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의 서재를 블로그로 쓰게 되면서, 거기에 서재의 꼴이 좀 알려지게 되면서 이런저런 불편한 의견들도 직간접적으로 전해듣게 된다. 이곳에서 주로 하는 일이 '책 선전'이거나 책읽기에 관한 '공치사'인지라 "돈을 얼마나 받길래 그렇게 열성이냐?"는 핀잔에서 "꽤나 잘난 체/아는 체한다"라는 비아냥까지가 그 의견들의 스펙트럼이다. 게다가 둘러보면 알라딘에서조차도 이런 일에 '극성'인 이들이 몇 명 되지 않는다(그런 와중에 최근에 몇 분이 또 활동을 그만 두셨고). 조만간 1000명에 이를 것 같은 즐찾에도 불구하고 자주 회의감을 갖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이번에 페이퍼의 달인 1위에 며칠 올라 있었는데 내가 갖게 되는 느낌은 부듯함이 아니라 배신감이다. 아무도 이런 일을 하지 않는구나!).

책읽는 걸 좋아하고 그게 또 밥벌이와도 무관하지 않아서 그와 관련한 수다들을 늘어놓는다. 거기에 이왕이면 보다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고 더 나아가 인문학에 관심을 갖도록 유도하는 것이 나대로의 '사명'이라고 여기는 편이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실효적인가는 늘 의문이며 결국엔 자기 알리바이에 불과한 게 아닐까라는 의혹으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다. 설상가상으로 이제 발을 빼기에는 너무 깊숙이 들어와 버린 게 아닌가도 싶고('보이지 않는 조직'의 압력도 느낀다!). 어떻게 할 것인가? 도서관련 정보를 주로 싣고 있기에 종종 드나드는 '북데일리'에서 한 기자의 고백을 읽으며 다시금 생각해본 것들이다.

북데일리(07. 01. 26) 책 기사=책 광고? 황당한 공식 이제 그만!

책뉴스 사이트 북데일리에서 진행하고 있는 ‘책 읽는 사람이 리더다’ 시리즈는 사회 각계각층의 유명인사들이 독자에게 감명 깊게 읽은 책을 추천하게 하는 독서권장 캠페인이다. 올바른 독서문화 정착과 책 읽는 사회 조성에 이바지하고자 포털사이트 다음과 문화일보가 뜻을 모았다.

얼마 전, 모 인사에게 캠페인 참여를 부탁했다가 다소 황당한 답변을 받았다. “책을 추천하는 일이 해당 도서를 광고하는 일로 비춰질까 염려스럽다”는 것이다. 책을 골라주는 일이 광고일 수 있다는 생각은 정말 이해하기 어려웠다. 설령 광고이면 어떤가. 좋은 책 많이 읽도록 하는 게 뭐가 나쁘단 말인가.

순수한 의도로 진행되는 책 운동에 ‘돈의 논리’를 대입하는 사고가 못내 안타깝고 씁쓸했다. 이런 시각은 비단 그 한사람 뿐이 아니다. “홍보용 기사다.” “책 선전이네.” 기사 덧글엔 종종 이처럼 삐딱한 의견이 올라온다. 대체 언제부터 책을 ‘소개’하는 기사가 ‘홍보’ 글로 둔갑됐는지. 이는 포털사의 뉴스 에디팅 시각 역시 마찬가지다. "기사는 좋은데... 책 홍보를 하는 거 같아서..."라며 책기사를 섣불리 전면에 내세우지 못한다.

그러나 영화나 TV드라마를 보자. 하루에도 얼마나 많은 기사들이 쏟아져 나오는가. 네티즌의 덧글 또한 얼마나 홍수를 이루는가. 하지만 기사를 두고 광고라고 의심하는 눈초리는 거의 없다. 왜 이같이 상반된 현상이 벌어지는 걸까.

여기엔 여러 요인이 있다. 먼저 영상매체에 익숙한 대중들은 봇물처럼 쏟아지는 관련기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반면 책을 읽지 않는 이들은 가뭄에 콩나듯 나오는 책 기사가 낯설다. 또한 책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 탓도 있다. 책은 양서여야하고, 계몽적이어야 한다는. 좋은 책이 아니면 절대 홍보하면 안된다는.

그러나 생각해보자. 요즘 악서가 얼마나 있는가. 과거와 달리, 엄청난 정보의 시대에 수도없이 쏟아져나오는 책을 두고 양서와 악서를 구분하는 일은 시대착오적 생각이다. 대개의 책들은 나름대로 정보나, 엔터테인먼트로서 가치가 있다. 책은 이미 무거움을 털어버렸다. 제발 읽지도 않는 사람이 책에 대해 엉뚱한 생각을 가지 말자.

이 모든 것은 책을 멀리하고 책에 무관심한 요즘 세태를 반영하고 있다. 드라마와 영화에 대해 논하는 장은 널려있다. 하지만 책에 관한 토론 장은 턱없이 부족하다. 극단적으로 말해 ‘책 기사 = 책 홍보’라는 공식은 책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일이 돈과 거래할 때만 가능한하다는 어이없는 발상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그저 책을 이야기 하는게 즐겁고, 책이 좋아서 글을 쓰는 사람은 여전히 적지않다.

살아가면서 내 인생을 밝혀준 책을 만나는 일은 얼마나 큰 행운인가. 그 책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함께 읽게 하는 일은 또 얼마나 뜻 깊은가. 책에 대한 이야기가 영화나 드라마에 대한 수다처럼, 지천에 널리고, 반갑고 익숙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상황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한 바램일까. 기사에 대한 덧글이 해당 책에 대한 감상과 평가로 ‘치환’되는 그 날까지, 필자는 ‘책 선전’을 멈추지 않을 셈이다.(고아라 기자) 

07. 01. 26.

P.S. 기자의 말을 다시 반복하자면 "살아가면서 내 인생을 밝혀준 책을 만나는 일은 얼마나 큰 행운인가. 그 책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함께 읽게 하는 일은 또 얼마나 뜻 깊은가. 책에 대한 이야기가 영화나 드라마에 대한 수다처럼, 지천에 널리고, 반갑고 익숙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상황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한 바램일까." 푸념과 결의는 그렇게 한 통속이 되어 나를 결박해놓는다. 잠시 딴생각을 했다. 마저 노를 저어야지. 헛!..  


댓글(23)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자꾸때리다 2007-01-26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신 라라라라 라라라면 신 라라라라 라라라면
신 라라라라 라라라면 신 라라라라

eat it for me ~

신 라라라라 라라라면 신 라라라라 라라라면
신 라라라라 라라라면 신 라라라라

I know 허기로 지친 아픈 니 배에
라면봉지 속 안에 니가 있단 걸 알기에
I know 거짓된 수많은 너구뤼~
너만 먹고 버텨오던 여린 나에게

너 매워서 그가 떠났던 날
널 위로했던 밥 내가 했던 말 기억해
저 하늘에 맹세해 널 먹어줄게 Shin Noodle~

오랜 시간을 냄비에서 숨죽이며 나는 끓어왔어
이젠 널 위해서 먹혀질 준비가 돼 있는 내게로오오~

이젠 그릇 놓고 넌 날 먹으면 돼
너의 냄비뚜껑이 뛸 수 있게
그저 넌 아무말 없이 기다렸단듯이
내 면을 잡고 먹어줘 그가 보란듯이 웃어줘
넌 날 먹으면 돼 라면을 먹고 편히 쉴 수 있게
가끔 또 먹고 싶을 땐 내게 말해, 신.라.면

신 라라라라 라라라면 신 라라라라 라라라면
신 라라라라 라라라면 신 라라라라

I know 우동에 길들여진 니 맛에
맑은 국물 속 안에 그(다시마)가 있단 걸 알기에
I know 지키지 못했던 promise
영원할거라 믿었던 국물 맛에게...

널 울리고 그가 떠났던 날
널 위로했던 밥 내가 했던 말 기억해
저 하늘에 맹세해
that I boil and I eat for you Shin Noodle~

오랜 시간을 냄비에서 숨죽이며 나는 끓어왔어
이젠 널 위해서 소화될 준비가 돼 있는 내게로~

이젠 그릇 놓고 넌 날 먹으면 돼
너의 냄비뚜껑이 뛸 수 있게
그저 넌 아무말 없이 기다렸단듯이
내 면을 잡고 먹어줘 그가 보란듯이 웃어줘
넌 날 먹으면 돼 라면을 먹고 편히 쉴 수 있게
가끔 또 먹고 싶을 땐 내게 말해, 신.라.면

니 국물이 마를 때까지 이 자릴 난 지킬게
밥을 말을 수 있게 신 라라라라-
니 국물이 마를 때까지 이 자릴 난 지킬게
밥을 말을 수 있게 .... 국물없인 못 먹니? 에휴 바보~~

Rap)

Uh! Uh! 냄비뚜껑이 뛸 수 있게!
내 면을 잡고 먹어줘, 웃어줘
라면을 먹고 편히 쉴 수 있게
내게 말해 신.라.면


기인 2007-01-26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의 노력과 그 실효성을 저는 느끼고, 도움 많이 받습니다. :)
로쟈님 마저 떠나신다면.. ㅜㅠ 로쟈님 만세! ㅎㅎ

마냐 2007-01-27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워낙 소심하다보니...*^^* '책 선전'을 한때 나름 열씨미 하다가...태업중인 관계로 제가 님같이 훌륭한 분을 배신때린 넘들의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슴다.ㅋㅋ 로쟈님이 최근 이런저런 미약한 회의를 갖는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드는데..(엄...그건 요즘 알라디너 돌림병이던가요) 팬들의 기대는 멈추지 않슴다. 님도 계속 노 저으셔야 하구요. 보이지 않는 마수에 걸린게 아닐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 않으셔도 될듯 함다. 님은 이미 '사명'을 완수하셔야 할 처지라니까요.이럇.

짱꿀라 2007-01-27 0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힘내세요. 흑색선전에 현혹되지 마시고 하시던 대로 하시면 됩니다. 님때문에 많은 도움을 받고 있고, 또한 표현을 하지는 못하지만, 너무나 감사한 일들이 많이 있답니다. 알라딘이나 인터넷 서점에서 활동을 그만 두게 하려는 그런 사악한 놈들이 많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개의치 마시고 계속 해주셨으면 합니다. 화이팅!!!

읽는기계 2007-01-27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알라디너의 욕망을 양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홧팅!!!

로쟈 2007-01-27 0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갑자기 '아빠, 힘내세요!' 분위기네요.^^; 그렇게들 보채지 않으셔도 노는 '열씨미' 젓고 있습니다. 어여, 노를 저어야지, 로쟈!..

마노아 2007-01-27 0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의 부담이 우리의 행복이 될 수 있다는 것에 미안함을 느끼지만 포기할 수 없죠. ^^ 다 함께 화이팅입니다. ^^

마늘빵 2007-01-27 0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책선전(?)으로 많은 펌뿌질을 하고 있는건 사실이나 매우 도움이 많이 됩니다. 뭐라 하는 사람들은 단순히 못마땅한 것이지만, 저 같은 사람들을 위해 그만두면 안돼요. 걔네는 도움이 안될지 몰라도 저는 도움이 많이 되거든요. 홧팅. 저는 비록 1000명중 한명이지만. ^^

나비80 2007-01-27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라리 담배를 끊죠. 로쟈는 못 끊습니다.

책속에 책 2007-01-27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전에 지인이 "도대체 무슨 책을 골라 읽어야할지 모르겠다고" 말씀하시더라구요. 그러니까 주변 분들도 동조하는 분위기. 우리 나라의 책 안 읽는 사람들의 대다수가 바로 그런 문제 때문에 쉽게 책에 다가서지 못하는 게 아닐까란 생각을 잠깐 했습니다..그런 점에선 지금의 책 기사도 심히 부족해요...
저야 로쟈님께 늘 많은 도움 받고 있는데 말이요^^

네모선장 2007-01-27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로쟈님을 자주 찾는 손님입니다
그냥 제 사견은 특별히 대중매체에 응하여 인터뷰하지 않으시고 계속 이곳에서 이렇게 글을 꾸준히 쓰시면 여러해가 지나면 그 진정성을 대다수 인정하게되고 더 많은 책벌레,책소개자들이 생겨날 것 같아요 ^^ 아자 화이팅입니다. 전 고딩들을 가르치는 수학 교사입니다^^

수유 2007-01-27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기회에 얼음집으로 이사오3. =3 =3 =3

허리우스 2007-01-27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댓글을 달아야할 것같은 생각이 들어서요. 로쟈님으로부터 엄청난 정보를 얻고 있는 사람으로서 감사하다는 말씀도 드려야 할 것같아서. 힘내십시요. 홧팅. 저도 로쟈님의 길을 따르겠나이다. ㅡㅡ;;;;;;;;;;

로쟈 2007-01-27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격려들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냥 동병상련의 기사가 떴길래 잠시 푸념을 털어놓았을 뿐인데, '심려'를 끼쳐드린 건가요? 즐찾 1000명은 너무 약소하고 하루 방문객 1000명 정도 되면 은퇴를 고려해보겠습니다.^^

stella.K 2007-01-27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에 대한 이야기가 영화나 드라마에 대한 수다처럼, 지천에 널리고, 반갑고 익숙하게'라...그럼 좋겠군요. 저는 리뷰 쓸 때 하도 똥폼 잡고 써서 그런가 별로 사람들이 안 와 봅디다. 그래서 요즘처럼 리뷰 쓰기 힘든 때도 없구요, 용기도 의욕도 나질 않지요. 책에 대해 아무리 얘기해도 혼자 떠드는 것 같아서 말이죠. 책에 대한 수다, 저에겐 좀 요원해 보이네요. 저도 조만간 여길 뜰까 생각중이었는데, 저 사진 보고...좀 더 생각해 보죠.^^

로쟈 2007-01-27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죠. 아무래도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주면 힘을 좀 얻게 되죠. 뻘짓한다는 기분도 덜 들고(그게 독약일지도 모르겠지만). 스텔라님도 기운 내시고, 몇 달만 더 노를 저어봅시다요.^^

닉네임을뭐라하지 2007-01-27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가 멀다하고 이곳에 들러, 즐겨보는 사람으로서,
로쟈님의 '책선전'이 멈추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

로쟈 2007-01-27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하루가 멀다 하고 들어옵니다. 게다가 오늘도 '책선전'을 멈추지 않고 있구요.^^

프레이야 2007-01-27 1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의 멋진 닉네임이 문득 '노저어'로 들립니다.^^
저도 그 1000명중 한 명이랍니다...

로쟈 2007-01-27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죠, 로져?..

paviana 2007-01-27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넵 노저님 ㅋㅋ 계속 저으셔야 됩니다.몇달이 아니라 주욱..^^

로쟈 2007-01-28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aviana님이 에이전시라도 해주시나요?^^

Koni 2007-01-29 1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책을 좋아한다면 내가 좋았던 책을 남에게 서슴지 않고 '선전'할 텐데. 실은 그 인사는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는 뻘생각도 듭니다.^^;
 

쿤데라의 <소설의 기술>(책세상)을 잠시 읽다가 몇 군데 검색을 해봤다(내가 왜 러시아어본을 구하지 않았을까란 궁금증 때문이었는데, 이 책의 러시아어판은 3년전이나 지금이나 아직 나오지 않은 듯하다). 그러다 눈에 띈 기사가 있어서 옮겨놓는다. 임상수 감독의 <오래된 정원>과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원작으로 한 필립 카우프만의 <프라하의 봄>을 비교해본 것인데(기사란이 '동상이몽'이다), 자세한 비교는 아니지만 동의할 만하다. 해서 드는 생각은 <오래된 정원>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시간을 내어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것.

강원일보(07. 01. 19) 오래된 정원 vs 프라하의 봄

혼자만 행복하면 미안했던 시대. 동지들이 하나둘 경찰에 붙들려 가는 것을 괴로워하던 현우(지진희)는 윤희(염정아)의 곁을 떠나 다시 서울로 돌아가고, 프란츠(다이엘 데이 루이스)는 자유연애를 통해 역사의 무게를 견뎌낸다. `오래된 정원'과 `프라하의 봄'. 이 두편의 영화는 연인들의 엇갈린 사랑을 통해 슬픈 현대사를 보여준다.



1980년 5월, 현우는 광주에 있었다. 그곳에서 그가 무슨일을 했는지를 윤희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사회주의자'라고 자신을 소개한 현우를 윤희는 말 없이 숨겨준다. 윤희는 첫눈에 봐도 당차고 씩씩한 여자. 현우는 그녀와 함께 보낸 6개월의 시간이 마치 다른 세상에 온 것처럼 편안하고 행복하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곳에 숨어있을 수 만은 없다. 서울에서 들려오는 동지들의 소식에 괴로워하던 현우는 다시 돌아갈 결심을 하고, 지금 보내면 아주 오랫동안 못 볼 것을 알면서도 윤희는 현우를 보내준다. 그로부터 17년 후, 감옥에서 나온 현우는 윤희가 암에 걸려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리고 윤희와 함께 지냈던 17년 전의 그 오래된 정원을 찾아간다.

임상수 감독의 현대사 3부작 중 마지막 작품이기도 한 `오래된 정원'은 감독의 전작과 달리 진중한 어조로, 그러나 역시 감독 특유의 `쿨'한 태도로 80년대를 바라본다. `오래된 정원'은 현우의 기억을 거슬러 오르는 방식을 택하지만 화자가 현우는 아니다. 민주화에 투신한 그 `청년' 대신 그(그들)를 바라보며 고통의 시간을 통과해간 여성의 시선을 통해 80년대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이 감옥에 들어가고 난 이후 감옥 바깥의 세상은, 그리고 그들의 아내와 후배들은 어떻게 90년대를 맞이했는가. 이성복의 싯귀처럼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은'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오래된 정원'은 개인의 신념에 관해 이야기한다. 거대한 사회적 변화 속에서 신념을 지켜낸 사람들의 사랑과 고통을 위로하며, 새로운 세대가 만들어갈 오늘을 긍정한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원작으로 한 `프라하의 봄'은 1968년을 시대적 배경으로 한다. 오랜 공산주의 사회였던 체코에 불어닥친 자유의 물결 속에서, 토마스와 테레사(줄리엣 비노쉬) 그리고 사비나(레나 올린)가 엮어내는 사랑과 배신, 집착의 서사를 매혹적인 영상으로 그려낸다. 필립 카우프만 감독은 격변의 시기에 인간을 둘러싼 외부의 부조리를 묘사함으로써, 그 안에서 방황하는 토마스의 고뇌를 부각시킨다. 그가 왜 한 여성과의 사랑에 만족하지 못하는지, 의사직을 박탈당하면서까지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는지를 말이다.(허남훈 기자) 

07. 01. 26.

P.S. 나대로의 '오래된 정원 vs 프라하의 봄'은 숙제로 남겨놓는다. 먼저, 영화 <오래된 정원>을 봐야 하고 <프라하의 봄>을 다시 봐야 하며, 소설 <오래된 정원>을 읽어야 하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다시 읽어야 한다. 누가 대신 다 보고 읽고 써주면 더욱 좋겠는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최근에 나온 책들 가운데 가장 '도발적인' 것은 뜻밖에도 가장 오래된 고전 <장자>의 재번역본이다. 한겨레의 기사 타이틀은 아예 "왜곡·오역의 ‘장자’는 불태워라"인데, 그간에 나온 <장자>의 번역들이 왜곡과 오역으로 도배돼 있으니 다 불태워 마땅하다는 것. 역자인 기세춘 선생의 일갈을 옮기면 “지금까지 우리가 읽어온 장자는 장자가 아니다.” 나도 몇 권의 번역서를 갖고 있는지라(비록 지금은 다 박스에 들어가 있지만), 그리고 가장 좋아하는 동양 고전인지라 관심을 안 가질 수 없는데(내가 처음 접한 건 허세욱 선생이 옮긴 범우문고판 <장자>였다), '네가 읽은 건 장자가 아니다!'란 소리니까 더 없이 도발적인/충격적인 발언임에 틀림없다. 소위 '전문가들'의 신뢰할 만한 리뷰들을 읽어봐야 상황판단이 가능할 듯싶지만, 일단은 역자와의 인터뷰 기사를 옮겨놓는다(책은 보관함에 넣어두었다). 아마도 내일자 신문에 게재되는 모양이다.

경향신문(07. 01. 27) ‘장자’ 재번역한 기세춘씨

“노·장자의 기본 ‘캐릭터’가 완전 변질됐습니다. 저항성이 사라지고 지배 담론으로 윤색됐어요. 그 본 모습을 제대로 보기 위해선 고증학적 작업을 거친 재번역이 필요합니다.”

기존 학계에 기세춘씨(72)는 ‘불편한 존재’다. “시중의 동양고전 번역서를 모두 수거해 불살라 버려야 한다”는 ‘과격한 발언’을 서슴지 않기 때문이다. 동양고전 번역서가 왜곡과 변질, 오역으로 넘쳐나고 있다는 게 기씨의 주장. 그가 “칠십 노인의 망령기와 당돌함으로 만용을 부려” 나선 재번역의 첫 결실로 ‘장자’(바이북스)를 내놓은 건 이때문이다.



“학계에선 아무도 경종을 울리지 않습니다. 저야 강단학계의 학맥이나 스승이 없어 자유로우니까 욕 좀 하겠다는 겁니다.” 기씨에 따르면 노장사상은 도교가 일어나 황제와 노자를 교조로 삼으면서 신비학으로 왜곡됐고, 정치권력에 의해 체제에 순응하는 은둔과 청담의 사상으로 변질됐다. 왜곡의 뿌리는 2~3세기 중국 위진(魏晉)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조조에 의해 등용된 왕필이 당시 반란의 중심이었던 도교 세력의 민중성을 거세하기 위해 ‘노자 도덕경’과 ‘장자’에 나타난 반체제성과 저항성을 제거해 체제순응적이고 권력친화적인 내용으로 왜곡했다는 것이다. 기씨는 “국내에 출간된 노장 주해 및 해설서들은 왕필의 주해를 근간으로 삼은 탓에 이러한 왜곡을 답습한 것들”이라고 비판했다.

번역자의 오역도 ‘장자’의 본 모습을 훼손했다. 시대와 문화, 언어 등의 차이로 인한 변질과 오해 가능성조차 제대로 검증하지 않은 채 번역했다는 것이다. 기씨는 “은미하고 철학적인 담론이 치졸한 처세훈이 되고, 서사적인 우화는 그 핵심을 놓치고 초점을 그르쳐 다른 길로 빠져버린 엉뚱한 이야기가 되어버렸다”고 꼬집었다.

그가 ‘장자’의 오역으로 꼽는 예를 살펴보자. 내편(內篇) ‘대종사(大宗師)’에 ‘죽일 자를 풀어주는 것이오(綽乎其殺之)’로 해석해야 할 것을 ‘여유있게 죄인을 죽이는 것이다’로, ‘잘못을 행해도 형벌로 다그치지 말라(爲惡無近刑)’로 해석되는 부분을 ‘어쩌다 악한 일을 하더라도 형벌에 저촉되지 않게 하라’로 옮긴 게 대표적. “권력 저항적이고 무정부주의인 노장 사상에서 어떻게 이런 해석이 나올 수 있느냐”는 게 그의 분노 섞인 한탄이다.

기존의 모든 가치체계를 전면 부정하는 혁명적 담론인 ‘동심론(童心論)’도 왜곡됐다고 지적했다. 특히 도올 김용옥 교수가 동심론을 기공술(氣功術)로 해석해 어린아이처럼 부드러운 피부를 가꾸어 젊음을 되찾자고 한 것은 “한심하다”고까지 말했다.

기씨는 “중국 고전의 경우 수천년 묵은 고문자이므로 우리나라에서 오늘날 사용되는 뜻으로는 해석이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또 “고전은 내용이 포괄적이므로 신학, 철학, 정치, 경제, 사회 등 광범위한 소양이 요구된다”며 “자기 깊이가 그걸 담을 수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제 밥술이라도 먹게 됐으니까 적어도 동·서양 고전은 우리가 제대로 번역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학문은 비판정신이 생명입니다. 그냥 그대로 답습하려면 왜 합니까.”(김진우 기자)

07. 01. 26.

 

 

 

 

P.S. 참고로, 교수신문에 연재됐던 고전번역비평 <최고의 고전번역을 찾아서>(생각의나무, 2006)에서는 안동림과 오강남 역주의 <장자>가 전문가들로부터 가장 많은 지지표플 얻었지만 반론도 만만찮은 것으로 소개돼 있다. 지난 1963년 최초의 완역본이 출간된 이래 60여 종 이상의 번역본이 출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영문학자와 종교학자의 번역이 가장 '읽힐 만한' 번역으로 추천되었다는 것도 특이한 일이다. 거기에 '재야' 고전학자의 새 번역본이 보태진 셈이다. '정역본'으로 공인받을 수 있을지 궁금하다. 장자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관하여 전문가의 조언을 같이 옮겨둔다.

교수신문(05. 07. 04) 장자, 어떻게 읽을 것인가

‘장자’는 천의 얼굴을 가진 고전이다. 시대를 넘나드는 해석의 다양성은 모든 고전에서 발견되는 보편적인 특징이기는 하지만, ‘장자’의 경우 이 점은 특히 두드러진다. 따라서 ‘장자’를 펼칠 때는 먼저 어떤 시각에서 읽을 것인가를 분명히 해야 한다. 그것은 각박한 현실로부터 삶의 거리를 두게 만드는 번득이는 지혜로 가득 찬 우화집으로 읽힐 수도 있고, 특유의 도가적 상상력으로 포장된 신화적인 사유의 보고로 다가올 수도 있으며, 또 그런 주제들을 탁월한 레토릭으로 버무려낸 한 편의 뛰어난 문학작품으로 자리매김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형형색색의 얼굴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들어 있는 문제의식들의 면면을 감안한다면 ‘장자’의 본령은 역시 철학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장자’의 뼈대를 이루는 사유들이 조형된 시기가 중국철학의 황금기인 ‘戰國’ 시대라는 점도 이런 판단에 설득력을 더한다. 그러므로 ‘장자’에 대한 제대로 된 독법은 그것을 한 권의 철학서로 읽는 것이다.

‘장자’를 철학서로 읽고자 할 때 그 종잡을 수 없는 사유의 늪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지 않으려면 적어도 다음의 세 가지 측면에 대한 선이해가 준비돼 있어야 한다. 첫째, ‘장자’에서 구사되는 언어적 표현들의 특징을 이해해야 한다. 통상 ‘장자’에서 주로 사용되는 언어구사 방식은 크게 ‘우언(寓言)’과 ‘중언(重言)’과 ‘치언(癡言)’, 세 가지로 나뉜다고들 말한다. ‘우언’은 말 그대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다른 말 속에 은폐시켜 전달하는 방식이고, ‘중언’은 사회적으로 그 권위가 이미 확립된 사람의 입을 빌리는 이중의 방식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형태이며, ‘치언’은 마치 내용물이 일정 기준 이상 차오르면 저절로 기울어져 쏟아지도록 고안된 술잔처럼 사용하는 언어의 의미가 고착되는 것을 시종일관 거부하는 표현법이다. 이와 같은 언어구사 방식은 언어의 본성에 대한 특유의 통찰로부터 비롯된 것인데, 이런 까닭에 ‘장자’를 읽을 때는 언제나 이른바 ‘행간’을 읽어내도록 노력해야 한다.

둘째, ‘장자’는 연대기를 달리하는 복수(複數)의 저자들이 만들어낸 집단 저작물이라는 점을 숙지해야 한다. 현재까지 가장 일반화된 견해에 따르면, ‘장자’에는 적어도 너댓 가지의 사상적 성향들이 혼재되어 있다. 장자 본인의 사상에서부터 그를 비교적 충실히 계승한 것으로 평가받는 장자후학들의 사상, 한비자류의 법가적인 경향성이 강한 사유와 그 반대편에 서 있는 아나키즘적 색채가 농후한 사유 그리고 이런 정치적인 관심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려는 탈속적인 개인주의적인 성향 등이 그것이다. 따라서 ‘장자’를 읽을 때는 이런 혼재된 생각의 갈래를 개략적으로라도 묶어낼 수 있어야 한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장자’는 고작해야 잡다한 이야기들을 두서없이 끌어 모아 놓은 단편들의 모음집에 지나지 않게 된다.

셋째, ‘장자’에 스며들어 있는 다양한 철학적 주제들의 성격을 간파해낼 수 있어야 한다. 이와 관련해 우리는 ‘장자’에 담겨 있는 사유의 폭과 깊이는 ‘전국’이라는 시대가 제기한 다양한 철학적 문제들을 나름의 관점에서 치열하게 고뇌하고 소화해낸 결과라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백가쟁명(百家爭鳴)’이라는 말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중국의 전국시대는 그리스의 아테네와 함께 이후의 동서양 철학사에 등장하는 모든 철학적 주제들의 원형이 제시된 시기이다. ‘장자’는 바로 이와 같은 지적 분위기의 중심을 관통하며 형성된 고전이다. 장자 본인의 사상 담겨 있다고 평가받는 내편에서 다뤄지고 있는 문제만 보더라도, ‘자연’과 ‘인간’을 비롯해 ‘주체’, ‘타자’, ‘언어’, ‘소통’, ‘실재’, ‘몸’ 등 그야말로 현대 철학에서 거론되는 거의 모든 주제를 아우를 정도로 다양하다. ‘장자’는 이런 주제들이 특유의 탈중심주의적 가치관과 심미적 세계관 속으로 수렴된 결과다. 이점이 또한 현대의 포스트모던적인 지적 상황에서 ‘장자’가 새롭게 주목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따라서 ‘장자’를 읽을 때는 이런 철학적 주제들에 대한 기초적인 소양을 먼저 갖추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장자’를 읽는다는 것은 이와 같은 요소들이 중층적으로 얽히며 구축해내는 철학적 사유의 정수와 대면하는 작업이다. 몇 번의 두레박질로 모두 길어 올리기에는 그 사유의 깊이가 너무 깊은 책, 그것이 ‘장자’이기 때문이다.(박원재/ 한국국학진흥원 중국철학)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앨런 2007-01-26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덕에 또 좋은 정보 얻어갑니다. 늘 신세만 지네요. 그래도 로쟈님이 계속해서 좋은 정보 퍼뜨릴 거라 믿으며 자주 들르겠습니다.^^

로쟈 2007-01-26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넷에 다 떠 있는 정보들입니다.^^;

승주나무 2007-01-26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 보니 저도 장자가 4종이나 있었군요. 안동림본, 오강남본, 김학주본, 서광사본.. 장자는 편린만 취해서 그 전체의 그림이 그려지지 않아 코멘트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요즘 안동림본을 읽고 있는데(비싸고 두꺼운 것을 신뢰하는 편벽 때매) 옛날처럼 원문과 대조해가며 볼 수준이나 여건은 아니구요~~
장자의 정역본이 무엇인지 스스로 판단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만, 모두 잡고 읽어보려구요. 근데 김학주본은 이제 애정이 식게 되더군요^^ 좋은 펌정보 감사합니다.

로쟈 2007-01-26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몇 종을 갖고 있는데, 이게 문헌고증도 필요하지만 문학성도 옮겨줘야 하기 때문에 '난감한' 번역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는 거 같습니다. 거기에 '내편'과 '외편', '잡편' 간의 차이(저자의 복수성)도 고려해야 하겠고. 연구서들이 많이 나와 있지만 가장 읽을 만한 번역(가장 정확하고 아름다운 번역?)이 먼저 확정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biosculp 2007-01-26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물가물한데 동심론은 이탁오 애기하는것 같은데 김용옥교수가 그런식으로 해석을 한 기억은 없는데 다시 책을 뒤져봐야 겠군요.
그리고 김용옥 교수 책을 기준은로 노자철학이것이다에서 왕필의 필터로 본 노자이기에 그 왕필이 살던 시대 위나라지만 한나라가 붕괴된후라 한제국의 논리를 먼저 해부하고 노자로 가자 뭐 이런식의 논리였던것 같은데. 좀 심하게 애기하면 김용옥도 다 한애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요. 쩝

로쟈 2007-01-26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존 학계와 '불편한 관계'이면서 도올과도 생각이 다르다고 하니까 저도 뭐라고 덧붙이진 못하겠습니다. 전공자들끼리도 의견조율이 안되는 게 고전번역인지라...

기인 2007-01-26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자는 아예 다른 텍스트도 있지 않습니까? 왕필 이전 텍스트도 있고, 그 해석에 대해서 김시천 선생님께서 숭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으셨는데요. 벌써 그 텍스트 이름도 가물거립니다;; 저도 장자 가장 좋아하는 고전 텍스트였었거든요. 매우 법가적으로 해석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로쟈 2007-01-26 1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가요? <철학에서 이야기로>를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마늘빵 2007-01-26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박원재씨 저 분한테 학부시절 장자를 배웠더랬는데;;;

기인 2007-01-27 0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출국하기 직전 떠오른 것.. 김시천 선생님은 장자가 아니라 노자 도덕경 새로운 텍스트였어요. ㅋㅋ 죄송합니다; 음. 집에와서 책장에 보니 '노자'아저씨의 책을 보고 두둥;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위지본 도덕경이었던가. 새로운 텍스트는요. 아니 근데 왕필 아저씨는 장자도 재해석 한 건가요? 스물몇살때 도덕경 주 달고 요절하신 천재로 기억하는데.. 돌이켜보면 6년 전쯤 기억이라 막막합니다.. 도는 말할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것은 기억할 수 업다... ^^;
 

이번주 한겨레의 '18.0'을 훑어보다가 주목하게 된 키워드는 '개중'과 '대중 지성'이다(이 두 단어가 한때 유행했던 '다중'을 밀어젖히는 것인가?). 각각 두 가지 기사에서 키워드로 쓰이고 있는데,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은 최근의 출판 트렌드를 읽기 위한 키워드로 '개중'을 들고 나오고, 고명섭 기자는 '수유=너머'의 '대중 지성 프로젝트'를 소개하면서 '엘리트 지성'의 상대어로 '대중지성'을 자리매김하고 있다. 과문한 탓인지 '개중'이란 말은 생경한데, 한기호 소장의 칼럼에서 처음 보았다(번역어인가?). 여하튼 어감상(아마 이 어감도 고려됐을 터인데) 약간 불편한 느낌을 주는 '개중'과 다른 한편으로 모순형용처럼 느껴지는 '대중지성'이 최근의 출판계와 인문학 동네를 특징지어줄 수 있는 키워드들이라는 건, 키워드들일 수 있다는 건 알아볼 수 있겠다. 관련기사들을 옮겨놓는다.  

한겨레(07. 01. 26) [한기호의출판전망대] 실리 추구 나서는 ‘개중’들

지난해 3월 나는 이 칼럼에서 문화시장의 변화로 ‘87’이 지고 ‘97’이 뜬다고 한 적이 있다. 87은 민주화의 원초적 체험인 6월 항쟁을 말하고 97은 세계화의 원초적 체험인 외환 위기를 말한다. 그렇다면 올해 2007년 출판시장은 우리에게 어떤 체험을 안겨다줄까? 나는 감히 ‘개중화’의 원초적 체험이라고 말하고 싶다.

‘개중’이란 개인과 대중을 합한 말이다. 대중은 세중(細衆)의 단계를 거쳐 이제 개중이 되었다. 작년에 <타임>에서 ‘개중’을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을 정도다. 개중, 그들은 혼자이고 원룸에 살면서 휴대전화나 메신저로 타인과 대화를 나누며 블로그를 통해 자신을 발신하는 등 철저하게 ‘1인용’으로 생활하지만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다. 지혜가 필요할 때는 대중에게 손을 내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군중(crowd)과 아웃소싱을 합한 ‘크라우드소싱’이라는 신조어는 그래서 등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미 기업이나 개인이 어려운 과제에 직면할 경우 그 해답을 인터넷을 통해 대중에게 묻는 일이 잦다. 물론 이것을 가능하게 만든 것은 디지털 기술과 웹 2.0이라는 기구이다. 출판에서의 시민저널리즘은 크라우드소싱의 개념을 바탕으로 등장한 것이다.

지난해에 ‘나만의 행복’을 갈구했던 개중은 올해 ‘현명한 삶’을 추구할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현명이란 철학자들이 갖는 지혜를 뜻하는 게 아니다. 영악스럽다고 할 정도로 일과 개인생활에서 실리를 추구하는 삶을 말한다. 2006년, 한때 책과 ‘거리’를 두던 20대 여성이 책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들의 손에 쥐어진 책은 문학작품이나 인문사회과학서적이 아니라 자기계발서였다. 이 분야에서 가장 많이 팔린 <마시멜로 이야기>나 <배려> 같은 책은 어린이용으로도 따로 출간되고 있으니, 20대가 대학의 교문을 나서기도 전에 ‘처세’의 기술부터 배우는 것을 탓할 수도 없다.

그들은 올해 나만의 ‘스타일’에서 한 단계 진전한 ‘뷰티블 에이징’(beautiful aging)을 더욱 열렬하게 추구할 것으로 예상되며, 실행의 방향을 세밀하게 제시하는 미용, 패션, 여행, 건강, 문화 등의 책을 많이 찾을 것으로 보인다. 젊은 여성들이 즐겨 읽는 문학을 우리는 ‘칙릿’이라 부른다. <브리짓 존스의 일기>(헬렌 필딩 지음, 문학사상사 펴냄),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로렌 와이스버거 지음, 문학동네 펴냄), <달콤한 나의 도시>(정이현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등은 이 땅에서도 통한 대표적인 칙릿이다. 그런데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한결같이 편집자다. 특히 <악마를 프라다를 입는다>에 등장하는 패션지의 편집장은 자본주의의 신기루로 묘사되기도 한다. 하긴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잘 나가는’ 편집자가 등장하는 예가 부쩍 늘어나고 있다.

이것은 우연일까? 결코 아닐 것이다. 이야기의 중심에 서는 인물이 ‘잘 나가는’ 학자나 저널리스트에서 편집자로 바뀌는 이유는 분명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이유를 인간이 지녀야 할 최고의 미덕으로 편집자적 안목을 꼽기 시작했다는 것에서 찾고 싶다. 과거에는 정보의 원천 생산자나 전달자가 세상을 주도했지만 정보의 소유권마저 개중에게 넘어간 지금은 그 위력이 크게 떨어졌다. 편집자는, 거미집처럼 얽혀있으면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정보를 자기만의 이야기로 꿰어서 다시 대중용으로 포장해내는 기술에서만큼은 거의 최고의 수준이다. 그래서 편집 능력을 갖춘 자여야만 새로운 시대를 주도할 수 있게 됐다. 그 능력이 바로 개중의 속성이라는 것도 여러분은 이미 눈치 챘을 것이다.(한기호/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

한겨레(07. 01. 26) 죽은 지식인의 사회 ‘대중 지성’ 깨어나다

“요즘 아카데미에서는 엉뚱한 열정이 불타오르고 있다. 앎에 대한 의지 속에서 삶의 형태가 바뀌는 게 아니라 돈에 대한 의지 속에서 앎의 형태가 바뀌고 있다.”

연구공간 ‘수유+너머’(대표 고병권)의 공부 모임 ‘2007 대중지성 프로젝트’는 이런 선언으로 시작하고 있다. 열정의 불길에 휩싸인 대학은 이들의 선언을 빌리면, 지식의 죽음, 지식인의 죽음을 재촉하고 있다(*사실 지식/지식인의 종언은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의 한 지류이기도 하다. 새삼 문제되는 건 아니다). 리하르트 바그너의 악극 <신들의 황혼>에서 주인공 지크프리트가 화염에 휩싸여 세계와 함께 무너지듯이, 돈에 대한 열정의 불길 속에서 지식인은 대학과 함께 소멸하고 있다는 것이다. 계몽의 주체, 진보의 전위였던 지식인이 붕괴한 자리는 그러나, 단순한 폐허가 아니다. 그 황량한 땅에서 새로운 주체, 새로운 지성이 태어나고 있다는 것이 이들의 믿음이다. 다름 아닌 ‘대중 지성’이다.

대중 지성이란 지식을 독점하던 특권적인 소수의 지성에 대한 대항 개념이다. 선생이 학생에게 일방적으로 지식을 주입하는 전통적 아카데미즘 바깥에서 대중이 스스로 지식을 생산하고 유통하고 공유하는 것을 가리킨다. 대중이 지식인화하고 지식인이 대중으로서 나서는 것, 그리하여 대중의 집합적 지혜 속에서 창조적 지성이 솟구치는 것, 대중 지성은 그 새로운 현상을 지시하는 말이다.

대중 지성이 가장 날렵하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는 곳은 인터넷 공간이다. 인터넷은 익명의 개인들이 특정한 주제 아래 모여 지식을 만들어내고 퍼뜨리고 재생산하는 대중 지성의 현장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사태를 보자. 자유무역협정을 기획하고 추진하고 협상하는 주체인 정부 관료들은 지난 몇 년 동안 협상의 주요 내용 공개를 거부했다. 기밀이 알려지면 국익이 침해당한다는 것이 이들이 내세운 방어 논리였다. 한 나라의 명운이 걸린 중대한 국가적 의제가 소수 관료들의 밀실에 맡겨진 채, 국가의 주인인 국민이 국외자로 밀려난 꼴이었다.

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 인터넷이었다. 서로 한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이 ‘카페’를 만들고 문제를 제기했다. 협상의 진행 상황을 알려주는 정보를 찾아내고 그것을 분석하고 거기에 새로운 전문 지식이 더해져 믿을 만한 자료가 탄생했다. 그리고 그 자료들이 팸플릿으로, 자료집으로, 선언문으로 가공돼 시민들에게 전달됐다. 비밀에 싸여 있던 자유무역협상이 서서히 실체를 드러냈다. 이제 정부 관료들은 미국과 협상하기 전에 시민과 협상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고병권 대표는 “이런 사태 전개야말로 대중 지성의 힘을 여실히 보여준다”고 말했다. “대중 지성은 대중의 집합적 지성이지만 지식인으로 대표되는 전통적 지성보다 더 전문적이고 더 풍부하며 더 심층적인 지식을 산출한다”고 그는 말한다.

대중 지성은 분명히 새로운 현상을 지칭하는 말이지만, 아무런 지적 계보 없이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말은 아니다. 대중 지성의 연원은 카를 마르크스에게로까지 올라간다.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서 대공장의 기계화 현상을 ‘일반 지성’이라는 말로 설명했다. 기계가 발전할수록 생산은 점점 더 사회적 협업 형식이 되고, 점점 더 생산자의 집합적 지성에 의존하게 된다는 것이 마르크스가 일반 지성이라는 말로 이야기하려는 것의 요지였다. 1970년대 말 이탈리아의 철학자 안토니오 네그리는 마르크스의 일반 지성에서 힌트를 얻어 ‘대중 지성’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제시했다.

네그리는 그의 지적 협업자인 마이클 하트와 2004년에 함께 쓴 <다중>이라는 저서에서 이 대중 지성을 ‘스웜 인텔리전스(swarm intelligence)라는 말로 더욱 구체화했다. 메뚜기떼나 개미떼에게서 볼 수 있듯이 개별적으로는 무력하기 이를 데 없는 존재들이 무리를 지어 활동하면 무시무시한 힘을 드러내듯이, 인간도 정보혁명이라는 새로운 국면에서 집합적 지혜를 통해 놀라운 창조성을 보여준다고 진단한 것이다. 대중 지성이란 이렇게, 흩어져서는 특별한 지적 성과를 낼 수 없지만 모이면 거대한 창조적 활력을 일으켜 세우는 현상에 어울리는 이름이다. 다만 이때의 ‘모임’은 한 공간에 꽉 들어찬 집회의 형식이라기보다는 개별적 존재들이 거미줄처럼 연결된 네트워크 형태라고 보아야 한다. 인간의 지성 자체가 두뇌 속 수많은 신경들의 연결(링크)을 통해 작동한다. 신경 하나하나는 아무런 지성도 없지만 그것이 일시에 연결될 때 지성의 공간이 형성되는 것이다. 두뇌야말로 집합적 지성 혹은 대중 지성의 표본이다.

조정환 갈무리 출판사 주간은 네트워크로 작동하는 대중 지성의 한 모습으로 ‘플래시 몹’을 거론한다.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인터넷상에서 의기투합해 특정한 시간, 특정한 장소에 모여 반전·평화 구호를 외치며 퍼포먼스를 벌이는 것, 이것이 대중 지성의 발현이다. 인터넷에 기반한 운동의 대부분은 이 대중 지성의 작품이다.” 특정한 지도부가 없다는 것, 다시 말해 운동의 꼭대기, 전위를 따로 두지 않는다는 것도 대중 지성의 한 양상인데, 플래시 몹에서 그런 지성의 작동 방식을 엿볼 수 있다.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대중 지성 프로젝트’는 대중 지성의 가능성을 의식적으로 실험하고 실천하는 공부 모임이다. 1년을 4학기로 나눠 44주 동안 계속되는 이 프로젝트는 현재 30명 정도가 공부에 참여하고 있다. 철학, 동양고전강독, 문화·예술 세 강좌로 이루어진 이 커리큘럼은 이름만 보면 여는 대학 강의와 달라 보이지 않지만, 참여하는 사람이나 공부하는 방식에서 기존의 대학 강의와 뚜렷이 구분된다. 여기서는 공부에 뜻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대학생도 있고 회사원도 있고 제대병도 있다. 강의의 방식도 대학 아카데미즘과 차이가 있다. 선생에게서 학생에게로 지식이 일방통행하는 것이 아니라 선생과 학생이 같이 공부하고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것을 목표로 한다.

동양고전 강의에서는 <논어> 암송을 하고 있는데, 암송이라는 옛 방식을 따온 것도 이유가 있다. “지식이라는 게 단순이 머리로 들어가기만 해서는 안 되고 그것을 외움으로써 신체에 각인하고 삶에 녹아들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지식이 생체의 리듬을 타는 것 생체가 지식의 리듬을 타는 것이 진정한 지식 습득이라는 생각이다. 공부에 참가한 사람들은 매달 마지막 주에 한달 동안 공부한 것을 글로 쓴다. “글로 표현하지 않은 지식은 지식이 아니며,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면 아는 것이 아니다. 표현과 내용이 하나로 합쳐질 때 비로소 지식이 된다.”

이런 독특한 방식의 공부를 통해 이들이 실현하고 실천하려는 것이 말하자면 대중 지성이다. 신체에 녹아들고 글로든 말로든 표현되고 그리고 그것들이 네트워크로 연결돼 집합적 지성으로 힘을 발휘하는 것이 이 프로젝트의 목표인 셈이다. ‘대중 위에 군림하는 엘리트’라는 전통적 지식인의 정체성 대신에 ‘대중인 채로 지식인이고 지식인인 채로 대중인’ 새로운 대중 지식인의 정체성을 이들은 모색하고 있다. 대중 지성은 지식의 새로운 존재 형식이자 지식인의 새로운 삶의 양식이다.(고명섭 기자)

07. 01. 26.

 

P.S. 네그리의 비유를 빌면, 메뚜기떼 혹은 개미떼의 '지성'이 대중지성이겠다. 나의 관심은 대중이 지성을 체득할 때 그는 무엇으로 여전히 대중인가, 이다.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고전적인 정의에 따르면, "대중은 개념상 사회를 통치할 수 없음은 물론 자신의 실존도 조율할 수 없고 또 그렇게 해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대중의 반역>). 물론 '고전적인' 정의에 따를 때 그렇다는 얘기이다(고로, 우리에겐 '대중'에 대한 다른 정의가 필요하다). 개인이면서 대중인 개중처럼 '양서류'로 우리는 점점 진화해가고 있는 것인지. 한편, 출판에서도 이 '양서류'적 양태는 이미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블룩'을 다루고 있는 지난 가을의 한 기사를 옮겨놓는다.

동아일보(06. 09. 27) 'Blook’ 블로그를 뛰쳐나와 세상의 책이 된다

회사원 박성빈(27) 씨는 지난해 10월부터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블로그를 만든 뒤 취미로 배운 사진을 틈틈이 올리기 시작했다. 실연의 아픔을 달래려 떠났던 2001년 유럽여행 등을 기록한 그의 사진은 로맨틱한 분위기로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고, 포털사이트 초기화면에 6번이나 올랐다. 방문자가 하루 수천 명 단위로 늘어난 그의 블로그의 내용은 이번 주 ‘그리우면 떠나라'란 책으로 나왔다. 박 씨의 책을 펴낸 랜덤하우스코리아 도정원 씨는 “프로 작가 못지않은 콘텐츠를 생산해 내는 ‘천연 블로거'가 요즘 떠오르는 새로운 작가군”이라며 “주제가 뚜렷한 ‘천연 블로거'를 찾다가 박 씨를 발견했다”고 말했다.

1인 매체인 블로그(blog)를 책(book)으로 만든 ‘블룩(Blook)'이 쏟아지고 있다. 블룩은 거의 매주 1권 이상 서점에 나오고 실용서 시장의 베스트셀러 상위 순위에서도 비중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특히 요리책 분야는 블룩이 휩쓰는 추세다. 현재 요리책 분야 부동의 베스트셀러 1위인 ‘2000원으로 밥상 차리기'를 비롯해 ‘베비로즈의 요리 비책' ‘꼬마마녀의 별난 빵집' ‘야옹 양의 두근두근 연애요리' 등은 모두 블룩형 요리책. 블룩의 원조 격인 ‘2000원으로 밥상차리기'는 ‘독신남이 직접 해 본 쉬운 요리'를 표방하고 2003년 출간돼 지금까지 56만 부가량 팔렸다.

그간 블룩은 요리책, 인테리어 등 매뉴얼형 실용서가 대세였지만 최근엔 미술 경제 에세이 영어교육 쪽으로도 외연이 확대되고 있다.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으로 유명한 박경철 씨의 경제에세이 ‘시골의사의 부자경제학', 미술 에세이인 ‘그림 읽어주는 손가락' ‘꿈을 꾸다가 베아트리체를 만나다', 장사 체험담을 간추린 ‘머리핀 장사에 돈 있다', 괴담집 ‘잠들 수 없는 밤의 기묘한 이야기', 20대 여성의 고단한 삶을 기록한 ‘라오넬라 새벽 두시에 중독되다' 등이 그런 책들이다. 산여고 영어교사 하명옥 씨의 홈페이지를 토대로 태어난 책 ‘영어일기 표현사전'과 ‘영어일기 영작패턴'처럼 양질의 콘텐츠는 블룩 시리즈로 선보이고 있다.

블룩은 개인이 매체이자 브랜드가 되는 1인 전문가 시대의 한 상징이다. ‘일하면서 책쓰기'의 저자이자 자기계발 전문가인 전미옥 CMI연구소 대표는 “책의 생산과 소비도 블로그를 중심으로 이뤄지는 시대가 왔다”며 “직장인에게도 브랜드 가치를 높일 수 있는 공격적 글쓰기로서 블로그와 이를 통한 책쓰기를 권하고 있다”고 말했다.

누구에게나 기회가 열려 있고 프로를 능가하는 아마추어들이 활동하는 곳이 인터넷 공간이다. 따라서 블로그 글쓰기의 장점은 진입 장벽이 없다는 것이 꼽힌다. 또 출판사에는 독자의 반응이 확인된 콘텐츠를 확보하고 참신한 저자를 ‘싼값'에 확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블룩이 뜨자 미국에서는 한 출판사가 픽션, 논픽션, 코믹 분야에서 우수 블룩을 시상하는 ‘루루블루커 상'을 만들기도 했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은 “일본 출판계에서도 인터넷 콘텐츠를 책으로 만든 ‘넷셀러'란 말이 쓰인다”면서 “블룩은 대중적이지만 유동성 정보라는 한계 때문에 일관된 세계관과 깊이를 바탕으로 한 교양서를 배출하기는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김희경 기자)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ommer 2007-01-26 17:51   좋아요 0 | URL
네그리의 '귀환'에서처럼, 대중을 괴물로 볼 수 있다면, 그것의 실체는 오락 프로그램에서 티비의 하단에 시청자의 감정을 대변하듯 '순간 나타났다 사라지는 글귀'가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개중과 대중지성에 실제로 참여하고 있다는 것보다도 '누군가' 대신 그러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겠지요. 개중에는, 걔중에는, 말이야...누군가...

로쟈 2007-01-26 17:55   좋아요 0 | URL
suture님도 한 유머 하시는군요.^^
 

이번주 한겨레의 '한국의 글쟁이들'은 저널리스트 작가 고종석을 다루고 있다. 출판칼럼니스트 최성일씨가 글을 썼는데, 반가운 마음에 옮겨놓는다. 나름대로 많이 읽고 잘 안다고 생각한 이 '글쟁이'의 특이한 면모도 읽을 수 있다. 가령 남의 소설을 안 읽는 기벽 같은 거. '방주'에 넣어두려다가 아끼는 마음에 '곁다리텍스트'로 분류하고 그에 걸맞게 후미에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의 책 <감염된 언어>의 서문에서 일부를 옮겨놓도록 하겠다.

한겨레(07. 01. 26) 한국의 글쟁이들/(17) ‘저널리스트 작가’ 고종석

고종석(48)에게는 열성독자들이 만든 인터넷 카페가 있다. 2004년 문을 열어 270명이 회원으로 가입한 ‘고종석 팬 카페(cafe.daum.net/kjsfreedom)’는 인문서 저자로서 그의 위상을 짐작하게 한다. 인문서 저자의 팬 카페는 손으로 꼽을 수 있다. 16권에 이르는 그의 책의 평균 판매부수는 5천부 안팎, 신간을 무조건 구입하는 고정 독자는 3천 명 정도로 추산된다. 요즘 같아선 인문사회 분야 베스트셀러 목록 진입이 무난한 ‘엄청난’ 숫자다.

인문서 저자=지금까진 <코드 훔치기>(마음산책·2000)가 제일 많이 팔렸다. 고종석은 책을 곱게 만들어준 편집자와 이 책을 논술교재로 활용한 논술학원 강사에게 그 공을 돌린다(*나 또한 학원에서 학생들에게 논술을 가르치던 시절 가장 많이 복사해서 나눠준 자료이기도 하다. 하니 '그 공'은 내게도 있다). 하지만 그가 글을 쓰고 책을 엮는 것이 단지 ‘연줄’ 덕분이라는 말과 마찬가지로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겸손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의 글과 책에 대한 독자의 호응을 ‘시장성’의 잣대로만 판단하고 싶진 않다. 그에겐 그 이상의 무엇이 있다.

고종석은 출판계에서 “아주 정확한 한국어 문장을 구사하는 작가”로 통한다. 아름다움보다 정확함을 특징으로 한다고 볼 수도 있으나, 고도의 정확성은 아름다움을 낳는다. 한 학생 독자는 “고종석의 책을 읽으면 똑똑해지는 느낌, 시야가 넓어진다는 느낌”을 전한다. 고종석의 절친한 벗인 강금실 전법무장관은 그의 시집비평집 <모국어의 속살>(마음산책·2006)에 대해 “고종석의 평론은 매우 균형잡힌 시각에서 정확한 분석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논평한다. 고종석의 글은 어느 대학 논술시험의 지문으로 나오기도 했다.

기자=고종석은 기자다. <코리아타임스> 기자로 언론계에 들어와 초창기 <한겨레신문> 문화부 기자로 일했다. <한겨레> 재직시절, 기사문답지 않은 기사가 논란을 빚기도 하였으나, 기자의 문체가 살아있는 기사문의 이정표를 세운다. 1990년대 중반 프랑스 주재기자 때는 철학자 질 들뢰즈의 죽음을 색다르게 해석해 전달한다. “고갈된 일흔 살 삶을 스스로 끝장냄으로써, 그 자신이 곧잘 ‘철학적 일화’로써 거론하던 엠페도클레스의 전설적 자살이 있은 뒤 2천5백년 뒤에, 서양 철학사에 또 하나의 일화를 보탰다.” 그 후 ‘친정’인 한국일보사에 복귀하였고, <한국일보> 논설위원을 거쳐 지금은 객원 논설위원으로 있다.

“모르겠어요. 기자가 되겠다는 특별한 생각이 있어 된 것도 아니고, 우연히 모집공고 보고 시험 봐서 잡은 직장이거든요. 글쎄요.” 기자는 어떠해야 하는가, 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의 부족한 부분은 그의 장편소설 <기자들>(민음사·1993)에 나오는 ‘기자숙명론’으로 채운다. “기자는 기록하는 자이지만 그 기록은 자신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남에 대한 기록이다. 남의 삶을 엿보고 싶어 하는 호기심, 자기가 엿본 것을 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 하는 광고충동, 그런 것들이 기자의 운명이 아닐까.”

소설가 장편 <기자들> 말고도 고종석은 단편소설집 <제망매>(문학동네·1997)와 <엘리아의 제야>(문학과지성사·2003)를 펴낸 바 있다. 소설은 왜 쓰게 됐나요? “기사가 사람 이야기를 그리긴 하지만 기사문의 언어는 그물코가 성긴 거죠. 빠져 나가는 부분이 굉장히 많아요. 사실일 수는 있어도 진실이 아닌 부분이 많이 있어요. 기사에서 새나가는 부분, 사회가 옳다 그르다 결정해주는 그런 선악·미추에 잡히지 않는 어떤 개인적인 선악과 미추, 개인적인 가치와 진실들은 기사가 잡아낼 수 없어요. 소설의 언어는 좀 달라요. 기사의 언어보다는 소설의 언어가 촘촘하지 않겠나, 덜 빠져나가지 않겠나 싶어 시작했어요.” ‘내 소설의 근간은 현실’이라는 고종석의 지론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기벽이라고 하긴 어려워도 고종석은 남의 소설을 잘 안 읽는다. 어느 출판사 사장의 목격담이다. 어떤 소설가의 출판기념 모임에서 소설가가 자신이 펴낸 책을 고종석에게 주자, 그는 이를 정중하게 사양하더란다. “고맙지만 나는 소설을 안 읽는다. 귀한 책 아끼기 위해서라도 다른 분께 주는 게 좋겠다”고 하면서 말이다. 장편소설보다는 단편소설집 두 권에 수록된 작품들이 더 낫다는 나의 독후감을 밝혔다. “소설이라는 장르에 계속 몸담을 생각이면 장편을 써야겠죠.”

언어학자=이글을 쓰기 위한 인터뷰를 하면서 해묵은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었다. 고종석이 말한 “영어공용화의 반대가 지닌 계급적 함의”를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그것은 계층간 영어능력의 격차를 줄이고, 언어가 의사소통의 도구라는 점에 주목한 것이었다. 한동안 나를 헛갈리게 한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라는 글의 한 구절이다. 이글은 <감염된 언어>(개마고원·1999)에서 볼 수 있다.

“영어가 공용어가 되든 안 되든, 우리 사회의 지배계층은 자기 자식들에게 영어를 열심히 가르칠 것이다. 그리고 영어에 익숙해진 그들의 자식들은 영어에 익숙하지 못해 지식과 정보에서 소외된 일반대중의 자식들 위에 다시 군림할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민주주의는 특정집단에 의한 그런 식의 지식의 독점을 당연시하지 않는다.”

정확한 한국어 사용자 아무튼 영어공용화의 긍정적 측면을 헤아리는 사람이 누구보다 분명하고 정확한 한국어 사용자라는 사실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명료한 개념 정의와 개념의 결을 세심하게 구분한 사례는 근간 <신성동맹과 함께 살기>(개마고원·2006)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고종석은 반미 친북 좌파가 고스란히 겹치는 것인지, 그 하나하나가 비난받을 일인지, 무엇보다 이런 딱지가 붙여진 이들이 정말로 반미 친북 좌파인지 되묻는다. “좌파는 친북보다도 훨씬 더 여러 겹의 뜻을 지니고 있지만, 그 핵심은 흔히 ‘복지’라는 말로 표현되는 사회연대를 조직하는 데 정부가 일정한 구실을 해야 한다고 믿는 세계관과 관련돼 있다.”

몇 해 전, 그가 엿본 출판사 편집자의 우직한 원칙주의가 빚어낸 엽기적 풍경에 그저 웃을 수만은 없다. 그가 읽던 고려시대 번역문집 문장 한가운데서 ‘미얀마제비’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사마귀란 뜻의 당랑(螳螂)을 옮긴 ‘버마재비’를, ‘버마제비’의 오자로 예단한 교열자는 버마의 바뀐 나라이름에 맞춰 ‘미얀마제비’로 바로잡았던 것. 편집자가 ‘버마재비’의 어원이 ‘범(호랑이)의 아재비(아저씨)’라는 걸 알았더라도 수난을 겪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는 그의 판단에도 공감하지만, 이글의 결론은 더 공감한다. “무릇 글쟁이는, 제 글이 고스란히 활자화될 땐, 그 글이 별 볼일 없다고 생각하는 게 좋다.”

번역자=고종석이 우리말로 옮긴 책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마지막 작품 <이게 다예요>(문학동네·1996)가 전부다(*내가 읽은 고종석의 책들 가운데 유일하게 돈 아까운 책이었다). “번역은 정말 어려운 작업이에요. 문장 하나를 우리말로 만족스럽게 옮기기가 굉장히 힘들어요. 번역이야말로 제대로 한다면 뼈를 깎는 작업일 것 같습니다. 영어나 스페인말이나 프랑스말이나 어설프게 읽을 줄은 아니까 주변에서 ‘너, 왜 번역 안 하느냐?’ 하는데, 저는 책 한 권 번역하려면 평생 해야 할 것 같아요. 또 번역은 일종의 평론인데 그렇게 하긴 정말 어렵죠.”

정치평론인=고종석은 정치현상을 보는 눈이 밝다. 시평집 <신성동맹과 함께 살기> 머리말의 한마디는 그런 눈이 흐려지지 않았나, 하는 걱정이 들게 한다. 그마저 “은근히 기대를 걸었”다니. 2003년 1월 중순 발행된 <인물과사상 25>(개마고원)에 실린 글을 통해 내가 서둘러 은근한 기대조차 접는데 일조한 그가 아니던가. “우선 그의 지지자들부터, 대통령이 된 것 이상의 업적을 그가 자신의 임기 중에 세우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순순히 인정해야 한다. 위에서 언급했듯 그의 집권이 우리 사회의 멘탈리티에 줄 긍정적 충격을 생각하면, 그 집권 자체만으로도 눈부신 업적, 그의 지지자들이 그와 더불어 자랑스러워할 만한 업적이다.” 다시 돌아온 정치의 계절에 정치를 바라보는 그의 혜안과 안목을 접할 수 있을까? “정치에 대한 관심이 많이 줄긴 줄었죠.”

대표작 네 권을 꼽는다면= “<기자들>은 첫 책이라서, <제망매>는 내가 소설가가 됐구나, <자유의 무늬>(개마고원, 2002)는 내가 저널리스트구나, <감염된 언어>는 내가 약간은 언어학도구나 하는 느낌이 들게 했지요. 이 세 개가 제 정체성인데, 셋 다 얼치기이긴 하지만 이 책들에 기자로서, 소설가로서, 언어학도로서 정체성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럼, 이 셋을 합치면 뭐가 될까요? 문화전달자가 어떨까요? “모르겠어요, 제가 뭔지는.”(최성일/ 출판칼럼니스트)

07. 01. 26. 

 

 

 

 

P.S. 그의 첫소설 <기자들>은 절판이라서 알라딘에는 아예 뜨지도 않는다(나는 책을 갖고 있지만 그의 책들 가운데 드물게도 읽지 않았다). 대신에 가장 많이 팔렸다는 <코드 훔치기>(마음산책, 2000)를 '네 권' 안에 채워넣도록 한다. 나머지는 나도 모두 읽은 책들이다. 그 중 <감염된 언어>(개마고원, 1999)에서 그가 (서문을 대신하여) 길게 쓴  서문 '서툰 사랑의 고백' 중 한 대목. 

사전 편찬자의 꿈을 접은 뒤, 나는 한때 외국어로 글을 쓰는 직업적인 글쟁이가 돼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도 몽상으로 그치고 말았다. 간단한 편지글 말고 내가 앞으로 외국어로 글을 쓸 것 같지는 않다. 또 내가 외국어로 기다란 글을 쓴다고 해도 이미륵이나 김은국만큼 쓸 수는 없을 것이다. 자신의 지적 작업을 프랑스어로 수행한 뤼시앵 골드만이나 줄리아 크리스테바 같은 사람은 성인이 되어서야 프랑스 땅을 밟았지만, 그 사람들은 동유럽의 조국에서 보낸 어린시절부터 프랑스어에 익숙했던 사람들이다. 반면에 내 유년기를 둘러싹 있던 언어는 오직 한국어뿐이었다. 나는 그것을 행운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아무튼 그건 내 운명이다.(...)

이런 모든 꿈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가버린 지금, 나는 정확하고 아름다운 한국어로 글을 쓰고 싶다는 꿈을 간직하고 있다. 정확성과 아름다움으로 한국어의 가능성을 넓혔다고 평가받을 만한 글 말이다. 아직은 그것이 몽상에 불과하지만, 나는 앞으로도 한국어로 글을 쓸 작정이므로, 이 꿈은 언젠가는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읽을 만한 한국어로 글을 써보겠다는 것은 10대 이래 내가 지녔던 몽상들 가운데 실현 가능성이 남아 있는 유일한 목표다.

실상, 정확하고 아름다운 한국어로 글을 쓰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얼른 떠오르는 이름만 해도 최인훈, 조세희, 김원우, 복거일, 이인성, 최윤 등 여럿이다. 그들이 대체로 번역 문투를 사용한다는 비판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것은 전혀 문제가 아니다. 20세기 말에 그들이 사용하고 있는 한국어를 19세기 말의 한국어와 견주어보면, 지난 한 세기 동안 한국어가 얼마나 변했는지 실감할 수 있다. 그 변화의 과정은 곧 감염의 과정이었다. 외국어와 외국 문화의 감염 말이다.

문화사는 곧 감염의 역사고, 그 문화를 실어나르는 언어의 역사도 감염의 역사다. 인공 언어가 아닌 한 감염되지 않은 언어는 없다. 최인훈에서 최윤에 이르기까지 외국어에 된통 감염된 한국문학은 세련과 풍요를 향한 한국어의 행진을 선도하고 있다. 내가 언젠가 그들만큼 볼품있게 한국어로 글을 쓸 수 있을까? 나는 애써볼 작정이다.(18-19쪽)


댓글(7)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7-01-26 04: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기인 2007-01-26 08:15   좋아요 0 | URL
퍼갑니다. 고종석 씨의 정치적 입장이나 세계관에 동의하지 않지만, 그의 소설론은 흥미롭네요.

마늘빵 2007-01-26 08:17   좋아요 0 | URL
아 이거 가져갑니다. 저도 그 카페 회원입니다. ^^ 안간지 오래됐지만.

로쟈 2007-01-26 08:43   좋아요 0 | URL
**님/ 축하드립니다. 저까지 만족(?)스럽네요.^^ 알려주신 '보물창고'는 종종 들러보겠습니다.^^
기인님/ 짐작에 고종석보다는 더 왼쪽이시죠?^^
아프님/ 님이 안 가신다면, 누가?..

나비80 2007-01-26 09:46   좋아요 0 | URL
'정확하고 아름다운 한국어'란 기준은 늘 모호하고 아슬아슬할 수 밖에 없는데, 고종석은 자신만의 판단 기준이 서 있는 모양입니다. 슬쩍 보면 언어의 역사성을 고려하는 입장이란 건 알겠지만 말이죠. 저는 몇 권 안되지만 제 주변에만해도 고종석의 3000명 안에 드는 녀석이 있답니다. ^^
그리고 저는 기인님과 고종석 가운데 끼겠어요!

도서관여행자 2007-01-26 10:45   좋아요 0 | URL
저도 퍼갈게요^^

로쟈 2007-01-26 15:18   좋아요 0 | URL
소이부답님/ 제가 보기에 고종석은 그가 거명하고 있는 어느 저자들 못지 않게 '정확하고 아름다운 한국어'를 구사합니다. 더불어, 저는 고종석의 '자유주의'를 지지합니다. 더 '정확하고 아름다운 한국어'의 포지션이 등장할 때까지는...
NOname님/ 이름을 안 갖고 계시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