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젝의 <까다로운 주체>(도서출판b, 2005)에서 '바디우, 발리바르, 랑시에르'란 절을 읽다가(이에 대한 정리는 시간이 나면 해둘 생각이다) 문득 호기심에 '자크 랑시에르'를 검색해보았다. 일부 번역문을 포함한 관련자료들이 몇 가지 된다. 그 중 하나를 옮겨놓는다(씨네21에 실렸다는 랑시에르의 인터뷰는 찾지 못했다. 어찌된 일인지 편집장의 말만 뜬다). 랑시에르의 철학 전반을 소개하는 것으로 2005년 봄 연세대학원신문에 실렸던 듯한데, 필자는 최원씨이다. 아래는 필자가 다시 교정을 본 것이라고 한다(작성일자는 05. 03. 28로 돼 있다). 어젠가 '자크 랑시에르 워밍업'을 했지만 워밍업의 마무리로 적합해 보이는 글이다.

'불화'의 철학자 랑시에르 

아마도 한국에서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의 이름이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알튀세르가 한창 국내에 소개되고 있던 19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 무렵이 아니었나 싶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그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크게 이상할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로부터 15년 가량의 긴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그는 국내에 변변한 책 한 권 번역된 적 없는 낯선 철학자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의 깊은 독자라면, 그가 알튀세르의 주도로 파리 고등사범학교에서 1960년대 초반에 진행되었던 <'자본'을 읽자> 세미나에 멤버로 참여한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간 국내에서 진행된 알튀세르에 관한 논의에서 그의 이름이 거의 자취를 감춰버린 이유는 68년 학생운동에 대한 대응 문제를 둘러싸고 그가 알튀세르와 갈등하다 결국 독자적인 길을 선택했었기 때문이다(74년에 자신의 에세이를 모아 낸 <알튀세르의 교훈>이라는 책자에서 그는 알튀세르의 철학을 대중투쟁을 마비시키는 "질서의 철학"이라고 혹평하고,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그 자체로 엘리트주의적인 이론에 불과하다고 힐난한다―이러한 평가가 과연 얼마나 정당한지는 이 자리에서 논하지 않겠다).

하지만 그가 단지 알튀세르주의에 대해서만 거리를 두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동시에 '차이의 철학'이라 불리는 일군의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사상들(료타르, 들뢰즈, 데리다 등)에 대해서도 소원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의 관점에서 이러한 사상들은 '변혁'보다는 '해석'의 문제에 집착함으로써 마르크스가 포이에르바하에 대해 쓴 테제 가운데 11번째 테제("이제까지 철학자들은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해왔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을 변혁하는 것이다!")를 다시 취소하는 것에 불과했다.

따라서 많은 프랑스 철학자들이 이제껏 국내에 활발하게 소개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랑시에르의 작업만이 소개되지 않고 있었던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즉, 그는 어떤 학파에도 소속되지 않은 철학자라는 것이 그것이다. 사실 이러한 그의 '비소속성'은 단지 철학 내 이러저러한 학파나 입장들에 관련해서만 드러나는 그의 특징도 아니다. 예컨대 그는 지속적으로 정치와 철학에 관해서 말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철학자'는 아니다. 반대로 그는 정치철학 내의 어떤 경향이 되길 단호하게 거부하고, 정치철학이라는 학문분과 전체를 자신의 비판대상으로 삼는다.

공인된 학문분과 체계 내에서 좀처럼 포착되지 않는 랑시에르의 이러한 이론적 위치, 이것이야말로 공인된 정치 공간 그 자체에 대해 그가 취하고 있는 외부자적인 태도와 상당히 조응하는 것이다. 그는 이를테면 '공적 공간'(혹은 '공론장')의 경계선에 서서 그 공간 바깥에 여전히 우리가 잊고 있는 어떤 '외부'가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구성원들의 '합의'에 기초해 있기에, 그 안에서 주체들이 서로를 알아보게 되고, 서로 말을 교환할 수 있게 되는 '호혜성'의 감각적 공간이야말로 고유한 정치의 공간이라고 생각하는 그 모든 '정치철학'적인 사고(이는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 철학으로부터 시작해서 근대의 다양한 사회계약론, 현대의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이론에 이르기까지 정치철학이 공유하는 보편적인 전제다)에 대해 랑시에르는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말할 권리'를 비롯한 다양한 권리들의 분배가 다소간 평등한 방식으로 행해지는 이러한 '공적 공간'을 성립시키기 위해 사회는 언제나 내부의 어떤 특정 부분이나 구성원들을 "몫이 없는 부분(une part des sans part)"으로 미리 배제하고 출발한다고 주장한다. 보이지 않는 존재, 들리지 않는 목소리의 구축이야말로 '호혜성'을 가장하는 공적 공간 내의 모든 '공정함'과 '정의'의 조건인 것이다.

정치철학에 대한 랑시에르의 이 같은 급진적인 비판은 특히 <불화>(1995)라는 그의 대표적인 저서에서 발전된다(*짐작에 'Disagreement'가 그 영역본인 듯싶다. 언젠가 복사해놓은 책인데 바로 못 찾겠다). 그는 고대 그리스어인 폴리테이아(politeia)의 번역어가 '정치(politique)'일 뿐 아니라 '경찰(police)'이기도 하다는 점에 착안하여,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정치'라고 인식하는 '분배'("집단들의 결집이나 합의가 달성되는 절차들, 권력의 조직화, 장소와 역할의 분배, 그리고 이 분배를 법적으로 정당화하는 체계")가 사실은 정치가 아닌 경찰의 일임을 폭로한다. 단, 그는 푸코를 참조하여 경찰활동의 의미를 폭력행사에 의한 질서유지 활동에 국한시키지 않고, 구성원들 각자에게 정당한 '몫'을 찾아주기 위해 사회가 행하는 그 모든 활동으로 확장시킨다.

랑시에르에 따르면, 분배란 언제나 사회의 한 '부분'으로 이미 인정받은 사람들(서로 '호혜성'이 형성된 사람들)이 다소간 평등한 방식으로 공동체로부터 자신의 몫을 찾아가는 일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들 간에 때때로 분배방식 등을 둘러싼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분배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자가 누구인가(즉 누가 그 사회의 '부분'인가)를 둘러싼 논란은 원칙적으로 있을 수 없다. 만일 공동체에 어떤 기여도 한 바가 없으면서 자기 몫을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면, 이들이야말로 '도둑심보'를 가진 자들로 분배에서 철저히 배제되어야 한다. 결국 경찰활동의 목표는 이러한 배제의 실현이며, 정치철학은 이를 정당화하고 이론화한다.

이제 랑시에르는 고유한 의미에서의 정치를 이러한 경찰 논리에 대립시켜 새롭게 규정한다. 정치란 바로 공동체에 별반 기여한 것이 없기 때문에 자기 몫을 주장할 수 없는 자들이 뻔뻔스럽게도 '평등주의' 논리에 입각하여 자기 몫을 주장할 때 발생한다. 따라서 정치는 본래 자기 근거나 기원(arkhê)이 없는, "추문"에 불과한 것이다.

<니코마쿠스 윤리학> 제 5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의 문제에 관해 논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들은 공동체에 보다 많은 기여를 한 사람들이 더 많은 분배를 받을 권리가 있다는 점에 대해 동의하지만, 그 기여도를 측정하는 기준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합의를 보지 못하기에 서로 다투게 된다(즉 '불화'하게 된다). 귀족(aristoï)은 덕(aretê)(이는 '뛰어남(excellence)'이라는 의미 뿐 아니라 귀한 가문의 출신이라는 뜻을 동시에 갖는다)이 그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부자(oligoï)는 재산(공동체 경제에 대한 기부금)이 그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전자는 귀족제(aristocracie)를 실시하자고 주장하고, 후자는 과두제(oligarchie)를 실시하자고 주장하게 된다. 하지만 결국 귀족은 보통 부유한 계급과 마찬가지로 부를 소유하고 있으므로, 양자 사이에는 진정한 쟁점이 생기지 않는다.

문제는 아테네의 데모스(demos, 자유인 신분의 고대 도시국가 빈민들)가 주장하는 기준 때문에 발생한다. 데모스는 당시의 귀족들이나 부자들과 달리 공동체에 별다른 기여를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자유'―발언의 자유―라는 '빈 껍데기 재산'만을 가져와 공동체를 '논쟁'과 '분열'로 몰아 넣었음에도 불구하고, 공동체 전체를 다수자인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며, 민주제의 실시를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데모스의 주장과 실천이야말로 랑시에르에게는 정치적 실천의 원형을 구성하는 것이다.

결국 그에게 있어 정치란 한 사회의 '부분'으로 인정받지 못한 '몫이 없는 자들'이 자신의 존재를 그 사회에 폭로하고 인정받아 공동체를 완전히 새로운 원리에 입각하여 재구성하도록 강제하는 '범법' 활동이며, 따라서 이는 몫이 있는 자들 사이에서나 행해질 수 있는 '대화(dialogue)'가 아니라, 자신을 대화상대로 전혀 인정치 않는 사회에 대해 자신의 존재를 '3인칭'으로 폭로하는 '독백(monologue)'의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랑시에르의 정치 개념은 후기 하이데거의 진리(aletheia, 베일을 걷어냄) 개념 및 그와 긴밀하게 연결된 포이에시스(poiesis, 이는 '제작'이라는 뜻을 갖지만 하이데거에게서는 특히 사물을 이름짓고 그것을 현전 안으로 불러내는 언어의 '시적(poétique)'인 기능으로 인식된다) 개념과 유사하게 미학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그것은 공적 공간 안에서 감각되지 못하고 있는 자들을 이름지어 불러내고 공공연하게 전시함으로써, 기존의 감각공간을 다시 분할하는 실천이다. 이 때문에, 랑시에르에게 있어 정치란 '사건' 이외의 것이 될 수 없다. 하나의 정치적 사건을 통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던 것을 보이고 들리게 하자마자 그것은 공인된 감각공간의 일부가 되어버리고 만다. 마치 기이한 피카소의 그림이 이제는 커피 잔의 무늬로 사람들에 의해 편안하게 소비될 수 있듯이, 또 그렇게 소비되는 그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예술작품이 될 수 없듯이.

그렇다면 공인된 감각공간 내에 본래적으로 흡수될 수 없는 것은 없다는 말일까? 랑시에르에 따르면 그런 것은 없다. 오히려 정치의 이러한 사건적 성격을 잊게될 때 '전체주의'와 같은 최악의 결과가 생겨날 수 있다. 랑시에르는 데모스(demos)와 오클로스(ochlos)를 구별하고 후자를 정치의 주체로 사고하려는 일체의 시도들을 비판하는데, 전자가 비규정적인 다수자(하나의 비어있는 장소)를 의미한다면 후자는 자신의 통일(unification)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다수군중을 의미한다. 언제나 통일이란 '합의'를 전제로 한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정치란 언제나 '불화'에 기초해야만 한다는 랑시에르의 테제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최원l Loyola University Chicago, 철학 박사과정)  

07. 02. 22.

On the Shores of Politics (Radical Thinkers) CoverHatred of Democracy Cover

P.S. 그런 관점에서 더 읽어볼 만한 책은 <정치의 해안에서(On the Shores of Politics)>나 <민주주의에 대한 혐오(Hatred of Democracy)> 같다(정치의 계절에 소개될 만하지 않을까?). 거듭 말하지만, 그의 미덕은 너무도 얇은 책들을 쓴다는 것(지젝도 바디우도 주저들은 두껍다). 이런 점에서도 그의 '비소속성'이 드러나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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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mmer 2007-02-23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튀세르-이후(Post-althusser)'의 정치철학적 경향(발리바르, 랑시에르, 바디우, 아감벤, 라클라우, 네그리 등)은 '군중'을 새로운 정치적 주체로 정립하려는 시도에서 맥을 같이 하고 있는 듯 합니다. 스피노자의 언급처럼 체제에 위협을 가하는 동시에 스스로를 위협하는, 양가적인 '다수'의 위상을 어디에 둘 것인가의 문제 말이지요. 더 흥미로운 건 이런 경향을 일별하는 지젝은 '절대적'으로 그들 모두를 참조하면서 비판의 외양을 취하기도 한다는 점입니다. 지젝은 칸트의 뒤를 이어 일련의 '비판서'들을 이미 써 온 건지도 모르겠네요...^^

로쟈 2007-02-24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젝만한 '강사'가 따로 없지요. 다 읽어서 정리해주고 비판해주고 아울러 계발적인 생각들도 툭툭 던져주고.^^