궁합이 잘 맞는 관계로 좀 의심스럽다, 라는 게 발마스님의 견해인 듯하다. 그러나 정말로? 지젝이 정말로 매력적인 ‘문화적 소비대상’으로 너나없이 읽히고 있는지? 그런 소비대상으로라면 지젝을 뺨치고도 한참 남아도는 ‘알튀세르’나 ‘푸코’ ‘들뢰즈’ 등은?)

-난해한 독일 관념론 철학과 라캉의 이론이 발하는 아우라로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거만하지 않고 자상하게 문화를 향유하는 법을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학계여 지젝을 본받으라! 그리고 이미 지젝을 흉내내고 해설서까지 쓰는 학자들까지 생겼으니.

(*)내가 알기로 <잉여쾌락의 시대>의 저자 정도를 꼽을 수 있을 텐데, 어떤 ‘학자들’이 더 있는 것인지? 사실 지젝을 흉내내는 이들보다는 무시하거나 폄하하는 이들이 더 많은 게 우리의 ‘학계’가 아닌가? ‘데리다’까지도 그저 쓸데없이 ‘난해한 철학자’ 정도로 치부되는 게 우리의 ‘학계’ 아닌가?), 남한의 문화산업은 전도가 양양하다(*‘지젝 따라하기’ 정도로 “남한의 문화산업”이 전도가 양양하다면, 이건 국가정책적으로 추진할 만한 일이다. 지젝의 책 몇 권이 번역되고, 방한해서 초빙강연 몇 번하고, 일부에서 ‘아, 지젝!”하는 현상과 남한의 문화산업이 어떤 관련성을 갖는다는 건지 나로선 헤아리기 어렵다. 문화계나 문화산업 관련업계 종사자들이 지젝을 읽기라도 한다는 건지?).

-다른 부류의 독자들은 전자와는 정반대로(그러나 정말로?) 지젝에서 급진정치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다. 지젝은 포스트모더니스트들과는 달리 주체를 일방적으로 부정하지 않고, ‘무의식의 주체’를 주장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는 것이다. 더욱이 알튀세르와 달리, 이데올로기를 "과학과 대립하는 것"으로 사고하지 않고(알튀세르에 관한, 정말로 지긋지긋한 영미식 토포스다! 이거야말로 이데올로기 그 자체다), 이데올로기가 작용하는 무의식적인 장소(또는 이데올로기의 실재계적 공백)을 발견하여, 이데올로기론을 새로운 정점으로 끌어올렸다고 한다(브라보!). 어떤 부류의 독자들이 진정한 지젝의 독자들일까? 전자일까 후자일까? 그런데 이런 질문이 의미가 있기는 있는 것일까?

(*)발마스님은 알튀세르의 토포스에 대해서는 정말로 지긋지긋해하면서 지젝에 대한 토포스에 대해서는 환호해마지 않는다. “브라보!” 그리하여, 지젝에 대한 ‘삐딱하게 보기’는 이제 지젝의 독자들에 대한 ‘삐딱하게 보기’로 전이되었는데, 나는 그런 식의 ‘무의미한’, 더불어 ‘감정적인’ 문제제기가 왜 필요한 것인지 알기 어렵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나는 왜 역자가 제목을 이렇게 번역했는지 아직도 이해하지 못했다. 혹시 오역도 바로잡을 겸 재판을 찍을 계획이 있다면, 그 때는 그 이유를 꼭 알려주었으면 고맙겠다)은 지젝의 원형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책이다.

(*)<이데올로기가>의 지젝의 ‘데뷔작’이라는 점에서 그의 ‘원형’을 보여준다는 말은 맞다. 그렇다면 그 ‘원형’이란 무엇인가? 이하의 내용에 따라면 (1)(헤겔과 라캉에 통달한) 전문학자로서의 지젝, (2)(이데올로기) 이론가로서의 지젝, (3)(대중문화) 분석가로서의 지젝, 세 가지이다. 그러니까 <이데올로기>는 세 가지 모습의 지젝이 모두 들어가 있다. 그리고 이 셋의 총합이 지젝이다. 비록 ‘전문학자’와 지젝은 전혀 어울리지 않지만. 그런데, 발마스님에 따르면 이 셋의 만남은 좀 문제가 있는 듯하다. 그건 조금 뒤에 결론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선 헤겔을 비롯한 독일관념론과 라캉의 정신분석학에 통달해 있는 전문 학자로서의 지젝의 면모가 있다. 실제로 그는 헤겔과 정신분석학으로 각각 학위를 하는 보기 드문 지적 인내심을 보여주었다(그런데 왜 자크-알랭 밀레는 지젝의 논문을 자기 총서에 출판해주지 않았을까? 그런데 왜 그는 지젝을 자기 오른팔처럼 생각하는 걸까?).

(*)약간의 착오가 있는데, 지젝은 헤겔이 아니라 하이데거로 철학학위를 했다. 비록 그가 언제나 들먹이는 건 헤겔이지만. 그리고 두 가지 학위를 하는 게 ‘보기 드문 인내심’의 결과인지? 발마스님도 내용을 알 만한데, 지젝은 철학박사 학위를 하고서 ‘백수’로 있다가 슬로베니아로 초빙강연을 온 밀레의 초청을 받아서 파리로 건너간다. 자신의 고백대로, 바로 ‘취직’되었다면 ‘보기 드문 인내심’을 발휘할 필요도 없었다. 밀레와 지젝의 사이가 어떤지 나로선 알지 못하며 크게 궁금하지도 않지만, 밀레의 총서에 지젝의 논문이 출간되지 않는다는 것과 ‘전문학자’ 지젝 사이에는 어떤 관련(혹은 결락)이 있다는 것인지? 밀레가 지젝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인지? 미심쩍은 지젝?)



-그리고 이런 지적 토대에 기초하여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자신의 이론적 과제로 제시하는 이론가 지젝의 모습이 있다. 이 과제는 푸코와 하버마스 사이의 근대성 논쟁의 배후 쟁점으로서 라캉과 알튀세르 사이의 논쟁이라는 문제로 제기된다. 이 문제에 관한 지젝의 테제는 라캉은 욕망의 그래프를 4단계로, 또는 2층으로 제시할 줄 알았던 반면, 알튀세르는 1층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곧 알튀세르는 호명 테제에만 그쳤을 뿐, 어떻게 호명을 넘어서는, 또는 호명을 벗어나는 주체가 존재할 수 있는지는 사고하지 못했다는 것이다(그러나 정말로? 지젝은 때로는 스스로 속는 척한다).(*즉, 지젝이 알튀세르를 비판하지만, 그 비판은 아닌 줄 알면서 하는 비판, 일종의 ‘연기’라는 것. 그러니 역시나 미심쩍은 지젝?)

-그리고 대중문화 분석가, 향유자로서 지젝의 모습이 있다. 그가 유고 영상기록 보관소에 틀어박혀 탐닉했던 미국 영화들은 단순히 이론을 예시하기 위한 소재에 그치지 않고(그랬더라면, 지젝이 그렇게 큰 인기를 얻을 수 있었을까?), 이론, 또는 진리의 증거 자체가 되어버린다(*이런 비판은 데리다 ‘전문가’로서의 발마스님의 모습과 어울리지 않는다. 이론과 사례를 제대로 구별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젝은 인기를 얻었다? 논리와 수사를 구별하지 못하는 데리다는? 데리다도 그래서 인기를 얻은 것인가? 해서, 이론가는 향유자와 다른 존재이며 각방을 쓰는 존재인 것인지?).

-어떤 이론, 어떤 진리? 물론 라캉의 이론, 라캉의 진리다. 따라서 지젝을 읽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지젝 또는 라캉에 동일화되는 과정이며, 대중문화에서 이들의 이미지를 읽어내는 것이다(*지젝을 읽는 게 지젝에 동일화되는 과정이라면, 알튀세르를 읽는 건 알튀세르에 동일화되는 과정이며, 스피노자를 읽는 건 스피노자에 동일화되는 과정인가? 그렇다면, 지젝에 ‘동일화’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발마스님은 아직 지젝을 읽지 않은 것이 아닌가?).

-93년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나는 지젝이 자신의 문제, 곧 라캉과 알튀세르의 논쟁을 좀더 정교하게 전개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내가 지젝을 너무 진지하게 생각했던 것일까? 그는 <부정적인 것과 머물기>, <이데올로기의 유령> 등에서, 자신이 이미 했던 이야기들을 거의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왜 그는 로베르트 팔러의 비판에 답변을 하지 않을까?).

(*)<이데올로기의 유령>은 내가 알기론 책이 아니라 논문이다. 어쨌든 이 대목에서야 지젝에 대한 발마스님의 ‘(악)감정’이 어떤 이유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 수 있다. 지젝이 “라캉과 알튀세르의 논쟁을 좀더 정교하게 전개”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까 일단은 지젝이 빌미를 제공한 셈. 발마스님이 지젝의 저작들을 다 탐독하고서 이러한 결론(불만)에 이르렀다면, 둘 중의 하나이겠다. 지젝이 불충분하게 말했거나, 지젝 자신은 충분하게 말했다고 믿지만, 발마스님이 보기엔 전혀 충분하지 않거나. 나는 현재로선 어느 쪽이 실상에 가까운지 판단할 수 없다. 로베르트 팔러도 안 읽었기 때문에.

-지젝이 대중문화에서 벗어나 급진정치 쪽으로 갈 수 있을까? 그가 과연 급진정치를 통해, 스스로 말하듯 라캉의 말씀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을까? 또는 그는 이미 대중문화에 너무 깊이 중독된 게 아닐까? 그런데 이 질문들은 의미가 있는 질문들일까?

(*)일단 대중문화와 급진정치의 ‘엄격한’ 구별이 발마스님의 기본적인 입장인 듯하다. 그리고 급진정치란 ‘라캉의 말씀의 한계’를 벗어나는 지점에서 조우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그리고 ‘대중문화에 대한 중독’으로부터도. 거꾸로 말하면, 지젝이 라캉의 ‘말씀’과 ‘대중문화’에 갇혀 있는 한, 그에게선 급진정치를 기대할 수 없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라캉과 대중문화를 빼면, 지젝은 없다. 그러니 급진정치여, 지젝없이 진군하도록!..



발마스님의 서평에서 내가 알 수 있었던 건 지젝이나 그의 책이 아니라 발마스님 자신이다(그런 점에서 보자면, 이 서평은 ‘불친절한’ 서평이다). 발마스님의 서재에 곧잘 들르는 내가 언젠가 특이하게 생각하면서 더불어 약간의 소외감(?)을 느낀 것은 ‘만화’ 얘기들이 오고 갈 때였다(나는 영화는 좋아하지만, 만화는 거의 보지 않는다. 학습만화조차도 즐겨보지 않는다). 발마스님은 만화에 문외한이 아니었다. ‘제7의 예술’로서의 만화를 폄하할 생각은 갖고 있지 않지만, 만화와 급진정치의 관계를 상상하는 일은 히치콕 영화와 비판이론의 관계를 상상하는 일보다 나로선 훨씬 더 어렵다. 그리고 요즘은 간혹 영화제 광고들도 서재에서 볼 수 있었는데, 영화에도 ‘급진정치적 영화’와 (쓰레기 같은) ‘대중영화’들이 있는 것인지, 그런 구별을 발마스님이 갖고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한국의 두 젊은 ‘공산주의자’ 감독이 만든 독립영화 <자본당선언: 만국의 자본가여 단결하라!> 같은 게 ‘급진정치’의 사례일까?).

지젝에 대한 발마스님의 취향이나 감정에 대해서까지 내가 참견할 일은 아니다. 나는 다만, <이데올로기>에 대한 서평에서 내가 아는/상상하는 ‘발마스님의 모습’과는 너무 동떨어진 모습을 발견했기에 당혹스러웠을 뿐이다(서평은 너무 ‘정념적’이며 그다지 공정하지도 않다). 어쨌거나, 지젝에게서 라캉과 알튀세르의 논쟁에 대한 정교한 해명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은 발마스님으로서도 크게 유감스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지젝을 넘어선 지점에서 발마스님의 몫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기에(발마스님의 ‘라캉과 알튀세르’론 또한 아직 미완으로 남아있다). 그러니까 내가 기대하는 것은 앞으로 도래할, 발마스님의 ‘이데올로기론’과 ‘급진정치론’이다. 우린 어쩌면, 따로 번역/오역할 필요 없이 우리말로 (지젝을 넘어선) 이론을 읽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04. 10. 30./ 06. 11.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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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6-11-02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

로쟈 2006-11-02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공익에 헌신해야 할 시각 같은데요.^^

섬나무 2006-11-04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늘 그렇지만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로쟈님의 지젝 사랑도 흥미롭구요. 지젝뿐 아니라 인문학에 문외한이지만 사람의 사고하는 형태와 방향은 알게 마련이니까요.ㅎㅎ급진정치여 지젝 없이 진군하도록! 이문열 옹호론 만큼이나 머리 아픕니다. - 로쟈님 덕분에 지젝을 좋아하게 된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